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한국의 커버스토리로 '작가들의 음식예찬'을 읽다 보니 체호프가 권장한 코스 메뉴가 나온다(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003/wk20100309142137105450.htm). 출처는 마크 쿨란스키의 <맛의 유혹>(산해, 2009)이란 책이고, 쿨란스키가 참조한 건 체호프가 스무 살쯤에 쓴 한 단편이다. 보드카에서 시작해서 맥주로 끝내는 메뉴 자체가 주량이 약한 나에게 끌리는 건 아니지만, 러시아식 수프와 어린 돼지고기는 흠, 약간 군침을 돌게 한다. 봄밤에 정신도 멍하던 참이어서 잠시 야참 생각을 해본다. 

체호프가 제안하는 코스 메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안톤 체호프는 <갈매기>, <세 자매>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가 젊은 시절 써놓은 글에 언론인을 위한 8코스 메뉴가 제안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코스 메뉴가 봄날 잃은 입맛을 되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한번 시도하면 주당이 될 것 같은 '주류입문 정석'임은 확실해 보인다. 1880년경 쓴 <자명종의 달력 Alarm-clock's Calender>이란 글이다. 



(1) 보드카 한 잔
(2) 양배추 수프와 카샤(메밀 가루로 쑨 죽의 일종)
(3) 보드카 두 잔
(4) 양고추냉이를 곁들인 어린 돼지고기 요리
(5) 보드카 세 잔
(6) 양고추냉이, 고춧가루, 간장
(7) 보드카 네 잔
(8) 맥주 일곱 병 

 

10. 03. 13. 

P.S. 러시아식 수프(보르시치)와 흑빵을 곁들인 야참은 아래와 같이 구성될 수 있다(실상은 한 끼 식사다). 조촐한 러시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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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코스 메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1-21 11:38 
    한겨레21의 '예술가가 사랑한 술' 코너에서 '체호프의 보드카'가 다뤄졌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봄에 주가한국의 기사에서 다뤄진 것과 같은 아이템이다.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다.      한겨레21(10. 11. 19)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코스 메뉴  춥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올가을은 남다르게 춥다. 옷장 구석에 묻혀 있던 코트는 옷장 문을 열었을 때 손이 닿기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
 
 
비로그인 2010-03-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드카는 주량이 바닥인 관계로 저도 썩 내키지 않지만, 햐 저 맥주랑 식탁에 차려진 수프며 빵은 정말 군침 돌게 만드네요 ㅋㅋ 그런데 체호프가 권하는 코스대로 마시는 게 러시아에선 보통 반주 수준인가 보죠? ㅋㅋ 정신없이 바쁘실 텐데 이런 호사를 다 누리게 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로쟈 2010-03-14 00:36   좋아요 0 | URL
차게 마시는 보드카는 소주보다도 넘기기가 쉽습니다.^^ 원래 바쁠 때 딴짓도 많이 하지요.^^;

카스피 2010-03-14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러시아 흑빵은 겉이 단단해서 러시아 사람도 빵 안쪽만 먹고 먹다가 남은 것은 벼계로 이용한 정도라고 하더군요^^

로쟈 2010-03-14 16:18   좋아요 0 | URL
아마 한국전때 전해져내려온 얘기일 거예요. 실제로 소련군들이 그랬다는군요...

L.SHIN 2010-03-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드카는, 레몬맛과 복숭아맛이 제일 좋은데..ㅎㅎ
아니면 오리지널 보드카에 오렌지 쥬스나 크랜베리 쥬스 혼합해서 먹는 것도..ㅎㅎ
아~ 술 고프다...

