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탈이 났다. 누워서 눈을 감고 귀는 열었더니 빗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눈을 뜨면 어두운 방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맞았다. 빛과 빗소리가 우르르 방 안으로 치고 들어오자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진 채 침대 위에 떼밀리듯 주저앉아 반쯤 열린 창틈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눈꺼풀을 닫는다. 그리고 나를 후려친 것이 빛과 빗소리인가 빗과 빛소리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꿈을 꿨다. 그것은 슬프디슬프면서도 안개처럼 빛과 빗소리 사이로 흩어지는 꿈이었다. 잠시 뒤 배는 다시 아팠고, 나는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과 잠시나마 그것을 잃어버렸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2

 

저녁을 차려 먹고 한참 동안 옥상을 빙빙 돌며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내려오는 계단참에서 몽땅 구기고 던져버렸다. 지난 한 해 그렇게 난간을 뒹굴며 바스라진 시의 잔해와 사체들이 적잖다.

 

 

 

3

 

어제는 여자친구가 자두 이야기를 했다. 작년 내일, 엄마의 자두 이야기였다. 그 자두에 대해서 나는 잊고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이런 걸 잊고 살아갈 줄 아는 내가 대체로 좋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내가 혹시 미친놈이거나 사이코패스거나 한 것은 아닌지 진단하기 위해 두개골을 텅텅 두드려보기도 한다.

 

엄마 묘지에 가져다 놓을 새로운 조화가 오늘 배송되었다.

 

 

 

--- 읽는 ---

작별인사 / 김영하

다정소감 / 김혼비

무엇이 예술인가 / 아서 단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안드레 애치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2-07-21 2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텅텅 정상입니다. 대구는 덥겠죠.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38   좋아요 3 | URL
대구도 시원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는데 심지어 소나기도 내리더라구요.
맑은 하늘에 소나기.

또 봄. 2022-07-21 2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는.쇼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뜬금없겠지만.
지두는 완전 다른 과일이 됐어요, 저한테.

syo 2022-07-24 19:39   좋아요 3 | URL
또 봄님 감사합니다. 저는 늘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고 있어요.
자두에 뭔가 즐겁지 않은 이미지를 덧씌워드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레이스 2022-07-21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저도 작년에 어머님 보내드리고 얼마 안되서 syo님이 어머님 보내드린 소식 서재에서 봤었네요. 사진으로 뵌 어머님 참 예쁘고 고우셨던것 같아요.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0   좋아요 3 | URL
덕분에 평안하게 잘 다녀왔습니다.
그간 내린 비에 다른 분들 묘는 많이 상했는데 엄마 자리는 멀쩡하더라구요.
역시 우리 엄마....

페넬로페 2022-07-22 08: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자두 이야기~~
syo님이 정성스레 엄마에게 자두를 익혀 드린 것을 기억해요.
그만큼 정성스러웠기에 망각할수도 있어요.
잘 다녀 오세요^^

syo 2022-07-24 19:41   좋아요 4 | URL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두 이미지에 씁쓸한 맛을 첨가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수이 2022-07-21 23: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어머님 돌아가시고 그 슬픈 자리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친구라는 건 얼마나 보잘것없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벌써 1년 전이네요. 잘 다녀와요.

syo 2022-07-24 19:42   좋아요 3 | URL
시간 진짜 빨리 갔네요. 저야 뭐 일찍부터 씩씩해졌지만 한참 고생하던 동생도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합니다.
화환 보내셨잖아요. 제가 보낼 입장이었을 때는 뭐 그게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받아보니 힘이 되더라구요.

청아 2022-07-21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럴땐 ‘좋아요‘ 말고도 ‘토닥토닥‘이나 ‘쓰담쓰담‘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하게되네요.
syo님!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3   좋아요 3 | URL
잘 다녀왔습니다 ㅎㅎㅎㅎ
토닥토닥 쓰담쓰담은 댓글로 잘 받아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당

scott 2022-07-22 0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우셨던 어머님
쇼님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3   좋아요 4 | URL
스캇님 감사합니다 ㅎ
무사히 잘 다녀왔어요.

책읽는나무 2022-07-22 06: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syo 2022-07-24 19:43   좋아요 4 | URL
날도 안 덥고 괜찮게 다녀왔습니다.
책나무님 감사합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22-07-22 08: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울은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던데 거기는 비 안 왔으면 좋겠네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쇼님.

syo 2022-07-24 19:44   좋아요 3 | URL
아니 비가 오더라구요.
하늘은 맑은데 장대비가 주루루룩 오더라구요.
근데 그때는 때마친 산 아래 까페에서 콜드브루 마실 때여서 오히려 좋았다는....ㅎㅎ

mini74 2022-07-22 0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님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저도 토닥토닥해드리고 싶습니다.

syo 2022-07-24 19:44   좋아요 4 | URL
토닥토닥 잘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토닥토닥 해주셔서 등짝 나가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