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이지만 전에 읽었던 하루키 소설의 많은 소재들이 재등장한다.


열일곱살, 순수한 첫사랑, 가슴, 갑작스런 이별, 어긋나는 정상적 어른의 관계, 꿈, 이세계, 그림자, 나의 반쪽, 망령 혹은 유령, 빙의, 구덩이, 굴, 숲속, 갑부집 아들, 혼자 밥하고 청소하기, 무조건 믿기, 중요한 건 내 마음, 난 여기 또 저기, 아니 여기 말고 저기, 그 소녀, 도서관, 책, 시간, 커피, 재즈, 겨울, 달 밝은 밤, 날 가져요, 합체, 이제 다시 시작이다.

첨 보는 대파 두 줄기는 그나마 신선하고 서글펐다.

명절 어르신과의 만남이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독자를 못 믿는지 자꾸 반복하고 다짐하고, 채근하고 설명하고. 설정에 공들이는 건 알겠는데 예전처럼 휙 넘어가질 못하고 자꾸 주춤거려서 맥이 빠졌다. 같이 벼랑에서 뛸 준비 되있었다고! 그 검은 강에 다이빙 하려던 찰라였어!

어색한 2인칭 '너'를 향한 1부 끝에서 그래, 이제 본격적으로 가보자! 했더만 (제목에서 카프카와 진격의 거인을 상상했던 나의 잘못) 다시 슬로 모드로 돌아왔다. 길고긴 시골에서의 2부의 마무리, 꿈결의 강물 속을 걷는 노년 작가의 진심을 엿보았다. 짠해서 욕을 삼킨다. 3부에서 나약함은 벗고 병렬 혹은 치환의 절정으로 돌진하나 싶었는데….아 … 이렇게 풀어가나요? 소년이여, 초심이여.

늘어지고 반복되는 설정과 순한 맛의 (등장인물들에겐 고통이었겠지만 하루키와 레이먼드 카버의 독자에겐 익숙한) 위기들은 750쪽 책을 여러번 덮고 완독을 할지 말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름과 작가 경력이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주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라면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나눠 읽길 권한다. 편지봉투 받고 세 쪽 동안 뜸들이다 봉투 여는 주인공이라 빠른 전개와 흐름을 바라는 사람은 복장이 터져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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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02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대파 두 줄기! 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0-02 20:57   좋아요 1 | URL
읽으셨죠? 그 장면의 대파 두 줄기에 눈물 두 줄기 흘리셨죠?!

잠자냥 2023-10-02 21:04   좋아요 1 | URL
아니요, 읽지는 않았는데 ㅋㅋㅋㅋ 왠지 찰진 비유라서 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은 안 읽을 것 같아요… ㅎㅎ

유부만두 2023-10-02 21:06   좋아요 2 | URL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대파 두 줄기 나와요;;; 슬픈 장면인데.
자냥님께 이 책 권했다간 대파로 맞을거 같아서 참아요.

단발머리 2023-10-02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출간되고 그 다음날 구매했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는 이유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 있었네요.
저는 그 기대감(하루키니까....)에 속아 한 장, 또 한 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우아! 4분의 1 읽었네요. 대파 나올때까지 전진!!

유부만두 2023-10-03 15:17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시면서 과거의 하루키 책을 떠올리는 것도 괜찮은 독법일듯 합니다. 다만 제 성미가 급해서... 대파는 2부 중간쯤 나와요.

얄라알라 2023-10-02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횽....제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은지 사진이 천천히 로딩 되길래......˝대파 두 줄기˝가 꼭 ˝얇게 뺀 가래떡˝ 같이 생겼구나...했네요. 대파 두 줄기와 슬픔의 정서....책 읽어보라고 낚으시는 유부만두님^^ You Win이십니다^^ 느린 호흡 익숙하진 않지만, 읽고 싶어졌어요

유부만두 2023-10-03 15:18   좋아요 1 | URL
얇게 뺀 가래떡, 맞아요. 그런 모양이네요. ^^ 대파 두 줄기 말고도 (그 생뚱맞음 외에도) 여러 소재들을 찾아서 연결해 보셔도 즐거우실 거에요. ^^

