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 소식이다. 아마도 김기덕의 <아리랑> 이후인 것 같다. 홍상수의 열두번째 영화 <북촌방향>이 오늘 개봉했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지지하는 입장에서(인상의 편차는 있었지만) <북촌방향>이 또다른 기대작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어려운 제작여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찾고 매우 부지런하게 영화를 찍는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이자벨 위페르 주연작도 얼른 개봉되면 좋겠다. 조금 일찍 올라왔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08. 26) “방식 다르면 생각도 달라…‘즉흥 촬영’ 밀고 나갔다”

한국의 영화감독 중 의뭉스럽기로 따지면 홍상수(51)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술에 취한 채 쉽게 찍힌 듯한 어느 장면이 사실 50번의 테이크 끝에 얻어낸 것임을,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만 사실 그들이 받는 출연료는 거의 없음을, 굵고 뭉툭한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속에 사실 인생에 대한 반짝이는 성찰이 숨어있음을, 아는 사람만 안다. 



9월8일 개봉하는 「북촌방향」은 그의 열두번째 장편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1~2년에 한 편씩 작품을 내놓던 그는 최근엔 1년에 2편을 내놓을 정도로 다산하고 있다. 그는 이미 프랑스 최고의 여우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차기작 「다른 나라에서」의 촬영까지 마친 상태다. 어떤 배우들, 어떤 관객들을 ‘신흥종교에 감화된 신도’처럼 거느린 그를 24일 서울 압구정에서 만났다.

-당신의 작품은 ‘최근작이 최고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홍상수 감독은 “인생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몇 개 없는데 그중 하나가 영화”라며 “싸구려로 안 하면 보답이 올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운”이라고 말했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미친놈도 아니고. 어떤 작품을 끝내면 ‘기분’이 있는데, 이번엔 나쁘지 않았다. 장르영화처럼 ‘이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 정해놓고 만들진 않는다. 다양한 반응이 있으면 그걸로 영화가 완성된다.”

-가수 백현진은 ‘술먹고 노는 장면은 홍상수가 제일 잘 찍는다’고 말했다.

“헛소리다. 술자리 장면이라고 특별히 생각하는 건 아니다. 골목길 장면, 밥먹는 장면과 마찬가지다. (밥먹을 때도 반주를 먹던데) 글쎄. 왜 그럴까.”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촬영했다고 들었다. 

제작방식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방식이 다르면 생각해 나오는 게 달라진다. <옥희의 영화>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구상이 없이 촬영을 시작했다. 이틀 전 정해 배우를 불러 1부를 찍고, 다시 정해 2부를 찍는 식이었다. 이번엔 그 방식을 더 밀고 나갔다. 전체적인 구상이 없이 첫날 찍고 둘째날 찍으니 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북촌방향」에선 김보경이 1인2역을 한다. ‘두 여인’의 테마는 당신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내가 오만가지 인물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 삶에서 나온 것들이 새 배열을 찾고 새 표현방식을 찾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비슷한 방식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에는 말로 집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덩어리들이 있다. 옛 여자와 닮은 여자를 찾는 것도 한 덩어리다. 그 덩어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고 공유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하는 영어 대사 영화다.

“파리에서 위페르를 본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로 기회가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했는데, 이번에 위페르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 내한한다고 전화가 왔다. 낮에 점심 먹는데 데려갈 데도 없어서 「오! 수정」과 「북촌방향」에 나온 고갈비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거기서 엉겁결에 출연하자고 얘기가 됐다.”

-갑자기 다작 감독이 됐다. 몇 편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나.

“그런 멍청한 목표가 있을 리가. 지금은 영화 만드는 게 중요하고 좋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계속 만들고 싶다.”

-작품에 대한 영감이 마구 나오나.

“‘이 때쯤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예를 들어 가을에 바람 부는 제주도에서 뭔가 찍고 싶다는 생각이다. 거기 맞춰서 한 번 해보는 거다.”

