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제: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집에서 읽었던 책인데 점자도서관 책꽂이 맨 위쪽에 외로이 꽂혀있어 골라두었다. 제법 두껍고 자간도 촘촘해 시일이 좀 걸릴 책이지만 우선 첫 테입을 시작했다. 먹는 것이 사람을 말해준다? 이건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손꼽히는 실천윤리학자인 피터싱어와 뉴질랜드의 농부이자 변호사인 짐 메이슨이 공동 저작한 이 위대한 책은 세 가지 유형의 가족을 찾아 먹거리와 식생활을 촘촘히 관찰 조사하여, 우리들 밥상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내가 오늘 먹은 것을 한 번 볼까? 아침에 현미조밥과 갈치구이, 된장찌개, 취나물과 다시마줄기나물, 앗참, 그앞에 모닝커피 드립으로. 점심엔 에스프레소 커피케잌(아파트 상가 도넛 플랜트의 내가 좋아하는 도넛)한 개와 카페라떼, 저녁엔 캔맥주 2개와 수박화채. 작은딸은 라면 끓여먹게 하고...ㅠ 참, 나도 별로 좋은 엄마는 못된다. 얼마전 다이어트 하려고 마음먹은 작은딸, 내일부터는 격려차원에서 식단에 내가 좀 신경써줘야겠다. 특히 저녁메뉴는 나와 함께 좀 간단한 걸로 실천하기!! 아자!  금주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데. 난 먹으면서 너는 참으라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ㅋㅋ

 

2.                                      

 구효서의 장편소설 

 작가는 서경식 선생께 감사의 후기를 남겨두었다.  

 이게 이 책을 고르게 된 결정적 동기다. 그리고 낭만적 제목에 걸맞게 괜찮은 스토리일 것 같아 첫 테잎 시작했다.  일본인 60대 여인과 독일로 가 통역사 일을 하는 대한민국 국적의 주인공 남자, 처음부터 그들의 만남에서 대화가 이어지고, 어떤 기막힌 이야기가 서서히 나올 듯하다.

표지의 맑은 하늘색 색감에 오래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마음에 든다. 두 천재 음악가의 불꽃 같은 삶!, 이라니.

 

3.  

 1929년에 발표된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소설이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사교계에서도 유명했고 17세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시낭송회를 열 정도로 전 장르에 걸쳐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던 시인 장 콕토는 자신의 문하생이자 연인이었던 한 여인을 잃고 마약에 빠져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낸다. 이 소설은 그 시기를 극복하고자 3주만에 씌어진 작품이다. 

무서운 아이들! 앙팡 테리블은 요즘 아이들을 말하는가 싶지만 이미 1929년 그의 소설제목으로 발단된 용어다. 동성애와 근친상간, 밤마다 벌어지는 그들의 기묘한 연극,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과 어떠한 이야기든 불쑥 튀어나오는 듯한 이 소설은 반소설(anti-novel)에 속한다고 평을 받는다. 소설은 이러저러 해야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깨어버린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앙팡 테리블 같다. 연인을 잃은 그가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십대들의 이야기로 어떠한 기존관념의 전복을 말하고 싶었을까. 더 읽어봐야 알 거지만. 아무튼 네번째 테잎까지 오늘 마쳤더니 두껍지 않은 책이 절반을 넘어버려 한 번만 더 녹음하면 가볍게 끝날 것 같다.^^  

기성관념은 어쩌면 죄악이다. 내가 어떤 나인데, 얼마나 소중한데... <앙팡 테리블>은 그런 아이들의 순수하고도 불안정한 세계를 보듬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아가 된 남매, 폴과 엘리자베트에게 브르타뉴 출신의 할머니가 의미있는 타인으로 등장한다.  
 

아무튼 생기는 거 없어도 난 이 일이 너무 좋다.

저녁에 또 다른 곳에서 순수봉사일(이주여성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랑 통화하다가 서로 한숨을 좀 쉬었다. 친구는 아이들과 원만하지 못하게 지내고 있어 답답해했다.  중1, 고1의 딸과 아들을 둔 친구는 나보다 여러가지로 아이들에 참 잘 하는 애다. 특히 딸은 어릴 적부터 심리적 장애가 있어(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참 힘들어 했고 백방으로 정성을 다하는 걸 다 봐서 안다. 나로 말하자면, 버럭거리는 건 똑같다. 요령도 없고 말을 돌려서 잘 할 줄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분노감 같은 게 타인에 대한 의존감에 더해 깊은 것 같다.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고 또 자중자애할 일만 남은 듯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려고 해봐야 소용 없는 일. 물질적 손해는 손해도 아닌 것. 작은 게 결코 작은 게 아닌 것. 뭔가 잃고 손해볼 것이니 조심하라던 점쟁이 말을 순간순간 잊지 않고 있기가 어디 쉽냔 말이다. 나를 억압하고 나를 조종하려고 드는 악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다. 마음 너무 아프지 말고 힘내라고 하니까 친구는 이것저것 주변일이고 가족일이고 다 마음에 두고 살면 맨정신으로 못 살았을 거라고 답했다. 

