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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지음, 김항섭 옮김 / 분도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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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성경 읽기는 곤욕스럽다. 여성을 자연스럽게 대상화하고 여성 혐오적인 표현도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 신자들은 그 내용을 읽는 데 있어 상당히 힘들어한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성경을 읽으려니 성경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 같고, 그대로 읽자니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성경 구절들이 너무 쉽게 무시된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어쩌면 마음 한편에 불편을 간직한 채 후자를 택해 왔는지 모르겠다.

 

여성 신학은 가부장적 질서를 거룩한 신적 질서로 고착해온 기독교의 구조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새로운 방식의 성서 해석을 시도해왔다. 이러한 시도 중에 가부장적 남성인 하나님을 재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여성 하나님’ 중심의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장된 다양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여성 신학의 시도는 여전히 남성적 신의 범주에 머문다. 남성적 신의 자리에 양육 능력이 있고, 사랑이 충만한 여성적 신이 대신한다고 해도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을 넘어서지 않는 한 하나님은 ‘여성화한 남성 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젠더 이분법 안에서 추구되는 ‘여성화’ 시도는 기독교 내 가부장적인 질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성도 지도자 및 지식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교회가 어떻게 남성 중심적인 교권 제도를 고집하는 교회로 변했는가. 그렇다면 페미니즘 관점을 적용하여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제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까.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진정한 의미의 여성과 신학이 무엇인지 접근한다. 책은 여성 신학 대신에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그것의 의미와 역사를 다룬다. 그리고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주도적인 생각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 위대한 여성들을 소개한다.

 

책의 저자는 여성주의 신학을 ‘비판 신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한다. 여성의 소명(“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2:18,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에베소서 5:22)에 대한 성차별적 인식은 신앙적으로 포장된 기독교적 윤리 담론이다. 여성 신자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상황이라면 그녀의 삶은 모순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전근대적, 아니 성서가 그리는 봉건적 여성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여성주의 신학의 목표는 두 가지다. (진정한) 나로 살아가기’와 ‘(성경이 그리는) 여자로 살아가기’가 충돌하는 ‘모순의 경험’을 비판하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대안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주의 신학(teologia feminista)과 여성 신학(teologia femenina)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여성 신학은 신학적 접근을 통해 가부장적인 종교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여성의 종교 경험에 주목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성 신학이 반드시 비판적 관점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여성이 있듯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 여성 신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성 (개인의) 관점’이지 여성주의적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종교를 믿는 많은 여성이 종교 안에서까지 남녀평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성의 관점’은 남성 체제 유지를 위한 신학이 되어 성경의 가르침을 도그마(dogma)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는 여성과 남성은 어느 쪽이든 복종이나 지배 없이, 호혜적 관계를 맺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다.

 

남성 중심 사회 내부의 여성들을 타자화한 채 배제된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여성 억압적 문화에 따라야만 ‘정상’인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에 반기를 드는 여자들은 ‘미친년’이 된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현실에 순응하거나, 미쳐버리거나, 이 두 가지 선택지에만 놓여 있었던 건 아니다.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은 두 가지 길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길들 사이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저자는 당시 시대적 제약 안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보여준다. 주류 역사에는 잊혔지만 그녀들은 여성의 예속에 반대했고, 하나님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이 발굴해 낸 선구적인 여성들은 시대적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차별과 불의의 제도에 맞서 싸웠다.

 

지금의 종교는 현실의 문제를 바꾸기보다는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탐탁지 않은 접근 방법이다. 이렇다 보니 봉건적 남성들 중심으로 해석된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교회는 사회와 정반대로 간다. 여성주의적 관점 없이는 교회뿐만 아니라 신학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그동안 가부장제 아래서 자기 정체성과 목소리를 스스로 찾고자 시도하는 여성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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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7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7 17:40   좋아요 1 | URL
성경에는 여성차별적인 내용만 있는 게 아니라 여성(성인)을 찬양하는 내용도 있어요. 그런데 후자의 내용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성경이 남성 중심 글쓰기의 산물이라서 종교 발전에 기여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지 않아요.

