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청춘 발라드 특집'을 해줬다. 방송을 처음부터 안봐서 청춘발라드라는 워딩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느껴지는 그대로, 시청자들이 청춘을 지나고 있었을 그 시대를 풍미했던 발라드를 부르고 듣는다는 컨셉이었을 것이다. 채널을 돌렸을 땐 윤상이 나오고 있었고, 이어서 김형석(의 노래들), 성시경, 김원준, 델리스파이스, 015B가 차례로 나왔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오랜만에 듣게 되어 무척 좋았고, 특히 015B의 노래는 진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듣고, 여전히 좋아하는 것들이 이렇게 '청춘 발라드'라는 이름으로 '그 때 그 노래'가 되어 '추억'해야히는 대상이 된 것에 대해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문득 6년쯤 전이 떠올랐다. 첫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지 2년쯤 됐을때였나. 회사가 4층에서 자리를 넓혀 같은 건물 11층으로 이사를 했고, 회사의 이전 기념 오픈하우스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우리 부서에 떨어졌었다. 나름 광고밥을 먹고 사는 업계였으니 평범하게 할 수는 없었고, 팀원들과 상의 끝에 70~80년대 추억의 학교를 컨셉으로 정했다. (말하고 나니 엄청 진부한데, 그 때만 해도 향수 마케팅이 스믈스믈 피어오르던 시기라 나름 신선했었다 ;; ㅠㅠ) 교복 대여업체에서 옛날 교복을 빌려 사장님을 비롯한 전 직원이 다 교복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했고, 인사동에 있는 추억을 파는 가게에서 책상과 각종 추억의 소품을 빌려와 회의실을 교실, 양호실, 과학실, 뭐 이런 컨셉으로 꾸미고, 추억의 게임이나 뽑기 같은 것도 준비했다. 흔들어먹을 수 있는 양철도시락도 만들어줬고 찍사들이 다니면서 오신 분들 사진도 찍어드렸었다. 컨셉을 정하니 준비는 수월했다. 


고백하건대, 그 때의 내가 기꺼이 그 컨셉에 즐거워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내 세대의 추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윗세대들의 것이었고, 우리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그들의 추억에 잠시 기댔을 뿐이다. '추억', '향수'라는 것은 실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실제로 구현이 되면 뭔가 유니크해보이는 묘한 지점에 속성으로 가 닿을 수 있게 해 준다. 아마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내밀한 지점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향수 앞에서, 추억 앞에서 그렇게 마음을 연다. 이때만 해도 내게 향수는 아직은 완벽히 타자화할 수 있는 것, 윗세대의 것이었기에 나는 그저 바라보며, 가끔 적절한 호응만 하면 될 뿐이었다. 못됐지만 이렇게 적절히 이용도 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갑자기 내 세대들이 벌써 향수라는 것의 주체가 되어버렸다. 세상은 내게 별로 그립지 않은 것들을 그리워하라고 등을 떠민다. 강남과 홍대에는 90년대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바가 생겨나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고, <건축학개론>을 보고 온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기억의 습작을 들어, 가끔 듣던 전람회 앨범을 듣는 일조차 민망하게 만든다. 급기야 최근에는 <응답하라 1997> 이라는 드라마에 나랑 같은 해에 수능을 본 애들이 나와서 한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는 H.O.T와 젝스키스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마구 주입한다. 아. 내 세대는 어느 새 향수를 강요당하는 세대가 되었버렸다.


내 세대가 이제 저 영악한 '향수'라는 녀석의 타겟이 됐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엄청난 짜증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우습고도 비장한 결심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그냥 적당히 추억하고 즐거워하면 되지, 라고 했지만, 적당히 추억하고 즐거워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벌써부터 추억 속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것도 누군가가 짜준 틀 안에서 향유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사본 적도 없던 다마고찌를, 잘 먹지도 않던 815 콜라와 축배 사이다를 당시에 내가 본 적이 있고 아직까지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땐 그랬지'라고 하며 반가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분명 <써니>가 유행했던 게 작년이었는데, 향수란 녀석은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1년 안에 10년도 넘는 세월을 거슬러올라왔냐'고 누군가에게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하책방의 O님과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이런 현상에 격한 짜증을 보이자, 그녀는 '향수', '추억'이라는 코드를 빌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컨텐츠는 사실 무척 쉬운 길을 가는 것이고, 본인은 그것을 매우 수준 낮은 컨텐츠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었다. 격하게 동의가 됐다. 향수라는 것, 그것도 한 세대가 공동으로 향유한 어떤 문화적 코드로서의 향수라는 것은 사람들의 내밀한 지점을 건드려 쉽게 흔들면서도, 공동의 경험을 무기로 단숨에 하나로 묶는다. 쉽게 만들어진 감동이고, 강렬하지만, 자꾸 반복하면 타성이 생기므로 더 강렬한 자극의 절대값을 유지하기 위해 메인 타겟 연령대를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내린다. 하여 내 세대는 이토록 빠르게 무방비상태로 향수 폭탄을 맞았으며 향후 5~10년 안에 현재 초중생들이 카카오톡으로 단체 채팅을 하고 마음 대신 애니팡으로 하트를 주고 받던 시대를 향수라는 이름으로 그리워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재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아마도 그 유치한 향수라는 녀석으로부터도 소외당한 세대가 되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 편이 어쩌면 차라리 나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향수라는 이름의 이상한 유행이 얼른 내 세대를 좀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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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12-10-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고 월요일 출근했더니, "자~ 이번 컨셉은 향수 마케팅입니다. 기획서 써 오세요~" 이러면 어쩔;;

