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영연방권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문학동네, 2011)이 출간됐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이주의 문학서'로 충분히 꼽을 만하다.   

  

한국일보(11. 09. 03) 환상·현실 넘나들며 풀어낸 인도 현대사

인도 현대사를 역동적으로 펼쳐내는 <한밤의 아이들>은 20세기 영연방권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다. 인도 출신의 살만 루슈디(64)가 1981년에 출간한 이 소설은 그 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았고, 1993년에는 부커상 제정 25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2008년에는 부커상 제정 40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됐다.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에서 계속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다. 198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됐으나 절판된 것을 이번에 다시 번역해 냈다. 



소설은 1947년 인도가 독립하는 하던 날인 8월 15일 0시 정각에 태어나서 신생 독립국 인도의 운명과 함께 하게 된 살림 시나이의 서른 해를 그린 작품. 신화와 역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 며 지극적 개인적 시각에서 인도 현대사를 풀어내는데, 이 작품만큼 현대 인도에 대해 폭 넓고 역동적인 서사를 들려주는 소설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설은 서른 살인 살림이 매일 밤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연인인 파드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인도가 독립하던 날 0시에서 1시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살림을 포함해 1,001명으로 '한밤의 아이들'로 불린다. 이들은 텔레파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하는 미모, 시간 여행을 하거나 성별을 마음대로 바꾸는 능력 등 신비로운 능력을 가졌는데 그들만의 의회를 조직해서 인도의 미래를 열기로 기획하지만 서로간의 갈등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이후 살림은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동-서 파키스탄 전쟁에 참전하며 인디라 간디가 선포한 비상사태 중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는 등 현대사의 굴곡을 겪게 된다. 이야기를 듣는 파드마는 독자를 대신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의심을 나타내거나 역사적 사실을 점검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루슈디는 다양한 인도 신화를 활용하고 기발한 언어 유희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무거운 역사적 사건을 때로 코믹하고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예컨대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숨은 의도는 살림과 '한밤의 아이들'의 능력을 지구표면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이후 인도에서 '루슈디의 아이들'이란 신진 작가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송용창기자) 

11. 09. 03. 

 

P.S. 루슈디의 또다른 대표작 <악마의 시>(문학세계사)도 오랫동안 품절상태였다가 작년에 다시 나왔다. 이번 가을엔 루슈디를 독서목록에 올려놓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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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보선과 맞물려 일찌감치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다. 어제는 안철수 교수가 시장 선거 출마를 고려중이란 기사가 정치면 톱뉴스였다. 그런 즈음이라 이주에 나온 책 가운데, 손호철 교수의 <현대 한국정치>(이매진, 2011),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 2000년대 편>(인물과사상사, 2011)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앞으로 어떤 시대를 살 것인지 생각해볼 '의무'가 있다.   

  

한국일보(11. 09. 03) 진보의 두 시각으로 바라 본 갈등의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는 '압축 성장'이니 '한강의 기적'이니 하는 경제적 찬사의 한편에서 끊임없이 다투고 대립하는, 뺏고 빼앗기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역사였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중심에 두는 진보의 시각으로 일관되게 분석해온 손호철 서강대 교수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이름난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한국 현대사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손 교수가 자신의 '한국정치 연구 종합판'이라고 소개하는 <현대 한국정치>(이매진 발행)는 이미 냈던 <현대 한국정치-이론과 역사> <해방 60년의 한국정치>를 합치고, 2006년 이후 쓴 노무현 이명박 정부 관련 논문을 더해 무려 900쪽에 가까운 단행본 한 권으로 만든 책이다. 해방 이후 정치체제 분석에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진보연합정치론까지 20여 년에 걸쳐 '민중사관이라고 부르는 진보적 시각에 기초해' 쓴 글들을 모았다.

옛 논문들이지만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해방 공간의 쟁점을 살핀 글들이나, 1950, 60년대 조봉암과 박정희의 대결 속에서 극우반공ㆍ개발독재체제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존재했던 진보적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내려는 노력들은 여전히 눈길을 끈다. '자학사관'이라는 보수세력의 비난의 표적이 되면서도 그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 드물게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논지를 일관되게 펴고 있다.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평가하고 향후 진보진영의 미래를 짚는 논문들은 지금 현실 정치 속에 살아 있는 글들이다. 손 교수는 두 정권의 민주화 업적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 정권에 대한 보수의 '좌파' 딱지 붙이기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서 사회양극화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다. 같은 맥락에서 내년 총선ㆍ대선을 앞두고 진보세력의 '선 진보대연합, 후 조건부 민주대연합'을 주문하고 있다. 