-영화, 책, 연극이 아닌, 주로 그림을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침대 위에 화집이 몇 권 있다. 세잔, 마티스, 렘브란트, 피카소… 멍하니 그림을 보면서 내가 이 그림을 왜 좋아할까 생각하는 게 재미있다. 그렇게 두 세 장 보다가 잠든다.”

-요즘 영화는 잘 안보나.

“영화에도 원형이 된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을 접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하는 건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많이 했다. 이제 그 이상으로 레퍼런스가 될 사람이 나오진 않는 것 같다.”

-요즘 당신 영화에 ‘착해서 좋아’라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제일 좋은 건 착한 사람이다. 우리들이 아기들을 보고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아무리 머리가 헝클어져도 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슬금슬금 용기가 난다.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지만 이런 착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힘이 난다.”

■영화 「북촌방향」은
지방에 살면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는 감독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놀러와 북촌에 사는 친한 선배 영호(김상중)에게 연락한다. 영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성준은 북촌을 배회하다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옛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고, 마침내 영호 무리와 ‘소설’이라는 카페에서 술자리를 갖는다. 이 술자리는 기묘하다. 여러 차례 보이는 술자리는 하루에 일어난 일 같기도, 여러 날 반복해서 일어난 일 같기도 하다. ‘소설’은 시간이 뒤섞이는 마술 같은 공간이다. 선형의 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 관객의 감각이 매혹적인 혼란에 빠지는 공간이다. 성준은 이곳에서 서툴게 피아노를 치고, 옛 애인을 닮은 카페 사장을 만나 동침하고, 마침내 탈출해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부는 성준이 이 지루하고 비루한 삶의 궤도에 영원히 포박됐다고 말하는 듯하다. 「오! 수정」에 이은 홍상수의 두 번째 흑백영화다.(백승찬 기자)


11.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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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9-0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석과 이은주가 연인으로 나왔던 '오! 수정'...그때 이은주가 스무살이었을 겁니다.

그리고...김보경 좋아하세요? '친구'에서 이쁘게 나왔고 드라마 '깍두기'에서 김승수 아내로 나온 게 기억나네요.늘씬하고 세련된 여인 역을 하던데 홍상수 영화에선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군요.

로쟈 2011-09-10 10:39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봤는데, 이 영화에서도 매력적으로 나옵니다.

무당광대 2011-09-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영화에선 관념적인 대화들을 많이 나누는데, 웃기면서도 슬프고 그래요. 딱 체홉 단편소설 같아요.

로쟈 2011-09-11 11:08   좋아요 0 | URL
체홉의 인물들보단 더 지적이긴 하지만, 서로 자기말만 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는 점은 딱 닮았습니다.^^

msjpolitics 2011-09-14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갈수록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너무 어릴때봐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북촌방향은 기회가 되면 한번 봐야겠습니다. 요새 이리저리 "밤과 낮"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를 봤는데, 그 대사 하나하나가 웃기면서도 참 불편하게 만들더라구요. 유준상도 괜찮지만, 저는 김영호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안봐서 뭐라고 말하기는 좀 그러네요.

로쟈 2011-09-14 17:51   좋아요 0 | URL
<밤과 낮>을 아직 못 봤는데, 유준상의 연기는 좋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하하하>에서도 그렇고 '홍상수 연기'를 마스터하는 듯해요...

philocinema 2011-09-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 전작품중 유일하게 dvd 출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상암동에서 홍감독 '전작전'할 때 가서 보고 왔지요.
dvd로도 출시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로쟈 2011-09-22 13: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9-2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 수집중인데, <밤과 낮>만 안 보여서 늘 애태우고 있네요..^^

로쟈 2011-09-22 13:23   좋아요 0 | URL
영화에 대해서라면 샥샥님이 할말이 많으실 듯해요.^^

영남자파 2011-09-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은주는 가고 오수정은 남았는데...
오수정은 여성과 남성의 시각이 다르다는 생각이..
얼마전에야 도서관에서 봤는데 껍디기에 "키스하고싶다" 라고 어떤 형제님의 염원이 있길래 진짠가 분석해가면서 봤더니...허 참!