레삭매냐 2018-09-1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의 경우를 보면, 여성들의 수가 압도적
인데 교회 내 결정권에 있어서는 목소리가 반
영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적인 예로 여성 목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남성 목사 수에 비해 적다는 게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8-09-17 17:43   좋아요 0 | URL
네. 교회 내부 안에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불평등한 구조를 완전히 뒤집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임혜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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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위험한 책이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해 수천 년 동안 유대인을 박해했고, 죄 없는 여성을 마녀로 규정하여 불태워 죽였다.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평화수호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구약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흙을 빚어 아담을 만들고 그 후에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의 진위를 떠나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남성과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존재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바울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2:12).”라는 구절이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한 예수의 말은 아예 무시한다. 그들은 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인용해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도 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근거로 여성은 신학교에서 남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해 이를 따르는 데 전념한다. 남성 중심 기독교 엘리트들은 성결(聖潔)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여성 신자들의 삶과 일상을 통제한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성경적 가부장제’, ‘성경적 여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성경적 가부장제’와 ‘성경적 여성’은 남성을 위한 여성의 순종과 희생이라는 기독교적 덕목을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그러나 교회 내에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는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은 여러 측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문화가 남아 있는 바이블 벨트(Bible Belt)에서 성장한 레이첼 헬드 에반스(Rachel Held Evans)1년 동안 ‘성경적 여성’의 삶을 살아보는 프로젝트를 단행한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은 저자가 ‘성경적 여성’의 삶이 현대 사회에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된 이야기다. 저자는 매달마다 ‘성경적 여성’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에 따라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저자는 남편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순종하고, ‘정숙한 여성’이 되기 위해 소박하게 옷을 입고 외출을 해보고, 집안 살림을 혼자서 한다. 그녀가 한 해 동안 실천해야 할 덕목은 열 개가 넘는다. 남편은 ‘성경적 여성’처럼 사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느낀 감정들을 일기에 기록한다.

 

이 책은 비기독교인도 읽을 수 있는 기독교적인 책이다. 페미니스트도 봐도 된다. 저자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다. 자신의 프로젝트가 공개되자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그녀를 ‘성경을 조롱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했다. 무신론자들의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무신론자들은 그녀의 프로젝트가 기독교적 가부장제를 미화한다고 비난했다. 무신론자인 나는 그녀의 도전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아내의 프로젝트를 지지해준 남편(그도 기독교인이다)도 존경스럽다.

 

저자는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는 보수 복음주의자의 발언과 사고를 비판하면서 “성경 어디에도 ‘성경적 여성’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이 이미 선지자로 불렸으며 특히 유니아(Junias)바울이 인정한 여성 사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성 사도를 인정하지 못한 남성 신학자들은 ‘유니아’를 ‘유니아스(Junias)’라는 남성형 이름으로 고쳤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유니아는 ‘Junias’로 표기된다. 남성 신학자들은 『잠언』에 언급된 ‘31명의 여인’‘현숙한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했다. 그래서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현대의 여성 신자들에게 ‘31명의 여인’처럼 남편에게 순종하고 집안일에 착실한 여성이 되라고 강조한다. 남성 신학자들은 남성 기독교인의 권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31명의 여인’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저자는 모성과 출산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독교 덕목이 비혼(非婚)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 신자를 소외시키는 부당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것이 두려웠다고 고백하는 모습은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이다. 그녀의 고백을 확인한 여성 신자들은 그동안 성경의 권위에 눌려 말할 수 없었던 출산의 두려움을 용기 내어 고백한다.

 

이 책의 목적은 ‘성경적 여성’이라는 모델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따로 있다. 독자들에게(특히 기독교인)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의 의미를 재정의한 저자의 말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상관없이 새겨들을 만하다.

