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무르지 않듯



어제는 지난 번 페이퍼에 쓴 적이 있었던(엮인글) 학교 동문 독서모임의 엠티가 있었다. 처음에는 팬션도 빌리고 거창하게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점차 축소되어 결국은 H가 다니는 교회의 작은 방에서 모이게 됐다. 그래도 내 마음은 엠티였던지라 나름 씻을 거, 갈아입을 옷 다 챙겨갔는데, 각자의 사정으로 새벽에 해산을 하는 바람에 따로 챙겨간 쇼핑백은 열어보지도 못한 사건.

H는 돌봐주는 아이의 어머니가 얘를 데리고 여행을 함께 다녀오면, 비용은 본인이 다 대겠다고 하셔서 얼마 전 영국과 프랑스를 다녀왔는데 거기서 와인을 한 병 사왔다. 그래도 나름 공부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와인병을 보니 까막눈이 된 느낌. 나는 이 와인이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것 밖에 모르겠어, 라며 포기. 얼마 후 늦게 도착한 I도 와인병을 유심히 보더니 '아아아,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것 밖에 모르겠네' 흐흐흐 똑같다 똑같아, 그럼 어때 맛있으면 되지요 ^^ 살다살다보니 교회에서 음주를 다 해본다. ㅋㅋ 와인을 마시고 H가 와인과 함께 프랑스에서 사온 치즈도 맛본다. 으흑 좋아라! (I가 와인을 열다가 코르크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살짝 끝맛이 떨떠름하긴 했지만.

밤새 주로 하던 이야기는 H가 현재 처한 문제와, 그에 대한 우리의 조언이었다. 우리 학교는 특성상 목사님 자녀들이 좀 많은 편인데, 어제 모임의 6명 중에서도 3명이나 부모님이 목사님이었다. H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신데 요즘 H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설교가 많이 힘에 부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H역시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더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겠지. 문제는 그 교회의 장로들이 이런 것들을 문제삼으며, 아버지를 몰아내려 하는 상황이란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실은, 그 전에 계시던 전도사님과 그 장로님 중 한 명의 부인인 권사님이 조금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H의 아버지가 그 전도사님을 조용히 나가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권사님께서 자신의 부정이 남편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배후에서 남편을 조종하여 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과정에서 너무 지치셔서 조용히 덮고 나오시려고 하고 있는 상태고, H는 이런 아버지께 약간 실망한 상태.

그리고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목사님이 성직자이긴 하지만, 역시 직업이고 노동인데, 온가족의 희생만이 요구되는 현실이 과연 옳은가. 온가족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월급 120만원 받으면서 몇십년째 월급을 올려달라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고, 거기에 권력의 맛을 아는 장로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목사님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조종하려고 하는 성직자들의 슬픈 사정들은 이미 넘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는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목사님께서도 몇년간 페이를 받지 못하시고, 본인이 시간강사로 강의를 나가시거나 하시면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셨는데도 이런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런 것들에 너무 무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S선배는 아버지가 35년동안 동일한 월급을 받아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본인은 목사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 한번도 말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교회의 규모가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도, 목사님의 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세속적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퇴직하신 후에 '새로 오시는 목사님은 좀 더 페이를 올려줬으면 한다' 라고 건의를 했고, 그 말을 들은 교회 사람들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H가 아버지를 향해 하고 있는 생각들은 모두 옳았다. 날카로운 비판과 정의에 대한 외침. 현재 상황은 누가 봐도 부당하고, 고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되돌리기엔 너무 지칠 것 같은 상황. 나는 H에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너가 아버지에게, 지금은 날카로운 비판자나 정의를 외치는 동료가 아니라, 가족이 돼드릴 때인 것 같아. 너가 생각하는 문제들을 아버지께서도 모르고 계신 게 아니고, 어쩌면 너보다 더 잘 알고, 더 많이 고민하고 계실테니까,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그냥 믿고, 지지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응원하겠다고 말씀드렸으면 좋겠어.

온당하지 못한 상황을 덮는 것이 옳지 못함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 상황이 아버지가 아닌 H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아마 H가 아버지에게 조언했듯, H에게 조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H가 아닌, H의 아버지의 일이다. 목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15년간 지칠만큼 지지쳤을 H의 아버지에게는 무조건 지지해주고, 믿어주고, 힘이 되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결론을 내리시든간에. 이런 내가 너무 무르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가족의 역할은 그런 거라 믿는다.