로쟈 2011-09-27 08:27   좋아요 0 | URL
오수정을 최고작으로 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뒤늦게 이중톈을 읽고 있다. 그의 책을 대부분 갖고 있지만 나는 지난 여름 <초한지 강의>(에버리치홀딩스, 2007)와 <백가쟁명>(에버리치홀딩스, 2010)을 흥미롭게 읽으면서 비로소 그의 독자가 됐다. 최근 읽고 있는 건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에버리치홀딩스, 2008)인데, 발행일이 2008년 5월 15일이고 구매일도 똑같다. 책이 나오자 마자 구했다는 걸 알겠다('이중톈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은 날도 5월 15일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다른 책들에 떠밀린 듯하고 정작 손에 든 건 3년도 더 지난 다음이다. 독서도 다 때가 있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제국을 말하다>에 이어서 <제국의 슬픔>(에버리치홀딩스, 2007)과 <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은행나무, 2008)까지 독서목록에 올려놓고 있다(책을 어디다 두었는지 조만간 찾아봐야겠다). 저자 스스로 대표작이라 꼽기도 한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 보니 작년 여름 것이 있기에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7. 24) 중국제국의 재건과 ‘역사 망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가 신성로마제국을 두고 퍼부은 독설에 가까운 촌철살인의 풍자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기까지 시나브로 국력이 쇠잔하고 분열이 이어지면서 17세기부터는 껍데기만 남은 제국이었다.

중국이 초강대국도 아니고 선진국도 아니며 제국은 더욱 아니라는 엄살 섞인 항변을 들고 나올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볼테르의 명언이다. 현대 중국의 설계자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기른다)를 당부할 때만해도 그런 이중성은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화평굴기’(평화롭게 우뚝 선다)를 부르짖는 지금의 중국이라면 사뭇 달라진다. 중국은 동양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진시황 이래 2132년 동안 제국으로 호령한 화려무비한 전력이 있지 않은가.

중국의 인기 역사저술가 이중톈은 화려한 중국 역사의 겉면보다 쓰라린 실패와 아픈 기억을 <제국의 슬픔>이란 책으로 담아낸 바 있다. 이중톈이 자신의 최고 역작이라 자신 있게 말한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에버리치홀딩스)에서 과거 중국제국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해부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는 중국 역사를 제국 시스템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치사와 문화사를 아우르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재구성했다. 이중톈이 진시황 이래 청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제국 유지의 핵심요소로 꼽은 것은 ‘중앙집권’ ‘윤리치국’ ‘관원대리’(官員代理) 세 가지로 요약되는 시스템이다. 진시황이 군현제와 그에 걸맞은 관원대리라는 하드웨어를 창조했다면, 한무제는 여기에다 윤리치국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더해 완벽한 제국의 틀을 만들었다. 윤리치국이란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 가운데 유가를 정치의 도구로 채택한 것을 일컫는다. 한나라 이후 모든 왕조는 이 트로이카를 앞세워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왕조의 명맥을 유지했다. 20세기 초 들어 강대한 제국이 하루아침에 자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이 시스템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는 중국의 실정에 맞는 ‘공화’ ‘민주’ ‘헌정’만이 미래의 근본 해결책이라고 처방했다. 중국 학계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몰라도 이중톈은 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중톈이기에 그의 한마디는 무겁게 들릴 수밖에 없다. 순환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제국이란 제도는 그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 도달한 제국은 무너진다. 무너진 제국은 제국을 형성했던 사회구조나 구성원의 삶의 질이 이전보다 훨씬 열악해진다. 영웅적 지도자가 나타나 다시 통합을 시도하고 제국이 재건된다.