 

 

성경은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자기계발 매뉴얼이 아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우리 삶에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무 자르듯 명료한 규칙과 규제 목록이 아니다. (398쪽)

 

 

성경의 가르침은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상황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사랑과 거룩’이라는 이름을 이용해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성경은 없다. 그런 성경이 있다면 정말 위험한 것이다. 이 위험한 성경을 손에 쥔 자는 권력을 앞세워 성경의 보편적인 가치뿐만 여성 신자들의 삶을 깔아뭉개고 있다. 성경과 예수를 비난할 게 아니라 성경과 예수를 왜곡하는 자들을 비난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종교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다.

 

 

 

 

 

 

 

 

※ Trivia

 

*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보기’ 프로젝트가 처음으로 공개되자 그녀를 조롱하는 어느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남겼다. A. J. 제이콥스가 이미 한 프로젝트죠(31쪽).” 미국의 작가인 A. J. 제이콥스가 이미 성경의 모든 계율을 1년 간 빠짐없이 실천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있다. 제이콥스는 성경대로 살아온 체험담을 책으로 펴냈고, 그 책을 번역한 것이 《미친 척 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 (세종서적, 2008)이다.

 

* 저자는 애니타 다이아먼트의 소설 <붉은 천막(The Red Tent)>을 인상 깊게 읽었다면서 몇 차례 이 책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녀가 성경의 구절대로 사흘 동안 앞마당에 친 텐트에 지냈을 때 <붉은 천막>을 읽었다. 책 105쪽에 <붉은 천막>의 원제를 ‘Red Tent’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정관사 ‘The’가 빠졌다. 또 이 책은 《여자들에 관한 마지막 진실》 (홍익출판사, 2001)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나 절판되었다.

 

* 책 325쪽에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적이 있는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s’가 빠진 로렌스 서머’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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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8-03-21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겠네요^^ 기회 되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cyrus 2018-03-21 14:52   좋아요 0 | URL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 책을 엄청 싫어할 거예요. 그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싫어하거든요.. ^^

stella.K 2018-03-2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 이 글 읽으면서 이 비슷한 책 있었는데 뭐지...?
<미친 척 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었어.ㅋ
어쨌든 이책 재밌겠다. 읽어보고 싶어지는군.

사실 기독교도 파가 여러 가진데 어디는 여자에게도 목사를
허락하는 파가 있지.
내가 다니는데는 여자에게 목사를 허락하진 않고 있어.
대표 기도도 그동안은 장로만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주일 날 총 4번 드리는 예배에서 마지막 4부 예배는
권사(여자)가 대표 기도를 할 수 있게된 것도
15년 전쯤 담임 목사님이 바뀌고부터다.^^

cyrus 2018-03-21 15:38   좋아요 0 | URL
제이콥스의 책도 ‘품절’일 걸요. 저는 <여자들에 관한 마지막 진실>을 읽고 싶어요. 저자가 이 책을 언급한 내용으로 봐서는 페미니즘 소설인 건 분명해요. ^^

종교인들이 다른 분파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 포용하는 자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들이 믿는 교리기 다르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무교고, 무신론자라서 종교인들에게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는 걸까요? ^^;;

stella.K 2018-03-21 15:50   좋아요 0 | URL
아이쿠.. 그 정도는 아냐.
물론 그런 극단적인 곳도 없진 않겠지만
많이 유연해.
네가 교회를 잘 몰라서 그렇지.ㅋ

cyrus 2018-03-21 15:49   좋아요 0 | URL
제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람 중에 종교인이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래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잘 몰라요. 제가 책으로 종교를 배우는 거라서 종교를 주제로 글을 쓰거나 대화를 나누는 데 한계가 있고, 단점이 많아요. ^^

마립간 2018-03-2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이 독후감만 봐서는 무슨 책인지 감이 오질 않네요.