우리는 현재 교회의 모습들에 속상해하며,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함께 고민을 했으나, 역시나 대안을 찾는 것도, 롤모델을 찾는 것도, 결론을 내리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H는 나중에 우리가 함께 교회를 만들어도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주변에도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 나는 교회를 만들 깜냥은 되지 않지만, 같은 고민을 가진 분들을 연결해주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가져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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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0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교회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제 가족이 다니는 교회는 지금은 조용하지만 불과 2006년도에는 엄청 시끄러웠어요. 장로의 담합과 이로 인한 분열...이 상황을 보고 예수님 혹은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

웽스북스 2008-03-09 02:09   좋아요 0 | URL
제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도 그래서 분열되서 나왔었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어제는 이런 말도 했었어요.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나치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삶의 의미를 본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거기에서 얻는 부수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고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권력이라고, 그런 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지, 이해하기가 참 어려워요. 사람이란 존재는 참.

미미달 2008-03-0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후에서 했던 방송 보고 편견이 생긴 건 사실이예요..

웽스북스 2008-03-09 22:31   좋아요 0 | URL
그 방송이 어떤 방송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긴 하겠죠, 그 사실은 분명 고쳐져야 하는 기독교의 아픈 모습이긴 하다만 일부의 사실이 전체인양 인식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긴 하죠.

털짱 2008-03-0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가 삶이군요! 종교도 삶의 연속성 속의 한 부분이고...
웬디양님의 페이퍼가 일요일 저녁의 저를 좀 경건하게 합니다.

웽스북스 2008-03-09 22:33   좋아요 0 | URL
예, 좋은 삶을 살아간다는 건
살아도 살아도 참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오늘밤 저로 인해 경건한 마음이 드셨다니,
어째 좀 감동입니다 ^^

마노아 2008-03-10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에 우리 교회에서 목사안수식이 있었어요. 두명의 여자 목사님이 탄생한 것인데, 안수 받으면서 두분이 목메어 울더라구요. 아마도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고단한 시간이 떠오른 것일 테지요. 두분 모두 예순을 훌쩍 넘겼거든요. 그런데 목사가 되고나서도 울어야 할 일은 더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꼿꼿이 걸어가길 바라지만요. 참 어려운 길이에요.

웽스북스 2008-03-10 22:04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 교회는 규모가 꽤 큰가봐요
두 분은 신대원을 늦게 들어가신 분들이었나봐요
마노아님도 괜히 찡해서 같이 우셨죠?
흥 난 다 알아요

(사실 내가 잘하는 짓)

마노아 2008-03-10 23:37   좋아요 0 | URL
울 교회 대따 작아요^^ㅎㅎㅎ 성전 규모만 대략 30평 정도요? ^^;;;;
음, 난 울 엄마 안수식 때도 울었던가? 이런 생각하며 담담했어요.
어쩐지 배신 때린 것 같군요^^;;;

웽스북스 2008-03-11 00:36   좋아요 0 | URL
어 마노아님, 배신이에요 ㅎㅎ
그런데 우리교회와 규모면에서 매우 흡사하네요
어머니가 목사님이신거에요?

마노아 2008-03-11 12:49   좋아요 0 | URL
넹. 올해로 십년 되셨어요. 나도 그땐 이십 대 꽃띠였는데....-_-;;;;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아니 엄밀히는 직장인들이 이번 2월 29일을 매우 미워했단다. 이유인 즉, 3월 1일 휴일을 2월 29일 때문에 하루 밀려 뺏기게 됐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위 얘기를 전하자, 나는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좀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니, 나름 과학적인 이유(?)로 4년에 1번 있는 날인데, 우리들의 휴일 기껏 하루 때문에 환영도 못받고, 불청객 취급을 당하면서 서럽게 존재하는 날이 됐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2월 29일이 있어서 3월 1일은 뺏겼지만, 분명 하루 더 미뤄져서 못쉴 걸 쉬게 될 날이 있을 걸요?"

그러자 그 사람은, 우와, 세상 너처럼 편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 첨 봤다며 -_- 감탄인지 조롱인지 좀 구분하기 어려운 말투의 이야기를 했다. 아마 후자이겠지?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나? 3월 1일 이후 날짜가 하루씩 밀렸다면, 월요일인 휴일은, 원래 일요일이었다는 말 아닌가. 나는 오히려 그가 당장 눈앞의 하나는 알고, 먼 둘은 생각지 못한 사람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달력을 확인했다.