중국이 또다시 세계 제국으로 굴기하는 걸 보면 순환론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과시한 ‘한·당(漢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이미 제국의 야욕을 세계 만방에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나라 때나 당나라 때나 한민족의 역사는 아픈 기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잖아도 최근 중국의 행태는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중국 제국이 될 지 모른다는 점을 확연히 각인시켜주고 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중국인들의 특성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역사적 교훈은 제국이 혼자 강압적인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중국계 미국 석학인 에이미 추아는 명저 <제국의 미래>에서 제국의 필요조건으로 ‘관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89년 베이징의 봄 이후 중국은 청년 정신까지 성장을 멈췄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중톈도 지적하듯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다시 역사의 심판을 받고 말리라.(김학순 기자)  

11. 09. 07. 

 

P.S. 이중톈과 함께 또 몰아서 읽으려는 저자는 이중톈 못지않은 필력을 자랑하는 중국사학자 레이 황이다. 그의 책도 번역된 건 모두 갖고 있는데, 일단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푸른역사, 2001)를 책상 가까이에 옮겨놓았다. 진순신의 <중국사 이야기>까지 더하면, 내내 중국사 이야기를 들으며 올가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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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의 위대함
    from 아흐퉁! 미잔트롭 2011-09-08 06:08 
    요즘 중국을 보면 저 나라가 공산당 나라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사회 경제 제도에 자본주의의 요소들를 파격적으로 도입하고도공산당은 엄연히 존재하고 평범한 서민의 집 벽에 모택동 초상화가 걸려있는 현상은 참 묘하다.러시아의 초기사회주의자들은 농노를 해방시킨 짜리를 암살했다. 러시아는 혁명초기에 마지막 황제의 가족을 총살시키고 암매장했다.마지막 황후의 언니는 산 채로 우물에 던져졌다. 새 러시아에서 마지막 황제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베르톨루치의 <마
 
 
미국사람 2011-09-08 00:49   좋아요 0 | URL
에이미 추아를 석학으로 <제국의 미래>를 명저로 꼽는 것은 약간 심한 느낌..
여러가지 책을 잘 섞어서 배낀 정도의 책입니다.

그것보다는 애 키우는 법 소개서인 타이거 마더( Battle Hymn of the Tiger Mother) 정도가 에이미 추아에게 맞는 듯 합니다.

예일대 교수 이긴 하지만 법대교수이니 수준에 오른 역사 서적을 쓰기에는 조금 힘이 부친 듯 합니다.

로쟈 2011-09-09 09:51   좋아요 0 | URL
독자에 따라 평가는 다른가 봅니다. 그래도 한국에선 예일대 교수란 후광이 있지요...

2011-09-08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획회의(30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리링의 <논어, 세번 찢다>(글항아리, 2011)에 대한 독후감을 적었다. 리링의 책은 이중톈의 <백가쟁명>(에버리치홀딩스, 2010)과 함께 이번 여름에 읽은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 실제로 이중텐의 <백가쟁명> 원저는 <논어, 세번 찢다> 이후에 나온 책으로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과 함께 리링의 <상가구>도 종종 언급한다. <상가구>도 얼른 번역되면 좋겠다...  

기획회의(11. 09. 05)  지식인 공자를 읽다

'공자'를 다시 읽고 있다. 아니 다시 보게 됐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싶다. 우리에게 ‘공자왈’의 공자만큼 친숙한, 고루할 정도로 친숙한 ‘성인’이 달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읽고, 다시 보게 됐는가. 두 종류의 공자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논어, 세번 찢다>의 저자 리링의 말이다. “역사적으로 두 종류의 공자가 있다. 하나는 <논어>에 있는, 피가 흐르고 살이 붙어있는, 살아있는 공자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 사당 안에 있는, 빚어지고 조각된, 향불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리기 위한 공자이다. 전자는 진짜 공자이고 후자는 가짜 공자이다.” 이러한 일갈에 덧붙여 그는 이렇게 묻는다. “어느 공자가 더 사랑스러운가?”  

