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기시다 슈의 <게으름뱅이 정신분석>(깊은샘, 1995)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뒤에 있는 것'을 읽다가 떠올린 책은 지난달에 나온 박규태 교수의 <일본정신의 풍경>(한길사, 2009)이다. 저자가 과거에 기시다 슈의 <성은 환상이다>(이학사, 2000)를 옮긴 적이 있어서다(아울러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문예출판사)도 우리말로 옮겼다). 믿을 만한 일본통의 저작이기에 챙겨놓으려고 한다. 저자 자신도 일본을 이해하는 데 곤란을 느낀다고 하지만, 다양한 고전에 대한 독해만으로도 요긴해 보인다.   

경향신문(09. 09. 26) 모순 ‘가깝고도 먼 나라’의 사유방식 

누가 처음 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에 대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비유는 현재까지도 한·일관계를 묘사할 때 매우 적절하게 사용된다. 북한을 제외하면 일본은 한국에 가장 가까운 나라다. 물론 여기서 ‘가깝다’는 말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한다. 양국의 감정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도쿄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한양대에서 일본언어문화학 전공 교수로 일해 일본에 대해 일반인보다 많이 안다고 할 수 있는 저자 역시 “일본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때때로 알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대해 갖게 마련인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근본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즉,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구분하는 한국적 사유방식과 달리 “논리적 사유와 비논리적 감정의 영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일본의 전통적 사유방식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양가적(ambivalence·모순, 반대 감정 병존) 속성’이라고 명명했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가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1946년)에서 모순되는 양극단에 대해 모순을 느끼지 않는 이중적인 성격을 일본인이 지닌 특성의 하나로 거론했다. 저자는 베네딕트의 이러한 고찰을 확장시켰다. 모순을 모순으로 느끼지 않고 병존시키는 일본인의 내면적 풍경을 가미(神), 사랑(愛), 악(惡), 미(美), 모순(矛盾), 힘(力), 천황(天皇), 초월(超越), 호토케(佛) 등 10개의 창을 통해 들여다봤다.

‘일본정신’을 상징하는 책으로 여겨지는 <고사기>를 보자. <고사기>는 창세부터 일본 황실의 성립과정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리고 있다.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불리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등장함은 물론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질투와 욕정 등 ‘인간적’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듯 <고사기>에 등장하는 신, 즉 ‘가미’들은 성욕과 권력욕, 복수심 등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의 민족신앙인 ‘신도(神道)’ 역시 가미를 인간과 질적으로 상이한 절대자로 여기기보다는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일본의 인간주의적 가미 관념에서는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추상적 이념이나 보편적 법칙 또는 불변성이나 영원성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릴 여지가 없다”고 한다. 일본정신에서 진리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현실 그 자체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상대주의는 양가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일본문화의 핵심적 특질이다. 대표적인 일본 불교 교단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창시한 신란(親鸞·1173~1262)이 설파한 선악관념 역시 상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신란은 심지어 “나는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불가지론으로까지 나아갔다.

일본인들이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후쿠자와는 제자들에게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서양 격언을 소개하며 실용적 학문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시켰지만, 악명높은 ‘탈아론(脫亞論)’으로 중국과 조선 침략의 논리적 기반을 제시한 지독한 패권주의자이기도 했다. 후쿠자와에게 “‘펜의 힘’과 ‘칼의 힘’은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여기에는 모순되는 두 개의 힘이 마치 모순이 아닌 것처럼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이와 같은 일본의 전통적 사유방식이 대단한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 단점으로 나타난다는 시각을 깔고 있다. 지독한 상대주의·현실주의·현세중심주의는 외래적인 것들을 껍데기만 남기고 일본적인 것으로 재빨리 변형시키는 저력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저지른 침략이나 현대 일본이 안고 있는 모순에 무감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블랙홀로도 작용했다.

저자는 일본정신을 들여다보는 10개의 창에 접근하는 통로로 <고사기> <겐지 이야기> <국화와 칼> <가면의 고백> 등 일본에 대해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10권의 책을 동원했다. 따라서 제목만 귀에 익을 뿐 직접 읽어보지 못한 유명한 책들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다이제스트로 이 책을 읽어도 쓸모가 있다.(김재중기자) 

09. 10. 05.  

P.S. 인간은 성본능이 망가진 동물이며 이에 따라 여러 가지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기시다 슈의 '성적 유환론'은 좀 오버다 싶지만(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게으름뱅이 정신분석>은 여러 모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더불어 유익했다. 미시마 유키오만 하더라도 매우 강압적인 조모와 부모,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성장한 독특한 환경으로 인하여 실재감을 갖지 못하는 정신병적 인격구조를 갖게 됐고, 그의 창작활동은 실재감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 기시다 슈의 해석이다.  

기시다에 따르면, 미시마는 자기 속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못 참아 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일부를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남의 손에 도둑 맞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가 작품 <가면의 고백>에서 갓태어났을 때의 목욕물이 기억난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자기에 관한 일로 자신은 모르고 타인만이 알고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찾고자 했던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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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06 00:30   좋아요 0 | URL
서양의 '이분적 사고'가 아닌 일본은 '신도'의 현세주의를 바탕으로 한 상대주의, 현실주의가 팽배하군요. '마시마'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강한 자존의식 덕에 '사무라이정신' 이 나올법 한데요. 또한 지독한 완벽주의(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성장후 죽기전까지)적 사유로 봐 '한국정신'(?)과는 다를 듯합니다. 과연 '한국정신'은 뭘까 싶습니다.

로쟈 2009-10-06 19:34   좋아요 0 | URL
요즘은 '먹고사니즘'이라고 하잖아요.^^;

드팀전 2009-10-06 09:22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고진이 <역사와 반복>에서도 다른 측면에서 거론하고 있는 내용이어서 제게 시의적으로 흥미롭군요. 미시마 유키오의 근대적 절대지에 대한 강박이 그가 '자결'이란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고진의 이야기였지요. 반면 오에는 그걸 안고 늙어 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라고.. 독특한 비유였던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0-06 19:33   좋아요 0 | URL
고진의 것을 포함해서 미시마 유키오론으로 인상깊었던 두 글이었어요...

perky 2009-10-06 13:12   좋아요 0 | URL
박규태 교수님, 언젠간 책 하나내지 싶더랬는데..전 이분 참 좋더라구요. 글 번역(황금가지 등)도 깔끔하게 잘하고 지식도 풍부하고..여러모로 장인정신이 느껴지는..'국화와 칼'도 저는 이분이 번역한 걸로 갖고 있지요. 조만간 저 책[일본 정신의 풍경]도 사야겠어요. 제목부터 근사하군요! (제가 요즘 일본문화에 푹 빠져서리..)

로쟈 2009-10-06 19:32   좋아요 0 | URL
네, 책이 아주 충실합니다. 교재로도 좋을 듯해요...

카스피 2009-10-06 10:54   좋아요 0 | URL
마사미 유키오는 천왕 복귀를 부르짖으며 자위대 쿠데타를 설득학다 실패해서 할복 자살한 그 문학가를 말하는 것인가요?

로쟈 2009-10-06 19:32   좋아요 0 | URL
네, 기사의 마지막 사진이 미시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