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 교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일본 최고의 지성이 안내하는 해부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
요로 다케시 지음, 박성민 옮김 / 궁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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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몸을 가까이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내키지도 않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인체의 구조를 알아야하는 의대생들이다. 의대생에게 해부학은 성인식과 같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의대생들은 직접 사체를 해부하면서 의사가 갖춰야 할 담대함을 배운다. 사체 기증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는다. 해부학 실습 전에 교수와 학생들은 고인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연다.

 

해부해본 적이 있는 의대생이나 해부학을 전공한 사람을 만나면 꼭 한번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해부 실습실에 안치된 진짜 사체와 공포영화에 묘사된 사체 중 어느 게 무섭지 않으세요?” 나 같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일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해부학 교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는 일반인에게는 으스스하게만 느껴질 해부학을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인체의 구조, 해부의 기본 순서와 원리, 해부용 사체, 해부학의 역사 등에 관해 알려준다. 이 책의 저자는 해부학과 뇌 과학을 전공한 작가 요로 다케시(養老孟司)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바보의 벽》(재인, 2003)은 자신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는 인간의 행동을 뇌 과학적 관점으로 설명한 책이다. 요로는 인간의 뇌 속에는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바보의 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벽으로 인해 인간들은 알고 싶지 않은 것, 자신과 반대되는 내용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보를 차단해버리면서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해부학 교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는 청소년을 위한 해부학 입문서로 1993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며 2005년에 문고판으로 다시 나왔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호기심 많은 청소년부터 의학 상식을 배우고 싶은 어른들까지 두루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습 정도를 다루겠지 하면서 본다면 오산이다. 책은 해부에 관한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연거푸 던진다. 인간은 왜 해부를 금기시하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해부를 시도하려고 했을까. 사체는 ‘죽은 몸’일까, 아니면 ‘물건’일까. 몸과 마음의 관계는?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인데도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을 만나면 훌훌 책장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해부학은 의학에 바탕이 되는 기초 학문이다. 대부분 사람에게는 해부학이 의대생들을 위한 전문적인 학문으로 인식될지 모르나 해부학은 몸을 알기 위해 배울 게 많은 학문이다. 우리는 어릴 적 한 번쯤은 인체 장기를 본뜬 모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 경험이 있다. 소독약 냄새나는 실험실에서, 약간 겁먹은 눈으로 과학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내 몸 안에도 저런 것들이 들어 있을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 대한 소소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굳이 여러 가지 사례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동서양에서는 몸이 중요한 주제였다. 학문의 역사 속에서 몸은 사색의 대상이자 탐구의 대상이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호기심은 해부학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요로 다케시가 생각하는 해부의 목적은 몸을 아는 것이며, 더 넓게 말하자면 해부는 ‘인간’을 알기 위한 과정이다. 몸은 지구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복잡 오묘하고 경이롭다. 그래서 몸은 ‘소우주’,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도 불린다.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몸을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환경과 문화 같은 외부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장소가 모두 몸이다. 그런 점에서 몸을 아는 것은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는 인간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해부용 사체를 다시 보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사체는 ‘죽은 몸’이지만,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완전히 해체되기 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나는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무엇으로 선택할까. 누군가의 눈이 될 수도 있고 심장이나 간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진열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하나?

 

 

 

 

※ Trivia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재판이 끝나고 나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38쪽)

 

 

→ 갈릴레오의 명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갈릴레오 사후에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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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3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3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2-14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을 위한 해부학 입문서라면 제가 읽으면 좋을 책 같습니다. 다방면의 독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전혀 상관 없는 책 같지만 막상 읽어 보면 어떤 책과 어떤 책 사이에 어떤 연결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예술로 가는 길은 하나다, 또는 배움의 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져요.

cyrus 2019-02-18 15:21   좋아요 0 | URL
이 책이랑 김승섭 씨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과 같이 읽으면 좋아요. 두 책에 연결고리가 있거든요. ^^
 
