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추운 아침이고 눈이 내릴 것만 같은데 돌이켜 보면 어제는 수능 날이었다.

 


 

1교시 국어 영역

 

국어는 독서/문학/선택의 삼색 구성인데, 통상적으로 선택은 선지식으로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고 문학은 난도가 낮다 보니, 승패는 독서에서 갈리는 편이다. 하여 일단 선택과 문학을 먼저 최대한 빠른 속도로 풀어제낀 다음 확보된 시간을 모두 독서에 투여하는 것이 안전한 전략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 남의 말이면 덮어놓고 안 듣고 보는 syo는 그냥 1번부터 순서대로 풀기 때문에 독서-문학-선택 순서대로 문제를 맞닥뜨렸는데, 독서가 너무 쉬운 거라, , 이거 이럼 나가린데- 하며 고개를 갸웃대다가 문학에서 깜놀. 뭐지 이 근본 없는 참신함은? 선지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거칠게 흔들리는 샤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미래의 N+1수생 syo…… 그러면서 이제 막 지난 1년간의 주마등이 깜빡깜빡 켜지-는 순간 무조건 망하는데-려는 찰나에 문득, , 이럼 문학부터 풀었던 애들은 아주 나락 갔겠는데? 싶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아이들의 눈빛에는 이미 영혼이 간데없고, 츄리링 입고 쓰레빠 신은 사시나무 서른 개쯤이 바삭바삭 쓸리는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떨리는 꼴을 보니, , 저거 벌써 만났네, 주마등. 늦었네, 못 살려. 그 순간 모든 떨림이 썰물처럼 사라지며 갑자기 든든해지는 내 마음. 와하하 망해도 혼자 망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1만큼 망할 때 10만큼 망해 주는 이들이 있는 이 훈훈한 세상.

 

그렇게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문학에서 실컷 얻어터졌지만.

 

 

 

2교시 수학 영역

 

킬러 문항이라는 것은 15(가끔 14), 22, 30번 자리에 놓이는 미친 세 문항을 말하는 것으로 일단 개 어렵고, 특히 2230은 주관식이며 보통 세 자리 숫자가 답이 되도록 문제가 구성되다 보니 찍기가 거진 불가능하여 정답률이 10%대를 스치는 편. 최상위권을 변별하기 위해 존재했던 놈들인데, 이 녀석들이 정부의 집중포화를 맞은 자리에 어떤 새로운 전기의자가 설치되어 수험생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게 될 것인지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상위권 학생들의 입장에서 정부놈들이 어쩌자고 이러냐 싶었던 부분은, 아니 킬러를 빼면 잘하는 놈과 겁나 잘하는 놈과 거어어어어어업나 잘하는 놈들은 어떻게 구별할 거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평가원 시험에서 수학 만점자가 2500명 가까이 나오는 바람에(2500명이면 상위권 애들이 노리는 메디컬 학과들의 전체 인원수에 육박한다), 이건 뭐 수학 하나 실수로 틀리면 즉시 의치한약수 포기하라는 뜻이냐는 볼멘소리도 소소하게 있었던지라 평가원 요놈시끼들 과연 수능은 어떻게 내나 보자 했던 것. 뚜껑을 열어보니 22(인강 사이트 채점서비스 기준 정답률 5%), 미적분 30(정답률 8%)은 사실상 킬러.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나는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수학이 나를 포기한 바로 그런 남자 syo에게, 어차피 킬러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있으면 운 좋게 풀 수도 있으니 진정으로 이 문제를 풀고 싶다면 수학 공부할 시간에 봉사 및 기부활동을 통해 선업을 쌓는 쪽이 더 효율적인 뭐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22는 보자마자 우회하여 23으로 진출했고, 아예 29가 마지막 문제인 것처럼 30을 회피하여 1로 돌아가 재점검에 들어갔다. 그 덕에 운 좋게 계산 실수 두 개를 발견하여 이득을 좀 봤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 22, 30과 면담 시간을 가져 보았지만 역시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합의 하에 시원한 마음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별이 후회로 남듯 이번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던 것. 22번은 나의 수험번호를 그럴싸하게 조합하여 125라고 찍었고, 30번은 샤머니즘을 동원, 마지막 문제니까 기분 좋게 100이라고 찍었는데, 집에 와서 정답표를 확인하니 22번 정답은 483이라 당연하게도 나가리였으나 하필 30번 정답이 125…….

 

 

 

2.5교시 점심 영역

 

수능을 이틀 앞둔 1114일 저녁, syo는 대패삼겹살 쌈장 볶음밥을 만들고 있었고, 등 뒤로는 우리의 친구 이 디아블로2를 하고 있었다. 통통통 마늘을 썰다가 갑자기 빡이 쳐서, 마늘을 썰던 칼을 의 목덜미에 들이대며, 야이 개만도 못하고 개보다 더한 개같은 놈아(멍뭉 미안), 더하기 빼기 하나 없이 말 그대로 내일 모레가 수능인데 나는 니 처먹을 저녁을 만들고 있고 ㅅㅂ 니는 디아블로를 쳐잡고 앉았네? 수험생 둔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이것은 가정폭력이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5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라고 협박한 결과, 수능 날 먹을 점심거리를 이 책임지기로 했다. 15일 퇴근길에 그는 빠리바게트를 들러서 샌드위치 한 팩과 단팥빵 하나, 그리고 비싸지만 두세 모금밖에 되지 않는 오렌지 주스 하나를 사서 돌아왔다. 그래서 16일 점심, syo는 보온도시락을 꺼내는 아이들 사이에서 비니루봉지를 꺼냈으며, 숟가락질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해야 했지만 부끄러울지언정(놈과 관련된 모든 상황은 syo에게 항상 부끄러움이다) 불행하지는 않았다. 좋겠다, 니들은 엄마 아빠 있어서 도시락 싸온 모양이네,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지만 씩씩한 syo! 이러면서 제로 콜라 뚜껑을 힘차게 돌렸는데 콜라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시원한 축포를 터뜨려 주었다. 제길, 나는 엄마도 아빠도 조심성도 없었다……. 아참, 휴지도 없었다. 저기 죄송한데 티슈 몇 장만……. 내 앞에 앉은 친구는 엄마도 아빠도 측은지심도 있었다. 파이팅, 너어는 너는 잘될 거야, 잘되라.

