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캉스의 계절도 다 지나간 것인지 눈에 띄는 신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몇 권의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면서도 개인적으론 '허기'를 느낄 정도다(이럴 때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서라도 필요한 '영양분'을 보충한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꾸리에, 2009)에 눈길이 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소개기사들을 읽어보면 강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빈곤론이라고 하기엔 많이 빈약한 책이다(즉 빈곤한 빈곤론이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경제학 전공이었다면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즉 일본적인 에토스인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예전에 <가난 이야기>(서셕연 옮김, 범우사, 1994)라고 번역된 적이 있고, 신경림 시인이 문학인생에 대한 회고에서 가와카미와의 특별한 인연을 언급한 적이 있다(그러고 보면 가와카미의 책도 경제서라기보다는 '시'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한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면서 제목은 '가와카미 하지메와 신경림'이라고 붙인 이유다.      

가난이야기(범우사상신서 052) 

한국일보(09. 08. 22) 가난과 맞선 '도덕적 마르크스주의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ㆍ1879∼1946)는 20세기 초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의 집 근처를 지나면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학생들을 보며 경제학부의 가와카미인지, 가와카미의 경제학부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삶과 사유를 일치시키려 한 그의 생애에는 시대의 영광과 좌절이 함께 하고 있다.

<빈곤론>은 그가 교토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16년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고, 가난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모았다. 부자들의 수요가 사치품에 몰리고 생산자들은 그에 맞춰 사치품을 만드느라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는 게 그가 지목하는 빈곤의 원인이다. 따라서 가난을 해소하려면 부자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중단하고 필수품이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나올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한편에서는 벼락부자가 속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가가 폭등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 문제를 고민하는 이 책이 나오자 대중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유물사관의 관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도덕에만 매달린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됐다. 그러자 가와카미는 그 비판을 수용하고 책의 절판을 요구했다. 저자도 인정했듯 이 책은 한계가 분명하다. 부자의 사치 근절로 빈곤을 막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할 뿐 아니라 현실적 해결 방안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론>에는 가난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그 가난과 맞서 싸우려는 그의 열정과 신념이 들어있다. 가난에 대한 가와카미의 태도는 1901년 겨울 대학생 신분으로 한 모임에 참가했다가 옷을 벗어준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마침 그 모임에서 모금 바구니가 돌았는데 돈이 없던 그는 외투, 상의, 목도리 등을 다 벗어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다음날 입고 있는 옷만 빼고 집에 있던 옷을 모두 그 모임에 기부했다고 한다.

가와카미는 개인의 도덕성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빈곤론>에 제기된 비판을 수용하고 마르크스 이론을 공부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정부는 그런 그를 대학에서 쫓아냈고 대학에서 나온 그는, 전편이 강조한 도덕성에 마르크스주의를 더해 <빈곤론2>를 썼다. 사상범을 단속하던 특고경찰에 검거돼 3년 9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투쟁 현장 뒤로 물러난 일개 노병에 불과한 나는 그저 인류 진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싶을 따름"이라며 칩거하면서 자서전 집필과 <자본론> 번역에 매진하다 1946년 1월 영양실조에 급성폐렴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  

  

한겨레(09. 08. 22) “결핍의 공포, 이것이 바로 가난”

<빈곤론>은 20세기 전반기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 가와카미 하지메(1879~1946)의 저작이다. 37살 때 쓴 이 책은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도 아니지만, 가와카미의 얼굴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저작이다.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 전집’ 36권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이 저작이라고 한다. 한 손에 잡히는 이 단출한 책에는 가난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한 윤리적 인간’의 정신이 담겨 있다.

가와카미의 삶은 전력을 다하여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삶을 닮았다. 만행과도 같은 맹렬한 사상 편력이 여기서 비롯했고, ‘윤리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독특한 경지가 이 편력의 끝에서 열렸다. 1905년 <요미우리신문>에 ‘사회주의 평론’을 열화와 같은 독자 호응 속에 연재하던 26살 도쿄대 강사는 이 연재물을 갑자기 중단하고 ‘절대적 이타주의’를 내세운 종교단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의 실상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음을 알고 두 달 만에 뛰쳐나왔다. 이 일화는 진리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이타적 도덕주의’를 일찍이 삶의 화두로 삼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학문적 이력을 시작한 그는 40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로 행로를 바꾸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 비로소 입당 기회를 얻고서 로자처럼 울었다.” 가와카미는 결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았지만, 도덕주의라는 근본태도는 마지막까지 기저음으로 남아 그의 사유에 독특한 울림을 심었다.

