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사고 이후 계속 악화되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 사태는 원자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데, 우리도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지진 안전지대라고 낙관하기엔, '그린에너지'라고 안심하기엔 원자력은 너무 위험하며 '값비싼' 에너지이다. 원자력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폐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1. 03. 19) ‘끌 수 없는 불’ 원전 신화는 무너졌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빨간불을 끄는 기술은 아직도 없습니다. 그리고 고준위폐기물을 제대로 처리하는 방법은 여전히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못합니다.”

일본의 반핵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가 1992년 도쿄 특별강연에서 한 예언이 10년 뒤 현실이 됐다. 대지진 뒤에 덮친 후쿠시마 원전 비극의 핵이 바로 끄고 싶어도 마음대로 끌 수 없는 불이다.

“결국은 수명이 아주 긴 방사능이 남게 됩니다.…100만년이 지나도 아직 10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남아 있다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불, 끌 수 없는 불, 독성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만든 불이라면 끄고 싶을 때 끌 수 있어야죠. 원자력의 불은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지만 끄고 싶을 때 끌 수 없다는 점에서 빵점짜리 기술입니다.”

원자력 이용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를 염원하는 7명의 젊은 생태사회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토론을 거쳐 내놓은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은 다카기의 경고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조근조근 차분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동 급변사태로 더욱 가팔라졌지만, 석유가격의 고공행진과 온난화 가스 저감 압박 속에 등장한 ‘원자력 르네상스’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상상을 절하는 일본 현실에 압도당한 탓인지 사람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보면서도 원자력 드라이브정책을 한 축으로 한,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국 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 국가발전전략이 불러들일지도 모를 위험성엔 여전히 둔감한 듯하다. 사람들은 일본과 한국 원전의 발전방식과 세대 차이, 도쿄전력과 일본 당국의 어수룩해뵈는 대응조처 등을 거론하며 한국은 다를 것이라 믿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다카기의 시선으로 보면 별로 다를 게 없다. 스리마일이 그랬고 체르노빌도 그랬지만 예상치 못한 원전사태 때 제때 불을 끌 수 없는 일본의 한계는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은 묻는다. 원자력은 안전한가? 안전하다던 일본 후쿠시마 원전들의 어이없는 실상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게 한층 더 명백해졌지만, 그전부터 원전 인근지역의 유아 사망률, 선천성 기형아, 암 발생률 등의 통계수치들은 원자력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이미 보여주었다. 그리고 원전 보유국들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한국도 고리1호기가 가동된 이후 2009년까지 원전 가동을 중지해야 할 정도의 사고가 423건이나 된다. 2007년에만 12회 가동 중지로 인한 손실액이 490억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2007년 6월로 정상수명 30년을 넘긴 고리1호기는 ‘수명 연장’ 판정을 받고 계속 가동중이다. 후쿠시마 사고 원전들이 바로 그런 낡은 원전들이다.

책에 따르면, 수명을 다한 원전들이 ‘운전 계속’ 판정을 받고 길게는 수십년을 더 버티는 것은 경제성이 있다는 증표가 아니라 그 반대다. 전력의 원전 의존율이 80%에 가까운 프랑스를 빼고, 1980년대 후반 이후 구미 국가들이 새로운 원전 건설을 중단한 채 낡은 원전들 수명 연장을 거듭하는 이유는 주로 그 지역 원전들이 사기업들이기 때문이고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책의 또다른 질문, 원자력은 경제적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수명 연장 외엔 뾰족한 방법도 없다. 원전은 가동을 멈추는 걸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철거하거나 그대로 밀폐 또는 굳혀서 영구보존해야 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냥 내버려두면 치명적인 방사성물질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계속 돈을 들여 관리해야 한다.

해체할 경우 잠시 곁에 있기만 해도 목숨을 잃게 될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비롯한 수만톤의 방사선 오염물질들을 어디에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독성이 길게는 수백만년 이상 지속되는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기술을 지닌 나라는 아직 한 곳도 없다. 사기업이 이런 뒷감당을 하다간 망한다. 그러니 차라리 계속 가동하면서 눈치 보는 게 낫다. 다카기가 얘기한 끌 수 없는 불은 이런 맥락까지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원전이 안전할까? 그리고 돈벌이가 되면 수명 연장이 아니라 새 원전을 건설할 것이다. 그게 사기업의 본성이다. 원전의 경제성은 발전단계만이 아니라 우라늄 채굴과 정련, 부지와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설 단계도 따지고 관리비용, 천문학적인 원료 재처리 비용 등도 감안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도 다량 방출된다.

