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밖 인문학습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란 주제를 다룬 기사 두 편을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인문학습공동체의 증가 현상을 보는 시각’이란 글을 정리한 기사와 지난봄 교수신문에 실렸던 문학평론가 오창은의 기사다(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젠 어느 정도 표준화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모두 지행네트워크 멤버라는 공통점도 있다. 개인적으론 대학밖 인문학 강의를 많이 해오고 있기에 내용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대학밖) 인문학 붐이 2005, 6년 즈음부터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니까(대학의 '인문학 위기론'과 맞물려 있다) 10년쯤 채워진 뒤에는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도 따져볼 수 있겠다...    

경향신문(11. 07. 26) “대학 중심 경쟁에서 탈피, 사회 참여의 갈증 풀어줘 인문학습공동체 참여 촉진”

2000년대 들어서 인문학습공동체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수유+너머’를 필두로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 정원’ 등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대학 중심의 낡은 지식 재생산 구조에서 탈피해, 제도의 외부에서 다양한 지적 활동과 실천을 벌여왔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반연간 잡지 ‘시민과 세계’에 기고한 ‘인문학습공동체의 증가 현상을 보는 시각’이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현상의 원인과 한계점을 짚었다. 그는 인문학습공동체의 확산과 대중적 열기가 “제도화된 교육기관이 우리 시대의 뜻있는 지식인과 대중에게 근본적인 비판과 성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전의 교육과 학습 패러다임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현상이 조선 후기 관학에 대항해 벌어진 실학운동, 1980년대 폐색 상황에 맞서 벌어진 진보적 학술운동과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한다.

1990년대 들어 학문 분야에서도 ‘무한경쟁’ 체제가 도입되면서, 교수·연구자들은 연구업적을 둘러싼 과도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기업식 문화가 무차별적으로 침투한 대학에서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한 스펙 경쟁에 몰두했고, 카이스트 사태와 같은 비극적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이명원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생존을 위한 ‘위험상황’에 처한 현실에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산다는 일의 존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인문학습공동체 참여를 촉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위기’가 지적되고 있지만, 오늘날 복잡한 현실의 모순은 ‘거리의 몸싸움’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습공동체는 고립된 대중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사회 참여의 갈증을 풀어낼 수 있게 해 줬다는 것이 이명원의 시각이다. 매년 1만명 이상 쏟아져 나오는 박사학위 소지자들 또한 “지식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을 견지하면서도, 사회운동에 대한 신념도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를 주목하고 ‘대중지식인’으로 거듭났다.  

다만 이명원은 “인문학습공동체 역사가 10여년이 지난 지금, 최초의 설립자나 발기인을 넘어설 후속 주체들이 형성됐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상징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상징의 다원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사유와 실천은 관성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여러 공동체가 보여주는 ‘커리큘럼의 대동소이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들뢰즈와 라캉, 지젝과 네그리를 읽고 강의하는 것”이 “제도 연구공간의 병폐라 할 수 있는 현실과 유리된 추상주의와 수입학의 경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것”이었는지를 되묻는다. “생활대중의 관점에서는 좀 더 살아있는 육성의 언어를 발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취약한 물적 토대하에서 운영되면서 ‘지식의 자본화’에 반대해 온 그들이 오히려 ‘지식을 대중들에게 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도 한계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러한 공동체의 실험을 제도권으로 순치시키려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개입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고, 인문학을 ‘자기계발의 도구’로 사용하라는 목소리도 이곳저곳에서 들리고 있다. 이명원은 “어떻게 제도와 자본과 권력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난 공동체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앞으로 10년의 고민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황경상 기자)   

교수신문(11. 04. 18) 대중화 여부 관계없이 학문체계 자체의 위기 반영

인하대 병원에 근무하는 김운용 씨는 지역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그러다 지난 2009년 10월에 인천 연수구 도서관에서 개최하는 ‘인문주간 행사’에 참여하면서 인문학에 푹 빠져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강의를 듣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마침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강좌가 진행되더라고요. 표정훈, 강유원 선생의 강의를 듣고 인문고전에 매료됐죠. 인문고전은 전공자의 도움 없이 얼개나 개념, 서술 방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 강좌를 통해 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자극을 확실히 받았죠.”

김 씨는 인문고전 공부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세상을 살피게 됐고, 심리적 갈등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김 씨도 인문고전을 접하기 전까지는 자기개발서를 챙겨 읽곤 했다. “자기개발서라는 것이 많이 읽으면 비슷비슷한 내용의 변주에 지나지 않아요.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기개발서가 실천을 대신해주지는 않거든요.” 반면 인문고전은 행복에 대한 자기 기준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인문고전의 힘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운용 씨가 2009년 이후 인문학에 기울인 정성은 각별했다. 첫 인문학 강의로 인연을 맺은 철학자 강유원의 인문고전 읽기 강좌를 1년 동안(총 40주 80시간) 수강했고, 국립중앙도서관의 은하문화학교에는 평일 휴가를 내고 참가할 정도로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난 3월에는 ‘인하대병원 북토피아 책향기’라는 인문고전 읽기 모임을 만들었다. 인문학 강좌 수강생에서 출발해 인문고전 읽기를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인문학적 실천으로 나아간 것이다.  



