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엊그제 내린 비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던 듯하다. 밤에는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여 여름 내내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았다. 환절기, 한동안 감기와 신종플루, 그리고 알레르기에 주의해야겠다. 그리곤 또 곧 겨울이 되겠군. 하지만 눈이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만만치 않다. 파스테르나크의 말대로, 산다는 건 들판을 가로지르는 게 아니다. 밤에 느끼는 계절은 이미 가을인지라 9월의 읽을 만한 책을 미리 골라놓는다. 생각이 나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이미 선정해놓았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외모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던지는 화두 같기도 한 이 소설은 80년대를 배경으로 박민규식 입담이 어느 장을 보나 질펀하게 펼쳐진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세 청춘들이 겪는 연애와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소설은 자본주의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 하는 관찰이 곳곳에서 성찰된다. 사랑은 상상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의 결말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결말로 치달을 때까지 작가 박민규가 펼쳐놓은 입담은 놀랍다."는 게 작가의 평이다. 하지만, '놀라움'까지 가기 전에 내가 먼저 느낀 건 유치함인데(나는 그가 맘먹고 유치한 걸 쓰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중간중간의 분홍색, 파란색 글씨들은 뭔가?(삶이란 뭘까요?).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할 밖에(나는 '감상적인' 소설들을 별로 좋아히지 않는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 같은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못한다. 내 탓인가?).     

9월에 읽을 만한 문학작품에 당연히 하루키의 신작 <1Q84>(문학동네, 2009)를 꼽을 수 있겠지만, 이건 굳이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나는 인도 작가 줌파 라이히의 신작에나 눈길을 주기로 한다.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이란 작품집이 나왔는데, 표제작 "'그저 좋은 사람'은 줌파 라히리 특유의 재능이 넘치는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교한 문장과 감정에 대한 풍부한 통찰,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축복받은 집>(동아일보사, 2001/2006) 이후에 <이름 뒤에 숨은 사랑>(마음산책, 2004)이 소개됐었고, <그저 좋은 사람>은 세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책은 호사카 유지의 <우리 역사 독도>(책문, 2009)이다. 생소한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한국은 그간 ‘독도는 우리 것’이라는 주장만 반복했지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인식하게 할 이론 개발과 홍보가 미흡했다. 독도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주장을 질적으로 몇 단계 끌어올린 『우리 역사 독도』는 저자가 기획하는 일련의 독도 관련 저술의 첫 번째 책이다."그런데, 저자가 일본인?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 체류 15년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고 하니까 일본인명의 한국인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의 저자인 만큼 구면이다. <일본 古지도에도 독도 없다>(자음과모음, 2005)란 책도 진작에 써두었군. 한일 문화와 역사에 정통한 듯싶은데,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반갑게도 안면이 있는 책이다.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추천사를 조금 소개하면 이렇다.  

"철학자들과 나눈 11편의 대담을 묶은 책이다. 데리다, 가타리, 로티, 보드리야르, 비릴리오, 지젝 등과 같이 현대 사상사의 지형도를 크게 바꾸어놓은 유명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담자는 러시아의 해체주의자 미하일 리클린. 저자는 현대 철학사의 가장 큰 봉우리를 데리다의 해체론적 패러다임과 들뢰즈의 분열분석으로 간주한다. 책 제목 ‘해체와 파괴’는 그 두 봉우리에 대한 이름이다.(...) 리클린의 대담집을 읽으면 망각의 늪 속에 빠져있던 이 자명한 사실이 다시 번쩍 떠오른다. 공산혁명과 소비에트, 스탈린과 전체주의를 경험한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서양 첨단 철학의 보편성과 한계를 묻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 때문이다. 사소한 대화부터 도발적인 질문까지 여러 수준의 공방이 오고가면서 구수한 커피 향을 빚어내는 대담집이다."   

곁들여서, 대담의 파트너들이기도 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와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상대출판부, 2008)도 같이 읽으면 좋겠다. 모두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될 만한 책들이다. 특히 <꿈의 세계와 파국>은 리클린과의 대담에서 직접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개념사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김윤철의 <정당>(책세상, 2009)이다. 분량이 얇고 평이하는 점이 이 시리즈가 자주 추천 목록에 오르는 이유인 듯싶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추천사에 따르면, "현대정치와 민주주의는 결국 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정당이 없는 현대정치와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정당정치를 가까이서 직접 목격하며 정당정치를 연구해온 한 소장 정치학자가 쓴 이 책은 이 같은 현실과 관련해, 정당에 대해 일반국민들이 알아야 할 상식들을 알기 쉽게 풀어쓴 국민교양서이다."  

'국민교양'에서 조금더 나가면 정당론의 고전으로 꼽힌다는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후마니타스, 2008)과 누구보나도 '제도화된 민주주의'로서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최장집 교수의 강연집 <민중에서 시민으로>(돌베개, 2009)도 덤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꼽은 경제/경영서는 김진애의 <도시 읽는 CEO>(21세기북스, 2009). 책에 대한 평이 후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시들은 모두 저마다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 특성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 열망,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삶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볼 때 유서 깊은 건축물이나 거대한 빌딩보다 허름한 뒷골목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세계의 유명 도시들을 모두 돌아볼 기회가 없다. 일생 동안 자기 나라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라도 반가울 수밖에 없다. 특히 뛰어난 안목의 전문가가 공들여 쓴 책이라면 더욱 좋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목에서 얼핏 추측해볼 수 있는데, 책은 CEO 시리즈의 하나로 <사진 읽는 CEO>, <그림 읽는 CEO> 같은 책들이 후속작이다.  

