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저명한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연암서가, 2010))가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에도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판이긴 하지만, 원래 영역자가 호이징하 자신의 영역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편차는 크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려니 사실 까치에서 나온 <호모 루덴스>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내가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도 이 까치판이다. 최초의 번역본은 언론인 권영빈의 <호모 루덴스>(홍성사, 1981)이지만(<놀이하는 인간>(기린원, 1989)으로 다시 나온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새 번역본은 저자명 Johan Huizinga를 네덜란드 발음을 따르려는 의도에서인지 '요한 하위징아'라고 표기했는데, 실제 발음은 [joːhɑn hœyzɪŋxaː]라고 하므로 딱히 부합하지도 않는다. 공연한 부스럼이라고 해야겠다(참고로 러시아어로는 '효이진가'라고 부른다). 애초에 '호이징가'라고 소개됐다가 '호이징하'로 교정됐는데, '하위징아'는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원칙 불명의 표기다. '하위징하'는 가능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호이징하'라는 관행을 존중하는 게 나을 듯하다(모음 표기까지 물고 늘어지자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마스크바'라고 불러야 한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06) 노동 예찬 사회…목졸리는 ‘놀이 정신’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사진·1872~194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모 루덴스>(1938)가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한 저작이자 하위징아의 말년을 장식한 걸작이다.  



하위징아의 출세작은 1919년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이다. 그에게 중세사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것이 이 저작이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20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두 독창적 저작은 한 사람이 썼다고는 언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다르다. 하나는 중세 말기 유럽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문화와 놀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통사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두 책 사이에는 자연스런 물의 흐름 같은 연속성이 있다. 하위징아 자신은 <호모 루덴스> 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중세의 가을>에서 … 문화와 놀이는 친밀한 관계라는 사상의 씨앗을 처음으로 마음에 뿌렸다.” 

14~15세기 유럽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중세의 가을>은 그 시절 중세인들이 겪었던 ‘삶의 쓰라림’에 대한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묘사에 이어 그 중세인들이 마음에 품었던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한 열망’을 추적한다. 그 열망의 길 가운데 하나가 ‘꿈의 길’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서나 살자.”(<중세의 가을>) 그 길에서 하위징아가 만나는 것이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인데, 바로 이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놀이 정신’의 중세적 표출이다.

하위징아는 1872년 네덜란드 북부 도시 흐로닝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아랍어를 공부했고, 흐로닝언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어학을 사실상 전공으로 삼았다. 특히 박사과정에서는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공부했고, 산스크리트 문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7년 그는 하를럼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여기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처음 유럽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1905년에 흐로닝언대학, 10년 뒤에는 레이던대학 역사학 교수가 됐다. 수많은 고대어를 공부한 것이 역사학자 하위징아에게는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었는데, <호모 루덴스>에도 그리스·로마·산스크리트 문헌과 단어가 수시로 등장해 논거를 제공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도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머리말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사피엔스’도, ‘(물건을) 제작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파베르’도 인간을 제대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이어 하위징아는 말한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 확신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인 셈인데, 그 계획을 수미일관하게 밀고 나간 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놀이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하위징아는 ‘경쟁’을 제시하는데, 그 경쟁의 성격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의 생활 전체가 그들에게는 놀이, 곧 경쟁으로서의 놀이였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이 경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가 ‘아곤’(agon)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경쟁의 성격을 지닌 것을 모두 경기, 곧 아곤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극단적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장수 칼라노스가 죽자 슬픔을 달래려고 아곤을 열었는데,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아곤 참가자 35명이 현장에서 죽고, 나중에 6명이 더 죽었는데 그중에는 우승자도 들어 있었다.” 하위징아는 이 아곤과 결합된 놀이가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신화·소송·전쟁·정치·상거래에도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입증해간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정신이 19세기에 소멸했음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떨까. 하위징아가 보기에 20세기는 겉보기엔 놀이가 아주 많아진 것 같지만, 놀이 정신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정치에서 놀이 정신이 죽고 ‘유치한 행위’가 판친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고 발호하던 때였는데, 그 현상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 우스꽝스러운 집단행위를 한다”고 썼다. 이 시대는 놀이의 정신에 관한 한 명예의 코드도, 게임의 규칙도 내팽개친 천박한 시대였다. 그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략한 것이 1940년 5월인데 이때 하위징아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변방 도시 더스테이흐로 유폐됐다가 1945년 2월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10. 03. 07.  

P.S. 나에게 <호모 루덴스>는 <중세의 가을>보다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목차를 다시 보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없지 않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이니 거의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고, 그사이에 책에 대한 안목도 달라진 때문일 것이다. 호이징하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책으론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문예출판사, 1994)이 있다. 최근에 나온 버전으론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코의서재, 2008)도 참고할 수 있겠다. 서양미술사학자인 노성두씨는 "나는 이 책을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바꾸지 않겠다"고까지 평했다. 국내서로는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그린비, 2007)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Статьи  по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Homo ludens. Artiklen over de Cultuurgeschiedenis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마침 러시아에 있을 때 호이징하의 책이 양장본으로 새로 출간되어 구입한 기억이 있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두 권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는데, 나머지 책은 여력이 닿지 않았고, 일단 국내에 소개된 책만이라도 구해놓자는 생각이었다. 다시 검색해보니 저렴한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 왼쪽이 <호모 루덴스>의 러시아어 양장본이고 오른쪽이 문고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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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여전히 호모 루덴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01 00:20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연암서가판이다.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인간이 ‘생각하는
 
 
yamoo 2010-07-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성사와 기린원..정말 이 두 출판사의 엔날 리스트를 보면 갖고 싶은 책들이 한보따리입니다..ㅎㅎ 호모루덴스는 저도 까치 출판사본으로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