웽스북스 2012-10-06 15:24   좋아요 0 | URL
으허허허 턴님 요즘 점점 잔인해지고 계심...ㅋㅋㅋㅋㅋ

Mephistopheles 2012-10-0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으로 모두다 우르르르 몰려가는 "추억팔이"는 더 이상 향수가 되지 못하겠죠.^^

웽스북스 2012-10-06 15:24   좋아요 0 | URL
그렇지만 거기에 우르르 몰려갔던 게 또 향수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ㅎㅎ

치니 2012-10-06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딱 한 번 본 '응답하라 1997'을 재미없어 했던 이유가 아마 이거였겠네요. ㅎㅎ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향수 마케팅 말고도 다른 덕목이 있어서 그런대로 좋았어요)
향수 마케팅에 솔깃한 적은 저 역시 한 번도 없는 듯.
뭐든 마케팅이 되면 재미없잖아요, 요즘 향수 말고 유행하는 힐링도 그렇고.

웽스북스 2012-10-06 15:26   좋아요 0 | URL
저도 타임라인이 떠들썩해서 한번 가서 본적이 있는데 20분 정도 본 걸로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뭔가 저랑은 겉도는 느낌. 나 학교 다닐 때 얘기 같지도 않던데...ㅎㅎㅎ

힐링도 이제 진짜 식상하죠 -_- 힐링은 셀프...ㅎㅎ

치니 2012-10-06 15:3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문제는 비 다양성인 거 같아요. 우리는 너무, 한 세대의 경험을 다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듯. 제 시대에 유행했다는 어떤 것들, 저는 처음 들어보는 것도 많고,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니까 추억도 당연히 다른데. 그땐 그랬지 정서 자체보다는 누구나 비슷한 걸 향유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그 태도가 문제!

응답하기싫어 2012-10-06 19: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100%동감!

웽스북스 2012-10-08 01:21   좋아요 0 | URL
치니 / 맞아요. ㅎ 그래서 결국 그 때 주류 문화를 향유했던 분들이 또 좋아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ㅎㅎㅎ

응답하기싫어 / 아, 대화명 ㅋㅋㅋㅋㅋ

2012-10-06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8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고 2012-10-07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향수를 강요당하는 세대......
정말 그렇네요ㅠ
그 어느 것에도 흥미 없어요.
2012나 응답했으면......ㅠ

2012-10-07 08:26   좋아요 0 | URL
훗. 진짜 2012에나 응답하면 좋겠네요.

웽스북스 2012-10-08 01:22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대답없는 2012 ㅠㅠ
아니다. 답이 안나오는 2012인가...

2012-10-0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완전 공감함. 근데 그러고 보니 '향수' 컨셉의 영화였던 <써니>와 <건축학 개론> 둘 다 몹시 촌스러웠어요. 그래서 둘 다 보고 좌절했던 영화.. <응답하라>는 아직 안 봤지만 그래도 기대를 품고 있는데, 얘도 좀 그럴까나요...

웽스북스 2012-10-08 01:24   좋아요 0 | URL
저는 <써니>는 봤고 (역시 남의 세대라고 편안하게..ㅋㅋ) <건축학개론>은 못봤는데 <써니>는 정말이지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ㅠㅠㅠ 단체로 본거라 어쩔 수 없이 봐서 크게 기대는 안해서 그나마 다행...

<응답하라>는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작품 자체는... 아다치 미츠루 떠오른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요. 하지만 전 도저히 볼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