그럼에도 2022년까지 12기의 원전을 더 건설해서 2030년께 원전 의존율을 59%까지 끌어올리겠다(현재 35.5%)는 한국(20기 가동으로 원전설비 세계 6위)이나 55기를 가동하면서 11기를 건설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는 일본, 59기 가동에 1기를 추가 건설중인 세계 2위의 원자력대국 프랑스, 향후 20년간 45기 이상의 원전을 더 건설하겠다는 러시아, 11기 가동에 26기를 추가 건설할 중국, 17기 가동에 10기를 추가 건설할 인도, 104기 가동에 11기 추가 건설을 계획중인 세계 최대 원자력대국 미국 등에선 대체로 국가가 직접 개입하거나 거대 독점업체들이 그 사업을 주도한다. 거기엔 경제외적 요소들이 강하게 개입한다. 이산화탄소 감축의무를 손쉽게 달성하려는 정치적 계산, 표준화된 기성체제와 유착하려는 권력과 관료와 기업 등 주류 이익집단들의 경로의존성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우라늄 확인매장량은 앞으로 43~79년 정도(2007년 기준) 쓸 수 있는 양밖에 없다.

이런 정도만 들춰봐도 또다른 두 가지 질문, 원자력은 청정 에너지인가, 원자력은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답도 자명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원자력은 안전하고 깨끗하고 경제적이고 지속가능하다 따위의 언설들은 ‘신화’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 한국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원자력 르네상스는 실은 아주 위험한 ‘원자력 신화의 르네상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1955년 한-미 원자력협정 체결 이래 지속돼온 공급위주의 원전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값싼 심야전기, 그와 연계된 비효율적인 양수발전 제도, 그것이 에너지 소비를 늘리고 다시 공급위주 에너지정책을 심화시키는 악순환구조. 그것은 석유나 원자력 의존도를 계속 높이고 에너지 낭비를 심화시키면서, 절약과 효율, 새로운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 등의 대안 찾기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이런 정체된 구조 속에서 기업과 관료 등 공급자 쪽은 이득을 챙기고 비용은 결국 국민이 댄다. 이런 공급자 담합구조는 이번 도쿄전력 대응에서도 일부 드러났듯 무사안일과 무기력, 안전불감증의 원천이기도 하다.

간 나오토 총리가 말했듯이 사고 한 번으로 동일본 전체를 괴멸시킬 수도 있는 ‘끌 수 없는 불’. 그런 위험한 불을 도처에 켜 놓고 살기엔 인간의 기술은 짧고 한반도는 너무 좁지 않을까. 책은 그렇다고 당장 원자력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게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할지, 대안은 없는지 등을 소수 공급자들간 담합이 아닌 소비자 중심의 사회적 공론화 작업을 통해 찾아보자고 제안한다.(한승동 선임기자)    

“제임스 러블록이 틀렸다” 

지구가 온난화(warming) 정도가 아니라 가열(heating) 상태의 급박한 열탕화 위기에 직면한 지금 지구를 구할 길은 원자력뿐이다. 이런 주장을 한 이는 뜻밖에도 지구를 살아 있는 우주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을 제시한 영국 과학자요 환경운동가 제임스 러블록이다. 본래 원자력 이용에 호의적이었던 러블록은 2007년에 낸 <가이아의 복수>(세종, 2008)에서 그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환경운동 분야에서 지명도가 높은 러블록의 이런 주장은 유럽 쪽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모양이고 국내에서도 비슷한 반향이 일었다.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 필자들은 러블록의 주장이 야기할 파장을 의식했음인지, 책 제2장을 러블록 비판에 할애했다.

러블록이 생각하는 완벽한 대안은 핵융합 에너지다. 별의 에너지이기도 한 핵융합 에너지는 방사능과 폐기물 처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의 무한하고 무해한 에너지다. 그런데 이것을 실용화하려면 적어도 10~20년은 걸린다. 많은 사람들은 핵융합 실용화에 이 정도 시간밖에 들지 않을 것이라는 러블록의 생각을 비현실적 낙관주의로 보고 있지만, 그에겐 그 정도의 시간마저 기다릴 여유가 없다. 그만큼 지구 열탕화가 위기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실용화한 핵분열 에너지, 즉 현존 원전에 기대자고 주장한다. 원자력이 가장 안전하고 폐기물 처리도 다른 화석연료들에 비해 손쉽다고 본다. 석탄에 비해 40배나 안전하며 수력보다도 안전하단다. 제3세계 사망자의 대부분은 원자력이 아니라 과로, 영양부족,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만큼 방사능으로 인한 암 발생과 핵전쟁에 대한 서구인의 두려움은 허상이라고 러블록은 주장한다.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한 비키니섬이나 옛 소련시절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피해는 과장돼 있으며, 특히 원자력은 가이아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에너지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진상형 경북대 교수는 원전을 보유한 31개국 대부분은 잘사는 나라인 데 비해 석탄과 수력을 주로 쓰는 나라들은 빈국들이 많아 안전도나 처리비용, 온난화 작용 등을 평면비교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비교하려면 31개국에 한정해서 양자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에너지원별 효과로 따지면, 예컨대 동일전력 생산을 전제로 100명이 일하면서 5명이 사망하는 석탄발전소와 10명이 일하면서 4명이 사망하는 원자력발전소 가운데 더 위험한 것은 원자력 쪽이 아니냐고도 했다. 무엇보다 원자력이 안전하지도 깨끗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고 보는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러블록의 원자력 대안론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술적 낙관론에 토대를 둔 러블록의 지나친 과학주의, 공학주의엔 사회적 관점이 부재하며, 인간(인간을 지구라는 생명체를 파괴하는 암세포로 보기도 한다)보다 가이아를 중심에 놓는 그의 시선은 과학과 종교 사이를 모호하게 오가는 줄타기라는 비판도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11.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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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3-19 20:46   좋아요 0 | URL
가이아 이론의 과학자가 원자력을 무한하고 무해한 에너지로 봤다는 게 참 충격적이네요. 어제 토론프로그램에서 방청자가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럼 대안이 뭐냐는 투로 원자력의 정당성을 얼버무리는 여당 의원에 화가 났습니다. 원할 때 끌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원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상황도 너무 서글프네요.

