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위해 쿤데라의 <커튼>(민음사, 2008)을 읽다가 작년 시사IN에 신형철 평론가가 실은 서평기사가 생각이 나서 찾아다 옮겨놓는다. 책에 대한 소개로 간명하면서도 유익하다.  

시사IN(08. 09. 05) ‘先해석’의 커튼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

밀란 쿤데라(1929~)는 <농담>(1967)에서 <향수>(2000, 원제:무지)에 이르는 10여 권의 작품을 쓴 소설가이지만 통찰력 넘치는 고급 에세이의 필자이기도 하다. 체코어로 쓴 초기작까지 포함하면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에세이집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인 <소설의 기술>(1985, 국역본 1990)과 <배반당한 유언>(1992, 국역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1994)은 이미 국내에 소개됐다. 앞의 책이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재출간을 거듭하는 모습과 뒤의 책이 엉뚱한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절판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에세이집을 고대했다. 기다리던 그 책, <커튼>(2005, 국역본 2008)이 나왔다.      



우리는 왜 그의 에세이를 아끼는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통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 통찰은 “소설만이 발견하고 말할 수 있는 것”(101쪽)에 대한 깐깐한 사색으로 이어지고, 이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왜 진짜 소설인가’를 입증하기 위한 노련한 변호가 된다. 그 변호의 방법론은 “나름의 사적인 소설사”(92쪽) 만들기이다. 그의 에세이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면 우리는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라는 위대한 선구자에서 시작해 18세기의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과 19세기의 플로베르 등을 거쳐 20세기 초의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브로흐 등을 지나 20세기 중반 폴란드의 곰브로비치를 찍고 밀란 쿤데라 자신에 이르는 하나의 소설사를 얻게 된다(모든 위대한 작가는 자기만의 문학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인가?

서정성의 덫에서 벗어나야 ‘진짜 소설가’

그에 따르면 ‘진짜’ 소설가는 서정성의 덫에서 벗어날 때 탄생한다.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는 시기, 자신의 고유한 영혼에 대해 말하려는 욕망에 들려 있는 시기가 바로 “서정적 시기”다. “반(反)서정주의로의 개종은 소설가의 이력서라면 반드시 들어 있는 기본 항목이다.”(124쪽) 개종 이후 숙고해야 할 것은 “나는 항상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고자 했다”(86쪽)라는 플로베르의 말이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은 곧 비도덕적이다.”(87쪽) 뒤집어 말하면,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소설의 임무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의 모더니즘과 더불어 소설은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선 사실로서의 역사로부터 독립했다. 소설가가 관심을 갖는 역사는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실존의) 뜻밖의 가능성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97쪽)일 뿐이다. 문제는 역사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실존의 수수께끼이므로, 필요하다면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적 개연성도 포기해야 한다. 예컨대 카프카가 그랬다. “카프카가 경계를 뛰어넘은 이후로 비개연성의 국경은 경찰도 세관도 없이 영원히 열려 있다.”(102쪽) 

그 실존의 수수께끼를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헤르만 브로흐와 로베르트 무질의 “생각하는 소설”(98쪽)이 그 대답이 된다. 그들은 과학이나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색을 소설 속에 통합하는 것, 그리고 아름답고 음악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작품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99쪽) 작업을 해냈다. 이 여담(餘談, digression)의 글쓰기를 통해 소설은 ‘소금장수 이야기’를 넘어서고, 결코 영화가 병합할 수 없는 소설만의 고유한 영토를 얻는다(그 자신 분개하며 말한 대로, <프라하의 봄>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전혀 별개의 두 예술이다). 바로 이것이 밀란 쿤데라 소설의 가장 매혹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가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21쪽)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선(先)해석의 커튼”(127쪽)을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나이 이제 팔순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일의 가치에 대한 변함없는 이 확신과 애정! 그러고 보면 이 해박하고 우아하고 유쾌한 할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ps.이 책을 읽고 나면 브로흐의 <몽유병자들>(1932-)과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1930-)를 읽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전자는 다행히 작년 말에 새 번역본이 나왔으나, 후자는 그간 번역된 바 없고 여전히 별무소식이다.)  

09. 10. 06.  

P.S.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과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커튼>뿐만 아니라 <소설의 기술>에서부터 쿤데라가 줄기차게 격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나도 두 작가의 이름을 쿤데라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참고로,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라는 말은 쿤데라가 브로흐를 인용한 것이다. 무질의 대작은 근간 예정이라는 소문이 몇년 전부터 나돌았는데, 올해도 그냥 넘어가는가 보다. 현대 소설뿐만 아니라 쿤데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모쪼록 빨리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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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0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마음속의 이상형을 전문(작)가는 눈앞에 실체(문자)화하여
보여주는 능력의 소유자군요. 우리(독자)의 마음은 어떤 전문가이든
우리가 바라는 이상형을 제시해주면 그뿐일까요?
과연 전문가입니다.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인식하는 범접할 수
없는 인지능력의 소유자, 그 인지력은 날카롭고 민감한 감각 수용체를
경유하여 최고의 조합력을 발휘합니다.
우리의 지루함에 해방구를 만들어 주는 전문(작)가는 문자를 휘두르는 도사,
우리의 기대 범위를 비개연성까지 확장시켜주는 전문가,,, 작가는 '분야의
경계'를 넘어 통합시킨 생산물(책)로 우리를 몰입시키군요.

로쟈 2009-10-07 19:59   좋아요 0 | URL
쿤데라의 말은 저도 자주 인용하고 또 써먹은 말입니다. <소설의 기술>에서부터 강조해온 것이죠...

수유 2009-10-0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서평을 보고 책을 다시 읽는다? 지하 내려가서 <커튼> 들고 올라와야겠네요, 요즘은 가벼운 소설들도 건들기 힘든 지경인데..

로쟈 2009-10-07 19:58   좋아요 0 | URL
오늘 강의할 때 참고자료로 썼습니다. 계속 일이 많으신가 보네요.^^;
 

필요 때문에 기시다 슈의 <게으름뱅이 정신분석>(깊은샘, 1995)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뒤에 있는 것'을 읽다가 떠올린 책은 지난달에 나온 박규태 교수의 <일본정신의 풍경>(한길사, 2009)이다. 저자가 과거에 기시다 슈의 <성은 환상이다>(이학사, 2000)를 옮긴 적이 있어서다(아울러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문예출판사)도 우리말로 옮겼다). 믿을 만한 일본통의 저작이기에 챙겨놓으려고 한다. 저자 자신도 일본을 이해하는 데 곤란을 느낀다고 하지만, 다양한 고전에 대한 독해만으로도 요긴해 보인다.   

