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에서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살림, 2009)에 대해 다룬 걸 보고 청소년잡지인 SEM에 실은 짧은 글이 생각나 같이 옮겨놓는다. 내 글은 다섯 명이 참여한 '책, 내 마음의 길잡이'란 기획특집의 한 꼭지이다(청소년용이라 약간의 '협박'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독서가 일상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이런 특집이 반가운 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뇌가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입증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9. 19) 뇌의 종합예술 '독서'  

뇌는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다. 코가 안경을 받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듯, 뇌가 독서용으로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인간에게 먼저 추상적 사고의 능력이 생겼고,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문자와 문해 능력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독서 능력이야말로 모든 인지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자 총집결이다.

우리에게는 독서 유전자나 독서 중추 같은 것은 없다. 그야 어쨌든, 아니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서는 환상적인 기예이다. 감각 기관들과 뇌가 한치 흐트러짐 없이 손발을 맞춰야 한다. 청각에 문제가 있어 음소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언어 이해가 더디고, 주변 시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빠르게 텍스트를 훑어 내릴 수 없다. 뇌는 시각과 청각 정보를 잘 처리해야 함은 물론이고, 안구가 기민하게 움직이도록 쉴 새 없이 운동 명령을 내려야 한다. 피질 적소에서 기억을 인출해야 한다. 때로는 변연계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소환해야 한다. 그래야 행간을 읽거나 추체험을 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단계단계 짚어가며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복잡다단하고 섬세한 작업이다.

<책 읽는 뇌>는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을 통해 이 경이로운 인간 능력을 파헤치고자 한다. 첫째로 독서 능력의 진화 과정을 밝히고, 둘째로 한 인간이 독서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을 밝히고, 셋째로 독서 능력이 잘못되는 경우를 소개했다. 독서의 계통발생, 독서의 개체발생, 독서의 장애라는 삼 단계 구성은 삼단뛰기마냥 완벽한데, 내용이 다소 난삽한 게 흠이다. 영어를 기본으로 놓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국어·한글과는 사정이 다른 대목이 있는 점, 독서 교육에 관한 조언들이 간간이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맘에 걸린다. 그러나 독서가 뇌의 기본 장착 기능이 아니면서도 이토록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배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의외로 난독증을 다룬 부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독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뇌’는 어떤 형태이고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살펴봄으로써 ‘독서하는 뇌’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독서가 다단계, 다차원 과정이니만큼 난독증에도 서너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일반인은 언어 반구인 좌뇌로 독서를 처리하지만 난독증 환자는 우뇌를 활성화한다는 것, 즉 다른 신경 회로를 쓴다는 점도 재미있다. 사실 ‘환자’라는 말은 틀렸다. 책이 시종 강조하듯, 독서가 선천 능력이 아니므로 난독증은 장애가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중에 공교롭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를 함께 읽었다. 그래서 소설의 등장인물 중 남녀 주인공에 도무지 집중하지를 못하고 난독증 소녀 후카에리에 빠져버렸다. 후카에리는 뭔가 영적인 것을 느끼는 소녀라는 설정인데, <책 읽는 뇌>에서 주장하듯 난독증이 공간감각 같은 우뇌형 재능과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면, 후카에리의 능력도 그런 것일까? 후카에리가 공감각을 지녔다는 암시를 주는 대목도 있던데, 그것도 관계가 있을까? 후카에리는 왼손잡이일까? 아, 내 독서하는 뇌의 난독은 어떻게 해야 하나.(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SEM(09년 9월호) 두뇌에 '파워옵션'을 달자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 매리언 울프에 따르면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 곧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인지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다.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책을 잘 못 읽겠어’라는 투정은 따라서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옵션’이 장착돼 있지 않다는 것뿐이니까.  

인류가 독서라는 새로운 능력을 발명해낸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이다. 이른바 문자와 기록을 갖게 된 ‘역사시대’의 개막이다. 하지만 독서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사고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인류사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독서는 전환점이자 도약의 디딤판이다.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 마나한 장신구가 아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이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와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다른 학생과 구별해주지는 못한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 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아니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의 여정이고 진화의 과정이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힘껏 노력하지만 결과는 다양하다고 말했다. 더러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에, 도마뱀에, 개미에 그친다. 또 더러 위는 사람이지만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미잘에 머물 수도 있고 넙치에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갈망할 수 있으며, 강인한 독서는 우리를 그를 위한 여정으로 이끈다.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은 장기적인 이 여정을 위한 ‘파워 옵션’을 마련하고 장착하는 것이다. 곧 책을 읽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책 읽는 뇌’의 용도를 넓혀나가고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개선해나갈 때 우리의 사고 지평이 달라진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 또한 달라진다. 여러분은 자신의 뇌를 ‘장신구’로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책 읽는 뇌’로 단련할 것인가.   

