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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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그 자신의 ‘눈빛’을 꺼버리다!
 

 

양털을 둘러 감은 탄원의 나뭇가지를 들고서 테바이 궁 앞에 모인 탄원자들에게 오이디푸스는 약속한다. 죽어가는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도시의 땅의 열매를 담은 이삭들도, 풀 뜯는 소의 무리도 죽어가고 있으며,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모스의 도시로 와 가혹한 노래꾼 스핑크스로부터 구해주었듯이 그들의 삶을 바로 세울 것을 약속한다.

 

오이디푸스는 도시와 그 자신과 그들을 위해, 그들 중 누구보다도 앓고 있으며, 동일하게 신음하고 있다며, 자신의 처남 크레온이 퓌토(델포이)의 포이보스(아폴론) 집에서 신탁을 받아 올 것임을 이야기한다. 크레온은 테바이에서 생겨난 오염을 나라에서 몰아내고, 치유할 수 없는 것을 키우지 말라는 신탁을 전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살해와 ‘관련 없는 자로서’ 역병을 몰고 온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추적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살인자가 누구이든, 내가 권력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땅으로부터 배척하는 바요.

누구도 그를 받아들여 접대하지 않고, 말을 걸지 않도록,

또 신들게 드리는 기도나 제사에

함께 하지도, 성수를 뿌리지도 못하게 말이오.

외려 나는, 우리를 오염시키는 그를

모두가 집에서 쫓아내라 명하오.“(236~242행)

 

누구도 그 살해를 저지른 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 같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모셔온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를 거절한다.

 

“아아, 현명함이 득이 안 될 곳에서 현명하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내 그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잊었으니! 그러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을!“(316~318행)

 

원하는 답을 회피하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살해자로서의 의심을 한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를 ‘이 땅을 오염시킨 불경스러운 자’라 이른다. 자기 친족들에게 적이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에 쫓길 것이며, 나중에는 어둠만을 보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라이오스의 죽음과 테바이에 역병을 몰고 온 자로서 지목되자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이 자신을 모함한다고 주장한다. 크레온과 이오카스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그 혐의를 물리지 않는다.

 

마침 이 때, 코린토스의 사자가 폴뤼보스의 죽음과 그 뒤를 이어 오이디푸스가 왕 노릇하기를 백성들이 간청한다는 상반된 소식을 들고 나타난다. 그야말로 사자의 전언은 폴뤼보스가 오이디푸스의 살해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죽었다는 소식이자, 그가 오이디푸스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동시에 밝혀지는 아이러니를 촉발한다. 이제 오이디푸스에게 던져진 문제는 라이오스의 살해자의 추적에서, 자신의 혈통과 정체에 대한 것으로 바뀐다. 어머니와의 결혼에 관한 신탁의 두려움에 대하여 사자가 전해 준 친모가 아니라는 소식은 곧 키타이론 산에 버려진 아이를 주워다 폴뤼보스에게 바친 것이라는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 상반된 소식의 전언이 오이디푸스가 명령했던 내용들이 자신에게로 실행되어질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자, 곧 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목자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쯤에서 이오카스테는 사태의 전말을 깨닫고는 궁 안으로 들어가며, 아무말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고 한다.

 

목자(하인)의 대답 속에서 자신이 이오카스테에 의해 키타이론산에 버려진 자이며, 사자에 의하여 폴뤼보스에 의해 키워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목자에게서 오이디푸스 자신이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 죽이라고 버려진 아이를 받아서 사자에게 전한 사실만을 듣게 된다. 즉, 살해자의 추적에서 오이디푸스 자신의 정체에 관한 문제로 극의 흐름이 진행되는 것이다.

 

“(코러스 좌1)

아아, 필멸의 인간 종족이여,

그대들이 살아 있을 때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내 얼마나 헤아렸던가!

겉으로만 행복해 보이고, 그러다가

기울어 저무는 것 이상의

행복을 얻고 있는가?