경향신문(09. 09. 26) 모순 ‘가깝고도 먼 나라’의 사유방식 

누가 처음 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에 대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비유는 현재까지도 한·일관계를 묘사할 때 매우 적절하게 사용된다. 북한을 제외하면 일본은 한국에 가장 가까운 나라다. 물론 여기서 ‘가깝다’는 말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한다. 양국의 감정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도쿄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한양대에서 일본언어문화학 전공 교수로 일해 일본에 대해 일반인보다 많이 안다고 할 수 있는 저자 역시 “일본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때때로 알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대해 갖게 마련인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근본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즉,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구분하는 한국적 사유방식과 달리 “논리적 사유와 비논리적 감정의 영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일본의 전통적 사유방식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양가적(ambivalence·모순, 반대 감정 병존) 속성’이라고 명명했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가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1946년)에서 모순되는 양극단에 대해 모순을 느끼지 않는 이중적인 성격을 일본인이 지닌 특성의 하나로 거론했다. 저자는 베네딕트의 이러한 고찰을 확장시켰다. 모순을 모순으로 느끼지 않고 병존시키는 일본인의 내면적 풍경을 가미(神), 사랑(愛), 악(惡), 미(美), 모순(矛盾), 힘(力), 천황(天皇), 초월(超越), 호토케(佛) 등 10개의 창을 통해 들여다봤다.

‘일본정신’을 상징하는 책으로 여겨지는 <고사기>를 보자. <고사기>는 창세부터 일본 황실의 성립과정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리고 있다.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불리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등장함은 물론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질투와 욕정 등 ‘인간적’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듯 <고사기>에 등장하는 신, 즉 ‘가미’들은 성욕과 권력욕, 복수심 등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의 민족신앙인 ‘신도(神道)’ 역시 가미를 인간과 질적으로 상이한 절대자로 여기기보다는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일본의 인간주의적 가미 관념에서는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추상적 이념이나 보편적 법칙 또는 불변성이나 영원성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릴 여지가 없다”고 한다. 일본정신에서 진리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현실 그 자체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상대주의는 양가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일본문화의 핵심적 특질이다. 대표적인 일본 불교 교단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창시한 신란(親鸞·1173~1262)이 설파한 선악관념 역시 상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신란은 심지어 “나는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불가지론으로까지 나아갔다.

일본인들이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후쿠자와는 제자들에게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서양 격언을 소개하며 실용적 학문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시켰지만, 악명높은 ‘탈아론(脫亞論)’으로 중국과 조선 침략의 논리적 기반을 제시한 지독한 패권주의자이기도 했다. 후쿠자와에게 “‘펜의 힘’과 ‘칼의 힘’은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여기에는 모순되는 두 개의 힘이 마치 모순이 아닌 것처럼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이와 같은 일본의 전통적 사유방식이 대단한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 단점으로 나타난다는 시각을 깔고 있다. 지독한 상대주의·현실주의·현세중심주의는 외래적인 것들을 껍데기만 남기고 일본적인 것으로 재빨리 변형시키는 저력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저지른 침략이나 현대 일본이 안고 있는 모순에 무감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블랙홀로도 작용했다.

저자는 일본정신을 들여다보는 10개의 창에 접근하는 통로로 <고사기> <겐지 이야기> <국화와 칼> <가면의 고백> 등 일본에 대해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10권의 책을 동원했다. 따라서 제목만 귀에 익을 뿐 직접 읽어보지 못한 유명한 책들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다이제스트로 이 책을 읽어도 쓸모가 있다.(김재중기자) 

09. 10. 05.  

P.S. 인간은 성본능이 망가진 동물이며 이에 따라 여러 가지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기시다 슈의 '성적 유환론'은 좀 오버다 싶지만(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게으름뱅이 정신분석>은 여러 모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더불어 유익했다. 미시마 유키오만 하더라도 매우 강압적인 조모와 부모,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성장한 독특한 환경으로 인하여 실재감을 갖지 못하는 정신병적 인격구조를 갖게 됐고, 그의 창작활동은 실재감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 기시다 슈의 해석이다.  

기시다에 따르면, 미시마는 자기 속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못 참아 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일부를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남의 손에 도둑 맞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가 작품 <가면의 고백>에서 갓태어났을 때의 목욕물이 기억난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자기에 관한 일로 자신은 모르고 타인만이 알고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찾고자 했던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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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06 00:30   좋아요 0 | URL
서양의 '이분적 사고'가 아닌 일본은 '신도'의 현세주의를 바탕으로 한 상대주의, 현실주의가 팽배하군요. '마시마'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강한 자존의식 덕에 '사무라이정신' 이 나올법 한데요. 또한 지독한 완벽주의(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성장후 죽기전까지)적 사유로 봐 '한국정신'(?)과는 다를 듯합니다. 과연 '한국정신'은 뭘까 싶습니다.

로쟈 2009-10-06 19:34   좋아요 0 | URL
요즘은 '먹고사니즘'이라고 하잖아요.^^;

드팀전 2009-10-06 09:22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고진이 <역사와 반복>에서도 다른 측면에서 거론하고 있는 내용이어서 제게 시의적으로 흥미롭군요. 미시마 유키오의 근대적 절대지에 대한 강박이 그가 '자결'이란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고진의 이야기였지요. 반면 오에는 그걸 안고 늙어 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라고.. 독특한 비유였던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0-06 19:33   좋아요 0 | URL
고진의 것을 포함해서 미시마 유키오론으로 인상깊었던 두 글이었어요...

perky 2009-10-06 13:12   좋아요 0 | URL
박규태 교수님, 언젠간 책 하나내지 싶더랬는데..전 이분 참 좋더라구요. 글 번역(황금가지 등)도 깔끔하게 잘하고 지식도 풍부하고..여러모로 장인정신이 느껴지는..'국화와 칼'도 저는 이분이 번역한 걸로 갖고 있지요. 조만간 저 책[일본 정신의 풍경]도 사야겠어요. 제목부터 근사하군요! (제가 요즘 일본문화에 푹 빠져서리..)