많은 (남자) 목사님의 설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성경적이며, 휼륭하다는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그 설교가 이 글 앞 부분에 나오는 편견을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

cyrus 2018-03-21 15:47   좋아요 4 | URL
책을 읽어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ㅎㅎㅎ

존 파이퍼 같은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은 성경 구절을 근거로 여성은 ‘남성을 위해 복종하고, 희생하고, 집안일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해요. 이 책에 여성을 폄하하는 보수적인 목사들의 발언과 사례들이 나옵니다. 이 목사들의 공통점은 성경 구절을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들을 믿는 신자들은 목사의 성경 해석에 반대하지 못하고 수긍만 할 뿐이죠. 그리고 목사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굳건하게 믿죠. 마립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을 훌륭하게 평가하는 목사들도 있어요. 이 책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을 칭송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종교인들의 말이 나옵니다.

마립간 2018-03-22 07:59   좋아요 0 | URL
자상한 댓글 감사합니다.

언뜻 보기에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같이 갈 수 없다. ; 라는 결론인지 아닌지 혼동스러워서요.

기회가 될 때, 읽어보로독 하죠.^^
 
깨달음의 거울 - 선가귀감
서산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선가귀감》은 서산대사 휴정 스님이 대장경의 핵심 내용을 추리면서 구절마다 주해를 달고 게송과 평설을 덧붙여 이해하기 쉽도록 꾸민 책이다. 법정 스님은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할 때, 제목을 '깨달음의 거울’로 정했다.

 

 

 

 

 

 

 

법정 스님이 직접 쓰신 서문에 따르면 초판이 1962년 선학강행회 이름으로 법통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스님 저서 연보에는 선가귀감이 '1976년 홍법원'에서 출간된 것으로 적혀 있다. 사단법인의 저서 연보 내용이 수정되어야 한다. 법정 스님의 선가귀감 제2판은 1971년 홍법원에서 나왔고, 제3판이 1976년 정음문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스님은 1961년부터 선가귀감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2년에 나온 선가귀감 역서가 스님이 최초로 저술한 책이다.

 

 

누구든지 말에 팔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일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선가귀감》 50쪽)

 

 

불교에서 선(禪)은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문자를 활용하지도 않고 경전 문구에 의존하지도 않고, 오로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무엇을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는가?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불자들은 이것이 궁금하다.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없다. 참선 수행자 스스로 ‘이것이 무슨 뜻일까?’하고 의문을 가지고 끝없이 연구하는 공부법이다. 이처럼 유성(有聲)이 아닌 무성(無聲)으로 경지에 이르려는 예는 많다. 불가의 선종(禪宗)이 대표적이다. 문자가 아닌 체험에 방점을 찍은 수행법은 선종을 중국에 전한 달마가 시초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의 이치인 도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인식 범주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세계는 언어문자로 나타내면 낼수록 본질과는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언어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궁극의 경지가 있고, 침묵이 웅변보다도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지만 선종의 사유세계가 확장될수록 깨달음의 세계는 심오해져 중생의 삶과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면도 생겼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선가귀감》 42쪽)

 

 

법정 스님은 선(禪)이 종파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원래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 (《선가귀감》 45쪽 역주 참고)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면서 경전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경전은 부처의 말씀이다. 특정 종파의 독단적인 논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경전을 경시하는 것은 부처의 근본 목소리를 부정하는 일과 같다. 인간의 사유나 사상은 문자를 통해서 기록되고 계승 발전되고 있다.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사유하는 것도 문자언어를 통해서 하고 있다. 인간의 사유의 범주가 언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침묵이 능사만은 아니다. 언어와 침묵은 조화 중도를 이루어야 침묵도 빛나고 언어도 의미가 산다.
 
불가에서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던지는 문제가 있다. 이른바 화두(話頭)다. 선승들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묵언 수행을 하고 정진한다.

 

 

게을리 지내지 말라
풀 속에 거꾸러지리니.