공쟝쟝 2023-10-05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세계관… 촘촘한… 워쩔…. 제겐 매력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우치다 센세이가 하루키 극찬하기에 한권 쯤 읽을까 싶었는 데 놀숲(읽음)말고 한권만 츄천해주신다면 바로 이 책 일까요?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0-05 20:05   좋아요 0 | URL
저 같으면 놀숲 말고는 <기사단장 죽이기>. 2권이라 사이즈도 적당합니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0-05 20:07   좋아요 1 | URL
퇴근하시고 북플타임이십니까? (저는 농땡이 타임입미다!!) 자꾸 제가 단 댓글에 단발머리님 댓글이 달리고 있어서 알림이 울립니다! 기사단장 죽이기 알겠습니다!!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저는 놀숲읽고 울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0-05 20:08   좋아요 0 | URL
실례지만……. 어느 지점에서? @@

공쟝쟝 2023-10-05 20:09   좋아요 1 | URL
둘만의 장례식으로 애도하는 지점에서…(그런데 곧바로 둘이잤나? 기억이 안나네요ㅋㅋㅋ 울다 멈췄나 그랬음 ㅋㅋㅋ)

잠자냥 2023-10-05 22:20   좋아요 1 | URL
쟝 남자구나…? 하루키를 읽고 울다니…!

공쟝쟝 2023-10-05 23:33   좋아요 0 | URL
이 댓글 때문에 먼지더미에서 하루키 책을 찾았습니다. 564페이지. “그날밤 우리는 네 번 했다.”
내 눈물이 왜 나왔다 들어갔는지 깨달은 지점.

잠자냥 2023-10-05 23:35   좋아요 1 | URL
아……. 완전 이해했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물선 2023-10-05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완전 맘에 쏙 들어요.

유부만두 2023-10-06 09:01   좋아요 0 | URL
보물선님 마음 알거 같아요. 하... 좀 그랬어요.
 

<스틸 앨리스>의 저자이기도 한 뇌과학자 리사 제노바의 <기억의 뇌과학>을 읽었다. 전에 읽은 뇌과학 책들이 뇌의 작동 방식을 중심으로 그 무한한 가능성을 찬미했다면 이번 책은 제목에서 보듯이 '기억력'이라는 하나의 측면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이면의 '망각'을 새롭게 바라보라 청한다. 


잘 잊는 편이다. 나이 들수록 그렇고 (위험한 수준이라는 냉장고에 핸드폰 두기를 한 적도 있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시간 알람이나 일정 알림을 자주 이용한다. 그리고 노환이신 부모님들을 뵈면서 기억력과 치매에 대한 걱정이 늘어간다. 


기억은 망각이 적절하게 일어나야 의미 있다는 저자의 설명에 납득되었다. 자잘하게 많은 외부 정보를 마냥 쌓아만 둘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지금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데 에너지를 많이 써야하고 힘겨워진다. 지워버리고 싶은 나쁜 기억도 제대로 잊어야 하는 것이다. 


치매는 뇌에 쌓이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 찌꺼기 탓이라는 이론이 있다고 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제거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숙면을 취하는 것이다. 밤에 제대로 잘 자고 건강한 식습관, 운동, 비타민 D 섭취를 하라고 권한다. 기억력은 신체의 노화와 마찬가지로 결국 잃을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집중력과 반복을 통한 장기 기억은 그 양이 무한대로 늘어갈 수 있다고 한다. 집중을 할 땐 온 몸의 신경을 이용하는 방법을 권한다. 보고 읽고 듣고 말해보고 스스로 질문도 하면서 반복. 기억해 낼 수 없는 '사소한' 것들에 너무 짜증을 내는 대신 간단히 검색해서 스트레스를 낮추라고. 검색 엔진을 사용한다고 해서 내 기억력이 더 빠르게 퇴화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때 접한 집안 어르신의 치매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다. 저자의 경험처럼 가까운 가족을 몰라보고 화를 내는 그 분에게 가족들은 그저 따뜻한 손길과 보살핌을 주어야 한다고. 기억은 못하더라도 그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좌절하고 만다. 마음이 부서지는 것이다. 