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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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에 언어가 있다. 그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책(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언어가 바로 수학”이라고 말했다. 갈릴레오는 수학을 자연의 기본 언어이자 자연 전체에 적용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수학과 물리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면 수학을 피해갈 수 없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은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일상의 익숙한 사물에 빗대어 물리학 이론을 능숙하게 설명할 줄 알았다. 생전에 그는 수학의 도움 없이도 물리학의 모든 이론이 설명될 수 있는 날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날이 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일반 대중 앞에 선보인 TV 방송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수학을 모르면 자연의 가장 심원한 아름다움을 실제로 느끼기 어렵다고. 앞서 갈릴레오가 말했듯이 수학은 자연의 언어이며 물리학자들 또한 수식을 대체할 다른 언어로 복잡하면서도 오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떨림과 울림. 이 책의 제목만 보면, 대체 이 책이 물리학의 어떤 측면을 어떻게 설명하려 하는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요즘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김상욱 교수는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떨림과 울림》을 썼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식으로 설명해야 하는 물리학은 ‘차가운 물리학’이다. 물리학은 인간이 보지 못하거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연 현상을 보이게 해준다. 그런데 ‘차가운 물리학’은 불친절하다. ‘차가운 물리학’은 자연 현상을 검증할 수 있는 간단한 수식을 보여주기만 한다. 그런데 수학과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수식이 간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수식이 아니라 알아먹기 힘든 ‘외계어’이다. 결국 이들은 물리학에 진절머리 나는 경험을 하게 되고, ‘물리학’ 하면 복잡한 수식을 떠올린다. 우리가 수학 다음으로 물리학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 이유이다. 그리하여 ‘차가운 물리학’은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학문으로 남게 된다.

 

김상욱 교수는 독자들이 천천히 손발을 담글 수 있게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리학’을 데운다. 물리학이 어느 정도 미지근해지면 독자들은 그 속에서 전해지는 ‘떨림’과 ‘울림’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물리학의 ‘떨림’과 ‘울림’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현재까지도 ‘떨림’과 ‘울림’이 반복되고 있는 거대한 물리의 세계이다. 이를테면 전자기파는 물이 떨면서 흐르는 것처럼 진동하는(물리학 용어로 ‘파동’이라고 한다) 빛의 일종이다. 1초 동안 많이 진동할수록, 전자기파의 에너지는 높아진다. 진동수에 따라 전파기파의 종류는 다양하다. TV나 라디오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은 이 전자기파에서 흘러나온다. 전자기파가 계속 진동하지 못한다면 모든 가전제품의 작동은 멈췄을 것이다. 우리가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 것은 소리가 일으키는 파동, 즉 울림이 만들어낸 근사한 효과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음악은 소리라는 물리적 현상이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 뇌는 이 소리의 파동을 ‘음악’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인다. 김상욱 교수는 우주를 포함한 이 거대한 세상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떨림과 울림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미세한 진동으로 숨 쉬고, 말하면서 움직인다.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떨림’과 ‘울림’은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우리가 오감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받아들인 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떨림’과 ‘울림’을 눈으로 보이게끔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떨림’과 ‘울림’이 남아 있다. 그래서 김상욱 교수는 이 책에서 ‘불투명한 세계’ 속에 사는 과학자들이 갖춰야 할 자세를 언급하면서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지 않는다. ‘차가운 물리학’은 경험이나 증거를 들어가면서 어떤 현상의 실체를 증명하려고 한다. ‘차가운 물리학’에 익숙한 과학자들은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세상을 분석하려고 했다. 그리고 간결한 수식으로 물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들은 수식과 과학적 증거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비과학’으로 취급했다. 물리학이 차가우니 그것에 익숙해진 과학자들의 태도가 쌀쌀맞을 수밖에 없다. 이러면 과학자들은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김상욱 교수는 ‘과학은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대중들 앞에서 복잡한 물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려워한다면서 고백한 파인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파인먼은 세상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과학자들이 자기들이 보는(보고 싶은) 눈, 자기가 아는 언어(수식)로 세상을 설명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의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물리학과 물리학자들이 차가워질수록 그 속에 있어야 인간성은 시들게 된다.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있지 않은 물리학은 ‘얼어 죽은 물리학’이다. 이런 학문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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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9-01-17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이 아마 팟캐스트 ‘과학하는 사람들‘에도 종종 나오시는 걸로 압니다. TV보다는 팟캐스트에서 더 많은 시간을 강의하셨고 ‘알쓸신잡‘에서는 편집이 좀 그랬는지 많이 나오지는 않더라구요. 이학과 공학은 제가 늘 어려운 분야라서 좀더 많이 읽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cyrus 2019-01-17 13:52   좋아요 0 | URL
김상욱 교수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글이 담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자가 물리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
 
