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도서관의 '부적절한' 도서에 대한 학부모 의견에 학교 이사회는 해당 도서 (처음엔 시리즈 제외 10권)의 대출 및 교내 이용을 금지한다. 이 결정은 정식 회의와 검토라는 절차마저 무시하고 '학생들의 올바른 정서 함양과 성장을 위해서' 급하게 이루어졌다. 그 금서 목록 중 하나는 바로 <클로디아의 비밀>이다. 어린이가 가출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기 까지 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렇게 보자면 세상의 모든 어린이 책은 나쁜 행동의 씨앗을 품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뽀인트이기도 하고. 


<클로디아의 비밀>을 너무나 좋아해서 여러번 대출해서 읽는 초등 4학년 에이미 앤은 학교의 이런 도서 금지 결정에 반발한다. 하지만 워낙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라 처음엔 조심스럽게, 그리고 차츰 용감하게 자신만의 그리고 친구들과 힘을 합쳐 학교 결정에 맞선다. 그 과정 중에 오해와 갈등 그리고 납득이 가능한 타협을 이룬다. 어린이 책의 판타지 같이 과한 일탈과 어른/어린이 적대감만 그려대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따지고 보면 가출해서 박물관에서 숨어 지내는 클로디아의 이야기야말로 위험천만하다) 사실 주인공 에이미 앤은 집에서 자신의 공간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라 클로디아 이야기에 더 몰입하고 있었다. 


어린이책을 읽으면서 보통은 엄마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이번 책은 나도 모르게 어린이 주인공과 그 친구들에게 (어쩌면 과하게) 감정이입을 하고 말았다. 그런 '위험한 책'을 읽고 성장한 어른들이 허술하긴해도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는 이야기라 좋았다. 조금 용기를 내서 나도 이 책에서 소개된 위험한 책들을 좀 읽으려고 한다. (그중 다수가 번역되었는데 이 책 안의 제목이 번역서의 제목과 다른 경우가 많다. 정확한 출판사/역자 이름과 함께 따로 목록을 만들어 주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가 바로 어제 그 결정이 번복되었다"(하지만 아직 수십 권의 책은 금서 목록에 올라있다)는 우리나라 80년대 민주항쟁 이야기부터. 김현숙 작가의 이 책은 폭력과 선정성 (특히 공권력인 경찰을 때리는 장면, 고문 취조하는 장면, 한컷 지나가는 에로 영화 장면 등)의 묘사 때문에 청소년 대상 금서 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금서 지정에 목소리를 높인 주지사는 책을 읽지 않고 리뷰만을 근거로 결정한 것 같다고.


Florida Ben & Jerry's digs DeSantis with 'Free Scoop and Banned Book Day' | Fox Business 


위 링크의 뉴스를 읽으면 '위험한 도서관'의 에이미 앤과 그 친구들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위험한 책'들이 얼마나 익숙한 표지들인지 놀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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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4-13 2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로디아의 비밀 ㅎㅎ 전 그렇게 재미있진 않았는데 아이는 좋아했었어요 :) 우리나라 80년대 민주항쟁 이야기는 뭘지 궁금하네요.

단발머리 2023-04-13 22:10   좋아요 2 | URL
클로디아의 비밀 아시는 분 ㅋㅋㅋㅋㅋ 전 오늘 처음 만났어요.

잠자냥 2023-04-13 22:43   좋아요 2 | URL
단발 님 저도 있어요. 전 좋아하는 책이라는 ㅋㅋㅋㅋㅋ (지금 보니 제가 클로디아의 비밀 첫번째 마니아네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4-13 22:46   좋아요 3 | URL
마니아 1위시라고요? 아, 유부만두님 & 잠자냥님 픽이라니… 오늘밤에 신세계 열리는 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04-14 06:40   좋아요 2 | URL
클로디아의 비밀, 저도 아이 때문에 알게 되서 읽었어요. 전반부 보다는 후반에 클로디아가 박물관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단발님/ 어린이 책의 클래식 오브 클래식입니다. 추천. ^^

건수하 2023-04-14 08:34   좋아요 1 | URL
언젠가 박물관에 이 책 들고 가고 싶어요 ^^

단발머리 2023-04-13 2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금 바로 찾아봤더니 <비밀 독서 동아리> 근처 도서관에 있는데 대출중이네요. 일단 예약을 걸어두었습니다.
위험한 책들 읽기 프로젝트, 너무 멋있어요!!