<기억의 뇌과학>은 나에게 욕심이나 요행을 바라지 말라고, 조급하거나 겁을 먹지도 말라고. 조금만 느긋하게 노화나 망각을 받아들이고 내일 보다 젊은 오늘, 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라고 말해준다. 공쟝쟝님의 말씀대로 ('공자님의 말씀'으로 읽힌다면, 당신은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얼렁 낮잠/밤잠을 챙기시길.) 따뜻한 위로의 뇌과학 책이다. 그래 괜찮다. 한대접 부쳐놓았던 녹두전을 빼놓고 시댁에 가서 차례상에 못올렸지만, 아이들이 오늘 아점으로 먹고 있으니 나는 아직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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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9-30 1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만 궁금증과 두려움이 빛의 속도로 밀려오네요 ㅋㅋㅋㅋㅋㅋ 전 일평생 수면에 진심인 사람인지라 그 점은 반갑고요. 녹두전은….
맛있겠네요! 🤤🤤🤤

유부만두 2023-10-01 08:09   좋아요 0 | URL
바로 그럴 때 이 책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건망증과 치매에 대한 설명을 공포를 빼고 해주거든요. 하지만 마냥 희망에 찬 이야기는 아니에요. 인간은 모두 늙고 죽을테니까요. 그런데 전 오늘도 새벽에 깨서 이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 녹두전은 억울하게도 맛있습니다.

moonnight 2023-09-30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려워요 치매ㅠㅠ 저도 읽고 위로받아야겠어요ㅠㅠ 유부만두님 표 녹두전 맛있겠어요@_@;;;

유부만두 2023-10-01 08:10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차근차근 다정하지만 너무 무르지 않게 뇌와 기억력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추천요. 그리고 녹두전 .... 맛있어요. 한끼에 다 끝나버린 나의 노동이죠....
 

연휴를 한글날까지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 세상엔 멋진 팔자를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아줌마도 있고. 어쩌겠나.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크흐, 멋지네. 나 지금 시댁에서 귀환해서 맥주 마시는 중) 그래, 남편님아, 너를 택하고 나는 지금 이 운명으로 들어섰어. 그리고 요즘엔 남편 만큼 정보라님도 안톤 허님도 좋아졌어. 그래서 이 책.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 활동 시작은 아홉 살 때였다고 했다. 그 아홉살 꼬마의 심정을 내가 너무나 잘 알겠기에 눈물이 났다. 그 아이는 (그리고 미래의 독자는) 지금 여기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세계로 도망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러시아 문학은 ...

"들여다보면 볼수록 러시아와 폴란드 작가들 중에는 광기와 천재적 창조력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사람 혹은 그 양쪽 모두를 당당하고 편안하게 손에 쥐고 세상에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거침없는 상상과 표현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나도 저렇게 창의적으로 제정신 아니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어린 시절과 겹치는 정 작가의 경험과, 불타는 러시아 소설을 향한 애정을 안다. 그래서 명절에 시댁에서 몰래 몰래 읽던 이 글에 (시댁에 갈 때 읽을 책 두 권 챙겨가는 아줌마 여기 있습니다) 토란 만큼 굵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명절이란 그간 밀린 친척들의 소식과 정치 뉴우스를 듣는 시간.  


"산다는 것의 무서움을 알려고 하지 않는 놈들 중에는 사기꾼 부류가 있으며 세상은 넓고 사기꾼은 아주 많다." 


그렇다. 그런 놈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정보라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려는 강한 열망의 작가들과 그 이야기를 읽고자 주먹 불끈 쥔 독자들이 있다는 걸 상기시킨다. 투쟁. 그렇다. 나는 이번 명절도 살아냈다. 집에 왔다. 설날 까지 또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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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9-29 2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명절도 살아냈다.... ㅠㅠㅠㅠ

..........에 제가 기립박수 칩니다. 수고많으셨어요, 유부만두님!
이제 집으로 돌아오셨다니 너무 반갑고 다행입니다. 푸욱 쉬시구요!!
내일은 매일글쓰기8일차임을 알려드립니다^^

유부만두 2023-09-30 08:18   좋아요 1 | URL
시댁에 가는 건 숙제 같아서 매년 무게가 더해집니다. 나중에 제 아이들도 이러겠죠. 지금도 자기들 방에서 나오질 않아요. ㅋ
자, 오늘은 8일차 입니다. 벌써 일주일을 채웠네요. 많은 분들은 이미 매일 리뷰나 책 이야기를 쓰고 계십니다만 전 컴 앞에 앉으려면 각오가!!!! 으얏!! 기합이!!! 필요합니다!
(더하기 카페인도요) 단발님도 명절 잘 지내고 계시나요?

