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으로 간행되는 <기획회의>(254호)는 '번역출판7'로 나왔다. <번역출판>이란 잡지를 따로 내지 않고, '잡지 속의 잡지' 형태로 펴내는데, 이번이 일곱번째라는 뜻이다. 이번호는 '번역의 난제와 과제들'이란 특집을 마련하고 있는데(특집의 내용은 목차를 참고하시길), 어찌하다 보니 '여는글'을 맡아서 쓰게 됐다. 여기에 옮겨놓는다.   

기획회의(09. 08. 20) [여는글] 에반드로스-번역자를 위하여 

과분하게도 ‘번역의 방법론’이란 특집의 ‘여는글’을 맡게 됐다. 온라인에서 ‘번역비평 이전의 번역비평’을 해온 데다가, 몇 달 전에 낸 책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도 마지막 장을 ‘로쟈의 번역비평’이라고 해놓았으니 청탁을 피해갈 도리가 없었다. 자칭 ‘곁다리 인문학자’인 나는 동시에 ‘많이 게으른 번역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부지런한 번역비평가’의 자리에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번역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것이다. 

 

번역의 방법론과 관련하여 언제나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직역/의역의 문제다.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 저자의 표현으론 ‘들이밀까, 아니면 길들일까’의 딜레마이다. 딜레마인 만큼 딱 떨어지는 해답은 있을 수 없겠고, 책의 성격이나 역자의 선호에 따라서 선택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이희재)0라고 보는 입장에선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면 반대하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것은 일종의 방향성이다.    

희랍비극 전집을 완역하고 있는 천병희 선생의 경우는 좋은 사례다. 자신의 번역을 새롭게 가다듬어 출간하면서 선생은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같은 고전학자인 강대진 박사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숲, 2008)을 평하면서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중앙대대학원신문>, 08. 11. 12). 희랍인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래서 단국대판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내 이오카스테를 향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여”(950행)라고 불렀고, 이것은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아내 이오카스테의 가장 사랑스런 머리여’에 가깝다고 한다. 새 번역본은 이 구절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오카스테여”라고 ‘의역’했지만 그는 그보다는 이전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니 직역과 들이밀기를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면,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는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걸려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전령)의 말은 어떻게 옮겨야 할까. 천병희 선생은 “가장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자면 신과 같은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죽었습니다.”(문예출판사판, 1235행)라고 옮겼던 것을 “여러분이 빨리 아시도록 가장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오카스테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숲판)라고 고쳤다(‘빨리 아시도록’과 ‘가장 간단히’는 중복되는 표현이다). 다른 번역본에서 “아주 짧게 말씀드리죠. 왕비 이오카스테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조우현 역)라고 옮겨진 대목이다. 이 경우에도 강대진 박사는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죽었습니다”를 선호할 듯싶지만, 그런 표현이 높은 사람에 대한 존대의 느낌을 전달해주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어 독자나 관객에겐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감내케 하거나 오히려 코믹한 느낌이 들게 하지 않을까. ‘머리’의 높임말로 ‘두상(頭上)’을 써서 “이오카스테의 두상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해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을 성싶다.  

한편으로 강대진 박사는 “서양말에 원래 존대법이 없으니 번역에서도 존대법이 너무 두드러지게 쓰지는 말자는 쪽”의 의견도 피력한다. ‘서양말’에 대한 대단한 환대다. 하지만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고 했다. 더불어 그러한 태도는 은연중에 우리 자신과 우리말에 대한 비하적 태도로 비춰질까 염려된다. 나는 반대로 <번역의 탄생>의 저자처럼 우리말에 대한 자신감과 우리말을 존대하는 태도가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오카스테의 머리’ 정도는 잘라먹어도 좋다고 보는 것이다(대신에 주석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자에게 그런 정도의 ‘권위’는 주어져도 좋다. 그것은 어떤 권위인가?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길, 2008)에 등장하는 한 가지 사례를 떠올려본다.   

