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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여인들
아일린 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시공사 출판사 마케터님께.
요즘 마음의 평안을 얻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편지를 보냅니다. 이 사진 때문에 깜짝 놀라셨죠? 작년 12월 마지막 주말이었던 가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한 달이나 지났군요. 마케터님이 저지른 희대의 실수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잊으려고 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답니다. (찡긋)
마케터님은 중세가 남자의, 남자에, 남자를 위한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중세》 2권 출간에 맞춰서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했었죠. 이벤트 참가자를 남자로 한정했더군요. 마케터님. 설마 역사(History)를 진짜 ‘남자들을 위한 이야기(His+story)’로 이해한 건 아니죠? 재밌으라고 이벤트를 만든 거죠? 당신의 아이디어에 전 전 대통령의 훤한 이마를 탁 치고 갑니다.
사람들 반응이 크게 심각해지자 마케터님은 이벤트 공지사항을 급히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이벤트 기획이 잘못된 점을 인정한 자세는 좋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마케터님은 중세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자신의 선입견이 진짜 지식으로 믿어버리는 착각을 합니다. 이러면 왜곡된 정보를 타인에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입견이 전파되는 힘은 무섭습니다. 선입견이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심어지면 완전히 사라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앞으로 이런 위험한 실수를 방지하라는 의미에서 제가 중세와 관련된 책 한 권을 마케터님께 권합니다.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아일린 파워라는 역사가가 쓴 《중세의 여인들》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성을 보세요. 파워(Power). 아주 멋지지 않습니까? 왠지 힘이 넘치듯 할 남자가 중세에 관한 책을 쓴 것 같죠? 그런데 틀렸습니다. 누구나 ‘힘’을 뜻하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일린 파워’가 남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일린 파워는 여자입니다. 네, 여류 역사가가 중세의 여인들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중세의 여인들》은 얇아요. 본문의 분량만 계산해도 200쪽 이상 되지 못합니다. 어때요? 1,000쪽을 훌쩍 넘어가는 《중세》에 비하면 읽을 만하죠?
요즘 독자들은 아일린 파워가 누군지 잘 몰라요. 오스틴 파워는 잘 아는데 말이죠. 그런데 아일린 파워 이 사람, 생전에 아주 유명했었답니다. 아놀드 토인비 아시죠? 이 유명한 역사가는 유부남인데도 한때 콩깍지에 단단히 쓰여서 아일린 파워를 짝사랑한 적 있습니다. 그녀는 미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분석하는 일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그녀는 연구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교수직을 역임했습니다. 그야말로 파워는 남성 학자들만 모여 있는 신전이나 다름없는 역사학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최고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남자들의 기록에 가려진 중세 여성들의 삶을 발견해냈습니다. 그 발견의 결과물이 바로 《중세의 여인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세 여성들을 남성중심사회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사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래요. 종교를 신성하게 여기던 중세 남성들, 특히 교회의 종교인들은 여성이 유혹에 쉽게 빠지는 타락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자신들이 우매한 여성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성들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는 거죠. 그런데 이 중세 남성들은, 알면 알수록 좀 웃긴 존재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들은 성모 마리아를 고결한 존재로 찬양하고 숭배했으니까요. 성모님도 여잔데, 현실의 여자들만 열등한 존재로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그렇지만 중세 시절에는 이런 비상식의 상식이 통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세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방법은 있습니다. 돈 많은 귀족의 딸로 태어나면 됩니다. 그리고 돈이 많아야 합니다. 돈이 많으면 역시 돈 많은 영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캬아! 이거야말로 금수저 인생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최곱니다 그려. 상류층의 여성들은 화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남성들, 특히 음유시인들은 그녀 앞에 잘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귀족 부인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감미로운 노래를 바쳤습니다. 귀족 부인들 덕분에 음유시인들은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이 성모 마리아를 숭배했다면, 모험심에 사로잡힌 기사들은 서사시에 나올 법한 숙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기사도 정신을 마음껏 발휘해봅니다만, 기사들이 사랑하는 숙녀들은 성모처럼 현실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족 부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용맹함을 뽐냅니다. 금수저를 확실히 쥔 귀족 부인들은 경제적으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들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귀족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이 집안의 재산 및 남편 소유의 토지를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귀족의 딸이 아닌 여성들은 어떻게 하면 인정받았을까요? 중세 사회에서 귀족의 딸 다음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여성이 중세 장인의 딸입니다. 장인의 딸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남성들만 있을 것 같은 중세 길드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인의 딸은 은수저 인생입니다. 보통 여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장인의 도제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은수저 인생의 그녀들만큼이나 대접받지 못합니다. 여성 장인들이 많아지게 되자 길드에 소속된 남성 장인들은 제 밥그릇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간사하게 규정을 만듭니다. 장인의 아내와 딸 이외에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못을 박은 거죠. 돈을 벌어서 생계를 이어가고 싶은 여성들에게는 억울한 일이죠. 그런데 이보다 더 억울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난 여성들이에요. 그녀들은 글자 하나 제대로 못 배우고 평생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흙 수저 인생인 거죠. 흙흙, 흑흑...