로쟈 2010-03-14 16:19   좋아요 0 | URL
폭탄주로도 많이 쓰이죠.^^

comorin 2010-03-1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이런 소설가분 덕분에 인류가 술을 끊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코스를 언젠가 따라하곤 싶지만, 그대로 따라했다간 바로 집에서 쫒겨날 것 같네요..마지막에 맥주 일곱병이 인상깊습니다. 독한 증류주를 마시고 나면, 그 갈증을 풀고 입가심을 하기엔 맥주가 최고라는 제 생각이 체호프와 같다니..^^

로쟈 2010-03-19 10:46   좋아요 0 | URL
그 비율이 4:7인가 봅니다.^^
 

국내 학자들의 책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경제학자 이정우 교수의 <불평등의 경제학>(후마니타스, 2010)과 사회학자 홍두승 교수의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한국사회의 계층을 말한다>(동아시아,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한국사회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진단서로 읽을 수 있겠다.   

   

한겨레21(10. 03. 12) 왜 불평등한가

소득 불평등과 관련해 ‘오쿤의 새는 물통’이라는 가상 실험이 있다. “지금 부자가 빈자에게 1원을 이전한다고 가정하자. 이 과정에서 중간에 새나가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은 빈자 손에 들어가는 건 χ뿐이고, ‘1-χ’는 도중에 잃어버린다고 가정하자. 이때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어떤 사람은 χ가 조금만 남더라도 이런 이전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평등보다는 효율에 관심이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도중에 새나가는 물이 아까워서 이런 이전 자체를 반대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오쿤은 ‘나는 구멍 난 물통 실험에서 60% 누출을 보일 때까지만 (이러한 형태의) 소득재분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쿤은 자신의 가치관을 분명히 60%라는 숫자로 밝히고 있는데, 독자 여러분은 이런 실험에서 어느 선까지 물이 새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지표는 있으나 왜 그런지는 없는 언론
오쿤의 새는 물통이 보여주듯, 이정우의 <불평등의 경제학>(후마니타스 펴냄)은 소득분배 ‘이론’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이론을 설명하는 교과서를 완전히 넘어서고 있다. 몇 가지 소득분배 모델과 간단한 수식, 그리고 몇 개의 그래프가 등장하고 있으나 복잡하게 증명을 시도하거나 경제모델 방정식을 도출하는 추상적인 ‘경제과학’을 다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뿌리인 <소득분배론>(1991)이 출판된 지 20년이 다 되었다.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세계화, 정보화, 구조 변동과 더불어 소득 양극화, 빈곤, 노동시장 유연화, 비정규직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불평등 심화, 양극화, 고용 불안정, 성장-분배 문제 등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이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로 당신, 그리고 당신 이외의 모든 사람의 월급·소득·일자리·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다소 수준 높은 교양경제학 강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론매체 등을 통해 소득분배 악화에 대한 수많은 지표를 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표만 제시될 뿐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기 일쑤다. 불평등 심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가진 소수의 전문가에 대한 수요 급증에서 오는 정보 격차에 주목하는 ‘기술 중시 가설’, 소위 국경 없는 경제·국제 경쟁의 심화로 인해 전통적인 굴뚝산업이 쇠퇴하고 자본이 해외로 이동함으로써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는 ‘세계화 가설’, 노동조합의 세력 약화와 낮은 최저임금으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들을 지킬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제도 가설’ 등 백가쟁명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은 소득분배 전공학도들에게 유용할 뿐 아니라 교양서로 읽을 수 있도록 흥미롭고 풍부한 현실 사례를 군데군데 배치하고 있다. 이를 테면 △한국 100대 부자들의 자녀가 혼인 등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자료 △한국 10대 재벌가 혼맥 이야기 △1924년 전북 고창군의 빈민생활조사 자료 및 일제시대 도시 빈민 조사자료 △달동네·산동네의 기원 △점심 도시락을 못 싸온 1963년 대구 명덕초등학교 이윤복군의 일기 등을 인용·소개하고 있다.