몇 해 전에 식도암 수술을 받았던 나의 외삼촌이 며칠전 영면하셨고 한달 전 유방암 수술을 한 동서가 퇴원했다. 친정엄마는 앞니 9개를 새로 해야할 형편이 되었다. 그냥 쑥 빠져버렸다는... 머리가 늘 아프다는 큰딸은 여전히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로 오늘 개학해서 기숙사에 들어갔고 작은딸은 일주일 남짓 방학이 남았다. 몸이 완전히 커버린 아이, 새로 사준 수영복 갖고 친구랑 실내수영장 한두 번 가야할 텐데... 미안하다. 그리고 방학해서 집에 잠시 와 있던 큰딸에게 좀더 잘해주지 못하고 성마른 화를 자주 내었던 난, 지금 마음이 아프다. 왜 이 모양인지. 사실 요즘 그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얼마나 착한지 모른다. 한 눈 팔지 않고 밖으로 돌지도 않고 독서, 음악, 영화, 기타, 공부만 하며 그저 운동화나 속옷, 기숙사 방에 둘 거울, 머리핀 정도 사달라고 하는 게 고작인데 그걸 다 해주진 못하고 새 운동화와 거울은 사서 들여보냈다. 아쉬움 없이 다 해주고 싶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으며 책장이 이상하게 잘 안 넘어간다고 뾰로통하던 아이, 차에 타서도 꼭 책에 눈을 두는 아이,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기를. 노랗게 머리 염색하고 싶다고 또 그러는 걸 일년반만 참고 대학생 되면 하라고 달랬다. 앙팡 테리블! 그 나이 때의 아름다운 영혼이 사무치게 아프다. 딸애들을 보면 그래서 더 복잡한 심경이 된다. 나로 말하자면 너무 순결하고 무결했던 그때의 영혼은 어디로 가고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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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0-08-1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더위가 무색하게 요즘도 바쁘시군요. 녹음실은 시원한가요? ^^

프레이야 2010-08-18 23:52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전 아직 휴가라고 가질 못했지만
녹음실은 완전 피서하기에 최고에요.
좁은 공간에 에어콘 혼자 틀고 추워요.ㅎㅎ
게다가 좋은 책까지 읽고 일석삼조에요.

yamoo 2010-08-1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맬맬 다른 책들을 동시에 봐요..하루에 7권 본적도 있어요...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의 책을 보는 것은 정신을 녹초가 되게 합니다..이론서들만 봐야 해서 책읽는 게 곤욕이 될 때도 있다는..3권의 소설이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0-08-19 00:21   좋아요 0 | URL
저도 좀 그런편이에요.
야무님은 이론서들만 봐야하신다니 정말 곤욕일 때가
많겠어요.^^ 집안 곳곳에 두는 책이 다를 때도 있지요.
죽음의 밥상,은 소설은 아니구요^^

반딧불,, 2010-08-19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편하지 않은 일상을 이리도 담담하게 적으셨는지..
글을 읽는데도 안타깝네요.녹음봉사라 멋지십니다.
그저 이러저러한 일들이 빨리 지나가고 담담하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늘 아쉬운 것은 아마도 프레이야님이 노력하고 사시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날이 많이 덥네요. 좋은 밤.

프레이야 2010-08-19 15:00   좋아요 0 | URL
반딧불님 오래만이에요. 반가워요.^^
지금 이 정도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하는데 늘 채워지지 않는 것들에
연연해 마음 끓이며 사는 미욱함이라니요...
오늘도 하늘이 쨍쨍합니다. 그래도 바람이 꽤 시원해요.

마녀고양이 2010-08-19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야 언니, 세권의 녹음을 시작하셨나봐요?
ㅇㅇ, 그윽한 음색 상상만해도 좋으네요~ ^^

참,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언니가 제일 순결하고 무결하시다고 전 생각해요!!! 뽀오~

프레이야 2010-08-19 15:01   좋아요 0 | URL
아유 제가 소리도 잘 질러요.ㅋ
어떤 책은 혀에 착착 감기며 재미나게 넘어가는 게 있고
어떤 건 이상하게도 목에 자꾸 걸리는 게 있어요.
뽀오~ 히힛~ 위로 줘서 고마워요.

stella.K 2010-08-1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소리 기부도 있다던데 그거 알고 프야님 생각했죠.
늘 하는 얘깁니다만, 전 목소리는 괜찮은데 읽는 걸 떠듬거려서...ㅜㅜ

프레이야 2010-08-19 15:03   좋아요 0 | URL
목소리기부요? 그건 어디서 하나요?
스텔라님 목소린 못 들어봤지만 정말 좋으실 거 같아요.^^
떠듬은 전 별로 안 그런 편인가봐요. 그러니 진도가 쑥쑥 나가요.ㅎㅎ

sslmo 2010-08-1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나이 때의 아름다운 영혼이 사무치게 아프다. 딸애들을 보면 그래서 더 복잡한 심경이 된다. 나로 말하자면 너무 순결하고 무결했던 그때의 영혼은 어디로 가고있는지 모르겠다

또다른 절 보고 있는 것 같아서...이 부분을 제 가슴에 꼭꼭 눌러 새겼습니다.
'나는 그가 아프다'던 '롤랑 바르트'이후 참 오래간만에 사무쳤습니다.

옆에 계셨으면 손 한번 '꼬옥'잡아봤음 좋겠어요.

