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으로 간행되는 <기획회의>(254호)는 '번역출판7'로 나왔다. <번역출판>이란 잡지를 따로 내지 않고, '잡지 속의 잡지' 형태로 펴내는데, 이번이 일곱번째라는 뜻이다. 이번호는 '번역의 난제와 과제들'이란 특집을 마련하고 있는데(특집의 내용은 목차를 참고하시길), 어찌하다 보니 '여는글'을 맡아서 쓰게 됐다. 여기에 옮겨놓는다.   

기획회의(09. 08. 20) [여는글] 에반드로스-번역자를 위하여 

과분하게도 ‘번역의 방법론’이란 특집의 ‘여는글’을 맡게 됐다. 온라인에서 ‘번역비평 이전의 번역비평’을 해온 데다가, 몇 달 전에 낸 책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도 마지막 장을 ‘로쟈의 번역비평’이라고 해놓았으니 청탁을 피해갈 도리가 없었다. 자칭 ‘곁다리 인문학자’인 나는 동시에 ‘많이 게으른 번역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부지런한 번역비평가’의 자리에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번역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것이다. 

 

번역의 방법론과 관련하여 언제나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직역/의역의 문제다.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 저자의 표현으론 ‘들이밀까, 아니면 길들일까’의 딜레마이다. 딜레마인 만큼 딱 떨어지는 해답은 있을 수 없겠고, 책의 성격이나 역자의 선호에 따라서 선택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이희재)0라고 보는 입장에선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면 반대하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것은 일종의 방향성이다.    

희랍비극 전집을 완역하고 있는 천병희 선생의 경우는 좋은 사례다. 자신의 번역을 새롭게 가다듬어 출간하면서 선생은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같은 고전학자인 강대진 박사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숲, 2008)을 평하면서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중앙대대학원신문>, 08. 11. 12). 희랍인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래서 단국대판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내 이오카스테를 향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여”(950행)라고 불렀고, 이것은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아내 이오카스테의 가장 사랑스런 머리여’에 가깝다고 한다. 새 번역본은 이 구절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오카스테여”라고 ‘의역’했지만 그는 그보다는 이전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니 직역과 들이밀기를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면,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는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걸려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전령)의 말은 어떻게 옮겨야 할까. 천병희 선생은 “가장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자면 신과 같은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죽었습니다.”(문예출판사판, 1235행)라고 옮겼던 것을 “여러분이 빨리 아시도록 가장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오카스테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숲판)라고 고쳤다(‘빨리 아시도록’과 ‘가장 간단히’는 중복되는 표현이다). 다른 번역본에서 “아주 짧게 말씀드리죠. 왕비 이오카스테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조우현 역)라고 옮겨진 대목이다. 이 경우에도 강대진 박사는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죽었습니다”를 선호할 듯싶지만, 그런 표현이 높은 사람에 대한 존대의 느낌을 전달해주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어 독자나 관객에겐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감내케 하거나 오히려 코믹한 느낌이 들게 하지 않을까. ‘머리’의 높임말로 ‘두상(頭上)’을 써서 “이오카스테의 두상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해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을 성싶다.  

한편으로 강대진 박사는 “서양말에 원래 존대법이 없으니 번역에서도 존대법이 너무 두드러지게 쓰지는 말자는 쪽”의 의견도 피력한다. ‘서양말’에 대한 대단한 환대다. 하지만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고 했다. 더불어 그러한 태도는 은연중에 우리 자신과 우리말에 대한 비하적 태도로 비춰질까 염려된다. 나는 반대로 <번역의 탄생>의 저자처럼 우리말에 대한 자신감과 우리말을 존대하는 태도가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오카스테의 머리’ 정도는 잘라먹어도 좋다고 보는 것이다(대신에 주석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자에게 그런 정도의 ‘권위’는 주어져도 좋다. 그것은 어떤 권위인가?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길, 2008)에 등장하는 한 가지 사례를 떠올려본다.   

지난 1988년 프랑스 대선은 미테랑 대통령과 시라크 총리가 맞붙어 화제를 모았었다. 권력(potestas), 곧 대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당시 도전자였던 ‘젊은’ 시라크는 역량(potentia)을 내세운 반면에 ‘늙은’ 미테랑은 현자의 권위(auctoritas)를 앞세웠다. 처음엔 시라크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아무런 공약 없이 단지 프랑스의 국론 분열이 내전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협을 반(反)공약으로 내건 미테랑이 결국은 승리했다. 그의 ‘위협’ 앞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역량’보다는 ‘권위’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권위’를 랑시에르는 티투스 리비우스를 따라서 ‘에반드로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에반드로스는 헤르메스의 아들로서 아욱토르(auctor)였다. 저자(author)란 말의 어원이기도 한 이 ‘아욱토르’는 창시자란 뜻도 갖지만 랑시에르는 ‘메시지의 전문가’란 뜻으로 새긴다. 그는 “세계의 소음 속에서 의미를 식별할 줄 아는 자”이다. 그는 신의 메시지를 알아듣고 목동들의 싸움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렇듯 아욱토르는 말을 잘 알아듣고 말의 기적을 연출할 수 있는 말의 장인이며 그의 권위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미테랑은 글쓰기를 즐긴 대통령이었다). 이제 작가와 다름없는 말의 장인으로서 번역자에게도 그런 권위는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혹은 번역자 또한 그런 권위를 스스로 찾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번역은 글쓰기다>(즐거운상상, 2009)의 저자가 일러주는 것처럼 사실 번역가를 겸한 작가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루쉰도, 미셸 투르니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모두 번역가-작가이다. 요즘은 대다수 번역가들이 동의하는 것이지만 번역에서 더 중요한 것은 외국어실력이 아니라 한국어 실력이고 글쓰기 능력이다. “번역가의 진정한 실력은 이 글쓰기에서 결판난다.”(이종인)는 전문번역가의 말이 더이상 과장이 아니다. 그러니 단순한 전달자, 곧 헤르메스-번역자에서 더 나아가 저자로서의 번역자, 에반드로스-번역자를 자임하는 걸 주저할 필요가 없다. 물론 에반드로스-번역자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번 특집의 제언들도 꼼꼼히 챙겨두어야겠다. 번역에 대한 많은 고민과 함께 번역자의 권위가 드높아지기를 기대한다. 