다루는 주제와 필치도 한껏 대중적이다. “한국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의 불평등은 토지에서 온다. 부동산 투기는 불신을 먹고 살고, 신뢰 속에서는 마치 햇볕 아래 드라큘라처럼 힘을 잃는다. 경기가 나쁘다고 눈앞의 단기 성과에 집착해서 부동산 투기를 경기 부양의 불쏘시개로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약이다.” 각 장 서두에는 양념처럼 짧은 경구를 붙여놨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조지 오웰, <동물농장>)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재산을 계산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짜 부자는 아닙니다.”(폴 게티) 빈곤을 다룬 제10장에서는 천상병 시인의 ‘나의 가난은’이란 시 전문을 싣고 있다.

“성장과 분배는 동행한다”
“한국 경제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두 가지 극단적이고 편향된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시장 맹신주의와 성장 만능주의다.” 양극화 시대에,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논쟁의 시대에, 그리고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대에 깊이 있게 일독할 만한 책이다. 이정우 교수는 결코 ‘좌파 분배론자’가 아니다. 이 책 전편을 관통해 그가 주창하고 있는 건 “성장과 분배는 동행한다, 분배를 통한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식이다.(조계완 기자) 

  

시사IN(10. 03. 11) 패자부활전이 필요한 대한민국

이 책은 풍부한 통계 자료와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계층과 관련 있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실을 차분하게 조망한다. 227쪽의 짧은 분량 안에서 그 조망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양극화, 중산층, 자영업주와 임금 근로자, 동네 슈퍼, 교육 불평등, 강남, 상류사회, 빈곤, 주거, 농어촌 문제, 사회적 소수자와 주변인 등.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 대부분을 망라한 셈인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계층 문제와 상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부분은 양극화 문제.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도는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상위 소득계층과 하위 소득계층 간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계층 양극화’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양극화란 중간이 공동화되고 소수를 제외한 다수가 하위 계층으로 전락하는 구도인데,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구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물론 그럴 위험성은 있다 해도). 소득계층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양극화나 중산층 개념 자체가 모호한 셈이다.

그럼에도 중산층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안정의 기초로 인식되기 때문이며, 저자는 중산층의 폭을 넓히고 튼튼하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계층 간 격차 해소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기보다, 취약 계층의 삶의 질 향상이나 빈곤 퇴치에 무게를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어느 정도 못사는가’라는 상대적 잣대가 아니라 ‘내가 어느 정도 생활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느냐’라는 절대적 기준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경제적 세습 고리’ 약화시켜야
교육 불평등 문제에 대해 저자는 현재의 입시 제도가 ‘있는 집’ 자녀에게 결과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대학 신입생의 가정 배경이나 출신 고교에서 잘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업적적 지위인 교육적 성취가 귀속적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2000~2009년까지 가장 많은 서울대 합격자를 낸 10개 고교 중 일반계 고교는 단 1개 (그것도 서울 강남에 위치한)에 불과했다.

저자는 어떤 제도, 어떤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더라도 추첨식으로 뽑지 않는 한 교육 기회의 계층별 차별성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생들의 잠재적 소질과 능력을 찾아내 선발해도, 그것이 곧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는 방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부 및 민간기업의 채용방식을 다양화하는 등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완화하는 것, 시장경제질서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제적 세습 고리를 약화시키는 것을 근본 처방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 요컨대 단판 승부가 아닌 패자부활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의 미덕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관점 차이를 일단 접어두고 일종의 중도 입장에서 문제와 현실을 ‘설명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좀 더 깊이 생산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신뢰할 수 있는 발제(發題)다.(표정훈_출판평론가) 