프레이야 2010-08-19 15:05   좋아요 0 | URL
애들한테 지혜롭고 다정한 엄마는 못 되고
제맘대로 감정풀이나 하고 그래서 반성해야돼요.^^
나무꾼님, 함께 사무쳐주시고 손 잡아 주셔서 눈물나려 해요. '꼬옥'

blanca 2010-08-19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의 이런 점들이 좋아요....요새 제 주변에도 아픈 사람들이 참 많아요. 건강도 이제는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 최선을 다해 절제하고 관리해야 가까스로 주어지는 것 같아요. 따님이 참 이뻐요...고 나이에 백년동안의 고독을... 은근히 남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친구들 간에 생긴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예전에 자꾸 여동생한테 은근히 그랬던 것 같아요. 못생긴 권력욕인데. 이런 저런 생각하다 가요...

프레이야 2010-08-19 15:08   좋아요 0 | URL
네, 절제가 몸에도 마음에도 필요해요. 그게 늘 문제네요.
못생긴 권력욕, 갖가지 욕구가 이기적인 방향으로만 비틀려 발현되니
문제인 거네요. 딱 맞는 말씀이에요. 저도 되돌아봅니다.
처녀자리 우리 힘내요.^^

2010-08-1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8-1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기는거 없어도 좋은 일, 그게 진짜 좋은 일이어요!
저 솔직히 프레이야님 낭독하시는 것 보고 저도 낭독 봉사 해보고 싶어서 여기 저기 알아보기도 했었어요. 그러다 흐지부지, 그리고 아무나 하는 것 아니라고 결론내렸답니다 ^^

위의 책들 소개와 더불어 프레이야님의 조용한 독백같은 글이 제 맘에도 참 와 닿아요. 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야지요. 우리에게 있던 즐거운 일들도 자꾸 떠올려보고요.
(저 오늘에야 책을 읽다가 알았네요. '프레이야'가 아름다운 황금의 여신 이름이라는 것을요. 저 참 무식하지요 ㅋㅋ)

프레이야 2010-08-19 19:11   좋아요 0 | URL
어므낫, 책에 나오나봐요?ㅎㅎ
그런 뜻도 있나본데 제가 알기론 북구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래요.
좋은뜻과 함께 요부의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다니 매혹적이더라구요.
아마 질투심도 강하겠지요. 호호~
나인님, 우리 같이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도 작은 변화에 즐거움을 찾아요.

2010-08-2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8-2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황금의 여신님.^^
광주 만남 공지 올렸어요.
따님들과 동행은 어렵겠지요?

프레이야 2010-08-21 14:05   좋아요 0 | URL
호호 언니, 작은딸한테 물어보니까 가고싶어해요.
되도록이면 데리고 가고싶어요.
올방학에 어디 제대로 데리고 가주지도 않고 아이도 답답해 하는데
알차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의논하고 연락드릴게요.

뽀송이 2010-08-23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ㅎ ㅎ 그래요,,, 말씀대로 모두 그래요,,, 아이들,,,살아가는일^^
님의 낭독녹음봉사 아름다운 일이예요.^^ 존경스러워요.^^
너무 더운데 갸녀린몸,,,잘 건사하시길~!!

프레이야 2010-08-23 18:32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저 요새 가녀리지 않아요.
튼실해요.ㅎㅎ 워낙에 먹어대서요.ㅋ
그래도 그리 안 봐주시니 다행이랄까요? 호호~~
더운날인데 건강하게 지내고 계세요.^^

2010-08-23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0-08-2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시는 프레이야님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전 두 아들들에게 소리지르는건 잘하는데 책 읽어주려면 혀가 꼬여요.^^
충분히 잘 하고 있는 따님도 미안해 하는 프레이야님도 보기 좋은 모녀예요.

프레이야 2010-08-25 23:11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소리 잘 질러요.
녹음하다보면 정말 혀가 꼬일 때가 있어요.
어떤 단어는 꼭 여러번 꼬이기도 하구요.
오늘도 '목표', '악영향' 이런 단어가 꼬였어요. 흐흑..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복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내 마음엔 독사가 산다, 청보리밭 너른 들은커녕. 

일전에 벗들과 변두리 어느 유명한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먹었다. 다 먹고 나서 경관이 좋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노란 줄무늬의 가는 뱀(아마도 줄뱀)이 스르륵 지나가는 것을 일별했다. 선명하고도 매혹적인 그 줄무늬와 몸통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 소리. 그냥 무심한 풍경 하나 오롯이 들어앉히지 못하는 못된 사진사 같은 내 마음이 그 뱀 한 마리 때문에 설레며 요동쳤던 기억이 난다. 또, 어쩌자고, 예쁜 뱀 한 마리를 마음에 두냐 말이다. 무섭다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고 다그치는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하면서 나는 잠시 그 뱀을 더 생각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왜 예쁘던데? 이러며...  

 

無心!  마음이 빈집이 되어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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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11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깜짝이야...독사래서 괜히 놀랬잖아요^^
나름의 체취가 있고, 쓰다듬으면 엄청 부드럽고 오싹했었다는 개코친구의 예전 감상이 생각납니다~

프레이야 2010-08-11 20:11   좋아요 0 | URL
독사 맞아요, 제가요. 아니, 제마음이요ㅎㅎ
집에선 완전 왕비병이랍니다. ㅋ
흐흑 친구분 뱀을 만져보셨단 말이에요?