<빈곤론>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인 1916년에 신문에 연재해 이듬해 출간한 책이다. 이 책에는 빈곤과 궁핍의 시대를 향한 가와카미의 분노 섞인 규탄과 이 사회적 질병을 퇴치할 방책에 대한 논구가 담겨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과 ‘강제된 가난’을 구분한다. 스스로 선택하여 기꺼이 받아들인 가난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가난은 같을 수 없다. 가난이란 그저 물질이 부족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의 공포와 두려움,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강제된 가난’의 본질적 모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자발적 가난은 절감하지 못한다.

이 강제된 가난의 실상을 규명하려고 그는 ‘빈곤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육체의 정상적 발육과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가 이 빈곤선을 긋는 지점이다. 최저생계비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빈곤선 이하’의 상태가 그가 말하는 가난, 곧 절대적·절망적 가난이다.

그는 통계 자료를 끌어들어 세계 최대의 부국이라는 영국의 런던에서조차 빈곤선 이하의 가난한 사람이 인구의 30%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상층 2%가 전체 부의 72%를 소유하고 있음도 밝힌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은지 이유가 밝혀진다. “소수의 부자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이어 왜 가난한 사람들이 죽도록 일을 하고도 생필품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필요와 공급의 불균등’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급은 생활에 하등 필요하지 않은 사치품으로 쏠린다. 구매력이 큰 부자들의 수요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사치품 생산에 생산력이 소비되느라 생필품에 필요한 생산력이 줄어든다고 성토한다. 절대적 빈곤을 없애려면 사치품 소비를 줄이고 생산력을 생필품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진단은 산업예비군의 압력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다는 사실, 그리고 최저생계를 감당할 만큼 임금을 올리려면 노동자들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와카미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런 진단 위에서 가와카미는 빈곤이라는 시대적 질병을 퇴치하려면 부자들의 사치 근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한계급의 사치는 사회의 죄악이다.” 왜냐하면 사치품을 생산하느라 사회의 생산력이 생필품에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을 국유화해 나라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경제 조직(자본주의 체제)을 개조하는 것도 방법임을 가와카미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체제 개조가 근본 방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외적인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와카미의 도덕주의적 관점은 적지 않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0여년 뒤 가와카미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제2 빈곤론>(1930)을 써 앞 책의 한계를 고백하고 극복했다. 그러나 <빈곤론>에 담긴 그의 진단과 처방은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가난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파토스가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던 것이다.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가와카미는 끝까지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지만 실천의 장에서 물러난 자신을 ‘전향자’로 간주해 스스로 유폐 생활을 했다. 그는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 영양실조와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한국일보(02. 07. 17) "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탄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는 시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전통적 서정이 아니면 신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알고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면서 내 시에 대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지만,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본을 따서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그룹으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서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동안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멤버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 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다 사업이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에 있는 작약 뿌리를 다 캐 팔았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이라고 내가 왜 못하랴, 나는 이런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 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이것을 나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돌리고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내가 먼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씩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의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보기도 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 살기가 이렇게도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 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도 한 직업은 아마 학원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싱거운,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생각보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땅은 사람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뿐 아니라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남아 있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 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이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 뿐이었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사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내게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10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적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다. 뿐 아니다. 고(故) 김관식 시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우리 서울 가서 함께 좋은 시 한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의 말에 큰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조건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아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여기에는 내 시를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의 격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 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았다. 이때 쓴 시들이 시집 ‘農舞(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반유신, 반군사독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 시는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 드러나면 동료나 후배는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문득 나는 시를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있는 말이 되기 어려웠던 터이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것도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것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점 나는 잊지 않고 있다.(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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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급성 폐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세기 초 일본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에 대한
사유를 시인의 '파장'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최고의 지성이 시장에서 '골라골라'를 외쳐도 공제선는 들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인도로 유배를 간다해도 나라의 숙제를 들고 가겠다 했다. 둘은
플라톤의 이상주의로(하지매), 아리스토의 현실주의(후광)로 극복하려 했다.

시인은 알아 차렸다. 척박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여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시어를 '행동하는 양심'의 도구로 삼았다.
시인과 '가와카미 하지메'의 특별함은 나에게도 그렇다.

로쟈 2009-08-23 08:52   좋아요 0 | URL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란 고백이 인상적입니다...
 