10. 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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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나온 몇 권의 책에 간단한 스크랩 스케치. 지난주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인문서는 없지만, 자본주의적 탐욕과 그로 인한 빈곤의 문제를 다룬 책들의 인상이 강렬하다. 제일 먼저 장 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갈라파고스, 2010).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2007), <탐욕의 시대>(갈라파고스, 2008)과 함께 '장 지글러 3부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한겨레의 기사를 참고하면(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9789.html), "원제(‘서양에 대한 증오’)가 말해주듯 이 책에서 지글러는 서방의 과오가 자체 교정 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광범위한 저항을 부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니까 책이 수신자는 '빼앗긴 대지'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증오 대상인 서구인들이다(이 책으로 저자는 '인권저작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2007년 한 해 동안 빈곤으로 인한 지구촌 사망자는 5700만. 이는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 전체 기간 인명피해와 맞먹는 것이었다. 지글러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지속 가능케 한 것이 신자유주의요 그것을 진두지휘한 세계은행이다. 그 배후에 워싱턴이 있다. 작가 켄 사로위와 등 9명이 교수형을 당한 것은 나이지리아의 소수 매판세력과 서방의 유착, 그것이 부른 부패와 파괴를 묵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레 시엔 코트디부아르 외무장관이 2001년 9월 공식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여러분들이 노예제도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주십시오. 내리쬐는 뙤약볕 밑에서 또는 빗줄기 속에서 수백만의 농부들이 여러 달 동안 힘들게 노동한 대가로 얻는 상품의 가격이,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농부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볼 필요 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노예제 폐지 이후) 방법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 흑인들은 이제 앤틸리스 제도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배에 강제로 실리는 일은 없어졌으니까요. 그들은 자기 땅에 머물러 살 수 있죠. 하지만 그들이 자기 땅에서 흘린 피와 땀에 대해서 런던이나 파리, 뉴욕에서 값을 매깁니다. 노예상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노예상인들은 주식투기꾼으로 모습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두번째 책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겨냥한 것인데, 필리핀의 사회학자이자 반세계화 운동가 월든 벨로의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더숲, 2010). 원제는 '식량전쟁(The Food Wars)'.  

저자는 전세계 식량 위기와 식량전쟁의 원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세계은행·IMF·WTO의 '삼각편대'를 그 원흉으로 지목한다. 경향신문의 리뷰(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1003121709525&code=900308)를 간추리면 이렇다.    

필리핀 사람들의 주식은 쌀이다. 필리핀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쌀을 자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년 100만~200만t의 쌀을 수입하는 처지이며, 가난한 지역에 쌀이 안전하게 배급되도록 군대까지 파견하는 실정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필리핀 국립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반세계화 운동가인 월든 벨로는 ‘식량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화와 자유주의의 본질’을 파헤친다. 멀쩡했던 나라가 사람들의 주식조차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게 된 배경에는 ‘녹색 혁명’이나 ‘농업 연료’에 대한 잘못된 믿음,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세계무역기구(WTO)의 오판, 거대 곡물회사의 농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추동하는 신자유주의가 있었다. 세계은행·IMF·WTO의 삼각편대는 자유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구조조정을 각 나라에 강요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생산성과 이윤이 적은 것으로 보이던 전통적 농업이었다. 케냐, 터키, 볼리비아, 필리핀, 멕시코 등은 초기에 구조조정의 시험대에 오른 국가였다. 정부는 농업에 대한 지원을 줄였고, 전통적 자영농들은 몰락했고, 해외의 값싼 농산물이 시장을 잠식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랐던 경쟁력 있고 빈곤 없는 세상이 왔을까. 2007~2008년 식량 위기 때문에 폭력 사태가 일어난 나라만도 30개국이 넘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정치 위기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일본의 반핵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프로메테우스, 2010). 부제는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왔는가'이다. 아직 리뷰기사는 뜨지 않았는데, 간단한 소개로는 "금융재벌로 대표되는 자본-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20세기를 지배했는지 속속들이 파헤친 책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로 손꼽히는 히로세 다카시는 JP모건과 록펠러로 대표되는 미국의 독점재벌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세계 정치경제를 조종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인사회(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의 추천사는 이렇다. "‘1인 대안언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반핵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고유명사를 낱낱이 까발려 자본가계급 인맥을 추적한 그 필생의 작업의 신호탄이 된 문제작. 역사를 자본의 시점에서 냉정하게 응시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필독서요, 시시각각 현실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세계적인 사건이나 뉴스들을 접할 때 그것을 어떻게 읽고 판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다." 