라로 2010-08-11 20:13   좋아요 0 | URL
저희 아이들도 뱀을 만져봤어요~.
전 뭐했냐고요??? 으악 소리 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죠~.ㅎㅎㅎㅎ

그 친구분은 저와 같은 부류네요,,,ㅎㅎㅎㅎ

소나무집 2010-08-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운전하는데 앞에서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뱀을 발견하고는 멈칫멈칫 서행했어요.내가 그 녀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속력을 냈다면~ 아우, 상상하기도 싫어~

프레이야 2010-08-11 23:18   좋아요 0 | URL
걔도 살아야죠. 길을 가로지르는 힘겨운 여정이었을지도요.
아우, 속력을 내셨더라면, 저도 상상하기 싫어요. 소름돋아요.

마녀고양이 2010-08-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 줄무늬 뱀 한마리. 어린 왕자의 그 뱀일까요?
언니가 보셨다는 뱀..... 이미지만 선명하네요. 맘 속의 독사, 나쁜건가요? 잘 모르겠어요.

프레이야 2010-08-11 23:46   좋아요 0 | URL
선명한 노랑줄에 감청색 바탕인데, 감청색줄에 노랑바탕일 수도 있어요.
간격이 아주 고르게 그어져있었어요.
한눈에 스쳐간 또렷한 어떤 이미지!
정말 우리 사는 것도 그런 한 순간의 강렬함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일 수도 있을까요?
마음속의 독사,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시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어요.
그래요, 우리 누구도 나쁘지 않아요.^^

마녀고양이 2010-08-12 11:48   좋아요 0 | URL
프야 언니, 저는 노란 뱀을 강렬하게 보시는 언니가 좋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를 갖지 않은 사람, 한가지 색으로만 물들은 사람이 과연 좋은걸까 하는 의구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선선해지네요..... 너무 기뻐여~ 의욕이 돌아올 듯 하여.

프레이야 2010-08-12 15:00   좋아요 0 | URL
마녀님, 한가지 색으로만 물든 사람은 위험하지요.
동감이에요. 그리고 힘도 되구요.
올여름 진짜 덥죠? 어여 더더 선선해지면 좋겠어요.
하지만 뭐 이 더위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할래요.ㅎㅎ

穀雨(곡우) 2010-08-1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군생활하던 시절 뱀이 숱하게 많았어요. 습하고 무더운 야심한 밤에 내무반으로 기어들어 오기도 했고 오솔길 사이사이마다 똬리를 틀고 있던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뱀은 인간이 만든 부정적 이미지의 최대의 희생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해코지를 하지 않으면 제 갈길 무심히 가는 뱀에게 경악하고 매질을 하는 건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음,,,제 생각엔 프레이야님의 마음이 뱀에게 이끌렸던 것은 고단한 그 녀석이 애달파 보여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독은 치명적이지만 때론 매혹적일 때도 있으니...^^

프레이야 2010-08-12 15:03   좋아요 0 | URL
우리들 마음대로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 심어두고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게 어디 뱀뿐일까요.^^
선명하고 경쾌하고 유연한 그 노란 줄뱀,
어쩌면 내면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더랬어요.
(은유적으로요)

blanca 2010-08-1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프레이야님. 태어날 날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요? 프레이야님과 저. 무심하고 싶어요. 언제나 초연하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0-08-12 19:30   좋아요 0 | URL
우리 처녀자리지요!! 우리 같이 축하해요.
마음, 그게 과연 있기나 한 건가? 원래부터 없는 것이라고 언젠가 그렇게
말해주더군요. 마음수련하는 사람이요.
우리의 것이 아닌 걸 들고 다니며 종일토록 바쁜 사람, 택배기사,
그게 우리들이라고 이철수는 그림그리고 썼구요. 와닿더군요.
 

 독일 작가 토미 바이어의 소설이다.  

 요즘 <피타고라스 강론 2> 녹음과 함께 이 책은 초벌편집이 거의 완료되어 간다. 낭독녹음 중에도 무겁지 않은 필치로 재미나게 읽혔고, 의외의 위트있는 결말도 괜찮았다.  

누구나 복권당첨의 꿈을 한 번쯤 꿔봤을 거다. 620만 유로의 로또당첨이 된 어느 날,  갑자기 부자라는 버거운 이름표를 달게된 마흔살 가량의 남자. 의사 아내가 머리로만 사는 남자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살았던 남자. 아내 대신 음식을 만들며 음악작업실에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꿈꾸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찾아온 분에 넘치는 행복도 서서히 일상이 되어가고 어찌보면 그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다.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 잃어간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잃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걸 얻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복권당첨이라는 진부한 설정을 출발로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그다지 진부하지 않다. 특별한 것 없는 소소한 사건들이 펼쳐지는데 그때마다 주인공 남자의 솔직한 심리가 보여 재미있다. 사랑, 연애, 결혼, 우정, 가족, 성공, 그리고 행복이란 것에 대해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수면위로 뜬금없이 떠오르는 방식이다. 그런 이야기가 로드무비처럼 주인공 로베르트 알만의 시점에서 줄곧 이어진다. '알만'은 독일어로 '누구나', '아무나'의 뜻을 가졌단다. 화려하거나 특별히 긴장감을 주는 사건은 없다. 풍경묘사가 멋진 것도 아니고 문체가 대단히 매력적인 것도 아니다. 단지 주인공 남자의 변해가는 심리가 솔직하게 전해진다는 점이 책장을 자꾸 넘기게 한다.