유부만두 2023-04-14 06:42   좋아요 1 | URL
어제 읽었어요. 작화나 이야기 전개가 좀 투박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네요. 단발님 읽으신 담에 어땠는지 알려주세요.

잠자냥 2023-04-13 2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클로디아의 비밀 저 엄청 좋아해요! ㅋㅋㅋㅋ 우리 집에 있습니다! 조카에게도 안 주는 내 책 ㅋㅋㅋㅋ

건수하 2023-04-13 22:49   좋아요 2 | URL
오 잠자냥님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어릴 때 봤으면 더 좋아했을 것 같아요 ㅋㅋ 저는 그… 목욕하는 장면이 좀 싫었어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3-04-14 06:44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의 리뷰 읽은 기억나요. 책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해서 조카에게 안 주는 책! ㅎㅎㅎ

수하님/ 저도 그 목욕 장면 싫었어요. 아무리 옛날 배경인 이야기지만 애들이 그렇게 지내는게 ...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 이제 기묘한 이야기를 듣는 청자는 오치카의 사촌 동생 도미지로다. 세 가지 이야기가 실린 이번 책을 읽으면서 자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올랐다. 화재를 막는 북과 수호신 이야기에는 일본 특유의 정서가 보였다. 당고 노점상의 비참한 어머니와 네 남매 이야기는 어떤가. 더해서 아랑의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간절한 염원은 현실을 바꿀 수 있지만 진실을 덮거나 뒤집는 건 말 몇 마디이다. 


어둡고 비밀스러운 이야기, 마음 속에 무겁게 담아두었던 여러 이야기를 심리 상담사 처럼 들어주면 그 청자에게 '업'이 쌓인다는 악몽 혹은 경고로 이번 책은 마무리된다. 듣고 '버린다'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타인의 경험과 고뇌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이 책도 마찬가지니 쉽게 훌렁 읽고 박한 별점을 주지 말아라, 일까?


표지의 긴 목의 귀신은 분하고 원통한 혼령이다. 귀신은 눈에 흰자가 많고 검은자는 작게 금처럼 나있다고 한다. 더불어 냉기를 뿜으며 천장에 매달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당신을 내려다 볼 것이다. (안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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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발표된 도리스 레싱의 첫 소설. 

제목이 주는 느낌과는 너무나 다른, 레싱 소설의 불편함이 가득한 소설이다. 노래하는 풀잎 같은 건 없다. 그저 무더운 남 아프리카 농장의 뜨거운 햇빛, 가뭄, 파리떼, 그리고 다른 사람, 다른 인종, 다른 삶, 다른 선택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만 가득하다. 


메리는 어린 시절 농장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화, 질병으로 사망한 언니 오빠에게서 차례로 벗어난 메리는 나름의 독립을 이룬다. 도시에서 비서로 일하며 독신자 기숙사에서 소박하게 생활한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이 나이(서른)에 맞지않게 철없이 소녀처럼 산다는 평을 엿듣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충격을 받은 메리는 쫓기듯 농장을 (힘겹게, 무능하게) 운영하는 리처드와 결혼해 도시를 떠난다. 잊었던 과거의 가난과 척박한 삶, 흑인 노동자들과의 공생에 치가 떨리는 메리. 이 삶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메리는 백인 이웃의 도움과 친절도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고 남편과의 사이에도 벽을 쌓는다. 그 벽 안에서 메리는 천천히 부서지고 망가져 버린다. 잠깐씩 농장일이나 집안일을 제대로 해내려 하지만 금세 손을 놓아버린다. 도시의 삶으로 돌아가려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이미 변한 자신의 상황에 좌절할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물 흘리는 기혼 여성들이 많으리라)


소설 초반에 이미 메리는 살해 당했고 그 범인은 바로 몇년간 하인으로 일한 흑인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사건은 흔한 마님-돌쇠 공식과는 차이가 있다. 처음부터 농장에서 메리가 필요 이상으로, 악에 받쳐 내뱉는 흑인에 대한 혐오와 몰이해는 점점 수위와 긴장을 높이다가 결국 그 혐오의 칼은 자신을 베어버린다.  


왜 메리는 이렇게 망가졌을까. 소설 말미에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며 냉정하게 평한다. (작가가 따로 이렇게 '교훈' 요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걸) 메리는 목마르게 인생의 구원을 기다렸지만 구원 따위는 오지 않았다. 메리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도 수행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메리는 처음부터 가난한 여성이었다. 꼴난 백인 타이틀로 흑인을 몰아세워봤자 이 세상에선 별 수가 없었다. 