지난 1988년 프랑스 대선은 미테랑 대통령과 시라크 총리가 맞붙어 화제를 모았었다. 권력(potestas), 곧 대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당시 도전자였던 ‘젊은’ 시라크는 역량(potentia)을 내세운 반면에 ‘늙은’ 미테랑은 현자의 권위(auctoritas)를 앞세웠다. 처음엔 시라크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아무런 공약 없이 단지 프랑스의 국론 분열이 내전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협을 반(反)공약으로 내건 미테랑이 결국은 승리했다. 그의 ‘위협’ 앞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역량’보다는 ‘권위’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권위’를 랑시에르는 티투스 리비우스를 따라서 ‘에반드로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에반드로스는 헤르메스의 아들로서 아욱토르(auctor)였다. 저자(author)란 말의 어원이기도 한 이 ‘아욱토르’는 창시자란 뜻도 갖지만 랑시에르는 ‘메시지의 전문가’란 뜻으로 새긴다. 그는 “세계의 소음 속에서 의미를 식별할 줄 아는 자”이다. 그는 신의 메시지를 알아듣고 목동들의 싸움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렇듯 아욱토르는 말을 잘 알아듣고 말의 기적을 연출할 수 있는 말의 장인이며 그의 권위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미테랑은 글쓰기를 즐긴 대통령이었다). 이제 작가와 다름없는 말의 장인으로서 번역자에게도 그런 권위는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혹은 번역자 또한 그런 권위를 스스로 찾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번역은 글쓰기다>(즐거운상상, 2009)의 저자가 일러주는 것처럼 사실 번역가를 겸한 작가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루쉰도, 미셸 투르니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모두 번역가-작가이다. 요즘은 대다수 번역가들이 동의하는 것이지만 번역에서 더 중요한 것은 외국어실력이 아니라 한국어 실력이고 글쓰기 능력이다. “번역가의 진정한 실력은 이 글쓰기에서 결판난다.”(이종인)는 전문번역가의 말이 더이상 과장이 아니다. 그러니 단순한 전달자, 곧 헤르메스-번역자에서 더 나아가 저자로서의 번역자, 에반드로스-번역자를 자임하는 걸 주저할 필요가 없다. 물론 에반드로스-번역자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번 특집의 제언들도 꼼꼼히 챙겨두어야겠다. 번역에 대한 많은 고민과 함께 번역자의 권위가 드높아지기를 기대한다. 

09. 08. 29. 

 

P.S. 바로 최근에 강대진 박사의 소포클레스 번역이 출간됐다. <오이디푸스왕>(민음사, 2009)으로 표제작 외 3편의 작품이 더 묶여 있다. 950행과 1235행이 각각 어떻게 옮겨졌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전자는 "오,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가장 친근한 머리여"로, 후자는 "말하고 듣기에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이야기하자면, 여신 같은 이오카스테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옮겼다. "여신 같은 이오카스의 머리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너무 어색했던 듯하다. 

아무튼 두 (세대) 고전학자의 정역본 번역을 갖게 되어 소포클레스 읽기가 한층 수월하고 고급스러워졌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 않다. 강대진 박사는 옮긴이 서문에서 "내가 이 번역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 동료는 "연극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번역을 부탁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못박았는데, 덕분에 역자의 의도대로 "매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읽기 불편한' 문장"들이 더러 나온다. 하므로 이 작품의 공연 대본은 다른 번역을 알아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 번역에서도 그렇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당대의 관객들에게 '읽기 불편한' 딱딱한 문장들로 공연됐을지 의문이다. 역자는 합창에 자주 사용되는 희랍어 감탄사들, 가령 '오이모이', '오 포포이', '토토토이', '이우 이우' 등을 '아아' '오오'라는 밋밋한 표현으로밖에 옮기지 못한 점을 무척 아쉬워하는데, 그런 생생한 현장감이 다른 한편으론 '읽기 불편한' 문장들을 통해서 재생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일까?  