이 장편소설은 어쩌면 믿음과 불신의 이야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행운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마지막 장에서 총체적 적군(내가 쓴 이 단어는 내용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이 묻는 "앞으로 어떻게 사실 거죠?"라는 말에 "살던 대로 살아야죠" 라고 말하는 남자가 목록을 작성하고 그 안에 여러 항목 중 어린이후원, 자신감과 고양이 등을 포함한 건 재미있다. 우리는 늘 뜻밖의 일들을 만나고 그럴 때마다 안절부절 당황하지만 그런대로 무던히 또 넘어간다. 행운과 불운은 샴쌍둥이 같다. 어느 한쪽만 안아주기엔 부족하다. 행운이 왔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고 불운이 왔다고 다 불행한 것도 아니다. 소소하거나 거창하거나, 행운과 불운, 한 몸의 그 낯선 방문자를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까, 그게 늘 숙제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크게 요동치지 않고 안으로 약간의 일렁거림만 간직하며 흐뭇해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애초에 내것 아닌, 감정들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히.  

어젯밤부터 이상하게 바람이 시원하다. 폭염이 갑자기 꺾인 듯. 이러다 다시 기승을 부릴지도 모르지. 이번 토요일이 벌써 입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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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날 옛적에 - 복권 당첨기
    from 마녀고양이의 느릿느릿한 서재 2010-08-03 15:05 
    프레이야 언니 리뷰에서 복권 당첨 이야기를 보자, 요즘 시간이 남아돌고 나날이 망각의 정도는 심해지는 마녀고양이는 더 늦기 전에 신나는 추억을 활자화하기로 결심한다.   지난번 댓글에 한번 이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만... 약 6-7년 전 이야기이다.  코알라의 적금을 들기 위하여 국민은행에 들렀다. 적금 신규 처리 후 고개를 드니 바로 옆 창구에서 로또를 발매한다. 줄이 꽤 길다. 그도 그럴것이 얼마 전에 1등이 나왔던
 
 
라로 2010-08-0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것 아닌 감정들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히. --->그게 되냐고요???

제 서재에 작년 후애님 만났을 때 사진 올렸어요~.ㅋㄷㅋㄷ
그냥 심심해서,,ㅎㅎ

오늘은 학원도 안가니 갑자기 넘 한가한 듯,,
이따 남편과 점심먹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놀려구요,,헤헷

프레이야 2010-08-03 10:11   좋아요 0 | URL
그건 삭제 잘 하셨어요. ㅎㅎㅎ
감정에 늘 휘둘리는 저, 바로 저를 반성하며 썼다우ㅠ
그게 안 되니 말에요.
남편분과 점심 맛나게 드세요. 오늘 좀 시원해요, 여긴.
팔랑나비님 생일 축하축하해요!!! 소중한 날이에요.

라로 2010-08-03 10:35   좋아요 0 | URL
삭제한줄 알고 있었더만 안했나봐요,,,지금 삭제 다시 했다는,,^^;;;
왜 이러고 사는지,,,ㅠㅠ

더운날 태어나느라 수고했다는 님의 글 읽고 눈물이 났잖아요~.ㅎㅎㅎㅎ
저희 엄마에게 물어보면 오늘보다 10배는 더 더운날이었다고 하실거에요,,,
어찌나 더웠다며 이를 가시는지...

남편 말로는 더운날 태어나서 제가 hot한 사람이라고 하지만,,ㅋㄷㅋㄷ

배려심 많은 프레이야님은 그래서 좀 더 선선한 날에 태어난거죠???ㅎㅎㅎ

남편과 점심 먹을때까지 혼자 놀려구 했더니 방금 문자왔어요.
자동차검사해야한다고,,더운데,,ㅠㅠ

더운날에도 기운차려서 팔랑거리고 올께요~.
님은 오늘 낭독하러 가시남요???
소중한날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보내세요~~.헤헤헤헤

꿈꾸는섬 2010-08-0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운과 불행은 샴쌍둥이, 그런 것 같아요. 행복하다고 마냥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마냥 불행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0-08-03 18: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꿈섬님.^^
하루에도 몇번씩 그 쌍둥이가 이쪽 저쪽을 보여주네요.

sslmo 2010-08-0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블로그에 오면,새로운 책들을 만나게 돼서 좋아요.
만약 이 곳을 몰랐다면 저와는 연결되기 힘들었을 책들이지만,
님의 페이퍼를 보니 불끈~읽어보고 싶어져요~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는 말을 이렇게 바꾸려구요.
할일은 많고 읽어야 할 책도 많다~^^

프레이야 2010-08-03 18:06   좋아요 0 | URL
이 책, 가볍게 읽을 수 있어요.
정말 읽어야할 책이 무지 많아요. 마음만 조급해서리..^^

마녀고양이 2010-08-03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좋은데여....
그리고 언니! 마리 리뷰 뽑히신거 축하드려염!!!
오만원 한도에서 실컷 쏴주세여... 부산서 일산 까짓거 거리가 껌이죠 머.

프레이야 2010-08-03 18:08   좋아요 0 | URL
그래요? 몰랐어요. 어디 났어요?
오만원요? ^^ 여름에 왠 선물이래요. 고마운 일이네요.
껌으로다가 오만원어치 쏠까요? ㅎㅎ

blanca 2010-08-0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밤 바람에 가을이 살짝 묻어 있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마리 리뷰 뽑히신 거예요!! 우아! 대박으로 축하드려요. 저는 요행하고는 항상 거리가 멀어서 살면서 한 번쯤 그래봤으면 좋겠어요...더운데 녹음하시기는 힘들지 않으세요?

