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합니다
옥상에서 밤 덮인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내 발끝이 차갑습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가로등 빛도 한층 더 야위지요. 배회하는 고양이, 구름에 흔들리는 달빛, 교회당의 붉은 십자가, 산 아래 도로를 달리는 광원들. 겨울이면 모든 풍경이 조금 더 퍽퍽해서 무엇이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안기고 싶은 마음이라고 고쳐 써도 다르지 않겠군요. 감각에 기대 떠올리는 이런 마음은 외로움이랄지 고독이랄지 하는 높고 윤곽 흐린 감정들보다 침투력이 훨씬 커서, 제멋대로 어떤 추억이나 이름을 꺼내 그 곁에 모여들곤 합니다. 겨우내 안아주고 싶은 이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생각이 지극하여 그대로 이 계절에 붙박였습니다. 그리하여 겨울이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은 안아주고 싶은 동안은 온통 겨울인 마음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나의 사계절을 하나의 계절로 수렴합니다. 맞아요. 그해 겨울에 그런 마음이 시작되었고, 그 마음이 끝나기 전까지 이제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syo는 여전합니다.
책머리에 앉은 먼지가 굳어 이제 여간한 입바람으로는 날리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읽지 않았습니다. 읽지 않는 삶이란 곧 쓰지 않는 삶일 것이라 짐작만 하던 적이 있었는데, 짐작은 현실이 되었고 이런 현실이 뜻밖에 또 나쁘지 않아서, 읽고 쓰면서 그럭저럭 살던 syo는 읽지 않으므로 쓰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었고 아무래도 올해 역시 syo는 읽지 않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읽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읽기를 멈추는 데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던 시기가 힘겹게 저물었고, 이제는 읽는 데에 계기가 필요한 범상하고 범속한 궤도에 올라탄 모양입니다. 서재 이마에 읽지 않고 쓰겠다고 써 붙여 놓았지만 읽지 않으니 써지지 않아서 결국 읽지도 쓰지도 않는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고야 말았네요. “보통 사람”이 되었어요. 아, 이제야 내가, 드디어 내가, 마늘과 쑥도 없이 내가.
syo는 여전히 백수입니다. 달라진 것을 꼽자면 그저 진간장과 국간장을 구별해서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피클에 취나물을 넣어 담그면 별미라는 사실을 배운 것 정도입니다.
활자는 악기고 쓰기는 연주입니다. 기예라는 것은 꽤나 가혹해서 연습한 딱 그만큼만 주어지는 반면 하루를 멈추면 사흘을 거슬러 갑니다. 일 년을 쉬었으니 삼 년을 거슬러 syo의 글은 이제 다시 삼십 대 중반쯤이겠습니다. 이참에 몇 년 더 쉬어 이십 대까지 회춘하는 것도 방법일까 싶다가도, 그 시절은 아름다웠으나 아름다운 만큼 어리석었으므로 오늘의 내가 그날의 어리고 어리석은 나를 끝내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이렇게 뭐라도 끄적댑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겨울이 꽤나 마음에 차기 때문입니다.
귤껍질로 차를 만들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