사랑스러운 공자? ‘공자’하면 자동적으로 ‘성인 공자’를 떠올리게 되는 우리로선 불경스럽게도 들리지만, 한편으론 통쾌한 느낌도 준다(사랑스러운 공자라니!). 새로운 발견의 쾌감이고, 해방의 쾌감이다. 리링의 제안은 물론 우리가 가짜 공자가 아닌 진짜 공자, 살아있는 공자와 대면해보라는 것이다. 그 진짜 공자는 ‘집 잃은 개’라고도 불린 불우한 지식인으로서의 공자다.  

 

우리 번역본에서 흔히 ‘상갓집 개’라고 옮겨진 ‘상가구(喪家狗)’를 리링은 ‘집 잃은 개’로 풀이하는데, 이 말의 출처는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세가’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 그의 행색을 보고 한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몹시 지친 것이 마치 집을 잃은 개와 같다고 말한다. 자공이 이 말을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외모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집 잃은 개 비슷하다고 말한 것은 맞구나, 정말 맞구나!” 춘추시대라는 난세를 살면서 이상을 펴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말년까지 여러 나라를 주유했지만 공자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성공한 건 많은 제자를 가르친 것이며 그들로부터 깊이 존경받은 일이 그의 생애를 가치있는 것으로 조명해준다. 요컨대 진짜 공자는 “성인이 아니라 민간의 학자이자 사립학교의 선생님이었을 뿐이다.” ‘집 잃은 개’라고 불려도 자기 처지가 정말로 그렇다고 맞장구친 이가 바로 공자였다.  

베이징대 교수로 고고학, 고문자학, 고문헌학의 대가로 통한다는 리링은 그런 공자의 모습을 재조명하기 위해 <상가구>란 책을 펴내는데 원래는 2004-2005년에 베이징대에서 <논어>를 통독한 수업 강의록이다(<상가구>도 ‘리링 저작선’으로 번역돼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책이 나오자마자 제목이 주는 인상 때문에 리링은 원색적인 비난과 저열한 인신공격에 시달린다. ‘성인’을 모욕했다는 게 주된 이유다. 그가 <논어, 세번 찢다>를 연이어 펴낸 건 그런 비난에 대응하여 무엇이 오해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자신의 주장을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의도가 없을 리 없다. “나의 연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불어닥친 복고의 광풍을, 거의 미친 듯이 보이는 이 기이한 현상을 겨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논어>를 이해하려면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지침을 <논어, 세번 찢다>에도 적용해보자면, 이 ‘복고의 광풍’은 왜 문제가 되는가. 

리링이 ‘지난 20여년’이라고 지칭한 건 대략 1980년대 말부터다. 이후에 지금까지 중국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다는 공자 존숭 현상은 리링으로선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상식과 이치에 어긋난다고 판단해서다. 무엇이 상식인가. 일단 공자가 계급사회의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논어>에서 ‘사람 인(人)’과 ‘백성 민(民)’이 한 구절에서 대구를 이룰 때 ‘사람’은 인텔리(군자)를 가리키고 ‘백성’은 대중(소인)을 뜻한다. 공자의 관심은 오직 군자와 관련이 있을 뿐이며 소인과는 무관했다.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건 마르크스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종교이지만 공자는 도덕적인 가르침만 남겼을 뿐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리링이 보기에, 공자에 대한 대중적 숭배는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논어>의 한 대목을 리링을 따라 읽어본다. ‘자로’편에서 ‘화이부동’이란 유명한 문구가 나오는 대목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되 동일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을 추구하되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신영복의 <강의>(돌베개)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이다. 신영복은 그런 해석이 ‘화동론’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새로 해석한다. 이런 근거에서 ‘군자화이부동’은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여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소인동이불화’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는 게 옳다는 견해를 밝힌다. 종합하면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란 뜻이 된다.    

