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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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은 일제에서 벗어난 19458월부터 19488월까지 3년간이다. 해방이 찾아왔지만,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소군정의 지배를 받았던 과도기다. 해방정국의 시대정신은 건국을 어떤 모습으로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의 건국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모색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즉 좌우익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격렬한 좌우체제의 대립 구도 속에 건국을 위한 노선 투쟁이 진행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사회주의의 소련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극심한 좌우익 대립 끝에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두 나라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38선을 긋고 신탁통치를 검토했다. 해방 이후 독립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 위에 섰다가 사라졌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김구의 한국독립당,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등이 우후죽순 난립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1945년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건준은 좌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고 우파의 참여로 구성된 좌우합작 정당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실시와 조선공산당의 방해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이력이 냉전적 잣대로 해석되는 바람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이나 정치활동에서 모든 정파와 주의·주장을 떠나 조국 광복이나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해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했. 민족의 과업을 위해서는 정파와 이념을 개의치 않았으며 누구와도 만나 대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박헌영은 민족 통일보다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열중했고, 미군정은 박헌영의 행보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각은 마치 철길에 놓인 레일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실패함으로써 역사는 8.15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미군정의 제반 정책은 좌익진영을 배제하고, 우익진영을 독점적으로 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건국과정에서 자신의 정치기반이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친일파와 손잡았다. 해방 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되면서 건국 역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우고 말았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후손이 오히려 영화를 누리는 현실이 우리 사회에 기회주의, 출세주의 등을 만연케 하는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이승만 정부 시절은 경제면에선 해방됐지만 일제치하보다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소작농들은 소작조건의 개선을 위해 지주를 상대로 파업을 전개했다.

 

현재와 미래문제의 해법을 찾는데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혼란상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보는 역사관에서 너무나 깊은 골이 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좌우대립의 원형질은 8.15해방 정국으로부터 존재한다.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자와 친일파, 좌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뉴라이트 세력들은 광복과 건국의 의미를 1948815일에서 찾고 있다. 그 날은 유엔총회 결의와 유엔 참관 하의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뉴라이트의 눈에는 1948815일 중앙청 광장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의 얼굴만 보일 뿐이다. 박헌영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행적을 대한민국 정통성을 저해한 부정적 역사로 보고 있다. 그래서 민족해방운동과 좌우대립의 해방공간 역사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김일성, 박헌영의 활동이 언급되면, 뉴라이트는 “그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하고 발끈하게 된다. 그들이 활동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억하자는 것이지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탈분단 시대의 역사의식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왜곡됐던 현대사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되돌아보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회가 미루어지면 해방공간의 반쪽 역사, 지워진 과거와 비틀린 역사로 가득한 괴랄한 교과서가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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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3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진 사내 이야기

 

 

 

 

 

 

 

 

 

 

 

 

 

 

 

 

 

 

 

조선일보를 구독 신청하지 않은 게 후회한다. 지난주 토요일 조선일보에 문제의 칼럼이 게재된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칼럼의 필자는 간장 두 종지를 가지고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한 편을 완성했다. 필자가 칼럼 데드라인의 압박에 쫓겨 급한 마음에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중국집에 간장 두 종지 더 달라고 주문했다가 주인에게 거절당한 자신의 경험을 야마로 잡을 줄이야.

 

필자는 그 당시 상황을 겪으면서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심하게 과장해서 표현했다. “간장님은 너 같은 놈한테 함부로 몸을 주지 않는단다. 이 짬뽕이나 먹고 떨어질 놈아. 그렇게 환청이 증폭되면서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이 문장을 쓰고 있을 필자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상상이 된다. 아마도 여기가 칼럼의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독자의 썩소를 부르는 최악의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필자의 환청은 그를 괴랄한 정신 상태로 이르게 한다. 필자는 평범한 중국집을 매정한 '배급주의' 공기로 가득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받고, 식당 종업원에게 고마운 인사를 남기는 행동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더 이상 쓸 내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무 것 아닌 행동을 지적한다. 필자는 문제의 중국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 맺힌 앙금이 남아있는지 친절하게 힌트를 남겨주셨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수습기자 시절부터 이 말을 귀 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언론의 힘이 크고 위대하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이 압도하던 권위주의 시대에 정의로운 언론인은 펜을 무기 삼아 온몸으로 진실을 기록했다. 그런데 펜이 생각 없는 사람에게 쥐어지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해로운 무기가 된다. 언론이 무책임하게 휘갈긴 펜은 선량한 사람의 가슴 속을 후벼 파기도 한다. <간장 두 종지> 필자는 펜이 아닌 망나니 칼을 쥐었다. 칼날은 권력이 아닌, 중국집 종업원으로 향했다.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간장 두 종지> 필자, 그리고 그 글을 옹호하는 기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필자의 옹졸함을 공개적으로 야유하는 동료 기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일보 칼럼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따질 때가 아니다. 자신들의 무기를 엉뚱한 데서 사용하고 있다. 칼럼 한 편 가지고 보수·진보 기자들이 서로 펜 싸움질을 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천명하는 장면

