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절반은 우편으로 부치고도 가방 가득 책을 채워넣어 어제 귀국해 보니 집에는 또 부재중에 배송된 책이 한가득이다. 주문한 책이 많지만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도 있다. 그 중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 삶의 의미라는 커다란 물음>(필로소픽, 2011)은 내가 해제를 쓴 책이다. 지난 연말에 제안을 받고서 '철학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책이라고 하니 새해맞이 '행사'로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밀린 일들 때문에 애를 먹으며 쓴 기억이 있다(행사가 아니라 행군이었다). 알라딘에서는 이미 미리보기를 통해서 읽어볼 수 있지만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제목은 '누가 택시 기사의 질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붙였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명하신 버트란트 러셀 경도 택시 기사가 던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 줄리언 바지니가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다. 당대의 철학자가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라면, 이유는 둘 중 하나겠다. 너무 거창하거나 아니면 너무 어렵거나.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이 그런 종류다. 그렇게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에 ‘빅 퀘스천’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드디어 이 질문을 답할 수 있게 될까? 책을 펼쳐든 독자의 일차적인 궁금증이겠다.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철학의 문제들> 같은 책을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지만, 돌이켜봐도 이 ‘빅 퀘스천’에 대한 러셀의 답변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더 위대한 제자’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인생의 의미’란 문제 역시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일단 중요한 것은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문제를 안고서 끙끙거린다면 노고는 인정할 수 있되 그리 현명한 처신은 아니다. 그런 견지에서 던지는 제안이지만, 책이란 모름지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는 철학 내지는 고집을 고수하는 분이 아니라면 이 책은 ‘무의미함의 위협’을 다룬 10장부터 읽어도 좋겠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도전 내지 위협 들이 어떤 것인지 알면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접근도 좀 더 평탄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란 질문 자체는 인생은 살 만한 어떤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즉 중립적이기보다는 얼마간 ‘편향된’ 물음이다. 정반대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하품을 하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인생은 무의미해!” 물론 그럴 경우 알베르 카뮈라면 대번에 “그럼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런 반응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게 좀 무의미하면 어때?”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대범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스누피처럼. 그러니 혹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하여 그에 대한 대처가 자동반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별도의 궁리를 필요로 한다.   

생각해보면 ‘인생무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게 한국인에게 그런 인생 허무주의적 태도가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의미’란 말이 그렇게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의미’란 단어 조합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한때 영어권 철학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인데, 그들은 가치의 언어들이 실상은 이성적 판단이기보다는 감정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그런 판단에는 합리적 근거를 댈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도덕적 선이나 미적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보편화될 수 없는 주관적인 감정을 엉뚱하게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나 ‘어이쿠!’ 같은 감탄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이란 도대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대상이 아니다. 가령 철학자들이 애용하던 질문 중에 “현재 프랑스왕은 대머리인가?” 같은 게 있다. ‘대머리이다’ ‘대머리가 아니다’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한가?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제 국가인 현재의 프랑스에 ‘프랑스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러니 대머리가 맞다, 아니다란 판단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어불성설이다. 혹 ‘인생의 의미’란 말도 ‘현재의 프랑스왕’과 같은 성격의 조합일까? 이 또한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문하려고 할 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덧붙여, 인생이 설혹 의미를 갖는다고 쳐도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은,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인생의 의미란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반론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왜 어려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지성들이나 성현들조차도 ‘합의’에 이르진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자님 말씀이 다르고, 예수님 말씀이 다르며, ‘너 자신을 알라’라고 훈계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또 다르다. 모두가 한 말씀으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일러주었다면(그야말로 인생의 ‘톱 시크릿’이겠다), 그들의 이름이 제각기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깨닫기도 어렵고 나누는 건 더 어렵다.  