 

 

 

 

3교시 영어 영역

 

내 옆에 앉아서 다리 떨던 너어는 너는 잘되지 마라. 진짜. 너 때문에 듣기 하나 말리는 바람에 겁나서 듣기 시간에 듣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시간 부족으로 문제 하나 통으로 날렸다 이 시끼야.

 

 


4교시 탐구 영역

 

여기가 문제 지점이었다. 앞 과목들이야 다들 망한 분위기라 나 정도 망한 건 티도 안 나는데, 여기서 나 혼자 망하는 바람에 인생 행로가 애매해진 것. 언제나 syo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물리의 역습. 초반에 계산 두 개 연속으로 말리는 바람에 멘붕 세게 왔고, 결국 들뜬 마음이 이어지는 지구과학에까지 영향을 미쳐 안 해도 될 실수를 낳은 모양. 물리 이 새끼 난 그동안 니가 너무 효자여서 양자로 삼고 재산까지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넌 그렇게 항시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더니 등 뒤로는 이렇게 칼을 갈고 있었구나, , 물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던가…….

 

 

 

5교시 귀가 및 휴식 영역

 

시험 보는 사이에 내린 비로 젖은 길을 한참 걸어 지하철을 잡아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두고 간 핸드폰에 사람들의 흔적이 잔뜩이었다. 외투 벗다가 전화 받고, 바지 지퍼 내리다가 톡 대답하고, 윗도리 벗었는데 또 전화받고, 실내복 바지에 한 다리 꿰었는데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 보내주신 이모께 압도적 감사를 표하고……. 어쨌든 일 년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는 감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은 오랜만이어서 어색하다.

 

필적확인 문구라는 게 있다. 문제지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문구를 OMR카드에 자필로 써넣어 수험생의 필적을 확보하는 건데, 올해의 문구는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였다. 나는 1교시부터 총 다섯 장의 OMR카드에 이 문장을 꼬박꼬박 다섯 번 적어 넣으면서,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크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아서 완전히 닫혀 있지 않은 문장. 문장의 주인이 전달하려는 뜻이 선명할수록 읽는 이에게 주어진 여백은 좁아진다. syo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란 그 선명함과 여백 사이의 어느 지점에 아슬아슬하지만 향기롭게 설 줄 아는 글이어서, 이 문장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고, 수험생들이 매 교시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에 괜찮은 한 줄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 문장은 양광모 시인의 가장 넓은 길이라는 시의 마지막 두 행이었다. 전문은 이렇다.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이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양광모 가장 넓은 길

 

이 전문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모든 감동은 즉시 사라졌다. 마지막 두 문장만 있을 때 품었던 미미한 여백까지 모조리 사라지며 이 시는 오직 한 가지 길을 간다. 뜻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너무도 많이 듣던 이야기이며, 당장 누구라도 누구에게든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행갈이 없이 연이어 적으면 그냥 격언일 뿐인 이야기를 행갈이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이 문장의 진의를 알았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서, 마지막 문장만 있을 때 내 마음속에 펼쳐졌던 의미의 넓은 길이, 다른 문장들이 드러나는 순간 내 마음밖에(시인의 마음속이겠지) 존재하는 좁은 길이 되고 만 것이다. , 이 시는, 그야말로 살신성인의 시였다. 동시에 마지막 두 문장만 떨어져 나와 독자에게 먼저 읽힌 후에 전문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몸소 체험하게 해주는 넓으면서도 좁아터진 시…….

 

 

  

6교시 내일부터 영역

 

최근 엿이며 초콜릿 같은 것들을 배부르게 먹다 보니 살이 좀 쪘는데, , 그건 최대한 빠르게 복구할지어다. 시험은 잘 봤으나 기대한 만큼 잘 본 건 또 아니다 보니(준비 과정에서 기대가 점점 커진 탓도 있고), 2024년의 syo겉보기엔 교수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학생캐릭터로 캠퍼스를 누비게 될지, 아니면 N수생의 모질고 거친 삶을 살게 될지는 추세를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모양. 그와 무관하게 어쨌든 한동안은 하루 한두 시간이라도 꾸준히 읽거나 써 볼 생각입니다. 손끝이 너무 굳어서 이러다 멸망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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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17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능 치셨을줄은 몰랐습니다...!! 고시 치신거 아니었나요...

syo 2023-11-17 12:26   좋아요 1 | URL
으하하하 추풍님 기준에서 생각하셨나본데, 고시같이 어려운 시험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페넬로페 2023-11-17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반가워요.
반가운데 이렇게 엉뚱한 소식을 들려 주시는군요 ㅎㅎ
어제 수능은 킬러 없는 불수능이었다고 하던데, 어쨌든 좀 잘 보신 거 같네요.
본래 기대한 만큼은 안 나오거든요.
내년에 대학생이 되는 상큼한 syo가 되시길 기원합니당^^

syo 2023-11-17 12:27   좋아요 2 | URL
킬러가 있더라구요. 절 죽이던데요? ㅎㅎㅎㅎㅎ 오랜만이고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공쟝쟝 2023-11-17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돌아오기 전에 서양철학 많이 읽어놨어야 했는 데 ㅜㅜㅜ 이제 물 건너갔다...)
머리카락에 눈이 덮였으나 빗자루로 쓸지 않는 가장 넓은 길 가실 대학생!쇼님 응원합니다.ㅋㅋㅋ
내년에 대학 가요제에 나오시나요? 고생 많았구, 푹쉬 쇼!

syo 2023-11-17 12:2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나 이제 서양철학에 관심없어요. 나는 이제 문학syo야. 엣헴.

