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 소나타
1
뜻밖에 장염을 맞아 모처럼 이틀 연속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워있지만. 사르르 급이라도 지속적으로 배는 아프고, 물을 마시고 그 물을 싸는 것으로 소중한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총량을 비교해 보면, 엄마 있는 병원의 병실이나 엄마 없는 집의 안방이나 도찐개찐이다.
2
병원에서 밤을 보내면 합계 한 시간은 넘고 두 시간은 못 되는 수준으로 잘 수 있다. 합계다. 결국 30시간쯤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대충 되는 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입에 집어넣으면서 자게 된다. 많이 자면 12시간도 잔다. 분명 8시에 침대에 올라갔는데 눈 떠보니 7시 50분이면 살짝 어리둥절하다. 어쨌든 일어나면 한참을 뒹굴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고마움을 음미하다가, 칼로리고 나발이고 정말 먹고 싶은 거 하나 시켜놓고 씻는다. 먹고 책 좀 읽는 동안 시간은 뚜벅뚜벅 저 혼자 잘도 가고, 그럼 나도 시간새끼 따라 병원에 가야 한다.
이런 삶이 반복되던 중이었다.
3
그래도 하루에 200쪽은 읽었고, 쓰려면 쓸 수도 있었다. 쓸 게 없어서 그렇지. 아니다. 쓸 것도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가 되었다가 애기가 되었다가 하는 엄마를 돌보고 있노라면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무진장 샘솟았다. 그러나 따져보니 그 모든 이야기가 결국 징징대는 소리로 귀결될 것이 자명했다. 위로하는 사람들 입장도 생각해야지. 허구한 날 그런 글을 읽으면 아무리 다정한 사람도 지치는 법이잖아? 나는 알라딘에 슬픔과 피로를 뿌려대는 스프링클러가 되고 싶진 않거든- 하는 논리를 시작으로 쓰지 않아야 할 이유들이 줄줄이 꿰어져 나왔다. 아, 이거 내가 쓰기 싫은 거구나. 내가 지금 안 쓰고 싶어서 명분 까는 중이구나.
그랬다고 합니다.
4
그러던 중 내 장이 꿈에도 생각 못했던 장염과 우연히 만나 심오하고도 따가운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몸의 주인은 침대에 누워 그들의 회담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 협상이 수월하게 진도를 빼는 듯, 키보드 두드릴 여력이 생겨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게 되었다. 이 한 바닥의 글을 다 채우는 동안 화장실에 몇 번 갔다 오는지 세어봐야겠다. 벌써 손가락은 접혀 있다.
5
하나뿐인 이단 우산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펴지는 우산이었지만 버튼도 듣지 않았고 수동으로 펴지지도 않았다. 비는 굵은 방울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날씨에 우산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않은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골목 끝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우산을 살만 한 돈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괜히 웃었다. 나는 고장 난 우산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울음을 겨우겨우 참으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우산을 건넸다.
"이딴 거 필요 없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아닌데. 야, 왜 울고 그래?"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다시 우산을 뺏어서 우산을 펴려고 낑낑댔다.
"우산이, 우산이 펴지질 않잖아. 저번만 해도 잘 됐는데, 꼭 필요하면 이래."
"눈물도 쌨다. 이리 줘."
할아버지가 우산을 조금 만지자 꼼짝도 않던 우산대가 활짝 펴졌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할아버지가 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 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할아버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_ 최은영, 「쇼코의 미소」
실컷 마음을 두들겨 맞고 잉잉거리면서 덮은 것은 최은영의 책이지만, 결국엔 늘 김금희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는 선명하다. 문장 때문이다. 오로지 이야기에만 복무하는 최은영의 문장. 이야기를 싣고 가기에 문장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담백하고 선명하지만, 문장 그 자체로 빛나는 구절이 적은 최은영의 글쓰기. 그래서 최은영의 작품을 옮겨 적을 때면 늘 문장이 아니라 문단을 옮겨야 한다. syo에겐 그렇게 통째로 옮겨야 하는 작가가 또 있다. 줌파 라히리가 그렇다. 그런 이유로 syo는 이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역시 그런 이유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아보라고 하면 최은영과 줌파 라히리를 그 안에 집어넣지 않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결국 최후의 한 자리는 감정도 취향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이를 위해 남겨두는 것인데.