    

 

서슬 퍼런 유신 시대에 저항했던 언론인들은 펜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 하나하나 검열했다. 시위 상황을 알리는 기사가 있으면 누락되곤 했다. 이를 참다못한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1024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자유언론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317, 134명의 언론인이 해직됐다.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은 중앙정보부의 기세에 눌려 펜을 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펜 대신에 정부를 위한 나팔을 쥐고 열심히 불어댔다. 1971년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권력에 무력한 언론을 향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학생들은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 화형식을 진행했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중에, 유신215)

 

이 사건 이후로 기자들은 학생 시위 현장에 취재하러 가면 야유와 욕을 들었다. 취재해도 제대로 된 기사 한 편 쓰지 못하는 기자들은 권력 앞에 힘 못 쓰는 고자처럼 여겼다. 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들이 농성장에 취재 기자들을 무시하는 팻말을 걸어둔다. 기자들은 그 팻말을 보는 순간,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

 

동아일보 기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유신독재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권력이 은폐하는 진실을 캐내 국민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겠다는 결의로 펜을 쥔다.

 

농성장 팻말을 본 기자 중에는 정연주도 있었다. 그때 당시 정연주는 동아일보 소속 기자였고, 자유언론 실천 성명 발표에 참여하여 해고당했다. 정연주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 KBS 사장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고초를 겪었다. 그 이후로도 권력기관을 동원해 언론의 손발을 묶는 정부를 비판했다.

 

펜으로 부정한 자들을 고발하고, 사회적 약자를 살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언론인의 책임감이고 의무이다. 민주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언론은 사실 보도권력 견제를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권력 언론으로 군림하고 싶어 한다. 1974년 상황에 비하면 요즘 언론인들이 개보다 못한소리를 들어도 전혀 이상한 점이 없다.

 

<동아일보> 주필을 하다가 권력에 의해 쫓겨난 천관우권력 앞에 벌벌 떠는 언론을 연탄가스에 취해 비명 한 번 못 지르는 기절한 상태라고 비유했다.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연탄을 쓰는 가구가 잘 없을 텐데. 아직도 언론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손에 쥔 펜이 정의의 칼인지 망나니 칼인지 구분도 못 한다. 분명히 제정신인데 이상하게 권력자들 앞에만 서면 무기력하다. 그런 기자들은 앞으로 기레기라고 부르지 말고, ‘고자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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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0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졌어요 ! 사람믄 무릇 그릇이 커야 합니다.

cyrus 2015-12-02 21:14   좋아요 0 | URL
칼럼 필자가 부장급이던데 회사에서 부장 대접 받지 못하면 부하들에게 눈치주는 사람일 것 같아요.

만병통치약 2015-12-0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화요리집˝에서 대접받을때는 분명 1인 1종지였겠죠 ㅋㅋ 근데 직원들 데리고 ˝중국집˝ 가니 전용 종지를 안 줘 ㅋㅋ / 부장님께서 서민용 중국집은 오랜만이라 감을 못 잡으셨답니다. ㅎㅎ

cyrus 2015-12-02 21:15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필자가 글 쓰는 감도 못 잡았군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5-12-0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찾아보고 나서 기자의 놀라운 문학적 비약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네요.

cyrus 2015-12-02 21:18   좋아요 0 | URL
칼럼 필자가 주문한 음식 받으면 감사 인사를 하는 손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황당했습니다.

yureka01 2015-12-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기자 보고 기레기라고 하더군요.
기자쓰레기.결국 펜이 쓰레기란 소리더라구요.

이젠 권력보다 자본에 휘둘리죠.
같은 기사 짜깁기와 베껴쓰기에 얼마나 뷰를 많이 찍는가 라는 거...