자, 이제 제가 마케터님에게 《중세의 여인들》을 추천하는 이유를 잘 아시겠죠? 중세가 남성의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겁니다. 남성들의 사회에 제한되어 살아야 했던 여인들도 있었고, 반면에 남성들로부터 인정받고 화려하게 산 여인들도 있었답니다. 중세 사회를 이해하려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아울러서 봐야 합니다. 만약 역사가가 중세의 하층 여성들 중심으로 연구했으면 중세가 여성들을 억압하는 남성의 시대라고 분석했을 겁니다. 이는 중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겁니다. 이 역사가는 상류층 여성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의 오류는 중세 기사들이 활동한다고 해서 중세를 남성의 시대라고 생각했던 마케터님의 실수와 비슷합니다.
마케터님은 자사에서 나온 《중세》 1, 2권을 다 읽으셨으리라 봅니다. 《중세》만 제대로 읽으면 중세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죠? 천만에요. 그것만 본다 해도 중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세 연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중세에 관련된 학술논문이 무수히 나옵니다. 중세 사회를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이 정말 많습니다. 중세 사회를 정형화된 의미로 함부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하는 순간, 생각의 진행은 멈춰버립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진 지식은 한 번에 깨뜨리기 힘든 선입견이 되고 맙니다. 이 선입견이 오래 남으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마케터님 본인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출판사 직원은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의 책을 만들고 홍보를 해야 하는 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만드는 책 속에 있는 지식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에게 신뢰를 주는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추신 : 이 책에 한계가 있습니다. 파워가 1920년대에 집필한 논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겁니다. 파워는 농촌에 거주하는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래서 파워는 현존하는 소수의 자료를 가지고 여성들이 이렇게 살았으리라 추정했습니다. 파워가 해결하지 못한 미흡한 연구는 후세 역사가들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면서 보완했을 겁니다. 이 점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 《중세의 여인들》을 만든 ‘새로운 상상’ 출판사 편집자님 그리고 이 책을 옮긴 이종인 번역가님에게 드리는 독자의 한 말씀.
독일의 음유시인(Minnesinger)을 ‘미네징거’ 혹은 ‘민네징어’라고 표기합니다. 책 53쪽에는 미네징거, 63쪽에는 민네징어라고 되어 있더군요. 다음 쇄를 찍을 때 한 가지 단어로 통일해주세요. 74쪽에 중세의 형제 화가를 ‘반 림부르그 형제’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들 형제가 현제 네덜란드 영토가 된 플랑드르 지방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 앞에 ‘van’을 붙었을 거로 추측해봅니다. 이 정도 표기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Limbourg’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림부르그’ 혹은 ‘림부르흐’입니다. 그런데 통상적인 외국어 표기를 따르면 ‘랭부르 형제’로 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