09. 08. 29. 

 

P.S. 바로 최근에 강대진 박사의 소포클레스 번역이 출간됐다. <오이디푸스왕>(민음사, 2009)으로 표제작 외 3편의 작품이 더 묶여 있다. 950행과 1235행이 각각 어떻게 옮겨졌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전자는 "오,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가장 친근한 머리여"로, 후자는 "말하고 듣기에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이야기하자면, 여신 같은 이오카스테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옮겼다. "여신 같은 이오카스의 머리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너무 어색했던 듯하다. 

아무튼 두 (세대) 고전학자의 정역본 번역을 갖게 되어 소포클레스 읽기가 한층 수월하고 고급스러워졌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 않다. 강대진 박사는 옮긴이 서문에서 "내가 이 번역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 동료는 "연극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번역을 부탁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못박았는데, 덕분에 역자의 의도대로 "매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읽기 불편한' 문장"들이 더러 나온다. 하므로 이 작품의 공연 대본은 다른 번역을 알아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 번역에서도 그렇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당대의 관객들에게 '읽기 불편한' 딱딱한 문장들로 공연됐을지 의문이다. 역자는 합창에 자주 사용되는 희랍어 감탄사들, 가령 '오이모이', '오 포포이', '토토토이', '이우 이우' 등을 '아아' '오오'라는 밋밋한 표현으로밖에 옮기지 못한 점을 무척 아쉬워하는데, 그런 생생한 현장감이 다른 한편으론 '읽기 불편한' 문장들을 통해서 재생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일까?  

내가 읽어본 번역본들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오이디푸스왕> 공연에 가장 적합한 대본은 연극학 전공자인 강태경 교수의 번역본이다. 영역본을 중역한 탓에 '이오카스테'를 '요카스타'라고 옮기는 식이지만, 그리고 부정확한 대목도 직역본보다는 불가불 많을 듯싶지만, 한국어로는 훨씬 매끄럽고 연극적이다. 곧 드라마틱하다. 간단한 대사이지만,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왕비 이오카스테의 죽음을 전하는 전령의 긴박한 보고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여러분이 빨리 아시도록 가장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오카스테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천병희) 
"말하고 듣기에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이야기하자면, 여신 같은 이오카스테께서 돌아가셨습니다."(강대진) 
"서둘러 말씀드리자면, 왕비 요카스타께서 - 돌아가셨소."(강태경)
  

드라마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극의 파토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은 어렵고 어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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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을 보지 않았지만, '강태경'버전을 제 식으로 표현한다면 "여러분, 왕비께서-돌아가셨습니다." 입니다. 물론 저는 원문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번역자가 무엇을 첫번째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머릿말에 원문에 충실했다는 말은 번역자의 큰 덕목을 실천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찌보면 복지부동형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거든요. 즉 직독이 독자의 판단이나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래알을 씹는 경우처럼 뱉어버리거나 집중력 저하로 독자 자신을 탓(불편)합니다.
(추천,안전효의 영어 길들이기/번역편)

로쟈 2009-08-29 20:13   좋아요 0 | URL
네, 자신을 투명한 투과물 정도로 간주함으로써 번역자의 존재감과 함께 책임으로부터도 비껴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outis 2009-09-15 08:14   좋아요 0 | URL
특히 고전 원전 번역의 경우, 모래알 씹는 느낌을 자신의 문화적 지층을 다양하게 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지식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안이한 태도로 입 벌리고 받아 먹기 식의 접근 방식을 가질 때는, 사실 아주 쉬운 단어로 된 문장도 모래알 씹는 느낌일 수 있거든요. 특히, 일본어식, 영어식 문법을 따른 번역과 '비문'의 경우는 '시적'표현의 허용과는 다른 번역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시적 표현을 최대한 살리면서 번역하는 것과 한국어로 글쓰기를 잘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는 것이죠.

로쟈 2009-09-15 20:16   좋아요 0 | URL
다양한 수준의 번역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제 바람은 희곡은 경우엔 공연용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정확한 번역과 이런 용도가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지는 의문입니다...