아마 양심이 살아 있는 기자는 스스로의 자괴감 때문에 버티기 힘들겠다 싶더군요.

cyrus 2015-12-02 21:19   좋아요 0 | URL
기자가 잘못 쓴 기사를 써서 욕 먹으면 신문 제일 구석에 짤막한 정정 보도 기사 내면 끝입니다.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봐요.

2015-12-01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02 21:23   좋아요 0 | URL
창피스러운 기후총회 연설 봤어요. 그런데 조중동은 보도를 안하더군요. 그런 비판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북다이제스터 2015-12-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초 객관적 언론이란 것이 가능한 일인지 근본부터 궁금해 집니다.

cyrus 2015-12-02 21:25   좋아요 0 | URL
기레기들 때문에 정당하게 취재를 하는 진짜 기자들의 존재감이 알려지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CREBBP 2015-12-0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래기들이라는 별명이 괜히 따라다니는 게 아니죠. 발로 안뛰고 손가락으로 기스크린 따라다니며 `취재`하는 기래기들도 많은 시대에 뭐 자기는 대우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기래기들이야 널렸는데 무 써는 칼이라도 있으니 권력

cyrus 2015-12-02 21:28   좋아요 1 | URL
날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팩트 검증을 제대로 안 하고, 일단 관심 끌 만한 기사가 나오면 내용을 똑같이 써요.

서니데이 2015-12-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내용인지 원문이 궁금해졌어요. 지난주 토요일에 실린 글이면, 종이신문 대신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3 15:44   좋아요 1 | URL
앤드류대디님의 말씀대로 ‘간장 두 종지’ 칼럼 원문, 한겨레 만평, 그리고 문제의 칼럼을 소재로 한 다른 언론들의 칼럼을 같이 보면 좋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간장 두 종지’라고 치면 다 나옵니다. ^^

마키아벨리 2015-12-02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문에다 한겨레만평, 한겨레 칼럼까지 보셔야합니다

서니데이 2015-12-0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드류대디님, cyrus님, 고맙습니다^^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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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은 애매한 단어다. '헌책'이라는 게 어디 있나. 그냥 책이다. '오래된 책방'이라고 쓰는 것이 더 편하다. 오래된 책방은 정말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책을 팔고 있는 집이다. 그 집에 쌓여있는 책들은 책이 아니고 문화며 역사다. 70년대에 나온 책에는 경제개발 시대의 새까만 먼지가 묻어있다. 80년대 전공서적을 들여다보면 콧구멍 속이 매캐해진다.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건 묘한 전율이 있다. 어떤 책을 사겠다고 작정하고 찾아 나서는 경우는 대개 드물다. 오히려 책이 찾아온다는 게 맞다. 오늘은 어떤 책이 있을지 막연한 호기심으로 기웃거린다.

 

저자나 지인이 면지에 사인을 남긴 책, 행간마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로 굵은 볼펜 심 자국이 선명한 책, 여러 번 넘겨 읽은 증거인양 곳곳에 찢어진 흔적이 있는 책. 고서쯤 되면 가치도 평가받지만 사람 손길을 많이 거친 헌책은 그저 버려도 되는 책으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책과 맺은 인연이 이렇듯 하찮다. 그깟 책쯤이야 버린다 한들 무슨 대수랴,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책이 그렇게 버려져야 할 존재인가. 책이라는 게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가.

 

오래된 책을 만나는 또 하나의 묘미는 누군가의 흔적 속에서 나의 어떤 기억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전 책 주인의 심중이 드러난 한 줄의 메모는 그 책의 고고학적 연대기이자 숨결이다. 책 안에 들어있는 비밀스러운 사연들은 선택한 이가 받는 덤이다. 커버를 넘기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글이 적혀 있다. ‘보고 싶은, ○○에게로 시작하는 문장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편지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책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가 직접 사인까지 해준 책도 책방에 발견된다. 책을 준 저자, 그 저자의 친필 사인 본을 받은 사람 모두 유명하면 책의 가치가 높아진다.