내가 읽어본 번역본들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오이디푸스왕> 공연에 가장 적합한 대본은 연극학 전공자인 강태경 교수의 번역본이다. 영역본을 중역한 탓에 '이오카스테'를 '요카스타'라고 옮기는 식이지만, 그리고 부정확한 대목도 직역본보다는 불가불 많을 듯싶지만, 한국어로는 훨씬 매끄럽고 연극적이다. 곧 드라마틱하다. 간단한 대사이지만,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왕비 이오카스테의 죽음을 전하는 전령의 긴박한 보고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여러분이 빨리 아시도록 가장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오카스테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천병희) 
"말하고 듣기에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이야기하자면, 여신 같은 이오카스테께서 돌아가셨습니다."(강대진) 
"서둘러 말씀드리자면, 왕비 요카스타께서 - 돌아가셨소."(강태경)
  

드라마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극의 파토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은 어렵고 어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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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을 보지 않았지만, '강태경'버전을 제 식으로 표현한다면 "여러분, 왕비께서-돌아가셨습니다." 입니다. 물론 저는 원문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번역자가 무엇을 첫번째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머릿말에 원문에 충실했다는 말은 번역자의 큰 덕목을 실천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찌보면 복지부동형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거든요. 즉 직독이 독자의 판단이나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래알을 씹는 경우처럼 뱉어버리거나 집중력 저하로 독자 자신을 탓(불편)합니다.
(추천,안전효의 영어 길들이기/번역편)

로쟈 2009-08-29 20:13   좋아요 0 | URL
네, 자신을 투명한 투과물 정도로 간주함으로써 번역자의 존재감과 함께 책임으로부터도 비껴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outis 2009-09-15 08:14   좋아요 0 | URL
특히 고전 원전 번역의 경우, 모래알 씹는 느낌을 자신의 문화적 지층을 다양하게 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지식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안이한 태도로 입 벌리고 받아 먹기 식의 접근 방식을 가질 때는, 사실 아주 쉬운 단어로 된 문장도 모래알 씹는 느낌일 수 있거든요. 특히, 일본어식, 영어식 문법을 따른 번역과 '비문'의 경우는 '시적'표현의 허용과는 다른 번역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시적 표현을 최대한 살리면서 번역하는 것과 한국어로 글쓰기를 잘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는 것이죠.

로쟈 2009-09-15 20:16   좋아요 0 | URL
다양한 수준의 번역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제 바람은 희곡은 경우엔 공연용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정확한 번역과 이런 용도가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지는 의문입니다...

기인 2009-08-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을 옮기고 싶으냐의 차이겠지만, 저는 강대진 선생님 번역이 더 '이질감'을 전달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원본의 느낌과 더 유사한지는 알 수 없지만요. ㅎㅎ
희랍 희곡을 읽는 독자들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겠네요. 역시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ㅜㅠ

로쟈 2009-08-29 20:11   좋아요 0 | URL
번역에서 제 관심은 '독자'와 '효과'쪽에 더 가 있습니다. 공연된 작품을 번역했는데, 공연할 수 없다면, 무얼 옮긴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되고요. 전공자들의 번역을 읽을 때마다 갖게 되는 생각은 '다른 전공자'를 위한 번역이 아닌가 하는 것이에요. 어차피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번역의 역설이라고 봅니다...

outis 2009-09-15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 공연용 대본은 연출가와 각색자의 능력에 따라 생산 가능합니다. 시적(詩的)인 표현들을 대화체로 옮기기 위해서 번역자 본연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표현들에 안주한다면, 그야말로 '에반드로스의 덕목'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랍 비극이 운율을 가진, 합창형식이 주요한 가무(歌舞)극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희랍 비극을 즐길 수 있는 출발점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시적 표현들을 '잘라먹는'다고 해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국에서 공연되었던 <오이디푸스 왕> 연극 작품들은 시적 표현을 최대한 살린 번역본을 가지고도 연출가의 능력에 따라서 충분히 공연 가능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로쟈 2009-09-15 20:15   좋아요 0 | URL
국내에서 공연된 <오이디푸스왕>은 본 적이 없는데, 한번 봐야겠네요...

노승영 2010-02-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를 눈으로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천병희 역을
그리스어 원서를 읽을 때 참고하고 싶은 사람은 강대진 역을
공연에 쓰고 싶은 사람은 강태경 역을 보면 되겠네요.
한국 독자에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소포클레스는 행복한 작가일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