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일본의 대지진에 관한 뉴스 속보를 들으면서 쓴 글인데, 당장에 떠오르는 '천지불인'이란 말에 분량을 더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기분이었다. 위로의 말도 사치스러워 그냥 '행복할 자격'만을 문제 삼았다.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이후, 2010),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난장, 2010) 등이 뉴스를 들으며 내가 펼쳐놓았던 책이다. 사망자가 사만 명이 넘어설 거라고 하니 입이 떼지지 않는다...   

   

경향신문(11. 03. 15) [문화와 세상]누가 행복할 자격 있나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수천명의 시신이 해안에서 발견되고 있고, 한 어촌마을에서 30년 동안 쌓은 거대한 방조제는 흉물스러운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원자력발전소까지 폭발한 가운데 피해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 오른다.

이미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으며 만물을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고 했다. 제물로 만들어진 지푸라기 개는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숭배의 대상이지만 의식이 끝나면 바로 내팽개쳐진다. 인간의 운명 또한 한갓 지푸라기 개와 다를 바 없는 것일까. 그런 처지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 원조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는 ‘잘사는 것’ ‘잘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어떤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주어진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체적인 ‘활동’이라는 게 요점이다.

그래서 그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소나 말, 그 밖의 다른 동물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른과 같은 활동, 가령 시민으로서의 실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어린이’란 말은 그저 소망의 표현일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이를 좀 먹어야 한다.

어떤 활동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자신의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이다. 훌륭한 장군이라면 자기 부대를 잘 지휘하는 일, 좋은 제화공이라면 훌륭한 구두를 만들어내는 일이 ‘잘사는 것’이고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인간의 삶이 일시적인 운에 많이 좌우된다 할지라도 행복은 긴 생애와 관련되기에 행복한 사람은 변덕스러운 운을 견뎌낼 것이며, 결코 비참하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지진과 같은 재앙은 그런 어른의 행복이란 것도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보이게 만든다. 버텨낼 수 없는 불운이 닥치기도 하며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어린아이의 첫 경험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란 깨달음이 아니라,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말했다. 어른들이 무능력하다는 뜻이다. 정곡을 찌른 듯한 이 말을 풀이하면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마술뿐이라고 지적한다. 무엇이 마술인가. “행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지혜에 따르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정령을 병속에 잘 가둬놓아야 하고 집에는 황금동전을 낳는 당나귀나 황금알을 낳는 닭 한 마리쯤 있어야 한다. 행복은 누군가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의 호두나무나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에 달려 있다. 혹은 지진이 나느냐 안 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일본의 지진에 대해 원로목사님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신앙적으로 볼 때’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웃 나라의 불행에서 신앙의 동기를 찾는 것은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믿음과 멀지 않아 보인다. 천지가 어질지 않은 마당에 인간에게서 어짊을 찾는 것은 무리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누구도 행복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서 운명에 겸손할 수는 있다. 인간도 소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11.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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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5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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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6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14: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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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3-17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 이름으로' 서문이던가에 이런 지적이 있더군요. 3대 악의 축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