 

자신의 물건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자연스럽다. 책의 경우 보통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적거나, 간단한 단상을 적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책 속의 흔적들은 자신이 간직하는 책에 그 소유를 밝히기 위해 찍는 도장과 같다. 동양에서는 책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알리기 위해 장서인을 찍는다. 우리나라 애서가들은 책에 있는 전 주인의 장서인을 따로 도려낸다. 장서인이 잘려나간 종이 부분이 흉물스러운 상처처럼 남는다. 그러면 거기에 종이를 덧대어 붙인 뒤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는다. 반대로 중국 애서가들은 전 주인의 장서인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장서인이 많이 찍혀있는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도장이 많이 찍힌 종이가 지저분하게 보여도, 책값은 올라간다. 유명인의 장서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책값이 더 오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인의 흔적이 있는 책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나는 책방에 가면 전 주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책을 산다. 지저분하게 보이는 남의 흔적들을 애써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장서가인 최석정의 말씀처럼 책을 모을 힘이 있어서 책이 내게 모인 것이다. 책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때를 밀려고 때밀이 수건으로 피부를 박박 문지르면 피부 살갗이 벗겨지듯이 종이의 때를 억지로 없애면 책 상태가 더 나빠진다. 헌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을 선뜻 사지 않는다. 당연히 새 책이 좋다. 누구나 깨끗한 상태의 책을 읽고 싶어 한다. 그래야 읽을 맛이 난다. 연필 자국으로 덮인 활자가 눈에 거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의 친필 메모에 공부에 대한 주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활자가 적힌 책이어도 그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눈에는 타블라 라사(Tabla rassa)일 뿐이다. 진정한 애서가는 책 한 권을 읽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책의 여백에 기록해둔다.

 

 

 

 

 

 

내가 책방에 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 1권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 부분이 많다. 더러는 그 밑줄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고 어떤 부분은 의문을 품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더듬는 것이 즐겁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늠하는 것 말고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을 느끼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 다른 인생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알뜰살뜰 적어둔 주인의 메모는 다음 책 주인의 가슴에 식은 공부 열정의 온도를 다시 뜨겁게 해준다. 굳이 주인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내 생각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다면 새로운 생각의 길을 만들면 된다. 또 다른 여백에 메모를 남기는 것이다. 메모에는 책 읽은 사람의 생각이 갇혀 있다. 이것은 서가에 꽂혀있을 때는 박제돼 있다가도 지식이 필요한 독자들을 만나면 다시 살아 숨 쉰다.

 

특별한 하늘의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책의 전 주인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측만 하게 된다. 그러나 주인이 남긴 글씨 속에 주인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그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책을 파고드는 모습 말이다. 책 속의 메모는 한 인간이 책에 쏟아온 열정과 떨림을 엿보게 해 준다. 애서가는 눈빛으로 책을 갉아먹는다. 책벌레가 사라졌다고?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책방에 가면 이름 모를 책벌레들의 흔적으로 지저분한 책들을 발견한다. 책방에 가득 쌓인 책더미 사이를 지나다니는 책벌레를 만나곤 한다. 두어(蠹魚, 책벌레)가 습기를 좋아하고, 햇볕을 싫어하는 것처럼 인간 책벌레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을 때까지 어두컴컴한 책방에 서식한다. 나는 또다시 그곳에 간다. 책을 구경한다. 메모 흔적 가득한 낡은 책을 고른다. 다시 한 번, 책 속에 내 취향이 비슷한 독자, 아니 인간 책벌레 동지의 인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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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1-3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래서 글씨 연습이 필요한거 같아요. 저는 신랑이 글씨 못쓴다고 구박할 정도의 악필인데 악필속에 비친 희미한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ㅋㅂㅋ~~~

cyrus 2015-12-01 18:00   좋아요 0 | URL
제가 발견한 헌책의 낙서는 심하게 알아보지 못하는 악필 수준은 아니었어요. 자세히 읽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 있어요. 저는 책을 메모하는 데 굳이 글씨를 잘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들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만 알아보면 됩니다. ^^

단발머리 2015-11-30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어쩜 이런 다른 생각과 이야기가 이어지는지.... 정말 신기해요^^

cyrus 2015-12-01 18:02   좋아요 0 | URL
서평 대회 적립금을 받고 싶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쭉 읽어봤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을 이미 다른 분들이 다 썼더군요. 그래서 뭐 써야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1-30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에 읽은 흔적을 많이 남기는 편이라 사진 속의 책에 어쩐지 정이 가네요^^ 읽은 책은 곳곳에 플래그를 붙이고 밑줄도 그어 놓는데 그걸로도 부족하면 책과 비슷한 크기의 노트 모양 포스트잇에 이런저런 메모들을 해서 책 뒷장 안쪽 날개에 붙여 두어요. 어떤 책은 앞 뒷면을 모두 빼곡히 채운 여러 페이지의 노트가 생기기도 하는데, 어느 날 그 책을 다시 펼쳐볼 때면 책도 책이지만 책 속의 제 흔적들을 보며 상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마치 저자와 제가 같이 쓴 일기장을 보는 것 같거든요ㅎ