09.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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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1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의 가소성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독서'다. 황해 홍길주는 '문장은 독서에만 있지 않고, 독서는 책에만 있지 않다' 했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독서의 범주에 둔 것이다. 그중 사유의 정제품인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발명이다.
열반하신 성철스님이나,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 독서가다. 두 분은 배움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조리하게도 스님의 '수자오계'에는 '책을 읽지 마라' 하셨지만 (진리는 문장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있다), 일반 신도에게는 독서를 권장하셨다고 한다.
산업혁명시대 다음으로 정보'제어시대'에 뇌의 신경학적인 연구들이 활발하다.
만약 뇌신경세포중 '성상세포'가 많아진다면 인간의 지적능력과 과학적인 발전은 더 커질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뇌의 가소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지금 그 현장(로쟈)에 와 있다.

로쟈 2009-09-19 17:52   좋아요 0 | URL
뇌의 가소성 이상으로 영양과 휴식도 중요한 듯합니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 대한 고명섭 기자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출간된 책이지만, 분량 때문인지 한 템포 늦추어 다루고 있다. 아직 읽을 짬을 못 내고 있지만, 나도 서평을 써봐야 하는 책인지라 요긴한 참조가 된다. 사실 책의 몇몇 부분은 그간에 다른 책들, 특히 '레볼루션 시리즈'(프레시안북)의 서문을 통해서 이미 읽은 것이기도 하다. 분량은 부담스러울 테지만, 놓치면 후회할 만한 책이다. 아래 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재미'라는 척도만 가지고도 책은 베스트셀러감이다. 

한겨레(09. 09. 19) 가난한 이들의 해방은 어떻게 이룰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최근작이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급진적 견해가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과격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머리말에서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주장을 비웃지만, 지젝이 보기에, 후쿠야마의 테제는 지금의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진보·좌파가 저마다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 대안이란 것들이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하려면 ‘신념의 도약’, 다시 말해 그 상식의 지평에서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젝이 이 책에서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발언은 지젝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대중적 규율을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규율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런 재정적·군사적 수단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지닌 것은 규율과 단결력뿐이다.” 지젝은 이런 ‘스파르타적’ 요소야말로 변혁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 안에는 해방적인 고갱이가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연합을 ‘프롤레타리아 스파르타’라고 부른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주장에 당장 ‘전체주의·근본주의 아니냐’는 힐난이 날아들 것이 분명하다. 지젝은 이런 비난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근본적 변혁을 회피해서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에 입각해서 그는 스스로 ‘악몽의 호러쇼’라고 부르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지젝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악몽이라 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적극적 검토의 대상으로 세운다. 그가 보기에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적 일탈이나 변종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핵심 요소들은 좌익 혁명운동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지젝은 벼랑까지 사고를 밀어붙인다. “미친 주장일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연하면,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히틀러는 과격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해서 비난받는다.

지젝은 나치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나치 참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끌어들인다.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나치즘과 무관하다거나, 그가 한때 나치였지만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두었다거나, 처음부터 나치가 아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변호한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는 나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참여했을 때 올바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틀렸을 때, 다시 말해 그가 나치에 참여했을 때, 그는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통한 근본적 변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 변혁의 내용이 좌익적 변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젝은 일화를 들어 말한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대표가 하이데거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는 자신은 학생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이렇게 파시즘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곧 총체성·규율·집단성 같은 것들이 애초에 파시즘과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그것의 본디 창조자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서 자기화한 것이다. ‘원파시즘적’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죽음을 초월한 사무라이 정신’도 파시즘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파시즘적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의 구성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지도자라는 범주도 “대의를 향한 열광을 촉발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파시즘 운동의 특수한 접합이 이 모든 것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비틀었을 뿐이다.  