인문학, 위기인가? 대중화인가?
한국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5년과 2006년 즈음부터이다.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됐다. 2006년 1월에는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의 방한 세미나가 있었고, 연말에는 그의 책『희망의 인문학』이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돼 이른바 ‘실천 인문학’, ‘평화인문학’이 활성화됐다. 2007년 3월에는 인권실천시민연대 주최로 의정부 교도소에서 ‘수용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됐다. 초기에 인문학과 대중의 만남은 노숙인·수용자·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인문학자들이 찾아가는 실천적 의미가 강했다.

일부 인문학자들의 실천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면서, 옛학진은 2006년 9월 ‘인문주간’을 지정해 대학과 지역사회의 인문학적 만남을 주선했다. 대학들은 적극적으로 나서 프로젝트 형식으로 지역사회와 연계해 인문학 강좌를 개최했다. 이것이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일으키자, 구청을 중심으로 한 자치단체와 도서관이 나서서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비제도권의 인문학적 실천운동이 학문제도 속에 있던 대학 인문학을 흔들어 깨운 형국이다. 



그렇다면, 대중과 인문학이 만남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는 극복되고 있을까. 인문학 강좌와 인문고전 읽기가 확산되고 있지만, 대학사회에서도 인문학이 부흥했다고 할 수는 없다. 대학 교양강좌에서 인문학에 해당하는 강좌는 여전히 축소되고 있다. 실용주의를 우선시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풍토 속에서 이른바 비인기 강좌인 인문학은 외면당하고 있다. 각 대학은 문학·역사·철학 강좌를 줄이고, 대신 교육수혜자의 구미에 맞춰 ‘골프와 비즈니스’, ‘취업역량 개발’과 같은 교양과목을 확대하고 있다.

독일 브레멘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유진홍 씨는 “10여년 전 학부제 전환 논의가 이뤄지면서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제기됐다”면서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한국적 학문축적 체제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밖의 인문학 열풍에 환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진홍 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의 대중화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인하대 병원의 김운용 씨는 “교양있는 삶에 대한 욕망”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인문학적 토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게 됐다는 이향미 씨는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살지 않고, 나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대사회에서 불안 요인은 증가하지만, 이것이 단지 경제적 안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도 강해졌다.

이러한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지방 자치단체들이다. 각 구청에서는 인문학 강좌를 경쟁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강남구에는 2008년부터 ‘수요인문학강좌’를, 송파구는 2010년에 ‘대하소설로 배우는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성북구의 ‘성북구민과 함께 하는 인문학 강좌’나 영등포구의 ‘동네 인문학’ 등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문학 열풍, 말랑말랑한 교양수준의 상품화”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시장의 논리와 연동하면서 상품화 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삶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정치적 시민의 복권”을 이루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 중 하나인데, “시장의 영역에서 인문학이 포섭됨으로써 오히려 말랑말랑한 교양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박성식 부대변인도 최근의 인문학 열풍에 대해 “기업과 광고가 인문학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듯”하다면서, “상품 광고나 기업이 인간화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이미지화하는 데 인문학적 방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문학은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응하는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 윤채영 중산고등학교 교사의 말이 눈길을 끈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 인문학이 성장했는데, 이는 지배엘리트들에게 역사와 문학을 가르침으로써 지배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과거 인문학이 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한국 사회의 인문학 대중화도 중산층의 삶의 논리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이다.  



살기 위한 인문학, 삶을 위한 인문학
최근 17만부나 팔려 인문고전 읽기 붐을 일으키고 있는 책이『리딩으로 리드하라』이다. 저자는 인문고전을 읽음으로써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문고전을 번역서가 아닌 원서로 읽고, 베껴쓰라고 권한다. 이러한 당황스러운 주장이 대중을 매혹시키고 있다. 마치 고갈되지 않는 성공의 에너지원으로‘인문고전’의 위치를 격상시킨 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저자가『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자기계발서를 간행해 100만부 이상을 판매한 베스트셀러가라는 사실이다. 자기계발의 자리에 인문고전을 위치시킴으로써 그의‘성공신화’는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리딩으로리드하라』와『꿈꾸는 다락방』사이의 간극은 한국 인문학이 직면한 크레바스처럼 위태롭다. 



그렇기에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의 이야기는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는 “인문학 연구는 대학의 틀 안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다면서, “대학밖 인문학은 인문학의 대중적 향유이지 인문학 연구의 대중화로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 인문학이 대학 바깥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의 대중화가 인문학 자체의 위기 극복의 대안일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은 인문학적 인식에 목말라하면서 한국의 언어로 형성된 인문학을 한층 더 요청하고 있다.