사실 그 흔적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재독할 때인데 처음과는 전혀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게 되거나 메모의 내용이 추가되면서 책을 통해 제 자신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재독하는 경우도 있어요. `나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요ㅎ 근데 이런 책은 제 일기장이나 마찬가지라 팔기는커녕 가까운 사람이 빌려달라고 해도 꺼려져요^^ 하지만 타인의 흔적이 남은 책은 저도 읽고 싶네요ㅎ 누군가와 같이 쓰는 일기 같을 것 같아요..

cyrus 2015-12-01 18:06   좋아요 0 | URL
책 읽고 난 뒤에 쓴 기록들을 ‘일기’로 비유하는 물고기자리님의 표현이 멋져요. 맞아요. 맨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을 기록하고 난 후에 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달라져요. 사실 저도 이런 소중한 기록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지금 알라딘에 서평을 쓰는 것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공개하는 일기를 쓰는 행위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친구들은 제가 블로그 활동 사실을 몰라요. ㅎㅎㅎ

살리미 2015-11-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모을 힘이 있어서 책이 내게 모인것!! 너무 멋지네요^^ 책장에 써서 붙여놓고 싶어요.
가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다보면 타인의 흔적이 지나쳐서 너무 지저분한 경우도 있던데, 마구 그어놓은 밑줄이나 동글뱅이 같은 것들요 ㅎㅎ
저런 메모정도라면 전에 읽은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반가울듯 합니다^^

cyrus 2015-12-01 18:08   좋아요 0 | URL
저 문장을 보면서 감동받았습니다. 제가 책방에 좋은 책을 만날 때 그 감정을 표현한 것 같았거든요. 도서관 책의 메모는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기 흉할 정도로 공공도서관 책에 메모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입니다. 단, 약간의 밑줄은 봐줄 순 있습니다. ^^

보슬비 2015-12-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cyrus님을 위해서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cyrus 2015-12-01 18:10   좋아요 0 | URL
보슬비님은 알라딘에서 책에 관한 흔적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는 일까지 기록하시는 모습이 대단해요. ^^

인디언밥 2015-12-01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요. 그때 반 아이들이 책 한 권씩 교실에 기증하는.. 뭐 그런 식의 행사가 있었는데, 기증한 책은 학년이 올라가면 책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는 식이었거든요. 어린마음에 제 책에 손때묻고 더러워지는 게 싫었는데, 그런 책은 친구들이 그만큼 많이 읽었던 책이니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책을 집에 가져갈 때 새책처럼 깨끗한게 좋은게 아니라고 하시던..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네요. 그때 기증한 책이 <유명한 이야기>였는데, `유명한`이야기 인 줄 알고 샀다가 `유 명한 씨 이야기`였는줄은 모르고...

cyrus 2015-12-01 18:13   좋아요 0 | URL
인디언밥님의 추억담을 보면서 감동과 웃음이 한 번에 느꼈습니다. ㅎㅎㅎ 정말 좋은 은사를 만나셨군요. 요즘은 새것이 더 많이 나오는 세상이라서 헌 물건을 물려 쓰는 일이 잘 없는 것 같아요.

최호영 2015-12-05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감사합니다

2016-01-21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한 번도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집을 나간 루소는 남의 집 하인 노릇까지 해가며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자신의 후견인 바랑 부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루소는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백수 생활을 하면서 편견 없이 세상을 통찰하는 눈, 독창적 사고력을 얻었을 수 있었다. 이랬던 루소가 여성의 독서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여성이 한쪽 손으로 책을 읽는 이유가 마스터베이션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성희롱 발언을 했다가는 사회에 매장당하는 신세가 된다. 루소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여성이 독서를 하면 정욕에 휩싸일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중세의 봉건 질서를 비판하고, 인간 이성의 가치를 신뢰했던 루소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마저도 여성의 독서를 용납하지 않았다.

 

남성들은 여성의 손에 책 한 권이 쥐어지면, 절대로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악마의 손에 들어간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지적 호기심을 경계했다. 여성들이 책을 읽게 되면 가정에 대한 순종을 거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렇다 보니 남성중심 사회에서 연애소설은 여성의 감정을 교란케 하는 불건전한 책으로 오해를 받았다. 남성들은 책과 여성의 관계에 자꾸 침범했다. 여성이 책을 읽다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힐까 봐 두려워했고, 성경이나 정숙한 여자가 되는 예절을 소개한 팸플릿을 권했다.

