앙리 파브르만큼 친숙한 곤충학자의 이름은 없지만, 그가 쓴 <파브르 곤충기>를 다 읽은 독자는 거의 없다. 그건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이 모두 축약본이거나 각색본이기 때문인데, 이번에 드디어 제대로 된 완역본이 나왔다. 분량은 생각보다 방대하다. 10권짜리니까. 이 정도면 어린이용이라고만도 볼 수 없겠는데, '내집마련'을 하게 되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싶다. 완역이라는 거대한 작업을 해낸 역자 김진일 교수와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06) "왜 벌레냐고? 곤충 무게는 인류의 1만배” 

인터넷서점에서 <파브르 곤충기>를 검색하면, 200여권의 책이 좌르르 쏟아진다. 대부분 어린이물이거나 만화각색본, 또는 발췌축약본이다. 이도 아니면 일본어 축약본을 재번역한 것들이다. 이런 차에, 평생 곤충 연구에 매달려온 곤충학자 김진일(68·성신여대 명예교수)씨가 <파브르 곤충기> 열 권을 완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10년쯤 전에 한 완역본이 있었으되, 오래전 절판된데다 비전공자의 번역이어서인지 내용 오류가 적잖았으니, 김진일판 <파브르 곤충기>는 명실공히 완역 정본이라 하겠다. 



<파브르 곤충기>를 쓴 장 앙리 파브르(1823~1915)는 아흔세 살까지 살았다. 박물학자이자 시인 겸 철학자였던 그가 생의 말년에, 그러니까 56살부터 86살까지 30년에 걸쳐 곤충(벌레) 관찰과 실험을 동시진행 해가며 집필한 책이 <파브르 곤충기>다.

파브르는 프랑스 남쪽 지중해안의 몽펠리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옮긴이 김진일씨 역시 그 대학에서 지중해안 모래풍뎅이 연구로 197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파브르가 관찰하고 연구한 곳을 발품을 팔아 돌아다녔던” 그이기에 이번 완역본 출간은 30여년 묵은 소망을 비로소 이룬 셈이다.

3일 서울 사직동의 집필실을 찾았을 때 그는 오래도록 끌었던 일을 털어낸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파브르 곤충기>를 이미 교수 정년퇴임 한 해 전인 2006년 중반에 3년에 걸쳐 다 마친 상태였다고 말했다. 곤충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바삐 달려온 그는 만약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번역할까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고 했다.

“앞으로 저 원전을 번역할 사람 안 나와요. 왜냐, 연구 환경이 달라요. 저만 해도 초창기 사람이니 넓게 공부했거든요. 풍뎅이도, 나비도 이야기도. 그런데 요즘은 풍뎅이라도 모래풍뎅이 하나만 파요. 다른 풍뎅이는 몰라요. 사실 교수 말년이면 잡무도 없었고요.”

우리나라 곤충학의 권위자인 그는 국내 곤충학의 사정을 묻자 곤충 연구에 대한 세간의 무심함을 오래 감내해온 노학자답게 “도무지 한국 사람들은 ‘벌레’가 지구 생물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안 한다”며 외려 질문을 던졌다.

“이거 대답해봐요. 전세계 개미를 다 모아놓으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데, 그는 금세 답을 일러줬다. “어디까지나 추산이지만 개미 체중을 합치면 인간의 100배가 돼요. 개미는 전체 곤충의 100분의 1밖에 안돼요. 그러니 곤충 무게가 사람 종족의 1만배라는 얘기예요. 곤충들 기존 종명만 해도 150만개가 넘어요.”

<파브르 곤충기>에는 파브르가 곤충 관찰에 빠져 있다가 동네 아낙들에게 정신이 모자란 이 취급을 받는 일화가 나오는데, 그는 그게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 벌레를 잡으러 다닐 때 ‘하필이면 왜 벌레냐’는 눈길들이었어요. 흰불나방이 창궐하던 여름, 불광동 근처를 가다 번데기를 뒤지니까, 누군가 무슨 약에 쓰냐고 묻더라고. 연구라고 했더니 저 혼자만 쓰려 안 가르쳐준다고 화를 내더라고요.”

그는 파브르의 큰 업적으로 동물행동학의 선구적 역할을 꼽았다. “동물행동학이 생물학 정식 분과가 된 게 불과 30년인데, 파브르는 이미 100년 전에 이 책을 썼어요. 행동 관찰을 통해 종마다 다 특성이 있음을 드러냈죠.”