지젝은 이런 검토 위에서 과거 혁명들이 수행했던 것들, 다시 말해, 진리의 정치, 당-국가-지도자 정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과감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지젝은 우고 차베스(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목한다. 차베스의 정치는 여러 가지 약점과 결점이 있지만, ‘자기 몫이 없는 자들’ 곧 빈민들과의 특권적 연대라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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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9-09-1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요구해도 다시말해 노동계급의 규율성과 단결을 이야기해도 당과 (중앙집권적) 국가는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아나키스트들은 뭔가요?

2. 지젝이 이야기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변혁을 복지시스템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서유럽의 사람들이 원할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즉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물론 베네주엘라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빈곤층이 혁명을 일으켜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차베스가 인기있는 곳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고..차라리 제도적 틀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발리바르식 접근법이 서유럽이나 자본주의가 발달한 여타 국가들에서는 더 가능성있는 변혁의 방법은 아닐지.

3. 아무리 "대의"가 본질적 변혁을 위해서 필요하다고는 하나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자유나 생명 혹은 인권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마치 "주체"라는 대의를 추종하는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지.

윗 서평을 읽고 드는 몇가지 궁금증을 적어봤습니다.


로쟈 2009-09-19 21:42   좋아요 0 | URL
지젝의 요지는 서문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삼는 것이다." 소련(북한)이 미국(남한)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북한)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진지하게 일독해볼 시간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9-09-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와 단절하는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는 소위 낭만적인 "아름다운 영혼"보다는 강철같은 규율이 필요다하는 이야기였었나요? 그러기 위해서 참조하는 것이 스탈린, 레닌이고 혹은 히틀러라는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구사회주의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규율을 강조했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권력의 집중 혹은 관료화라고하는 회피하기 힘든 문제인데 이것 때문에 결국 구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원인이기도 하지요.

결국 노동자나 피억압계층/계급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권력이 당이나 관료시스템에 돌아가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규율"이나 "대의"가 근본적 변혁을 위해 올바르게 작동될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권력의 집중과정에서 발생하는 혁명의 아포리아와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지젝에게는 있는지요? 만약 없다면 이것이 없이 어떻게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만.

로쟈 2009-09-19 22:34   좋아요 0 | URL
yoonta님은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걸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습니다.^^; 지젝의 입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구요. 바디우를 인용하면, "탈존재보다는 재앙이 낫다"는 게 이 '전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입니다...

yoonta 2009-09-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한다는 것이지요.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나 지젝의 헤겔주의 혹은 라캉주의는 저도 상당부분 동의하고 긍정합니다만 현실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은 이런 원칙적 대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없이는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극단적 테러가 되거나..얼마전 본 <바더마인오프>라는 독일적군파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대의"가 올바르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을 다수 대중이 수용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테러가 될 뿐이다라는 것을 말이지요. 알카에다와 같은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는 것이겠고요. 똑같은 정치적 폭력이더라도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된 프랑스 혁명때의 자코뱅파라던지 러시아 혁명에서의 볼세비키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대중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그것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의를 위한 동의를 획득할 것인가가 되어야 겠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반복하지만 구체적힌 현실과의 접점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지젝식의 레닌주의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고 외치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대의"로서는 원칙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더라도요. 오늘날 소위 좌파진영에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대부분 이런 지점에 있는 것이겟지요. 원칙이나 대의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현실을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을수 없다는 현실. 그래서 정치는 때로는 정치적 반대파와 타협하기도 해야하는 기술이라고도 이야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다 거세하고 지젝은 때로는 뭐랄까 너무 나이브한 원론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젝의 비판이 포스트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컨대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은 될수 없다고 그래서 저는 생각한 답니다.

2009-09-20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9-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은 첨병-담론(제가 만든 말)을 이끌어 내려 합니다.
이즘의 원형을 내재한 역사의 건에서 재사용(reuse)이 아닌
순도 높은 재활용(recycle)의 가치를 찾자고 합니다.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라는. 즉 역사적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함인데, 역사의 인큐베이터 밖에서 쉽지 않는 접점(실전부대)을 찾아야 합니다.

예로, 우울증 환자을 위해 항우울증치료제가 시판됩니다.
뇌의 행복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 재활용(recycle) 유도 보호제입니다.
부작용은 적지만 극심한 우울증 환자에게는 3주이상 투약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배설물에서 물을 재흡수합니다.
소장의 경우는 80% 물을, 대장은 물 이외를 재흡수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역사는 대장안으로, 그 안에서 생명수를 재흡수하자 합니다.