로쟈 2011-03-21 08:45   좋아요 0 | URL
'원자력 마피아'란 말이 헛소리가 아닌 듯합니다...

雨香 2011-03-21 10:05   좋아요 0 | URL
"원전은 가동을 멈추는 걸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인데도 원전을 계속 짓겠다는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원자력발전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책이군요. 감사합니다.

mirror 2011-03-22 08:33   좋아요 0 | URL
원자력 마피아의 대부는 미테랑과 죠스팽일 것 같네요. 프랑스 좌파들은 정권 잡고서도 원자력 발전소 미친듯이 지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미테랑은 핵폭탄 실험까지 아주 열심히 했죠. ^^ 그리고 미국은 원자력 마피아가 힘을 못 쓰는 지역인것 같네요. 근 30년간 안 지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바마가 원자력 마피아의 조직원인 것 같구요. 30년간이나 안 했던 것을 새로 시작하려 하니 말입니다. ㅎㅎ 중국과 인도는 새롭게 마피아에 장악된 지역이고요. 지금도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전국민의 절반에게 원자력이 아니면 전기를 공급할 수 없다고 한, 인도의 관리 녀석은 진정 마피아의 끄나풀임에 틀림없나 봅니다.
 
이슬람혁명과 이란 현대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간행하는 월간 소식지 <출판문화>(544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을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칼럼으로 이달에는 '책으로 읽는 이슬람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었다. 읽은 책보다는 읽어야 하는 책이 더 많은 분야인데. 이번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부쩍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그래서 관련서들을 한데 모았다). 유엔 안보리가 군사개입을 결의한 리비아의 전황이 빨리 호전되기를 기대한다.   

출판문화(11년 3월호) '우리의 시각'이 아닌 '그들의 시각'으로

‘책읽는 세상’은 ‘책으로 읽는 세상’이기도 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몰아치고 있는 혁명의 바람이 자연스레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튀니지, 이집트, 그리고 리비아. 재스민혁명으로 튀니지의 독재자 벤 알리가 21년만에 권력에서 축출됐고, 이어서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무바라크, 무려 30년간 이집트를 철권으로 통치했지만 이집트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그를 몰아내는 데는 단지 18일이 걸렸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를 뒤흔든 18일’이 이집트혁명을 가리키는 문구가 됐다. ‘세계를 뒤흔든 10일’, 곧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환기시키는 문구다. 1969년의 쿠데타 이후 42년째 집권하고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만이 탱크와 전투기까지 동원해가며 권력의 마지막 광기가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리비아의 시민군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중동에서 진행중인 ‘연속혁명’은 사막과 석유, 광신적 근본주의와 테러, 그리고 여성들의 베일 등으로 채워진, 이 지역에 대한 지배적 인상을 바꿔놓고 있다. 더불어 ‘이슬람혁명’으로 불린 1979년의 이란혁명 이후 32년만에 이슬람혁명이란 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지만 그래도 32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사실 이슬람이란 말보다, 그리고 이란이란 말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온 건 페르시아의 왕자와 공주들이었고, <아라비안나이트>였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를 얼마나 흥미롭게 읽었던가. ‘열려라, 참깨!’란 주문을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려본다. 언제였던가.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벌어진 성대한 기념행사 덕분에(정확하게는, 그걸 보도한 TV 덕분에) 미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초등학교(국민학교) 2학년이던 내게 각인됐었다. 그리고 이듬해 땅콩장수 출신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가 알게 된 미국의 첫 대통령이어서 미국은 한동안 ‘지미 카터의 나라’ 혹은 ‘땅콩장수의 나라’였다. 그리고 호메이니. 터번을 두르고 흰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1979년에 자주 TV에 등장했다. 그가 친미 편향의 팔레비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공화국을 세운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아야톨라 호메이니다(‘아야톨라’는 시아파 성직자의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고 본명은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란도 미국만큼 우리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길 법한 나라였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망각의 베일 너머에 있다. 마치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타고 사라진 것처럼.  