옮긴이 역시 국내 최초로 동물행동학을 개설했다. <파브르 곤충기> 열 권에는 권마다 초입에 옮긴이의 ‘맛보기’ 글이 실렸는데, 풍뎅이 등 국내 곤충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분류학자이기도 한 옮긴이가 분류학에 무지했던 파브르를 시종 비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파브르는 분류학자들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기존 학명을 무시하고 종종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 썼다. 옮긴이는 “파브르가 학명을 써주었다면 혼란이 덜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사실 김진일판 번역본의 특징은 파브르가 오기한 숱한 학명을 바로잡고 그가 잘못 이해했던 생물학적 사실들도 알려준다는 데 있다. “파브르는 진화론을 부정했어요. 곤충들은 ‘본능’ 행동밖에 없다는 거야.”

그가 파브르에게 가장 감탄했던 것은 ‘관찰방법’이다. “아, 이 사람이 이런 걸 쉽게 풀어가는구나. 땅속 개미가 굴을 뚫어놨지, 어떻게 그 굴 속으로 들어갈까? 지푸라기를 집어넣고 파기 시작한 거라. 아주 쉽지, 그러나 그 방법을 생각해 실천한 건 누구냐 말이지. 그게 뛰어난 거죠. 장수금풍뎅이는 갈대를 꽂아놓고 따라 들어갔지. 그걸 꽂지 않으면, 굴이 어딨는지 모르잖아요. 그걸 팍 생각해 냈다는 거.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겁니다. 이 책 안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정말로 많단 얘기예요.”

첫 권을 낸 지 5년여 만에 완간된 김진일판 <파브르 곤충기>에는 갈피마다 파브르의 문학적 표현들이 살아 숨쉰다. 이를테면 10권에선 유럽장수금풍뎅이의 굴 파기를 관찰하며 크레타 미궁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빠져나온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신화 속 이야기와 그 벌레가 살아남는 방식이 얼추 닮은꼴임을 보여주는 식이다.

“파브르가 연구 결과를 놓고 책을 냈다면 쉬웠어요. 실은 실험·관찰을 진행하며 책을 썼거든. 그런데도 도입, 본론, 결론으로 순서가 정연하거든. 곤충들 제멋대로 행동하는데, 나는 이건 천재 아니곤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허미경기자) 

10. 03. 07.   

 

P.S. 올해 나올 과학서로 기대를 갖고 있는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의 과학에세이집 등이다. <종의 기원>과 <사회생물학>은 새 번역본. 굴드의 에세이집은 세 권 가량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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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0-03-07 19:34   좋아요 0 | URL
저도 언젠가는 10권 다 마련해서 꽂아 두고 싶네요(한권 한권이 가볍게 볼 가격은 아니지만...;). 어렸을때 축약본을 재미있게 보고는 했었는데요. 그래도 실제 벌레들은 싫더군요. 무서워요-.-

로쟈 2010-03-08 20:18   좋아요 0 | URL
보통은 발이 많고 기어다니는 동물에 대해선 혐오감을 갖기 마련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3-07 20:47   좋아요 0 | URL
시튼의 동물기와 파브르의 곤충기를 모두 외워버리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는데...좋아하는 곤충이 있나요?

로쟈 2010-03-08 20:16   좋아요 0 | URL
실제로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요.^^; 교과서에 나온 말똥구리 정도라면 모를까.

노이에자이트 2010-03-09 16:20   좋아요 0 | URL
저는 웬만한 곤충은 다 좋아해요.제일 귀여운 것은 배추벌레.여치도 좋아해요.날개를 떨면서 우는 모습은 정말 신비합니다.

비로그인 2010-03-08 14:32   좋아요 0 | URL
막내아들이 7살이고 이제 초등 1학년인데, 이녀석 꿈이 곤충학자예요. 이걸 사둬야 되는건지, 나중에 때가 되면 사는게 맞는건지...ㅠㅠ. 스물스물 지름신이 자꾸 고개를~~ㅋㅋ.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곤충학자가 꿈이라면 바로 사주셔야겠는데요.^^

루체오페르 2010-03-08 16:15   좋아요 0 | URL
와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책이네요. 언젠가는...리스트에 올려놔야겠습니다.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네, 소장해둘 만한 책입니다...

