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1
이놈의 집구석은 생겨먹기를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건물 옥상으로 가는 길이 301호의 내부에 있다. 옥상을 포기하기로 하면 아쉬울 게 없을 것도 같지만, 인터넷 선이 옥상에서 시작해 건너편 전봇대로 이어지는지라, 어쩌다 선 한 번 끊어지면 301호 아저씨한테 사정사정을 해서 옥상에 올라가야 한다. 301호 아저씨는 택시 운전을 하고 그 집 꺽다리(좀 나눠줘) 아들내미는 고등학생이었나 뭐였나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 기사님이 출동할 수 있는 시간대에 301호는 비어있기 일쑤다. 망하는 거다.
태풍이 왔다. 창 너머를 보고 있으면 저 물 저게 지금 낙수인지 분수인지 헷갈린다. 야 너네 지구 중심 방향으로 떨어져야지 지금 뭐하냐… 중력의 법칙 어디 갔어… 뉴턴 대체 어디 갔어… 아니, 설마 내가 지금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인가? 어, 쟤네 갑자기 또 막 옆으로 가네. 직립보행이네…….
이런 anti-자연법칙적 위기상황 속에서, 옥상 쪽에 고정시켜 놓은 매듭이 풀어졌는지 우리 집 인터넷 선이 지금 파도 드센 방파제에 걸어놓은 새마을운동 깃발마냥 펄럭이고 있다. 불안해 죽을 것 같다. 아, 그야말로 이것은 광케이블의 소리 없는 아우성…… 100Mbps를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다음 주는 연휴고, 월요일 화요일은 엄마 병간호를 하느라 병원에 있을 테니, 저 링링새끼가 인터넷 선을 날름 끊어먹는다면 아, 우리 집은 9월 중순까지 그냥 신석기 시대 되는 거지. 반달돌칼 그거 10만 년 전에 쓰고 나서 어디 놔뒀더라?
2
사이러스님과 또 만났다. 그 사람은 참 열정적인 데가 있다. 그 나이 때의 syo와 비교해보면 삶에 대한 확신도 있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행복의 모양새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있는 것 같다. 내부에 단단한 기준을 마련해 두어서, 아닌 것과 맞는 것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한다. 야, 근자에 보기 드문 청년일세.
3
그에 비해 syo란 어떤 인간인가.
최근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의 골자는 ‘엄마한테 잘하라’는 것이다. 어쩐지 다들 그 말을 해왔다. 다 나를 걱정하는 이야기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이야기인 것은 알지만, syo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 여덟 명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홉 번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내가 도대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살았기에 이 정도까지? 싶다. 그리고 열 번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겐 짜증조차 난다. 그 안에는 심지어 술 먹고 전화해서 “형 그렇게 살지 마” 하는 놈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대체 걔는 어떻게 아는 걸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면 늦다고 말한 친구는 양친이 버젓이 살아계시는 반면 나는 아버지를 보내봤고 걔도 그걸 안다. 도대체.
며칠 전 꼰대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친구의 글을 읽으며 정말 꼰대란 어떻게 판명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사회생활이랄 만한 것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보니 실제 유통되는 전형적인 꼰대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이런 저런 상황을 상상하며 꼰대의 그림을 그려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상상 속에서 나는 늘 나 자신을 꼰대가 아닌 꼰대질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포지셔닝은 나는 꼰대가 아니라는 무의식적 확신의 결과물이고, 꼰대의 가장 명백한 속성 중 하나가 ‘자기 인식의 철저한 결여’라는 점에서 미루어 보면, 내 안에도 이미 꼰대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syo는 스스로의 꼰대화를 방지하기 위한 지침으로 ‘먼저 물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걸로는 택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문장의 힘을 빌려 와 더 세밀한 지침으로 삼으려고 한다. 최소한 알라디너 가운데서는 모를 사람이 전혀 없을 문장을. 그 문장은 나름나름으로 번역되지만, 결국 가정이 행복한 이유는 대충 다들 어슷비슷한 반면 불행한 이유는 독창적인 데가 있다는 내용이다.
최소한 가정에 관한 일이라면, 타인의 행복을 격려하고 북돋을 때는 내 행복의 경험을 끌어와 엮어도 좋겠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으니까. 그러나 다른 가정의 불행한 사연을 만났을 때는, 내가 겪었던 불행한 가정사, 공유재의 형태로 세상에 떠도는 당연하지만 추상적인 격언,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그 가정의 구성원이 지녀야 할 자세 같은 것들을 기반으로 타인에게 충고하지 말아야지. 불행한 가정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결국 이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꼰대가 되지 않는 길이 이리도 어렵다. 결국 위로뿐인가. 그게 맞나? 아니 그냥 포기하고 그냥 꼰대로 살까? 요가가 힘들어서 차라리 이럴 바에 사유를 포기하고 말겠다던 이병창 선생님의 비명소리가 변조되어 들리는 것 같다…….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은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 남 일에 무관심해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일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이나 관계맺기의 무능함으로 인해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_ 은유, 『다가오는 말들』, 128쪽
반면,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든 아주 복잡한 사건이든 더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당연히 사물이 아니다. 산 위에 걸린 구름처럼 음식, 정보, 빛,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_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07-108쪽
그러니
내가 너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만질 수 있어서 쓰다듬을 수 있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서
사람은 그냥 갈 수 있어서
남몰래 혼자 떠나려고 하는 세상에
네가 있지 않아서
사람이 꽃이 아니길
참 다행이다
꽃이 스쳐가는 바람과 함께 너에게 갈 때
_ 이사라, 「사람」 부분
--- 읽은 ---



+ 헤겔 / 피터 싱어 : 101 ~ 202
+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 96 ~ 200
+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 191 ~ 341
--- 읽는 ---



=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 오노 후유미 : ~ 161
= 세상에서 가장 쉬운 통계학 입문 / 고지마 히로유키 : ~ 55
=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 정기문 : 180 ~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