생각해보면 그 망각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자신의 처지를 돌보기에도 바빴다는 이유다. 이란처럼 왕정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독재자가 있었고 그해 가을 그가 측근에게 암살당했다. 그렇게 하여 이란이나 우리나 똑같이 격변의 80년대를 맞게 됐다. 1980년 봄 이란에서는 또 다른 혁명으로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화하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우리에겐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그런 동시적․병행적 역사에 흥미가 생겨서 유달승의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를 손에 들었다.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서 본 이란 현대사’가 부제인 책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번이라도 우리의 눈으로 이란을 본 적이 있을까?”란 물음이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이란을 보자’를 기치로 내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광신자의 나라’ ‘억압적인 여성 차별 국가’라는 ‘이미지’로만 알려진 그 나라에도 우리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처럼 똑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가 대개 그렇듯 새삼스럽진 않다. 우리는 왜 우리의 눈으로 이란을 바라보지 못했을까? 우리의 시각이 아닌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 우리에게도 ‘악의 축’이 되고 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이념적 재단만이 미국의 주특기이자 주된 관심사인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이란 정책은 근본적으로 실리주의와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교훈은 우리도 우리 수준의 ‘실리주의와 현실주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란 정책도 일방적으로 친미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는 우리의 국익과 실리를 토대로 변화해야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테헤란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학자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정부 부처 과장의 시각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란은 풍부한 석유자원과 천연가스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장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란의 4대 교역국이고, 이란은 한국의 4대 원유공급국”이라는 것이 이란의 현실적․실제적 ‘의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우리의 시각’일까. 저자는 머리말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한국 기업들의 가전제품, 정보통신제품, 자동차 등은 이란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8년 한국과 이란의 교역 규모는 약 129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현 시점에서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이란에 대해, 우리의 입장에서, 제대로 아는 것임을 잊지 말자.” 이 정도면 저자의 방점은 ‘이란’이 아니라 ‘우리의 국익’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든다.   

‘자원’과 ‘시장’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일반적 척도이자 지배적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으로 읽는 세상’은 그것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혹은 ‘우리의 눈’이 ‘우리의 국익’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그들의 눈’으로 보는 건 어떨까. 이란에 대해서라면 이란인들의 눈으로 보는 것 말이다. 가장 유익한 길잡이가 돼주는 건 마르잔 사트라피의 만화 <페르세폴리스>이다. ‘페르시아의 도시’란 뜻의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가리킨다. 이미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자전적 만화에서 저자는 이슬람 혁명기에 성장기를 보낸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펼쳐놓는다.   

사트라피의 이야기도 1980년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10살이 된 1980년부터 학교에서는 베일을 써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진다. 1년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프랑스계 학교에 다녔지만 해가 바뀌면서 외국계 학교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타락의 상징이란 이유로 문을 닫게 했다. 그리고 여학생을 비롯한 모든 여성에게 베일 착용이 강제되었다. 이란식 문화혁명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대목이어서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에서 ‘문화혁명’ 장을 찾아봤다. 두 문단이 기술돼 있는데, 1980년 6월 문화혁명본부가 설치되고 곧이어 2년 동안 이란의 모든 대학이 폐교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유는 호메이니의 교시였다. “우리는 경제 제재나 군사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이 서구의 잘못된 사상에 오염되는 것이다.”  

이란의 전통과 문화로의 복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교조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였던 이슬람공화국 하에서 여성의 삶은 특히나 힘겨운 것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인데다가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부모를 둔 덕분에 유학생활까지 경험하는 샤트라피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자유였다. 지식인에 대한 탄압과 사상에 대한 억압,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침해, 그리고 이라크와의 8년 전쟁으로 얼룩진 것이 그녀의 성장기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녀는 ‘이란인’이란 자긍심을 잊지 않았고 자신의 나라가 ‘소수의 극단주의들이 벌이는 잘못된 행동’으로만 판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 소녀의 성장기가 많은 사람의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내게 된 밑바탕일 것이다.   

<페르세폴리스>를 읽고 나서 나는 더 많은 이란 여성, 더 많은 이슬람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의 시각’보다는 ‘그들의 시각’과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트라피의 후속작 <바느질 수다>도 구하고(<페르세폴리스>와는 성격이 좀 다른 책으로 ‘차도르를 벗어던진 이란 여성들의 아찔한 음담!’을 다룬다), 이슬람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의 자서전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와 이란의 격동기에 테헤란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했던 아자르 나피시의 회고록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에도 자연스레 손이 갔다.   