호르몬의 거짓말 - 여성은 정말 한 달에 한 번 바보가 되는가
로빈 스타인 델루카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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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카페인 금단 현상을 병으로 여긴 사람은 없었다. 하루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섭취량이 줄이면 카페인 금단성 두통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카페인 금단 현상은 절대 방치해선 안 될 증상이 됐다. 실제로 2013년 『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5판에 ‘카페인 금단 증상’이 새로운 장애로 추가됐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은 탈모, 생리가 시작되기 전부터 슬슬 찾아오는 통증은 ‘생리전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치료 대상이 됐다. 중년 여성은 호르몬 에스트로겐이 결핍되는 ‘갱년기 증후군’을 겪는다.

 

호르몬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직 ·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호르몬은 인체의 내분비샘 등 여러 기관에서 만들어지며 분비되는 일종의 화학물질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호르몬의 종류만도 40여 종이 넘는다고 하니, 우리 몸 자체가 거대한 호르몬 생산 공장인 셈이다. 호르몬은 신경계는 물론 다른 체내 기관들과의 작용을 통해 몸의 대사를 조절하고 몸에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호르몬은 과다 분비되거나 분비량이 적어지면 건강에 적신호를 보낸다. 인류가 호르몬제를 개발해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연 호르몬요법은 만병통치약일까? 호르몬요법은 그동안 화끈거림, 식은땀 등 완경기(폐경기) 여성의 증상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노화 현상을 막아주는 건강보조제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년 여성을 위한 호르몬요법이 유방암과 뇌졸중, 심장 마비 등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여러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사실 호르몬요법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호르몬요법의 위험성을 제기한 의사들이 있었지만, 대중 매체들은 치료제의 치명적인 부작용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호르몬 결핍과 관련된 새로운 질병들이 나오고, 여기에 맞춰 의료업계와 제약회사 들은 새로운 호르몬요법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바람몰이’에 나섰다.

 

《호르몬의 거짓말》여성의 신체적 · 심리적 반응에 ‘호르몬 이상(과다 또는 결핍)’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치료와 약을 권하는 ‘호르몬 신화’가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낸다. 1970년대 초부터 많은 학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르몬 신화’는 수천 년간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과 함께 가부장제를 견고하게 떠받쳐주었으며 의료업계와 제약회사에 의해 부풀려졌다. 여성이 ‘질병 없는 환자’가 되는 배후에는 제약 회사와 의사 집단의 결탁이 있었다. 음모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거대 기업 수준의 제약회사들은 의사들의 학술논문과 세미나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수많은 질병과 치료제를 ‘발명’해내고 있다. 질병이 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약이 질병을 만드는 것이다.