로쟈 2009-10-06 19:32   좋아요 0 | URL
네, 책이 아주 충실합니다. 교재로도 좋을 듯해요...

카스피 2009-10-06 10:54   좋아요 0 | URL
마사미 유키오는 천왕 복귀를 부르짖으며 자위대 쿠데타를 설득학다 실패해서 할복 자살한 그 문학가를 말하는 것인가요?

로쟈 2009-10-06 19:32   좋아요 0 | URL
네, 기사의 마지막 사진이 미시마입니다...
 
사회언약론자가 꿈꾸는 사회

한국출판문화상 50년을 기념하여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책, 미래와의 대화'의 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나도 몇 달 전에 서평을 쓴 적이 있는 조너선 색스의 <사회의 재창조>(말글빛냄, 2009)를 다루고 있다. 색스는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재창조를 주창한다. 그의 주장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우리도 다문화주의와 '호텔로서의 사회'가 사회적 진보의 지향점이 될 수 있을지 한번 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일보(09. 10. 01)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2005년 7월 7일 런던 중심가의 출근시간대 버스와 지하철에서 발생한 연쇄 폭탄테러.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700명이 넘게 부상한 이 테러는 영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테러 용의자 무슬림 청년들이 해외의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아니라,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아온 청년들이었기 때문. 이후 영국에서는 무슬림들에 대한 보복 테러가 이어졌고, 무슬림들은 도심지 건물에 '백인 접근금지'라는 팻말을 내걸기도 했다.

이 사태는 다양한 인종·종교 집단의 문화를 인정하겠다는 영국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정책의 적실성에 대한 논란을 가열시켰다. "우리는 몽유병자처럼 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트레버 필립스 영국 평등인권위원회 의장의 발언은 당시 영국사회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한국 역시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유학생 등 체류 외국인이 이미 2007년에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다문화사회로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류학, 사회학, 여성학을 중심으로 다문화주의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정부 각 부처는 다문화주의의 이름 하에 다양한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전통이 강한 서구사회는 급격한 문화적 변동의 과정에서 어떻게 다양한 구성원들을 통합해 갔을까. 갈등은 없었을까. 



종교 갈등으로 인한 문명충돌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타자와의 대화를 강조한 <차이의 존중>(2002)의 저자인 영국 철학자 조너선 색스(61)는 <사회의 재창조> (원저 2007년ㆍ2009년 말글빛냄 번역출간)에서 1970년대 이래 미국, 영국, 호주 등 서구사회의 오랜 독트린이었던 다문화주의의 오류를 진단하고, 날로 높아지는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다문화주의가 여전히 사회통합 원리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유대교 지도자(랍비)이기도 한 색스는 "오늘날 다문화주의는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왔다"고 선언한다.

다문화주의의 기원
흔히 미국사회를 나타내는 '도가니'(melting pot)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이민자나 소수집단의 문화를 새로운 문화에 용해시킨다는 '문화동화론'은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하나의 독트린이다. 그러나 흑인들의 민권운동(미국), 대규모 이민 유입(유럽) 등 격렬한 사회변화는 1970년대부터 서구사회로 하여금 다문화주의 정책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이민자 집단이 그들만의 학교와 사회복지기관을 설립하도록 국가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공립학교는 소수집단에 연고를 둔 교사를 채용했다.

조너선 색스의 표현대로 "역사상 최초로 이민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민자에 적응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20세기초 경험한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한 민족주의에 대한 극단적 반감 등도 다문화주의를 꽃피게 했다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그러나 민족적, 종교적 소수집단이 사회 공동의 언어와 정치체계를 공유하면서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는 전면에 부상했지만, 그와 동시에 공동의 사회적 목표 안에서 개인을 하나로 묶어주던 도덕적 유대의 끈도 끊어지기 시작했다. 종교지도자이기도 한 지은이 색스가 보기에 도덕성의 붕괴는 애초 다문화주의의 목표였던 공동체의 '공존' 대신 '분열'을 가속시키는 촉매가 됐다.

■ 실패한 '호텔로서의 사회'
색스는 이 책에서 흥미로운 비유를 통해 다문화주의의 실패 원인을 뜯어본다. 그는 다문화주의 사회를 '호텔로서의 사회'라고 비유한다. 투숙객들은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다른 호텔을 찾을 수도 있다. 문제는 투숙객들이 이 호텔에 대해 아무런 애착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투숙객들과 얼굴을 익히고 한담을 나눌 수도 있지만, 그곳에 뿌리 내릴 수는 없다. 사회로 말하자면 이는 어떤 주류문화도, 어떤 국가적 정체성도 없는 사회다.

도덕적 상대주의의 횡행, 규칙·훈육·권위·자기절제가 결여되어 있는 문화, 불안정성의 증가로 규정되는 이런 정체성의 공백기에 사회구성원들은 민족적 정체성 혹은 종교적 정체성 같은 '보다 안전한 과거의 흔적'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려 든다.

색스는 이를 '내적 도피'라고 설명한다. 비(非)유대학교에 자녀를 보낼 때 별 걱정을 하지 않았던 일반 유대 가정들이 최근에는 유대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다른 종교권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적 도피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전통적인 정체성의 유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있어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들 자신이 '함께하는 모두'로 여기지 않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 혹은 종교 공동체가 사회보다 우위에 서고 국가정체성이 약화되는 시대는 색스에 따르면 '야만과 암흑'의 시대다. 다문화주의는 오히려 사회의 통합이 아닌 분리를 야기시켰다는 점, 차이를 줄이는 대신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다문화주의는 유효한가
그렇다면 과거처럼 단일문화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색스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사회에 충심을 기울이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양립불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 모델은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the home we built together) 모델이다. 이 모델은 모든 사람이 외부인으로 전락하는 '호텔 모델'과는 달리 구성원들이 "나는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체적으로 인종적·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구성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공동목표에 기여하는 사회다.

주류문화는 타문화를 자극하는 무의미한 언동을 금하도록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해야 하고, 소수문화는 주류문화의 전통을 존중할 책임을 의식하는 사회다. '동화없는 통합'과 '조화로운 다양성'은 이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다.