수이 2023-11-17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멸망이 그대 길에 가당키나 할까. 와락 수고했어. 밥 먹자.

syo 2023-11-17 12:29   좋아요 2 | URL
내가 좀 수고했지 ㅎㅎㅎㅎㅎ 밥 좋아요 😆

꼬마요정 2023-11-17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어요. 가장 넓은 길은 청소하기 힘들어요…(엥?) 길이 좁든 넓든 syo 님 원하는 길이기만 하면 되죠 머 ㅎㅎ 푹 쉬시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내년엔 대학생 쇼님이길!!!!

syo 2023-11-18 12:5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ㅎㅎㅎ
대학생이라니, 엄청나죠? 좋은 시절인 것 같아요. 남들 교수할 나이에 대학생도 할 수 있는 호시절....

blanca 2023-11-17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syo님 돌아오셨다, 그런데 이런 고퀄의 수능 분석을 가지고 오시다니요! 스윽 읽으려다 너무 좋아 학부모인 저로서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재독, 삼독해보려 합니다. ^^;;; 헉 30번 답....소오름...저 수리 주관식 찍어 맞춘 여자예요. ㅋㅋㅋ 이제 대학 새내기 syo님 일기 읽을 수 있는 겁니까?

syo 2023-11-18 12:56   좋아요 1 | URL
와 정겨운 단어 ‘수리‘ ㅎㅎㅎㅎㅎㅎ
마흔 줄에 대학 일기 되게 독보적인 컨텐츠가 될 것 같네요 ㅎ 제가 다 기대가 되네요. 대학 꼭 가라 나야....

페크pek0501 2023-11-17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출현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당~~ 잘 지내셨는지요?

syo 2023-11-18 12:57   좋아요 2 | URL
페크님 오랜만이네요! 저는 언제나 무탈한 syo입니다!

단발머리 2023-11-17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교시 수학영역에서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학 잘하는 문학syo님! 수고 많았어요! 이제 자주 오는거죠? ㅋㅋㅋㅋㅋㅋ

syo 2023-11-18 12:58   좋아요 1 | URL
수학으로 감동을 드리고 받다니..... 우리 둘 중 누가 대단한 걸까요? ㅎㅎ
매일 매일 오려고 노력중입니다!

yamoo 2023-11-17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오랜만에 출현하셔서 보니, 수능을 보셨군요!
예전에 뭔가 합격통지서를 받은 페이퍼를 봤는데,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시기 위한 셤을 치셨나봅니다.
앞으로의 길에 건투를 빌어요! 쇼님^^

참고로...국어영역에서 문학은 대체로 쉬운데, 올핸 매우 헷갈리는 선지가 많았나봅니다. 문학에서 저렇게 선지를 구성하면 답이 없고 걍 찍어야 됩니다. 문학은 주관적인 해석이 다분한데...출제위원들이 매력적인 오답이라고 저렇게 구성할 시 충분히 그렇게 볼 개연성이 높아 출제 오류가 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매력적인 오답을 유도하여 문제없게 선지를 구성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번 출제위원들이 이 어려운 걸 해냈나봅니다. 그럼에도 국어는 수학처럼 급간 차이가 심하게 나지 않으니 좀 기다려보시면 좋은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어요~~~ㅎㅎ

syo 2023-11-18 12:58   좋아요 1 | URL
야무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업계분이셨던가요...... 댓글 읽다가 갑자기 두 손이 공손하게 모아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11-17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고, 덕분에 아침에 pn다이오드 문제풀이까지 마친 초보 물리러는…60퍼센트 수강한 물리 강의 조용히 드랍하기로 합니다 ㅋㅋㅋ 공대 출신 20년 물리 인생이 어렵다면 머리털 나고 처음 물리하는 나는 생명과학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어ㅋㅋㅋ저를 물리로부터 구하셨습니다!!!! (이렇게syo 핑계로 물포자로 돌아간다 ㅋㅋㅋㅋㅋ)

syo 2023-11-18 13:00   좋아요 2 | URL
제가 물리 녀석과 쌓은 역사가 몇십 년인데, 저도 다른 애들한테 뒷통수 다 맞아도 얘한테 맞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능 결심할 때도, 그래 물리는 워낙 오래 했으니까 든든하다- 하는 점이 파지티브 포인트였었는데요....

생지러 화이팅입니다. 탐구는 생지죠.

stella.K 2023-11-17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오래 전부터 생각한 건데 학교는 나이 먹고 다니면 좋겠단 생각이 들거군요.
전 학교 때 학교 다니기가 넘 힘들했거든요.
이 나이쯤 다니면 정말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ㅋ
근데 스요님 안 보이시더니 수능 보셨군요. 멋지네요. 좋은 결과 있기를!^^

syo 2023-11-18 13:02   좋아요 1 | URL
이 나이에 수능 보는 게 또 어찌보면 노욕 같기도 하구요....

젊은 친구들 전부 와, 나이에 상관없이 도전하는 모습 멋지세요! 라고 말은 하지만 알고 보면 와, 그냥 살던 대로 살지 괜히 공부해서 젊은애들 자리나 뺏어가려고.... 라고 생각하고 있을듯합니다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11-18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syo님 오랜만입니다! 깜놀 수능소식도 멋지구리하게 들려주시는!!! 반가워요!

syo 2023-11-18 13:03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 오랜만입니다 ㅎㅎㅎㅎ 이제 좀 자주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서괭 2023-11-18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syo님 수능 치셨군여!! 수험생 생활이 팍팍했을 텐데 그럼에도 여전한 입담이 참 반갑습니다^^ 그래도 잘 봤다고 평하시는 거 보니 내년을 기대해봐도 좋겠군요!!

syo 2023-11-20 20:19   좋아요 2 | URL
수험생 라이프는 생활이 팍팍한 것도 그거지만, 인성이 팍팍해지더라구요..... 죽기 전에 숨 쉬러 나타났습니다.
내년의 일은 내년에게 맡기기루 하구요 ㅎㅎ

bookholic 2023-11-18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수능 공부하시느라 뜸하셨군요...^^ 수능 공부하시고 수능 보느라 고생 많았어요.. 찍은 문제는 다 맞추시고, 푼 문제는 실수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syo 2023-11-20 20:20   좋아요 1 | URL
매긴 대로 성적이 나오는 게 일단의 바람이긴 합니다 ㅎ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북홀릭님!