오, 가여운 오이디푸스여, 내 그대의,

그대의, 그대의 운명을

거울로 삼아, 그 어떤 인간도

행복하다 여기지 않으리."(1186~1196행)

 

오이디푸스의 살해자 추적은 결국 자신의 결혼의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이다. 그 스스로는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와의 결혼이라는 신탁에 대해 최대한 피하고자 하여 코린토스의 폴뤼보스 곁을 떠났다. 살해의 의지도 없었고, 그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들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앞서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 대하여 크레온과 그의 모함으로 라이오스 살해자로 자신이 지목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그 무서운 진실 앞에서 피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그대로, 키타이론 산에서는 네 발로, 코린토스와 테바이의 궁전에서는 두 발로, 결국 눈 먼 자로서 지팡이를 짚고 세 발로 다시 키타이론 산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끝까지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결국 자신에게로 그 질문이 되돌아오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오이디푸스는 지혜의 눈으로, 그 눈 빛을 믿고 추적한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낸 아폴론 록시아스의 ‘시간’ 앞에서, 그는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하고 그 지혜의 빛을 차단한다. 어찌보면, 다른 방식의 앎, 지혜를 얻는 과정으로의 전환일 것이다.

 

“(코러스 우2)

그대는 모르고 행했지만, 모든 것을 보는 시간은 그대를 찾아냈고,

오래전부터 자신이 거기서 나고,

자식을 낳기도 한 결혼 아닌 결혼을 벌합니다."(1213~1215행)

 

어리석은 자라면 고통을 덜 느꼈을 것을, 너무 명민하기 때문에 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오이디푸스에게 코러스는 노래한다.

 

“고집에서나 역경에서나 똑같이 불행한 자여!”(1347행)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희랍의 격언대로,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알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신의 목숨을 건 소크라테스와도 대비되는 지점이 있다. 자신의 몸에 대하여, 우주의 질서에 대하여, 자연의 운행에 관하여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들의 흐름을 타고 자신의 운명을 제어할 수 있다는 확신은 공부에 맹렬히 임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실현 가능한 것으로 인정될 것이다. 눈먼 오이디푸스를 통해 코러스는 마지막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오,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도다.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쏠려 들어갔는지.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1524~1530행)

 

지혜 또는 지식의 총량이 증대하고,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부분적인 제어가 가능해질 때 인간이 오만에 빠질 위험 또한 증대한다. 그 모든 원리를 터득한다면, 심지어 우주 작동의 원리까지도 터득한다면, 아득한 옛날 ‘마법’이라고 불릴 만큼의 심오한 비의들을 전수받는다면 이전까지의 그 어떤 혁명적 이론으로도 풀 수 없었던 인간의 질병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커질수록 겸손해지기는, 그 역병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을 오이디푸스가 오염된 자라는 모함의 죄인으로 몰아 처단해야 하고, 그 처단의 이유를 합리화해기 위해서는 ‘거짓’ 이론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 지도적 위치에 섰던 현자인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자신을 벌하여 테바이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의 주위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의 권위를 따라 거짓을 유포하고 실행에 옮기는 ‘광기’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은 지금까지의 많은 혁명의 역사적 과정에서 보여 준 ‘숙청’과 ‘처단’의 학살과 문화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불러일으키며 걷잡을 수 없는 반역의 정당화를 보증해 줄 것이다.

 

스스로가 저주하고 추방을 선언했던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 그의 현자로서의 고귀한 위치에서 떠나며, 그 지혜의 눈을 멀게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어찌 보면 높은 벼랑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보다도 살아남아 그 처절하고 끔찍한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며 생명과도 같았던 지혜의 감각기관을 단절하는 것이 더 힘겨운,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자기 정체의 발견은 그리 우리 일상에서 먼 사건이 아니다. 수 천 년 전의 고대 희랍에서만 벌어질 일이 아니다. 우리의 공부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우리의 공부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보지 못할 것을 보는,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형제이자 자식인 이들을 본 것처럼, 그렇게 끔찍한 진실에 직면할 것이다. 1293행에서는 오이디푸스의 그러한 상태를 ‘질병’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것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차마 그것을 이전의 지식과 지혜의 수준으로 보지 못할 때, 견딜 수 없을 때,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눈빛’을 꺼버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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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에반드로스-번역자를 위하여"