낮에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숲, 2009)이다.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으로 새롭게 출간된 것인데, 원전 번역으론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삼성출판사본과 동서문화사본을 더 갖고 있는데, 당장 손에 들 수 있는 건 동서문화사본과 이 숲본이다. 플라톤의 <국가>와 함께 정치학의 고전이면서 '기원적' 저작에 해당하기에 시간을 내 한번쯤 숙독해봄 직하다(책의 윤곽은 강유원의 <서양 정치사상 고전 읽기>(라티오, 2008)에 잘 정리돼 있다. 강유원은 박영사본을 대본으로 삼았다). 서평기사를 일단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15) 서구 정치학의 뿌리…핵심은 공공의 이익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정치학>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희랍어 원전 번역으로 새롭게 나왔다. 이로써 서구 정치학의 고전이자 정치학 이론의 뿌리라 할 저작을 좀더 가깝게 다가가 읽을 수 있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년 시절에 스승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메이아’에서 20여년을 공부하고 가르친 뒤 40대에 새로운 학원 ‘뤼케이온’을 열어 당대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그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 작업을 했는데, 형이상학에서부터 윤리학·정치학·자연학까지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400여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술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저술들(‘엑소테리카’)과 학원 내부용 강의 노트들(‘에소테리카’)로 나뉘는데, 외부용 저술은 다 사라지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50편 정도의 내부용 저술뿐이다. <정치학>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정치학>(폴리티카)은 먼저 저술된 <윤리학>(에티카)과 짝을 이루는 저작이다. 개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그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정치학>은 그 개인들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국가 공동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윤리학>의 마지막 구절은 “자, 이제 (국가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보자”로 끝나는데, <정치학>은 이 문장에 이어서 그 국가(폴리스)의 발생과 구조와 최선의 형태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윤리학의 일부로 보았는데, <윤리학>의 핵심 원칙인 ‘중용’이 <정치학>에서도 핵심 원칙으로 작동한다. 개인의 행복이 중용에 있듯이, 훌륭한 국가도 중용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서구 정치학의 뿌리이기는 하지만 그 뿌리의 뿌리라 할 저작이 없는 것은 아닌데, 스승 플라톤의 <국가>(폴리테이아)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탁월한 제자였으면서도 스승과는 견해가 달랐고 스승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도 서슴지 않았다. <정치학>도 그런 저작 가운데 하나다. 플라톤의 <국가>가 이상국가라는 이념을 상정하고 그 국가의 성립 조건을 상상력을 동원해 밝히고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현실 세계의 국가들을 경험적으로 분석해 거기서 최선의 정치체제를 찾아내는 방식을 구사한다. 플라톤이 이상주의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적으로 현실주의적이다.

<정치학>은 ‘국가 공동체’(폴리스)의 기원과 성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출발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가정’(오이코스)이다. 폴리스는 다수의 가정 공동체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폴리스를 알려면 가정 공동체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최초의 경제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이 등장한다. 경제학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란 바로 ‘가사 관리’를 뜻한다. 여기서 가정이라고 번역된 오이코스를 그 시대의 실상대로 이해하면, 한 명의 가장 아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몇 명의 노예들과 일정한 넓이의 토지로 이루어져 있는 일종의 장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이코노미아는 이 소규모 공동체를 가꾸고 이끄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친 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의 다른 양상들도 밝히는데, 물물교환에서 화폐가 탄생하고 상업이 성립하고 독점이 발생한다는 것까지 설명한다. 그의 설명 가운데 생산된 물건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다는 대목은 훗날 카를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정치학>의 모든 주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명제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 번역서는 그 명제를 “인간은 ‘국가 공동체(폴리스)를 구성하는 동물’(zoion politikon)이다”라고 번역했다. 이 명제는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바뀐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폴리스가 보편적 질서였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목표가 구성원에게 단순한 생존이 아닌 훌륭한 삶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 훌륭한 삶을 전체적으로 보장하는, 다시 말해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치체제는 올바른 것이지만, 다스리는 자들의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모두 올바르게 운영하면 공공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가장 잘 작동할 수 있는 정치체제는 ‘혼합 정체’다. 민주정체의 좋은 요소와 귀족정체(과두정체)의 좋은 요소가 결합한 것이 그가 말하는 혼합 정체인데, 민주정체는 다수의 참여와 지배를 보장하고, 귀족정체는 뛰어난 개인들의 ‘탁월함’(아레테)을 활용할 기회를 보장한다. 이 혼합 정체가 원만히 유지되려면, 그 중심에 중간계급이 넓게 포진해 있어야 한다. 이 중간계급이 중심을 잡고 민주정과 귀족정의 장점을 떠받치는 것이 국가에서 실현되는 ‘중용’인 셈이다.(고명섭 기자)  

09.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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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1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2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8-22 08:30   좋아요 0 | URL
이상주의자 '플라톤'의 제자인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이나 지식에 있어서는 권위에 맹종하지 않았군요'(옥중서신)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 멀면서도 가까운데에 손님들이 오셨으니 못 이긴척 환대하는 '중용'(중도실용?)이 필요한 때라 생각합니다만,,,

