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이달의 당선작'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몇 년 전부터 알라딘에는 엄청나게 뜨거운 감자 한 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나 감자의 뜨거운 열기에 그만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두려웠습니다. 자신들도 뜨거운 감자에 손대면 다칠까 봐 두려운 거죠. 일주일이 지나게 되면서 열을 잔뜩 품은 감자는 점점 식어갔습니다. 이제 누구나 감자에 손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자의 존재를 잊었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몇 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차가웠던 감자 속에 또다시 열기가 생성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다 뜨거워지는 감자를 발견합니다. 이번에 그가 용기 있게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대봅니다. 감자의 실체가 궁금한 저도 그 사람을 따라서 감자에 손을 내밀어 봅니다.
알라딘에 있는 뜨거운 감자란 바로 ‘이달의 당선작 선정 방법’을 둘러싼 논란입니다. 그동안 알라딘에서는 이 뜨거운 감자 한 개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이게 너무 뜨거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난처한 골칫덩어리였죠. 이 감자는 몇 차례 뜨거워지다 식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감자의 변화를 주시했지만, 누구도 감자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정작 감자를 재배한 알라딘 요술램프의 지니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니가 나서서 뜨거운 감자를 식혀주길 바랐지만, 지니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니는 그저 알라딘의 램프 속에 지내면서, 전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지니가 램프에 나와서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달의 당선작 선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견을 묵과할 수만 없습니다.
이른 새벽에 ‘yamoo(야무)’님이 뜨거운 감자에 다시 한 번 손댔습니다. 야무님은 2011년에 감자에 손을 댄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다시 뜨거워진 감자를 보면서 저도 가만히 지켜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뜨거운 감자를 보면 모르는 척 했습니다. 두려웠던 거죠. 손대면 툭 하고 터질 것 같은 뜨거운 감자에 다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비겁하게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달의 당선작’에 많이 선정되지 못한 분들의 입장이 되어서 당선작 선정 과정의 문제점을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다음에 야무님의 의견에 대한 제 생각을 밝혀보겠습니다.
현재 ‘이달의 당선작’은 10분의 당선작 선정위원회가 뽑고 있습니다. 알라딘의 지니는 10분의 선정위원회에게 좋은 글을 선정하는 권한을 부여한 겁니다. 당선작 선정위원회가 나오기 전에는 분야별로 책을 소개하는 알라딘 MD가 당선작을 선정한 거로 알고 있었습니다. 알라딘의 지니는 ‘이주의 당선작’ 제도를 운용하다가 2010년 6월 29일부터 ‘이달의 당선작’으로 개편되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예고했습니다. 2010년 7월부터 마이리뷰, 마이페이퍼, 영화리뷰, 포토리뷰, TTB리뷰 총 다섯 개의 분야에서 당선작이 나왔습니다. (현재 영화리뷰, 포토리뷰, TTB리뷰 당선작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지니는 선정 기준을 공개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한 번 보실까요?
- 마이리뷰 : 내용성, 추천수, 땡스투(Thanks to) 받은 횟수, 댓글 수 등의 항목별 가중치를 달리한 결과를 참고
- 포토리뷰 : 내용성, 추천수, 땡스투 받은 횟수, 이미지 개수, 댓글 수 등의 항목별 가중치를 달리한 결과를 참고
- 영화리뷰 : 내용성, 추천수, 작성자의 관람여부, 댓글 수 등의 항목별 가중치를 달리한 결과를 참고
- 마이페이퍼 : 상품을 1개 이상 담은 페이퍼를 대상으로 내용성, 추천수, 댓글수 등의 항목별 가중치를 달리한 결과를 참고
- TTB리뷰 : 현재와 동일.
* 출처: http://blog.aladin.co.kr/zigi/3862822
지니가 선정 과정을 공개하는 일이 올바른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법을 제시한다고 해서 선정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생각이 절대로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용성’이 구체적으로 무얼 뜻하는지 모호합니다. 내용이 좋다는 것일까요? 추천 수와 댓글 수. 이때는 ‘좋아요’로 변경되기 전에는 ‘추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좋으면 사람들은 ‘추천’을 눌렀습니다. 추천 수가 많은 글이 당선작이 될 가능성이 큰 거죠. 추천 수를 많이 받는 알라딘 블로거(알라디너)의 블로그 같은 경우 하루 방문자수가 많은 편이고, 글 한 편 올리면 추천 수(지금의 ‘좋아요’ 수)가 스무 개 이상을 받습니다. 거기에 댓글도 많이 달리는 편입니다. 그러면 방문자 수가 적고, 추천 수와 댓글 수가 적은 알라딘 블로거들은 ‘이달의 당선작’에 뽑힐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물론 추천 수가 열 개 이하, 댓글이 한 개도 없는 블로거의 글도 ‘이달의 당선작’에 뽑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천 수와 댓글 수 여부로 ‘이달의 당선작’을 뽑는다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왕래가 잦은 ‘인기 많은 블로거’가 당선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의견을 그저 질투심에 눈먼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공격하면 안 됩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직접 언급하기가 민망하지만, 제 부족한 글에 ‘좋아요 수’가 많고, 댓글이 많이 달립니다. 그래서 제 글이 ‘이달의 당선작’에 꽤 많이 뽑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예전에 있던 선정 기준을 다시 언급하느냐. 당선작 선정위원회도 이 과거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여 당선작을 뽑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선작 선정위원회가 아니라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알라딘 측이 10분의 선정위원회에 명확한 선정 기준을 제시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정 기준 없이 10분의 선정위원회가 자발적으로 당선작을 뽑도록 전권을 부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선정 기준이 이상하다고 해서 다짜고짜 이분들에게 당선작을 뽑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활동이 베일에 싸여 있다고 해서 선정위원회의 활동 자체를 비난하는 생각도 위험합니다. 그분들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겁니다. 매달 ‘좋은 글’을 발견하고 추천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좋은 글’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해주는 객관적인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몇 몇 사람들은 선정위원회가 생각하는 ‘좋은 글’을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이달의 당선작’에 어울리지 않는 함량 미달의 글로 보는 거죠.