프레이야 2010-08-03 18:09   좋아요 0 | URL
그죠? 어젯밤부터 바람이 갑자기 시원해요.
축하, 고마워요. 어디 났는지 찾아가봐야겠어요.
저도 복권당첨 같은 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에요.ㅎㅎ
녹음실은 완전 시원해서 제겐 피서랍니다.^^

루체오페르 2010-08-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처음 알게 된 책인데 마녀님의 복권 당첨기까지 알게되네요.ㅎ

프레이야 2010-08-03 18:0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루체오페르님^^
마녀님 당첨기는 제가 다 두근두근 부럽더라구요.ㅎㅎ

꿈꾸는섬 2010-08-03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마리여사 이벤트 당첨 축하드려요.^^(당첨될 줄 알았어요.ㅎㅎ)

프레이야 2010-08-03 18:10   좋아요 0 | URL
호호 고맙습니다.^^

순오기 2010-08-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마음산책 리뷰대회 당선될거라고 내가 장담했잖아요.^^
쓸줄은 몰라도 볼줄은 안다니까요.ㅋㅋ
축하해요~~ 여름에 책사면 좋지요.

프레이야 2010-08-03 18:20   좋아요 0 | URL
에고.. 호호 고마워요, 오기언니^^
3등이 어디래요~~
그러고보니 참 오랜만의 리뷰 당첨이에요.
그동안 제가 게으름도 부렸지만요.

라로 2010-08-0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당선된걸로 한턱내시는 대신 후애님만남 이벤트에 오세요~~~~.
차비로 쓰시면 어떨????^^;;;;

프레이야 2010-08-07 19:42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전 너무 멀어 못갔어요.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지요?^^
서울엔 오늘 비 온다고 하던데요..

穀雨(곡우) 2010-08-0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복권에 대한 감흥은 제가 초큼 남다릅니다. 몇해전에 지인들과 거나하게 한잔하고
집으로 가던길에 생전 사지 않던 복권을 샀더랬죠. 근데 이게 숫자가 5개나 맞았지 뭡니까..ㅋㅋ 더 요상한 건 아무렇지도 않더라는거죠.(당첨금이 작아서 그랬나?ㅎㅎㅎ)
그런고로 소소한 일상에 깜놀하는 정도여서 담에 1등에 당첨되면 이 책 읽도록 할께요...
(푸핫)

프레이야 2010-08-07 19:43   좋아요 0 | URL
당첨금 작아도 걸리는 맛이 어딘가요?^^
그런데 정말 거액이 당첨되면 이 책의 주인공처럼 변화가 일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ㅎㅎ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이 감동을 주는 법은 늘 이렇다. 이래서 그를 밀쳐낼 수 없다. 철저하게 비정하게, 혹은 비장하게 읽히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역시 로맨티스트다운, 서늘한 풍경을 그려주는 방식. 몇번인가 책장을 그냥 덮을까, 하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선 먹먹해서 문장을 붙들고 앞뒤로 왔다갔다 머뭇거리기도 하고, 단문들로 빠르게 치고 나가는 문장들을 헤집고 나아가는 일이 그닥 고된 일도 아닐텐데 꽤 더디게 읽혔다. 추상적인 단어와 관념속의 어떤 이미지들이 치고 들어왔다가 또 치고 나가는 걸 반복하는 과정에서 성웅 이순신보다 전쟁터에 나가있는 한 사람이 도드라졌다. 바다이거나 육지, 그 전쟁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시공을 초월한 우리 삶의 보편적 공허함 속에 건재해 있다.  

그 공허함이 부정적인 것일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저 너머의 지점에 서서 미성숙한 나를 그윽히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긍정적이어서 오히려 섬뜩하다. 신의 눈길이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저 안고 가야할 숙명과도 같은, 생을 사는 목숨의 권리에 대한 부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외롭게 견뎌야할 폭염과도 같다. 폭염이 연일 육신을 누르고 정신마저 지치게 하는 즈음, 그것은 생의 그렇게나 대단한 폭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 생에 마지막 폭염이라 생각하고 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칼의 노래>는 우리 삶의 무수한 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온갖 냄새가 창궐하는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법에 대한 고찰이다. 적들은 전체적으로 밀려오고, 실체가 없다. 개별적으로 닥쳐올 때마저도 그것은 하나의 전체로서 압박한다.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것에 무엇을 걸었던지 모르겠다. 오늘도 내 것이 아닌 오욕칠정의 감정들을 부여잡고 번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들도 '나'가 대적할 대상이 애초에 아닌지도 모른다. 내 것이 아니라면 그냥 놓아버리면 그만인 것을, 미련하게도. '나'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적들, '나'에게 불친절하고 '나'를 오역하는 세상의 모든 적들, '나'의 총체적인 반군들에게 취할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인가.  