두리아재 2010-05-22 22:22   좋아요 0 | URL
10년전 이미 출간된 바 있는 1999년 완역본(탐구당)을 개작한 것인지? 진짜 김씨 스스로 번역한 것인지..? 곤충기 번역은 단순히 곤충전공자의 곤충 용어 지식 보다는 프랑스 어문학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불문학자들이 10년 넘어서야 완성한 원고지 2만장의 분량의 대작을 김씨는 3년만에 번역했다고 자랑을 하는데... 글쎄요? 무언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10-05-22 22:36   좋아요 0 | URL
10년전 완역본이 탐구당본이군요. 찾아보니 소장하고 있는 대학도 6곳밖에 안됩니다.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검증'은 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두리아재 2010-05-22 23:57   좋아요 0 | URL
10년전 곤충이야기 10권 전체를 통독하고나서 느낀 점은 파브르는 곤충연구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이었읍니다.특히 그의 백과전서적인 박식함과 어휘 구사력은 그야말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지요. 프랑스어의 세밀한 뉘앙스를 우리 말로 옮기는일은 불문학을 전공한 역자들이라 해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의 윤리적 기준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신중한 처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이미 기존 번역물이 존재하고 있을때는 말이지요.위의 기사를 보면 김진일씨도 곤충 전공자로서 과거의 탐구당본을 이미 숙독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인데 그렇다면 그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군요.자신의 것이 정본이라는 홍보성의 오만함보다는 보다 겸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에 있어서 열화당과 예경출판사의 사례에서 보듯이 말이지요
 

네덜란드의 저명한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연암서가, 2010))가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에도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판이긴 하지만, 원래 영역자가 호이징하 자신의 영역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편차는 크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려니 사실 까치에서 나온 <호모 루덴스>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내가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도 이 까치판이다. 최초의 번역본은 언론인 권영빈의 <호모 루덴스>(홍성사, 1981)이지만(<놀이하는 인간>(기린원, 1989)으로 다시 나온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새 번역본은 저자명 Johan Huizinga를 네덜란드 발음을 따르려는 의도에서인지 '요한 하위징아'라고 표기했는데, 실제 발음은 [joːhɑn hœyzɪŋxaː]라고 하므로 딱히 부합하지도 않는다. 공연한 부스럼이라고 해야겠다(참고로 러시아어로는 '효이진가'라고 부른다). 애초에 '호이징가'라고 소개됐다가 '호이징하'로 교정됐는데, '하위징아'는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원칙 불명의 표기다. '하위징하'는 가능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호이징하'라는 관행을 존중하는 게 나을 듯하다(모음 표기까지 물고 늘어지자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마스크바'라고 불러야 한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06) 노동 예찬 사회…목졸리는 ‘놀이 정신’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사진·1872~194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모 루덴스>(1938)가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한 저작이자 하위징아의 말년을 장식한 걸작이다.  



하위징아의 출세작은 1919년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이다. 그에게 중세사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것이 이 저작이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20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두 독창적 저작은 한 사람이 썼다고는 언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다르다. 하나는 중세 말기 유럽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문화와 놀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통사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두 책 사이에는 자연스런 물의 흐름 같은 연속성이 있다. 하위징아 자신은 <호모 루덴스> 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중세의 가을>에서 … 문화와 놀이는 친밀한 관계라는 사상의 씨앗을 처음으로 마음에 뿌렸다.” 

14~15세기 유럽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중세의 가을>은 그 시절 중세인들이 겪었던 ‘삶의 쓰라림’에 대한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묘사에 이어 그 중세인들이 마음에 품었던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한 열망’을 추적한다. 그 열망의 길 가운데 하나가 ‘꿈의 길’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서나 살자.”(<중세의 가을>) 그 길에서 하위징아가 만나는 것이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인데, 바로 이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놀이 정신’의 중세적 표출이다.