 

(《선가귀감》 게송 44쪽)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생각을 버려야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탐욕을 줄이면 고통도 줄어든다. 올해 연말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큰 사건이 일어났다. 생각해 보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물들어 있는 잘못된 의식과 행위의 근본 원인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애욕의 불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끓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선가귀감》 164쪽)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인간 스스로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탐욕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행과 불행이 절대자의 뜻이나 숙명, 혹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연기(緣起)의 진리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다. 이러한 연기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씨앗은 적게 뿌리면서 수확은 많이 거두려고 한다. 이것이 지나친 욕심, 곧 탐욕이다. 휴정 스님은 “애정이 한 번 얽히면 사람을 끌어다가 죄악의 문에 처넣는다”고 하였다. '나 혼자 잘살기 위해', '나 혼자 편하기 위해' 내가 법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르면 그 대가는 곧바로 타인에게 전가되고 결국에는 그 업보가 돌고 돌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지나친 욕심이 인생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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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2-2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만에 리뷰네요..^^..ㅎㅎㅎ 바빴나 봐요?

cyrus 2016-12-20 15:41   좋아요 1 | URL
사흘 동안 감기 증상에 시달려서 고생했습니다... 주말에 거의 누워만 지냈습니다. ㅎㅎㅎㅎ


yureka01 2016-12-20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고고,,왠지 몇일 동안 서재를 비우지 않을 텐데 뭔 일 있을 거란 예감..감기였군요..요즘 상당히 심하다고 하던데..얼른 쾌찬차 하시길,!~~~

cyrus 2016-12-20 15:49   좋아요 2 | URL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평소에 감기 잘 안 걸리고, 걸려봤자 이틀 정도면 치유되는데, 올해 독감은 정말 센 녀석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6-12-20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cyrus 2016-12-21 08:06   좋아요 1 | URL
네. 올해는 아픈 일이 많았어요. 건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호랑이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

양철나무꾼 2016-12-20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번 독감은 잠복기가 5일입니다.
자택격리든 뭐든 격리, 감금되어야 합니다, ㅋ~.

고생하셨네요, 앞으로도 잘 드시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법정 스님도 그렇고, 동쪽나라 출판사도 그렇고...귀한 거네요, 반갑습니다.
책도, 오래간만의 님도~^^

cyrus 2016-12-21 08:1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주말에 어디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만 지냈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6-12-2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감 유행이라고 뉴스에 나오는데, cyrus님은 빨리 나으셨다니 그래도 다행이예요. cyrus님,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12-21 08:11   좋아요 1 | URL
독감 걸린 이후로 잠을 일찍 청했습니다. 역시 잠이 보약입니다. ^^

표맥(漂麥) 2016-12-20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가귀감은 정말 괜찮은(주제 넘지만) 내용의 책입니다. 말 그대로 보물 같은 책...^^

cyrus 2016-12-21 08:12   좋아요 0 | URL
책에 좋은 구절이 많았습니다. 이제 다시 나올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
 

 

 

 

 

 

 

 

 

 

 

 

 

 

 

 

 

 

 

 

 

 

나는 법륜 스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법구경을 추천하고 싶다. 법구경은 인생에 지침이 될 만큼 좋은 게송(偈頌)들을 모아 엮은 최고(最古)의 경전이다. 스님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삶의 해법들 대부분은 법구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법구경은 아무나 소화하기 어려운 경전이다. 짧은 잠언에는 비유와 암시가 가득하다. 스님은 법구경의 심오한 지혜를 편안한 언어로 알려준다. 해당 출판사 서평에 보면 《법륜 스님의 행복》을 ‘우리가 알아야 할 총체이자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지혜의 보물창고’라고 소개했다. 어이없게도 법구경이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말았다. 출판사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혜의 보물창고가 존재하고 있는데, 스님의 책을 마치 대단한 책인 것처럼 알렸다. 이래서 출판사 서평의 팔 할은 과장이다.

 

 

 

 

 

 

 

 

 

 

 

 

 

 

 

 

 

 

《법륜 스님의 행복》의 표지를 펼쳐 보면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은 행복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응축해놓은 것 같다. 나는 이 구절이 어디에 나오는지 법구경 역서를 살펴봤다. 내가 참조한 법구경 역서는 김달진의 《법구경》(김달진 전집 7, 문학동네), 법정 스님의 《진리의 말씀》(이레)과 한명숙의 《법구경》(홍익출판사)이다. 글자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하게 읽어본 결과, 《법륜 스님의 행복》의 법구경 구절과 비슷한 것이 없었다. 이 구절이 법구경 어디에 나오는지 정말 궁금한데, 달랑 경전 이름만 써있으니 당황스럽다.

