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학교에 가보니 <공간>(3월호)이 강사실 책상에 놓여 있었다. 서평란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산책자, 2010)을 다루었는데, 여기에 옮겨놓는다. 다사다난하다 보니 두 주 전에 쓴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공간(10년 3월호) 무미예찬 

무미예찬(無味禮讚). 그러니까 ‘맛없음’에 대한 예찬이다. 말이 안 되는가? 그런 염려는 저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처음에는 역설로만 여겨질 것이다. 무미(無味)를 예찬한다는 것, 맛이 아니라 맛없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처음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인 저자에게서 ‘우리’란 일차적으로 프랑스인이고 서구인이다. 따라서 무미에 대한 그의 예찬이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된다는 판단은 한국인 독자라면 보류해야 할 판단이다. 그럼에도 ‘무미예찬’에서 어떤 역설을 감지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각과 사고가 서구화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우리말로 ‘무미’라고 옮겨진 단어는 저자가 불어로 ‘fadeur’(영어로는 ‘blandness’)라고 옮긴 중국어의 ‘담(淡)’이다. ‘담백하다’고 할 때의 ‘담’으로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보기엔 이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다. “그것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강하게 논증하지 않고 여러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이다.   

담의 소리, 담의 느낌, 담의 그림과 시 등 “은미(隱微)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무미함에 대해 살펴나가는 저자가 무미의 전범으로 예시하는 것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예찬(倪瓚)의 문인화다. 그림의 전경에는 잎이 성글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전부다. 듬성듬성한 바위들이 물가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 텅 빈 공간 건너편에 야트막한 언덕들이 밋밋한 원경을 이룬다. 네 개의 기둥으로 버텨놓은 초막이 아래쪽에 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다. 전체적으론 윤곽선들조차 분명치 않을 정도로 연한 먹물로 그려졌다. 그래서 “도무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유혹하는 것이라고는 없지만, 그런데도 이 풍경은 풍경으로서 충만하게 존재한다.” 바로 무미의 풍경이다.  

화가 예찬은 나이 사십대까지는 막대한 재산 덕분에 지극히 고상한 세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지배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생애의 마지막 몇 십 년은 방랑으로 소일하며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연한 삶을 살았다. 그가 평생 그린 풍경의 무미함은 곧 ‘무미한 삶’이라는 그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풍경의 무미함이 내적 초탈함이란 삶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듯 ‘담’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 없이 가리킨다.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無爲)한 것이 삶의 기조가 된다고 하면, 이러한 태도는 서양의 주류적 가치관과 대비된다. 가령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따름이다.”라고 제자들을 다그친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 확실한 자기 ‘맛’을 드러내는 것, 곧 주장과 분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서양의 미덕이라면 중용적 태도를 이상으로 간주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려 하는 것, 그럼으로써 후세가 자기에 대해 말할 거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삼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고, 소인과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는 교훈도 나온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 뿐인 소인과 달리 군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말을 행동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때에는 남을 위하는 척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담백함’이 시(詩)․서(書)․화(畵)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인재의 자질을 판단하는 잣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의 재질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그런데 성격이 균형 잡히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하고 담백하며 아무런 맛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는 평범함과 담백함이란 자질을 먼저 고려한 후에야 그가 총명한지 따졌다. 한 가지 덕목에만 빠지지 않아야 모든 덕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야지만 공직생활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변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 시각에 공감하게 되면 “완벽한 성격에는 이렇다 할 성격이 없으며, 충만함은 곧 평범함이다.”란 말도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왜 그런가? 모든 자질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면 어떤 특징도 다른 특징보다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의 사람됨은 남 보기에 특기할 만한 점이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저자의 ‘무미한’ <무미예찬>을 특기할 만할 것이 없는 책이라고 평한다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10. 03. 05. 

 

P.S. 개인적으론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을 접한 지는 몇 년 됐다.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3)란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그의 다른 책들을 바로 검색하여 <불가능한 누드>(2007)란 책의 출간을 한 출판사에 제안한 바도 있다(이 책이 나의 첫 소장품이다). 나는 <무미예찬>이 번역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불가능한 누드>가 나오는 걸로 혼동하고 있었다. 제목은 선정적일지 몰라도 중국 미술에 대한 책이다. 그의 최신간 또한 중국 미술을 다룬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2009)이다. 이 두 권 정도는 더 번역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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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7: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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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2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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