기인 2009-08-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을 옮기고 싶으냐의 차이겠지만, 저는 강대진 선생님 번역이 더 '이질감'을 전달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원본의 느낌과 더 유사한지는 알 수 없지만요. ㅎㅎ
희랍 희곡을 읽는 독자들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겠네요. 역시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ㅜㅠ

로쟈 2009-08-29 20:11   좋아요 0 | URL
번역에서 제 관심은 '독자'와 '효과'쪽에 더 가 있습니다. 공연된 작품을 번역했는데, 공연할 수 없다면, 무얼 옮긴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되고요. 전공자들의 번역을 읽을 때마다 갖게 되는 생각은 '다른 전공자'를 위한 번역이 아닌가 하는 것이에요. 어차피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번역의 역설이라고 봅니다...

outis 2009-09-15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 공연용 대본은 연출가와 각색자의 능력에 따라 생산 가능합니다. 시적(詩的)인 표현들을 대화체로 옮기기 위해서 번역자 본연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표현들에 안주한다면, 그야말로 '에반드로스의 덕목'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랍 비극이 운율을 가진, 합창형식이 주요한 가무(歌舞)극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희랍 비극을 즐길 수 있는 출발점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시적 표현들을 '잘라먹는'다고 해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국에서 공연되었던 <오이디푸스 왕> 연극 작품들은 시적 표현을 최대한 살린 번역본을 가지고도 연출가의 능력에 따라서 충분히 공연 가능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로쟈 2009-09-15 20:15   좋아요 0 | URL
국내에서 공연된 <오이디푸스왕>은 본 적이 없는데, 한번 봐야겠네요...

노승영 2010-02-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를 눈으로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천병희 역을
그리스어 원서를 읽을 때 참고하고 싶은 사람은 강대진 역을
공연에 쓰고 싶은 사람은 강태경 역을 보면 되겠네요.
한국 독자에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소포클레스는 행복한 작가일듯... ^^
 

한겨레에서 번역에 관한 블로그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73594.html).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반은 번역과 번역비평 담론을 모니터링할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중간언어'란 표현이 눈길을 끄는데, 학술용어인지 필자의 용어인지 잘 모르겠다. 필자에 대해선 기사 외에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한겨레(09 08. 28) [블로그] 번역에 대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언어를 전공하는 이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울거라 -자(自) 타(他)가- 여기는 알바가 번역이다. 이것만큼 철저한 오해가 또 없다. 해당 외국어를 잘한다고해서 대상어로 옮기는 작업에 능할것이란 억측은 이 바닥을 너무 만만히 본 탓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잘한다는 기준이란 게 또 모호하기 그지없다. 왜냐면 외국어는 지금 '잘하고 있다'가 내일도 '잘 할 것이다'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돼서 배운 언어는 쉽게 화석화되기에 하루라도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져버린다. 결국 ‘잘한다’는 말은 현재상태를 이름과 동시에 일련의 미래동작들-한 마리 죽여도 어느샌가 스멀스멀 또 한 마리 기어 나오는 집에 눌러 앉은 바퀴처럼 끝끝내 최후의 결정타를 날릴수 없는 어휘군단에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대처하며 아무리 발버둥 손버둥쳐도 정점(네이티브)엔 도달할 수 없다는 냉엄한 사실을 수시로 인정하는 동시에 외국어와 모국어 사이의 적절한 지점에 계속 위치하는-이 수행되리란 기대를 포함한 말이다.

번역에 있어 모국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해당 외국어보다 모국어가 비교적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어-한국어>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한국어 표현을 일본어로 바꾸는 것보다 일본어 표현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더 많이 본다. 일견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나 자신조차도 예외가 아닌데 이런 현상의 이유는 1.일본어 표현을 적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2.이해는 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 표현을 모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한->일이 일->한 보다 쉽다고 느끼는 이유는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학습자 자신이 기실 한->일이 아니라 한국어->중간언어(일본어지만 동시에 일본어라고 할 수 없는 학습자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간언어는 학습자가 책에서 읽거나 티브이・라디오에서 듣거나 혹은 일본인 친구와의 대화로부터 의식・무의식적으로 익혀 세운 하나의 언어세계이다. 이 언어세계의 주인은 당연히 그것을 세운 학습자 자신이기에 외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고 친숙하게 느껴지게 마련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일본어->한국어 번역에 있어 주요한 어려움은 2.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어를 닦고 기름칠하고 부품갈아주는 작업을 하는 '일본어 학습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올해 선정된 모(母)대학의 번역 상에서 찾은 재미난 발견 하나가 있다. 일본어 부문과 영어 부문의 수상작과 가작을 비교해 본 결과 먼저 일본어의 경우 수상작과 가작 사이에 큰 차이를 못 느꼈다는 점이다. 수상작은 철저히 원문을 따라 걸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부분에서는 직역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번역의 젤 어려운 점은 어디까지 내딜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것이다. 너무 가버리면 창작이 되고 범생처럼 얌전히 주의깊게 가면 직역같아서 왠지 껄끄럽다. 이런 점에서 가작은 좀 더 가볍게 원문과 나란히 걸으려고 했다는 흔적이 보였다.  

다음으로 영어의 경우는 -원문을 번역문과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자알 이해할 만큼의 영어독해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지라 한국어에 한해서 말한다면-수상작과 가작 사이의 질 차이가 확연했다. 수상작에 납득이 갔다. 일본어와 다른 흥미로운 점은 질 차이뿐만 아니라 번역자의 원문 해석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런 정도라면 동일한 원문이라도 번역자별로 읽어보는 재미가 있겠다 싶었다. 왜 일본어 번역은 비슷비슷한데 영어 번역은 이리도 다른 걸까라고 일반화하는 건 위험하지만 암튼 흥미로운 실마리란 생각이 들었다.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의 단편 중에 <ぽたん>이란 작품이 있다. 문고판으로 4페이지 정도의, 길이로 보자면 단편이라기 보단 콩트에 가까운게 아닌가 싶다. 1페이지 정도 시험삼아 한국어로 옮겨봤는데 -'번역'은 내게 있어 일종의 자그만 로망이라 함부로 입에 올리기가 민망스럽다 ^^- 평이한 문장임에도 만만찮다. 좋은 한국어 문장이 내 머릿속에 충분히 비축되어 있지 않음을 통감했다. 무엇보다 이 단편의 제목을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같은 의성어 혹은 의태어로?-무엇보다 ‘ぽたん’이란 단어는 사전에도 올라와 있지 않다. -혹은 내용을 고려한 전혀 다른 제목? 귀국하면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서 비교해 볼 생각이다.   