5월 5일   (어린이날) 월요일
5월 12일 (석가탄신일) 월요일

2월 29일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가정의달, 행복하고 푸릇푸릇한 5월의 휴일을 이틀이나 빼앗길 뻔했다. 꽃을 샘내는 3월의 휴일 하루보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5월의 휴일 이틀이 더 좋지 아니한가! (휴일 차별인가? ㅋㅋ) 휴일이 많이 사라진 이 마당에, 3월 1일 하루가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5월의 휴일을 이틀이나 선물해준 2월 29일에게 고마워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지. 그러니, 2월 29일 그대 너무 서러워마시길! 나는 그대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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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3-0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한 살 먹는건 하루 늦췄잖아요. -_-

웽스북스 2008-03-01 22:4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소중한 의미를 또 아프님이 발견해주시는군요 ^^

털짱 2008-03-0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웬디님의 글도 아프락사스님의 댓글도 저를 웃게 만드네요.^0^
갑자기 매순간이 의미있게 다가오는데요?

웽스북스 2008-03-01 22:41   좋아요 0 | URL
털짱님이 웃으신 지금 이순간이, 저에겐 참 의미있는데요? ^^
좋아서 마음이 막 근질근질합니다 ㅎㅎ

순오기 2008-03-0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를 발견하고 새기며 사는 오늘이, 또 의미있는 날이 되기를...

웽스북스 2008-03-02 00:47   좋아요 0 | URL
후후, 네네, 그렇게 오늘과 오늘이 쌓여,
벌써 3월이에요 순오기님...^^

바람돌이 2008-03-02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그런것까지 찾아내시다니... 대단하셔요.
더불어 염장터지는 소식을 전하죠. 5월 3일부터 5월 12일까지 저 중간 방학입니다. 학교장 재량으로 올해 처음 생겼다죠? 물론 겨울방학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요. ㅎㅎ

웽스북스 2008-03-02 00:48   좋아요 0 | URL
와.......
못들은걸로 해둘게요 ㅋㅋ

농담이구요
좋은 계획이라도 세워보세요 바람돌이님
세상에나, 방학도 부러운데 중간방학이라니,
수능이라도 다시 봐야 하는 걸까요? 흑

엄마말 들었으면 자다가 떡은 안생겨도
중간방학은 생겼을텐데 ㅎㅎ

비로그인 2008-03-02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집에서 있는 저는 오히려 휴일이 덜 반가운데요.

웽스북스 2008-03-02 21:44   좋아요 0 | URL
저두 그랬던 것 같아요
어쩐지 나만 쉬는 유니크함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ㅎㅎ

L.SHIN 2008-03-02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상황을 두고 부정적인 면만 보는 사람과 그 안에서 긍정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있죠.
웬디님같이 긍정적인 사람이 좋아요.^^
기왕이면 그 긍정 바이러스를 주변 사람들도 깨우칠 수 있게 많이 퍼트려주세요.

웽스북스 2008-03-02 21:45   좋아요 0 | URL
흐흐흣 고마워요 에쓰님
근데 저 긍정 바이러스 별루 없어요 ㅋㅋ
그래도 저 좋아해주실거죠? 흐흐흐흐 ^-^

L.SHIN 2008-03-03 19:49   좋아요 0 | URL
흐흐흐흐흐,그럼요~^^
대신 강정은 준비해 두셔야 합니다. 꿀 잔뜩 묻힌 걸로. ㅡ_ㅡ (훗)

웽스북스 2008-03-03 23:32   좋아요 0 | URL
긍정대신 강정이라 ㅎㅎㅎ
제가 만들지는 못하는데, 오리온 강정은 발암물질 나왔고, 아 어쩌지?
 



어제는 콜택시를 타고 퇴근을 했는데 실은 내가 콜택시를 탈 때마다 나는 콜택시의 세계가 너무 궁금했었다. 어제 기사님은 친절하시고,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길래, 나는 그간 궁금했던 콜택시의 세계에 대해 좀 여쭤봤다. 나름 이것도 알고보니 재밌고, 공정을 넘어 다소 냉정한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콜택시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은 총 세명이라고 한다. 한 명은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전담이고, 한 명은 콜을 보내는 것 전담,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연결 사항을 SMS 로 전송하는 일 전담이다. 바쁜 시간이 되면 콜 연결 쪽이 말을 제일 빨리 하는 직원으로 교체된다고 한다. 아무리 빨리 말을 해도 다 알아듣는 기사님들도 신기하다. 내가 어떻게 저 말을 다 알아들으시냐고 했더니, 저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말을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역시 밥벌이는 참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손님 한명이 콜을 신청하면 그 콜은 최대 네번까지 방송을 해주는데, 그 네번 할 때마다 뒤에는 A1, A2, A3, A4 라는 말이 붙는다. 이건 현재 콜을 받을 수 있는 반경 거리를 이야기하고, 숫자가 커질 때마다 반경 거리가 늘어난다. 그리고 신기한 건, 콜센터에는 전광판이 있어서 그 차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가 다 나오기 때문에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경 1km 안에 있는 택시만 콜 응대가 가능한 A1의 경우는 A2 위치에 있는 사람이 콜에 응하면, 전광판상으로 다 표시가 되기 때문에 경고를 먹게 된다는 것이다. 경고자는 다음날 아침 7시 (아가씨 교대시간이란다) 까지는 콜에 응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만약 그 상태에서 다시 콜에 응하게 되면 24시간동안 정지라고 한다. 그리고 본인이 가겠다고 한 콜을 거부하게 될 경우에는 최소 3일동안 콜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이용하는 해피콜은 시각장애인 봉사를 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다소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장애인용 콜을 부르는 기호가 따로 있다. F1, F2 로 시작하는 말들은 장애인 콜이라는 뜻이다. 장애인 콜에 응한 기사에게는 K2라고 응대하는데, 이는 감사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왜일까?) 그리고 콜 정지를 당한 기사님께서 장애인 콜에 응할 경우에는 정지가 풀리게 된다.