로쟈 2009-09-20 23:4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비유십니다.^^

펠릭스 2009-09-27 22:32   좋아요 0 | URL
레닌의 아버지는 장학사이자 대지주였군요.
빈권층과 특권층의 연대, 즉 지젝은 NGO운동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일까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 동향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잡지를 오늘 받아서 읽은 몇몇 흥미로운 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가 '중간필자' 결핍 현상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해주고 있는데,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야 이뤄지는 게 '중간필자군'이라는 입장에서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긴 학계도 매체도 내다버린 형편이라면 무얼 기대하기도 힘든 경우이긴 하다... 

한겨레21(09. 09. 18)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한국 인문사회 출판에는 ‘중간필자’, 즉 저술을 주업으로 삼는 자유로운 문필가 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인문학이 고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상상력과 자의식을 먹고 사는 학문인데, 지금 대학에서 이뤄지는 인문학 연구의 80%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증학·통계학·교육학·족보학 넷 중 하나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이뤄지는 연구이기 때문에 품만 들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18%는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싱겁거나 외곬이라서, 그 연구 결과물을 읽고 나면 “에라~ 그래, 혼자 놀아라”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남는 2%가 그나마 읽을 만한 논문을 생산해내는데, 그들은 대학 내에서 열심히 ‘왕따’당하다 결국 입지 구축을 포기하고 대충 한 발만 걸쳐둔 채 밖으로 나온다. 그 경계성 혼란을 인문학으로 승화시켜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이들이 현재 한국의 중간필자다.

‘미국식’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한 학계
둘째는, 매체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를 하는 언론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매체에서 뽑아져나오는 인문학이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연재물이 대부분이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대중의 지적 관심을 강하게 집약시키는 해외 저술들은 절반 이상이 저널리스트가 쓴 것들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밝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저널리스트의 유작 <콜디스트 윈터>란 책이 최근 나와서 이목을 끌었는데, 이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전쟁의 원인, 구조, 경과 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읽는 사람이 진짜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다리가 잘리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지독하게 훈련받고 직업상 방대하게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널리스트들이야말로 학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기발한 방식으로 ‘글감’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동안 간혹 중간필자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전문가-중간필자-대중’으로 너무 구획지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런 논의 구조에서는 학계가 지리멸렬하니 중간필자라도 잘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학계는 무시하고 대중을 선도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근본을 잘못 보는 것이다. 나는 중간필자를 ‘흘러넘침’ 현상으로 본다.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서 이뤄지는 중간필자야말로 ‘상업성’과 ‘개인적인 이유’ 등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흐르기는커녕 바싹 말랐다.

학계는 <기획회의>에서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미국식 시스템’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해서 아주 가관이다. ‘군단’급 학회를 제외한 중소 규모의 학회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술지 논문의 구색을 맞추느라 아는 사람들에게 논문 한 편만 보내달라는 ‘강제성’ ‘구걸성’ 전화를 돌리느라 바쁘고, 젊은 학자들은 2~3년 기본 연봉을 보장해준다는 이유로 자기 연구 분야도 아닌 프로젝트에 무미건조하게 투입돼 시간과 능력을 허비하고 있다. 출판사와 ‘의욕적으로’ 계약한 원고는 ‘공수표’로 방치한 채 말이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  