지금 떠오르는 가장 맘에 드는 번역 제목은 1967년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원제목은 <Guess Who's Coming To Dinner>였다. 이 멋진 번역 제목은 기실 일본에서 붙인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쓴 것이라고 한다. 씁쓸하다. 

09. 08. 29. 

 

P.S. 최근에 발견하여 구입한 번역학 관련서는 한국번역학회에서 옮긴 <라우트리지 번역학 백과사전>(한신문화사, 2009)이다. 1부에선 번역학 용어들에 대한 해제를, 그리고 2부에서는 각 나라와 지역의 번역 전통을 다루고 있다. 책은 1998년에 나온 초판을 옮긴 것인데, 참고로 올해 2판이 새로 나왔으며 온라인에서 발췌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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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언어'를 'interface-language'(자작용어)라고 하면 어떨까요?

로쟈 2009-08-29 13:57   좋아요 0 | URL
interface를 '자작'이라고도 옮기나요?..

펠릭스 2009-08-29 14:43   좋아요 0 | URL
제가 만든 '조어'라는 말인데요.

로쟈 2009-08-29 20:14   좋아요 0 | URL
ㅎ 제가 잘못 봤네요...

Sati 2009-08-29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언어 interlanguage, промежуточный язык'는 학술용어가 된 듯 합니다. 애당초 기계어 계발이나 기계번역, 외국어교수법, 이중언어사용 이론쪽에서 언급되던 표현인데, 포탈검색해보니 최근에는 영어학원쪽에서도 많이 사용하는가 봐요.

로쟈 2009-08-29 20:15   좋아요 0 | URL
닉을 바꾸셨네요.^^ 영어학원쪽에서도 많이 사용한다고 하니 새로운 정보입니다...

Sati 2009-08-29 20:35   좋아요 0 | URL
닉 이쁘죠? ㅎㅎ 매트릭스 다시 보다가, 이 아이가 너무 이뻐서 바꿔버렸어요. 종이로 된 번역에 대한 로쟈님의 글을 자꾸 접하게 되서 너무 반가운 거 있죠. 방금 손 청결제(1인당 1병밖에 안 파네요... 전시분위기...)랑 기획회의 주문 넣고 왔어요.^^

서울비 2009-08-30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nterlanguage 중간언어는 제2언어 학습자가 모국어와 학습목표어 사이에 중간언어를 갖는다는 1970년대 SLA(second language acquisition) 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 영어교육학, 언어습득론 관련하여 편하게 인용되는 용어입니다.

로쟈 2009-08-31 00:2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엊그제 내린 비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던 듯하다. 밤에는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여 여름 내내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았다. 환절기, 한동안 감기와 신종플루, 그리고 알레르기에 주의해야겠다. 그리곤 또 곧 겨울이 되겠군. 하지만 눈이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만만치 않다. 파스테르나크의 말대로, 산다는 건 들판을 가로지르는 게 아니다. 밤에 느끼는 계절은 이미 가을인지라 9월의 읽을 만한 책을 미리 골라놓는다. 생각이 나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이미 선정해놓았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외모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던지는 화두 같기도 한 이 소설은 80년대를 배경으로 박민규식 입담이 어느 장을 보나 질펀하게 펼쳐진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세 청춘들이 겪는 연애와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소설은 자본주의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 하는 관찰이 곳곳에서 성찰된다. 사랑은 상상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의 결말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결말로 치달을 때까지 작가 박민규가 펼쳐놓은 입담은 놀랍다."는 게 작가의 평이다. 하지만, '놀라움'까지 가기 전에 내가 먼저 느낀 건 유치함인데(나는 그가 맘먹고 유치한 걸 쓰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중간중간의 분홍색, 파란색 글씨들은 뭔가?(삶이란 뭘까요?).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할 밖에(나는 '감상적인' 소설들을 별로 좋아히지 않는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 같은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못한다. 내 탓인가?).     

9월에 읽을 만한 문학작품에 당연히 하루키의 신작 <1Q84>(문학동네, 2009)를 꼽을 수 있겠지만, 이건 굳이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나는 인도 작가 줌파 라이히의 신작에나 눈길을 주기로 한다.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이란 작품집이 나왔는데, 표제작 "'그저 좋은 사람'은 줌파 라히리 특유의 재능이 넘치는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교한 문장과 감정에 대한 풍부한 통찰,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축복받은 집>(동아일보사, 2001/2006) 이후에 <이름 뒤에 숨은 사랑>(마음산책, 2004)이 소개됐었고, <그저 좋은 사람>은 세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책은 호사카 유지의 <우리 역사 독도>(책문, 2009)이다. 생소한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한국은 그간 ‘독도는 우리 것’이라는 주장만 반복했지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인식하게 할 이론 개발과 홍보가 미흡했다. 독도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주장을 질적으로 몇 단계 끌어올린 『우리 역사 독도』는 저자가 기획하는 일련의 독도 관련 저술의 첫 번째 책이다."그런데, 저자가 일본인?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 체류 15년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고 하니까 일본인명의 한국인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의 저자인 만큼 구면이다. <일본 古지도에도 독도 없다>(자음과모음, 2005)란 책도 진작에 써두었군. 한일 문화와 역사에 정통한 듯싶은데,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반갑게도 안면이 있는 책이다.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추천사를 조금 소개하면 이렇다.  