또 봄. 2023-11-20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능시험만으로도 존경스러운데, 물리가 버팀목이었다니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소식 들려주세요!!

syo 2023-11-20 20:21   좋아요 1 | URL
수능도 물리도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ㅎㅎㅎ 하지만 좋은 소식이 온다면 저도 그 소식 녀석을 존경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3-11-20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수능 보셨어요?
의대? 치대? 법대? ^^
하여튼 넘 반갑습니다. ^^

syo 2023-11-20 20:22   좋아요 2 | URL
북다님 오랜만이지요! ㅎㅎㅎㅎ
저는 수능을 보고 수능은 저를 봤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훈훈한 결말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여전합니다

 

 

옥상에서 밤 덮인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내 발끝이 차갑습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가로등 빛도 한층 더 야위지요. 배회하는 고양이, 구름에 흔들리는 달빛, 교회당의 붉은 십자가, 산 아래 도로를 달리는 광원들. 겨울이면 모든 풍경이 조금 더 퍽퍽해서 무엇이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안기고 싶은 마음이라고 고쳐 써도 다르지 않겠군요. 감각에 기대 떠올리는 이런 마음은 외로움이랄지 고독이랄지 하는 높고 윤곽 흐린 감정들보다 침투력이 훨씬 커서, 제멋대로 어떤 추억이나 이름을 꺼내 그 곁에 모여들곤 합니다. 겨우내 안아주고 싶은 이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생각이 지극하여 그대로 이 계절에 붙박였습니다. 그리하여 겨울이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은 안아주고 싶은 동안은 온통 겨울인 마음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나의 사계절을 하나의 계절로 수렴합니다. 맞아요. 그해 겨울에 그런 마음이 시작되었고, 그 마음이 끝나기 전까지 이제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syo는 여전합니다.

 

책머리에 앉은 먼지가 굳어 이제 여간한 입바람으로는 날리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읽지 않았습니다. 읽지 않는 삶이란 곧 쓰지 않는 삶일 것이라 짐작만 하던 적이 있었는데, 짐작은 현실이 되었고 이런 현실이 뜻밖에 또 나쁘지 않아서, 읽고 쓰면서 그럭저럭 살던 syo는 읽지 않으므로 쓰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었고 아무래도 올해 역시 syo는 읽지 않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읽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읽기를 멈추는 데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던 시기가 힘겹게 저물었고, 이제는 읽는 데에 계기가 필요한 범상하고 범속한 궤도에 올라탄 모양입니다. 서재 이마에 읽지 않고 쓰겠다고 써 붙여 놓았지만 읽지 않으니 써지지 않아서 결국 읽지도 쓰지도 않는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고야 말았네요. “보통 사람이 되었어요. , 이제야 내가, 드디어 내가, 마늘과 쑥도 없이 내가.

 

syo는 여전히 백수입니다. 달라진 것을 꼽자면 그저 진간장과 국간장을 구별해서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피클에 취나물을 넣어 담그면 별미라는 사실을 배운 것 정도입니다.

 

활자는 악기고 쓰기는 연주입니다. 기예라는 것은 꽤나 가혹해서 연습한 딱 그만큼만 주어지는 반면 하루를 멈추면 사흘을 거슬러 갑니다. 일 년을 쉬었으니 삼 년을 거슬러 syo의 글은 이제 다시 삼십 대 중반쯤이겠습니다. 이참에 몇 년 더 쉬어 이십 대까지 회춘하는 것도 방법일까 싶다가도, 그 시절은 아름다웠으나 아름다운 만큼 어리석었으므로 오늘의 내가 그날의 어리고 어리석은 나를 끝내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이렇게 뭐라도 끄적댑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겨울이 꽤나 마음에 차기 때문입니다.

 

귤껍질로 차를 만들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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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1-08 23: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허... 아니 무슨 글을 이렇게 쓰시는 분이 있나요? 정말 여전하시네요. 얼마 전에 우연히 여기 왔다가 무슨 글을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어? 하고 놀랐는데 말입니다.

얄라알라 2023-02-15 12:56   좋아요 1 | URL
은오님,
매서운 감식안이 있으신 은오님의 칭찬세례를 받으신 syo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에 뵈어요!!

scott 2023-01-09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웰컴 백 북플🤗

책읽는나무 2023-01-09 0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더 젊어져서 오시다니?
비법 좀?...
잘 쉬다 오셨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셨죠?

반유행열반인 2023-01-09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은 우리 사는 나라에서는 원래 추운 거지만…가끔가끔 따뜻하시길 기원합니다. ㅎㅎ저는 늘 봄을 기다려요.

라로 2023-01-09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진간장과 국간장 구별 못 해서 진간장만 사용해요. ㅎㅎㅎ 귤껍질로 차도 만드시고!!
저도 알라딘을 떠났다가 다시 올까봐요.^^;;
암튼, 웰컴 백 앤드 해피 뉴 이어~~!!^^

2023-01-09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귤껍질로 향긋한 차 만드시면 글 또 올려주실 거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3-01-12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하기가 어렵죠.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수이 2023-02-20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저기 은오님이 댓글 달았네 ㅋㅋㅋ 은오님 댓글 보다가 글 보다 우리 쇼 뭐 하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죠. 빨리 공부 끝내고 놀자. 심심해.

수이 2023-02-20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제가 알라딘에 한동안 안 왔다가 다시 요즘 오고 있어요. 쇼님 글 언제 올라오나 그럴 때가 있었잖아. 그땐 쇼 글 읽는 맛에 알라딘 할 맛이 났었는데. 에잇.

수이 2023-02-20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대 없는 알라딘에서 놀면서 버티다가 그대 컴백하는 날 미친듯 난리 부르스를 추겠소. 쇼 없는 알라딘이 이런 건지 내가 왜 진작에 몰랐을까. 아아아악.
 

  

성묘 가다 30분만에 락킹 고수 된 썰 푼다

 

야트막한 산도 산은 산일진대 반바지를 입고서 그 산을 오르겠다고 깝치는 멍청한 오라비를 위해 내 동생이 다이소에서 구매한 모기 기피제를 고소할 수 있을까. 겉면에 이 제품으로 기피되는 벌레는 모기진드기라고 명백하고 한정적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실제로 모기와 진드기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으니 제품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영문 모를 달콤한 향을 첨가하여 그 향기에 대취한 모기진드기이외의 칠만 육천 가지 날벌레들이 syo와 동생의 주변에서 광란의 연회를 벌였다는 것이 문제다. 여름날 밤 가로등 아래 서서 고개를 쳐들면 수백 마리 날벌레들이 전구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데, 그 전구 대신 소켓에 내 머리를 끼워 놓고 산에 올라가는 기분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다. 산어귀부터 묘소까지 가는 20분 거리는 체감상 20년쯤 되는 대방랑의 여정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무슨 꿀벌 아저씨처럼 벌레로 만든 옷을 입고 엄마 안녕 나 왔어 내 새 옷 좀 볼래/벌레? 하게 생겼으므로 급한대로 언 발에 오줌 눠야 할 판이었던거라, syo는 손수건을 꺼내 휘두르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벌레에 시달리느라 비명을 지르며 뒤따라오던 동생이 syo의 현란한 동작에 감탄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으아아아바아아벌레새끼들아아으아으아아근데오빠야락킹잘추네으아아아벌레우으이우와우!