가외의 심각한 노력이 요구되는 매체 구조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우연히 한 블로그를 알게 됐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파고들어 역사상식의 뒤통수를 치는 글을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였다. 글마다 참고 문헌이 붙어 있는데 많을 경우 10편이 넘어갔고, 그중에는 해외 석학의 최신 저작이나 논문도 포함돼 있었다. 글을 잘 쓴다기보다 질문을 잘했고,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 품새가 아마추어적인 듯하면서도 꼼꼼하고 알찼다. 그런 글이 100편 넘게 올라와 있었다. 원고지 매수로는 3천 매 정도였다. 당장 연락을 취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현재 계약을 맺은 상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한 경제신문 국제부 기자였다. 그는 직장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짬을 내어 성실하게 그런 글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허랑한 글들의 바다에서 괜찮은 글 하나를 발견한 기쁨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글이 나오는 구조가 글쓰는 이에게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을 훌륭하게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의 저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전작이 필요하다. 적어도 책을 5권은 내야 5천 부 팔리는 저자에 도달한다는 출판계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저술 작업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포털이 중계하는 환경이 구축된 최근 5년 사이에 매체는 ‘빅뱅’이라고 할 만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표현 욕구를 블로그 등에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인문학’이란 간판을 달고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에세이·잡기류거나 재테크·다이어트 같은 실용류다. 역사·예술·문화비평 등도 간혹 있지만 체계성이 부족하거나 콘셉트가 부여되지 않은 리뷰, 세상 읽기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우리 인문저술계에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콘셉트’다. 조선시대 역사교양서만 예를 들어보자. 기생, 하층민, 양반, 무기류, 살인사건, 연애사건, 왕, 후궁, 2인자 등 아이템이 널려 있다. 이들을 매개로 역사의 빈곳을 채워나가는 건데, 나도 이런 책들을 내긴 하지만 과연 이걸 인문학적 역사물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순수한 인문학 독자로서 왜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갑자기 백과전서 짓기에 몰두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다큐멘터리를 내고 싶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이라는 원전을 어떻게 이 땅에 ‘번역’하고 어떤 경우는 ‘베껴먹었는지’ 그 체계적인 커넥션과 계보학이 궁금하다. 게다가 동인·서인도 모자라 남인·북인·소론·노론·벽파·시파·노론청류까지 뻗어나가 나라가 망한 판국에, 그들의 다양한 역학관계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 온전하게 알아듣기 쉽게 정리해놓은 책 한 권 없는 현실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변화된 매체의 양적 팽창이라는 환경을 등에 업고 이뤄질 수 있을까?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
앞으로는 출판도 해외로 수출해야 영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얼마나 시장이 큰가. 10년 전만 해도 중국 책들은 공무원이 쓰는 도덕 교과서처럼 재미가 없었다지만, 요즘은 대륙도 상업출판이 불붙어서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발’에 물이 올랐다. 거기에 ‘대표선수’로 내보내려면 최소한 소재의 특수성(특수한 보편성), 콘셉트(관점)의 확실성, 자료조사의 성실성, 논술 구조의 정합성은 담보돼야 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다른 실용·경제 분야라면 몰라도 인문학 분야에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해외로 판권을 수출하려면 실용서나 경제경영서를 잘 세팅해보는 게 오히려 빠르겠다는 판단이 자꾸 앞선다. 어차피 그쪽은 내용보다는 콘셉트 싸움이니 말이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랬다”고 가벼운 책으로 돈을 벌어 정말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책 읽고 ‘외국어는 안 돼도 콘셉트는 되는’ 진짜 엘리트 중간필자가 많이 생기게 말이다.(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09.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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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민혁의 생각
    from haawoo's me2DAY 2009-09-18 10:27 
    커패서티! RT aleph_k님: 한국에 야구, 게임 해설자는 몇 명이나, 전업작가는 몇 명이나 먹여살릴 수 있는 커패서티일까? heterosis님 rabbiyang님 julymon님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http://ow.ly/pTPj
 
 
노이에자이트 2009-09-17 23:33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책저술을 맡길 만한 필자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조금 고급독자를 위한 넌픽션물이나 역사물이 많아져야 하는데...미국의 퓰리처상 넌픽션 부문같은 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2   좋아요 0 | URL
민음사에서 논픽션도 공모하지만, 아직은 응모작이 많지 않나 봅니다. 작가 지망생들은 모두 '소설'에만 매달려 있어서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넌픽션에 쏟아부을 수 있는 여력이 없지요. 입에 풀칠하고 바쁜 형국이어서...

펠릭스 2009-09-18 10:29   좋아요 0 | URL
'중간필자','중간지대적 담론','양극단을 융합할 힘의 중간' 등에서
'중간'의 중요함을 느낍니다.

로쟈 2009-09-19 09:03   좋아요 0 | URL
학문과 삶의 소통이라고 하면 많이들 공감할 듯싶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학문은 학문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고요...