제럴딘 브룩스의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도 당연히 빼놓을 수 없다. ‘Nine Parts of Desire’란 책의 원제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이슬람 시아파의 창시자라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지전능한 신께서는 성욕을 열 가지로 나누어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중 아홉 가지를 여성에게, 한 가지를 남성에게 주셨다.” 곧 ‘열의 아홉’이 여성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고로 ‘책으로 읽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건대, ‘이슬람 남성’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고작 ‘열의 하나’일뿐이므로.  

11. 03. 19.  

P.S. 초보적이긴 하지만 이슬람 지역에도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이슬람사 책들을 챙겨놓게 됐는데, 기본서는 아이라 라피두스의 <이슬람의 세계사>(이산, 2008)인 거 같다. 이슬람 역사 전문가인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2006)도 이번에 같이 구한 책이다. 이슬람사의 고전이라는 호지슨의 <이슬람의 모험>도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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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rod 2011-03-19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이란에서 9학년 부터 11학년 까지, 3년간 살았습니다. 1999년부터 2002년이 되겠네요.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많은 이란 관련 책들이 이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지는 제가 읽어보지 못 해 모르겠네요. <페르세폴리스>는 극장에서 보고 상당히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테헤란에서 3년 살면서 비를 겨우 2번 경험 했는데 겨울이 오면 눈은 참 많이도 내렸습니다. (때로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중동에 위치해 있으면서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종교혁명의 여파로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같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재외한국인을 위한 교회와 성당도 있었고요.

교육의 경우, 남자와 여자는 유치원 때와 대학교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분리 되어 있습니다. 제 경우는 국제 학교를 다녔는데 국제 학교 역시 남자 학교와 여자 학교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인, 북한인,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이 모두 한 학교를 다녔었습니다. 서로 학년이 달라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딜가나 수적으로 우세한 한국인(기업들 덕택에)이 가장 시끄러웠습니다.

간혹 어떤 이란인들은 한국인을 업신 여길 때도 있었습니다. 혁명 전에 한국인들은 이란에 돈을 벌기 위해 많이 왔었다고. 대개 남자는 택시기사 여자는 무용수로. 처음 이란에 도착해서 한동안 혁명 전에 건축된 집에서 지냈었습니다. 고풍스럽고 우아하고 집 뒷 뜰에는 수영장이 있던 집이었죠. 혁명 전의 삶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친구 마지드의 집에 놀러간적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노르웨이에서 살아온 마지드의 어머니는 혁명 당시 이란에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 역시 혁명에 가담했다고 하신 마지드의 어머니는 저의 등장에 집 안에서도 챠도르를 걸치게 되었습니다. 마지드 역시 스파이더맨과 NBA,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이었죠.

많은 서민들은, 주로 택시 기사들, 혁명 이후의 삶에 대해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호메이니는 거짓말쟁이라 공통적으로 말했습니다. 혁명의 구호는. 석유, 물, 전기 등은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모두 무료로 제공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답니다. 어쨋든 혁명은 성공했고 팔레비 왕조는 쫓겨났고 지금의 이란이 있는거지만. 혁명 후 연이어 터진 전쟁. 외국, 주로 서방세계의 수출 제제 등. 힘겨운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아직도 거리 곳곳에 전쟁과 혁명의 상처가 남아있었죠.

제가 자주 타던 택시의 기사 친구(?) 레자 핫다디는 테헤란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 했습니다. 택시 기사가 더 많은 수입을 안겨주기에 그는 택시 기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8살 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서 모은 돈은 20대에 군면제를 위해 다 썼고 지금은 결혼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습니다. 밝고 맑은 천성을 가졌고 저를 무척 좋아해서 이란에 살면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레자의 집으로도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소위 우리가 산골동네라고 말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늑하고 친절하고(물론 아이들은 끊임없지 저를 재키찬이나 부르스 리라고 불러댔지만) 따스했던 동네였고 사람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란에 대한 글을 보게 되서 또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네요. 근데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버리면 너무 길어지기에 여기서 멈춰야 겠어요. 두서도 없이 추억들을 나열한것만 같아 죄송하네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세요.

로쟈 2011-03-21 08:46   좋아요 0 | URL
생생한 이란 이야기 감사합니다.^^

펠릭스 2011-03-21 20:00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들었습니다.