 

법구경의 번역본은 두 가지가 있다. 팔리어본과 산스크리트어본이 전해지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역서는 팔리어본을 국역한 것과 한역본을 국역한 것으로 나뉜다. (팔리어는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등에서 발달한 언어) 두 번역본에 차이가 있다. 팔리어본은 26품 423송(26장 423개의 문장이 있다고 보면 된다)으로 이루어졌고, 한역 법구경은 39품 752송이다. 그리고 글의 배열이 다르고, 원문 해석과 한문 해석을 비교하면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만 가지고 특정 역서가 오역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법구경이 널리 애송되면서 유포되는 과정 중에 각각 시대적 정서가 반영된 번역본들이 많이 나왔다. 또는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여 가필되면서 일부 문장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스님의 책에 있는 법구경 구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역서를 대조해가면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문장의 의미와 비슷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12품 애신품(愛身品)에 있는 문장으로 보인다. (김달진은 12품 제목을 ‘기신품’으로 옮겼다) 각각의 인용문들을 한 번 비교해보시라.

 

 

1) 《법륜 스님의 행복》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 《김달진 전집 7 : 법구경》 (김달진 번역, 188)

 

스스로 악을 행해 그 죄를 받고

스스로 선을 행해 그 복을 받는다

죄도 복도 내게 매였으니

누가 그것을 대신해 받으리

 

※ 원문 : 惡自受罪 善自受福 亦各須熟 彼不自代 習善得善 亦如種甛
(악자수죄 선자수복 역각수숙 피불자대 습선득선 역여종첨)

 


3) 《진리의 말씀》 (법정 스님 번역, 92쪽)

 

내가 악행을 하면 스스로 더러워지고
내가 선행을 하면 스스로 깨끗해진다
그러니 깨끗하고 더러움은 내게 달린 것
아무도 나를 깨끗하게 해줄 수 없다

 


4) 《법구경》 (한명숙 번역, 158쪽)

 

악행은 스스로 그 죄를 받고
선행은 스스로 그 복을 받는다.
그 열매는 지은 사람에게서 무르익으니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할 수 없다.
선행을 하면 선의 열매를 얻으니
또한 달콤한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법륜 스님 책 인용문이 애신품에 있는 구절이 맞으면 원문의 배열을 무시하고 풀어쓴 것이 된다. 출판사는 책의 주제인 행복을 강조하려고 법구경 원문의 ‘善’을 행복으로 옮겨 썼다. 법구경은 부처의 말씀이다. 부처의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개인적인 관점에 덧붙여 문장을 해석하면 독자가 경전을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善’을 행복의 동일어로 보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 건지 의심이 든다. 법구경 공부가 많이 부족한 입장이라서 내 의견을 확실하게 표명하기가 어렵다. 출판사의 문장 해석이 미심쩍지만, 일단 눈 감아 주겠다. 하지만 문장 배열이 달라진 사실을 알리지 않고, 법구경을 인용한 점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법구경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는 문장의 출처를 의심하지 않은 채 ‘법구경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믿는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출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원문을 변형한 법구경 구절을 열심히 인터넷에 공유한다. 법구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어이없어하면서 바라봤을 것이다.

 

법구경에는 우리 삶에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줄 좋은 문장이 많다. 그래서 문장 인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법구경은 아주 매력이 넘치는 텍스트다. 글 쓰는 식자들은 자신의 문장을 세련된 모습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읽는 법구경 같은 텍스트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법구경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문장을 인용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자신의 무지함을 공개하는 것이다. 법구경 원문을 제멋대로 해석한 문장을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마치 법구경을 읽고 이해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식자라는 호칭이 아깝다. 그들은 식자가 아니라 아는 척하는 무식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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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저는 이 표현에 반감이 드네요...
불행은 내가 만들지만
행복은 반드시 내 스스로 100%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좋은 사회 시스템이 덧대어서 행복을 만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끄적였슴돠..

cyrus 2016-03-14 08:19   좋아요 0 | URL
법구경의 문장은 한 번 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도 있어요.