이현정 한국다문화센터 소장은 "평등하고 개방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공동체가 합의해서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색스의 주장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며 "다만 그가 대안 모델을 설명하면서 그 비유가 유대교의 것을 따르는 등 특정 종교의 원리를 보편화할 때 발생할 문제점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비록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서구사회의 실패를 분석한 색스의 이론은 본격적 다문화주의 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한국사회에도 참고할 부분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다문화주의 이론이나 정책과 관련, 이태주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이민자 집단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 며느리가 되라'고 하는 식의 동화정책에 가깝다"며 "위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 문화적·사회적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화서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는 "다문화주의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정책을 그저 벤치마킹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며 "이민자들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자생적으로 변화하는지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해 정책을 추진해야 하며, 자칫 문화제국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왕구기자)  

"다원주의는 방관적 존중, 다문화주의는 적극적 존중"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다원주의(pluralism)에서 발전한 이론이다. 다원주의가 각 문화를 인정하되 각 문화가 알아서 스스로를 존중하라는 다소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다문화주의는 문화간의 적극적인 존중을 중시한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사상가인 비쿠 파렉(74) 영국 헐대 교수의 <다문화주의 다시 보기>(2002)는 다문화주의 이론의 대표 저서다. 문화 간의 적극적 소통이 그 사회 전체의 문화를 풍부하게 만든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고유문화를 방치할 경우 문화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그들의 기본권이 위협 받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이민자 문화를 보호·발전시키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담고 있다.   

정치철학자인 찰스 테일러(78) 전 캐나다 맥길대 교수는 <다문화주의>(1994)에서 '존중'의 문화적 관계를 강조하며, 서구문화이건 제3세계 문화이건 상호존중에서 출발해 문화적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치고 있다.

윌 킴리카 캐나다 퀸스대 교수의 <다문화주의 시민권>(1995)은 다문화주의적 감수성을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한정하지 말고 세계적 단위까지 확대해야 한다며 시민의식의 제고를 주장하고 있다.

조너선 색스는 누구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 영연방 유대교 최고 지도자로 랍비 학교인 런던유대인대에서 랍비 서품을 받았다. <차이의 존중> 등 문화간 차이의 극복에 관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2004년 <차이의 존중>으로 종교 부문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했으며 앞서 1995년에는 유대인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킨 공로로 예루살렘상을 받았다. 현재 영국 유대교협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이왕구기자) 

09.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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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라의 생각
    from tzara's me2DAY 2009-10-05 10:04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http://ow.ly/sEZu 조너선 색스의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 이 모델은 모든 사람이 외부인으로 전락하는 '호텔 모델'과는 달리…인종/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구성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공동목표에 기여하는 사회다
 
 
philocinema 2009-10-03 10:13   좋아요 0 | URL
'차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이다'라고 되뇌이며 살고 있습니다만,

위의 문구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했는데도,
자연스레(부지불식간에) 문구대로 살아가고 있는 제가 되고 싶습니다.

로쟈 2009-10-03 10:27   좋아요 0 | URL
차이에 대한 존중과 방임도 다른 것이란 걸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호텔로서의 사회' 모델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어요...

펠릭스 2009-10-05 22:25   좋아요 0 | URL
구성원간에 공동목표을 만든다면 어떤 모델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재 여성(이민자):남성(한국인), 남성(이민자):여성(한국인) 결혼이민자의
구성비 국내 다문화정책수립에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국내에 취업중인 산업연수생(?)도 함께,,,
* 최근 소설 '도가니(melting pot)'였군요.

로쟈 2009-10-05 22:23   좋아요 0 | URL
그게 문제이긴 한데요. 최근에 '공화주의'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최소한의 합의(언약?)를 마련하는 게 중요할 듯해요...

펠릭스 2009-10-05 22:28   좋아요 0 | URL
예,,들어본 것 같습니다.
 

‘한국경제대안 시리즈’에 이어서 우석훈의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네 권의 시리즈 가운데, <생태요괴전>(개마고원, 2009)와 <생태 페다고지>(개마고원, 2009) 두 권이 우선 1차분으로 나왔는데,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2009)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세 권이다. 언론의 아무런 조명도 없이 '조용히' 출간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작전'을 방불케 한다. 조용히 내딛는 걸음이지만 당차면서도 확고해 보인다.     

배송도 그렇고 책은 연휴가 지나야 보게 될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소개와 목차를 통해 대강의 취지와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생태요괴전>의 부제인 '넓게 생각하고 좁게 살기'의 풀이가 이렇다.

과시적 욕구로 가득 찬 본능, 혹은 마케팅에 의해 급조된 욕망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넓게 살기’다. 큰 아파트, 큰 건물, 대형 승용차 같은 것들이 이런 본능 혹은 욕망이 지시하는 방향이다. ‘좁게 살기’는 이와 반대되는 삶의 상징적 표현이다. 예전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망했다. 세상은 넓지 않다.  

본능이 지시하는 과시적 소비의 욕구를 이기고 좁게 살려면 생각을 아주 많이 해야 한다. 한마디로 ‘넓게 생각하기’가 가능해야 좁게 살 수 있다. 넓게 생각하기란 어떤 것인가? 각자의 삶의 영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좁게 살기’도 해석의 여지가 많다. 적게 먹는다고 라면을 주식으로 먹거나 햄버거 위주의 식사를 하는 것은 ‘싸게 살기’이지, ‘좁게 살기’는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좁게 살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왜 너는 생태적으로 살지 않니?”라고 야멸치게 쏘아붙이며 잘난 척하라고 좁게 살기를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높은 빌딩, 큰 차, 열관리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해야 개발요괴의 전성기를 극복할 수 있고, 다가오는 ‘희소성의 시대’에도 한국 경제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와 문화, 경험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들임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247-8쪽)  

이 대목을 읽고 서가에서 빼온 책은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2002)와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이다. 싱어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언급하는 대목이 생각나서다. '독서와 문화, 경험'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라고 할 때, 특히 이런 책들은 '도구 중의 도구'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결국 돈이 문제다'(85-88쪽)라는 절에서 싱어가 인용하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돈은 '분리의 보편적인 기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과 힘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추한 남자라도 돈이 있으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둘 수 있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돈은 우리를 진정한 인간성에서,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서 분리시킨다."(마르크스의 말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참조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의 이러한 생각을 입증해주는 심리학 실험을 싱어가 소개하고 있다는 점. 개인적으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의 하나였는데, 실험 내용은 이렇다. 두 대조군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한쪽에는 과제를 주면서 돈에 대한 문구를 중간중간 들려주거나 옆에 돈더미를 올려놓거나 각종 화폐가 나타나는 스크린세이버를 볼 수 있게 한다(이들을 '머니그룹'이라고 불렀다). 물론 대조군 피험자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머니그룹이 다음과 같은 행동 특성을 보였다. 