하위징아는 1872년 네덜란드 북부 도시 흐로닝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아랍어를 공부했고, 흐로닝언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어학을 사실상 전공으로 삼았다. 특히 박사과정에서는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공부했고, 산스크리트 문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7년 그는 하를럼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여기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처음 유럽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1905년에 흐로닝언대학, 10년 뒤에는 레이던대학 역사학 교수가 됐다. 수많은 고대어를 공부한 것이 역사학자 하위징아에게는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었는데, <호모 루덴스>에도 그리스·로마·산스크리트 문헌과 단어가 수시로 등장해 논거를 제공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도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머리말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사피엔스’도, ‘(물건을) 제작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파베르’도 인간을 제대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이어 하위징아는 말한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 확신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인 셈인데, 그 계획을 수미일관하게 밀고 나간 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놀이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하위징아는 ‘경쟁’을 제시하는데, 그 경쟁의 성격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의 생활 전체가 그들에게는 놀이, 곧 경쟁으로서의 놀이였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이 경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가 ‘아곤’(agon)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경쟁의 성격을 지닌 것을 모두 경기, 곧 아곤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극단적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장수 칼라노스가 죽자 슬픔을 달래려고 아곤을 열었는데,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아곤 참가자 35명이 현장에서 죽고, 나중에 6명이 더 죽었는데 그중에는 우승자도 들어 있었다.” 하위징아는 이 아곤과 결합된 놀이가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신화·소송·전쟁·정치·상거래에도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입증해간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정신이 19세기에 소멸했음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떨까. 하위징아가 보기에 20세기는 겉보기엔 놀이가 아주 많아진 것 같지만, 놀이 정신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정치에서 놀이 정신이 죽고 ‘유치한 행위’가 판친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고 발호하던 때였는데, 그 현상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 우스꽝스러운 집단행위를 한다”고 썼다. 이 시대는 놀이의 정신에 관한 한 명예의 코드도, 게임의 규칙도 내팽개친 천박한 시대였다. 그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략한 것이 1940년 5월인데 이때 하위징아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변방 도시 더스테이흐로 유폐됐다가 1945년 2월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10. 03. 07.  

P.S. 나에게 <호모 루덴스>는 <중세의 가을>보다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목차를 다시 보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없지 않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이니 거의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고, 그사이에 책에 대한 안목도 달라진 때문일 것이다. 호이징하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책으론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문예출판사, 1994)이 있다. 최근에 나온 버전으론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코의서재, 2008)도 참고할 수 있겠다. 서양미술사학자인 노성두씨는 "나는 이 책을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바꾸지 않겠다"고까지 평했다. 국내서로는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그린비, 2007)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Статьи  по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Homo ludens. Artiklen over de Cultuurgeschiedenis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마침 러시아에 있을 때 호이징하의 책이 양장본으로 새로 출간되어 구입한 기억이 있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두 권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는데, 나머지 책은 여력이 닿지 않았고, 일단 국내에 소개된 책만이라도 구해놓자는 생각이었다. 다시 검색해보니 저렴한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 왼쪽이 <호모 루덴스>의 러시아어 양장본이고 오른쪽이 문고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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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여전히 호모 루덴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01 00:20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연암서가판이다.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인간이 ‘생각하는
 
 
yamoo 2010-07-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성사와 기린원..정말 이 두 출판사의 엔날 리스트를 보면 갖고 싶은 책들이 한보따리입니다..ㅎㅎ 호모루덴스는 저도 까치 출판사본으로 갖고 있습니다.
 

책은 바로 구해놓았지만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웬디 브라운의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갈무리, 2010)이다. 마땅한 리뷰가 올라왔기에 워밍업으로 미리 읽어둔다. 관용이 언제나 '강자'의 미덕이라는 상식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서울신문(10. 03. 06) 관용이란 말에 속지 말라, 그 속에 정치·폭력 숨었다

이런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최근 같은 팀의 한 동료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처음에는 불쾌감과 함께 심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곧 그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전처럼 함께 일을 해 나가기로 했다. 소수자의 권리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관용의 정신’을 발휘해서 말이다. 이런 경우 당신은 아마 스스로의 드넓은 포용력에 만족하며 “잘한 일이다.”라고 뿌듯해할 것이다. 
  
그러나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승철 옮김, 갈무리 펴냄)을 펴낸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를 두고 “관용의 탈정치적 전략에 속았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면서 “관용을 운운하기 전에, 소수자에게 느끼는 불쾌감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관용만으로 해결이 될 문제인지를 고민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 펴냄)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한 ‘관용(톨레랑스·Tolerance)’이란 개념은, 1995년 책 출간 당시부터 우리 사회에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며 크게 유행했다. 각종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것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관용은 주목받는 단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관용은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 각 지역에서 여전히 결코 의심받지 않는 가치 중 하나로 존재한다.  