인문학 대중화는 노숙인·저소득층·재소자·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대화하려는 인문학자들의 실천적 노력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통치의 기술로 작동하는 ‘순화된 인문학’이 충돌하는 담론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대학 내 인문학의 위기가 대학 바깥의 인문학 담론의 유행으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반면 인문학을 상품화하는 일부 경향은 궁극적으로는 인문학의 가치를 왜곡시키는 것일 뿐이다

인문학은 실용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로 접근하는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인문학 해체’ 담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적 성격을 지닌 인문학이 자본주의 체제의 재활성화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거기에는 ‘절망과 기만의 인문학’이 남게 될 것이다. 살기 위한 인문학이냐, 삶을 위한 인문학이냐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인문학은 대중화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위기이고, 이것은 한국 학문체계 자체의 위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 인문학은 뉴타운·행정수도·후쿠시마 원전·건강한 먹거리 등과 같은 현안에 대해 인문학적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한국 인문학이 자본의 스토리텔링 일부로 편입될 것인가, 체제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가는 근본적 문제설정과 연결돼 있다.(오창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11. 07. 26.  

 

P.S. 대학밖 인문학 붐과 연관된 흐름은 '자가학습'용 책들의 증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출간한 '앎과 삶' 시리즈도 그런 맥락에 놓이는 듯싶다. 우리 삶에 필요한 앎을 그때그때 충족해보자는. 1차분으로 <교육>, <20대>, <중국> 세 권이 출간됐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1-08-01 14:33 
    인문학습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 via 로쟈
 
 
정다빈 2011-07-27 14:50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인문학관련 자기계발서를 볼때마다 일련의 의심과 더 쉽게 인문학을 알 수 있을까하는 유혹을 동시에 느꼈었습니다. 다행히도 지금의 제 선텍이 옳은거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로쟈 2011-07-27 22:09   좋아요 0 | URL
자기계발은 자기단련만큼이나 필요하고 불가피한 것인데요, 다만 '누구를 위한'이란 문제의식을 포함해야 될 듯해요...
 

지난주에 교수신문 기자의 전화를 받고 지금 읽고 있는 책 몇 권을 꼽은 적이 있는데, '여름, 愛書家들 책을 권하다'란 기사의 일부로 포함됐다. 아무래도 전화상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부정확하게 옮겨진 부분들이 있어서 정정해놓는다. 일단 기사는 이렇게 나갔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독문학, 필명 로쟈)
최근 읽고 있는 책은『한나아렌트』 자서전과『법가』다. 서평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읽고 있다. 어제까지의 관심사는『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나쓰메 소세키로 읽는 근대』(박유하 지음, 김석희 옮김, 문학동네, 2011.7)였다. 추천하는 책은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프란치 M.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이가서, 2011.7)와 『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디어드리 배릿 지음, 김한영 옮김, 이순, 2011.7)이다. 진화심리학쪽 책에 관심을 갖고 항상 보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생물학과 심리학에 대한 최신 정보는 항상 확인하는데, 심리학과 문학이 경쟁관계이면서 상호협력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 누가 더 잘 이해하고 있는지 심리학과 문학은 서로 경쟁한다.

 

전공을 '노문학'이 아니라 '독문학'이라고 한 건 물론 오류다(하긴 '노문학'이란 말을 쓸 일이 요즘은 거의 드물어졌다). 그리고 읽고 있는 책으로 꼽은 건 '<한나 아렌트> 자서전'이 아니라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다. 아렌트에 대해서 준비하는 글이 있어서 원서와 함께 책상맡에 놓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 그리고 <법가>라고 돼 있는 건 정위안 푸의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돌베개, 2011)이다. 이 역시 서평감으로 골라서 읽은 책인데, 덕분에 7-8권의 다른 책에서 '법가' 파트만 골라 연이어 읽어봤다. 어제는 아예 <한비자>(글항아리, 2010)까지 주문해서 받았는데, 완역이 아니어서 놀랐다. 전에 갖고 있던 선집과는 달리 이 책은 완역본인 줄 알았다. 32편이 수록돼 있으니까 전체(55편인가 그렇다)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다. 물론 주요 편들은 번역됐다고 하지만. 

  

그리고 '어제까지의 관심사'라고 한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2011)는 나쓰메 소세키 연구서라 구입한 책이다. 국내 연구자의 책으론 윤상인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문학과지성사, 2009)에 이어서 나온 성과다. 소세키는 물론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도서출판b, 2010)을 정독하기 위해서도 필히 거쳐가야 하는 작가다. 러시아와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문학은 개인적인 관심분야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진화심리학 책 몇권을 추천도서로 꼽았다. 프란츠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이가서, 2011)와 디어드리 배릿의 <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이순, 2011) 등. 이 분야의 책을 처음 읽는다면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부터 시작해도 좋겠다.   