"철학자들과 나눈 11편의 대담을 묶은 책이다. 데리다, 가타리, 로티, 보드리야르, 비릴리오, 지젝 등과 같이 현대 사상사의 지형도를 크게 바꾸어놓은 유명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담자는 러시아의 해체주의자 미하일 리클린. 저자는 현대 철학사의 가장 큰 봉우리를 데리다의 해체론적 패러다임과 들뢰즈의 분열분석으로 간주한다. 책 제목 ‘해체와 파괴’는 그 두 봉우리에 대한 이름이다.(...) 리클린의 대담집을 읽으면 망각의 늪 속에 빠져있던 이 자명한 사실이 다시 번쩍 떠오른다. 공산혁명과 소비에트, 스탈린과 전체주의를 경험한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서양 첨단 철학의 보편성과 한계를 묻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 때문이다. 사소한 대화부터 도발적인 질문까지 여러 수준의 공방이 오고가면서 구수한 커피 향을 빚어내는 대담집이다."   

곁들여서, 대담의 파트너들이기도 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와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상대출판부, 2008)도 같이 읽으면 좋겠다. 모두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될 만한 책들이다. 특히 <꿈의 세계와 파국>은 리클린과의 대담에서 직접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개념사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김윤철의 <정당>(책세상, 2009)이다. 분량이 얇고 평이하는 점이 이 시리즈가 자주 추천 목록에 오르는 이유인 듯싶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추천사에 따르면, "현대정치와 민주주의는 결국 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정당이 없는 현대정치와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정당정치를 가까이서 직접 목격하며 정당정치를 연구해온 한 소장 정치학자가 쓴 이 책은 이 같은 현실과 관련해, 정당에 대해 일반국민들이 알아야 할 상식들을 알기 쉽게 풀어쓴 국민교양서이다."  

'국민교양'에서 조금더 나가면 정당론의 고전으로 꼽힌다는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후마니타스, 2008)과 누구보나도 '제도화된 민주주의'로서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최장집 교수의 강연집 <민중에서 시민으로>(돌베개, 2009)도 덤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꼽은 경제/경영서는 김진애의 <도시 읽는 CEO>(21세기북스, 2009). 책에 대한 평이 후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시들은 모두 저마다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 특성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 열망,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삶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볼 때 유서 깊은 건축물이나 거대한 빌딩보다 허름한 뒷골목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세계의 유명 도시들을 모두 돌아볼 기회가 없다. 일생 동안 자기 나라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라도 반가울 수밖에 없다. 특히 뛰어난 안목의 전문가가 공들여 쓴 책이라면 더욱 좋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목에서 얼핏 추측해볼 수 있는데, 책은 CEO 시리즈의 하나로 <사진 읽는 CEO>, <그림 읽는 CEO> 같은 책들이 후속작이다.  

짐작에 'CEO'란 말은 지난 10년간 최고 히트 유행어의 하나일 것이다. CEO에 대한 선망과 숭배는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기업지배사회'는 'CEO 지배사회'이기도 하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고른 사회분야의 책은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 "미셸 세르의 사상적 영향 하에 인류학자로 학계에 입문한 라투르는 후기 저작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지난 수세기 간 “근대”의 이름으로 인류사회에 풍미해 온 지적 편견을 독창적 시각으로 재조명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에 천착해 온 근대적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브리드의 증식으로 이원론적 해석이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양자를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비(非)근대적 접근”으로 종전의 근대성이 이루지 못한 근대적 기획을 완결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개인적으론 이미 서평을 쓴 책이므로 앞으로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의 이미지만 더 나열해둔다. 미셸 세르와의 대담집 <해명>(솔출판사, 1994)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위원이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아닐리르 세르칸의 <우주 엘리베이터>(월북, 2009). 저자가 생소한데, 터키의 우주비행사 후보라고 한다. 소개를 보니, "저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지구와 정지궤도를 잇는 우주엘리베이터를 개발하려고 할 때 시작점까지 셔틀을 쏘아 올려 승무원이 승객들을 우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구조를 제안했다. 하지만 우주 엘리베이터는 그의 호기심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는 건축과 물리를 공부한 저자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즐겨온 여행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장르로는 아이디어 모험담이 아닐까 싶다. 전작이 <좌절하지 않고 타임머신을 만드는 법>(월북, 2009)인 것을 보아도 그렇다. '15세 과학소년들의 시간 여행 분투기'라 한다. 찾아보니 조지 웰즈의 <타임머신>(엔북, 2009)이 나온 게 1895년이다. '영화'와 같은 나이라는 게 흥미롭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예경, 2009)이다. "필자 공주형은 박수근의 정직하고 착한 청혼 편지에 끌려 박수근 연구로 박사까지 받게 된 사람이다. 그림과 그림 사이 당대의 역사와 사회상이 펼쳐지고 그 안에 있는 박수근을 잘 보여주는 그의 글은 박수근의 그림을 닮았다."고 소개한다. 분량으로 보아 자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는 듯싶진 않다. '박수근 연구'의 현단계가 어떤 것인지 구경해볼 수는 있겠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허문명의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푸르메, 2009).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여성 평전이다. "이 책에 언급된 12명 여성의 공통점은 스스로 여성임을 한계로 여기지 않고, 설사 한계로 여겼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는데 있다. 언론인인 저자는 현대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 여성 거물 12인의 삶을 아주 집약해서 정리하고 있다." 비슷한 컨셉으론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시리즈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낮은산, 2009)도 있겠다. 비올레따 빠라(가수), 다이앤 아버스(사진가), 유잔 팔시(영화감독), 케테 콜비츠(화가) 등 네 명의 여성예술가를 다루고 있다. '클라시커50' 시리즈의 <여성>(해냄, 2002)과 <여성예술가>(해냄, 2003)도 인명사전 역할을 해줄 듯싶다.    