'1인 대안언론'이란 말이 눈길을 끄는데, 히로세의 저작 리스트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체르노빌의 아이들>, <위험한 이야기>, <미국경제의 지배자들>, <그들만의 제국>, <붉은 방패>, <하나의 사슬>, <금융제국>, <무기제국>, <석유제국>. <지구의 함정>, <클라우제비츠의 암호문>, <연료전지 혁명>, <로마노프 가의 황금>, <역사를 목격한 영화>, <할리우드 대가족> 등. 우리로 치면 '논픽션의 강준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은 "JP모건과 록펠러로 대표되는 미국의 독점재벌이 어떤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행태를 저질렀는가? 또 그들이 세계경제를 어떻게 좌지우지했으며 그들에 의해 미국은 물론 세계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조종"되었는가를 다룬다. JP모건과 록펠러에 대해서는 두툼한 책들이 나와 있기 때문에 참조해볼 수 있겠다.   

 

   

<제1권력>에 대한 일본 독자의 서평 가운데는 "자본의 논리로 근현대사를 관통한 독보적인 저작. 내가 읽은 가운데 최고의 미국사다!"란 평도 있다고. 그러고 보니 이번주에 나온 강준만의 신작도 '미국사 산책'이다.    

 

 

10. 03. 13.  

P.S. 장 지글러의 책에서도 언급되는 나이지리아 내전에 대해서는 나이지리아 출신작가 아디치에의 소설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모던 클래식'으로 나온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민음사, 2010).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10. 03. 13) 쌍둥이 자매의 삶을 뒤흔든 검은대륙의 내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33)의 2006년 작으로, 그의 두 번째 장편이다. 1980~90년대 나이지리아 군부 독재 치하를 배경으로 억압적 가정에서 자라는 열다섯 살 소녀의 성장을 다룬 첫 소설 <보랏빛 히비스커스>(2003)로 호평을 받았던 아디치에는 이 작품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오렌지상을 받고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주목할 100대 영문 소설'에 이름을 올리는 등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아프리카 현대문학의 거장인 치누아 아체베의 뒤를 이을 작가로 촉망받는 그는 모국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18세에 미국 유학을 떠나 문예 창작과 아프리카 연구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미국과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67~70년 나이지리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친영(親英) 세력인 하우사족과 갈등을 겪던 이보족이 군부 쿠데타를 통해 나이지리아 안에 '비아프라'라는 새 국가를 세우면서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사이엔 전쟁이 벌어졌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이 전쟁의 참상을 전해 들은 작가 아디치에는 식민 통치의 잔인한 유산, 무수한 희생자를 낳은 소수 지배자의 무책임한 행위를 알리겠다는 열망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작품의 중심 인물은 이보족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자 쌍둥이 자매인 올란나와 카이네네. 서로에게 경쟁 의식을 가진 이 자매는 각각 대조적 성격의 남성들과 교제한다. 카이네네는 아프리카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나이지리아를 찾은 영국인 작가 리처드와, 올란나는 나이지리아 독립을 주장하는 개혁파 지식인 오데니그보와 사귄다. 하지만 애인이 다른 여성과 동침한 것에 좌절한 올란나가 리처드와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보낸 탓에 자매는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내전은 두 사람의 안온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이런 고난 속에서 두 자매는 다시금 가족애를 회복한다.

작가는 힘있는 필체로 비극적 역사 속에서 요동치는 사랑과 배신, 질투 등 인간적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아수라 같은 상황에서도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는 생의 의지를 통해 울림이 큰 드라마를 완성했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열정적 지성으로 한 시대의 초상을 그려낸, 20세기 고전들의 훌륭한 후계자"로 아디치에를 평가했다.(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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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14 15:53   좋아요 0 | URL
비아프라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군요.국제스릴러물의 대가인 프레드릭 포사이트가 문명을 알린 게 비아프라 내전 르포였어요.요즘 나이지리아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가 내전을 하고 있더군요.