 

여성이 마음대로 책을 읽지 못했던 ‘남독(男讀) 강점기’ 대략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라고 보면 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여성들은 하층민 여성보다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남성들의 텃세 때문에 제한적으로 독서를 해야만 했다. ‘남독 강점기’의 여성은 ‘책 읽는 존재’가 아닌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자연스럽게 규정되었다. 

 

 

 

 

 

안토니 비르츠  「소설 읽는 여자」 (1853년)

 

 

 

남성들은 여성의 독서를 금지하면서도 여성과 책의 만남을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화가 안토니 비르츠는 소설 읽는 여자를 나체 상태로 만들었다. 이 그림을 구경하는 남자들은 누드모델의 독서 행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자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자의 몸매를 마음껏 감상할 뿐이다. 그림의 구도는 남자들의 눈이 여자의 봉긋한 가슴과 은밀한 부위가 비치는 오른쪽 거울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여자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들은 그림 왼쪽에 악마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악마의 손은 여성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공급하는 ‘나쁜 손’이다. 남성들은 소설에 푹 빠진 여성을 부도덕한 죄인으로 경계하면서도, 자신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채워주는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시선은 장서표에서도 드러난다. 남성 장서가들을 위해서 여성 나체가 그려진 장서표가 유행했고, 에로틱한 장서표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가부장제가 강화되었던 동양에서도 책 읽는 여성의 존재는 미미했다. 중국의 남성 애서가들은 책을 미녀로 비유하곤 했다. 중국 명나라 사람 포송령의 소설 《요재지이》에 책 속에 튀어나온 미녀의 이야기가 있다. 낭옥주는 독서를 무척 좋아해서 성인이 되어서도 홀아비로 지내왔다. 그는 자신이 즐겨 읽는 책속에 나오는 미녀가 자신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멋진 왕자가 나오는 동화를 읽고 나서 백마 탄 왕자가 자신에게 청혼하기를 바라는 소녀들의 순수한 마음과 유사하다. 낭옥주의 기도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되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다. 낭옥주는 <한서>를 읽다가 살아있는 듯한 미인이 그려진 그림을 발견한다. 드디어 그림 속 미녀는 진짜 사람이 되어서 낭옥주 앞에 등장한다. 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안여옥’이라고 밝힌다. 낭옥주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안여옥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책밖에 모르는 바보 낭옥주는 자신의 책을 잊지 않았다. 낭옥주가 독서에 열중하면, 안여옥은 질투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살고 싶으면, 책을 모두 내다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낭옥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목숨,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태어난 집이나 다름없는 책을 버릴 수 없었다. 고대 중국의 시인이나 애서가들은 책의 아름다움을 미녀로 비유하면서 칭찬했지만, 책 읽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책에 관한 글에 등장하는 애서가들은 전부 남자다. 안여옥은 책에서 태어난 사람인데도 책을 싫어한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부정하는 그녀의 태도가 억지스럽다. 애서가 입장에서는 안여옥이 독서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의 남성들도 책과 여성의 만남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로 이해했다.

 

남성의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여성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고 싶은 열망을 마음껏 표출했다. 기존사회 관념에 도전하며, 여성의 교육적·사회적 평등을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300여 편이 넘는 서평을 남긴 역사상 최초의 여류 서평가였다. 그녀는 부지런히 신간 도서들을 읽고, 비평했다. 마리 조피 르루아예 드 샹트피라는 여성은 플로베르의 문제작 《마담 보바리》를 읽은 뒤에, 소설 여주인공에 관한 자신의 감상을 직접 편지에 써서 작가에게 보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무서운 속도로 읽어냈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 대학 문턱에 가보지 못한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녀들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서의 즐거움에 마음껏 탐닉했다. 독서의 역사를 논할 때, 그녀들의 활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책의 역사마저 남자들이 기록하는 이야기(History)가 되었다. 현재의 독자들은 이들이 독서 문화에 끼친 영향을 모르고 지냈다. 아직도 책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책을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 중에 여성이 제일 많았다. 독서가 아픔과 슬픔과 비애를 달래주는 마음의 치유제라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이었다. 여성의 독서는 고귀하다. 그녀들은 단순히 즐거움을 느끼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강제된 체제, 억압된 자유, 그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로서 살아야 했던 시간에 대한 처절한 복기(復棋)다.