雨香 2011-03-2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국익'이라.. 세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인 것 같습니다. 리비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로 그런데요. 북에 보내는 삐라에는 '지금 중동은 독재자와 싸우고 있다'이지만 정작 우리는 국익을 위해 독재자와 친하게 지내는 현상이지요.
기독교계 역시 혼란에 빠졌다고 하는군요. 선교사들의 말에 따르면 무라바크 시절엔 선교에 관대했지만 아랍권의 민주주의로 자칫 선교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고민한다고 합니다. 참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기독교인입니다만 이런 모습 보기 싫어 교회 안간지가 15년쯤 된 것 같습니다.)
페르세 폴리스 DVD로 보관함에 담아 놓습니다. 씨네큐브에 종종 가곤 했을 때 놓쳐서 아쉬어했던 영화인데 DVD로 챙겨보겠습니다.

로쟈 2011-03-24 00:15   좋아요 0 | URL
국내에 개봉했었군요!^^
 

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다시' 읽는 재미에 대해서 조금 적었다.  

 

한겨레(11. 03. 19) 제대로 된 모비딕 ‘다시’ 읽으며 

허먼 멜빌의 걸작 <모비딕>을 다시 읽고 있다.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춘 다이제스트판이 아니라 완역판으로는 처음 읽는 것이지만 ‘고전’이기에 ‘다시’ 읽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대로 고전이란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유명하기에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 고전이다. 창피하니까. 하지만 뒤늦은 독서에 이유가 없진 않다. 그간에 발췌·표절 번역본은 많았지만 확실한 추천 번역본은 없었다는 점. 그런 가운데 장인적 솜씨를 담은 새 번역본이 나온 것이 불과 지난해의 일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란 1인칭 화자의 말이 서두이지만 멜빌은 그보다 앞자리에 고래의 ‘어원’과 고래에 관한 문헌 ‘발췌록’을 배치하고 있다. 고래, 혹은 ‘거대한 바다 괴물’에 대해 수많은 민족과 세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노래했는가를 미리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단 이것을 ‘진정한 고래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충고한다. 만약 그런 게 이미 존재한다면 멜빌은 따로 <모비딕>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고래학’으로서의 <모비딕> 말이다.

지갑도 바닥나고 뭍에서는 더이상 흥미를 끄는 것이 없기에 이슈메일은 포경선을 타려고 항구를 찾는다. 돈도 벌어야 하지만 고래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컸고 고래잡이 항해가 어쩌면 신의 섭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룻밤 유숙하게 된 여인숙에서 뜻밖에도 식인종 작살잡이와 방을 같이 쓰게 된다. 항유로 처리한 원주민의 두개골을 팔러 돌아다니는 ‘야만인’ 작살잡이의 이름이 퀴퀘그. 이슈메일은 낯선 식인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벌이지만 곧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란 생각으로 마음을 가라앉힌다. 아니 두려움이 가시자 예의바른데다가 감수성까지 예민한 자신의 동숙자를 예찬하기까지 한다. 



젊은 시절 직접 포경선을 타고 남태평양을 누비다 식인종들과 한 달 동안 같이 살기도 했던 멜빌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차별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멜빌과 마찬가지로 이슈메일도 문명의 위선과 간사한 허위 따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선량한 야만인’에게 오히려 친근감을 느꼈다. 높은 설교단에 올라가서는 사다리를 끌어올려서 설교단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만드는 예배당 목사님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는 기독교적 우애란 허울뿐인 예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대신에 이교도 퀴퀘그와 담배를 같이 피우며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러고는 퀴퀘그의 우상 숭배 저녁 기도에 동참한다.

엄격한 장로교회의 품에서 태어나 자란 어엿한 기독교도인지라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이슈메일은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관대하고 고결한 하느님이 하찮은 나무토막에 질투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스스로 반문한다. 물론 그건 같은 나무토막끼리라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숭배란 무엇인가? 이슈메일 생각에 그건 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 “이웃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 생각으로 이슈메일은 퀴퀘그의 예배에 동참하여 우상 앞에서 두세 번 절을 하고 우상의 코끝에 입을 맞춘다. 이후에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누워서 더욱 돈독해진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은 물론이다.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피쿼드호를 타고 출항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이지만, <모비딕>은 그런 우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전으로서 값을 했다.  

11. 03. 19.   

P.S. <모비딕>은 교양강의차 읽고 있는 것인데, 다른 번역본들 외에 더 참고하고 있는 책은 멜빌을 전공한 신문수 교수의 <모비딕>(살림, 2005), 김옥례 교수의 <모비딕>(신아사, 2005), 그리고 호손과 미국소설학회 편, <모비딕 다시 읽기>(동인, 2005)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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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9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2단 세로조판이었고 두께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것도 완역이 아니었군요. <백경>이란 제목이었죠 아마. 김석희 선생 번역이면 읽어볼 만하겠는데요. 별고 없으시죠? 요즘은 공연히 사람들에게 별일 없는지 묻게 되네요...