내가 전화를 걸면 내가 있는 곳과 행선지를 자동으로 기억해 주길래 시스템화가 꽤 잘돼있구나,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전광판으로 자동차의 위치까지 나오는 시스템일 줄은 몰랐다. 연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날 보며 기사님께서는 기뻐하며 더 많은 것을 알려주려 하신다. 아저씨의 직업세계에 대한 관심이 즐거웠나보다. 역시 뭐든 더 배우려면 리액션이 좋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나같은 길치에 거리개념 없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반경 몇킬로인지 계산하기가 쉽지 않은데, 경고를 주는 제도는 좀 냉정하다는 생각도 든다. 콜을 받고 못받고는 당장의 밥줄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을텐데 말이다. 물론 내 콜을 가끔 선릉이나 삼성에서 잡아 10분 이상 기다리게 하는 아저씨들 때문에 늘 기다려야한다면 그 역시 난감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공정해보이기도 하지만, 가끔 '고객'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서비스들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기계로 만들 때에야 차가운 것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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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죠 2008-02-20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찍일찍 들어가세요! 이토록 예쁜 아가씨가 위험하게스리- 떼콩!(요즘 돌쟁이 조카를 겁줄 때 쓰는 말)

웽스북스 2008-02-20 14:08   좋아요 0 | URL
으흣 콜택시는 콜 기록이 다 남아있어서요, 안전해요 ^_^

turnleft 2008-02-20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보기 드문 르포 페이퍼군요 +_+

웽스북스 2008-02-20 14:09   좋아요 0 | URL
아이쿠, 이런 페이퍼에 르포라니요
보기드문 찬사로군요 +_+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8-02-20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재밌군요. 난 택시타면 말없이 가만있는 타입인데. 말걸어도 귀찮아요. -_-

웽스북스 2008-02-20 14:10   좋아요 0 | URL
택시에선 책도 못보고, 잠도 못자고
거의 공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인데, 아저씨랑 가끔 얘기하는 것두 나름 재밌어요

도넛공주 2008-02-2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린콜을 애용한답니다.친절하지요.해피콜도 시스템이 철저하네요.

웽스북스 2008-02-20 14:11   좋아요 0 | URL
네 무엇보다 철저한 미터베이스에 콜비가 없어서 좋아요 ^_^

Mephistopheles 2008-02-2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건 물어보고 마는 유교수같은 웬디양님 같으니라구..^^

웽스북스 2008-02-20 14:11   좋아요 0 | URL
제가 배고픈건 참아도 궁금한건 못참거든요 ㅋㅋ

이매지 2008-02-2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은 친절콜이예요 ㅋㅋ
참고로 콜은 받으면 건당 몇 백원씩 수수료로 받아요 ㅎ
콜받아서 갔는데 기본요금이면 대략 낭패 -_-

웽스북스 2008-02-20 14:12   좋아요 0 | URL
그래서 콜아저씨들은 장기를 주로 뛰시나봐요
적절히 택시아저씨가 좋아하는 위치, 정도를 가늠하는 게 참 힘들긴 해요

그래도 우리집 가는 구간은 양호한 편이긴 해요 ^^

무스탕 2008-02-20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콜택시를 이용해본적이 없네요.
어느 분야든 관심을 갖고 궁금한것 파헤쳐 알아내고야 마느 웬디양님.. :)

웽스북스 2008-02-20 14:2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일이랑 공부만 빼놓고는 호기심이 많아서 문제에요 ㅋㅋ