참고로, 어제 구입한 책은 모두 고대 중국 관련서인데, 이강수의 <중국 고대철학의 이해>(지식산업사, 2010, 11쇄), 가이즈카 시게키와 이토 미치하루의 <중국의 역사: 선진시대>(혜안, 2011), 그리고 사타케 야스히코의 <유방>(이산, 2011, 2쇄)이다. 이러다 <초한지>까지 읽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11. 07. 26.  

P.S. 근황을 적은 김에 이번주 기대작도 '곧 읽고 싶은 책'으로 꼽아본다. 일순위는 리링의 <논어, 세번 찢다>(글항아리, 2011). 저자는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로 고고학, 고문자학, 고문헌학 3고학의 대가라 한다. 중국의 실력자가 유가의 고전을 종횡으로 읽고 해체한다니 기대를 안 가질 수 없다. 4권으로 이루어진 '리링 저작선'의 첫번째 책. 논어에 대한 중국 학자의 독해로는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도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잠깐 본 기억이 난다. 소장도서로 갖춰두려고 했으나 계속 미뤄졌는데, 목돈이 생기길 기대해봐야겠다. 도올의 <논어한글역주>(통나무,  2008)도 전3권 중 1권만 구해놓은 듯싶은데, 마저 짝을 맞추면 좋겠다. 이 정도 3인의 '논어독'이면 나름 장관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11-07-26 09:36   좋아요 0 | URL
진화심리학을 읽고 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빨강스포츠카를 타는 것은 부인의 갱년기로 인한 젊은 여자에게 관심끌기 위한 숫컷의 생존본능이라는 대목이 재미있었습니다.

로쟈 2011-07-27 09:48   좋아요 0 | URL
과도한 주장도 가끔씩 하지만 대체적으론 수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천도서관의 제안으로 8월 2-3주에 4회 동안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강좌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제목은 '로쟈와 함께 떠나는 한여름의 세계문학 여행'이라고 나갔다(http://yclib.sen.go.kr/yclib_index.jsp). 무료강좌이며 행사당일에 선착순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청소년을 위한 강좌이지만 일반인도 참석가능하다고 한다.  

이미지 

일정은 매주, 화, 수요일 오후 2시인데, 한번 더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8월 9일(화)_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2. 8월 10일(수)_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3. 8월 16일(화)_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4. 8월 17일(수)_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11. 07.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복이어서 어머니댁에 가 닭죽을 먹고 왔다. 덕분에 '나가수'도 끝까지 보고(집에서라면 아이와 채널경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돌아오긴 했어도 기력이 좋아진 것 같진 않다. 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욕의 문제 같긴 하지만. 그런차에 지난 주중에 임시저장해놓은 페이퍼가 생각나 다시 불러왔다. 음식을 다룬 책에 손길이 가는 건 매우 드문 일이지만 <칼로리 플래닛>(월북, 2011)이란 책이 3년전에 나온 <헝그리 플래닛>(월북, 2008)과 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관심이 생겼다. 이를 테면, 나란히 보면 좋은 책이다. 그래서 서평기사도 나란히 불러모았다. 우리가 무얼 먹으며 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한다.    

국민일보(11. 07. 22) 불평등한 21세기 지구인 식탁, 그래도 한결같이 웃는다…왜냐고?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기차역에 사는 방글라데시의 12세 가출 소년 알라민 하산. 첫 열차로 도착한 승객의 가방을 택시 정류장까지 나르고 동전 몇 개를 확보했다. 운이 좋았다. 오늘 아침은 굶지 않아도 좋았다. 그가 역 바닥에 하루치 식량을 늘어놓았다. 롤빵 한 개, 홍차 두 잔, 흰 쌀밥 위에 채소 카레를 끼얹은 덮밥 두 접시, 그리고 담배 다섯 개비. 거리의 진수성찬은 그가 하루 종일 동료 짐꾼들과 주먹다짐하며 생계를 꾸려갈 1400㎉의 에너지를 제공해줄 터였다.

음식을 먹는 건 에너지를 얻는 행위이다. 빵과 밥은 잘게 부서져 분자 상태로 혈액에 흡수된다. 그 빵과 밥을 위해 인간은 하루를 산다. 인간이 에너지를 몸속에 넣고 배설하는 반복적 활동으로 생존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삶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다는 것, 하루에 얼마만큼의 식료품을 소비해야 한다거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삶을 얼마나 단단히 옭죄고 있는가. 그래서 누군가의 식탁을 엿보는 건 놀라운 관찰 행위가 된다.

환경 및 과학 분야 사진 저널리스트 피터 멘젤과 그의 아내이자 TV 뉴스 프로듀서 출신의 저술가 페이스 달뤼시오가 함께 제작한 ‘칼로리 플래닛’은 개인의 하루 식단을 한 장의 사진에 담은 포토 논픽션이자 요리 다큐멘터리이다. 세계 30개국, 미국 12개 주를 돌며 80명의 사람을 만나 그가 먹어치우는 음식들을 요리된 상태 그대로 한 자리에 모아 주인공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떤 잣대로도 평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사례들을 모아놓고 보니 21세기 어느 날 지구인의 하루 식단표가 완성됐다.