로쟈 2009-08-22 10:09   좋아요 0 | URL
아, 시사 멘트시군요.^^
 

저녁에 마트에 다녀온 걸 제외하면 하루종일 '재택'근무를 한 탓에 바깥 소식은 인터넷 뉴스로만 접한다.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이 오늘 입관되었다고 하니 이제 그의 죽음도 '현실'이 됐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은 주로 1987년 대선 정국 이후여서(그때 나는 아직 선거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정당의 선거참관인으로나 투표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따져보면 길지 않다(그래도 나에겐 얼추 반생이다!). 그 기간 동안 '한국 정치'하면 늘 한쪽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니 이른바 한국 정치사의 '상수'이다. 이제 그 '상수'를 제하고 '변수들'로만 방정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당장은 의문이 든다. 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선 김에 그의 시대의 공과도 좀더 분명하게 밝혀지면 좋겠다. 그게 가야 할 길의 방향과 보폭을 정하는 데 요긴할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DJ노믹스'를 추억하는 기사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20) 디제이노믹스에 대한 추억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국민의 정부 초기에 썼던 취재수첩을 들춰봤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맞아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 때였다. 수첩엔 그때의 숨가빴던 상황들이 거칠게 담겨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다룬 내용이 많았다. 수첩을 넘기다 ‘디제이노믹스’(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철학과 정책기조)란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1999년 8월 어느 날, 청와대에서 경제 관련 업무를 하는 비서관과 저녁을 먹으며 디제이노믹스를 소재로 오간 말들을 적어 둔 것이었다.   

질문은 주로 “디제이노믹스는 어디로 갔느냐”였다. 그는 “지금은 아이엠에프 때문에 옴짝달싹 못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대통령이 하고 싶은 경제정책들을 내놓을 것이다”라는 요지로 대답했다. 실제로 그해 8월15일 김대중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새로운 경제정책 구상을 밝혔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 들어도 도발적이다.

“…더불어 성공할 수 있는 경제 번영을 이룩하겠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하고 중산층 중심으로 경제를 바로잡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이 없도록 세제를 고치겠습니다. …중산층 육성과 서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인간개발 중심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적극 펴겠습니다. …근로능력과 의욕이 있는 모든 국민에게는 직업훈련과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야망은 그 뒤 대체로 흐지부지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한 디제이노믹스는 실종됐다고 진단했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반민주적 성장지상주의와 야만적 시장만능주의의 악조합’이 굳어졌다고 혹평한 이들도 있다. 과연 이런 비판이 타당할까.

김 전 대통령이 편 경제정책 가운데 디제이노믹스와 딱 부러지게 부합하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확실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정도가 꼽힌다. 하지만 현행법과 제도에는 디제이노믹스가 곳곳에 녹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때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라면,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기업의 구성원한테 구조조정 주체로 참여해 성과를 나눠 가질 수 있게 한 한국형 우리사주제도다. 국민의 정부는 2001년 8월에 근로자복지기본법을 제정하고,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여러 관련 법령을 개정해 우리사주제를 크게 바꿔놓았다. 주식회사 사원들한테 우리사주제를 단지 재테크 목적이 아니라 경영 참여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의 종업원주식소유제도(ESOP)를 우리 실정에 맞게 설계한 제도다. 이를 잘 활용하면 구조조정과 대규모 실업의 긴장관계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선 항공·철강·자동차 같은 기간산업의 구조조정에 활용돼 성공한 사례가 수없이 많다. 1980년대 미국 크라이슬러의 극적 회생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제너럴모터스(GM)의 구조조정도 공적자금과 노조의 퇴직연금 출자를 통한 합작이다.

디제이노믹스에 대한 되새김은 자연스럽게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쌍용자동차를 떠올리게 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쌍용차 회생의 전제로 3자 매각을 얘기한다. 새 주인을 찾아야 회생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새 주인’에서 쌍용차 사원들은 아예 배제되어 있다. 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면, 쌍용차 회생의 씨앗을 디제이노믹스에서 한번 찾아보시라.(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09.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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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1 16:02   좋아요 0 | URL
고인의 일기에 경천애민(敬天愛民) 사상이 스며있습니다.

로쟈 2009-08-22 10:07   좋아요 0 | URL
국가 지도자라면 의당 갖추어야 할 태도일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은 듯해요...
 

점심을 먹고 돌아왔는데, TV를 켠 아이가 "김대중 대통령 서거하셨대!"라고 알려준다. TV속보를 본 모양이고, 나도 포털사이트에서 바로 속보를 접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황망한 마음이 없지 않다. 고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기사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는데, 이미 '준비된' 기사들일 테다. 그중에는 고인의 어록도 정리해놓은 게 있어서 차분히 읽어본다(이미지는 옥중서신이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지만, 다른 빛은 보이지 않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해럴드경제(09. 08. 18) (DJ어록)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 경제, 사회 현안에 해박했고, 발언에는 거침이 없었다. 유명한 발언도 많이 남겼다. 전문가들조차 김 전 대통령 앞에서 서면 주눅이 들 정도의 막힘없는 멘트는 ‘인동초’의 삶의 기록으로 남게됐다. 생전 김 전 대통령의 주요 발언을 정리한다.