짐작에 'CEO'란 말은 지난 10년간 최고 히트 유행어의 하나일 것이다. CEO에 대한 선망과 숭배는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기업지배사회'는 'CEO 지배사회'이기도 하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고른 사회분야의 책은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 "미셸 세르의 사상적 영향 하에 인류학자로 학계에 입문한 라투르는 후기 저작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지난 수세기 간 “근대”의 이름으로 인류사회에 풍미해 온 지적 편견을 독창적 시각으로 재조명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에 천착해 온 근대적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브리드의 증식으로 이원론적 해석이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양자를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비(非)근대적 접근”으로 종전의 근대성이 이루지 못한 근대적 기획을 완결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개인적으론 이미 서평을 쓴 책이므로 앞으로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의 이미지만 더 나열해둔다. 미셸 세르와의 대담집 <해명>(솔출판사, 1994)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위원이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아닐리르 세르칸의 <우주 엘리베이터>(월북, 2009). 저자가 생소한데, 터키의 우주비행사 후보라고 한다. 소개를 보니, "저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지구와 정지궤도를 잇는 우주엘리베이터를 개발하려고 할 때 시작점까지 셔틀을 쏘아 올려 승무원이 승객들을 우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구조를 제안했다. 하지만 우주 엘리베이터는 그의 호기심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는 건축과 물리를 공부한 저자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즐겨온 여행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장르로는 아이디어 모험담이 아닐까 싶다. 전작이 <좌절하지 않고 타임머신을 만드는 법>(월북, 2009)인 것을 보아도 그렇다. '15세 과학소년들의 시간 여행 분투기'라 한다. 찾아보니 조지 웰즈의 <타임머신>(엔북, 2009)이 나온 게 1895년이다. '영화'와 같은 나이라는 게 흥미롭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예경, 2009)이다. "필자 공주형은 박수근의 정직하고 착한 청혼 편지에 끌려 박수근 연구로 박사까지 받게 된 사람이다. 그림과 그림 사이 당대의 역사와 사회상이 펼쳐지고 그 안에 있는 박수근을 잘 보여주는 그의 글은 박수근의 그림을 닮았다."고 소개한다. 분량으로 보아 자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는 듯싶진 않다. '박수근 연구'의 현단계가 어떤 것인지 구경해볼 수는 있겠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허문명의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푸르메, 2009).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여성 평전이다. "이 책에 언급된 12명 여성의 공통점은 스스로 여성임을 한계로 여기지 않고, 설사 한계로 여겼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는데 있다. 언론인인 저자는 현대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 여성 거물 12인의 삶을 아주 집약해서 정리하고 있다." 비슷한 컨셉으론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시리즈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낮은산, 2009)도 있겠다. 비올레따 빠라(가수), 다이앤 아버스(사진가), 유잔 팔시(영화감독), 케테 콜비츠(화가) 등 네 명의 여성예술가를 다루고 있다. '클라시커50' 시리즈의 <여성>(해냄, 2002)과 <여성예술가>(해냄, 2003)도 인명사전 역할을 해줄 듯싶다.    

10. 작은 책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작은책' 시리즈다. <작은책>이란 월간지가 있는 줄 몰랐는데(하긴 서점에 들어오지 않고 알라딘에도 입고되지 않는다) <후퇴하는 민주주의>(철수와영희, 2009)를 읽다 보니, 이게 '작은책' 강연을 묶은 책이다. '한국사회비평' 범주에 속하는 이 강연모음집은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철수와영희, 2007)부터 시작해서 <1%의 대한민국>(철수와영희, 2008)을 거쳐 <후퇴하는 민주주의>까지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다. 한겨레문화센터의 인터뷰특강 모음집에 뒤서는 것이면서 <거꾸로, 희망이다>(시사IN북, 2009)로 스타트한 시사IN 신년특강 모음집엔 앞서는 것이다.   

'작은책'이지만 필자(강연자)들은 모두 쟁쟁하다.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손에 든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럼 뭐가 좀 달라질지 모르고, 아니면 누가 좀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왜 겁을 먹느냐고?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의 저자 손낙구 씨의 강연 제목을 빌면, '집이 많은 놈, 집은 있는 놈, 집도 없는 놈'의 사회가 한국사회라는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확산되면 '아파트에 미친' '부동산공화국'을 부추기면서 사욕만 챙기고 있는 누군가는 좌불안석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최소한의 염치를 기대한다면...  

09. 08. 29.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골랐다. 강의를 위해서 조금 자세히 읽어보려고 하는 참이기도 하다. 다수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건만 해도 댓종이 넘는다. 전집판과 그 이후에 나온 번역본들을 주로 참조하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려면 나도 곧 '하산'해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8-29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9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9-0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사카 유지는 국내 신문에 종종 기고하고 있습니다.몇년 전에는 경향신문에 정기기고했지요.부인이 한국인입니다.호사카 유지 아버지의 친구인 한국인 교수가 매우 예절바른 사람이라 한국인에 대해 인상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신문에 기고하는 독도관련 글에는 '한국인들은 독도는 우리 땅 외칠 줄만 알지 왜 독도가 한국땅인지 설명을 못한다'고 지적하더군요.논리를 개발해서 파고 드는 일본에 맞설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로쟈 2009-09-01 20:57   좋아요 0 | URL
사실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서 '논리'까지 개발할 생각을 못했던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