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혁명과 이란 현대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간행하는 월간 소식지 <출판문화>(544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을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칼럼으로 이달에는 '책으로 읽는 이슬람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었다. 읽은 책보다는 읽어야 하는 책이 더 많은 분야인데. 이번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부쩍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그래서 관련서들을 한데 모았다). 유엔 안보리가 군사개입을 결의한 리비아의 전황이 빨리 호전되기를 기대한다.



출판문화(11년 3월호) '우리의 시각'이 아닌 '그들의 시각'으로
‘책읽는 세상’은 ‘책으로 읽는 세상’이기도 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몰아치고 있는 혁명의 바람이 자연스레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튀니지, 이집트, 그리고 리비아. 재스민혁명으로 튀니지의 독재자 벤 알리가 21년만에 권력에서 축출됐고, 이어서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무바라크, 무려 30년간 이집트를 철권으로 통치했지만 이집트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그를 몰아내는 데는 단지 18일이 걸렸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를 뒤흔든 18일’이 이집트혁명을 가리키는 문구가 됐다. ‘세계를 뒤흔든 10일’, 곧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환기시키는 문구다. 1969년의 쿠데타 이후 42년째 집권하고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만이 탱크와 전투기까지 동원해가며 권력의 마지막 광기가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리비아의 시민군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중동에서 진행중인 ‘연속혁명’은 사막과 석유, 광신적 근본주의와 테러, 그리고 여성들의 베일 등으로 채워진, 이 지역에 대한 지배적 인상을 바꿔놓고 있다. 더불어 ‘이슬람혁명’으로 불린 1979년의 이란혁명 이후 32년만에 이슬람혁명이란 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지만 그래도 32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사실 이슬람이란 말보다, 그리고 이란이란 말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온 건 페르시아의 왕자와 공주들이었고, <아라비안나이트>였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를 얼마나 흥미롭게 읽었던가. ‘열려라, 참깨!’란 주문을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려본다. 언제였던가.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벌어진 성대한 기념행사 덕분에(정확하게는, 그걸 보도한 TV 덕분에) 미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초등학교(국민학교) 2학년이던 내게 각인됐었다. 그리고 이듬해 땅콩장수 출신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가 알게 된 미국의 첫 대통령이어서 미국은 한동안 ‘지미 카터의 나라’ 혹은 ‘땅콩장수의 나라’였다. 그리고 호메이니. 터번을 두르고 흰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1979년에 자주 TV에 등장했다. 그가 친미 편향의 팔레비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공화국을 세운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아야톨라 호메이니다(‘아야톨라’는 시아파 성직자의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고 본명은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란도 미국만큼 우리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길 법한 나라였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망각의 베일 너머에 있다. 마치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타고 사라진 것처럼.
생각해보면 그 망각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자신의 처지를 돌보기에도 바빴다는 이유다. 이란처럼 왕정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독재자가 있었고 그해 가을 그가 측근에게 암살당했다. 그렇게 하여 이란이나 우리나 똑같이 격변의 80년대를 맞게 됐다. 1980년 봄 이란에서는 또 다른 혁명으로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화하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우리에겐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그런 동시적․병행적 역사에 흥미가 생겨서 유달승의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를 손에 들었다.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서 본 이란 현대사’가 부제인 책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번이라도 우리의 눈으로 이란을 본 적이 있을까?”란 물음이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이란을 보자’를 기치로 내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광신자의 나라’ ‘억압적인 여성 차별 국가’라는 ‘이미지’로만 알려진 그 나라에도 우리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처럼 똑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가 대개 그렇듯 새삼스럽진 않다. 우리는 왜 우리의 눈으로 이란을 바라보지 못했을까? 우리의 시각이 아닌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 우리에게도 ‘악의 축’이 되고 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이념적 재단만이 미국의 주특기이자 주된 관심사인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이란 정책은 근본적으로 실리주의와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교훈은 우리도 우리 수준의 ‘실리주의와 현실주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란 정책도 일방적으로 친미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는 우리의 국익과 실리를 토대로 변화해야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테헤란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학자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정부 부처 과장의 시각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란은 풍부한 석유자원과 천연가스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장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란의 4대 교역국이고, 이란은 한국의 4대 원유공급국”이라는 것이 이란의 현실적․실제적 ‘의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우리의 시각’일까. 저자는 머리말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한국 기업들의 가전제품, 정보통신제품, 자동차 등은 이란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8년 한국과 이란의 교역 규모는 약 129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현 시점에서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이란에 대해, 우리의 입장에서, 제대로 아는 것임을 잊지 말자.” 이 정도면 저자의 방점은 ‘이란’이 아니라 ‘우리의 국익’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든다.