▶경제
-국민의 정부’ 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시키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1998. 2. 25 대통령 취임사중에서)
-현 내각은 금년 1년 동안은 ‘실업대책 내각’ 이라는 결심으로 일해야 합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옛말입니다. 이제는 가난도 나라가 구제해야 합니다. (1998.3.18 국무회의)
-사람은 가난하게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부유하게 되지도 말 일이다. 우리는 가난해도 부유해도 다 같이 돈의 노예가 된다. 알맞게 갖고 자유인이 될 일이다. (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IMF는 지난해 말, 한국이 IMF 지원체제에서 졸업했다고 선언했고 국제신용 평가기관들은 줄지어 한국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했습니다. 그러나 작년의 성과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국제신용평가기관도 개혁의 계속 그리고 정치의 안정을 주문하고 있습니다.(2000.1.26 연두기자회견)  

▶통일
-북한에 대해 당면한 3원칙을 밝히고자 합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1998.2.25 취임사)
-안보는 철통같이 하되, 그러나 전쟁을 막기 위한 안보, 그리고 결국은 남북이 화해 협력하기 위한 안보, 이런 방향으로 나갈 때 나는 우리 조상들이 도와서 하늘이 도와서 우리 민족의 미래가 열릴 것이 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남북정상회담 대통령 방북 성과 대국민 보고’ 중에서)
-공산국가에 대해서 억압과 고립화, 이런 것으로써 성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방으로 유도하고 대화를 하고 이렇게 해서 성공 안 한 적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관계가 경색되면 될수록 이러한 햇볕정책은 계속 이어나가야 합니다. (2002.12.30 국무회의 중에서)
-저는 20년 동안 일관되게 3원칙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하였습니다. 3원칙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입니다. 3단계는 제 1단계 남북공화국 연합제, 즉 1연합 2독립정부의 단계입니다. 제2단계는 연방제, 즉 1연방 2지역자치정부의 단계입니다. 제 3단계는 완전통일의 단계입니다.(1994.11.2 중국 북경대학 연설문)  



▶민주주의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1998.2.25 취임사)
-국민은 항상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잘못 판단하기도 하고 흑색 선전에 현혹되기도 한다. 엉뚱한 오해를 하기도 하고, 집단 심리에 이끌려 이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국민 이외의 믿을 대상이 없다.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했는데, 하늘이 바로 국민인 것이다. (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민주정치는 대의정치입니다. 대의정치는 계약정치입니다. 죤 로크(J.Locke)가 말한 대로 국민과 주권자와 정치인 간의 계약인 것입니다. 3당통합은 계약위반입니다. 평민당보고 같이 하자고 했으나 안했는데, 만약 평민당까지 했으면 이 의사당은 야당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민주주의입니까? (어둠속에서도 빛을 찾아서, 1990. 2. 27, 평민당 대표연설중에서)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정치는 심산유곡에 핀 한 떨기의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입니다. 연꽃을 피게 하고 정치를 예술화하는 것은 국민의 예지와 책임감과 결단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국민 여러분께서는 꼭 투표에 참여해 주십시오. 귀중한 한 표를 포기하는 것은 국정에 참여하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자 여러분의 미래를 선택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입니다.(2000.3.27 16대 국회의원 선거 관련 담화문)  



▶인권
-나는 98년 대통령 취임 이후 5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사형집행을 한 일이 없으며 몇 사람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사형집행은 진정한 해결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하루속히 우리나라와 전세계에서 사형제도가 없어져서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사형제도폐지를 위한 국제엠네스티 캠페인 기고문 중)
-인류역사 이래 사람이 있는 곳에 인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인권의 침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권의 침해가 있는 곳에는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투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1998.4.16 세계인권선언 50주년 메시지)

▶여성
-어머니의 권리가 아버지의 권리와 같고, 아내의 권리가 남편의 권리와 같고 딸의 권리가 아들의 권리와 같은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가족법 개정을 이뤘다(89년 정기국회에서 가족법개정안 통과 직후)
-저는 ‘반절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사회’ 를 ‘남녀 모두가 성공하는 사회’ 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1998.7.3 제3회 여성주간 기념식 연설)

▶동서 화합
-동서의 화합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양상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1998.4.30 대구?경북 국가기도회 연설)
-21세기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혁명기입니다. 세계가 하나로 되는 시대이며, 무한경쟁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 남고 승리하려면 국민적 단결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지역이기주의는 망국의 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힘을 합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세력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합니다. (1999년 대통령 신년사중에서)
-나는 내가 호남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 번도 나의 고향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차별받는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고통을 나누는 것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일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의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기타
-학문이나 지식에 있어서는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된다. 존경은 해도 비판의 눈은 견지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내 자신의 비판의 그물에서 여과시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미숙하고 과오를 범할 경우가 있더라도, 내가 나로서 사는 유일한 지적 생활의 길이기 때문이다. (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시시비비를 먹고 자랍니다.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70년대 저서 ‘행동하는 양심’에서)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의 덕분입니다. (2000.10.31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
-(대통령이 되기)전에 비하면 아내한테는 더 충실한 남편이 되는 것 같다. 그것 하나가 좋은 점이다. (1999.9.2 타임지 회견) (이상화 기자) 