나의길 2009-09-18 14:44   좋아요 0 | URL
중간입장이 일방통행이 아니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사회현상에 의해 중간필자의 그 수가 적을 수도 있지만, 출판, 독자, 저자의 세가지 형태의 직업군을 볼 때는 출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을 대우하고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각각의 산업군도 알차게 성장하리라 봅니다. 현재 출판계는 베스트셀러 글, 베스트 셀러 저자, 베스트 셀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중간필자의 수를 줄이는데 한 몫 한다고 봅니다. 양질의 저자를 출판사가 발굴하고 그들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인문학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 봅니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나 불특정 공간에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도 문제라 봅니다. 과연 출판계는 잘하고 있나도 한번 들춰봐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5   좋아요 0 | URL
사실 출판, 독자, 저자에 다 불만을 토로할 수 있지요. 어느 편이 먼저 총대를 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주초에 읽은 시사IN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직함이 좀 길다)이 '마르크스라는 유혹'에 대한 불편함을 적고 있다. 사회적 담론이 대개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의미론적 마르크스가 아니라 화용론적 마르크스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수사가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것(나는 '마르크스의 연인들'에 대한 고종석의 비판에 공감한다). 마르크스를 지식인의 아편으로 본다는 점에서(레이몽 아롱의 말이던가)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다시금 확인하게도 해주는 칼럼이다(이념적 포지션으로 보자면, 그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중도 보수이다).      

  

시사IN(09. 09. 15) 마르크스라는 유혹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고종석_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09. 09. 17. 

P.S.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국가의 야만적인 폭력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용산 참사와 민간인 사찰과 공적 폭력의 남용은 그 '역사적 사회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박정희식 계획경제가 스탈린식 계획경제와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호명이 필요한 것은 거꾸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겐 '진정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냥 '마르크스'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에 대항하는 마르크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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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17 20:45   좋아요 0 | URL
식물이나 동물이나 독은 필요합니다.
상대를 치유하는 약으로도 가능하니까요.

로쟈 2009-09-19 09:06   좋아요 0 | URL
상처를 입힌 화살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지요...

philocinema 2009-09-17 22:5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실천도 못하면서 늘 머릿속에서나 말로만 평등, 분배, 정의등을 반복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반복적으로 주장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진보 담론이 오히려 진보의 장애물로 기능한다는. 자유에 대한 담론이 오히려 자유의 신장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요...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이번주 대학신문에서 '제도권 밖 인문학' 동향에 관해 짚어주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내가 실었던 글도 참조하고 있어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대학신문(09. 09. 12) 제도권 밖 인문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들고 자발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지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완화된 지금, 이들 단체는 더욱 성장하고 있다. 제도권 인문학이 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과의 위상이 축소되고 인문학 교육이 감소하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자 제도권 밖 인문학이 ‘인문학 위기 담론’의 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에는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백종현 교수(철학과)는 저서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을 통해 “우후죽순으로 대학이 생겨났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됐다”며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져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제도권 인문학이 소수 학자끼리만 소통되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창작과 비평』의 전 주간 최원식 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는 “대학의 폐쇄성이 인문학 위기 형성에 일조했다”며 “제도권 밖의 인문학 단체들이 인문학 대중화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가치가 대중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 허브로 성장한 ‘인디 인문학’들의 향연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들은 꾸준히 성장해 지식 허브의 한 축으로 기능 하고 있다. 분과 학문에 갇히지 않는다는 강점으로 각종 학문을 망라하며 연구하는 이들은 그 성과를 단행본으로 내놓기도 한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대표격인 ‘연구 공간 수유+너머’(수유+너머)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등의 저서를 발간했다. ‘수유+너머’는 공부와 생활을 함께 하는 단체의 성격을 특별히 ‘지식 코뮌’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자체적 실험결과를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호모 쿵푸스』 등의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수유+너머’를 비롯해 일반인 대상의 강연 ‘콜로키움’과 재소자 대상의 강연 ‘찾아가는 인문학 강좌’를 주최하는 ‘지행네트워크’, 인문학 연구 공동체 ‘다중네트워크 센터’, 문학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대안 문화공간인 ‘문지문화원 사이’를 주목해볼 만하다. 1980년대 ‘불온서적의 성지’에서 세미나와 토론회를 유치하며 학술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전남대 앞 서점 ‘청년 글방’과 ‘좋은 책방’ 그리고 서울대 근처 녹두거리의 ‘그날이 오면’ 또한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과 일반인의 자발적 참여로 유지되는 이들 단체는 올가을에도 풍성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픈 독자는 ‘수유+너머’에서 오는 18일(금)부터 매주 금요일 개최하는 ‘대학생 케포이필리아’를 통해 마르크스와 루쉰의 삶을 배울 수 있다. ‘문지문화원 사이’는 황지우 시인이 21일부터 시민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학과 비극의 향연’을 주제로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등의 명작읽기 강의를 진행한다. 