하지만 브라운 교수는 이렇게 관용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경계한다. 그는 관용이 ‘자유’나 ‘평등’의 동의어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관용이란 이름 뒤에 숨은 정치적인 계산들과 헤게모니 투쟁, 심지어 그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는 최근 20년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예로 들며, 이런 ‘관용의 폭력’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지적한다. 책에서 설명하는 관용의 탈정치성은 앞서 예로 든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비슷하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 문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이해해야 할 요소가 분명 있다. “동성애자는 불쾌하다.”는 차별적 인식을 갖게 한 사회 구조는 무엇인지, 또 이런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지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용은 이러한 국가나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고 브라운 교수는 말한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등 사회적 문제를 단지 관용이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피하고, 소수자들을 배려받아야 할 수동적 위치로만 몰아가면서 이들이 정치세력화되는 것도 막는다.

나아가 브라운 교수는 책의 부제로 붙였듯 이런 식으로 관용이 현대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 될 수 있음도 지적한다. 관용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사실상 소수자를 포함한 국민의 권리 보장과 계층 간의 소통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교묘하게 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기득권에 대한 도전 역시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브라운 교수는 관용이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에도 활용되고 있다고 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이 중동 국가를 상대로 벌인 수많은 전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관용의 논리가 적용됐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나 후진국의 문명은 불관용적이기 때문에 서구 선진 국가의 관용적인 문명이 이들을 처단하고 민중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논리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관용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들에는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책에서 브라운 교수는 계보학의 방법을 통해 관용 담론이 전략적으로 사용된 흐름을 추적해 간다. 애초 종교개혁 이후 종교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된 때부터 인도주의로 의미가 확장되고 또 최근 다문화주의의 한 담론이 되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한 관용의 용법을 소개한다.(강병철기자) 

10.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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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잡담] 관심가는 책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from High enough! 2010-03-06 21:00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 로쟈의 저공비행관용, 일명 똘레랑스.어쩐지 좀 멋있고, 어쩐지 좀 유식해 보이고, 어쩐지 좀 있어 보이는 그런 말이다.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또는 대립적인 어떤 세력들 간의 적대적인 태도 대신 그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좀 뿌듯하고 멋있는 그런 개념이랄까 뭐 그렇다.오, 하지만 저 책의 시점은.'왜 소수자에 대한 시각이 불편한 거지?' 같은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없다는 거 알고 있니-라고 한...
 
 
노이에자이트 2010-03-06 20:40   좋아요 0 | URL
개인이 먼저 바뀌어야 하느냐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하느냐는 오래된 논쟁이 생각나는군요.브라운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소신인 듯합니다.하지만 사람은 가만 있고 사회가 바뀌나요? 개개인의 변화를 강조하면 기존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게 하는 보수적인 주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글쎄올시다 입니다.

로쟈 2010-03-07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그 개인도 강대국의 개인이냐, 약소국의 개인이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주장만을 펼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용의 담론이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보여주는 게 책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요...

돈케빈 2010-03-07 01:05   좋아요 0 | URL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도 중심키워드가 '관용'이더라구요.

로쟈 2010-03-07 09:37   좋아요 0 | URL
관용은 제국의 필수적인 미덕이기도 하지요...

2010-03-07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나온 내털리 데이비스의 <책략가의 여행: 여러 세계를 넘나든 한 16세기 무슬림의 삶 >(푸른역사, 2010)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화제의 책은 16세기를 다루고 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 뤼시엥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문학과지성사, 1996)까지 '16세기 3종 세트'로 묶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아,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를 포함하여 미시사 책들이 몇 권 더 있긴 하다). <16세기 문화혁명>은 두툼한 분량의 무게감 그대로 '눈부신 역저'라 불릴 만한데(나는 내주에나 좀 읽어볼 참이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3. 06) 과학혁명 디딤돌 놓은 16세기 장인과 기능공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수년전 발언을 떠올려 본다. 당시 ‘천재경영론’으로 명명되면서 널리 회자됐던 발언에 깔린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사실 뿌리가 깊고 지배하는 영역도 넓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소수의 천재들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근대과학의 역사 역시 갈릴레이, 뉴턴, 케플러, 베이컨 등 걸출한 천재들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17세기 유럽에서 살았다. 그래서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세기라고 부른다. 전작 <과학의 탄생>(일본 제목은 ‘자력과 중력의 발견’)으로 찬사를 받았던 지은이는 후속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에 초점을 맞췄다. 17세기 천재들의 업적에 가려 조명을 받지 못했던 16세기의 장인·기능공 등 ‘민중’들이다.