09.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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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8 15:15   좋아요 0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의 저를 다지는 말씀입니다.
"학문이나 지식에 있어서는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된다.
존경은 해도 비판의 눈은 견지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내 자신의 비판의 그물에서 여과시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미숙하고 과오를 범할 경우가 있더라도,
내가 나로서 사는 유일한 지적 생활의 길이기 때문이다."
('옥중서신’중에서)

로쟈 2009-08-20 22:51   좋아요 0 | URL
감옥에선 10시간씩 독서에 몰입했다더군요. 역설적으로 정치 지망생들은 한번씩 가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CEO 같은 거 하지 말고...

Kir 2009-08-18 22:56   좋아요 0 | URL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지껏 힘겨운 삶을 버텨내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일어나주시길 바랬는데 더는 무리였나봅니다. 2009년은 정말 최악의 해로 기억될 것 같아요.

로쟈 2009-08-20 22:48   좋아요 0 | URL
최악의 선택이 빚은 결과들인데, 아직 끝이 아닐 듯싶어요...

자꾸때리다 2009-08-20 18:43   좋아요 0 | URL
결과적으로 말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추진한 바람에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졌다고 볼 수 있지 않는지... 한나라당 말대로 DJ가 경제를 망쳤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물론 그 근거는 전혀 다르지만.

로쟈 2009-08-20 22:48   좋아요 0 | URL
결과적으론 그런 면도 있겠습니다. 당면했던 현실에서 선택지가 별로 없었을 것도 같구요. 물론 한나라당에서 비판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MB의 행태로 보면...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잠시 칼럼들을 훑어보다가 '탐욕의 미래'를 우려하는 칼럼 두 편을 묶어서 옮겨놓는다. 지난주 한겨레21의 특집기사와 오늘자 한겨레의 박노자칼럼이다. 시스템이 조장하는 '대박 환상'이 인성으로 제어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파멸로 가는 길에 브레이크는 없어 보인다...  

 

한겨레21(09. 08. 14) 잊혀진 공포, 살아난 탐욕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수천조원의 자산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금융 패닉을 경험한 지가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의 심리적 충격과 허탈했던 기억을 모두 잊은 듯 금융시장과 부동산 시장 곳곳에서 과열과 거품의 조짐이 일고 있다. ‘손실의 기억’은 사라지고 ‘수익률의 기대’가 부풀어오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2000년 3월 미국 나스닥 거품 붕괴와 함께 무너졌던 코스닥 신화의 허망한 붕괴를 목도하며 21세기를 시작한 경험조차도 10년을 넘지 않는다. 당시 5천 포인트를 상회했던 나스닥이 수개월 만에 3천 포인트 밑으로 떨어지고, 한국의 코스닥 지수도 290포인트까지 치솟던 것이 50포인트라는 원점으로 회귀했던 기억 말이다. 당시 정보기술(IT) 대박의 꿈을 좇아 ‘묻지마 투자’를 하던 수많은 개미들의 머니게임은 처절한 좌절로 끝났다.

그러나 머릿속의 ‘대박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수년 뒤 부동산과 금융상품에 대한 머니게임은 다시 되풀이된다. 2004년부터 저금리 기조 아래 부동산 시장이 점차 들썩이고 때마침 수익 경쟁을 벌이던 은행들이 대대적인 주택담보 대출을 풀어 실탄을 공급하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전국적인 부동산 투기 열풍이 대한민국을 휩쓸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뒤 최대의 금융 거품이 세계적 차원의 폭발을 앞두고 있던 2007년 시점에, 한국에서는 2천만 계좌 이상의 펀드상품이 팔려나가고 있었고, 2006년까지만 해도 360만 명 전후를 맴돌던 주식투자 인구가 2007년 440만, 지난해는 46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경제활동인구 5명 가운데 1명이 주식투자를 한다는 얘기다. 종합주가지수도 2천 포인트를 돌파하며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대박의 꿈을 좇아 부동산에, 펀드에, 주식에 자산을 쏟아붓던 정점에 글로벌 금융위기는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2008년 10월 이후 본격화된 금융위기 충격은 거의 실시간으로 전세계, 전 가구에 파급되었고 우리나라도 순식간에 은행 파산의 공포, 기업 파산의 공포, 가계 파산의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우리 가계가 느꼈던 공포는 2000년 IT 버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물가상승률 밑으로 소득이 추락하면서 가계 수입이 줄었다. 가계 자산의 77%를 차지하는 부동산 가격이 추락하고, 펀드와 주식이 반토막 행진을 이어가면서 가계가 보유한 자산가치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반면 각종 시중금리가 7% 이상으로 뛰어오르면서 지출해야 할 이자 비용은 급팽창하고 부채도 늘어났다. 대박의 꿈이 파산의 공포로 전환된 것이다.