◇‘성역’ 없는 온라인 인문학 공동체
언론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오프라인 단체들보다는 인지도가 약하지만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 또한 인문학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단순히 오프라인 단체들이 활동 영역을 인터넷상으로 옮긴 것과는 다르다. 대표적 단체로는 올해 창립 10년을 맞은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의 역자 조영일 문학평론가가 카페장으로 활동하는 이 단체는 이미 인문학도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중적 단체로 성장했다.

‘비평고원’에는 성역이 없다. 철학·문학·영화 등 이들이 비평하지 않는 성역은 없으며 체면과 나이로 보호막을 갖던 선배들이 ‘기 센’ 후배들의 혹독한 비평을 피할 수 있는 성역은 더욱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오프라인 지식 코뮌과 비교해 갖는 강점이다. 조영일씨는 “비평고원의 모토는 자유로운 비평뿐”이라며 “오프라인 인문한 단체들은 상주 회원끼리의 유대로 신입 회원들이 배제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비평고원은 그러한 점을 고려해 오프라인에서의 모임을 지양한다”고 밝혔다. 또 ‘비평고원’은 참여자들이 자주 바뀌어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에서 일반인과의 소통이 용이하다. 실제 ‘비평고원’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의 절반 이상이 직장인, 자영업자, 주부 등 인문학 비전공자다. ‘비평고원’은 올가을 그간의 성과를 집대성한 동인지 『비평고원 프로젝트』를 발간할 계획이다. 이 동인지는 ‘가라타니 고진’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주제로 무크지 형식으로 출간된다 하니 이를 통해 제도권 밖 온라인 인문학의 수준을 느껴봄도 좋을 듯하다.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 변방이 아니다…중요한 것은 ‘의지’
온라인 인문학 단체는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지식공동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 지식 담론을 형성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알려진 이현우씨는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글을 통해 ‘비평고원’을 비롯한 온라인 인문학 단체의 가능성을 인정한 바 있다. 인터넷 공간의 인문학 단체는 개방성과 공유성, 현장성과 순발력을 통해 기존의 학술단체들이 창출하지 못했던 ‘중간지대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화를 넘어선 새로운 학술담론의 창출에도 긍정적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의지’다. 인터넷 공간의 활용과 지식의 공유는 사용자의 의지에 달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대중들의 인문학 수요는 높아지는 실정”이라는 ‘수유+너머’의 대표격인 최진호씨의 말처럼 제도권 밖 인문학은 이미 새로운 지식 원천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이들 단체는 해외에도 알려졌다. 최원식 교수는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들은 대중적인 인문학 가치 함양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대중과의 친화력에 덧붙여 제도권 인문학과도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은열기자)  

09. 09. 16.   

P.S. 기사에서 "백종현 교수(철학과)는 저서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을 통해"라고 언급한 것은 기자가 잘못 옮겨적은 것이다.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은 저서명이 아니라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에 실린 논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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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9-16 23:08   좋아요 0 | URL
온라인에서만 치열하게 논쟁하고 실제로 만나선 안된다...아무리 진보적인 사람들도 우리나라 인간관계는 위계질서 따지는 짓을 안 할 수는 없나 봐요.같은 유교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도 학교 선후배 위계는 없던데 왜 우리나라는 이럴까요...

로쟈 2009-09-17 19:31   좋아요 0 | URL
대부분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죠...

펠릭스 2009-09-17 21:43   좋아요 0 | URL
인터넷이 없었던 70,80년대는 제도권 밖에서 전.비전공자 함께 인포말구룹화하여 왕성했지요. 그때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못들어 봤지요. 현재는 가상공간 덕분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할 수 있으니 양적으로는 팽창할 수 있습니다. 지식 담론을 형성할만 역량이 우려되기 합니다만 지식은 얇아도 예전보다 공감력이 일반화되기 때문에 '중간지대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어 오히려 더 고무적입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네, 아직은 가능성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