로쟈 2011-03-19 00:44   좋아요 0 | URL
완역본이 없었던 건 아니구요, 저도 동서문화사판은 새로 구해서 갖고 있습니다. 다만 강추번역본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 저야 무고한데, 시절은 하수상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3-1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을 처음 읽었을 땐 눈에 안 들어왔지만 나중에 퀘이커 교도에 관심이 생기면서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그러면 선원들의 종교적 성향에 초점을 두고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3-19 18:23   좋아요 0 | URL
그것도 한가지 독법이겠네요...

yjsohn 2011-03-20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비딕하면 스타벅스 커피전문점이 항해사의 이름(스타벅)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떠오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0 16:28   좋아요 0 | URL
오...방금 제가 그 일화에 대한 페이퍼를 썼는데요...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일본의 대지진에 관한 뉴스 속보를 들으면서 쓴 글인데, 당장에 떠오르는 '천지불인'이란 말에 분량을 더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기분이었다. 위로의 말도 사치스러워 그냥 '행복할 자격'만을 문제 삼았다.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이후, 2010),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난장, 2010) 등이 뉴스를 들으며 내가 펼쳐놓았던 책이다. 사망자가 사만 명이 넘어설 거라고 하니 입이 떼지지 않는다...   

   

경향신문(11. 03. 15) [문화와 세상]누가 행복할 자격 있나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수천명의 시신이 해안에서 발견되고 있고, 한 어촌마을에서 30년 동안 쌓은 거대한 방조제는 흉물스러운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원자력발전소까지 폭발한 가운데 피해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 오른다.

이미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으며 만물을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고 했다. 제물로 만들어진 지푸라기 개는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숭배의 대상이지만 의식이 끝나면 바로 내팽개쳐진다. 인간의 운명 또한 한갓 지푸라기 개와 다를 바 없는 것일까. 그런 처지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 원조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는 ‘잘사는 것’ ‘잘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어떤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주어진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체적인 ‘활동’이라는 게 요점이다.

그래서 그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소나 말, 그 밖의 다른 동물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른과 같은 활동, 가령 시민으로서의 실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어린이’란 말은 그저 소망의 표현일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이를 좀 먹어야 한다.

어떤 활동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자신의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이다. 훌륭한 장군이라면 자기 부대를 잘 지휘하는 일, 좋은 제화공이라면 훌륭한 구두를 만들어내는 일이 ‘잘사는 것’이고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인간의 삶이 일시적인 운에 많이 좌우된다 할지라도 행복은 긴 생애와 관련되기에 행복한 사람은 변덕스러운 운을 견뎌낼 것이며, 결코 비참하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지진과 같은 재앙은 그런 어른의 행복이란 것도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보이게 만든다. 버텨낼 수 없는 불운이 닥치기도 하며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어린아이의 첫 경험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란 깨달음이 아니라,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말했다. 어른들이 무능력하다는 뜻이다. 정곡을 찌른 듯한 이 말을 풀이하면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마술뿐이라고 지적한다. 무엇이 마술인가. “행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지혜에 따르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정령을 병속에 잘 가둬놓아야 하고 집에는 황금동전을 낳는 당나귀나 황금알을 낳는 닭 한 마리쯤 있어야 한다. 행복은 누군가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의 호두나무나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에 달려 있다. 혹은 지진이 나느냐 안 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일본의 지진에 대해 원로목사님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신앙적으로 볼 때’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웃 나라의 불행에서 신앙의 동기를 찾는 것은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믿음과 멀지 않아 보인다. 천지가 어질지 않은 마당에 인간에게서 어짊을 찾는 것은 무리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누구도 행복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서 운명에 겸손할 수는 있다. 인간도 소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11.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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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5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1-03-17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 이름으로' 서문이던가에 이런 지적이 있더군요. 3대 악의 축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392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번달에 고른 주제는 '공정한 사회'이고, 김승식의 <공정한 사회란?>(고래실, 2010)과 김진철의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밀리언하우스, 2010)을 관련도서로 읽었다.   

책&(11년 3월호) 공정한 사회란? 

‘친서민’과 함께 ‘공정사회’는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현 정부의 양대 국정지표이다. 덕분에 ‘공정사회’란 말이 5공화국 시절 ‘정의사회’만큼이나 많이 회자되고 있다. 더불어 어떤 사회가 공정한 사회인가란 의견도 분분하다. 김승식의 <공정한 사회란?>에 눈길이 간 이유이다. 증권 관련 업종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저자가 ‘공정한 사회’의 그림을 그리는 데 발 벗고 나선 것은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공정한 사회의 개념을 정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그래서 붙인 부제가 ‘역사적 고찰로 살펴본 공정사회의 이념논쟁’이며 책의 대부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에 할애돼 있다. 그러한 역사적 고찰에 기대어 저자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완전한 보완관계’를 이루는 사회를 공정한 사회의 모델로 삼는다.  