 

반면에 리링은 ‘화’를 상류사회에서의 ‘조화’란 뜻으로 읽으며 이것은 구별의 기초 위에서 추구된다고 말한다. 구별이란 차이이고 차등이다. 조화란 고양이와 쥐처럼 서로 다른 것을 한군데 섞어놓을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여 ‘동’은 하층사회에서 부르짖는 ‘평등’으로서의 ‘동’이다. ‘동’이란 남녀가 같고, 군관과 사병이 같다는 등의 사회적 평등을 의미한다. 군자는 이러한 동을 말하지 않으며, 묵자식의 ‘같음을 숭상함’은 공자가 보기에 소인의 도이다. 공자는 인(仁)을 말하지만 그 또한 구별과 차등에 근거한 사랑으로 평등이나 박애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리링의 주장이다. 요점은 ‘공자왈’의 신화를 걷어내자는 것이다. 일종의 ‘공자 바로 보기’다. 

그런 점에서 리링은 1919년 중국의 5.4운동 정신을 계승한다. 당시 ‘공자의 거점을 타도하자’란 구호를 그는 ‘전통의 단절’에 대한 요구로 이해하지 않는다. 실제 타도대상은 ‘공자의 거점(孔家店)’이 아니라 ‘주가의 거점(朱家店)’이었고, 이는 공자가 성전에서 내려와 제자백가로 되돌아가게끔 했다. 난세를 살았던 한 지식인이 공자 본래의 모습이며, 리링은 “내가 그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법은 그를 지식인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성인 공자’보다는 그가 제시한 ‘지식인 공자’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공자는 어느 쪽인가. 

11.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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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9-0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쏙쏙 들어오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저희 애기는 벌써 콜록이랍니다.^^;

로쟈 2011-09-07 17:29   좋아요 0 | URL
네 조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10월쯤 되면 애를 먹곤 하지요.^^;
 

'두 권의 계간지'라고 제목을 붙이려다가 밋밋한 듯싶어서 좀 세게 고쳤다. 그래도 실상은 <문화과학>과 <실천문학> 가을호, 두 권의 계간지에 대한 리뷰기사다. 기자들은 기사거리가 없을 때 이런 기사를 쓰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보로서 유익하다.  

   

경향신문(11. 09. 06) 금융위기는 헤게모니 싸움서 비롯…자기통치의 ‘코뮌 공동체’가 해결책

‘혁명의 시기’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세계체제론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모든 혁명과 반혁명은 전 지구적 헤게모니(패권) 국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정립을 위한 다툼이 시작될 때 벌어졌다. 세계가 영국이 주도하는 질서 체제로 전환할 때 프랑스혁명(1789)이 발생했다. 미국이 전 지구적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던 시기에 러시아혁명(1917)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2007년 시작된 금융위기로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이 점쳐지는 지금은 어떨까. 계간 ‘문화/과학’ 가을호는 ‘혁명의 계보학’을 특집으로 다루며 현 상황도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총론에서 “금융위기는 주기적 경기침체의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구조적 차원에서 변혁되는 지구적 헤게모니 이행의 문제와 연관돼 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체제론자 조반니 아리기의 주장이 이해를 돕는다. 그는 19세기의 패권국은 영국, 20세기의 패권국은 미국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패권 국가의 부침을 보면 일반적인 구조가 보인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헤게모니 국가로 금융자본이 집중되고 기축통화의 변화가 나타난다. 헤게모니 국가는 두번째 단계에서 세계 실물경제를 지배하며 이윤을 뽑아낸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실물경제가 침체되는 대신 금융부문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후 급격히 쇠락한다. 자연스레 오늘날 미국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 시대 가장 뼈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하층계급이다. 헤게모니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패권 국가는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에 골몰하면서 착취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국제통화기금(IMF)이 신자유주의를 전 세계에 강요한 것이 대표적이다. 더구나 미국이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긴축재정으로 선회한 이상 주요 경제국들 역시 따라갈 수밖에 없어 복지는 무너지고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된다. 이미 이스라엘, 칠레, 영국 등에서 물가폭등과 긴축재정, 청년실업 등의 문제로 시위가 빈발하고 있다. 

 
1907년 러시아 노동자도서관. ‘니조프킨 도서관’은 노동자들이 자기 수입의 2%를 내고 자산을 정치적 대의명분에 따라 공유하는 ‘공동금고’를 운영했다.