 

정신과에 갈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중년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딱히 병명도 없는 우울증을 겪는다. 생리 전이나 출산 뒤, 수유 기간, 완경기 전후에는 에스트로겐 수치가 낮아지며 이런 때에 우울증이 걸리기 쉽다. 그런데 대부분 의학 전문가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이 많은 이유를 남녀 간의 뇌의 구조적 차이, 월경, 임신 및 출산과 관련된 호르몬의 차이 등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여성의 우울증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호르몬이 주기성을 가지기 때문에 기분 변화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울증은 여성의 생애주기별로 나타난다. 생리전증후군, 청소년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 여성의 삶에서 우울증에 시달려야 할 일이 많다.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여성의 생애주기별로 나타나는 우울증은 치료받아야 할 ‘질환’으로 명명된다. 정신의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성은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존재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임산부는 기억력이 떨어지고, 수유기 여성은 쉽게 산후우울증에 걸리며 폐경기 여성은 신경질적이며 쉽게 짜증을 낸다는 식으로 거론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태도나 행동들이 여성호르몬에 문제가 있어서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호르몬의 거짓말》은 이제까지 여성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남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의학계는 결국 남성의 잣대로 여성을 재단하면서 그 건강과 생명을 위협해 왔다. 남성을 위주로 임상 실험한 결과물을 가지고 여성을 진단하고 치료하게 되면, 여성은 자신의 증상을 둘러싼 외적 요인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의사 앞에 선 여성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 취약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은 지금까지 과학의 이름으로 생산되어 온 건강에 대한 지식(또는 편견)이 어떤 식의 잘못된 근거에 기초하여 생산되곤 하였는지, 또 어떤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지, 그래서 왜 의학계가 결국 여성들의 건강 현실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도 ‘병’ 또는 ‘장애’라는 이름을 단 외우기 힘든 의학 용어에 넘어가 약을 처방받는 ‘가짜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그사이에 병원과 제약 회사는 살찌우고, 의료 체계를 세금으로 지탱해나가는 시민들의 지갑은 얇아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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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세계의 모든 현상은 일정한 인과 관계의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학으로 이 법칙을 알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라플라스(Laplace)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수많은 계산을 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계산력만 있다면 향후 전체 운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만사 별자리 운행하듯이 계산만 다 한다면 향후 어떻게 움직일지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필요한 계산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이루어진 인과율이 작용하므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단지 수많은 변수와 복잡하고 많은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미래란 인과율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믿었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1984, 2006)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가 등장하면서 비결정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입자의 속도가 정해지는 순간 위치가 달라지고, 반대로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속도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찰 장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확률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카를 포퍼(Karl Popper)《열린사회와 그 적들》(민음사)에서 인류의 운명과 역사가 결정되거나 닫혀 있지 않으며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반드시 무너지고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한 마르크스(Marx)의 결정론적 역사관을 비판했다. 포퍼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지가 존중되고 비판이 보장되며 자아실현의 길이 열려있는 ‘열린사회’를 인간과 사회 발전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의 입장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반영되어 있다.

 

결정론의 허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정론은 학문의 세계뿐만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한때 유전자가 외모는 물론 지능 · 기질과 질병까지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본성을 오랜 진화과정을 겪어 온 유전자의 관점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이런 주장은 요즘 과학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형편이다. 오히려 환경이 유전형질에 끼치는 영향이 밝혀지면서 유전자와 환경이 얼마나,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을유문화사, 2018)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으로 오해받곤 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머리카락, 피부색, 키 등 외모는 유전되지만, 사회적 행동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학습이나 경험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보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번식(생식)도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것이며, 생명체는 유전자를 보존시키기 위해 번식을 하게 된다. 그의 도발적인 책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촉진했다.

 

사실 이 열띤 논쟁은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기 일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사회생물학》(민음사)이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반향이 생겨난다. 이 책 역시 《이기적 유전자》처럼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을 위해 쓰인 책은 아니었고 대학 교재였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이 진화생물학자들 간의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문제작이 되었을까? 사회생물학은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행동이 종(種)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도킨스는 윌슨의 입장을 응용하여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클래식, 2011)

*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2014)

 

 

 