 

락킹이 뭐 이런 것인 모양

 

 

다소 침체된 성묫길에 분위기를 화려한 롹킹 퍼포먼스로 불지르고 싶은 분들께, 다이소 모기 기피제, 아 강력 추천합니다!

 

 

 

--- 읽은 ---

 


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

 

 

표지에 떡하니 박혀 있듯, 원제는 “Why Fish Don’t Exist”이다. 거칠게 풀면 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가식의 의문형으로 풀 수 있는데, 번역본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큰 차이가 있을까? 내가 읽기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진짜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아직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명제처럼 공지의 사실이 되지 못했다.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사람들의 인식에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꼬리, 저 지느러미, 저 비늘, 저게 물고기인데,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데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러나 하늘을 올려다보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 도는 것은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각적 인식과 다른 과학적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 지동설에는 그런 것이 있고 물고기 부존재설에는 아직 그런 것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지동설만큼의 과학적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보다, 오직 지금에만, 물고기 부존재설이 아직 지동설만큼의 위치를 획득하지 않은 지금에서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 더 나중에는 이런 질문이 의미가 없어진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시대에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은 개인의 삶과 세계의 질서를 흔들 만큼 거대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듯이. 따라서 바로 지금, 우리는 이 질문에 천착해야만 한다. 때를 놓친 질문은 질문의 모습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윤리나 정치로 모습을 바꾸고 돌아와 우리의 지난 무책임과 무관심을 비난한다.

 

질문에 대한 저마다의 대답이 저마다의 인생을 반영한다. 그래서 질문의 형식이 조금 더 걸맞다. 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나요? 하는 질문의 과학적 답변은 과학자들이 만들 일이고, 우리의 답변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죄다 뭔 놈의 물고기 폐병 걸려 기침하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읽어보시면 뭔 소리인지 알 수 있으십니다…….

 

  

 

--- 읽는 ---

교양 노트 / 요네하라 마리

미식가를 위한 식물 사전 / 스쥔

필로소피 랩 / 조니 톰슨

저도 의학은 어렵습니다만 / 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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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7-25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태워 먹는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모기 진드기 기피하느라 온갖 잡다한 벌레들은 다 불러들이고. 그 회사 참 어쩌라는 건지. 애처롭네요. ㅋㅋ 제목이 참!

근데 동영상 나름 환호하는 것 같은데 운동화를 던져 식겁했습니다.
너무 격한데요?ㅋ

반유행열반인 2022-07-24 2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속도라면…저의 올해 독서 7권은 금세 따라 잡으시겠네요…뒤쳐지는 자의 슬픔…
즈이 집에는 뽀로로가 그려진 스프레이랑 롤링? 물파스 같은 모기 기피제가 두 종이나 있는데 몇 년 전 동남아 방문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아서 그걸 빌려드릴 걸 그랬죠…냄새는 그냥 상큼한 모기약(읭) 수준이고 벌레가 꾀는 건 못봤는데…이래서 저는 다이소 싫어해요.(집의 어른들은 죄다 다이소 매니아라 맨날 뭘 번갈아 사오셔서 늘 난감합니다…저거 딱 가격만큼인 것을 하고…) syo님의 락킹ㅋㅋㅋㅋ 왜 어떤 광경인지 알 것 같지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7-24 2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지난번 페이퍼에서,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못 드렸는데(실은 어떻게 잘 인사드릴 수 있는지 어색하고 뻘쭘해서 안 드렸는데)
다녀오셨군요.
그런데, 세상에나 날벌레의 광란의 춤, syo님과 동생분 역시 비자발적 락킹을 피하실 수 없었군요.

그나저나 올려주신 동영상 넋 놓고 보았습니다. 스우파에서 립제이가 잘 추는 장르가 랑킹이라 해서 한 때 열심히 유투브 찾아다녔는데 syo님 올려주신 영상 딱 제 취향입니다!

페크pek0501 2022-07-24 23: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춤 홀딱 반하게 되네요. 올려 주신 영상 잘 봤어요. 마치 필름을 빨리 돌리는 듯한 동작들.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으면 저런 경지에 가게 되는 걸까요? 존경스럽네요.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것, 바다 속에 쓰레기들이 많아 그 쓰레기에 걸려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장면이었어요.
그 피해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올 터인데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는 게
인간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어요. 그런데 <물고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제가 말한 것과 관련성이
있는지요?
<교양 노트>는 제가 완독한 책이어요.^^

mini74 2022-07-25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자꾸 웃음이 나지요. ㅎㅎ 저도 얼마전에 아버지 뵙고 왔는데 청바지를 뚫더군요. 온통 다리가 울퉁불퉁합니다. 무서운 존재들. 저는 락킹은 못하고 고스란히 내어주고 왔습니다 ~ 물고기 폐병 걸려 기침하는 소리 ㅎㅎㅎ 역시 넘 재미있으세요 👍

2022-10-06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25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속탈이 났다. 누워서 눈을 감고 귀는 열었더니 빗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눈을 뜨면 어두운 방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맞았다. 빛과 빗소리가 우르르 방 안으로 치고 들어오자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진 채 침대 위에 떼밀리듯 주저앉아 반쯤 열린 창틈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눈꺼풀을 닫는다. 그리고 나를 후려친 것이 빛과 빗소리인가 빗과 빛소리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꿈을 꿨다. 그것은 슬프디슬프면서도 안개처럼 빛과 빗소리 사이로 흩어지는 꿈이었다. 잠시 뒤 배는 다시 아팠고, 나는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과 잠시나마 그것을 잃어버렸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2

 

저녁을 차려 먹고 한참 동안 옥상을 빙빙 돌며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내려오는 계단참에서 몽땅 구기고 던져버렸다. 지난 한 해 그렇게 난간을 뒹굴며 바스라진 시의 잔해와 사체들이 적잖다.