사진과 함께 음식 목록, 주인공 일상도 소개됐다. 당연한 얘기다. 미국 전쟁(베트남에서는 베트남전을 이렇게 부른다) 상이군인의 식생활은 그가 참전군인이고 세발 모터 카트를 운행할 수 있는 특별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 덕분에 쌀국수와 돼지고기 스튜, 청어튀김, 돼지 간 등 2100㎉의 음식을 풍족하게 먹는다. 묽은 곡식 죽과 찐 밀가루 만두, 쇠고기 육수로 하루 고작 900㎉를 섭취하는 보츠와나의 간병인. 그녀 식단에서 가장 중요한 건 HIV 항 레트로 바이러스 약이다. 알약 네 알이 없다면 그녀 아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후대 역사학자는 현대 인류의 삶을 말할 때 ‘섭취 열량과 활동량의 극단적 불균형’을 지적할 게 틀림없다. 80명의 하루 식단을 살피다 보면, 투입과 배출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게 된다. 너무 많이 먹어 걱정인 대표주자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인이다.

175.3㎝, 135.6㎏의 15세 미국 여고생 맥켄지 울프슨은 체중 감량 캠프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침 식사로는 사과 팬케이크 2장과 칠면조 소시지 2개, 무지방 우유, 오렌지 주스를 먹는다. 점심은 샌드위치 샐러리 당근 샐러드, 저녁으로는 닭고기 샐러드 파스타 과일펀치가 준비돼 있다. 여기에 간식으로 사과 초콜릿푸딩 프레첼까지 총 1700㎉가 허락된다. 평소 식사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

조만간 비만 수술을 할 예정인 미국의 전직 스쿨버스 운전사 릭 범가드너도 곡물 베이글과 브로콜리, 아이스티로 구성된 1600㎉의 다이어트 하루 식단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예전이라면 한 끼로도 부족한 양. 그는 “과거에는 이걸 다 먹고 추가로 닭 3마리의 가슴살, 감자, 그레이비, 비스킷까지 먹었다”고 고백했다. 과식은 비만을 낳았고 비만은 릭에게서 직장을 앗아갔다. 쇼핑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20대 미국 여성 티파니 화이트헤드의 하루는 버거킹 치킨 프라이와 프렌치프라이, 닥터 페퍼로 시작한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양상추가 가득 든 시저 랩 샌드위치와 과일 스무디를 먹으려면 한 끼에 8달러는 투자해야 한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그녀에게는 벅찬 가격이다. 그래서 발길은 또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한다.

모두가 많이 먹어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케냐 마사이족 목축인 눌키사루니 타라콰이는 가뭄으로 가축을 대부분 잃어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한다. 우갈리(옥수수가루 죽) 400g과 바나나 1개, 우유 59㎖와 설탕 2큰술을 넣은 홍차 2잔이 그녀가 하루 종일 먹는 음식이다. 총 800㎉. 그녀 반대편에는 병적인 간식 중독증 환자 질 맥티그가 있다. 영국 런던의 학교 도우미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하루에 4개의 샌드위치와 비스킷, 소시지, 초코바, 초콜릿 케이크, 초콜립 칩까지 무려 1만2300㎉를 집어 삼킨다. 두 사람 모두 그대로는 살아남지 못할 게 분명하다. 800㎉보다 많고 1만2300㎉보다 훨씬 적은 중간지대 어딘가에서 타협은 이뤄져야 했다.

사람은 제 입으로 들어갈 음식 앞에서 오래 가식적일 수 없는 법이다.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수줍어하고 얼마쯤 자랑스러워했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70억 세계인의 삶을 한 권의 책에 통째로 복사해냈으니 저자들이 진정 영리하다 하겠다.(이영미 기자) 

 

경향신문(08. 02. 16) ‘우리가족 일주일치 식량입니다’