-어려운 과제를 주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도움을 청하기까지의 시간이 더 걸렸다. 
-각자 의견을 갖지고 다른 참여자와 이야기하게 자리를 옮겨보라고 하면, 의자 사이의 거리를 가장 멀리 떨어지게 놓고 앉았다.
-남들과 함께하는 오락보다 혼자서 하는 오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을 도우려는 자세가 덜했다.
-실험 참가 수고비로 받은 돈의 일부를 기부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장 적게 기부했다.
 

즉 두드러질 정도로 이기적인 행동양식을 보인 것인데, 이런 면은 다른 사람의 과제 수행을 돕는 일에 통제 집단이 평균 42분을 썼지만 머니그룹은 25분만 썼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사회에서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의존도가 줄고, 개인은 보다 자족적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돈은 개인주의를 북돋우는 한편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넓게 생각하기'의 한 측면은 '돈에 대해 덜 생각하기'이고, '좁게 살기'에 한 방식은 '돈에 덜 의존하며 살기'이다. 혹은 거꾸로 '돈 안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살기'이다(이런 서재질도 한 가지 예다). '돈이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의 목록을 늘려가는 것, 그것이 반자본주의적 실천이다. 물론 그런 실천은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란 말을 인사로 주고받고, 부동산과 재테크가 가족의 최대 관심사인 사회에서는 조롱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시대는, 우석훈의 표현을 빌면, '개발요괴들'의 시대였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 불황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그 시대는 끝났다, 혹은 끝나가고 있다.   

돈은 우리에게 안락과 편익을 제공해주지만, 더불어 확실한 건 우리가 또다른 지구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인류의 행복도, 영혼의 구원도 역시나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해서, 필요한 건 방향전환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이렇게 비트는 건 어떨까. "돈을 목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수단으로서도 대우하라." 아주 당연한 요구이지만, 물신주의와 성장신화가 권력을 잠식하고 우리의 의식을 세뇌하는 시대인지라 새삼스럽게 들린다.  

아, 돈은 한가위 보름달도 살 수 없다!..  

09.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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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0-03 22:13 
    우석훈의 생태경제학 시리즈 출간 시작 — via 로쟈
 
 
2009-10-03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3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ilocinema 2009-10-03 09:54   좋아요 0 | URL
우석훈님의 경제대안 시리즈를 주위분들에게 선물해가며 같이 읽었던 기억이 그리 멀지 않은데,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출간되었군요! 여러권 사서 주위분들과 나누어야 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석훈님의 책은 혼자 읽고 지식을 흡수하는 책이라기보단 여러 사람이 책을 읽고 삶이 변화하여 실천이 필요한 책이니까요!


로쟈 2009-10-03 10:28   좋아요 0 | URL
네, 많이들 읽으면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올 수 있겠죠. '녹색 성장'이란 말의 허울도 되새겨볼 수 있겠구요...

무해한모리군 2009-10-03 12:4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아니었으면 출간된줄 몰랐겠네요. 어서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한가위 잘 보내세요.
싱글은 게으르게 뒹굴뒹굴

로쟈 2009-10-03 22:09   좋아요 0 | URL
신간 소식이야 검색만 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구요. 유의미한 책이 제 때 나와주어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연휴 잘 보내시길.^^

indipia 2009-10-05 20:02   좋아요 0 | URL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생태와 교육을 주제로 우석훈님이 좋은 책을 쓰신것 같네요. 읽을책이 저만치 밀린터라 근신하고 있었는데,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인 생태와 교육이라니..얼렁 사야겠어요. 그나저나 댓글달기 잘안하는데, 실천대목에서..아차 싶어 댓글달아요 ^^

로쟈 2009-10-05 20:4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댓글은 가끔 달아주셔도 좋습니다.^^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의 갑론을박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미국 작가 샐린저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루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 완독했는데, 예전에는 읽다가 그만 둔 책이었다. 작품의 배경은 크리스마스 즈음이지만, '호밀밭'이란 제목이 10월을 연상하게 해서 고른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소개는 이렇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은 뉴욕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비틀즈의 광적인 팬으로 알려진 채프먼이 레논을 암살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와 자신을 동격화하며, 범행 뒤에도 도망가지 않고 이 책을 꺼내 읽었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거침없는 언어, 선정적 소재로 출간되자마자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샐린저 현상’이라 불릴 만큼 채프먼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화제를 모았다. 이번 시간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방황하는 10대의 눈에 비친 위선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살펴보자. 



고교 독서평설(09년 10월호) 순수를 지키려는 젊은이의 방황

샐린저 현상 불러일으킨 세계적 베스트셀러
베일에 가려진 은둔형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 )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단지 ‘1950년대 미국 대학생들의 경전’으로만 기억되는 작품이 아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함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작가가 40년 이상 절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지지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600만 부가 팔려 나간 이 작품의 인기는 ‘샐린저 현상’, ‘샐린저 산업’이란 말까지 만들어 냈을 정도인데, ‘샐린저 현상’이란 독자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끼고 다니면서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 홀든과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고, ‘샐린저 산업’은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상업적 성공을 가리킨다. 이러한 ‘샐린저 현상’과 ‘샐린저 산업’이 작품이 출간된 지 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요인은 무엇일까? 주인공 홀든이 현실 속 인물이었다면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일 테지만, 오늘은 예전 그대로의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는 열일곱 살의 홀든을 만나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주인공과 닮은 샐린저의 청소년기
다들 알다시피 홀든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말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 제일 먼저 듣고 싶은 것은 내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어떻게 구차하게 보냈으며, 또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모는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따위일 것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카퍼필드식의 시시껄렁한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입에 담고 싶지 않다.” 이런 홀든의 태도는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기피했던 작가 샐린저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데, 몇몇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참고삼아 그의 삶을 살펴보자.  

샐린저는 1919년에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류·치즈 수입업자로 많은 돈을 번 덕분에, 그의 가족은 뉴욕의 고급 주택가에 살며 경제 공황 시대에도 중상류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2년 샐린저는 맨해튼의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하지만 낙제를 하는 바람에 1년 만에 그만두고, 아버지는 그를 펜실베이니아의 군사 학교로 보냈다. 이후 뉴욕대를 중퇴한 그는 어시너스 칼리지와 컬럼비아대에서 처음으로 문예 창작 수업을 받았다. 