 



강 교수는 시리즈로 내고 있는 <한국 현대사 산책>의 '2000년대 편'(인물과사상사 발행)을 노무현 시대에 초점을 맞춰 5권으로 묶었다. 194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내온 기존 시리즈 중 권수가 가장 많다. 동시대 이야기라서 그가 늘 저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언론 자료가 풍부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만큼 이 시기가 파란만장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등 모든 이념적, 정치적 경계를 가로 질러 모든 시각을 다 소개하는 기록에 무게를' 둔다는 원칙에 따라 강 교수가 훑어 내려간 지난 10년의 한국 현대사는, 우리 모두가 불과 얼마 전 겪어 낸 사건들인데도 마치 드라마를 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다. 9ㆍ11 테러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제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는 코드를 찾아낸다. '역사는 룸살롱에서 이뤄지는가'(룸살롱 접대 비리) '영어가 권력이다'(영어 교육 문제)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명박 논쟁)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종횡무진하며 노무현 이명박 시대의 총체적인 한국 사회상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강 교수는 '우리 안에는 노무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명박도 있'고 그 '둘은 늘 충돌한다'고 했다. 그 충돌이 어느 때보나 잦았던 2000년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열정에서 냉정으로'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했다. '아웃사이더'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열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길게 가는 건 냉정이라고 했다. 냉정의 실체가 뭐냐고? '꿈 없는 생존경쟁의 시대'라고 그는 답한다.(김범수기자) 

11.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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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4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법가와 전체주의의 기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부터인가 화요일 연재에서 금요일 연재로 바뀌었다. 점심때까지 아이템을 놓고 고심하다가 '난세의 후흑학'에 대해 쓰기로 하고 서두로 '법가' 얘기를 꺼냈는데, 그걸로 그냥 분량이 차버렸다. 후흑학 얘기는 꼼수로 아껴두기로 했다.  

   

경향신문(11. 09. 02) [문화와 세상]승승장구하는 ‘법가들’

중국 전국시대에 나온 법가사상은 알다시피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법가에 근거한 가혹한 통치가 시황제 사후 진나라의 몰락을 초래했고 뒤이은 한나라 무제는 유가사상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다. ‘냉혹한 법가’ 대신에 ‘부드러운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고 법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아니다.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저자 정위안 푸는 중국에서 관이 주도한 정통 유교가 실상은 정통 유가의 수사법을 법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혼합물이었다고 말한다. 겉은 유가이지만 속은 법가라는 의미의 ‘외유내법’이 그 결과물이다.

법가의 목적은 군주와 정부가 백성의 사회생활 거의 모든 부분을 무제한의 권력으로 통제하는 사회질서의 구축이었다. 법가에 따르면 백성은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가축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법가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 천지는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다룬다”(도덕경)는 도가의 통찰을 더욱 확장한다. 군주에게 백성은 가축이자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법가는 군주의 이익이 곧 ‘공익’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최고 지배자로서 군주는 ‘공공’을 대표하기에 군주 개인의 이익이 곧 ‘공공의 이익’과 같다. 이러한 공공의 이익을 지키고 무지한 백성의 ‘사적 이익’을 막는 것이 법의 중요한 역할이다. 법가가 주장하는 ‘법치’란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일 따름이다.

정위안 푸는 중국 정치에서 법가의 중요성이 마키아벨리가 서양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법가의 요체는 마오쩌둥에 의해서도 계승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법가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장악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법가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법가적 전통에 대한 이런 통찰이 남의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 같진 않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혹 민주주의란 허울을 앞세운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교적 국가체제가 민주공화국 체제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권력자의 이익이 곧 ‘국익’이라는 법가적 관점이 폐기된 것 같지 않다. 요즘엔 그 권력이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이원화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군주, 곧 권력자를 제외하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법가의 평등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법가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상대적 법치도 다 포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민은 과거의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제물로 귀하게 쓰이다가 제사가 끝나면 버려지는 지푸라기 개처럼, 선거철에만 귀한 대접을 받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시 ‘가축’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사실 조작적인 여론몰이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심리’는 법가의 육질 좋은 먹잇감이다. 공권력의 남용과 편의적 법적용에 앞장서며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법가들’ 말이다. 어쩌면 비싼 대학 등록금을 비롯한 고비용의 교육체계 배후에도 백성을 지적으로 열등하고 무지한 채로 놔두어야 한다는 법가의 가르침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백성이 유순하고 무지해야, 군주는 세속의 모든 쾌락을 즐기면서 천하를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게 법가의 생각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얘기인가

11. 09. 01. 

P.S.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역자는 '옮긴이 서문'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가 2009년 용산사태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를 다시 되묻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란 말인가? 왜 형법만 더 강화되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에는 법가의 잔재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는데도 국내에는 이를 분석한 책이 거의 없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역자는 법가적 전제 정치를 우선 박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법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말이다.(11쪽)  

'법가적 전제정치'를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외피를 쓴 '법가적 법치주의'라면 어떨까. 현재의 공권력이 휘두르는 전횡적 법치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는 견제할 수 있을까. '사법개혁' '검찰개혁'이 구호로만 남아있는 현실은 역자가 희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직은 요원하다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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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우껴 2011-09-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닌가요?

