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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오이디푸스 왕, 그 자신의 ‘눈빛’을 꺼버리다!
양털을 둘러 감은 탄원의 나뭇가지를 들고서 테바이 궁 앞에 모인 탄원자들에게 오이디푸스는 약속한다. 죽어가는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도시의 땅의 열매를 담은 이삭들도, 풀 뜯는 소의 무리도 죽어가고 있으며,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모스의 도시로 와 가혹한 노래꾼 스핑크스로부터 구해주었듯이 그들의 삶을 바로 세울 것을 약속한다.
오이디푸스는 도시와 그 자신과 그들을 위해, 그들 중 누구보다도 앓고 있으며, 동일하게 신음하고 있다며, 자신의 처남 크레온이 퓌토(델포이)의 포이보스(아폴론) 집에서 신탁을 받아 올 것임을 이야기한다. 크레온은 테바이에서 생겨난 오염을 나라에서 몰아내고, 치유할 수 없는 것을 키우지 말라는 신탁을 전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살해와 ‘관련 없는 자로서’ 역병을 몰고 온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추적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살인자가 누구이든, 내가 권력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땅으로부터 배척하는 바요.
누구도 그를 받아들여 접대하지 않고, 말을 걸지 않도록,
또 신들게 드리는 기도나 제사에
함께 하지도, 성수를 뿌리지도 못하게 말이오.
외려 나는, 우리를 오염시키는 그를
모두가 집에서 쫓아내라 명하오.“(236~242행)
누구도 그 살해를 저지른 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 같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모셔온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를 거절한다.
“아아, 현명함이 득이 안 될 곳에서 현명하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내 그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잊었으니! 그러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을!“(316~318행)
원하는 답을 회피하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살해자로서의 의심을 한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를 ‘이 땅을 오염시킨 불경스러운 자’라 이른다. 자기 친족들에게 적이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에 쫓길 것이며, 나중에는 어둠만을 보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라이오스의 죽음과 테바이에 역병을 몰고 온 자로서 지목되자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이 자신을 모함한다고 주장한다. 크레온과 이오카스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그 혐의를 물리지 않는다.
마침 이 때, 코린토스의 사자가 폴뤼보스의 죽음과 그 뒤를 이어 오이디푸스가 왕 노릇하기를 백성들이 간청한다는 상반된 소식을 들고 나타난다. 그야말로 사자의 전언은 폴뤼보스가 오이디푸스의 살해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죽었다는 소식이자, 그가 오이디푸스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동시에 밝혀지는 아이러니를 촉발한다. 이제 오이디푸스에게 던져진 문제는 라이오스의 살해자의 추적에서, 자신의 혈통과 정체에 대한 것으로 바뀐다. 어머니와의 결혼에 관한 신탁의 두려움에 대하여 사자가 전해 준 친모가 아니라는 소식은 곧 키타이론 산에 버려진 아이를 주워다 폴뤼보스에게 바친 것이라는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 상반된 소식의 전언이 오이디푸스가 명령했던 내용들이 자신에게로 실행되어질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자, 곧 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목자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쯤에서 이오카스테는 사태의 전말을 깨닫고는 궁 안으로 들어가며, 아무말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고 한다.
목자(하인)의 대답 속에서 자신이 이오카스테에 의해 키타이론산에 버려진 자이며, 사자에 의하여 폴뤼보스에 의해 키워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목자에게서 오이디푸스 자신이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 죽이라고 버려진 아이를 받아서 사자에게 전한 사실만을 듣게 된다. 즉, 살해자의 추적에서 오이디푸스 자신의 정체에 관한 문제로 극의 흐름이 진행되는 것이다.
“(코러스 좌1)
아아, 필멸의 인간 종족이여,
그대들이 살아 있을 때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내 얼마나 헤아렸던가!
겉으로만 행복해 보이고, 그러다가
기울어 저무는 것 이상의
행복을 얻고 있는가?