무엇이 공정한 사회인가? 저자는 두 가지가 핵심이라고 본다. 먼저 공정한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사회, 즉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이고, 다음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재활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70%가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만큼 공정한 사회라는 국정지표는 방향을 바로 잡은 것이긴 하다. 문제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일 것이다. 이때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계층 간 격차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공정사회는 “몇 %의 정부지출과 사회복지지출 국가로 갈 것인지의 문제”이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공정사회 개념이 기회균등은 강조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선택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지상주의 공정의 개념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서구의 정치경제사에 대한 개관은 “공정한 사회란 결국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의 가치가 자유 우선에서 평등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우리의 소득불균등을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시장개입 정도는 매우 열악한 수준이다. 흔히 정부가 시장에 너무 많이 개입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다. 구체적인 수치를 살펴보면, 2007년 기준 한국의 GDP대비 사회지출규모는 7.5% 수준으로사회복지를 지향하는 국가군과는 비교할 것도 없고, 자유시장을 지향하는 OECD 국가군 평균인 19%에도 훨씬 못 미친다. 결국 “우리 사회는 세계최고 수준의 자유지상주의(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공정한 사회가 공염불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계층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보다 실질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한편 불공정 사회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 정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일간지 경제부 기자 김진철의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은 언론과 시민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일단 경제를 알아야 한다는 것. “제대로 된 경제기사, 정의롭고 용기 있는 경제기자”도 절실히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시민 독자들이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떤 망상인가. 현 정부 초기에 고환율 정책이 별다른 저항 없이 이어졌던 것은 원화 약세로 수출이 늘어나면 경제가 성장하고 ‘나’에게까지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고,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와 비자금 조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편드는 이들이 있는 건 삼성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는 착각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런 헛된 믿음과 착각을 주입하는 것이 주로 언론이라는 데 있다. 힘 있는 자들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언론 본연의 역할은 내다버린 지 오래고, “광고주의 돈, 정부의 회유, 신문사주의 이익에 기자들이 복무”하고 있는 것이 저자가 비판하는 우리의 언론 현실이다. 이권과 결탁한 현혹적인 경제기사들을 통해서 전문적인 경제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들의 인식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경제기사를 읽되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고 경제부 기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방책은 없는가? 애초에 신문사도 기업이기에 이윤을 추구한다. 미디어라는 사회적 역할 수행과 함께 기업으로서 이윤도 창출해내야 하는 것이 언론의 딜레마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언론으로서 자기 역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하는 것이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조성되는 일이겠다. 그리고 기자들은 기자들대로 출입처 중심주의나, 기자단의 배타주의, 보도자료 기생주의 등의 구태를 벗고 전문성을 갖춤과 함께 기자로서 본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까칠한 의심’의 태도로 경제기사를 대하는 독자의 자세를 보탤 수 있다. 이 경우엔 독자가 아닌 기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이면서 비판적인 기사 읽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속지 않을 수 있으며, 힘 있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 것이 또한 공정한 사회로 가는 중요한 걸음이다.  

11. 03. 13. 

P.S. <공정한 사회란?>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책인데, 세계최고 수준의 자유지상주의 시장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란 지적이 흥미로웠다. 대신에 "2000년의 인류역사에서 만인평등의 의한 자유가 부여된 역사는 채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다."(99쪽) 같은 대목은 뭔가 아마추어리즘적이란 인상을 갖게 한다. '2000년의 인류역사'란 표현이 두어 번 나오는데, 저자는 '인류'를 어떻게 정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게다가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면 좀 과도한 '어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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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3-1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저 공정은 공허하게 정의가 실종된...의 약자가 아닐까요.

로쟈 2011-03-16 08:35   좋아요 0 | URL
그럴 듯하네요.^^;

비로그인 2011-03-1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公正이 公定으로 읽히는 건 낱말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지배권력의 담론으로 쓰이는 이상 空井이기 때문이겠죠...

로쟈 2011-03-16 08:35   좋아요 0 | URL
우물이란 비유도 아깝습니다.^^;

꼬마요정 2011-03-1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위 사회지배층의 입장에서 공정사회겠죠.. 돈과 권력의 경중에 따라 대접받는..

로쟈 2011-03-16 08:36   좋아요 0 | URL
한때 정의란 말이 그랬듯이, 공정이란 말도 의미가 변색될 거 같아요...

雨香 2011-03-1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레이코프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경제부문에서의 공정은 '신자유주의'가 그 프레임을 차지한 것 같습니다. 경제전문신문이나 경제주간지가 모두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이니까요. 그나마 이코노미 인사이트가 출간되긴 했습니다만 처음 몇 달 이후 이제는 힘이 쭈욱 빠진 느낌입니다.

로쟈 2011-03-18 11:40   좋아요 0 | URL
경제에 관해서는 '인사이트'를 원하지 않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