 

 

 

3

 

어제는 여자친구가 자두 이야기를 했다. 작년 내일, 엄마의 자두 이야기였다. 그 자두에 대해서 나는 잊고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이런 걸 잊고 살아갈 줄 아는 내가 대체로 좋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내가 혹시 미친놈이거나 사이코패스거나 한 것은 아닌지 진단하기 위해 두개골을 텅텅 두드려보기도 한다.

 

엄마 묘지에 가져다 놓을 새로운 조화가 오늘 배송되었다.

 

 

 

--- 읽는 ---

작별인사 / 김영하

다정소감 / 김혼비

무엇이 예술인가 / 아서 단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안드레 애치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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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2-07-21 2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텅텅 정상입니다. 대구는 덥겠죠.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38   좋아요 3 | URL
대구도 시원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는데 심지어 소나기도 내리더라구요.
맑은 하늘에 소나기.

또 봄. 2022-07-21 2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는.쇼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뜬금없겠지만.
지두는 완전 다른 과일이 됐어요, 저한테.

syo 2022-07-24 19:39   좋아요 3 | URL
또 봄님 감사합니다. 저는 늘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고 있어요.
자두에 뭔가 즐겁지 않은 이미지를 덧씌워드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레이스 2022-07-21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저도 작년에 어머님 보내드리고 얼마 안되서 syo님이 어머님 보내드린 소식 서재에서 봤었네요. 사진으로 뵌 어머님 참 예쁘고 고우셨던것 같아요.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0   좋아요 3 | URL
덕분에 평안하게 잘 다녀왔습니다.
그간 내린 비에 다른 분들 묘는 많이 상했는데 엄마 자리는 멀쩡하더라구요.
역시 우리 엄마....

페넬로페 2022-07-22 08: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자두 이야기~~
syo님이 정성스레 엄마에게 자두를 익혀 드린 것을 기억해요.
그만큼 정성스러웠기에 망각할수도 있어요.
잘 다녀 오세요^^

syo 2022-07-24 19:41   좋아요 4 | URL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두 이미지에 씁쓸한 맛을 첨가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수이 2022-07-21 23: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어머님 돌아가시고 그 슬픈 자리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친구라는 건 얼마나 보잘것없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벌써 1년 전이네요. 잘 다녀와요.

syo 2022-07-24 19:42   좋아요 3 | URL
시간 진짜 빨리 갔네요. 저야 뭐 일찍부터 씩씩해졌지만 한참 고생하던 동생도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합니다.
화환 보내셨잖아요. 제가 보낼 입장이었을 때는 뭐 그게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받아보니 힘이 되더라구요.

청아 2022-07-21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럴땐 ‘좋아요‘ 말고도 ‘토닥토닥‘이나 ‘쓰담쓰담‘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하게되네요.
syo님!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3   좋아요 3 | URL
잘 다녀왔습니다 ㅎㅎㅎㅎ
토닥토닥 쓰담쓰담은 댓글로 잘 받아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당

scott 2022-07-22 0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우셨던 어머님
쇼님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3   좋아요 4 | URL
스캇님 감사합니다 ㅎ
무사히 잘 다녀왔어요.

책읽는나무 2022-07-22 06: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3   좋아요 4 | URL
날도 안 덥고 괜찮게 다녀왔습니다.
책나무님 감사합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22-07-22 08: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울은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던데 거기는 비 안 왔으면 좋겠네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쇼님.

syo 2022-07-24 19:44   좋아요 3 | URL
아니 비가 오더라구요.
하늘은 맑은데 장대비가 주루루룩 오더라구요.
근데 그때는 때마친 산 아래 까페에서 콜드브루 마실 때여서 오히려 좋았다는....ㅎㅎ

mini74 2022-07-22 0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님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저도 토닥토닥해드리고 싶습니다.

syo 2022-07-24 19:44   좋아요 4 | URL
토닥토닥 잘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토닥토닥 해주셔서 등짝 나가겠어요 ㅎㅎ
 


입이 있어도 입이 없는 동거남

 

 

 

1

 

은 더위를 잘 참고 syo는 추위를 잘 참는다. 이렇게 말하니 긍정적인 인간 같아 보이는군. 고쳐 말하면, 은 추위를 잘 못 참고 syo는 더위를 잘 못 참는다. 이렇게 말하니 또 이번에는 글쓴이의 심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군. 문장을 조금 더 진실 방향으로 끌고 오면, 은 여름만 되면 syo를 냉면집 육수 주전자 취급하고 syo는 겨울만 되면 을 매미 유충만도 못한 놈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왔고, 이제는 내가 수비할 시간.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덥긴 하지만 그 정도라고? 난 잘 모르겠는데- 이지랄 하면서 이죽거리는 꼴을 버텨낼 시간. 이틀 전에 그가 처마신 맥주캔은 아직 모니터 옆에 있다. 언제 치우나 본다, 내가.

 

 

 

2

 

열대야하고 모기는 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누가 날 좀 설득해주기라도 하면 좋겠다. 납득이라도 하면 덜 빡칠 듯.

 

 

 

3

 

모든 연애가 다 이렇게 흘러간 것은 아니지만, 요즘 생각으로 연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입인 것 같고, 이번에는 나름 입이 충만한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을 하는 기관 말고, 감각기로면 따지면 입은(주로 혀는) 미각을 담당한다고 보는데, 사랑할 때 입은 촉각 기관의 역할도 한다. 오직 사랑할 때만 그렇다. 입으로 촉각할 수 있는 사이는 어떤 종류든, 어떤 형식이든, 사랑의 일종이다. 혀와, 입술, 그리고 이로 매만질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다(물론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3.5

 

그러니까 양치를 잘하자고.

 

 


3.5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8


그러니까 아 너는 대충 해도 되겠다.

 

 

 

3.8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

 

읽고 있는 책 두 권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알고 고른 것은 아니었는데. 병렬 독서의 맛은 이럴 때 증폭된다.


  

말에는 본래 국가도 없고 국경도 없다. 국경을 그어 놓은들 말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는다. 한국이라는 국가 내부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지역이나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변이들이 존재하며 이들 변이들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심지어 어떤 변이들은 수시로 끊임없이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나든다. 말들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가공품의 '발명'은 이러한 차이를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한국어라는 말 속에는 '언어=영토=국민'이라는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구도가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고 균질한 하나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 환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는 다름 아닌 표준어 제정이다.