L.SHIN 2008-02-2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택시에 대한 정보 재밌게 봤습니다.^^ 체계적이군요.
저는 택시를 타면 가끔 앞자리에 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으레 아저씨들이 말 거는데..
솔직히 귀찮지만 대체로 받아주죠. 하지만 술을 많이 먹은 상태라(말투는 전혀 안 그런척)
그 다음날 생각해봐도 대화 내용은 싹- 기억상실입니다. =_=

웽스북스 2008-02-20 14:30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앞자리에는 한번도 안타봤는데 (혼자탈때는)
그래도 뒷자리가 편하더라구요

대화내용이야 뭐 대부분 내리는 순간 기억 안나긴 하죠 ㅋㅋ

순오기 2008-02-20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콜택시가 이렇게 철저히 관리되는구나! 또 하나 배웠네요~ㅋㅋ 감사^^

깐따삐야 2008-02-21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택시 타면 기사 아저씨랑 노가리 까는 거 좋아해요. (왠지 이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아요? ㅋㅋ) 하여간 뉴스보다 더 재밌어요. 어떨 땐.

보석 2008-02-2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정보입니다. 정말 현장르포라는 느낌?^^
 

남대문이 불타 사라진 일에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이렇게 다함께 격분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남대문이 소중한 문화재인 건 맞지만, 남대문이 국보 1호라 해서 우리 나라의 수많은 다른 문화재들보다 탁월하게 훌륭하거나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운하 건설을 가장 큰 공약으로 내세운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다. 남대문만큼이나 소중한, 수없이 많은 문화재들을 '고의로'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를 너무 당연한 듯 한 사람을 지지했던 국민들이니, 그리고 그 옆에 어떻게든 땅한뙈기 장만해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즐비한 곳이니, 사람들이 남대문 앞에서 이렇게까지 황망해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나보다. 문화재는 괜찮고, 남대문은 안된다는 사고는 어디서 왔는지, 대운하 착공 뒤 사라지게 될 문화재 하나 하나에 이렇게 가슴 아픈 마음을 과연 가져줄 것인지 의문이다. 순위 매기기에 의한 상징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대운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경이지만,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크게 대두됐던 이유도 환경이지만, 자신이 살지 않을, 미래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니, 그래서 크게 개의치 않고 추진하려 하던 사람들이니 이제부터라도 부디 과거(문화재)가 좀 발목을 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남대문이 보기 좋게, 아름다운 형태로 복원되는 것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다. 그래봐야 이미 원형과 같을 수는 없으니까.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게 복원한다 하더라도 이미 불타버린 남대문이 이전의 가치와 동일한 가치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들을 계기로, 대운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힘이 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던 그의 추진력에 제동이 걸리길 바랄 따름이다. 운하에 쓸려 없어질 문화재들도 남대문처럼 소중한 문화재라는 걸 이제라도 깨달은 사람들이 좀 더 많이 대운하 사업에 반대해 주길, 그래서 대운하 사업이 부디 중단되길 바란다. 적어도 내게, 아니 앞으로의 우리 모두에게,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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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1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 역시 운하를 반대하는 이유는 첫째가 환경이며 둘째가 경제성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 광분하는 이유는 일종의 어설픈 노스텔지어가 아닐까 라고도 생각도 들어요. 어쩌면 죄진 놈이 성낸다..일지도 모르겠고요..^^

웽스북스 2008-02-13 00: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러니 서로 니탓 네탓 하고 있는 거겠죠? 도무지 내탓은 별로 없더라는

해적오리 2008-02-1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동감....

웽스북스 2008-02-13 00:08   좋아요 0 | URL
역시 감은 겨울에 먹는 감이 맛있다구요? (민망해서 이런 딴청을, 앗 딴청님!) ㅋㅋ

L.SHIN 2008-02-1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힘 있고 멋진 말이로고~

웽스북스 2008-02-13 00:08   좋아요 0 | URL
흐흐 에쓰님 저 방금 스트레칭 했어요 ^_^

L.SHIN 2008-02-13 11:01   좋아요 0 | URL
오오~ 앞으로 1주일만 계속 해 보는겁니다.
그럼 그 후부터는 스트레칭도 습관이 되고, 숙면도 할 수 있고~^^

웽스북스 2008-02-13 16:34   좋아요 0 | URL
흐흐 3주 플랜 따라서 해보려구요 ^_^
오늘 아침에 벌떡! 일어났어요 약발 너무 잘받는다니까요 ㅋㅋ

바람돌이 2008-02-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솔직히 남대문의 붕괴에 이렇게까지 여론이 들끓을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어요. 어쩌면 tv의 힘일지도 모르겠네요. 대운하가 건설되면 소리소문없이 문화재들이 파괴되고 사라지겠지만 숭례문의 붕괴는 실시간으로 스펙트컬한 영상으로 생중계되었잖아요. 그 힘도 크겠죠. 님의 말대로 남대문의 붕괴가 대운하에 제동을 걸수 있다면 진정 남대문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할 수도 있겠죠.