댓글들에서 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이거 본의 아니게 결례했네요..^^;

로쟈 2011-09-03 09:20   좋아요 0 | URL
댓글에서 보셨을 수는 있겠는데, 아무튼 제가 쓴 기억은 없습니다.^^;
 

이달에 '독서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양천도서관에서 3회에 걸쳐 '사랑에 대한 세계명작 읽기' 강좌를 진행한다. 일정은 월요일 오전 10:00-12:00이며 커리로 고른 작품은 러시아 작가 3인의 사랑에 관한 소설들이다. 그래서 애초에 내가 제안한 강좌 타이틀은 '러시아식 사랑이야기'였다. 무료강좌이므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 9월 5일_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2. 9월 19일_ 도스토예프스키의 <영원한 남편>  

 

3. 9월 26일_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11. 09.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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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9-0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책들을 보면 러시아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이 들어나는데 몇년간 러시아에 계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 젊은 러시아인들은 영적으로 너무 타락했다(이분 독실한 신자에요)고 하네요.아무래도 책속의 사랑 이야기는 백년이 넘어서 그렇겠죠.그런면에서 현재 러시아 젊은이들의 사랑을 나눈 작품도 국내에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1-09-03 01:30   좋아요 0 | URL
어느 시대엔 순수한 사랑만 있었다, 이런 건 아닌 듯하고요, 지금도 타락한 사랑만 있다고 말할 순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저도 최근 러시아문학이 소개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여건이 또 그렇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교수신문에서 진보와 진화의 개념이 어떻게 분리됐는지에 관한 학술발표문 발췌기사를 스크랩하려다 엉뚱하게도 월드와이드웹 관련기사에 눈길이 갔다. 꿩 대신 닭으로 옮겨놓는다. WWW가 고안된 지 딱 20년이 됐다고 하니까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번 성찰해보고 또 앞으로의 변화를 전망해보는 게 좋겠다.   

  

교수신문(11. 08. 29) www가 바꿔놓은 21세기의 삶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지난 1991년 8월 6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연구원이던 팀 버나스 리(현재 미 MIT교수)는 월드와이드웹을 만들어 처음으로 웹페이지라는 것을 작성했다. 월드와이드웹(WWW) 또는 W3로 불린 이 프로젝트는 그로부터 20년간 과거 인류가 수 백 년 동안 겪었던 것 이상의 변화를 몰고 오며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웹의 등장으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혁신들이 온라인을 통해서 이뤄지면서 지구촌은 지난 20년간 총체적 변화를 겪었다. 지구 반대편 어느 한 나라 시골에서 터진 뉴스는 이제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웹서비스를 통해 광속으로 전 세계로 확산된다. 최근에는 각종 스마트 기기가 등장해 사회의 모습을 더욱 빨리, 그리고 광범위하게 바꾸고 있다.  

분산, 참여, 공유의 시대. 프로페셔널을 위협하다
웹이라는 것은 결국 웹 페이지들이 서로 링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영어로‘Web’이 거미줄을 의미하듯이, 정말 다양한 링크가 수많은 페이지들을 엮고 있다. 각각의 페이지들은 URL 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주소를 가지는데, 웹의 초창기 진화는 이러한 페이지들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지면서 거대한 정보의 네트워크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담았던 페이지가 중심이 됐던 웹이 블로그 포스트나 북마크, 트위터, 페이스북 등과 같이 페이지의 정체성을 가진 영구적인 링크의 웹이 돼가고 있다. 이런 링크는 그 사람 자체 또는 작성자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정체성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또한, 이런 정체성은 외부 사람들의 공유와 참여를 통해 더욱 커다란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런 의미의 새로운 세대의 웹을‘웹 2.0’이라고 한다.

웹 2.0의 가치는 분산, 참여, 공유로 대별된다. 웹 1.0이 기존의 커다란 섬으로 상징되던 포탈의 기술이라고 한다면, 웹 2.0은 작은 섬들의 집단과 이들 간의 다리를 건설하는 방식의 기술이다. 이런 참여와 공유의 정신은 거대한 사회적인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터넷에 연결된 개개인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불만을 호소하거나 누군가의 생각을 지지하는 형태로 정치적 행위를 일상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민기자들의 속보와 방송을 이용한 실시간 중계의 위력은 과거 촛불시위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새로운 혁명을 웹이 촉발하는 사례를 요즘 많이 볼 수 있다.