대략 이런 것들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천착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고비들이다. 개인적으론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대목에서 일단 저자 바지니의 솜씨와 역량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먼저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그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할 때 사람들이 어떤 근거를 내세우는가에 주목한다. 보통은 ‘목적’과 ‘방향’과 ‘계획’이 앞세워진다. 그런 게 없다면, 혹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바지니가 보기에 이 전제와 결론 사이에 비약이 있다. 즉 어떤 초월적인 계획이나 목표, 목적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성급하게 부정해버리는 것이 문제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특정의 의미에서만 ‘무의미’하다는 게 바지니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일반화하는 것은 일종의 과장법이요 호들갑에 불과하다.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를 대며 사람이 경박해지거나 시무룩해지는 건 일종의 ‘할리우드 액션’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라는 생각 자체가 난센스라는 주장은 어떻게 반박할까. ‘인생의 의미’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은 인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에 기댄다. 소리가 색깔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 피아노 소리의 색깔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시적인 대답은 기대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을 끌어내긴 어렵다. 하지만 ‘의미’란 말이 어떤 것이 지닌 ‘중요성’을 뜻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생의 의미’가 그런 경우다. 중립적인 관점에선 의미를 갖지 않지만 ‘내 인생의 의미’나 ‘우리 인생의 의미’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 인생의 의미란 말은 인생은 왜 우리에게 중요하며 또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란 물음과 등가이다. 그리고 이런 물음 자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가 인생에 어떤 가치를 두고자 한다면 인생은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란 말이 난센스라고 여기는 이들도 문제를 과장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저자의 주장이 더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그가 ‘성찰하지 않는 삶’을 변호할 때이다. 물론 그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성찰을 통해서만 의미를 궁구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성찰하는 삶’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할 테지만 바지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인식은 지식인의 거만함과 부족한 상상력에 기인한다고 꼬집는다. 대개 ‘인생론’ 비슷한 이름을 단 책을 내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한 가닥씩 자기주장을 펼친 이들은 철학자나 지식계층에 속하는 이들이기 십상이다. 거기에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일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철학적 성찰의 중요성도 그간에 너무 과장됐다고 그는 생각한다.  

‘철학과 인생의 의미’(이 책의 부제다)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엄격하게 철학적 방식으로만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니 일견 자기 모순적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가 저자의 지적 성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엔 철학자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막대한 다수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다. 철학적 성찰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각자는 나름대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노력이 ‘엄격하게’ 철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평가절하될 이유는 전혀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것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위협과 도전이고 또 그에 대한 저자의 대응이다. 종합해보자면, 인생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인 한, 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좋은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의미하고 그 삶을 사는 이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전혀 사고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생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저자는 비록 최종적인 해답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중차대한 문제, 곧 ‘빅 퀘스천’을 꼼꼼하게 생각하는 데 철학적인 성찰이 그래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을 걷어내고 좀 더 명료하고 현명한 대답에 가까이 가는 데 필요한 도움이다. 여기에 이견을 달 수 있을까? 그러한 전제에 동감한다면, 이제 비로소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란 물음을 품고서 저자와 함께 성찰의 여정을 시작해보아도 좋겠다. 장담컨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러셀 경도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거리가 몇 마디쯤은 생길 것이다. 혹은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누가 택시기사의 질문을 두려워하랴!”  

11. 02. 20.  

P.S. 저자 줄리언 바지니의 책은 최근에 나온 <가짜 논리>(한겨레출판, 2011)를 비롯해서 여러 권이 소개돼 있다. 그중엔 '바지니'란 이름으로 검색되지 않는 책도 있는데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7)이 그런 경우다(저자가 '줄리안 바기니'라고 돼 있다). <빅 퀘스천>과 같은 성격의 책으론 존 코팅엄의 <삶의 의미>(동문선, 2005)도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인생의 의미>도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옥스포드대학의 '아주 짧은 입문서' 시리즈의 하나로 다시 나온 책이다. 사실 바지니의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도 이 시리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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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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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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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02-2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와 삶이 의미가 있다 믿는다면 세계와 삶의 저자 Author를 믿는다는 뜻이겠지요. 비트겐슈타인도 세계의 의미를 믿는다는 것은 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자꾸때리다 2011-02-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공책>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신(神)과 삶의 목적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나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삶의 의미, 즉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이것과 신과 아버지의 비유가 서로 연관된다.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을 세계의 사실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건 선생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자꾸때리다 2011-02-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이제는 텍스트 바깥의 저자를 믿는 시대가 아니지만...

faai 2011-02-2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Atheism]이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로 번역된 적이 있었군요;; 줄리안 바기니라니 생각도 못 했다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