아주 불편하고 무섭고 갑갑한 독서 경험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지 못했다. 여러 인물에 증오와 연민을 느끼면서 이야기의 힘에, 점점 나빠지는 인물들의 상황에 (졸라의 소설만큼이나 잔인하다) 덩달아 내몰리듯 읽었다. 찬물을 많이 마시면서 읽었다. 폭풍우 밤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도 계속 목이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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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08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도리스 레싱 작가의 책들
이 제법 있는데 역시나 읽지
않고 새 책 나온 게 없다 두리
번거리고 있습니다.

요즘 슬럼프인가 봅니다.
책도 다 귀찮고 설라무네.

불편한 독서라... 궁금하긴 하네요.

유부만두 2023-04-08 10:55   좋아요 2 | URL
19호실로 가다, 와 겹치는 부분도 있고요, 불편하고 무섭지만 덮을 수가 없었어요.

레삭매냐님의 독서 슬럼프 중에 만나기엔 좀 위험한 책 아닐까 싶어요. 여러 의미로요.
그래도 전 이번 책으로 레싱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Falstaff 2023-04-08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싱을 집어든 순간, 독자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고, 영문학자 동무님이 얘기했었는데, 아, 씨. 정말 그렇더라고요.

유부만두 2023-04-08 17:10   좋아요 2 | URL
동감입니다. 읽는 내내 어둡고 불쾌한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또 조금은, 아니 꽤 좋았... 아, 나에게 이런 이상 심리가 있다니? 하는 순간들도 있었고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해요. 전 레싱을 더 읽으려고 합니다.

psyche 2023-04-08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한데 선뜻 손을 못 대겠어.

유부만두 2023-04-08 17:12   좋아요 1 | URL
엄청 우울하고 비참한 소설인데 또 ‘재미‘가 있어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그런가요?;;;) 첫 소설이라 투박함이 있는데 힘있는 이야기에요.

책읽는나무 2023-04-08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레싱 작가의 소설은 좀 그런 것 같아요.
뭔가 내 치부가 까발려진 듯한 느낌이랄까?
<19호실로 가다> 읽고, 한참 멍~ 했더랬죠.
그래도 읽고 싶다! 그래놓구선 멈춤??!!!!ㅋㅋㅋ

유부만두 2023-04-10 09:33   좋아요 1 | URL
읽고 싶다! 하는 책이 워낙 많아서요. 나무님 맘 너무 잘 알아요.
 

2020년 코로나로 봉쇄되기 전 여름부터 그해 늦가을 까지 빌리 서머스의 이야기. 나쁜놈만 죽이는 청부 살인업자, 최고의 저격수는 안/덜 나쁜 놈일까, 그는 살아남을까. 그의 마지막 한 건은 성공할까.


책장은 거침 없이 넘어가지만 주인공 빌리나 그 주위의 인물, 행동들이 너무 허술해 보여서 2권이 다 하기 전에, 1권 중반부터 그가 잡혀서 죽을까봐 겁이 났다. 작업 성공 100퍼인 킬러가 이리 다정하고 오지랍이라니. 그의 이동, 변장은 주변 인물들이 지적할 만큼 엉성하다. 그래도 누가 뭐랄쏘냐. 대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인데. 작가 스티븐 킹은 무료한 코로나 봉쇄기간에 (책 말미에 2020년 7월까지 썼다고 나옴) 자기 마음대로 킬러와 보통 사람, 독자와 작가, 악인과 선인을 가지고 어깨 힘 빼고 '놀았다'. 그의 작업실 한 켠에 블루마블처럼 빌리 서머스 보드게임/디오라마가 놓인 것을 상상해 본다. 책 곳곳에 오버룩 호텔의 유령 이야기, 움직이던 동물 모양 나무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흥미로웠다. 책 읽는 걸 숨기는 킬러는 에밀 졸라를 즐겨 읽고 이언 매큐언을 좋아한다. 이것도 좋았지. 하지만 구원의 글쓰기, 희망의 소녀, 발견되는 가능성 등의 모티브는 흔해서 싫지만 또 안심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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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8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0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지옥의 2박3일 수사 기록. 

삼십대의 사설 탐정이 도시와 교외, 산속 골짜기를 누비고 수사 방향과 용의자를 조금씩 틀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지능과 강철 같은 체력을 뽐낸다. 나쁜 남자의 순애보 끝에는 아주 아주 더 나쁜 여자가 있다는 공식. 그나저나 이 시대엔 음주운전법이 없었나봄. 사람들은 계속 마시고 계속 담배를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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