변혁은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러시아혁명을 분석한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을 분석한 안태환 부산외대 HK연구교수의 논문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떠오른다. 그 핵심은 자기통치를 핵심으로 하는 ‘코뮌적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이 교수는 “노조도, 혁명적인 당도 존재하지 않던 러시아에서 1905년의 혁명이 분출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코뮌 경험 덕택”이라고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1860년대부터 각 지역 농장에 코뮌 공동체가 존재했다. 여기에 1905년 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기계몽의 열망을 품은 노동자들이 일요학교, 민중의 집, 협동조합을 설립해 활동하면서 주체적인 능력을 키웠다. 이 교수는 “1905년 혁명은 반세기 이상 준비돼온 것”이라고 말한다.

안태환 교수는 1999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볼리바르 혁명’을 “좌파 지식을 가진 지식인, 정치 세력화된 노조, 기존의 사회주의 정당이 선도한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1989년 베네수엘라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해 일어난 ‘카라카소’ 대시위 이후 이미 ‘주민평의회’ 등 공동체가 조직돼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5만여개의 마을 중 1만5000여곳에 주민평의회가 조직돼 있다. 이들은 차베스의 정책을 자유롭게 논쟁하고 비판하면서 직접 항의도 한다. 이러한 자기통치적 주민평의회와 조합운동이 20세기 현실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생산수단의 ‘전면적 국유화’보다는 ‘사회적 소유’를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방식의 혁명을 일궈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혁명이 단순한 국가권력의 쟁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말하는 혁명은 세계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고 창안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황경상 기자)    

경향신문(11. 09. 05) 하버마스·푸코의 빈자리, 지 젝·가라타니가 채웠다

2000년대 한국사회에서 풍미한 사상가는 누구일까. 맨 앞줄에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이 자리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2000년대 이후 지젝의 저서는 23권, 가라타니의 저서는 12권이 번역됐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미셸 푸코의 인기는 다소 떨어졌다. 하버마스와 푸코의 저서는 2000년대 이전에는 각각 16권, 11권이 번역됐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10권, 7권이 소개됐다. 이 밖에 자크 데리다의 저서는 2000년대 이전 7권, 2000년대 이후 8권으로 꾸준히 소개됐다. 조르조 아감벤과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는 2008년 이후에만 7~8종의 번역서가 집중적으로 나와 한국 지식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임이 증명됐다.

이 같은 현상은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문학)가 계간 ‘실천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포스트-근대문학의 시대, 또는 연장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소개됐다. 천 교수는 한국 지식계의 지형을 해외 사상가의 번역서 현황으로 살펴본 뒤 이 중 한국문학과 관련, 가장 의미 있는 지점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다기한 반응을 살펴보았다. 

천 교수는 “한국 문학문화의 주체들이 ‘거부’를 포함해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명제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하는데 2000년대 한국문학의 풍경 전반이 담겨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당초 ‘종언’의 의미와 달리 문학활동이나 비평이 권력의 억압이나 자본의 침탈로부터 인간을 방어하는 데 바쳐지지 않고 ‘문학 자체’를 지키는 데 소용된 전도 현상은 ‘한국 근대문학의 죽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고 진단했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6년 번역, 출간된 후 사상서로는 특이하게 1만부가 판매됐다. 천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탈정치화된 문학에 대한 분노가 이 책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고 해석했다. 아울러 이 책이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문학사 논의”였음에도 실제 논쟁은 거의 없었고, “문단시스템에 깊이 연루될수록 가라타니의 주장에 생래적 반감을 보인 반면, 현존 문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일수록 종언 테제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천 교수는 “종언이란 명제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문학판의 기득권자들, 오늘날 문단문학 재생산의 주체는 자본의 메커니즘에 철저히 종속돼 있거나 그 자체로 자본이 되어 있다”면서 “문학의 정치적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종언론이 쓰여야 함에도 과거로부터 유지돼온 문단권력을 유지하는 데 바쳐졌다”고 말했다.