우리나라에 번역된 《사회생물학》은 절판된 상태라 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생물학》의 후속편 격이라 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분석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1978년에 나왔으니 올해가 출간 40주년이다. 진화론 논쟁을 주제로 다룬 책들에서 《사회생물학》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어서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화론 논쟁의 역사와 그 핵심을 잘 정리한 《센스 앤 넌센스》(동아시아)는 사회생물학의 주요 입장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 따르면 윌슨은 사회생물학으로 인간의 성적 차이, 공격성, 종교, 동성애 등을 설명하려고 했으며 “머지않아 사회과학은 생물학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비판이 거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윌슨의 도발적인 주장은 ‘사회생물학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함께 하버드대학교에서 활동했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윌슨을 ‘환원주의자’라고 비난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 (사이언스북스, 2016)

 

 

 

굴드는 평생 결정론의 함정에 빠진 과학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선 학자이다. 그는 윌슨뿐만 아니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비판했다. 《판다의 엄지》(사이언스북스)도킨스를 비판한 칼럼(8장 『이타적인 집단과 이기적인 유전자』)이 수록되어 있다. 굴드는 도킨스의 주장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얽매인 악습’, 즉 환원주의, 결정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 리처드 도킨스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 2015)

 

 

 

그렇다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기적 유전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나는 앞서 이 책이 ‘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결정론’을 옹호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유전자 관점(gene’s-eye view)을 옹호하는 책으로 봐야 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서 출현빈도가 증가할 형질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변질하는 것에 대해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이 책, 아니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만 보고 도킨스를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도킨스는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에 수록된 『유전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도깨비’로 비유하면서 매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인간을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유전자의 노예라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았다. ‘유전자 관점’과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아주 작은 차이가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왜곡돼는 바람에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 자유 의지에 기반한 비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환경 영향을 극복하고 주체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인간은 주변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우리를 조종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이기적 유전자》 11장에서 그 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서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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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6   좋아요 0 | URL
<센스 앤 넌센스>에서 본성과 양육을 확실하게 구분하거나 양자 중 한쪽만 옹호하는 자세를 ‘넌센스’라고 말해요. 북사랑님이 읽으려는 책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책의 저자는 본성과 양육을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하네요. 저 역시 저자의 주장에 공감해요.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

2018-10-29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7   좋아요 0 | URL
제가 ‘입자’를 양자로 착각해서 잘못 썼네요.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18-10-2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할 힘이 있다고 설파한 도킨스의 글에서
저는 오히려 그럴 힘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우리는 힘을 합치면 어떤 자연 재해가 일어날지라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자연재해의 위력이 크다는 걸 말하듯이, 도킨스의 말은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걸 말해 주고 있는 것 같거든요.
어쨌든 도킨스의 그 말은 우리 인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존재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10-30 17:0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연대하는 힘을 잘 이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어요. ^^
 
여성의 진화 - 몸, 생애사 그리고 건강
웬다 트레바탄 지음, 박한선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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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채집 시대의 인류는 수명은 짧았지만, 체력은 좋았다. 윤택한 삶을 살며 장수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각종 알레르기 질환을 비롯한 암, 당뇨와 같은 생활습관병에 시달리고 있다. 진화 의학자들은 이 난제의 해법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찾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질병과 건강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분 분야를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이라고 부른다. 진화 의학은 1990년대에 진화생물학자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주1]조지 C. 윌리엄스(George C. Williams)가 연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의학이다. 진화 의학자들은 질병의 증상을 없애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현대 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질병에 걸리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을 인류의 진화 과정과 인체의 구조적 특성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진화 의학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의학계에 도입되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존 의학계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진화 의학은 인간의 몸을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산물로 본다. 예를 들어 음식을 비만의 원인은 게으른 생활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구석기 시대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채식, 어류와 해산물을 주로 먹었다. 풍요로운 음식을 즐기기 시작한 지는 겨우 1만 년밖에 되지 않았다. 농경 시대의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곡식, 감자 등 탄수화물 섭취가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되면서 섭취 열량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비만, 고혈압, 당뇨 등 ‘현대의 문명병’의 위험에 노출된 이유가 우리의 식생활이 너무 빠르게 진화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구석기 시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농업 혁명으로 우리의 식생활만 엄청나게 달라져 버린 것이다.