수십년 철권통치에 신음하던 튀니지 민중들에게 웹은 해방구였다. 여기서 촉발된‘자스민(Jasmin) 혁명’은 과거엔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이집트와 리비아, 시리아 등 중동지역의 민주화는 물론 중국과 북한 등 다른 대륙의 정치경제 현실에까지 파장을 미치고 있다. 웹 2.0의 성공은 이미 인터넷이라는 곳이 단순히 정보를 일방적으로 가져오는 곳이 아닌, 양방향성과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켰고, 대중들의 직접적이고도 실시간적인 참여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회로의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 웹은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백과사전의 대명사이던‘브리태니커’의 빈자리를 인터넷기반 집단지성의 산물인‘위키피디아’가 대체하고, 백화점이나 잡화점은 온라인쇼핑몰이나 소셜커머스에 잠식당하고 있다. 과거 오프라인 시대의 비즈니스모델은 사라지거나 생존을 위해 변신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기존의 대량생산 체제의 철옹성도 그 위상이 하락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해진 품목에 대해 대량생산을 하고, 이로 인한 원가절감과 가격경쟁력을 이루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도 이러한 패러다임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점점 다품종 소량생산 및 롱테일(Long Tail)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수요에 입각한 비즈니스가 활성화되고 있다. 이러한 脫대량화 현상은 과거에 중요시됐던 공정과 부품, 근로조건 및 임금 등에 이르는 전반적인 사회현상의 규격화의 중요성도 무너뜨리고 있다. 생산라인과 자신의 역할에 따라 일을 수행하는 분업과 전문화의 철칙도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는 깨기 어려워 보였던 프로페셔널리즘도 붕괴되는 조짐이 보인다. 웹의 개방성과 검색 등을 통해 비전문가로 여겨졌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는데, 이미 블로그를 통해 철저히 직업적인 기자들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던 저널리즘과 미디어에 아마추어 블로거들의 참여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프로페셔널리즘의 붕괴는 한두 가지 직업군에 국한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분산된 지식과 정보의 결합이 초래할 미래
웹이 발달하면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과거에는 정말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제약조건의 힘도 많이 약화됐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만 모여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메일도 이용할 수 있고, 원격회의 같은 것을 통해서 서로가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다.
 
또한 공간의 제약이 약해졌기 때문에, 수많은 상품들을 가상의 공간에 진열할 수 있게 됐고, 살아가는 공간 역시 반드시 아주 가까운 도시에 다 같이 모여서 살 필요가 없어졌다. 과거처럼 모든 산업과 교통이 한 곳으로 집중돼 있지 않아도 그리 불편하지 않게 살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결과적으로 힘의 분산을 가져오게 된다. 정보와 지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산됐고, 이렇게 분산된 지식과 정보는 다시금 웹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통해 다시 관계를 맺고 더욱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과거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대마불사’또는 큰 것만을 좋아하는 전통적인 믿음에도 균열을 가져오고 있다.

무조건 덩치를 키우면 역량이 강화되고,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사고는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질적인 내용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 및 역량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시대가 됐다. 과거와는 달리 되려 덩치만 크고, 조직의 변화적응력 부족으로 인해 무너지는 기업들이 속출할 것이다. 거대하고 덩치가 큰 조직이 적응하기에는 앞으로의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개개인의 특장점과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고 효율적인 기업들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고, 이들이 세상의 판을 다시 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웹은 어떤 형태로 발전하게 될까. 웹의 연결이 집이나 사무실에 있던 PC에서 들고 다니는 개인화 장비들로 확대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전체가 연결되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웹은 더 이상 문서와 콘텐츠를 전달하고 주고받는 수준의 데이터 중심의 웹이 아니라 더욱 다양한 인간의 활동영역을 커버하는 인간 중심의 소셜 웹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소셜 웹에 기존의 데이터 웹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있으며, 동시에 이들 사이의 다양한 연결 및 융합서비스 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서비스들이 매일 엄청나게 등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실시간으로 다양한 정보를 포함해 연결된 사람들의 상태 및 행위들이 소셜 웹 인프라 구조를 통해서 전파가 되고, 이를 통해 유용한 서비스들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것에 비해, 기존에 만들어졌던 연결과 그와 연관된 서비스들 중에서 집단지성에 의해서 오랜 시간 선택되지 않거나, 유용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퇴보를 한다.

이런 현상은 마치 우리의 뇌가 기억을 형성하고, 기억이 잊히는 것과 유사하다. 다음 세대의 웹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인간중심의 소셜 웹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보다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형태로 촉진할 수 있는 쉬운 도구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연결과 사회의 움직임이 전체의 의사를 전달하고 이를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세계가 된다면, 어쩌면 정치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집단의식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종족이 가지고 있는 오버마인드(overmind)가 웹의 미래 기술을 통해 나중에 탄생할지도 모르겠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정지훈 관동의대 명지병원 융합의학과) 

11. 09. 01.  

P.S. 아래는 '월드와이드웹 20년 주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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