한편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같은 계간지에 실린 ‘슬라보예 지젝, 사유의 반란’이란 글에서 한국사회에서 지젝 열풍의 원인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영화를 독특하게 분석하는 대중문화 비평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와 혁신이라는 알튀세르의 문제 설정을 계승했다”면서 “최근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철학자인 발리바르, 라클라우, 바디우, 랑시에르 역시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이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젝은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의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에 희망과 대안을 찾는 급진적인 흐름을 유지,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2008년 촛불시위는 타인의 ‘믿음에 대한 믿음’(이데올로기)을 해체하라는 지젝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젝의 주장이 점점 더 한 탁월한 철학자의 ‘원맨쇼’로 비춰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그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현실정치와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한윤정 기자) 

11. 09. 06.  

P.S. 혁명을 주제로 한 책을 몇권 더 골라봤다. 이중 <혁명의 현실성>의 원제는 <혁명의 리허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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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생각의나무, 2011)은 지지난주쯤 나온 책인데, 마땅한 소개기사가 뜨지 않았었다(그렇게 넘어가는 책들이 적지 않다). 다시 검색해보니 기사 하나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30년 전 책이지만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노동운동가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평했다. "기존 노동운동 개념의 오류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의 분석은 현실사회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작별하지 않은 채 그를 뛰어넘고 싶은 활동가들에게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하다."   

경향신문(11. 09. 03) 30년전 예견한 노동현실…프롤레타리아는 혁명 주체가 아니다

“한 세기 이상 동안, ‘프롤레타리아’ 사상은 자신의 비현실성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그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자체만큼 시효가 지난 것이다.”

프랑스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인 앙드레 고르는 1980년에 쓴 책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에서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주체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에 작별을 고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이 이미 자본주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자본의 복제품’으로서 지배질서에 편입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해도, 그들은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지배계급)가 되어 “계급의 이름으로 행하는 억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고르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며 대신 ‘신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비노동자들의 비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운다. 그가 말한 ‘비계급’은 자동화와 정보화에 의한 노동의 소멸과정에서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노동계약과 노사 합의에 따라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는 노동자들의 계급과 다르다. 고르는 “이런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이제 특혜받는 소수층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는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새로운 주제는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감소로 그 자체가 목적이고 보상인 자율적 활동을 최대한 확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자 새로운 혁명의 주체와 과제를 제시한 이 책은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 책의 부록으로 1978년에 쓴 ‘실업의 황금시대’라는 글에서 고르는 “자동화시대에는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더 이상 고용창출이 생겨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경제성장으로 인해 심지어 고용이 감소한다”며 오늘날 ‘고용없는 성장’을 정확히 예견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20여년간 간호하다 생전에 함께 약속한 대로 파리 교외 시골마을의 작은 집에서 잠자듯 침대에 나란히 누워 삶을 자유의지로 마감한 앙드레 고르. 그는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할 만큼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는 프랑스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자리 나누기와 함께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기도 했다.(주영재기자) 

11. 09. 04.  

P.S. 앙드레 고르의 책은 <D에게 보낸 편지>, <에콜로지카>가 더 번역돼 있다. <경제적 이성 비판>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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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 2011-09-04 23:36   좋아요 0 | URL
오래 기다리던 책이 나왔네요^^

로쟈 2011-09-05 08:23   좋아요 0 | URL
30년만입니다!^^

park6 2011-09-05 21:01   좋아요 0 | URL
아...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감동받은 기억이 나네요~ㅎㅎ

로쟈 2011-09-05 23:47   좋아요 0 | URL
닭살이었단 분들도 계시더군요.^^

허스키 2011-09-06 23:54   좋아요 0 | URL
'D에게 보낸 편지'는 아내가 직접 골라서 신혼여행에 가져가 함께 읽었던 책입니다. 불현듯 의자에 앉아 함께 햇빛 속에서 책을 읽으며 느끼던 그 바람이 그리워집니다.

로쟈 2011-09-07 17:10   좋아요 0 | URL
각별한 인연을 갖고 계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