샐린저가 본격적인 창작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건 1939년,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한 창작 강좌에 등록하면서부터다. 1940년에는 처음으로 단편 「젊은이들」을 발표하면서 차츰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샐린저는 전쟁에 참가하여 4년간 군 복무를 했다.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전역한 그는 마침내 1951년, 10년 동안 준비해 온 장편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했다. 주인공의 거친 언어와 반항적인 내용 때문에 초기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에 페이퍼백이 나오자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은 물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약 젊은 세대의 ‘바이블’이 되었고,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도 젊은이들이 이 책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꿈꾸며 방황하는 청춘
윌리엄 포크너(1897~1962)조차도 ‘당대 최고의 작품’이라고 치켜세운 작품이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찍부터 ‘금서’로 낙인찍힌 소설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학교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 성적 또한 부진하여 낙제당하기 일쑤인 주인공 홀든의 모습이 청소년 독자들에게 전혀 모범적이지 않다는 게 일부 교사와 어른들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어떤 조사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홀든은 ‘빌어먹을’이란 욕설을 245번이나 사용한다. 더욱이 조금 덜 심한 욕설까지 포함하면 785번에 이른다고 하니, ‘청소년 권장 도서’로서는 부적합하게 여겨졌을 게 당연하다. 흡연과 음주, 매춘 장면의 묘사와 동성애, 성도착(변태) 등에 대한 언급 역시 자녀를 둔 어른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퇴학을 당한 뒤에 동생 피비를 만나려고 부모 몰래 밤늦게 집으로 찾아온 홀든에게 피비조차도 이 말을 반복하지 않는가. “아빠는 오빠를 죽이고 말 거야.” 

홀든은 피비가 아직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무척 아끼지만, 퇴학당한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피비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이유야 많단다. 그 학교는 내가 다닌 학교 중에 제일 똥통 학교야. 바보들이 우글거리는 학교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오빠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야?”, “오빠는 어느 학교든 다 싫어해. 오빠가 싫어하는 것은 백만 가지는 될 거야. 그냥 싫어하고 있어.” 

한 가지라도 좋아하는 것을 말해 보라는 피비의 물음에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건,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 않기 위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제임스 캐슬’이란 아이와 자신의 죽은 동생 ‘앨리’ 정도다. “누가 죽었다고 해서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순 없지 않니?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라는 게 홀든의 주장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지키려 하는 ‘순수한 세계’가 현실보다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걸 암시해 준다. 

작품의 표제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 역시 그러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장래의 꿈을 말해 보라는 피비의 닦달에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 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벼랑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벼랑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요컨대 아이들이 놀다가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 낙제생 홀든의 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에서 ‘벼랑’에 직면해 있는 인물은 그 자신이며, 파수꾼이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보호해 줘야 할 인물도 바로 홀든이다

이분법적 선택과 판단을 뛰어넘어
홀든은 여러 번 배에 총탄을 맞은 배우의 연기를 흉내 내는데, 그 연기는 ‘흉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홀든이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의 추천을 받아, 어른 행세를 하며 매춘부를 방에 들이는 장면을 보자. 홀든은 매춘부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처음에 약속한 금액인 5달러를 지불하지만 여자는 10달러를 요구한다. 홀든이 거절하자 그녀는 엘리베이터 보이와 함께 다시 찾아와 완력으로 5달러를 더 갈취해 간다. 홀든은 욕설을 퍼붓다가 얻어맞기만 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혐오하는 동시에 두렵기도 한 현실에 홀든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복수, 단 ‘상상 속의 복수’다. 홀든은 피 흘리는 채로 권총을 들고 엘리베이터 보이를 다시 찾아가, 겁에 질려 애원하는 녀석을 무자비하게 쏘아 죽인다. “그러고는 전화로 제인(홀든의 첫사랑)을 오게 하여 내 배에 붕대를 감게 한다. 내가 계속 피를 흘리는 동안 제인은 내게 담배를 물려 주는 장면을 상상의 화면에 그려 본다.” 

물론 이것은 홀든이 많이 보았을 법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 역시 “영화란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속 현실은 ‘연기’이고 ‘가짜’다. 다시 말해 ‘속임수’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 선택이 아니라면, 홀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은 ‘자살’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자살이었다.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땅바닥에 떨어진 순간 누군가가 와서 내 시체를 덮어 준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정말 투신자살을 했을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시체를 구경꾼들이 내려다볼 것이 혐오스러워, 결국 자살을 결행하지는 못하지만. 

‘복수’와 ‘자살’, 두 가지 선택지에는 공통적으로 홀든 자신을 관찰하는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이 관찰자의 시선은 두 가지 양식을 가질 수 있다. ‘구경꾼의 시선’과 ‘파수꾼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홀든이 기대하는 건 ‘파수꾼의 시선’이다. 동생 피비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한 뒤에, 홀든은 예전 학교의 영어 교사였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전화를 걸고 찾아간다. 앤톨리니 선생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인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홀든은 앤톨리니가 자신이 만난 선생 가운데 제일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친구 제임스 캐슬을 안아 올려 준 이도 앤톨리니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말 그대로 벼랑(창문)에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구해 줄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델이다. 그는 홀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 세상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라고 정확하게 진단 내린다. 홀든은 이런 상황에서 주위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것을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지레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성급한 판단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의 작문 재능을 인정하면서, 일단 가고 싶은 길이 분명해지면 우선은 학교로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또한 홀든처럼 정신적 혼돈과 고민을 겪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들이 남긴 고뇌의 기록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충고도 보탠다. “장차 네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네게서 배울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한 정신 분석학자의 말을 빌려서 앤톨리니 선생이 홀든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적 복수’와 ‘자살’이라는 홀든 식의 이분법적 선택을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안은 아직 홀든의 몫이 아니다. 