오, 가여운 오이디푸스여, 내 그대의,
그대의, 그대의 운명을
거울로 삼아, 그 어떤 인간도
행복하다 여기지 않으리."(1186~1196행)
오이디푸스의 살해자 추적은 결국 자신의 결혼의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이다. 그 스스로는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와의 결혼이라는 신탁에 대해 최대한 피하고자 하여 코린토스의 폴뤼보스 곁을 떠났다. 살해의 의지도 없었고, 그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들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앞서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 대하여 크레온과 그의 모함으로 라이오스 살해자로 자신이 지목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그 무서운 진실 앞에서 피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그대로, 키타이론 산에서는 네 발로, 코린토스와 테바이의 궁전에서는 두 발로, 결국 눈 먼 자로서 지팡이를 짚고 세 발로 다시 키타이론 산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끝까지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결국 자신에게로 그 질문이 되돌아오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오이디푸스는 지혜의 눈으로, 그 눈 빛을 믿고 추적한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낸 아폴론 록시아스의 ‘시간’ 앞에서, 그는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하고 그 지혜의 빛을 차단한다. 어찌보면, 다른 방식의 앎, 지혜를 얻는 과정으로의 전환일 것이다.
“(코러스 우2)
그대는 모르고 행했지만, 모든 것을 보는 시간은 그대를 찾아냈고,
오래전부터 자신이 거기서 나고,
자식을 낳기도 한 결혼 아닌 결혼을 벌합니다."(1213~1215행)
어리석은 자라면 고통을 덜 느꼈을 것을, 너무 명민하기 때문에 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오이디푸스에게 코러스는 노래한다.
“고집에서나 역경에서나 똑같이 불행한 자여!”(1347행)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희랍의 격언대로,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알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신의 목숨을 건 소크라테스와도 대비되는 지점이 있다. 자신의 몸에 대하여, 우주의 질서에 대하여, 자연의 운행에 관하여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들의 흐름을 타고 자신의 운명을 제어할 수 있다는 확신은 공부에 맹렬히 임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실현 가능한 것으로 인정될 것이다. 눈먼 오이디푸스를 통해 코러스는 마지막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오,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도다.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쏠려 들어갔는지.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1524~1530행)
지혜 또는 지식의 총량이 증대하고,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부분적인 제어가 가능해질 때 인간이 오만에 빠질 위험 또한 증대한다. 그 모든 원리를 터득한다면, 심지어 우주 작동의 원리까지도 터득한다면, 아득한 옛날 ‘마법’이라고 불릴 만큼의 심오한 비의들을 전수받는다면 이전까지의 그 어떤 혁명적 이론으로도 풀 수 없었던 인간의 질병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커질수록 겸손해지기는, 그 역병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을 오이디푸스가 오염된 자라는 모함의 죄인으로 몰아 처단해야 하고, 그 처단의 이유를 합리화해기 위해서는 ‘거짓’ 이론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 지도적 위치에 섰던 현자인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자신을 벌하여 테바이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의 주위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의 권위를 따라 거짓을 유포하고 실행에 옮기는 ‘광기’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은 지금까지의 많은 혁명의 역사적 과정에서 보여 준 ‘숙청’과 ‘처단’의 학살과 문화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불러일으키며 걷잡을 수 없는 반역의 정당화를 보증해 줄 것이다.
스스로가 저주하고 추방을 선언했던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 그의 현자로서의 고귀한 위치에서 떠나며, 그 지혜의 눈을 멀게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어찌 보면 높은 벼랑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보다도 살아남아 그 처절하고 끔찍한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며 생명과도 같았던 지혜의 감각기관을 단절하는 것이 더 힘겨운,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자기 정체의 발견은 그리 우리 일상에서 먼 사건이 아니다. 수 천 년 전의 고대 희랍에서만 벌어질 일이 아니다. 우리의 공부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우리의 공부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보지 못할 것을 보는,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형제이자 자식인 이들을 본 것처럼, 그렇게 끔찍한 진실에 직면할 것이다. 1293행에서는 오이디푸스의 그러한 상태를 ‘질병’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것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차마 그것을 이전의 지식과 지혜의 수준으로 보지 못할 때, 견딜 수 없을 때,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눈빛’을 꺼버릴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