 

거칠게 말해 중세과학과 근대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머리와 몸으로 대비된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시대 학자들은 실험 등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를 머리로 탐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봤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상아탑에 갇힌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고전에 나오는 인체의 구조나 생명의 원리 등 이론만 외우고 읊조렸을 뿐이다. 실제 수술이나 조제를 하는 사람들은 천대받았다.

그러나 16세기 장인·기능공들은 ‘고귀한 언어’ 라틴어와 고전은 배운 적 없었지만 몸을 움직여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을 축적하고 스스로 느낀 궁금증을 실험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틴어가 아닌 속어(고국언어)로 글을 썼다. 당시 유럽에서 융성한 목판 인쇄술은 미술, 건축, 의학, 군사학, 기계학, 천문학, 지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문화혁명’을 전파했고 후세가 이를 확인할 좁다란 통로를 남겼다.

물론 이들에게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비교하고 검증하고 자신의 가설을 입증시켰지만 근대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이론화’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반면 17세기 학자들은 이들이 멈춘 곳에서 출발했다. 앞서 기능공들을 업신여기던 아카데미즘이 아카데미 바깥에서 이룩된 지식과 방법론을 재빨리 흡수해 이론화함으로써 과실을 따먹었다는 것이다. 

 

천재와 영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받아줄 대지가 없었더라면 천재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지은이가 말하고자 한 것도 이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의 잊혀졌던 방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민중들의 르네상스’를 온전히 복원시켰다.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유럽 문명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이 책은 ‘명저’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김재중기자)  

10. 03. 05.  

P.S. 최근 일본소설들이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번주에는 인문교양서에도 '일본책'이 여럿이다. '일본류'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도서출판b, 2010)이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네번째 책으로 출간됐다(전체 일곱 권 가운데, 이제 두 권을 남겨놓고 있다. 나머지 한 권은 <근대문학의 종언>). 

    

지난 2007년 첫 권이 나온 이래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는 페이스인데, 짐작엔 올해는 한 권 정도 더 나올 듯싶다. 그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이 컬렉션 '전담역자' 조영일씨의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나온 민음사판의 역자 박유하씨가 이 '개정 정본판'의 번역을 다시 맡았고, 가라타니의 수정판을 "예전 번역을 일일이 대조하고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는 해이라 그 의미가 더 도드라진다. 가라타니 컬렉터인 나로선 바로 손에 들 수밖에 없는 책.  

그리고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와 일본의 재독 '경계인' 다와다 요코가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경계에서 춤추다>(창비, 2010)도 눈에 띄는 책이다. 두 사람이 2007년에 잡지 <세카이(世界)>에 열가지 주제를 놓고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간단한 소개기사는 이렇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깊고 넓은 안목으로 디아스포라(이산·離散)를 천착한 글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저술가다. 다와다 요코는 1982년부터 독일에서 살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다양한 글을 발표해 많은 상을 받은 소설가다. 그의 글이 한국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둘은 ‘경계인’으로서 다중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력이 다른 만큼 사유와 글쓰기 방식도 다르다. 서경식 교수는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사고방식이나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방식이 세로방향이 되는 경향, 그것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해가서 구멍을 파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로방향으로 열어간다. ‘모으기’에 응하는 ‘흩어놓기’라고나 할까.” 뿌리를 파고드는 서경식의 글이 깊은 가을 밤 비에 흠뻑 젖은 듯한 스산함을 일깨워준다면, 맺힌 것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다와다 요코의 글은 신록으로 내닫는 해사함이 있다. 집·이름·고향에 대한 ‘두 사람’의 상념이 빚어내는 차이의 무늬는 아름다우면서도 아프게 시리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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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5 17:36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을 다루고 있다. 이미 일간지 리뷰들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책이지만,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한번 더 언급하게 됐다. 대단한 역작이어서 제쳐놓기가 어려웠다.    한겨레21(10. 03. 22)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2010-03-0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6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3-06 11:22   좋아요 0 | URL
아직 완독하지 못한 구판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신판을 구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드네요^^ 강한 구매 충동을 느끼면서도, 언제 읽으려나 하는 현실론이 가로막는 군요^^