단발머리 2023-10-01 21:53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친정 식구들이랑 식사해서요 ㅋㅋㅋㅋㅋㅋ지금 재활용 마치고 막 앉았어요.
일단 오늘의 일정은 끝났고요. 내일은 다시 놀리, 놀리, 놀놀놀놀놀놀놀놀놀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9-29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아 첫째줄 저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진짜 연휴 시작!

유부만두 2023-09-30 08:18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명절 전에 시험 문제 던지고 연휴에 들어가신 자냥선생님!

moonnight 2023-09-30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고많으셨습니다. 유부만두님^^ 시댁에서 (무사히) 귀환해서 마시는 맥주의 시원함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유부만두 2023-10-01 08: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남은 연휴 책이랑 영화를 즐겨보렵니다! 문님께서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주 그래픽 노블 <하비비>를 도서관에서 만나 돌아오는 길은 힘들었다. 동네 슈퍼에서 1+1 세일 중이던 파스타 소스를 둘 샀고 2+1 탄산수도 여섯 개나 챙겼기 때문이다. 카톡으로 들어온 '상호대차 신청 도서가 준비되었습니다' 메세지는 내가 건널목을 건너기 직전에 받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만났을 땐, 내일 올걸 그랬지. 이렇게 두껍고 무거운 책일줄은 몰랐지. 그런데 알았어야지. 그 유명한 <담요>의 작가의 책인데. 



<담요>가 기독교 안에서 살아내며 성장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면 <하비비>는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과 (이방인이) 경전과 계급, 온갖 굴레를 살아내면서 물/생명/글/잉크를, 결국 이야기와 구원을 추구하는 이야기다. ... 라고 쓰고보니 과연 그랬나? 싶다. 



초반부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페르세폴리스>가 연상되는 여성 잔혹사로 시작한다. 주인공 여성 도돌라는 노예가 되어 끌려다니다 그곳에서 버려진 어린 흑인 아이(잠)을 데리고 사막으로 도망친다. 도돌리가 겨우 열두 살, 잠(후에 하비비)은 세 살 때의 일이다. 표지의 두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이 두사람은 모자로 보기에도, 연인이 되기에도 매우 불안한 관계다. (성경과의 의도적인 병렬구조는 마리아-예수 모자관계를 연상시킨다. 피에타의 두 인물이 얼마나 애절한지 떠올려본다) 도돌라는 하비비를 돌보며 살아가다 납치되어 할렘에 갇히고 강제로 임신 출산을 겪는다. 하지만 어린 도돌라와 성인 도돌라가 함께 교차하며 등장해서 함/잠/하비비 등 여러 이름의 아기/소년/남자 등으로 복잡하며 불리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갸가 갸라는 건 조금 더 읽어야 나온다. (이거 스포일러가 되어버렸군요)


두 사람의 기구한 운명과 인연 보다도 이들을 둘러싼 환경/문화/적들을 풀어내고 그려내는 방식이 독특하다. 이들은 코란 경전의 글자들로 하나씩, 그림 같이 보이는 그 문자들의 틀로 보호도 받고 그 안에 갇히기도 한다. 성경과 코란의 차이점을 짚어낼 때마다 세계는 멀티버스로 갈라지는 것도 같다. 노아의 아내는 방주에 탔는가. 노아의 아들 함은 왜 저주를 받았는가 (받은 건 맞대?), 아브라함이 바치려던 '아들'은 이스마엘인가 이삭인가, 그리고 ... 무엇보다 시초에 있었던 말씀 혹은 잉크 한 방울. 


마지막 장면도 그닥 희망적이지 않고 묵직하게 의무감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살자. 살아보자. 날자, 날자꾸나.


대상화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았던 도돌라는 결국 하비비가 필요했으니 아들이 있어야 하는 어머니/여성인 건가. 명절에 제사 모실 아들이 필요한건가. 이런 식으로 여성은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는구나.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미국인 백인 남성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불편하다. 여성과 타문화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을 벗으려 애쓰고 있는데 과연 그 작업에 성공했는가.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폭력의 기운에 그는 얼마만큼 협조하고 있는가. 여성은 끝까지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슬람 문화에 대한 '너그러운' 저자의 시선은 오리엔탈리즘과 어떻게 다른데? 