10. 작은 책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작은책' 시리즈다. <작은책>이란 월간지가 있는 줄 몰랐는데(하긴 서점에 들어오지 않고 알라딘에도 입고되지 않는다) <후퇴하는 민주주의>(철수와영희, 2009)를 읽다 보니, 이게 '작은책' 강연을 묶은 책이다. '한국사회비평' 범주에 속하는 이 강연모음집은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철수와영희, 2007)부터 시작해서 <1%의 대한민국>(철수와영희, 2008)을 거쳐 <후퇴하는 민주주의>까지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다. 한겨레문화센터의 인터뷰특강 모음집에 뒤서는 것이면서 <거꾸로, 희망이다>(시사IN북, 2009)로 스타트한 시사IN 신년특강 모음집엔 앞서는 것이다.   

'작은책'이지만 필자(강연자)들은 모두 쟁쟁하다.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손에 든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럼 뭐가 좀 달라질지 모르고, 아니면 누가 좀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왜 겁을 먹느냐고?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의 저자 손낙구 씨의 강연 제목을 빌면, '집이 많은 놈, 집은 있는 놈, 집도 없는 놈'의 사회가 한국사회라는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확산되면 '아파트에 미친' '부동산공화국'을 부추기면서 사욕만 챙기고 있는 누군가는 좌불안석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최소한의 염치를 기대한다면...  

09. 08. 29.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골랐다. 강의를 위해서 조금 자세히 읽어보려고 하는 참이기도 하다. 다수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건만 해도 댓종이 넘는다. 전집판과 그 이후에 나온 번역본들을 주로 참조하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려면 나도 곧 '하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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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9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9-0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사카 유지는 국내 신문에 종종 기고하고 있습니다.몇년 전에는 경향신문에 정기기고했지요.부인이 한국인입니다.호사카 유지 아버지의 친구인 한국인 교수가 매우 예절바른 사람이라 한국인에 대해 인상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신문에 기고하는 독도관련 글에는 '한국인들은 독도는 우리 땅 외칠 줄만 알지 왜 독도가 한국땅인지 설명을 못한다'고 지적하더군요.논리를 개발해서 파고 드는 일본에 맞설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로쟈 2009-09-01 20:57   좋아요 0 | URL
사실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서 '논리'까지 개발할 생각을 못했던 거겠죠...
 

민족이 허구적 구성물임을 주장한 <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 2003)의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후속작이 출간됐다. <세 깃발 아래서>(길, 2009).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이 그 부제다. 우연찮게도 이번 가을호 <창작과비평>에는 앤더슨의 민족주의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문이 번역돼 있는데, 나란히 읽어보면 흥미롭겠다. 리뷰기사를 <창작과비평>에 실린 논문을 소개하는 기사와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29)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 지핀 유럽 아나키즘

<세 깃발 아래에서>는 <상상의 공동체>(1983)의 지은이인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73·사진)의 2004년 저작이다. 이 책은 앤더슨을 세계적인 학자 반열에 올린 <상상의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종의 후속작이다. <상상의 공동체>에서 그는 근대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18세기 말~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해 유럽에서 발전했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결속해주는 문화적 접착제 구실을 했다고 주장했다. 후속작에서 앤더슨은 이렇게 형성된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에 동남아시아 식민지역에서 급속히 번지게 된 이유와 그 과정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살핀다.    

  

전작 <상상의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앤더슨이 이 책에서 동남아시아를 주요 사례로 끌어들인 것은 그 자신의 출생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1936년 아일랜드 출신 아버지와 잉글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중국 윈난성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를 키워준 보모는 베트남 출신 여자였다고 한다. 장성한 뒤 아버지가 다녔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 앤더슨은 21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에서 정치학을 연구했다. 그 후 지금까지 이곳에 거점을 두고 인도네시아·타이·필리핀 지역 연구를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여전히 아일랜드 국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고향을 국적으로 간직한 것은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그의 어떤 애착을 암시한다.  

제목에 쓰인 ‘세 깃발’은 이 책이 지닌 지역적 성격과 세계적 성격을 동시에 상징한다. 첫 번째는 스페인과 미국에 대항해 혁명 전쟁의 포문을 연 필리핀 지하운동단체 ‘카티푸난’의 깃발이며, 두 번째는 당시 유럽 급진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하던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고, 세 번째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절부터 쓰인 쿠바의 깃발이다. 이 세 깃발은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이 유럽 아나키즘 운동, 나아가 쿠바의 반식민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부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은 그런 세계적 차원의 연결 지점을 가리킨다.