‘자원’과 ‘시장’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일반적 척도이자 지배적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으로 읽는 세상’은 그것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혹은 ‘우리의 눈’이 ‘우리의 국익’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그들의 눈’으로 보는 건 어떨까. 이란에 대해서라면 이란인들의 눈으로 보는 것 말이다. 가장 유익한 길잡이가 돼주는 건 마르잔 사트라피의 만화 <페르세폴리스>이다. ‘페르시아의 도시’란 뜻의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가리킨다. 이미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자전적 만화에서 저자는 이슬람 혁명기에 성장기를 보낸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펼쳐놓는다.
.JPG)
사트라피의 이야기도 1980년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10살이 된 1980년부터 학교에서는 베일을 써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진다. 1년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프랑스계 학교에 다녔지만 해가 바뀌면서 외국계 학교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타락의 상징이란 이유로 문을 닫게 했다. 그리고 여학생을 비롯한 모든 여성에게 베일 착용이 강제되었다. 이란식 문화혁명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대목이어서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에서 ‘문화혁명’ 장을 찾아봤다. 두 문단이 기술돼 있는데, 1980년 6월 문화혁명본부가 설치되고 곧이어 2년 동안 이란의 모든 대학이 폐교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유는 호메이니의 교시였다. “우리는 경제 제재나 군사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이 서구의 잘못된 사상에 오염되는 것이다.”
이란의 전통과 문화로의 복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교조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였던 이슬람공화국 하에서 여성의 삶은 특히나 힘겨운 것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인데다가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부모를 둔 덕분에 유학생활까지 경험하는 샤트라피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자유였다. 지식인에 대한 탄압과 사상에 대한 억압,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침해, 그리고 이라크와의 8년 전쟁으로 얼룩진 것이 그녀의 성장기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녀는 ‘이란인’이란 자긍심을 잊지 않았고 자신의 나라가 ‘소수의 극단주의들이 벌이는 잘못된 행동’으로만 판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 소녀의 성장기가 많은 사람의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내게 된 밑바탕일 것이다.



<페르세폴리스>를 읽고 나서 나는 더 많은 이란 여성, 더 많은 이슬람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의 시각’보다는 ‘그들의 시각’과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트라피의 후속작 <바느질 수다>도 구하고(<페르세폴리스>와는 성격이 좀 다른 책으로 ‘차도르를 벗어던진 이란 여성들의 아찔한 음담!’을 다룬다), 이슬람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의 자서전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와 이란의 격동기에 테헤란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했던 아자르 나피시의 회고록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에도 자연스레 손이 갔다.



제럴딘 브룩스의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도 당연히 빼놓을 수 없다. ‘Nine Parts of Desire’란 책의 원제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이슬람 시아파의 창시자라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지전능한 신께서는 성욕을 열 가지로 나누어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중 아홉 가지를 여성에게, 한 가지를 남성에게 주셨다.” 곧 ‘열의 아홉’이 여성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고로 ‘책으로 읽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건대, ‘이슬람 남성’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고작 ‘열의 하나’일뿐이므로.
11. 03. 19.



P.S. 초보적이긴 하지만 이슬람 지역에도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이슬람사 책들을 챙겨놓게 됐는데, 기본서는 아이라 라피두스의 <이슬람의 세계사>(이산, 2008)인 거 같다. 이슬람 역사 전문가인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2006)도 이번에 같이 구한 책이다. 이슬람사의 고전이라는 호지슨의 <이슬람의 모험>도 출간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