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부터
1
어떻게 저렇게 말 못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된 건지 모르겠다. 지난 주 면접 때, 생각했던 것만큼 말을 잘 못하고 온 것 같아서 며칠 시무룩한 데가 있었는데, 한 방에 해소가 되었다. 고마울 지경이다.
보통 정치인의 이미지 하면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지 않나. 물론 잘 정련된 말은 잘 정돈된 팩트에서 나오는 것이겠고, 그러다보니 어떤 한계지점이 있었겠지만, 아 제발 팩트고 나발이고 그 전에 기본적인 언어구사력은 좀 갖췄으면 좋겠다. 비록 저들이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존재지 시민의 능력을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걸.
2
역사 공부가 힘들다고 생각될 때면 역사의 척추가 되는 중요한 주제들을 정하고, 그 주제들을 세밀하게 공부하여 기초를 튼튼하게 할 필요가 있다. 건물을 지을 때 중추 기둥을 튼튼하게 세운 후, 방을 배치하고 외벽을 칠하듯, 역사를 공부할 때도 꼭 알아야 하는 핵심 주제를 선정하고 그것들을 깊이 공부한 후, 거기에 인물이나 사건들로 살을 입혀야 한다.
_ 정기문,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8쪽
뻔하고 내실없는 방법론 같은 것들이 알고 보니 정말 위대한 지혜였구나, 하고 깨닫는 사건이 가끔씩 터진다. 와, 이래서 그렇게 국영수 중심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하라고 했던 거구나, 하나마나한 소리의 대표주자, 비결을 감추기 위한 개수작인 줄만 알았더니! 하며 찬탄하는 순간이 드물게나마 오긴 하더라.
그렇지만 그런 순간은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지구는 둥글다는 말에 감동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걸어 나가서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온 사람의 입에서 나온 와, 지구는 둥글어! 레알 둥글었어! 하는 감탄사는 지구는 둥글다는 평범한 명제에 찬란한 빛을 불어넣는다.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난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는 빛을.
뻔한 방법론이 어쩐지 막대한 질량으로 다가와 쿵쿵 두드릴 때, 책덕후는 이때 얼른 올라타야 한다. 멀리 갈 수 있다.
3
필요한 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양심과 확신에 따라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모든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갖춘 현실 세계인 객관적 세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되지 않는 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은 법과 도덕과 갈등을 빚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법과 도덕은 그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다. 반면에 객관적 세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되면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개인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객관적 세계의 법과 도덕에 맞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면 주관적 차원과 객관적 차원 둘 다에서 자유가 존재할 것이다. 자유에 대한 제약은 사라질 것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사회 전체의 요구가 완벽히 조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 개념은 현실이 될 것이며 세계사는 목표를 성취할 것이다.
_ 피터 싱어, 『헤겔』, 55-57쪽
이런 게 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저 차갑고 딱딱하게만 보이는 독일 철학자들은 뜻밖에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있다.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보면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어부, 사냥꾼,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모두들 아침에 낚시하고 오후에 사냥하고 저녁에 목축한 다음 비평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아코, 하늘 나는 자동차가 타고 싶어떠요? 이런 귀요미. 진지해서 한껏 더 귀요미.
요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병창 선생님의 새 번역 『독일 이데올로기』 1, 2권
그 제자에 그 사부인 것인가. 헤겔은 혓바닥이 꼬여서 쉬운 말도 꼬아 하는 눈 세 개 달린 괴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찾아 읽다보니 어쩐지 재미있는 구석도 많고, 왜 그렇게 헤겔, 헤겔 하는지 조금쯤 알 것도 같다. 그렇지만 덕질 리스트에 누구 이름 하나 새로 올리기에 나는 너무 늙어버린 느낌이고, 또 마르크스에 비해 생긴 것도 영 귀염성이 없어놔서 헤겔에 입덕할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vs
마르크스 vs 헤겔 외모대결 마르크스 압승
4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궤적마다 다른 시간의 기간이 있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각각 다른 리듬으로 흐른다.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세부적인 것들은 간과하고 사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양상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의 과거는 신기하게도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의 간격(기간)을 결정하는 토대는 세상을 이루는 다른 실체들과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장의 한 양상이다. 이 역동적인 장은 도약하고 요동치며 상호 작용할 때만 구체화되며, 최소 크기 아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_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98쪽
늘 느낀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은 인문학에서 과학 쪽으로 건너와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과학이 인문학을 덮치면서 이루어질 때 훨씬 완성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도 깊이 있는 울림을 던진다. 어쩌면 이건 이과생으로 살아 온 내 인생 10년 때문에 생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참과 거짓을 명확히(≠완벽히) 구분할 수 있는 영역에서 닦은 기반을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영역으로 확장할 때, 엄밀성을 최대한 보존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시간의 간격’조차 다른 실체들과의 어우러짐 속에서 결정되고 구체화된다는 이 ‘인문학적 상상력’의 결정판 같은 명제가, 과학의 옹립을 받는 진실임을 수식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능력(물론 이 책에는 수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건 그저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 읽은 ---
+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 오노 후유미 : 278 ~ 528
+ 미시경제학 한입에 털어넣기 / 사카이 도요타카 : 73 ~ 198
+ 광대하고 게으르게 / 문소영 : 150 ~ 282
--- 읽는 ---
=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 정기문 : ~ 180
= 헤겔 / 피터 싱어 : ~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