앤더슨 저작은 추상적인 개념 설명이 아닌 구체적인 사례 분석이 중심인데, 이 책에서는 사례 분석이 사실상 내용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 민족운동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유럽과 쿠바의 상황을 교직함으로써 사태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세 인물, 소설가 호세 리살, 인류학자·언론인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 저항운동 조직가 마리아노 폰세는 모두 186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세기 말 이후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 특히 호세 리살은 이 책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필리핀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앞세우는 것은 19세기 말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킨 선구적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을 준 것으로 유럽 아나키즘을 지목한다. 아나키즘은 당시 경쟁 이념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농민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하찮고’ ‘몰역사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편견도 품지 않았다. 억압적 지배질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했다. 초기의 민족주의자들은 아나키즘 운동에서 든든한 국제적 동맹군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호세 리살은 1861년에 필리핀에서 태어나 1882년 식민 종주국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유학한다. 그곳 마드리드대학에서 철학·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지 않고 파리와 런던 등지에 머물며 의학을 공부하고 유럽의 지식인들과 지적·정치적으로 교류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두 편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어로 쓴 두 소설 <놀리 메 탕헤레>(1887)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1891)는 “유럽 바깥에서 쓰인 최초의 선동적인 반식민 소설”이었으며, 당대 서구문학의 아방가르드 양식을 효과적으로 차용한 최정상급 작품이었다.   

리살은 자신의 두 번째 소설에서 이렇게 쓴다. “스페인어를 하는 한 줌의 사람들이여, 스페인어로부터 무엇을 얻으려는가? 독창성을 죽이고, 다른 마음에 너희 생각을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대신에 진짜 노예로 변질시키려는 것인가! 언어야말로 한 민족의 사상 그 자체인 것이다.” 리살의 소설들은 필리핀 현지로 들어와 반식민 민족운동의 상상력을 폭발시킨다. 1892년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살은 4년 뒤 터진 반스페민 민족해방전쟁 과정에서 처형당한다.  

 

지은이는 필리핀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당시 일본·중국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음을 상세히 밝힌다. 특히 쑨원·량치차오·루쉰은 필리핀 민족운동의 영향을 직접 받았으며, 그들의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옮긴이 서지원(오하이오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씨는 해제에서 “국제주의 입장이 민족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이 책은 무척이나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고명섭 기자) 

한겨레(09. 08. 28) 창비, 탈민족주의 확산 본격 제동 나섰다

창비 진영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원류 격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론’을 정조준했다. 지난주 출간된 <창작과 비평> 가을호를 통해서다. <창작과 비평>은 1990년대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해 특집·논단 등의 꼭지를 통해 그 ‘현실적 공허함’을 이따금 지적하긴 했지만, 앤더슨의 저작을 겨냥해 직접 비판을 가하기는 처음이다.  

 

창비의 달라진 행보 뒤에는 남북관계가 위기에 봉착하고 시장근본주의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탈민족 담론의 확산을 방치할 경우 자칫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이나 국가를 매개로 한 공공적 실천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창비의 문제의식은 ‘상상의 공동체론’을 논박하기 위해 게재한 라디카 데사이 캐나다 매니토바대 교수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데사이 교수의 비판은 민족주의를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앤더슨의 시각과 그 안에 내장된 ‘유럽중심주의’에 맞춰져 있다. 민족주의의 내용은 “해당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과제들이 요구하는 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실재임에도 앤더슨은 그것을 오직 문화적인 조성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제3세계 민족주의를 아메리카와 유럽의 선행 모델에 대한 ‘표절’의 산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한층 견고한 유럽중심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앤더슨의 민족주의 연구에 담긴 성과를 데사이 교수 역시 긍정한다. 민족주의의 기원을 19세기 중반의 유럽이 아닌, 18세기 후반 미국의 탈식민화 과정에서 찾음으로써 “민족주의를 언어나 종족 또는 다른 원초적 요인들에 의존해 설명하는 오랜 설명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사이 교수가 볼 때 상상의 공동체론이 거둔 ‘성공’은 학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요컨대 <상상의 공동체>는 신자유주의가 제3세계를 경제적으로 재식민화하는 상황에서 “학문을 탈정치화하고 민족주의를 가당찮은 문화적 박식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학문의 우경화에 일조”하고 “진보정치가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에 반격할 필요가 절실해지는 중요한 시점에 민족주의 연구를 유럽중심적인 것으로 만들고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서구의 구성물로 규정해 그 정통성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사이 교수는 <상상의 공동체>가 거둔 인기의 일부는 “신자유주의와 그것의 파생물인 ‘지구화’의 소산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데사이 교수의 말은 창비가 앤더슨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얻으려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와의 ‘결과론적 공모’ 혐의를 추궁함으로써 탈민족주의 담론의 확산에 확실한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데사이 교수의 글을 발굴해 게재를 추천한 사람이 편집인 백낙청 교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염종선 <창작과 비평> 편집장은 26일 “지난 3월 <아시아-퍼시픽 저널: 저팬 포커스>라는 해외 잡지에 실린 글을 백 교수가 발견해 번역게재를 추천했다”며 “편집위원들도 이 글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편향된 부분에 대한 교정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데사이 교수의 원문은 창비 영문판 누리집(www.changbi.com/english)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세영 기자)  

09.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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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8-28 23:15   좋아요 0 | URL
민족주의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도 모두 삼켜버리는 블랙홀이라고 봅니다.사회주의가 민족해방론과 제휴하다가 결국은 민족편향으로 끝나버린 게 사실이니까요.오히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의 해독을 저지하고 경고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뉴라이트가 일부 탈민족주의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민족주의의 유용성만을 계속 강조하는 것은 안이한 자세라고 봅니다.앤더슨 비판이 결국은 민족편향이라는 괴물을 살려주는 결과를 가져올까 염려되는군요.창비에 실린 글을 읽어봐야겠습니다.