어제 법구경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법륜스님이 인용한 문장을 찾지 못했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행복으로 시작되는 문장이 단 한 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인용한 문장의 정체가 의심됩니다. 그런데도 스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서평을 작성할 때 문제의 문장을 재인용하고 있어요. 법구경이 어떤 책인지 모른 채 좋은 말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셈이죠.

양철나무꾼 2016-03-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 글씨 님이 쓰신 건줄 알고 반가워서 헐레벌떡 달려왔는데...법륜스님 필체란 말이죠?

오랜 수도 생활을 하신 스님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이해서 말이지요~!

고전을 공부하다 보면, 원본과는 전혀 달라서 출처를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거나 가감 정도는 애교로 봐주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있던 차에 님의 문제제시 반갑습니다, 꾸벅~(__)

cyrus 2016-03-14 08:25   좋아요 0 | URL
진짜 스님이 쓴 건지 아니면 책을 만든 출판사가 문장을 넣은 건지 모르겠어요. 스님의 친필 사인이 있어서 일단 스님이 쓴 걸로 생각했어요.

법구경을 여러 번 훑어봤는데 스님의 책에 있는 문장이 없었습니다. 원문을 살짝 고쳤거나 아예 법구경에 없는 문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법구경은 `부처가 남긴 진리의 말씀`입니다.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법구경 원래 의미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법구경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밝히면 되는데 달랑 경전 이름만 적혀 있어서 문장의 정체가 의심됩니다.

표맥(漂麥) 2016-03-1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구경은 정말 권할만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종교에 걸림이 없는 분, 아니 걸림이 있어도 한번쯤 읽기를 권하는... 그런 느낌의 책 입니다...^^

cyrus 2016-03-14 08:2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는 무교인데도 어렵고 생각할 기회를 많이 주는 경전을 좋아합니다. ^^

빨강앙마 2016-03-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정말 이해가 어려운 말들이 너무 많아서... 쉽진 않더라구요^^;;

cyrus 2016-03-16 12: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경전을 읽다 보면 앞에 있는 문장과 뒤에 나온 문장이 서로 모순되는 것도 있어요. 한 번만에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법정 스님의 《진리의 말씀》은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 해석과 약간 차이가 있어요.
 
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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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밥 먹여주랴.” 이 한마디면 누구나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책에 대한 냉소적인 힐난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책에서 행복의 비결을 찾으려고 했다가 실망해 본 사람에게 이 말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래, 밥 먹여준다.”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음이 퍼뜩 떠오른 경험 있는 독자라면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생길을 찾는 것. 누구나 고민해본 적 있는 심오한 문제다. 사람들은 《법륜 스님의 행복》(약칭 ‘스님의 행복’)이 어려운 고민을 해결해주는 책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해졌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의 뒤통수를 치고 싶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문법상 명사지만, 현실에선 동사에 가깝다. 행복을 글로 배운다고 해서 완전히 내 삶의 기쁨이 충만하기 어렵다. 행복을 글로 배우는 것과 정말 행복해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은 서로 엄연히 다른 경우다.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삶의 과정 또는 행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스님의 행복》을 읽은 독자는 자신의 서평에 책 속에 있는 가르침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고,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고 썼다. 그 독자는 수행자도 이루지 못한 깨달음을 불과 며칠 만에 알았으니 스님을 죽이는 일만 남았다. <임제록>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여라’는 그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이제 스스로 자기 삶을 다스리면 된다. 그런데 마음으로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부처의 실체를 만나지 못한다. 즉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면 힘든 현실 앞에서 가슴이 답답함을 호소한다. 이러면 스님의 말씀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스님은 인생에 정답이 없으므로 자기가 선택한 대로 사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명성을 믿고 이 책이 인생을 유익하게 해주는 정답이라고 믿으면 크나큰 오산이다. 스님의 가르침이 무조건 옳고 실천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 스님의 말씀도 자유로운 사유의 길을 막아버리는 편견과 구속의 벽이 되기도 한다. 나는 과거의 불행했던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스님의 조언을 수긍하지 않는다. 스님은 고통스러운 삶의 한 장면을 그냥 지나가야 할 과거로 생각하고, 현재에만 집중하라고 말한다. 과거의 나쁜 기억을 계속 안으면 자신만 더 괴로워진다. 그래서 스님은 자신에게 불행의 씨앗을 안겨준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면서 그동안 쌓인 원망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조언한다. 나를 괴롭힌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갈등 관계를 청산할 용의가 있다. 그렇지만 가해자가 일말의 반성도 없다거나 자신의 죄를 모르는 척하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상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를 용서하는 것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양보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피해자의 마음에 상처가 덧날 수 있다. 나쁜 기억을 스스로 내려놓으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스님은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말한다. 고통의 짐이 너무나도 많으면 레테의 강 속으로 던져버리기가 쉽지 않다.

