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忌
1
속탈이 났다. 누워서 눈을 감고 귀는 열었더니 빗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눈을 뜨면 어두운 방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맞았다. 빛과 빗소리가 우르르 방 안으로 치고 들어오자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진 채 침대 위에 떼밀리듯 주저앉아 반쯤 열린 창틈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눈꺼풀을 닫는다. 그리고 나를 후려친 것이 빛과 빗소리인가 빗과 빛소리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꿈을 꿨다. 그것은 슬프디슬프면서도 안개처럼 빛과 빗소리 사이로 흩어지는 꿈이었다. 잠시 뒤 배는 다시 아팠고, 나는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과 잠시나마 그것을 잃어버렸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2
저녁을 차려 먹고 한참 동안 옥상을 빙빙 돌며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내려오는 계단참에서 몽땅 구기고 던져버렸다. 지난 한 해 그렇게 난간을 뒹굴며 바스라진 시의 잔해와 사체들이 적잖다.
3
어제는 여자친구가 자두 이야기를 했다. 작년 내일, 엄마의 자두 이야기였다. 그 자두에 대해서 나는 잊고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이런 걸 잊고 살아갈 줄 아는 내가 대체로 좋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내가 혹시 미친놈이거나 사이코패스거나 한 것은 아닌지 진단하기 위해 두개골을 텅텅 두드려보기도 한다.
엄마 묘지에 가져다 놓을 새로운 조화가 오늘 배송되었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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