글벗과 저녁을 먹고 매미소리 들으며 평상에 앉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달을 살고 죽음을 맞을 매미 - 수매미 - 는 그악스레 울어댔다. 그리 울어대면 장렬한 죽음이 되려나. 한 달 전에 지리산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는 우리 또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적은 온몸에 퍼진 암세포였다. 죽음의 방식을 일부 선택한 여인의 이야기가 이순신이 선택한 자연사와 겹쳐졌다. 순간, 그악스레 사는 법을 모르고 아직도 꿈을 꾸고 사는 어줍잖은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말했다. 연이어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속해 있을 공간에 대해서도 말했다. 아름다운 도시, 아니면 사랑하는 자, 그러니까 적의 품? 지금 살아온만큼의 세월을 앞으로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장수시대가 끔찍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지금부터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 된다. 물론 건강이 유지되어야 그것도 가능한 일이다. 실버타운으로 들어가는 날을 벌써 이야기하는 건 어리석다할지 모르지만 그런 걸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장이 없는 시대다. 그러나 나는 현명하지 못하여 현실적인 걸 대비할 줄 모른다. 그냥 적들과 부대끼며 자연사할 것이다. 그정도면 족하다. 장기는 기증할 것이다.  

적은 무수하다. 질병, 배신, 절망, 증오, 죽음...... 그리고 사랑.  
김훈은 책머리에서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니 적의 이름은 '불가능'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  

우리가 희망을 걸고 꿈을 꾸는 것들은 생에 최대의 적이다. 그것들은 늘 절망을 안겨주고 잠시나마 비상하던 꿈을 깨게하여 진흙탕에 구르게 한다. 비루한 우리들은 오늘도 꿈을 꾸었고 또 깼다. 내일은 내일의 꿈을 꿀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늘 약속을 어기고 절망을 또 심어줄 것이다. 가치는 혼돈을 정의는 오류를 몰고온다. 절박하다. 그 오류와 모순이 최대의 적이다. 김훈은 절박한 오류를 안고 홀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책머리에.  

그러나 나는 적이 애초에 없었듯 사랑도 애초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기루에 불과한, 또는 제멋대로 모양을 바꿔 흐르는 구름떼와 같은 것.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불가능에 대한 사랑", 적은 그런 게 아니다. 살기등등한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58쪽)"이다.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에 죽는 것이 자연사라고 확신한다. 1인칭 화자 김훈의 언사이지만, <칼의 노래>는 두 인물간의 감정이입과 거리두기가 꽤 적절하다. <칼의 노래>는 '칼의 울음'으로 시작하여 '들리지 않는 사랑노래'로 맺는다. 후자는 다소 김훈답지 않은 소제목인가. 김훈 작품의 매력은 냉소와 절망으로 일관하는 듯하다가 세상끝에서 발하는 처절한 희망으로 치닫게하는 기운이다. 게다가 그는 현실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낭만주의자의 밑얼굴을 감추지 못한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의 함대는 수없이 진을 바꾸어가며 펼치고 오므렸고 모이고 흩어졌다. 대장선이 후미에 있을 때 이물 너머로 바라보면 함대는 적과 마주잡고 쉴새없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무도자처럼 보였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고정된 적을 조준하는 일은 어려웠고 나를 고정시키고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도 어려웠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나, 모든 유효한 조준은 이동과 이동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내가 적을 조준하는 자리는 적이 나를 조준하는 표적이었다.(58- 59쪽)

 
   

 

학익진을 펼치며 적과의 춤을 추는 이순신을 그려본다. 춤을 추듯 생을 산다면 죽음도 그러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결국 칼로 베어지지 않는 아득한 적을 '내 마지막 바다'로 불러 한줄기 일자진으로 맞이하려는 그를 그려본다. 명과 왜의 협약으로 퇴진하는 왜군을 공을 세우는 기회로 삼지않은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상도땅 정도는 왜의 손에 들어갔을 수 있다고 한다. 현명하기보다 무모하기, 두려움 앞에 두려움 그 자체로 나서기. 적의 칼에 베어져도 전쟁터에 '속하여' 맞는 자연사를 꿈꾸는 그는 어쩌면 적을 가장 사랑한 사람, 주어진 올무의 삶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나의 전쟁터에 제대로 '속해' 있는가.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려니."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검명과 이순신의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 속에 내가 속해 있는 것이다. 만개한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적들도 한갖 꿈속의 꿈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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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7-3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형이상학을 치고 오르는 느낌. 그리고 처절한 외로움. 몇 번을 읽어도 아직까지 잘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0-07-30 10:41   좋아요 0 | URL
그의 문장은 처음과 두번째의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결말 부분에서 그 처절한 외로움이 더욱 강하더군요.
삶도 죽음도 결국 홀로 감당해야하는 것이겠지요.

마녀고양이 2010-07-3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끈질기게 대항하는 죽음을 맞고 싶지 않아요. 그건 모든 이의 소원일까요?
너무너무 끈질겨서, 길게 늘어지는, 너무 처절한 그런 죽음은 싫어요.

언니.... 날두 더운데,, 너무 난해해염~ 아하하

프레이야 2010-07-30 10:42   좋아요 0 | URL
매미소리 짜르르~해요, 아침부터.
날도 더운데 그냥 난해하게 이럴 거 없이 단순하게 살까요?
아웅~~ㅎㅎ

비로그인 2010-07-30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 훈은 사람도 문장도 강한 그 마초성?에 괜히 저항감을 느끼게돼요. 그 문장의 힘에 혹하면서도 모음 수필집말고 실제로 소설을 읽은 적은 한번도 없다는.. 그러나 안 읽고 있기엔 아까운 작가겠지요?