복잡한 내 마음을 흔들 정도로 그림은 역동적이다. 등장 인물들이 도망가고 쫓고, 추락하고 폭발하는 장면 장면들은 흑백으로 정지된 컷안의 그림이 아니라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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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가 출판하려 그리 애쓰던 원고가 너무나 역사 기록처럼 보였고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를 실존 인물로 그려냈다면 그 원고는 장성주 번역가의 설명하는 '대체역사'물이다. 오늘 새벽에 읽은 켄 리우의 단편 <북두>는 선조가 의주까지 버리고 몽진을 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황제의 명(혹은 승인)을 받고 조선으로 진군하는 이여송과 활동대장 담원사의 이야기, 대체역사이다.


이여송은 명과 조선 국경에 머무르고 있다. 한차례 일본군에 당한터라 명의 원군이 필요하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명에게 득인지 실인지 멀리 떨어진 북경에서 소년 황제는 신중하게 판단한다. 일본군과 조선의 입장을 제대로 계산하는 명석한 담원사는 잠복해서 평양까지 진격하는 작전을 편다. 한편 조선인 출신 이여송은 전라에 있는 이순신과 협공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짧은 이야기라 더 소개하기 조심스럽다. 


역사 이야기는 결말을 안다. 많은 독자는 이순신을 당연히 알고 임진왜란과 이여송도 안다. 그 역사에 얼마나 가상의 창작 요소가 매끄럽게 들어가 있는지가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에서처럼 역사 속 며칠 몇달을 작가가 종이와 펜/컴퓨터 모니터와 자판으로 살아내고 상상해서 우리에게 선사한다. 잠깐, 그 사이에 번역가가 있다. 이번 경우에는 장성주 선생. 원작 영문에서 다음 문장을 만들었다.


"적호(담원사의 애마)가 내뿜은 숨결이 달빛 속에서 섬뜩한 흰빛을 띠고 두 사람의 주위를 감쌌다." (북두, 291) 


임진왜란과 21세기 한국 독자 사이에 긴 시간, 중국에서 미국으로 어린 시절 이민 간 작가 켄 리우, 그의 영어 원고, 장성주 역자의 작업 등이 다 얇디 얇은 막으로 변해버렸다. 난 지금 적호의 숨결과 담원사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그가 현대 한국말을 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번역의 힘. 


작가 켄 리우는 이 가상 역사에서 실제 역사를 참조는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옛 중국 명과 지금(2010년 출간 당시 한참 쭉 쭉 뻗어나가는)의 중국을 칭송하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 <민들레 왕조 연대기>는 초한지의 sf적 재해석인데 (한신이 여성으로 나온다니 궁금하다) 이 단편 <북두>는 아마 그 연장선으로 쓴 소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한지 소재와 삼국지 소재가 많이 보인다. 명의 평화를 사랑하는 황제, 시기를 앞선 과학영재 담원사, 용맹한 조선 출신 명 장군이 나온다. 하지만 이여송은 조선 출신 가문일 뿐이지 그가 분한 마음에 조선어 욕설을 할 정도로 조선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다. 더해서 이순신 장군이 그에게 조선어 편지를 보냈을리가. 일기도 한자로 쓰신 분이. 켄 리우에게 조선어/한글은 한자와 격차를 둔 다른 전달 체계인 것이다. (야! 너!) 다시 역사와 나 사이의 거리가 벌어진다. 켄 리우가 대국 중국 출신 대국 미국인 작가인 자기 존재를 드러내버렸다. 우리말 번역가 측에서도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께서 전라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보급선과 수송선을 모조리 격침하시지 않았다면, 풍신수길은 이미 한 달 전에 압록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나흘 전에 이순신 장군을 뵈었는데, 장군께 안부 인사를 전하시더군요." (북두, 286)


명의 군인이 자국의 장군에게 보고를 하며 타국의 장군을 이렇게 높이는 것은 바른 화법이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원군이랍시고 와서, 그것도 조상이 조선 사람이라는 인물이 열심히 싸우지도 않고 여러 잡음만 일으킨 인물에게 이순신을 낮추어 언급하기 싫었으리라. 독자인 내 마음도 그랬다. 그래서 영특한 담원사의 계책을 우리 번역문으로 읽으면서 자꾸만 나는 한산과 명량을 떠올렸고 장성주 역자의 문장에서 김훈을 보았다. 역시나 번역서는 번역서이고 번역가의 창작 활동 없이는 담원사의 "코드 네임 북두"도 제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역사를 너무 의식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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