웽스북스 2008-02-13 00:09   좋아요 0 | URL
영상의 힘도 역시 무시하지는 못하겠네요- 저는 그 시간에 TV를 안보고 있어서, 미처 그 부분은 생각지 못했어요-

깐따삐야 2008-02-1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잘 썼다. 정말! 추천 팍팍 날려야 할 페이퍼에요!

웽스북스 2008-02-13 00:12   좋아요 0 | URL
그럼 곶감 2개 주세요 ^_^
(추천 하나보다 곶감이 더 좋은 단순 웬디)

깐따삐야 2008-02-13 00:21   좋아요 0 | URL
2개로는 한참 부족하죠. 근데 곶감은 너무 먹으면 변비에 걸린다는.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2-13 00:24   좋아요 0 | URL
으흡, 정말요? -_- ㅋㅋ
난 2개만 먹을래요

다락방 2008-02-1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웬디양님.
국민들이 '대운하'때문에 그분을 대통령으로 뽑은것도 아니구요, '문화재를 고의로 없애겠다'는 말 때문에 뽑은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전히 대운하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크구요.
남대문이 다른 문화재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국민들이 격분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문화재보다 더 자주 보이고, 더 친근한 것이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중계가 됐구요. 이 나라의 대통령을 어떻게 뽑아놨든, 그 장면을 보고 서운하고 속상한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지는데요, 저는.


웽스북스 2008-02-13 00:17   좋아요 0 | URL
그 말 때문에 뽑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제 1 공약인 사람을, 게다가 추진력까지 넘쳐나서 그걸 할 게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사람을 뽑았다는 말이었어요- 남대문이 다른 문화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남대문만큼 소중하다는 이야기였구요. 그것두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여러개잖아요. 서운하고 속상해하는 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구, 그것 만큼 다른 문화재들을 향한 속상한 마음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속상해하고 광분해할 다른 에너지들을, 현재 남아있으나 고의로 수장될 수도 있는 문화재들에게 쏟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구요. ^_^ 남대문은 이미 사라진 거구,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은 지켜야겠지요. 지금보니 글을 너무 띄엄띄엄 써서 곡해의 소지들이 있네요- 회사에서 몰래 써서 그래요 ㅋㅋ

대운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너무 무력해요. 그분의 추진력 앞에서요. 이러다 정말 운하를 팔 것 같아서 너무너무 걱정되거든요 ;;

순오기 2008-02-1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숭례문의 전사가 대운하 발목이라도 꽉 잡고 늘어졌으면... 간절히 바랍니다!ㅠㅠ

웽스북스 2008-02-13 16:32   좋아요 0 | URL
발못 도끼로 찍고 피 철철 흘리면서 대운하 팔 것 같아 걱정이지요 ㅜㅜ

라주미힌 2008-02-13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수강산이 국보1호죠... ㅎㅎ

웽스북스 2008-02-13 16:32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 말씀이 정답입니다. 역시 한마디로 축약하는 저 능력에 저는 오늘도 감탄이에요 ^-^

보석 2008-02-1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을 수많은 문화재에 애도.

웽스북스 2008-02-13 16:34   좋아요 0 | URL
묵념......
 

 
   
  재혼 가정 자녀의 성씨 변경은 과거에 비하면 대단한 진보이긴 하지만 바뀐 성이 아이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진짜 바꿔야 할 것은 한 가정 안에 다른 성씨의 공존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의 편견이다 (중략)

성을 바꾸어야만 아이가 보호될 만큼 이혼에 대한 편견이 깊다는 얘기다. 부모 이혼으로 인한 아이의 고통은 사회의 편견 때문에 배가된다. 한 가정 안에 두 가지 성이 공존하는 문화라면 굳이 아이 성을 바꿀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까 궁여지책으로 아이 성씨 개명을 하는 것이다.

시사인 22호 성씨개명 권하는 사회 (남재일) 中
 
   


나를 유독 예뻐하던 이모의 결혼식날 나는 이모의 결혼식장에 갈 수 없었다. 결혼식장에 갈 수 없는 이모의 딸 Y가 우리 집에 와 있었고, 나는 그날 Y를 보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얼굴을 기억 못하는 나이지만, 예전 이모의 남편 얼굴은 가끔 기억이 난다. 호리호리한 큰 키에, 허여멀건허니 잘생긴 얼굴, 그리고 갈색빛 나던 곱슬머리. 당시 나는 어렸기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둘은 식을 올리지 않고 살림을 차렸고 Y를 낳았고, 몇 년 정도를 같이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모의 남편은 이모를 떠났다. 어린 내게 그 이유는 누구도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기억하기에도, 어쩐지 그 사람은 이모에게 정착할 것 같은 느낌을 주지는 않았었다.