연극 공연용 대본은 연출가와 각색자의 능력에 따라 생산 가능합니다. 시적(詩的)인 표현들을 대화체로 옮기기 위해서 번역자 본연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표현들에 안주한다면, 그야말로 '에반드로스의 덕목'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랍 비극이 운율을 가진, 합창형식이 주요한 가무(歌舞)극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희랍 비극을 즐길 수 있는 출발점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시적 표현들을 '잘라먹는'다고 해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국에서 공연되었던 <오이디푸스 왕> 연극 작품들은 제가 경험해본 바로는 시적 표현을 최대한 살린 번역본을 가지고도 연출가의 능력에 따라서 충분히 공연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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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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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번역출판7’에 대하여>


* 직역/의역의 문제 -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로쟈는 번역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주제를 직역과 의역, 그리고 번역자의 권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 예로,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잘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고스란히 옮길 것인가? 번역자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로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라는 이희재의 주장을 근거로 직역과 의역의 문제를 다룬다. 이에 대한 로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입장에선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로쟈는 “그것이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면 반대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한국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며, 이러한 논의는 이미 <우리글 갈고 닦기>(이수열 지음,  한겨레출판, 1999-10-18) 등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좋은 사례로 천병희 선생의 경우를 든다.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서양고전문헌학자인 강대진 박사의 견해를 대비시키고 있다. “희랍인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희랍 원전 표현 그대로 ‘이오카스테의 머리’라는 번역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강대진 박사의 주장을 로쟈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한국어 독자나 관객에겐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감내케 하거나 오히려 코믹한 느낌이 들게 하지 않을까. ‘머리’의 높임말로 ‘두상(頭上)’을 써서 ‘이오카스테의 두상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해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을 성싶다.”

 

오히려 이러한 코믹한 느낌은 서양원전의 시대적, 문화적 바탕을 고려해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로 번역을 옮길 때 발생하고 있다. 강대진 박사의 <잔혹한 책읽기>에서도 그 예를 들고 있는 것으로 매우 코믹한 경우이다.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Works and days)>을 ‘작품과 생애’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머리’라는 표현은 고대 희랍의 서사시나 비극 작품이 ‘시’라는 형식의 문학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매우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이해를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 오히려 그러한 ‘차이’를 즐길 수 있는 부분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도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으며, 강대진 박사의 민음사 번역본 40행에서는 그대로 번역으로 옮기고 있다.

 

이것은 로쟈의 오해처럼 한국어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하기 가장 까다로운 ‘시’를 최대한 그 원전의 운율과 의미를 되살려 옮길 수 있는 한국어의 풍부한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중의 이해라는 명목으로, 까다로운 시어들에 대한 능통한 한국어 구사 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그 시의 특성을 오히려 삭감시키는 표현들을 선택하는 태도는 번역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형성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오히려 무능력을 드러냄으로써 번역자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로쟈는 또한 강대진 박사의 ‘존대법’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지나친 서양말에 대한 환대이며 예의에 벗어나는 공손’이라고 평가한다. 원전이 갖는 특수하고 미묘한 차이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을 때, 한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번역자들에게는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말에 대한 ‘비하적 태도’라는 변명을 낳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 대한 존대의 태도는 원전에 대한 일차적이고 매우 기본적인 지식과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용감한 ‘잘라먹기’식의 접근이 아니라, 번역자의 권위를 제대로 세울 수 있도록 그 미묘한 차이들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말에 능통한 실력을 제대로 키우는 것이다. 그래야만 아름답고 함축적인 시어들을 우리말에서 자유자재로 낚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한국어가 까다로운 외국어로 된 ‘시’를 최대한 그 의미 전달을 놓치지 않을 만큼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언어라는 것을 보여줄 때, 그럴 때에야 비로소 단순한 전달자(헤르메스)에서 “세계의 소음 속에서 의미를 식별할 줄 아는 자”로서의 에반드로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의 장인, 글쓰기에 능통한 자로서의 번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원전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문화적 바탕과 의미들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기본적인 것이다. 문자를 읽을 수 있다고 모두가 다 번역할 수는 없으며, 한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야말로 시어를 구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에반드로스로서의 번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용감한 ‘잘라먹기’에 앞서서 겸손한 원전에 대한 ‘공부’를 통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을 위해서 선택하고 잘라버린 시어(詩語)들 때문에 ‘파리스의 사과’를 ‘아담의 사과’로 오인하고 비평하는 코믹한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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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9-09-16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의 장인, 글쓰기에 능통한 자로서의 번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원전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문화적 바탕과 의미들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기본적인 것이다. 문자를 읽을 수 있다고 모두가 다 번역할 수는 없으며, 한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저도 번역할 때마다 깊이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로쟈 님 블로그에 갔다가 에움길 님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본인이 아니라서 정말 주제넘은 듯합니다만) “에움길” 님께서 표기하신 “로자”는 오타이군요. 정확하게 “로쟈”로 표기하셔야 되겠죠. 괜한 참견을 한 것 같아, 매우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에움길” 님의 좋은 번역비평 글 기대하겠습니다.