프레이야 2010-07-30 20:06   좋아요 0 | URL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여성성에 오히려
연민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생리에 대한 묘사는 경험해보지도 않은
그가 어찌 그리 더 세세할까요. 자료를 보고 썼다고 하지만 말에요.
내치기엔 매력이 심한..ㅋ
만치님, 더워서 어찌 지내나요?

stella.K 2010-07-3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안 썼던 기억이 나네요.
이야기의 배경 보단 실존에 더 많은 촛점을 두고 썼다는 생각이 드는데,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난감하더군요. 그땐 서재질 초기이기도 해서
리뷰를 쓰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았지요.
다시 읽으면 써 지려나?
공무도하를 읽겠다고 하곤 여태 못 읽고 있습니다요.ㅜ

프레이야 2010-07-30 19:5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리 생각했어요. 실존에 대한 소설.
공무도하, 읽으시면 괜찮다 느끼실 거에요.^^

순오기 2010-07-3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을 읽었어도 세월이 흐르니 느낌만 남아 있지, 구체적인 감상은 가물가물해요.
김훈은 정말, 이순신과 난중일기의 문장을 사랑했지요.

프레이야 2010-07-30 20:00   좋아요 0 | URL
김훈의 문장은 두번 읽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전 두번 읽진 않았지만 두번 읽으면 확실히 명징할 거 같구요.

hnine 2010-07-30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도 우연이 아니었나봐요. 이번에도 김 훈의 글과 프레이야님의 글을 구분 못하며 읽었어요.
'사랑'도 '적 (敵)'이라 함은, 사랑이 곧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냉소와 절망으로 일관한 것 같으면서 드러내는 낭만주의자의 얼굴이라, 훌륭한 리뷰입니다.

프레이야 2010-07-30 20:0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김훈이 참 낭만적이구나, 생각들어요.
결국 그의 그런 면모가 훨씬 현실적인 게 아닐까 싶구요, 역설적으로.
문장을 조금 수정했어요. 감정이입이 다소 심했던지요.^^
 

회원신청도서라 어딘가에서 어서 듣고 싶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위해 되도록 빨리 마쳐주고 싶었다.  어제 제1권을 끝내고 2권으로 들어갔다. 1권에서도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글귀가 너무나 많았는데 2권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사이사이에 유머러스한 일화를 소개하며 라즈니쉬는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전한다.  

이 책을 읽으며 특히 어떠한 단어가 갖는 진지한 의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향해야할 것 중, 행복이 아니라 '지복', 심각함이 아니라 '진지함', 다원성이 아니라 일원성 즉 '전체성'. 신이 우리에게 육신을 준 것은 물질주의자가 되라는 것이고 영혼을 준 것은 정신주의자가 되라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느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단지 어떤 일을 해도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할 때 무목적성으로 나아가는 현자의 길을 간다고 한다.  바보와 현자의 공통점은 모두 목적없이 행한다는 사실이지만 깨어있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 난 지금 깨어있는 것일까, 미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삶은 매 순간 변한다. 진실로 깨어 있는 사람은 매 순간에 감응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감응한다. 그는 어떠한 편견도 지니지 않는다. 머릿속에 과거를 저장하고 다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그 상황을 통해 행동할 것이다. 그는 감응하는(responsive) 사람이 된다. 이것이 '책임(responsible)'이라는 단어의 의미다. 

나에 따르면 감응하는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소위 도덕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감응할 줄 모른다. 

책임(responsibility)이 도덕성보다 더 근본적이다. 이 'responsibility'라는 말에 의해 나는 현재 순간에 감응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나는 이미 마련된 형식이나 그 동안 축적된 선입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순간에 감응할 때 그 행동은 그대를 자유롭게 한다. 이 때 그대의 행동은 항상 선하고 항상 적합하다.  (피타고라스 강론 II, 40쪽, 계몽사 오쇼 라즈나쉬 사상 선집 8)

 
   

 

 

1953년,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라즈니쉬의 명상을 따라갈 순 없지만 참으로 지혜로운 이야기들이라 녹음 내내 느껍다. 나같이 아둔한 사람은, 읽을 때만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구절들을 따라 좀 지혜로워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라즈니쉬의 제자이며 인도 푸니에 살고 있는 손민규의 번역도 낭독하기에 참 좋다. 번역 문장이 짧고 간결하여 숨을 고르게 하여 읽을 수 있고 내용이 명확하게 전달되는 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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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0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7-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울림이 크죠, 라즈니쉬는?!

후애(厚愛) 2010-07-2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놀러오세요~
<캡쳐 이벤트>하거든요.ㅎㅎ

blanca 2010-07-2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응하는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이다...아아 명심할래요. 그 동안 축적된 선입견에 행동하는 중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깨입니다. 고마워요.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10-07-26 01:31   좋아요 0 | URL
책에선 마호메드와 이슬람교리 중 일부다처제를 언급하더군요.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 시대의 요구에 유연하게 감응하며
대처하는 지혜를 말하더군요. 축적된 선입견은 자기중심적으로
쌓이고 시대정신에 감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블랑카님 고마워요.^^

마녀고양이 2010-07-25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견이 없이 사는....... 정말 정말 제게 필요한 말이랍니다.
저는 너무 쉽게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평가라는 자체를
없애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람이나 세상은 한단어, 한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져...... 프야 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