홀든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앤톨리니 선생이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고는 경악하여 바삐 짐을 챙겨 나선다. 그가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이것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홀든만의 섣부른 판단이다. 날이 새자 홀든 스스로도 자신의 판단이 성급한 게 아니었을까 염려한다. 앤톨리니 선생은 단지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어루만졌을 뿐, 이러한 행위에 이상한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홀든은 “설사 선생이 변태라 하더라도 내게 정말 잘해 준 것만은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는 홀든에게 중요한 깨달음인데, 현실을 ‘진짜와 가짜’, ‘순수와 부정’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
서부로 떠나기로 결심한 홀든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피비의 학교에 찾아갔다가, 계단 벽에서 외설스러운 낙서를 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이를 지우지만, 그런 낙서는 여기저기에 널렸고 심지어는 칼로 새겨져 있기까지 하다. 100만 년을 걸려 지우러 다닌다고 해도, 온 세계의 더러운 낙서들을 다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홀든 역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얼핏 절망으로도 보이지만,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이기도 하다. 

가족을 떠나 서부로 가려는 결심 역시 홀든에게는 일시적인 기분 전환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같이 따라가겠다며 가방을 들고 쫓아 나선 피비의 말에 격분한 홀든이 그녀를 때려 줄 생각까지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화가 난 피비를 달래기 위해 홀든은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홀든 자신에게도 아주 적합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홀든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다만 요양 병원에서 잠시 회복기를 거쳐야 했을 따름이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서 홀든은 그토록 싫어하고 조롱을 퍼붓던 학교 친구들에게까지 그리움을 표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여기에 등장시킨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없기 때문에 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스트라드레이터와 애클리마저 그립다. 그놈의 모리스 녀석도 그렇다. 우스운 이야기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스트라드레이터는 흘든의 네 번째 학교인 ‘페니’에서 한 방을 쓰던 4학년 선배로, 모범생에 미남이지만 이중인격을 지닌 인물이다. 애클리는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며 행동거지가 더러운 옆방의 4학년 선배이고, 모리스는 홀든에게 창녀를 소개했던 엘리베이터 보이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홀든의 이야기이고, 그가 떠들어 댄 이야기이다. 이렇게 떠벌리는 행위 자체에는 이 세계에 대한 긍정과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함축되어 있다. 독자들이 홀든의 모습에서 ‘반항적 영웅’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거나 신비화가 아닐까. 더불어 샐린저 자신의 체험이 많이 녹아들어 간 작품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오랜 침묵에 빠져 있는 작가는 홀든과 가장 닮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09. 10. 01.   

P.S. 분량상 작품의 말미에서 홀든이 회전목마를 타는 동생 피비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대목에 대한 분석은 다루지 못했다. 나중에 분량을 더 키울 때 보충할 예정이다. 한편,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한 번역은 이덕형본(문예출판사, 1998)인데, 홀든의 어투는 마음에 들지만 결정적인 대목에 오역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에서 인용한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를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277쪽)고 잘못 옮겼다. '비겁한 죽음'을 택하는 게 성숙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건 넌센스임에도 왜 이제까지 방치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판매된 걸로 돼 있는 공경희본은 이 대목을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48쪽)이라고 옮겼다. 아무래도 '이유(cause)'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좀 어색하다.  

한편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 따르면, 국내에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 가운데 추천번역본은 한권도 없다. 아래는 그 평가내용을 간추린 한국일보의 연재기사 '번역 이것이 문제다'의 한 꼭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에서 읽을 수 있다. 이후에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국내 독자들이 가장 많이 찾고 또 읽는 작품에 추천본이 없다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일보(04. 03. 14)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청소년기의 고뇌를 그린 성장소설로 널리 읽히는 인기작이다. 샐린저는 작품을 출간한 후 독자들을 피해 은거해 버렸는데, 작가의 괴팍한 삶을 모델로 한 할리우드 영화도 만들어져 국내 상영까지 했다. 대중성이 있어서인지 현대작품치고는 우리말 번역도 일찌감치 1963년에 나왔다.  

국내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으로 확인된 것은 모두 30여 종이다. 이 중 내용이 같은 것을 빼면 검토 대상이 된 것은 17종. 그 가운데 8종은 표절본으로 기왕의 판본을 베끼거나 약간 윤문한 정도이다. 그런데 독자적 번역본 역시 작품의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질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비표절본 9종의 번역서 중에서 추천할 만한 번역서는 한 종도 없다. 추천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읽을 만한 번역은 이덕형, 윤용성, 김욱동ㆍ염경숙 공역본 등 3종이다.  

이덕형(문예출판사)과 윤용성(문학사상사)의 번역본은 가독성을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원문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문장을 자유롭게 변형하면서 자연스런 구어체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번역본들에서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전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긴 문단이나 문장을 편한 대로 나누어 처리한 대목이 많았다.  

특히 원문에서 작가가 주인공의 의식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중복해 표현한 부분을 하나로 통합해 번역하였다. 문장은 매끈해졌지만 결과적으로 원문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자신의 생각을 길게 연결하면서 서술해 주인공의 어투를 전달하는 것이 번역의 정확성만큼이나 중요하다. 단지 가독성만을 높이기 위해 작품의 고유한 어조나 서술방식을 무시한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김욱동과 염경숙의 공역본(현암사)은 원작의 속어, 비어 등을 살리려고 노력한 점이 특징이다. 때로 지나친 부분도 있지만 원작의 어감을 자연스럽게 전하려고 고심한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번역본의 문제는 주인공이 구사하는 비속어가 주인공의 경어체 말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전하는 독백투 이야기의 잠재적 청중은 어른이라기보다 동년배로 보는 게 무난하다. 따라서 어투도 경어체보다는 평어체로 처리하는 것이 무난하다.  

세 번역본 모두 다른 번역본에서 잘못 옮긴 부분을 제대로 번역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장의 ‘The Cab I had was a real old one that smelled like someone'd just tossed his cookies in it’에서 ‘just tossed his cookies’는 ‘토한다’는 뜻이다. 이 속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옮긴 번역본들이 많다.  

그러나 세 번역본들에서도 문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 많이 발견된다. 10장의 나이트클럽 장면의 번역이 대표적인 경우다.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을 보면서 좋은 번역은 단순히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원작의 문체, 어조, 문맥을 전하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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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종류의 결단에 대하여
    from 게슴츠레의 공부터 2009-10-07 20:53 
     "지긋한 이 세계에 부시지는 못하더라도 균열을 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신중함을 내세우며 기다리다간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모두 다 잘 될거야 식의 악무한적 일상을 벗어나려는 이런 태도는 용감하기는 하나, 이는 '결단'의 층위에 놓인 거라기보다는 권태로운 세계 그 자체에 내속적인 구조적 열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주로 젊은이들에게 볼 수 있는 이 논변의 이면에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있을지 모른다.   "
 
 
펠릭스 2009-10-0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쟈 2009-10-02 11:43   좋아요 0 | URL
추석 잘 쇠시길.^^

펠릭스 2009-10-02 11:56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좋은 추석되시길...