‘고위험’을 감수하고 ‘고수익’을 좇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던 사회심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반면, 우선 부채를 줄이려는 부채 디레버리지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다시 ‘안전자산’을 찾게 되었다. 2007년까지만 해도 전체 금융자산 대비 41%로 떨어졌던 예금 비율이 2008년 말 기준으로 46%까지 올랐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심리적 수준을 넘어 구조화된 투기 욕망
외환위기 이후 줄곧 자신과 가정의 미래를 투기성 짙은 투자에 걸면서 이미 우리 가정의 소득과 소비, 저축 구조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가계는 비교적 안정적인 노동소득 상승과 15% 이상의 높은 순저축률을 보이고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은행에 따르면 저축을 기반으로 한 민간 소비는 경기가 악화되어도 크게 줄지 않았고, 반대로 경기가 과열되어도 소득의 일정 부분을 저축으로 쌓는 경향이 많아 소비가 급팽창하지도 않았다. 가계의 움직임이 경기의 급격한 변동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가계 운용 패턴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노동소득이 불안정한 가운데 저축을 줄이는 동시에 부채를 동원해서 소비를 확대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가계 부채는 빠르게 늘어나 지난해 기준 가처분소득의 1.4배까지 폭증한다. 반대로 가계의 저축률은 빠르게 줄어들어 지난해 기준 2.5%를 기록하는데, 이는 저축률이 0%까지 추락했던 미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수치다. 올해 미국인들의 저축률이 급상승해 6.5%까지 올라간 점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은 가장 저축을 안 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 가정들이 경기변동에 민감한 상품들, 즉 투기성 자산에 몰리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안정적인 저축성 예금이 줄어들고, 보험상품도 경기변동에 민감한 변액보험이 25%를 차지할 정도로 팽창했으며, 주식 직접투자도 2007년 기준으로 무려 21%가 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한국 가계 자산이 점점 더 ‘시장에 민감한’ 구조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곧바로 가계의 소비지출에 큰 영향을 주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제는 가계 운용이 경기변동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기변동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위기로 충격에 빠진 가계가 갑자기 자산 운용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단순히 국민들의 고수익 기대, 투기 욕망이라는 심리적 요인으로만 투기 열풍을 해석할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이다.

구조화된 투기적 가계 운용 구조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서서히 수면 아래로 잠복하기 시작한 2009년 3월부터 즉시 그 실체를 다시 드러낸다. 유동성 부족으로 한국과 신흥시장에서 자금을 대거 회수했던 선진국 금융자본들이 다시 한국 주식을 매수하면서 주가가 올라가자 개미들은 이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가장 극적인 것은 이른바 공모주 열기였다. 지난 5월 하이닉스반도체의 일반 공모 유상증자에 무려 26조원에 달하는 자금이 몰려 사상 최대를 기록했는데, 이는 기존 하이닉스 주식 시가총액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우려할 만한 것은 개미들이 돈을 빌려 주식에 투자하는 행위가 부활하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주식을 사기 위해 증권사에서 돈을 빌리는 신용융자 잔액이 지난 6월18일 4조원을 넘어서고 있는데, 이는 올해 들어 178%가 늘어난 것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를 틈타 부동산 시장도 비록 국지적 양상을 띠고 있지만 다시 거품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는 올 4월 0.7%로 플러스 반전된 뒤에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고, 특히 서울 강남권은 1.18%까지 오르면서 2006년 가격대 회복을 말하는 실정이다. 특히 지난 7월, 월 단위로는 9년 만에 처음으로 버블세븐 지역 아파트 경매에 사상 최대 금액인 1500여억원의 뭉칫돈이 몰리기도 했다.