로쟈 2010-03-07 09:38   좋아요 0 | URL
새로 들어간 글들도 있어서 저자의 '확정본'이기도 해서 무시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어제 학교에 가보니 <공간>(3월호)이 강사실 책상에 놓여 있었다. 서평란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산책자, 2010)을 다루었는데, 여기에 옮겨놓는다. 다사다난하다 보니 두 주 전에 쓴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공간(10년 3월호) 무미예찬 

무미예찬(無味禮讚). 그러니까 ‘맛없음’에 대한 예찬이다. 말이 안 되는가? 그런 염려는 저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처음에는 역설로만 여겨질 것이다. 무미(無味)를 예찬한다는 것, 맛이 아니라 맛없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처음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인 저자에게서 ‘우리’란 일차적으로 프랑스인이고 서구인이다. 따라서 무미에 대한 그의 예찬이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된다는 판단은 한국인 독자라면 보류해야 할 판단이다. 그럼에도 ‘무미예찬’에서 어떤 역설을 감지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각과 사고가 서구화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우리말로 ‘무미’라고 옮겨진 단어는 저자가 불어로 ‘fadeur’(영어로는 ‘blandness’)라고 옮긴 중국어의 ‘담(淡)’이다. ‘담백하다’고 할 때의 ‘담’으로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보기엔 이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다. “그것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강하게 논증하지 않고 여러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이다.   

담의 소리, 담의 느낌, 담의 그림과 시 등 “은미(隱微)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무미함에 대해 살펴나가는 저자가 무미의 전범으로 예시하는 것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예찬(倪瓚)의 문인화다. 그림의 전경에는 잎이 성글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전부다. 듬성듬성한 바위들이 물가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 텅 빈 공간 건너편에 야트막한 언덕들이 밋밋한 원경을 이룬다. 네 개의 기둥으로 버텨놓은 초막이 아래쪽에 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다. 전체적으론 윤곽선들조차 분명치 않을 정도로 연한 먹물로 그려졌다. 그래서 “도무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유혹하는 것이라고는 없지만, 그런데도 이 풍경은 풍경으로서 충만하게 존재한다.” 바로 무미의 풍경이다.  

화가 예찬은 나이 사십대까지는 막대한 재산 덕분에 지극히 고상한 세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지배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생애의 마지막 몇 십 년은 방랑으로 소일하며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연한 삶을 살았다. 그가 평생 그린 풍경의 무미함은 곧 ‘무미한 삶’이라는 그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풍경의 무미함이 내적 초탈함이란 삶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듯 ‘담’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 없이 가리킨다.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無爲)한 것이 삶의 기조가 된다고 하면, 이러한 태도는 서양의 주류적 가치관과 대비된다. 가령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따름이다.”라고 제자들을 다그친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 확실한 자기 ‘맛’을 드러내는 것, 곧 주장과 분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서양의 미덕이라면 중용적 태도를 이상으로 간주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려 하는 것, 그럼으로써 후세가 자기에 대해 말할 거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삼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고, 소인과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는 교훈도 나온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 뿐인 소인과 달리 군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말을 행동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때에는 남을 위하는 척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담백함’이 시(詩)․서(書)․화(畵)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인재의 자질을 판단하는 잣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의 재질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그런데 성격이 균형 잡히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하고 담백하며 아무런 맛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는 평범함과 담백함이란 자질을 먼저 고려한 후에야 그가 총명한지 따졌다. 한 가지 덕목에만 빠지지 않아야 모든 덕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야지만 공직생활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변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 시각에 공감하게 되면 “완벽한 성격에는 이렇다 할 성격이 없으며, 충만함은 곧 평범함이다.”란 말도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왜 그런가? 모든 자질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면 어떤 특징도 다른 특징보다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의 사람됨은 남 보기에 특기할 만한 점이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저자의 ‘무미한’ <무미예찬>을 특기할 만할 것이 없는 책이라고 평한다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10. 03. 05. 

 

P.S. 개인적으론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을 접한 지는 몇 년 됐다.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3)란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그의 다른 책들을 바로 검색하여 <불가능한 누드>(2007)란 책의 출간을 한 출판사에 제안한 바도 있다(이 책이 나의 첫 소장품이다). 나는 <무미예찬>이 번역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불가능한 누드>가 나오는 걸로 혼동하고 있었다. 제목은 선정적일지 몰라도 중국 미술에 대한 책이다. 그의 최신간 또한 중국 미술을 다룬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2009)이다. 이 두 권 정도는 더 번역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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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