바밤바 2009-10-0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와~ 소리 나오네요. 멋지십니다.^^;;

로쟈 2009-10-02 11:43   좋아요 0 | URL
손품을 좀 팔았습니다.^^;

게슴츠레 2009-10-0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채프먼의 경우를 떠올리기도 했고 또 마침 규율이 살짝 엄했던 고등학교 때라서 홀든에게 투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독서의 경험은 마냥 그런 바람에 마냥 맞장구를 쳐주지만은 않았더랬지만 결국 그렇게 읽어내는 데 성공(?)하고 책장 한 켠에 넣어 두었더랬지요. 오늘 로쟈 님의 비평을 보니 당시 풀리지 않았던 찝찝함들을 다시 헤집어 보게 되는군요.
그와 함께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저 '절망'으로서만 환원될 수는 없겠지요. 말씀하신 '절망'과 '체념'의 차이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전목마를 보며 행복해 하는 홀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기대되는군요. 항상 그렇듯이 멈춰서서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9-10-02 11:51   좋아요 0 | URL
홀든은 사실 매우 도덕적인 인물이잖아요. 고지식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직 미성숙하고. 어른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반항의 아이콘이 된 건 그의 일면이 부풀려진 탓이라고 봅니다.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 이전에 그런 파수꾼이 필요한 소년이었다는 게 제 해석입니다...

다이조부 2009-10-0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졸업한지 10년이 지났는데 로쟈님 덕분에

독서평설을 챙겨 보게 됬습니다.

인터넷에 뜨기 전에 본문 내용을 먼저 읽은 적은 처음이네요 ^^


로쟈 2009-10-02 1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연재는 11월에 끝나지만, 평설엔 다른 읽을거리도 많지요...

philocinema 2009-10-0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전집을 사놓고 마음 가는대로 한 권씩 읽고 있습니다.
아직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소개글을 보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곳에서 로쟈님의 글을 읽으며 기쁨을 느껴온 세월이
어느덧 4년이 다 되어 갑니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로쟈 2009-10-02 13:50   좋아요 0 | URL
아, 전집! 모양은 그게 좋을 텐데, 저는 낱권으로 사둔 책들이 많아서 따로 꿈꿀 수가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이 되시길...

yoonakim 2009-10-0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보지 않았던 소설인데...제목의 호밀밭도 파수꾼도 이상하게 제 정서와 매우 다르다는 생경함에 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1인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싶다고 해서 고민하는 즈음...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를 사놓고 바쁜 일정과 밀린 일들로 책상 위에 두고 구경만 하던 차에 아이와 함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거스르려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나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엄마가 함꼐 읽기에 좋은 텍스트인거 같네요. 젊은 시절에 읽었어야할 것을 고1이 된 아이와 함꼐 읽게 되나 봅니다. 풍성하고 평화로운 한가위 되시길...^^

로쟈 2009-10-03 10:26   좋아요 0 | URL
좀 위태한 장면도 나오지만, 아이와 엄마를 두루 만족시켜줄 것도 같은데요.^^ 한데, 벌써 고1이군요!^^

펠릭스 2009-10-04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설은 청소년의 눈을 통해 가족, 학교, 도시속의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것도 간접적인 언급하는 것을 보면
성장소설을 넘어 작가의 시대정신도 집약된 듯합니다. 따라서 비슷한
나이 또래와의 공감력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밭'은 호밀밭, 밑밭, 담배밭, 수박밭, 뽕밭 등을
연상케 합니다. '밭'의 풍요는 은밀함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밀밭안으로
들어가 두 발을 벌리고 누워 하늘을 보며 심호흡을 하는 것은 기성 남성의
동굴 심리로 남성주의적 사회 부조리를 상징합니다.

주인공 홀든(남성)에게 순수한 소통은 피비(착한 여성)입니다.
홀든의 학교밖은 자신이 속한 도시상과 멀리 떨어진 도시에 대한 전쟁으로
자신이 붙일 만한 곳은 없읍니다. 결국 동생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
오랜 은둔의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사학교에 입학한 후, 2차대전 로르망디작전에
참전하기도 하지만 '개츠비'와 '원폭의 발명'을 긍정합니다. 이는 청소년기인
홀든이 부조리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리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심리이며
곧 자존에 대한 재인식이라 생각합니다.

로쟈 2009-10-05 11:34   좋아요 0 | URL
마지막 멘트는 일리 있는 의견이십니다. 홀든은 도덕적 결벽주의자로도 보이니까요...

펠릭스 2009-11-20 21:50   좋아요 0 | URL
'고교독서평설' 읽었습니다. 홀든이 매춘부에게 강제로 5달러를 더 지불하고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두가지로 대응했데,하나는 복수며 또는 '상상속의 복수'를 영화처럼 합니다만,마치 이부분은 '루신'의 '아퀴'가 건달들에게 맞고서 스스로 위안하는 '정신승리법(=상상속의 복수)'을 생각나게 하더군요.

다락방 2009-10-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저는 민음사판으로 읽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궁금한게 있어서요. 저 위에 홀든이 선생을 변태라고 오해한게 자는 홀든의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요, 제가 읽은 민음사판에서는 잠든 홀든의 성기를 만져요. 그래서 놀라서 옷을 챙겨입고 나가구요. 머리를 쓰다듬은 거라면 '오해'할 수 있지만 성기를 만진거라면 그건 더이상 '오해'가 아닐 것 같은데요. 혹시 원문과 직접 비교하신 거라면 어느게 맞는건지 알 수 있을까요?

'머리를 만진 선생을 오해하는 것'과 '성기를 만진 선생은 아무리 잘해줘도 변태인 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른데 말이죠.

로쟈 2009-10-05 11:33   좋아요 0 | URL
원문에 'head'라고 돼 있는 걸 역자가 '귀두'라고 옮겨서 아마 문제가 됐을 거예요. 이후에 다시 '머리'로 정정한 걸로 압니다. 만약에 성기를 뜻했다면 말씀대로 오해의 소지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다음날 아침 홀든은 자신의 판단이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하거든요. 역자의 오버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