최근 ‘음식’이라는 창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책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 세상)나 사샤 아이센버그의 ‘스시 이코노미’(해냄) 같은 책이다. 1년 전 이맘때쯤 나온 빌 버포드의 ‘앗 뜨거워’(해냄)도 빼놓을 수 없다. 건강이나 요리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있는 세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음식이 오늘날 인간의 본질과 조건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삶을 유지하는 데 음식은 기본이다. ‘먹는다’는 행위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회적 활동이다. 음식은 또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분짓는 기준이다. 인간만이 굽고 삶고 볶고 튀긴다. 음식은 우리를 규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번주 나온 ‘헝그리 플래닛’(원제 Hungry Planet)도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만하다. 부제처럼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라 할 만한데 참신하고 독창적인 기획이 돋보인다. 전 세계 24개국 30가족이 1주일 동안 먹는 모든 식품들과 그 가족 구성원들을 사진에 담았다. 여기에 1주일치 식품의 상세 목록과 총지출 비용 등이 제시되고, 이들 음식을 둘러싼 가족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부부이면서 각각 저명한 사진기자, 작가인 두 저자는 아프리카 차드의 난민촌에서부터 남미 에콰도르의 안데스 산맥, 부탄 고원지대의 작은 마을, 그린란드 중동부 연안의 이누이트족 마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면서 그곳 가족들의 ‘음식 이야기’를 모두 265장의 사진과 글로 풀어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각 장을 여는 30장의 ‘가족사진’. 1주일치 식품을 앞에 둔 가족들을 거의 똑같은 구도로 잡아낸 사진은 다른 문화와 풍습을 가진 이들의 식단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배급 받은 밀과 옥수수 포대, 생수 한 통, 염소고기와 생선 조각, 과일과 야채 몇 개를 늘어놓은 수단 난민 가족의 휑한 식단과 온갖 육류와 스낵, 음료수, 패스트푸드 등으로 산을 이룬 미국 중산층 가족의 식단 사진을 비교해 보라. 또 선진국으로 갈수록 고기와 가공된 포장식품을 많이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게 된다. 코카콜라나 맥도날드 햄버거 등 이른바 ‘글로벌 브랜드 식품’을 발견할 수도 있다.

1주일치 식품의 상세 목록과 총지출 비용을 비교해보는 건 어떨까. 예컨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사는 흑인 중산층 5인 가족의 1주일치 식품 총지출 비용은 31만4180원인 데 비해 아프리카 말리의 13인 가족은 2만4230원이다. 책 말미에 제시된 나라별 개황도 흥미롭다. 미국의 비만 인구 비중이 남녀 각각 32%, 38%인 반면 말리는 0.4%, 3.4%다.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도 각각 124.7㎏과 19㎏. 말리의 가족에게 대표 요리를 부탁했더니 토마토와 고추, 쌀, 양파 등 모든 재료를 그냥 넣고 푹 끓인 쌀요리가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보니 먹는 것에 대해 ‘좋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책에는 각 나라의 평범한 한 가족이 살아가는 삶의 풍경이 간결하게 그려졌지만 오늘날 세계의 식탁이 직면한 문제들이 날카롭게 포착돼 있다. 에콰도르 산간마을의 한 가족은 직접 기른 것들로 먹거리를 충당하면서 ‘포브레 페로 사나’(Pobre Pero Sana, 가난하지만 건강하다)의 삶을 영위한다. 반면 멕시코에선 코카콜라가 다른 마실 것들을 몰아내고 ‘가족 지정 음료’로 등극했다. 부탄의 한 가족은 아침과 저녁 식사가 똑같이 붉은 쌀밥, 고추, 시금치, 카레지만 미국의 한 가족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오히려 패스트푸드를 더 많이 먹게 되는 고민에 빠져 있다. 프랑스에선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상징인 전문 식품점들이 사라지고 있고, 폴란드에선 미국 스타일의 패스트푸드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패스트푸드와 그 영향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다이어트 열풍이 동시에 들어오는 기현상이 목도된다.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음식과 관련해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지구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영양 부족에서 비만으로의 변화다. 세계 각지의 식탁은 천차만별이지만 하나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더 많은 설탕과 정제 탄수화물과 지방을 섭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몇 억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한편에선 몇 억명이 너무 많이 먹어 과체중과 비만에 시달리는 곳이다. 저자들은 ‘과잉’의 현대 사회에 필요한 소박한 지혜를 세계의 장수마을로 유명한 일본 오키나와의 옛말에서 찾는다. ‘하라 하치 부.’ 배가 80% 부를 때까지 먹으라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음식 문화를 담은 30개의 메뉴로 만들어진 ‘음식의 세계지도’라 할 만한 책이다. 세계 각지의 음식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풍습도 알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책 속의 사진들 속에 ‘우리 가족’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혹시 이번 주말 대형 마트에 가서 1주일치 먹거리를 구입할 생각이었다면 한번쯤 되묻게 될 것이다. ‘우리 가족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라고.(김진우 기자)  

11. 07. 2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VANITAS 2011-07-24 23:42   좋아요 0 | URL
오늘 구입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로쟈 2011-07-25 20:51   좋아요 0 | URL
네, 사진만으로도 성찬이더군요...
 

지난주 역사분야의 화제작은 이덕일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 2011)이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2000)를 바로 떠올리게 해준다. 아이가 영화를 보고 나서 요즘 해리 포터 시리즈에 잔뜩 빠져 있어서 몇권 주문하는 김에 나도 이 두 권을 어제 같이 주문했다. 조선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 읽을 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텐데 큰일이다...

  

경향신문(11. 07. 24) “주류에 맞서다 죽은 윤휴 과연 우리세대는 떳떳한가”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 윤휴(1617~80)는 사약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0여년 전부터 이 비운의 정치가를 주목했던 역사평론가 이덕일씨(50·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는 당시 윤휴의 후손이 “아직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무엇이 300여년 전 죽은 선비를 그토록 ‘금기’로 만들었는가, 이 소장이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을 내놓은 이유다.