투기에 대한 잠재적 욕망이 건재하고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외환 마진거래(FX 마진거래) 열풍이었다. 환율 변동에 따라 설계되고 자기 자본의 50배에 해당하는 투자를 할 수 있는 전형적인 투기적 상품인 외환 마진거래에 올해 다섯 달 동안 무려 361조원 이상의 자금이 몰렸는데, 이 가운데 99%가 개인들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개인의 90% 이상이 손실을 보는 것으로 막을 내렸고, 결국 금융위원회가 규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금 부활하는 투기 욕망이 이번에는 무엇으로 귀결될 것인가? 제2의 부동산 버블과 금융 버블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녹색 성장 분위기에 편승해 세간의 우려처럼 ‘그린 버블’이라는 제3의 버블을 만들어낼 것인가?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공포를 불러일으킨 뇌관(금융 자유화와 부채를 기반으로 한 소비경제)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존 버블 시스템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노동소득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고 실업률은 올라가는데, 교육비와 의료비 같은 경직성 지출은 늘어만 가고 있다. 노동소득에 기초하지 않고 금융적 투기수익으로 줄어든 소득을 보완하려는 구조가 온존하는 한 거품과 거품 붕괴, 공포와 탐욕은 끊임없이 교차될 것이다.(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한겨레(09. 08. 18) [박노자칼럼] 가난의 시대 

한국의 지배자들이 "선진화"를 들먹일 때마다 북한 지배자들이 이야기하는 “강성대국”이 생각난다. 북한과 같은 동북아의 최빈국에서 “강성대국”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만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지만,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선진화”도 이와 다를 게 없다. “선진화”에 대한 장밋빛 이야기 속에서 다수의 한국인들은 가난과 불안의 늪으로 점차 빠져든다. 물론 평균 가구 월소득의 절반도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층은 아직은 11%를 넘지 않으며, 저소득층은 약 26%, 적자 가구들은 29% 정도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빈곤화의 추세는 꼭 “맨 아래” 25∼30% 한국인만의 문제라고 본다면 오판이다.  

한 달에 200만∼250만원 정도의 “괜찮은 소득”을 올려 빈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명목상의 중산층이라 해도, 언제 잘릴지 모를 비정규직이나 기업형 마트와의 경쟁에서 계속 밀리고 밀리는 동네가게 주인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져 간다. 고용 불안이 심화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새로운 “구조조정” 캠페인에 파란불이 켜지고 시장에서 대기업의 독점화 추세로 영세업체의 줄도산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성장 시대의 중산층은 점차 신흥 빈곤층으로 재편돼 간다.  

소득 기준으로 봐서 아직도 국내 가구의 58% 정도가 중산층이라 하지만 지금대로 중산층의 비중이 해마다 약 1%씩 줄어간다면 15∼20년 뒤의 한국은 “선진국”은커녕 브라질처럼 빈곤층과 준빈곤층이 다수를 차지하는 남미형 사회가 될 것이다. 오늘날 전임교수의 자녀가 연구교수직을 전전하는 평생의 박사급 비정규직이 되고 오늘날 정규직 공장 노동자의 자녀가 평생 각종 임시직과 계약직 이상을 얻지 못하는 “영구적 아르바이트생”이 될 확률이 높은 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 다수 절대빈곤의 상징이 보릿고개였다면 저성장시대 다수의 상대빈곤층의 상징은 마이너스통장과 현대판 고리대인 대부업체들의 “론”, 그리고 밀리고 밀리는 각종 사회적 보험료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 스트레스, 자살 충동일 것이다. “내가 언제 잘릴까”, “우리가 늙으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 “론 상황이 밀렸는데 이제 깡패들이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을까”해서 늘 겁에 떠는 이들이 출산을 할 의욕보다 자살을 해버릴 충동을 훨씬 더 강하게 느끼니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세계 최대의 자살률은 앞으로도 “일류 국가 대한민국”의 상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전체 개인 보유 주식의 73%를 갖고 있는 이 나라의 “최고 1%”나 전체 부동산의 78%를 갖고 있는 “최고 10%”는 영원한 불안의 생지옥을 체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의 귀한 자녀들은 유치원 때쯤이나 미국이 되든 중국이 되든 그 어떤 “높은 나라”로 건너가 “오렌지”의 본토 발음을 익히지 않는다면 자사고 등 국내 “귀족 학교”를 졸업하여 등록금이 2000만∼3000만원이 될 수도권의 “최고 명문대”를 다닐 것이다. 새로운 “귀족”과 “평민”, “천민”들의 거주지역과 생활코스, 음식과 문화 등이 철저하게 차별화돼 그들의 자녀들은 서로 만날 기회조차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조금씩, 한 발짝 한 발짝씩 단결력이 있는 “국민”도 “계급”도 없고 파편화된 개인들과 고착된 신분, 영구화된 불안만이 있는 사회가 돼간다는 것을 그 희생자가 될 다수의 한국인들은 과연 아는가? 아니면 토건과 수출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가? 이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가까운 미래가 우리에게 곧 보여줄 것이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09.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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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8 13:33   좋아요 0 | URL
예측되는 그린버블, 신흥빈곤층 속에 '올바른 절망'만이 있을까요?

로쟈 2009-08-20 22:53   좋아요 0 | URL
사실 거짓(주입된) 희망들이 투기의 원천이지 않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