 

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님의 행복》을 읽은 독자들까지 지적하는 나의 까칠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 생각의 허점을 알려줘도 좋다. 그런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은 내 생각을 비난한다. 불만이 있어도 제발 그러지 마시라. 스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자고.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스님의 보호 속에서 내 행복을 쌓을 이유가 없다. 법륜 스님을 만나면 그를 죽여라!

 

 

 

 

※ 서평대회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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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꿀꿀이 2016-03-12 18: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16-03-1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이 책 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cyrus님, 좋은 저녁 되세요.
오늘도 퀴즈 준비합니다.^^

cyrus 2016-03-13 14:50   좋아요 1 | URL
왜 평소와 다르게 비밀댓글을 달았습니까? ^^;;

서니데이 2016-03-13 15:00   좋아요 0 | URL
쓰다 잘못 눌렀나봅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2016-03-12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3-13 14:53   좋아요 0 | URL
종교인, 선생님도 카운슬러가 되어야하는 세상이죠.

2016-03-1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3-1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제목 보고 놀랐어요. ^^
하지만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경험도 사고방식도 나이도 성별도 처한 환경도 다르며, 자신만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글이예요. 사이러스님의 요즘 글, 참 좋네요.

제 의견으로는
과거의 나쁜 기억을 과거로 여기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가해자로 인해 더 이상 영향받지 않는 삶을 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어요.
피해를 입은 것도 억울하고 화나는데, 현재도 얽매여서 연연하면서 자신의 삶을 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으니까,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싶구요.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사실이니까요!

말처럼 쉽나요, 어디.
시간이 필요하더군요, 저는. 그리고 아직도
미운 사람이 있어요. ㅎㅎ.

cyrus 2016-03-14 08: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단시간 내에 잊고 해결하기가 어려워요. 스님의 책의 독자서평에 보면 스님의 글을 읽고난 뒤에 마음이 편해졌다는 식으로 쓰던데 저는 이런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법구경에는 우리 삶이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적혀 있어요. 스님의 책을 살다가 힘들 때 읽는 구급 비상약처럼 읽을 수가 없어요.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너무나도 어렵고, 정답이 엄청 많아요. 스님의 가르침만 믿고 의지하는 방법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상황에 따라서 행복하기 위한 방법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맞춰서 능동적으로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싶어서 좀 과한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

JK 2016-03-1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끌어안고 가는 사람들이 드문것 같아요. 외부에 의존하려하고. 그만큼 세상사는게 힘들다는 거겠죠.

cyrus 2016-03-14 12:55   좋아요 0 | URL
사회가 각 사회구성원이 겪는 문제의 고통을 경감해주면 되는데 그 기능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6-03-1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무지 쎕니다 :> 모쪼록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cyrus 2016-03-19 12:54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심사위원의 눈에 띄기 위해서 일부러 과감한 제목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더 과격해서 입상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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