페리 앤더슨의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도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형제가 모두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군요.

로쟈 2009-08-29 14:08   좋아요 0 | URL
저는 월러스틴의 비판이 가장 래디컬하다고 보는데요. 그에 따르면, 대학제도 자체가, 근대적 학술담론 자체가 유럽중심적이라는 것이죠...

펠릭스 2009-08-29 15:16   좋아요 0 | URL
앤더슨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 무장하기 위한 기초체력 단련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위성발사체로 보면 맨 위 위성체는 제국주의고, 1단연료엔진은 민족주의 같은 것인지? 문제는 발사체 맨 위에 위성말고 탄도를 올리면 안된다는 격인지 심상치가 않습니다. 또한 19세기 말 필리핀이(호세 리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킨 선구적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학교에 배송된 책과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가방 가득 채워넣고 귀가하면서 우편함에 들어 있는 잡지와 계간지까지 손에 들고 왔다. 계간지는 <문학동네>(가을호)인데,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이란 특집에 짧은 글을 보탠 바 있다. 여기에 옮겨놓는다.  

문학동네(09년 가을호)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모든 질문이 질문의 계기와 질문하는 자리를 갖듯이 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질문과 대답의 자리는 비대칭적이다. 나는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을 묻는 자리의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대답을 마련해야 하는 자에게 질문하는 자는 마치 심문자처럼 언제나 대타자의 자리에 놓인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대타자의 앎에 대한 두려움만이 나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밀알이다. 아니, 자신이 하나의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다.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사례가 된 이 환자는 의사들의 노력으로 겨우 치료가 됐다. 즉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문 밖에 닭 한 마리가 있는 걸 보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즉시 되돌아왔다. 닭이 자신을 먹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잖은가?”라고 의사가 물었다. 환자의 대답은 이랬다. “네, 물론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  

물론 이 사례담은 우스개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처럼 기독교의 신에까지 사안을 고양시키게 되면 이건 ‘진지한 우스개’이자 ‘숭고한 우스개’이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아버지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할 때 신은 그 자신을 잠시 믿지 않는다. G. K. 체스터턴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신이 잠시 동안 무신론자로 보이는 유일한 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젝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야말로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덜 무신론적’이라고 진단한다. 모두가 회의주의자의 포즈를 취하며 냉소적 거리를 유지하고 타인들을 착취하며 윤리적 제한들을 뛰어넘는다. 신의 무지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믿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에도 세 가지가 있는 듯싶다. 한편에는 여전히 문학에 대한 진지한 믿음, 철석같은 믿음을 견지한 문학의 사제와 신도들이 있다. 반면에 마치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문학은 죽었다’라고 공언하는 종말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제도적 관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 의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문학의 생산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문학이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사르트르)이라는 정의 자체를 오늘날의 문학이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 다만 문학의 변신을 새로운 가능성이란 이름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변절로 간주하여 내치느냐에 따라 의견은 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은 문학의 존재/부재를 ‘믿는다’. 결코 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하거나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여기서 문학에 대한 믿음의 과잉과 결핍은 ‘사변적 동일성’으로 묶인다.  

반면에 제3의 입장은 ‘믿음 자체에 대한 믿음’이란 형식을 취한다. 이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자신의 눈을 믿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으며 그래서 속는다. 문학에 속아 넘어간다. 즉, 문학의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을 믿는다. 대타자를 믿는다. 이들은 ‘닭’의 존재를 믿는 ‘낱알’들이다. 지젝은 그 ‘낱알들’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기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안네 프랑크와 함께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견지한 채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든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은 다시 W. B. 예이츠의 시구에서도 식별해볼 수 있다.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제2의 강림 The Second Coming」 중에서


오늘날 ‘최선의 무리’들조차도 문학의 ‘상징적 순수함’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지 못하며 냉소적․회의적 포즈로 물러나 앉는다(대학의 문학 강의실이나 문학인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반면에 ‘최악의 무리’(군중)는 온갖 광신적 행동에 동참한다. 문학이라고 포장된 온갖 것들에 재미를 붙이고 의견을 보탠다. 남은 선택지는 ‘침몰해가는’ ‘순결한 의식’이다. 이 순결함의 사례로 지젝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 등장하는 뉴랜드의 아내를 든다. 그녀는 남편이 오렌스카 백작부인과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사실을 품위 있게 무시하고 그의 충실함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답변인가? 그렇다. 해서 결국 나는 병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나는 질문이 요구하는 답변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했다.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건 말할 수 있다. 나도 이름을 보탠 한 선언이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6.9 작가선언'에서)

내가 보태지 못한 말은, 이 선언이 미처 챙기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가장 예민한 살갗일뿐더러 가장 질긴 살갗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가장 먼저 상처 입지만 가장 늦게까지 아물지 않는다는 것. 가장 빨리 아파하지만 동시에 가장 늦게까지 아파한다는 것. 이제 그런 문학이 ‘존재’하도록 모두가 애써 연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당신의 정절을 믿어요.”  

09. 08. 28.  

P.S. 서두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의 '계기'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마감이 지나 이 원고를 써야 할 시점에서 또 다른 서평을 위해 읽어야 했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다. 달리 대답거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지젝이 언급한 믿음의 문제를 한국문학에 적용해보았다. 인용한 예이츠의 시는 보통 <재림>이라고 옮겨지는데, <시차적 관점>에서 재인용하며 번역된 제목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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