로쟈 2010-03-14 16:17   좋아요 0 | URL
잘 아시는군요. 저도 기회가 되면 언젠가 아프리카문학 공부도 좀 해봐야겠어요. 5년쯤 뒤면 시간이 있으려는지...
 

기획회의(267호)에 실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레이몬드 고이스의 <공적 선 사적 선>(기파랑, 2010)을 다루고 있다. 짐작엔 이 책에 대한 유일한 서평일 듯싶은데, 책에 대한 평가보다는 내용을 간추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책의 의의는 공과 사, 곧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해 한번 다시 생각해보도록 한 데 있다.  

기획회의(10. 03. 05)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인문서에 대한 관심은 보통 저자에 대한 관심이거나 책의 주제에 대한 관심이다. 레이몬드 고이스의 <공적 선(善) 사적 선(善)>의 경우는 후자인데, 책을 읽고 난 감상으론 전자로 이행해도 좋겠다는 쪽이다. 얇은 분량이지만 여러 모로 유익했다는 판단에서다. 얇다고는 해도 저자가 일반 독자들을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학술서의 문체에다 많은 각주를 거느리고 있어서 예상보다는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책의 맨 앞에 배치된 ‘옮긴이의 말’이 일단은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준다. 저자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정치철학이 전문분야라는 것과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교리나 이데올로기들을 해체하는 데 주력했다. 니체에게 그것이 기독교였다면 고이스에게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다.” 말하자면 ‘자유주의라는 교리’의 비판과 해체가 저자의 주된 관심분야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는 무엇일까? 공과 사, 곧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 아닐까? 거기에 덧붙여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한데 “고이스는 이 책에서  이러한 우리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타인을 경쟁자로 인식하도록 요구하는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그리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도 저자의 주된 논지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입장은 이렇다. “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으며, 일련의 대조적인 사항들이 중첩되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은 생각과는 달리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공과 사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환상을 해체하기 위해서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니체식 계보학이다(실제로 그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초기 유고>의 비평판 편집에도 관여한 바 있다). 미셸 푸코도 방법론으로 이용한 적이 있지만, 계보학적 고찰이란 어떤 사상이나 관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며 역사적 우연이라는 걸 보여주는 식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기독교적 선/악이라는 것이 나쁨/좋음이라는 귀족적 윤리가 전도된 것에 불과하다고 폭로한 것이 좋은 예이다. 고이스는 공(公)사(私)구분의 역사성과 우연성을 드러내주기 위해 세 가지 인물의 사례를 검토한다. 디오게네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이다.  

 

기원전 4세기 사람인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의 시장 한복판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아테네는 그런 행위가 통제되지 않는, 문화적 진화의 수준이 낮은 사회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디오게네스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끼고 그를 비판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디오게네스 자신은 그러한 행위가 배가 고프면 배를 쓰다듬어서 허기를 달래는 것처럼 단순한 행위일 뿐이라고 답했다 한다. 여기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못 본 체함의 원리’의 적용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즉 공적 공간은 못 본 체함의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고, 사적 공간은 반면에 사적 공간은 못 본 체함의 원리를 어겨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당시 아테네에는 공적/사적이란 개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지만, 디오게네스는 사적으로 해야 할 일을 공적으로 행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테네인들과는 달리 로마인들은 공적인 것(Publicus)과 사적인 것(Privatus)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구분을 갖고 있었다(영어의 구분 자체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로마 공화국 말기였던 기원전 50년 말 원로원은 갈리아(골)의 총독 카이사르를 소환했다. 여러 정치적인 변칙행위를 문제삼은 것인데, 만약 지휘권을 후임자에게 넘겨주고 ‘사적인 시민’으로 돌아와 재판을 받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공공의 적’으로 선포될 처지였다. 이때 ‘공공의 것’을 뜻하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란 말이 흥미롭다. 오늘날 ‘공화국(republic)’이란 말의 어원이기도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공동선에 대한 관념만 있었지 추상적 권력구조로서 국가라는 개념은 없었다(즉 ‘로마 국가’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일단 publica는 populus(인민)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수액이 풍부한 나무처럼 활기찬 성인 남자와 소년, 곧 군대에 갈 수 있었던 남자를 가리켰다. ‘군단을 형성할 남자들’ 혹은 ‘무장할 수 있는 남자들의 집합’이 인민이었다. 그리고 공적인 것이란 ‘전체 인민에게 속하는 것’이란 뜻이었다. 거기서 차츰 ‘공공의 것’이 갖는 다의적 의미가 형성되는데, 저자는 네 가지로 간추린다. (a)군대의 재산 (b)로마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현상유지 (c)로마인의 공동관심사 (d)로마인이 공동선.  