몇년 후, 이모는 그 사람과는 정 반대의, 지금 이모부를 만났다. 살집 있는 몸에 키도 크지 않고, 얼굴은 동글동글하고 까맣고, 인상은 살짝 사나운! Y는 언젠가 언니, 우리 아빠는 싸이를 좀 닮은 것 같아,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만 큭 하고 웃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 말이다.

이모부는 결혼한 적이 없었고, 이모는 결혼 경험이 있기에 사실 그것만 해도 이모는 시댁에서 꽤 많이 흉을 잡혔을 게다. 그래서 이모는 보수적인 시어머니께 아이가 있다는 말은 하지 못했었나보다. 그래서 Y는 제 엄마의 결혼식장에 갈 수 없었다.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Y가 어려도, 눈치가 빤한 아이인데 저를 보며 얘가 참 불쌍하다고 안타까워하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었다.

이모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아이가 있다고 말을 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었다. 시댁에는 아이가 없다고 이야기를 했으며, 사람들에게는 재혼 사실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Y에게는 원래 Y의 성인 윤,이 아닌 새 이모부의 성인 강,을 붙여줬다. Y가 이모부를 친아빠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뒤에는 아마 타자의 시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받는 편견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게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려보지 못한 나는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그 시선들이 이모에게 주었을 상처보다는 Y가 살면서 받아온 상처가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이모는 Y가 어려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애들이 제일 먼저 알아듣는 말이 자기의 이름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몰랐을 리 없다. 아마 Y는 꽤 어린 나이부터 철이 들어 있었을 거다. 굳이 따져 묻지 않았던 걸 보면.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오는 상처와 영향들은 분명 있었을게다. Y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부터 이모는 6년간 매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갔다. 사정을 설명하고, 그러니 학교에서 얘를 강Y로 불러달라고. 아이들에게도 강Y로 얘기해 달라고 매년 그렇게 찾아가 이야기했다. 엄마와 나는 이 끝이 보이는 거짓말을 나중에 도무지 이모가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는지, 옆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모는 정말 간절히 호주제가 폐지되기를 기다렸고, Y가 중학교에 갈 때까지도 폐지되지 않자 결국에는 이모도 Y도 거의 눈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이 됐다. 서로가 알고 있지만, 서로 굳이 묻지 않는 지경. Y는 자기 친구들이 다 하는 버디버디도 자신의 이름으로 할 수가 없었고, 싸이월드 미니홈피도 자기 이름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본인의 이름으로 된 미니홈피를 갖게 되면 분명 강Y로 알고 있는 친구들이 이유를 물을 테니까. 그럼 자신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난감했을테니까. 그냥 이모의 이름으로 미니홈피를 만들고, 이모의 이름으로 버디버디를 했다.

이런 상황 하나 하나에 맞닥뜨릴 때마다, 윤Y로 알고 있는 중학교 친구들과 강Y로 알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난감함을 겪을 때마다, Y의 마음이 어땠을지. 가끔 Y가 지나치게 눈치를 본다던가, 지나치게 어른들을 떠본다던가, 혹은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행동할 때, 나는 그간 Y가 받아왔을 상처가 Y에게 미쳤을 영향들이 보이는 것만 같아 그만 속상해지고 만다. 그렇지만 나도 어른들의 뜻을 따라, Y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한 언니. 언젠가 Y와 TV를 보려 리모콘을 돌리다가 나온, '엄마 나는 왜 아빠와 성이 달라?' 라는 특집드라마에 당황해 슬그머니 채널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제 아빠의 존재를 궁금해할 게 분명할 Y에게, 그래도 너가 이렇게 유독 예쁘고, 하얗고, 다리가 긴 건 너희 친아빠를 닮았기 때문이란다, 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던. (그랬다간 이모한테 맞을지도 -_0)