최근에 읽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김초엽도 syo에겐 그런 작가군의 한 사람이다. 김초엽은 아마도 최은영과 싸워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글을 줄곧 쓰기로 한다면, 최은영을 이겨내지 못하고서는 김초엽은 멀리 가지 못할 것 같다. 아, 그리고 문장도.
김초엽의 문장은 아쉬운 데가 있기까지 했다. 접속사나 조사를 고를 때, 좀 더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두고 생각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같은 음절이 부주의하게 반복되는 문장은 입 안으로 몇 번 더 궁굴려 보고 썼다면 좋지 않았을까? 읽으면서 저런 생각을 꽤 했다. 어떨 때는 김초엽이 쓴 문장에 글자나 획 하나 더하고 빼지 않고서 그저 단어의 배열만 바꾸어 훨씬 더 맛있는 문장을 syo가 직접 만들어내 보기도 했다. 물론 취향이 작용했겠고, 다들 나처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syo 입장에서도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즉각 더 나은(낫다고 내가 생각하는) 문장이 떠오르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이 타이밍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한 번 물러났다 돌아와서 보니 내가 갑자기 왜 김초엽을 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장과 염의 회담이 답답하게 꽉 막힌 상태라 영향을 받은 듯하다. 얼른 답보상태가 끝나고 시원하게 뚫렸으면 좋겠다. 뚫린 내 장처럼…….
6
시몬 드 보부아르는 가르치고,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느라 정치에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르트르를 그리워했다. 아침에는 로댕 미술관 옆에 있는 뒤리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오후에는 리슐리외 거리에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헤겔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따뜻한 카페에서 지칠 줄 모르고 첫 소설을 교정했다. 그녀는 이 소설에 『초대받은 여자』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삼각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밤 시간은 신중하게 계획했다. 일주일에 이틀 밤은 샤를랭 호텔에 묵고 있는 제자 나탈리 소로킨과 함께 보냈고, 토요일 밤은 부상에서 회복하여 파리로 돌아와 몽마르트르 푸아리에 호텔에서 숙박하는 자크 로랑 보스트와 보냈다. 보스트는 토요일을 제외하면 코자케비치 자매 중 한 명인 새 애인 올가와 함께 샤를랭 호텔에서 지냈다. 이 같은 성적 문란에는 호텔 안팎의 맹추위도 부분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보부아르는 힘껏 일해서 젊은 세 여성과 보스트를 금전적으로 도와주었다.
_ 아녜스 푸아리에,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
멋있다. 진심 멋쟁이. 저것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걸까? 뭘 더 하면 그게 될까?
뭔지는 몰라도 일단 그게 장염은 아닌 것 같다. 화장실에 자꾸 들락날락거리는 건 아무래도 멋이 없다…….
7
급 ㄸ, 급 마무리…….
죄송합니다.
생활도, 필력도, 제자리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약간의 시간은 필요한 것 같다.
--- 읽은 ---
+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 149 ~ 303
+ 세상에서 가장 쉬운 통계학 입문 / 고지마 히로유키 : 147 ~ 238
+ 소소한 일상의 물리학 / 제임스 카칼리오스 : 53 ~ 278
+ 동의 해신 서의 창해 / 오노 후유미 : 215 ~ 355
--- 읽는 ---
=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경제학수업 / 박홍순 : ~ 158
= 다시, 책으로 / 매리언 울프 : ~ 72
=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 / 아녜스 푸아리에 : ~ 111
= 쇼코의 미소 / 최은영 : ~ 181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이제니 : ~ 83
= 인문학 개념정원 / 서영채 : ~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