 

지난 1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 소장은 “현재 우리 사회는 ‘윤휴를 죽였던 당시 체제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학계의 정설과 다르면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풍토가 있어요. 인문학은 늘 세상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고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사형당한 윤휴는 과연 우리 시대는 ‘떳떳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송시열에 덧칠된 신화를 벗겨냈다. 이번에는 그의 반대편에 섰던 윤휴의 삶을 조명하면서 다시 한번 송시열 계열의 노론 중심 역사관을 비판한다. “아직도 국사교과서는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했다고 가르치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진짜 북벌론자인 윤휴를 죽였습니다.” 그는 송시열이 주장한 북벌이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잇겠다는 전략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효종의 군비 강화책을 사사건건 반대했으며, 북벌 총사령부격인 체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도리어 역모의 증거로 삼아 윤휴를 제거한 것 자체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성리학만을 만고의 진리로 삼아 유일사상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윤휴가 <중용>에 주석을 붙인 <중용신주>를 내놓으면서 주희와는 다르게 장·절을 구분하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일 정도였다. 성리학에는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할 수 있는 사상이 담겨 있었기에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었다. 흔히 당파싸움으로만 알려진 예송논쟁 또한 사대부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왕을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로서 동격에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장은 “국상에 상복을 3년이 아니라 1년을 입으라는 주장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는데 가족장을 치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윤휴는 ‘송시열의 나라’에 맞서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자사(중용의 저자)는 동의할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는 중국에서 청나라에 반대해 일어난 ‘삼번의 난’을 호기로 여기고 이때 북벌을 실시해야 한다며 58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다. 북벌에 앞서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와, 신분에 따른 호패의 차이를 없애는 지패제를 도입했다. 북벌이 추진되려면 나라와 백성들이 부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모든 정책은 서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이 소장은 “윤휴의 죽음 이후 조선은 다른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제국’이 돼 버렸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윤휴의 북벌론은 실현 가능했을까. 이 소장에게 이 질문은 본질이 아니다. 그는 정치와 학문의 ‘진정성’을 말한다. 북벌을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노론과, 실제 북벌 총책임자가 되길 원했던 윤휴의 삶은 어떻게 전승됐는가. “윤휴의 사상을 이은 강화 양명학자들이 일제에 맞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노론은 대거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황경상 기자) 

11. 07. 24. 

 

P.S. 송시열과 윤휴를 포함한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에 대한 소개는 이경구의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푸른역사, 2009)를 참고할 수 있다(이선아의 <윤휴의 학문세계와 정치사상>(한국학술정보 2008)은 학위논문인 듯싶다). 윤휴를 다룬 장의 제목은 '근본주의자를 위한 변명'인데, 윤휴의 '이단적' 주자 해석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윤휴 본인은 주자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주자의 정신을 따른다는 신념을 가졌다. 하지만 송시열 등은 주자를 따르는 또 다른 길, 해석의 가능성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가 재건의 방향이 다르게 흐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가 제기한 대안은 정치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범위에서 유형원, 정약용 등을 통해 이어졌고, 국가주의적 기획은 영조, 정조의 정국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영조는 유학의 시비는 국가와 무관하다고 선언해 유학의 틀 내에서는 더 이상 시비가 강렬하게 전개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윤휴가 대한제국 끝 무렵인 1908년에야, 조선의 문제적 인물 수십 인과 함께 비로소 복권된 것은 권력화된 주자학의 독선이 드린 어두운 그림자일 것이다.(149-150쪽)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바다 2011-07-24 12:15   좋아요 0 | URL
사실 이덕일이 주장하는 것들이 우리가 배웠던 것들과 유사합니다. 소위말하는 현대 주류 사학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지요. 로쟈님도 국사책에서 윤휴가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서 송시열과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었다는 내용을 배웠을 것입니다. 전혀 새로울게 없습니다. 우리의 기억속에 이미 송시열과 노론은 나라를 망하게 한 세력이고 윤휴는 복권되어 있었습니다. 광해군과 같은 맥락이지요. 이덕일 말대로 노론이 아직도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면 국사 교과서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을리 없겠지요. 이덕일이 널리 읽히는 것은 소위 우리가 배운 것과 유사한 내용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지 뭔가 새로운 사관이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로쟈 2011-07-24 13:35   좋아요 0 | URL
핵심주장은 노론이 친일파가 되고 지금의 기득권세력이란 것 같아요. 학계도 포함해서. 그래서 논란을 부르는 것 같고요...

