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서 번역에 관한 블로그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73594.html).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반은 번역과 번역비평 담론을 모니터링할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중간언어'란 표현이 눈길을 끄는데, 학술용어인지 필자의 용어인지 잘 모르겠다. 필자에 대해선 기사 외에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한겨레(09 08. 28) [블로그] 번역에 대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언어를 전공하는 이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울거라 -자(自) 타(他)가- 여기는 알바가 번역이다. 이것만큼 철저한 오해가 또 없다. 해당 외국어를 잘한다고해서 대상어로 옮기는 작업에 능할것이란 억측은 이 바닥을 너무 만만히 본 탓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잘한다는 기준이란 게 또 모호하기 그지없다. 왜냐면 외국어는 지금 '잘하고 있다'가 내일도 '잘 할 것이다'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돼서 배운 언어는 쉽게 화석화되기에 하루라도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져버린다. 결국 ‘잘한다’는 말은 현재상태를 이름과 동시에 일련의 미래동작들-한 마리 죽여도 어느샌가 스멀스멀 또 한 마리 기어 나오는 집에 눌러 앉은 바퀴처럼 끝끝내 최후의 결정타를 날릴수 없는 어휘군단에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대처하며 아무리 발버둥 손버둥쳐도 정점(네이티브)엔 도달할 수 없다는 냉엄한 사실을 수시로 인정하는 동시에 외국어와 모국어 사이의 적절한 지점에 계속 위치하는-이 수행되리란 기대를 포함한 말이다.
번역에 있어 모국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해당 외국어보다 모국어가 비교적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어-한국어>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한국어 표현을 일본어로 바꾸는 것보다 일본어 표현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더 많이 본다. 일견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나 자신조차도 예외가 아닌데 이런 현상의 이유는 1.일본어 표현을 적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2.이해는 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 표현을 모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한->일이 일->한 보다 쉽다고 느끼는 이유는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학습자 자신이 기실 한->일이 아니라 한국어->중간언어(일본어지만 동시에 일본어라고 할 수 없는 학습자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간언어는 학습자가 책에서 읽거나 티브이・라디오에서 듣거나 혹은 일본인 친구와의 대화로부터 의식・무의식적으로 익혀 세운 하나의 언어세계이다. 이 언어세계의 주인은 당연히 그것을 세운 학습자 자신이기에 외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고 친숙하게 느껴지게 마련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일본어->한국어 번역에 있어 주요한 어려움은 2.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어를 닦고 기름칠하고 부품갈아주는 작업을 하는 '일본어 학습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올해 선정된 모(母)대학의 번역 상에서 찾은 재미난 발견 하나가 있다. 일본어 부문과 영어 부문의 수상작과 가작을 비교해 본 결과 먼저 일본어의 경우 수상작과 가작 사이에 큰 차이를 못 느꼈다는 점이다. 수상작은 철저히 원문을 따라 걸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부분에서는 직역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번역의 젤 어려운 점은 어디까지 내딜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것이다. 너무 가버리면 창작이 되고 범생처럼 얌전히 주의깊게 가면 직역같아서 왠지 껄끄럽다. 이런 점에서 가작은 좀 더 가볍게 원문과 나란히 걸으려고 했다는 흔적이 보였다.
다음으로 영어의 경우는 -원문을 번역문과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자알 이해할 만큼의 영어독해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지라 한국어에 한해서 말한다면-수상작과 가작 사이의 질 차이가 확연했다. 수상작에 납득이 갔다. 일본어와 다른 흥미로운 점은 질 차이뿐만 아니라 번역자의 원문 해석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런 정도라면 동일한 원문이라도 번역자별로 읽어보는 재미가 있겠다 싶었다. 왜 일본어 번역은 비슷비슷한데 영어 번역은 이리도 다른 걸까라고 일반화하는 건 위험하지만 암튼 흥미로운 실마리란 생각이 들었다.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의 단편 중에 <ぽたん>이란 작품이 있다. 문고판으로 4페이지 정도의, 길이로 보자면 단편이라기 보단 콩트에 가까운게 아닌가 싶다. 1페이지 정도 시험삼아 한국어로 옮겨봤는데 -'번역'은 내게 있어 일종의 자그만 로망이라 함부로 입에 올리기가 민망스럽다 ^^- 평이한 문장임에도 만만찮다. 좋은 한국어 문장이 내 머릿속에 충분히 비축되어 있지 않음을 통감했다. 무엇보다 이 단편의 제목을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같은 의성어 혹은 의태어로?-무엇보다 ‘ぽたん’이란 단어는 사전에도 올라와 있지 않다. -혹은 내용을 고려한 전혀 다른 제목? 귀국하면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서 비교해 볼 생각이다.
지금 떠오르는 가장 맘에 드는 번역 제목은 1967년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원제목은 <Guess Who's Coming To Dinner>였다. 이 멋진 번역 제목은 기실 일본에서 붙인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쓴 것이라고 한다. 씁쓸하다.
09. 08. 29.
P.S. 최근에 발견하여 구입한 번역학 관련서는 한국번역학회에서 옮긴 <라우트리지 번역학 백과사전>(한신문화사, 2009)이다. 1부에선 번역학 용어들에 대한 해제를, 그리고 2부에서는 각 나라와 지역의 번역 전통을 다루고 있다. 책은 1998년에 나온 초판을 옮긴 것인데, 참고로 올해 2판이 새로 나왔으며 온라인에서 발췌독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