  표준어 제정 과정에는 우생학과 위생학이 개입한다. 우생학적 처리 과정은 서울 말을 우등한 것으로, 지역어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표준어에서 지역어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위생학적 처리 과정. 이 처리 과정을통해 토착어가 아닌 외래어들은 '오염된 말'이 된다. 순수한 언어란 있을 수 없지만 만들자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것을 오염된 것으로 지목해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순수한 것이 된다. 이런 가공 과정을 거쳐 한반도라는 명확한 영토와 경계를 가진 '한국어'가 발명된다. 이 한국어는 그냥 한국어가 아니다. 우생학과 위생학으로 담금질된 '우수하고', '순수한' 한국어다.

_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어떤 것이 잠재적으로 순수한 것(가령, 자연, 문화적 정체성, 기원, )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데리다처럼 읽기 시작한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것을 순수하다고 간주하게 되는 것은, 어떤 발화자 또는 작가가 순수성이라는 이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거나, 또는 우리가 어떤 용어들이나 개인들을 아주 빠르게 비자연적이거나 위협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오로지 그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어떤 것의 순수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위협에 '타자(other)'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상에 대해, 타자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위협이 된다는 말을 동시에 듣게 된다. 때때로 약물은 자연적인 신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자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척도가 되어] 약물을 폄하시키고 있는 그 '자연적 신체'의 일관성에 의문을 붙이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 신체라는 이상이 유동적인 것이라면, 자연적 신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_ 페넬로페 도이치, HOW TO READ 데리다

 

자체로 완전 신박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에 눈여겨 읽는 포인트는, 애초에 순수한 것이 있어서 오염된 것들을 제거해서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염을 정의하고 제거하여 남은 것을 순수라 상정한다는 것. 그러니까 순수는 목적지가 아니라 오염이라 정의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이고 수단으로만 동작한다. 나쁜 놈들이 순수를 악용해서 타자를 오염이라 정의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악용할 순수가 없고 그저 이용되기 위해 추후에 탄생한 순수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려치면, 권력이나 권력을 지망하는 이가 오염을 만들고, ‘오염순수를 만드는 셈이다.

 

언젠가부터 모든 정의로움은 그 정의로움을 모두의 정의로움으로 만들 생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의 깃발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미치고 미치지 않음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가 그저 승자의 역사라면, 모든 정의는 고작 수긍하는 자의 정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인데도, 여기가 정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참 드문 것이다.

 

 

 

--- 읽은 ---



1. 쓸모없는 수학

김동진 지음 / 좋은땅 / 2022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노력을 의식하지 않고 삽니다. 분명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요. 1년의 주기 속에서 계절마다 오는 변화에 미리 대비하고, 1주일의 주기 속에서 요일마다 여전히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며 살아갑니다. 반복되는 사랑과 이별에 익숙해지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찾고, 잦은 실패의 경험에서도 배울 것을 찾습니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너무 강렬히, 그리고 직접 다가옵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 활동으로 일궈낸 우리 삶의 관성과 항상성은 뒷전으로, 또는 당연한 것으로 밀려납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알지 못하듯이 우리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삽니다. 변화에 대비하기 급급하죠. 수학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_ 김동진, 쓸모없는 수학

 

무려 올해의 첫 책이니까 이건 리뷰를 써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도리.

 

 

 


2.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22

 

가능한 한 온갖 기분을 다 맛보고, 온기를 찾아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젊음의 키스를 마음껏 즐기고 카툴루스를 노래하는 아름다운 음성의 메아리를 즐기자. 모든 계절이, 궂은 날이나 화창한 날, 적포도주와 백포도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나 혼자 있는 것, 모든 것이 좋아할 만하다. 삶의 기쁨에 제동을 거는 잠조차도 꿈으로 가득 차 있다. 걷기, 말하기, 자기만의 뜨락에서 홀로 있기처럼 극히 평범한 행동도 정신이 뻗어 나갈 때면 고양되고 조명된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으며, 아름다움은 선함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 건강과 맑은 정신의 이름으로, 여행의 끝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하지 말자. 죽음일랑 우리가 배추를 심는 동안이나 말을 타고 가는 동안 찾아오게 하자. 아니면 어느 시골집으로 달아나 낱선 이들이 우리 눈을 감겨 주게 하자. 누가 흐느껴 울거나 손길 닿는 것이 우리를 못 견디게 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바라기는, 죽음이 우리가 평상시처럼 하던 일을 하는 중에, 아무런 항의도 애곡도 하지 않는 소녀들이나 선량한 벗들 가운데로 찾아오게 하자. 그가 우리를 <노름, 잔치, 농담, 범상하고 속된 이야기와 음악과 사랑 노래 가운데> 찾아오게 하자.

_ 버지니아 울프,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나는 만연체를 사랑하고, 깐깐한 이들이 볼 때 번역투가 다 빠져나가지 않아서 고칠 데가 많아 보이는 그런 문장을 사랑하고, 어려운 말과 아름다운 말에 조금쯤 욕심을 부려 만들어 놓은 문장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실 울프의 문장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짧은 식견이지만, 내가 읽은 에세이 속 울프의 문장은 예를 들면 소로의 문장보다 지혜롭지 않고, 리베카 솔닛의 문장보다 아름답지 않다. 그렇지만 울프의 문장에는 어떤 치열함이 있다. 특히 책을 다루는 글에서 울프는 치열한 글쓰기가 뭔지 보여준다. 이미 책과 한바탕 싸우고 난 후의 경과를 보고하는 글임에도, 가끔은 지금 이 순간도 책과 싸워내는 중이구나- 싶을 정도의 현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서평이나 독후감을 오래 써 본 사람은 아는, “책 읽은 글만이 가지는 독특한 장벽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을 넘기 위해 내 독서는 책을 어르고 달래는 독서가 되어야 할지, 책을 던지고 찢으며 이겨 먹는 독서가 되어야 할지, 아니면 그저 관조하고 바람 같은 웃음을 남기며 지나치는 독서가 되어야 할지, 그런 질문과 마주하면서 우리는 책 읽은 글을 쓴다. 우리에게 울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이 그 중에 있다.

 

그러나 당연히 보통 독자라는 것은 기망.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지간한 사람들을 몽땅 보통 이하로 만들어버리는 일종의 저주 같은 제목이다.