  

여기서 공동관심사라는 것은 군대 모든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집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 뜻했다. 그리고 공동선은 각각의 시민이 소유한 가축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원과 교량의 수가 늘어나는 걸 의미했다. 공동의 관심사가 존재한다면 특수한 개인이나 집단을 지명하여 그 문제에 전념하도록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런 공직을 맡은 사람을 ‘정무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적인(priuatus)’란 단어는 그런 정무관직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공적 권위나 권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였다. 원로원의 소환에 맞서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내가 이 강을 건너지 않는다면, 나는 곤경에 처한다. 내가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곤경에 처한다.” 그는 공동선에 앞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선택한 것이었다.   

한편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사적인 것은 내면의 삶을 뜻했다. 디오게네스의 경우에 사적인 것이란 다른 사람들을 역겹게 하지 않기 위해서 피해 들어가야 할 장소였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자기 마음에서 찾아낸 존재론적으로 특권적인 장소였다. 카이사르에게서 지위가 공동선과 갈등을 빚어내는 사적인 내용을 품고 있었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성과 같은 의미에서의 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내 은행 잔고”이다. 요컨대 공과 사에 대한 단 하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계보학적 고찰을 통해서 현대 자유주의가 사적 영역의 핵심으로 침해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유재산권 등을 상대화한다. ‘민주공화국’에 사는 시민으로서 숙고해볼 만한 문제다.  

10. 03. 12. 

 

P.S. 저자의 책으론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비판이론의 이념>(서광사, 2006)이 먼저 출간돼 있다. 'Raymond Geuss'가 '레이몬드 게스'라고 표기됐고 얼추 그렇게 읽음 직한데, '레이몬드 고이스'가 맞는 표기인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리뷰를 기획하면서는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공과 사>(신서원, 2004)도 같이 읽어보려고 했지만, 사정의 여의치 않았다.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의 <중국의 '자유' 전통>(이산, 1998)까지 관심권에 두었지만 책을 구해놓는 데 그쳤다. 실상은 마감에 쫓겨 쓰느라 <공적 선 사적 선>의 문제제기도 충분히 다룬 건 아니다(마지막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란 주제는 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음, 2010)에서도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기회를 보아 한번 더 '공부'해볼 참이다. 게스/구이스와 같이 읽을 저자는 같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사상사를 강의하는 퀜틴 스키너이다. 그는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2007)에서 이사야 벌린 등의 '자유주의 자유론' 대신에 '공화주의 자유론'을 옹호하는데, '자유주의 비판'이란 점에서 게스/구이스와 입장을 같이한다(역자도 같다). 두 사람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나오는 '정치사상사' 시리즈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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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회적 상상>(이음, 2010)이 출간된 김에 마이리스트를 만들어놓긴 했는데, 책은 아직 본격적으로 읽진 못했다. 며칠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하고 오늘은 2002년 방한시 강연문들을 모은 <세속화와 현대문명>(철학과현실사, 2003)을 대출했다. 사정을 보아 따로 서평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다음주 한겨레21의 서평 후보이기도 했는데, 결국은 <16세기 과학혁명>만을 다루었다). 한겨레 고명섭기자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13) 근대 시민사회의 도화선 ‘새로운 상상’  