푸른바다 2011-07-24 14:07   좋아요 0 | URL
섵부른 음모론이지요.^^ 역사를 무슨 다빈치 코드류의 소설로 착각하는 분인 것 같아요. 굳이 현재의 추세를 들자면 영남 출신들이 재계와 정계를 장악하면서 조선시대 소외되었던 '영남남인'과 '영남북인'들이 재조명되는 흐름은 있는 것 같아요. 이황, 유성룡, 윤휴, 이익, 정약용이 남인이고, 남명 조식은 북인이며 북인 세력들이 광해군 시대를 이끌었지요. '실학'을 이야기 하면서 박지원이나 홍대용이 모두 노론이었다는 점은 숨깁니다. 역시 왜곡을 수반하는 말이긴 하지만 영남 세력이 대한민국 주류가 되면서 노론은 평가 절하되고 남인이 실학이란 이름으로 재조명됐다는 게 약간은 더 실상에 가까운 듯 해요. 제 국사시간 기억으론 송시열과 노론은 역사의 흐름에 저항한 기득권 세력으로 배웠어요. 로쟈님도 그렇게 배우지 않았나요? 이덕일의 주장은 이러한 흐름에 부합되어 오히려 각광을 받는 듯 싶기도 합니다. 그가 주류 학계와 다른 저항 세력인 듯 행세하는 건 책을 팔기위한 상술일 수는 있어도 전혀 현실과 부합되는 건 아닙니다.

lunar-altena 2011-07-24 16:26   좋아요 0 | URL
실학이 재조명 된거는 아무래도 민족주의 사학에 입각해서 뭔가 우리도 일본 침략만 없었으면 자본주의화 됐다는(자본주의 맹아론) 그런 '바람'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영남 출신들의 정재계 장악과 연관되서 생각해 볼점도 충분히 있는것 같구요.

뭐. 아!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지역대학 사학과를 나온 사람 입장에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어서요. 고등학교 국사시간 때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잘 생각이 안나네요. 그점은 논외로 치고,(어쩌면 진보의 투철한 민중사관이 교과서에 실렸을 수도요) 제가 대전 지역 사학과를 나왔거든요. 송시열과 기호학파의 고향인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여기 교수님들(조선시대 전공, 특히 성리학)은 송시열에 상당히 긍정적이십니다. 뿐만아니라 서울의 유명대학의 조선시대 전공 교수님들도 노론쪽 학파가 많다보니 학계가 그 쪽으로 치우쳐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서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모 유명대학 교수님들의 입김은 학계에서 강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같이 된 원인이 노론-> 친일파 -> 기득권층 이란 도식에 완전히 부합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재미난 건 또 있습니다. 서울중심의 학계에서 소외된 지역대 교수님들은 각자 자기 지역 유학자들을 연구하시죠. 그런데 마치 자신이 그 옛날 최고 유학자의 학맥을 이었다면서, 옛날에 스승들이 논쟁했던 그대로 아직도 싸우십니다. 뭐 일반화 할수는 없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노론과 소론이, 남인과 서인 쪽 연구자분들이 다투고 계신다고 합니다. 참 웃기죠?

서울 주류와 지역 비주류, 그리고 지역들간에도 사소한 차이로 화합하지 못하는 점.
논어의 이런 구절이 생각나네요.
君子 和而不同하고 小人 同而不和니 (군자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지만, 소인은 서로 같은 듯 무리지어 다니지만 어울리지 못한다.)
과연 지금의 일부 교수님들이 예전 유학자들만큼의 도량이나 될런지...

이런 면을 그냥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직도 노론과 주류 학계의 문제점은 해소되지 못한것 같습니다. 굳이 노론이 아니더라도,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과 불관용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죠. 그런면에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자는 이 책의 목표는 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

푸른바다 2011-07-25 10:06   좋아요 0 | URL
이덕일 류가 조선과 한겨레에서 모두 대접받는 이유이기도 하죠.^^ 좌파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면서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에 관심있기에 송시열과 노론은 수구반동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죠. 우파는 꼭 위에 기술한 이유만은 아니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송시열과 노론에 비판적입니다. 이는 한중일 삼국의 반주자학적 일반 경향이 일부 반영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송시열과 노론 주류의 고향인 충청도 지역에서 일부 지지 그룹이 있지만 그야말로 지역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제가 알기론 사학계에서 송시열과 노론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흐름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입니다. 대표적으로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이분이야 말로 학계에선 이단자로 볼 수 있죠. 학계에서 송시열과 노론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냈다간 수구보수로 몰리기 십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lunar-altena 2011-07-25 20:42   좋아요 0 | URL
예, 잘 들었습니다. 뭐 제가 학계 사람도 아니고, 자세히는 모르지요. 지역에서 중앙을 바라보는 창도 부족하고. 훔 그래도 말이죠. 훔 실명을 거론하기 그렇지만 서울대 사학과 출신 교수님들이 우암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네요. 물론 지금의 국사학과 교수님들은 어찌되는지 모르지만, 현재 은퇴하시고 명예교수로 계신 분들, 제자도 많이 배출한 뭐 그런 분들이 몇몇 우암에 긍정적이시더라구요. 확실히 저희 지역(대전)은 우호적인 분위기 입니다. 또한 충북 쪽이 우암의 학술사업과 기념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1-07-25 23:15   좋아요 0 | URL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교수도 다양하니 송시열에 긍정적인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알기론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1-07-25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6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6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