 

 

 


3. 질문하는 삶

류대성 지음 / 현암사 / 2019

 

개인의 삶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한 사회는 개인과 개인의 결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체다. 나와 타인의 관계를 돌아보고 내 생각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만큼 타인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지향하느 목표와 가치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오늘도 내일도 같은 날의 반복이다.

  얄팍한 지식과 허세, 수많은 성공 비법과 처세술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두벅뚜벅 자기 길을 걷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인 사유와 고민이다. 주체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사람에게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향기 나는 삶을 원한다면 향수 대신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각의 무능함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인류 사회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 자기 이익을 위한 침묵과 외면은 결국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홀로 건널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_ 류대성, 질문하는 삶

 

우리는 지금 답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질문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정말이다. 세상에 답은 너무도 많이 널려 있어서 키보드 몇 타만 두드려도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정작 질문이 부족하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그렇다. 무얼 물어야 하는지 몰라서 묻지 않다 보니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게 된다.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르니 물을 게 생겨도 제대로 묻지 못한다. 악순환이다.


질문하는 삶이란 결국 사유하고 고민하는 삶을 말한다. 이렇게 요약하는 순간, 이 책은 범상한 책이 되어 버린다. 사유하고 고민 좀 해라 제발 좀- 하는 책들은 무수히 많고, 최소한 그런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만큼은 그래도 사유하고 고민하는 사람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한다(착각일 확률도 꽤 크다). 결국 역시 이 책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들은 이 책을 읽지 않고,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이들만 이 책을 읽는 그런 이 책중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범상함과 무가치는 전혀 다른 평면의 이야기다. 인용구의 마지막 부분 향기 나는 삶을 원한다면 향수 대신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각의 무능함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인류 사회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 자기 이익을 위한 침묵과 외면은 결국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홀로 건널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하는 이 대목은 범상하지만 정론이고, 범상하여 정론이며, 정론이어서 범상하다. 정론이지만 범상하다-는 평은 범상한 평에 불과하다. 정론은 범상함과 상관없이, 그저 곧게, 꿋꿋이 쫓아갈만 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정론이라 부른다.

 

 

 

 

--- 읽는 ---

그러나 아름다운 / 제프 다이어

미끄러지는 말들 / 백승주

HOW TO READ 데리다 / 페넬로페 도이치

타인에 대한 연민 / 마사 누스바움

화해의 몸짓 / 장성욱

에세 / 미셸 드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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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2-07-07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는 지금 키스가 충만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거죠? 삼님은 여전히 못하고?? ㅋㅋㅋㅋ

syo 2022-07-07 18:1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다이제스터 2022-07-0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독서의 세계로 다시 오심을 환영합니다. ^^
한번 맛보면 좀체 벗어나기 어려운 세계로… ^^

syo 2022-07-21 22:28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치만 다시 완전히 발을 담근 것은 아니고 또 그렇다고 발을 끊은 것도 아니고, 이게 당최 뭔지 저도 잘....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2-07-07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치를 잘하자 필기…(왜? 이 썩지 말라고…) 저 올해 독후감 다섯 개 썼는데 syo님은 이제 3번임? (아직은 내가 이겼다…) 3이 친구라서 올해는 3권만? 30권만 읽나요?ㅋㅋㅋㅋ 얼른 300권 읽는 나날 탈환 기원합니다.

syo 2022-07-21 22:30   좋아요 2 | URL
댓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ㅎㅎ
아마 올해는 50권 언저리에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는 짐작입니다.
탈환 기원 말씀은 힘이 되긴 하는데, 아무래도 300권 읽는 나날은 이제 오지 않을 것 같고, 이젠 그렇게 많이 읽기를 바라지도 않는달까요...

새파랑 2022-07-07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이 충만한 연애를 하고 계시는군요 ^^ 이 기세로 여름이 가기 전에 100권 읽으실거 같아요~~!

syo 2022-07-21 22:31   좋아요 2 | URL
입충연ㅎㅎㅎㅎㅎㅎ 댓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세 같은 거 없어서 여름은 물론이거니와 올 한해 다 해도 100권은 못 읽을 것 같아요 ㅎㅎ

mini74 2022-07-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시대 없애버린 우리 글이 제주방언엔 여전히 살아있다고 , 이 발음들이 남아있었음 영어발음하기도 좋았을거람 다큐 본적이 있어요. 대구사투리에도 옛말이 남아있답니다. 글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왜 삼님 이 안 닦아도 되겠다는 문장만 각인된건지 ㅎㅎㅎ

syo 2022-07-21 22:32   좋아요 1 | URL
댓글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내용은 전부 숙지하셨네요. 각인하신 문장 딱 그거 하나 쓰려고 다소 장황한 글을 쓴 거라고 보셔도 됩니닼ㅋㅋ

stella.K 2022-07-08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스만큼 내로남불도 없죠. 남이하면 드러분 것 같고 내가하면 탐욕적이 되고.ㅋㅋ
최근에 알았는데 모기도 아주 무익한 건 아니라더군요. 근데 그 이유가 있다는데 그걸 못 들었슴다. 아놔...
지난 달 모기한테 왕창 뜯겼는데 소리없이 뜯기니 대책이 없더군요. 무더우면 오히려 안 뜯기는데 입추 모기는 대단하죠.

syo 2022-07-21 22:34   좋아요 2 | URL
주거지가 산간지방(?)이어서 모기가 반쯤 산모기거든요.
이놈들은 발견이 잘 돼서 뜯길 확률은 적은데, 대신 한 번 뜯기면 노멀모기한테 세 번 뜯긴 기분이어서 영 언짢습니다.
모기도 유익한 데가 있다니, 놀랍긴 한데 그냥 모르고 살면서 평생 저 쓸모없는 벌레새끼들- 하면서 욕치고 살고 싶습니다....

답이 늦었습니다.

바람돌이 2022-07-09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syo님의 시원한 글을 읽는 재미를 느낍니다. 어서오세요. 다시 오셔서 반가워요. ^^
미끄러지는 말들 재밋을 것 같아서 담아가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을 보통독자로 지칭한다는데 분노하고 갑니다. ^^

syo 2022-07-21 22:35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보시다시피 한 달에 두어번 들르는 수준이네요. 민폐다.....

미끄러지는 말들 나쁘지 않습니다. 울프는 나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