그렇다면,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둘러싼 잡음과 싸움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라딘 측이 새로운 선정 기준을 밝혀야 할까요? 저는 오히려 이 생각에 반대합니다. 알라딘 측이 속 시원하게 선정 기준을 알려주면 고맙죠. 그러면 선정 과정에 대해서 서로 싸우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단점이 있습니다. 저 같은 적립금을 노리는 속물 같은 사람이라면 선정 기준에 맞춘 서평을 쓰게 됩니다. 이런 글이 당선작이 되더라도 양질의 글이 나올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서평이 뭡니까’라는 글을 남겨서 서평에 대한 알라딘 이웃님들의 생각을 확인해봤습니다. 어떤 분은 일정한 규칙에 얽매여서 쓰는 서평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책에 대한 글쓴이의 감상이 많은 서평이 ‘이달의 당선작’ 선정에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감상이 많은 서평을 당선작에 배제되는 ‘질 나쁜 글’이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 한 번 ‘당선작 과정’을 둘러싸고 키보드 베틀이 펼쳐집니다. ‘이달의 당선작’에 어울리는 좋은 글은 과연 서평일까 감상문일까? 정답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이 싸울 겁니다.
2011년에 ‘이달의 당선작’으로 변경되었을 때 로쟈님이 댓글로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개편이 아니라 ‘개악’으로 보인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의 논란을 불식시키려고 알라딘 측이 새로운 선정 기준을 제시하면서 당선작 제도를 바꾼다면 일부 사람들이 로쟈님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좋은 글’로 대표되는 ‘이달의 당선작’에 충족시켜주는 글, 그것도 매달 스무 편 넘는 좋은 글을 공평하게 찾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야무님의 글을 읽고 나서 작년 12월의 마이리뷰 당선작들을 쭉 읽어봤습니다. 물론 제 글도 읽어봤습니다. 사실 12월에 당선된 《나의 한국현대사》 서평이 좋은 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필 제가 쓴 서평 중에 이게 당선이 되었는지 의아했습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핵심 메시지에 대한 생각을 적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소개된 문송면 사건을 소재로 제 생각을 쓴 겁니다.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덧붙이는 서평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저는 《나의 한국현대사》 서평을 총 세 편이나 썼습니다. 두 번째로 쓴 서평은 작년 알라딘 서평 대회를 위해서 쓴 것이고, 문송면 사건을 소개한 세 번째 서평 역시 적립금을 목적으로 썼습니다. 제가 이 정도로 적립금을 받으려고 무진장 글을 열심히 씁니다.
저도 야무님의 생각처럼 상당히 적은 분량의 글, 인용문이 많은 글이 당선작이 된 것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용문이 다섯 개 이상 채우면 글의 분량이 길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좋은 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식으로 글을 써서 당선작 혜택을 받았습니다. 글 전체 맥락에 상관없이 인용문을 채우려는 글쓰기는 줄거리만 쭉 나열하는 글과 별반 차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 기준을 개정하기보다는 선정작 후보가 될 수 있는 기본 요건부터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 수 2,000자 이상을 넘지 못하고, 인용문이 다섯 개 이상 있는 글을 당선작에 제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제 생각에 못마땅해 하는 분들은 지적하셔도 좋습니다. 지적한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새로운 선정 기준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대안이 정답이 될 수 없어요. 허심탄회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마음으로 밝혀줬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뜨거운 감자에 열띤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없어서 의외입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새로운 대안이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이들이 공정하게 느낄 때까지 감정 싸움이 번지게 될 겁니다. 제가 오늘 감자에 화상 입을 것을 감수하고 감자가 더 뜨겁도록 달구어봅니다. 이 뜨거운 감자가 조용히 식기 전에 이 감자를 지켜보고만 있는 분들(특히 저처럼 당선작 경험이 많은 분들) 그리고 알라딘이 여기에 대한 입장을 솔직하게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뜨거운 감자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