<근대의 사회적 상상-경제·공론장·인민주권>은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1931~)의 2004년 저작이다. 테일러의 저작 활동은 ‘철학적 인간학’과 ‘서구 근대성 탐구’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책은 서구 근대성을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의 관점에서 살피는 저작이다. 지은이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특징짓는 세 가지 형식으로 ‘시장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을 제시한다. 이 세 가지 형식에 대한 탐구가 이 책의 본론을 이룬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테일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경제학·정치학을 공부했다. 캐나다로 돌아온 뒤 맥길대와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로 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활동과 정치실천을 함께 한 다소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영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신좌파 정치운동을 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 신민주당의 핵심 이론가로 활동했다. 자신의 정치적 열정과 경험을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려는 행동주의자의 면모가 저작마다 깊이 배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정치사상은 흔히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로 요약되는데,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 귀속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주요 고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고민의 과정에서 테일러는 ‘서구 근대성’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벌였는데,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그런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제시한 ‘사회적 상상’이라는 말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연상하면 다소 수월하게 감이 잡힌다. 지은이 자신도 앤더슨의 그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다. 집단적 상상이 현실적인 힘을 행사할 때 그것을 두고 ‘사회적 상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논리정연한 이론이 아니라 모호하고 흐릿한 이미지와 이야기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상상’이다. 이 사회적 상상 중에 결정적으로 근대를 규정한 세 가지 형식이 경제·공론장·인민주권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기본 가정이다. 

먼저 지은이는 ‘사회적 상상’이라는 것이 어떻게 싹터서 자라나는지를 설명한다. 시작은 이론이다. “이론이란 처음에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다가 소수 엘리트의 사회적 상상 속으로, 이어 사회 전체의 사회적 상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지은이는 17세기에 ‘근대적인 사회적 상상’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처음 출현했으며, 그 이론을 제출한 사람이 네덜란드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그로티우스·1583~1645)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였다고 딱 짚어 말한다. 이 두 사람은 평등한 개인들이 계약을 체결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질서를 만든다는 관념을 이론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개인들의 평등성과 상호이익인데, 이것이 바로 근대적 도덕질서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 근대적 도덕질서가 사회적 상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상상 자체를 바꾸고 진전시킨다. 그 결과로 나타난 근대의 사회적 상상체가 ‘평등한 상호이익의 세계’ 곧 ‘시민사회’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시민사회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한 것이 ‘시장경제’다. 경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8세기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평등한 개인들의 이기적 활동이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질서가 이 경제다.  



지은이가 강조하는 두 번째 ‘사회적 상상’은 ‘공론장’이다. 공론장을 처음 제대로 규명한 사람은 위르겐 하버마스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18세기에 ‘공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서유럽에 처음 등장했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일종의 토론 공간 안에서 서로 연결됐다고 말한다. 이때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묶어준 공통의 공간이 책·팸플릿·신문 같은 인쇄물이었다. 인쇄물 자체가 실제의 공간은 아니므로 공통 공간, 곧 공론장은 장소를 초월한 일종의 ‘상상적 존재’다. 그러나 이 공론장은 정치권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테일러는 공론장이 권력의 외부에 있다는 점이야말로 고대의 아고라와 다른 점이라고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의 토론장인 아고라가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정치 내부의 장이었음과 달리, 근대의 공론장은 정치 외부에서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론장이 정치에 규범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인민주권’의 관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공론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민이며, 이 인민이 주권자이므로 정치권력이 인민의 감독과 견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인데, 이런 생각을 통해 ‘스스로 지배하는 주권적 인민’이라는 ‘사회적 상상’이 사회 전체로 퍼졌다. 그 결과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이었으며, 이 두 혁명은 인민주권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테일러는 이 책의 근대성 논의를 더 밀고 나가, 2007년에 펴낸 대작 <세속의 시대>에서 포괄적으로 상술했다고 옮긴이는 전한다.(고명섭 기자) 

10.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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