outis 2009-09-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해주신대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귀로만 듣던 단어여서 '자'로 기억된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9-1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같은 글에서 지적한 것인데, 1235행에서 강대진 박사는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말하고 듣기에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이야기하자면, 여신 같은 이오카스테께서 돌아가셨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천병희 선생은 '머리'를 포함해서 번역했다가 숲판에선 뺐고요. "'머리’라는 표현은 고대 희랍의 서사시나 비극 작품이 ‘시’라는 형식의 문학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매우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이해를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 오히려 그러한 ‘차이’를 즐길 수 있는 부분"이라곤 하지만, 강대진 박사도 이 대목에선 그게 '어색하다'고 본 게 아닐까요? 제가 지적하고픈 것은 그것입니다...

outis 2009-09-1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출판사에서 다른 출판사로 저작권을 옮길 때, 모든 것을 원전으로부터 다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와 함께 달리 표현할 부분을 정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출판부에서 책을 낼 때와, 일반 대중을 향해 전집 기획 시리즈로 한 번역가의 고전 번역을 낼 때와는 편집자의 요구와 그 강도가 매우 다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해당 원전에 대한 기본적인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편집자들은 모든 '시적'표현들을 '어색하다'고 평가하고, 대중은 해독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서 고쳐줄 것을 몇 차례 요구하곤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outis 2009-09-1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천병희 선생님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있을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잘라버린다고 해서, 희랍 비극을 읽지 않을 대중이 그 점 때문에 읽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 것 같으신가 하고요. 선생님과 해설서 등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취미로 즐겨 읽기 어려운 것이 또한 고전입니다. 고전이 수 천 년 세월을 견디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도록 읽히는 것은 해당 국가의 언어로 쉽게, 일반화 시켜서 번역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은 사실 매우 읽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어린 아이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outis 2009-09-1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읽기 어려움에도 우리에게 안겨줄 지혜와 삶의 그 풍요로움을 기대하면서 책을 읽는 안목을 한 단계 높이고자 애쓰며 공부한다면, 그 과정에서 좋은 스승의 인도와 그들의 책을 함께 읽는다면, 그 어려움은 오히려 우리들의 지혜와 고전을 읽는, 그로부터 파생된 무수한 철학, 정치, 문학, 예술 서적들을 읽는 안목을 높이고 풍부하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강대진 박사가 그 스스로 주장한 것을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에는 대중을 위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에 대한 편집진과의 갈등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원전, 특히 고전 원전 번역자들에게는 이 갈등이 번역 그 자체보다도 더 힘든 과정일 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원전에 대한 안목이 있는 편집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겠지요.
 
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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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율을 가진, 가무에 의해 불려지는 노래이자, 무엇보다 '시'인 비극을 제대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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