이제 호주제가 폐지되고, 드디어 Y는 공식적으로 강,이라는 성을 갖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부터 Y가 느껴왔을 속상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못했을 거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인성에 깊숙히 미쳤을지도 모르는 영향들이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성이 바뀌었을 뿐이다. 어쩌면 다시 윤Y로 알고 있는 중학교 친구들에게 강Y임을 알리는 과정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모의 속을 참 많이도 썩인 Y로 인해 이모 가정은 작년 한 해 참 다사다난했었다. Y가 그렇게 된 데에, 가정의 영향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조심스레 말하자면, 아마도 있을 것이다. 부모가 이혼한 아이들은 엇나간다,라는 사회적 편견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회적 편견이 아이의 엇나감에 선행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모가 Y의 문제 앞에 좀 더 열려 있었다면, 사회적 편견 앞에 좀 더 당당했다면, Y가 받았을 상처를 좀 더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팔이 안으로 굽는 이모 조카니까, 아예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우리 이모도 이런 맘고생 몸고생 해가며 그렇게 매년 애 학교 쫓아다니며 힘들어하지 않았을텐데, 우리 Y도 좀 더 예쁘고 당당하게 자랐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먼저 든다. 성을 바꿔주는 사회가 아니라, 성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위에 살짝 옮겨둔 시사인의 칼럼이 마음에 착 감겨왔다. 역시 사람은 자신과 연관된 문제 앞에 더 마음을 쏟을 수 밖에 없나보다.

다행히 다사다난했던 이모 가족 일은 잘 마무리가 된 올 해, 명절에 이모 가족을 만나 함께 훌라를 하며 (-_- 어무이) 나는 앞으로는 이모의 가족이 그저 무탈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제 제 자리를 찾아가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Y의 마음이 부디 올곧게 자라나길, 발레도 하고 싶고, 스튜어디스도 하고 싶고, 간호사도 하고 싶다는 Y가 당분간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꿈꾸길, 정말 간절히 바랐다. (어째 마무리가 너무 마무리스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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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1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이들의 그늘은 100%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차 저차 어찌되었던 어른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아이들의 그늘을 만들어주곤 해요. 암튼 Y의 앞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밝은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웽스북스 2008-02-12 00:21   좋아요 0 | URL
100%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향이 매우 큰 건 사실이죠- 그치만 우리 이모니까 저는 표현이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는 거죠-

Mephistopheles 2008-02-12 00:41   좋아요 0 | URL
마자요..저도 어쩌면 가까운 피붙이가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속으로만 되뇌일지도 모를 일이죠.^^ (근데 왠지 막 퍼부을 것 같은 예감도 들어요..^^)

웽스북스 2008-02-12 01:04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 역할은 저보다는 저희 엄마가 하셨겠죠 전 그럴 군번이 아니어서 ;; ㅎㅎ

푸하 2008-02-1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엄마가 와서 '오늘은 내가 안놀아줘도 되니?' 라고 물어보고 가신다. 어제 3시간 밖에 못잔 피곤한 나는 '응 오늘은 괜찮아, 다음에 내가 또 조를게', 라고 답했다. 엄마는 '열심히 졸라야 놀아줄 거야' 라며 거만한 표정으로 가신다."(웬디양님이 쓴, 긴 연휴만큼 길어진 수다에서...)
문득 이구절이 생각났어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태도가 불가능할 바에야 소심하기보단 거만한게 훨씬 좋다.라구요.
생각지 못하고 주목하지 못한 면들을 보게 해준 값진 글이에요.

웽스북스 2008-02-12 01:15   좋아요 0 | URL
흐흐 그런데 푸하님, 실은 우리 엄마도 소심해요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안놀아줘도 되니?'라는 대사가 가능하지요 ^_^

제 글이 또 다른 제 글을 연상시키고, 이런 거 재밌네요
글이라기엔 좀 부끄럽지만 말이죠 ㅎㅎ

암튼 그렇게 말씀이라도 해 주셔서 참 고마워요 푸하님 ^^

보석 2008-02-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주제가 폐지되어 다행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웽스북스 2008-02-12 01:17   좋아요 0 | URL
네, 실은 저도 단순한 사람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저 칼럼을 읽는 순간 이모네 가족이 생각나서 그냥 끄적여봤답니다

2008-02-12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2-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같아요.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었어요.

웽스북스 2008-02-12 20:34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이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었다니, 전 그냥 고맙네요 ^_^

고현정 2009-07-1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일같지 않아요,,저 역시 같은 일로 깊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으니까요,,그 본인한텐 아무 잘못도없이 시시때때로 겪어나가야할 보이지않는 무거운 족쇄가 될수도 있죠,나와 너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에서 때론 편리를 위해 때론 진실을 위해 때론 상황에 따라 바꾸고 바뀌어야할 순서들에 가장 중요한것 가장 위하는 그 실체가 되는 건 무엇일까요,그 조카분한테 늘 꼬리표처럼 아마 주홍글씨가 되어 맴맴따라 다니는 이름과 성과 아버지와 부모의 과거들까지 혼자 떠안고 살어야하는데,조금이라도 상처덜받고 살아갈수 있는 사회가 올까요,,
그냥 외국나가 살지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