 

질병은 인류의 발전과 함께 그 탄생과 진화를 반복하고 있다. 과연, 실제 문명과 의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더 건강해지고 있는 걸까. 과거와 비교하면 질병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운 걸까. 진화론적 관점으로 여성의 몸과 건강을 살피는 《여성의 진화》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책의 저자인 생물 인류학자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은 초경, 임신, 출산, 완경[주2]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진화적 요인이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적 · 의학적 지식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여성의 건강과 연관 지어 논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여성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질환은 여성의 몸이 문명화에 따른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다. 예를 들어 유방암이 나날이 급증하는 원인을 해부학적 구조에서 찾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화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여성들은 초경이 늦었고 그 직후 임신을 했으며 완경을 빨리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여성들은 이들보다 초경이 일찍 시작하며 생리 횟수가 많다. 구석기시대 여성들이 평생 150번 정도 생리를 한 데 반해 현대 여성은 400번 정도 생리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호르몬이 유방암의 발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초경이 빠르고 완경이 늦으면 그만큼 여성의 몸은 호르몬에 노출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유방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즉 임신과 출산 횟수가 많으면 유방암 발병률이 낮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임신과 출산 경험이 적거나 없으면 발병 우려가 높아지는 것이다.

 

포유류의 성장에서 접촉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갓 태어난 동물이 살아남으려면 어미가 반드시 새끼를 핥아줘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어미가 핥아주지 않은 새끼 양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다. 접촉은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아기를 업고 다니고, 끼고 자고,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젖을 물리는 육아 방식은 아기와 산모 모두에게 너무나 적합하다. 옥시토신(oxytocin)은 출산 후 아기를 돌볼 때에도 그 분비량이 많이 늘어나는데, 아이와 산모 사이의 유대감을 크게 만들고 모유 수유를 돕는다. 코르티솔(cortisol)은 신체가 스트레스에 반응하고 감염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호르몬이다. 아기를 안아서 달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코르티솔 수치가 내려간다. 하지만 안아주지 않고 계속 울게 내버려 두는 일이 잦아지면 아기의 코르티솔 분비가 촉진되면서 아기의 성장과 정서, 뇌 발달까지 저해할 수 있다. 모유 수유의 장점은 아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옥시토신은 임신으로 이완된 산모의 자궁을 임신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며, 출산 후의 출혈을 멎게 한다.

 

이 책에서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의 몸이 번식(생식, 출산과 육아) 성공에 초점을 맞춰 진화해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저자는 “여성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번식이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348쪽). 《여성의 진화》는 진화론적 가설에 치우치지 않은, ‘여성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다이어트를 위해 구석기 시대의 식단으로 바꾸자는 식의 실현 불가능한 건강 비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책이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남성이 이 책을 읽고 여성의 생리 · 임신 · 출산의 수고로움을 안다면 건강한 여성들이 정말 살만한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여성의 진화》 19쪽에 랜돌프 네스가 ‘랜디 네스’로 되어 있다. 랜디가 ‘랜돌프’의 애칭이라서 틀린 표기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확한 이름은 ‘랜돌프 네스’이다.

 

[주2] 책에서는 ‘폐경’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폐경은 ‘여성으로서 생명이 끝난다’는 부정적 어감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 리뷰에선 ‘폐경’ 대신 ‘완전한 성숙’이란 긍정적 의미를 담은 ‘완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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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28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 그래야 하는 것인데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또는 불행해진 여성들이 많은 게 현실이죠.

cyrus 2018-10-29 15:16   좋아요 1 | URL
임신과 출산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몰상식한 남성들은 임신을 ‘벼슬‘이라고 말하는데,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여성의 몸을 잘 모르니 여성의 건강권 보장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 없어요. 여성도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 국민이에요. 정부는 모든 연령의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먼저 만들어야하는데,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제가 봐도 지금 우리 사회는 여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