 

 

 

 

※ 글 제목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곰발님이 오늘 쓰신 글을 읽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Thanks to Gombal

 

※ 《여자와 책》 302쪽에 적힌 ‘E.M. 포르스터’를 ‘E.M. 포스터’로 고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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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11-2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 제가 태어났으면 큰일날 뻔했어요. 눈치 안 보고 책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려야겠어요.
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 여자는 열등하다는 거요.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세계는 새롭게 밝혀져야 할 무엇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를...

cyrus 2015-11-30 17:35   좋아요 0 | URL
만약에 지금이 남자들만 책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정말 따분했을 거예요. 지적 허영심 많은 꼰대들의 말다툼이 있지 건전한 독서토론은 없었을 겁니다. ㅎㅎㅎ

표맥(漂麥) 2015-11-2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5-11-30 17: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11-29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레즈 라캥에서도 책을 읽음으로써 테레즈가 도덕을 알게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죠~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 했지만요~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에 무의식적으로 녹아있는 여자들에 대한 시선이 읽힐때는 시대상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좀 불편해집니다 ㅎㅎ
책 읽는 여자들... 위험합니다. 남자들이 부과한 의무를 안하려고 하니...
요즘도 책 읽는 여자 그리 좋아하지 않는듯 합니다 ㅎㅎ 적당히 머리빈 여자만 아니면 될 정도로만 읽기를 바라는 사람들 종종 봤습니다. ....

cyrus 2015-11-30 17:38   좋아요 0 | URL
낭옥주처럼 책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독자는 노답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이 될 수 있어요. 저처럼 책 읽는 남자도 여자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또르르

stella.K 2015-11-3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는 그때 그때마다 어디서 주제를 그렇게도 잘 뽑아내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참 탁월해!
루소 그 점잖게 생긴 할배가 그런 응큼한 상상을 하다니. 웃겨!ㅋㅋ
얼마 전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지려면 130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게
그냥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쩝

cyrus 2015-11-30 17:40   좋아요 0 | URL
루소의 삶에 흑역사가 많아요. 가장 유명한 인생의 오점이 자신이 부모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놓고선 자식들을 고아원에 보낸 일이에요.

서니데이 2015-11-30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15-11-30 20:1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
 

 

 

 

 

 

 

 

 

 

 

 

 

 

 

 

 

 

미국의 심리학자 쉐드 헴스테드는 인간은 하루에 5만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는 우리말이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고로 기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과 언론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든다. IS 테러 소식, 광화문 시위, 각종 사건 사고 소식 등 많은 정보가 우리 주위에 맴돌고 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는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기사를 다룬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도 비판적이나 부정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끌게 된다. 비판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람 이야기는 대상이 구체적이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실감이 난다.

 

 

 

 

 

 

 

 

 

 

 

 

 

 

 

 

 

 

 

 

우리 사회는 긍정을 강조한다.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 '긍정의 힘' '긍정심리학' 같은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 '긍정'이라는 제목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같은 얘기를 하는 책들도 많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끌어당김의 법칙'을 내세운 베스트셀러 《시크릿》이나 1년 열두 달 삶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무조건 행복할 것'과 같은 여러 자기계발서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도 결국 "긍정하라"인 것이다. 이지성은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뜻을 가진 R=VD 공식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인생의 진리는 단순하므로 우리 스스로 상상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아직 열리지 않은 희망의 열매가 거둘 것이라고 낙관해도 좋을까. 삶의 난관들을 무시하고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하는 생각은 위험하다. 긍정의 힘만 믿으면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보면서 문제의 본질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가 주목을 많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인 말의 칭찬만 더 듣고 싶어 하는 역설적인 표현인지 모른다. 부정적인 말이 조직 내 분위기를 흐리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올바른 비판 의식이 갖춰진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분위기로 조성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향한 부정적인 비판이 자신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 까봐 아예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것 자체를 거부하여 오로지 칭찬만 듣고 싶어 한다. 칭찬만 듣고 자란 사람은 자신이 남들의 눈에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거의 아부에 가까운 칭찬만 듣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 앞에 자신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주 열심히 춤을 춘다.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열정이라고 말하지만, 남들 앞에서 잘 보이고 싶어서 부단히 애쓰는 모습일 뿐이다. 그렇게 잘했는데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나 좋은 반응이 없다면 분명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계속 칭찬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도전적 과업을 포기하거나,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된다. 중세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허무맹랑한 미신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죽음의 무도'는 죽음 앞에서 누구나 죽게 되는 인생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칭찬의 긍정적 효과를 상징하는 말로 알려졌지만, 이것을 삐딱하게 보면 '칭찬'이라는 미신을 믿고,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남들 앞에서 열심히 춤추는척 하는 비참한 상황을 보여준다. 과도한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칭찬의 무도'를 멈추지 못한다. 언제까지 주변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칭찬의 춤을 추고 있을 건가? 당신의 모습을 보라. 비판과 실패를 두려워하는 비굴한 모습을.

 

 

어떤 질문이 당사자를 불편하게 했다면 본질에 정확했다는 이야기다.

 

(손호성 《악당의 명언》 중에서, 408~409쪽)

 

 

칭찬을 장려한다는 이유로 '강요'를 하면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려는 가식만 나올 뿐이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이 필요하다. 부정적 피드백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비판적 직언을 존중해야 한다. 직언을 막으면 조직이 실패할 수 있다. 노키아 경영진은 “아이폰에 버금가는 스마트폰을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개발진의 건의를 무시해 급격한 경영 악화를 경험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의 직언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1등 악당에게는 근면 성실이 필수 덕목, 빌 게이츠, 히틀러, 무솔리니도 근면, 성실했다.

 

(손호성 《악당의 명언》 중에서, 114~115쪽)

 

 

윗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을 향해 '우리 젊은 시절보다 노력하지 않는다', '옛날보다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는 데도 불만 타령만 늘어놓고 있다'라고 잔소리한다. 그러나 근면이 무조건 성공을 보장해주는 필수 조건이 아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믿고 표를 준 국회의원마저도.

 

 

똑똑한 애들은 보통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서 공략한다. 하지만 사악한 애들은 장점을 무력하게 만들어서 좌절시킨다. 다신 못 일어나게.

 

(손호성 《악당의 명언》 중에서, 221쪽)

 

 

제대로 일하지 않거나 성과가 미미한 사람일수록 자기 나름으로 열심히 했다고 변명을 한다. 열심히 한다는 칭찬이 능력을 향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가리려는 방패가 된다. 정글 같은 냉혹한 현실에는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무기로 앞세워 성공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독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성실'과 '노력'이라는 방패를 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힘들다.

 

긍정과 칭찬은 우리 삶을 기분 좋게 해주는 꿀이다. 그 꿀을 맛보려면 벌의 독침 공격을 맞으면서까지 벌집에 다가서야 한다. 꿀을 지키기 위해 공격하는 벌들은 안정적인 우리 삶에 공격하는 수많은 난관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따끔거리게 하는 가벼운 쓴소리가 될 수 있고, 심하면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좌절하게 하는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포로가 된 스톡데일은 지속적 고문과 가혹한 환경을 견뎌내는 생활을 8년이나 한 끝에 극적으로 생환하였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또는 부활절에는 미군이 승리, 포로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다고 막무가내로 믿었던 많은 병사는 계속되는 실망감에 결국 상심해 죽게 된다. 현실을 파악하지 않은 맹목적인 낙관은 결국 실패로 이끌지만, 어려운 현실 속의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고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실화이다. 강요에 가까운 무조건적 긍정은 언젠가 우리의 발등을 크게 찍을 때가 있다. 긍정에도 힘이 있지만, 부정에도 중요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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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1-2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1-28 09:4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인디언밥 2015-11-28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칭찬의 무도` 아프게 와닿네요. 저도 누가 저를 좋게 보면,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엄청 애썼었거든요. 지금도 여전한지는 모르겠지만...

cyrus 2015-11-28 09:4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랬습니다. 남들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누군가가 부탁하는 일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어요. 뭐든지 잘 하려는 마음이 정신적 압박감으로 되어서 스트레스가 생겼어요.

saint236 2015-11-28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괜찮아 다 잘될거야가 너무 팽배하다보니까 현실의 문제를 외면해 버리더라고요. 잘 될거라는 믿음도 현실을 직시하고 돌파할 수 있는 용기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헛된 꿈이지요.

cyrus 2015-11-29 19:44   좋아요 1 | URL
제가 글로 쓰고 싶은 내용을 아주 간결하게 말씀해주셨네요.

페크pek0501 2015-11-2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이지성 저자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봅니다.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자는 그래서 행복해질까요?

saint236 2015-11-29 23:50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편견일지 모르지만 이지성은 뽕도 안되더라고요

yureka01 2015-11-30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죽음도 맹목적 낙관의 일종이라면...ㅎㅎㅎ그러게요.

cyrus 2015-11-30 17:43   좋아요 0 | URL
올리버 색스나 지미 카터 같은 사람들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들처럼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이르면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