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복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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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엔 독사가 산다, 청보리밭 너른 들은커녕. 

일전에 벗들과 변두리 어느 유명한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먹었다. 다 먹고 나서 경관이 좋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노란 줄무늬의 가는 뱀(아마도 줄뱀)이 스르륵 지나가는 것을 일별했다. 선명하고도 매혹적인 그 줄무늬와 몸통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 소리. 그냥 무심한 풍경 하나 오롯이 들어앉히지 못하는 못된 사진사 같은 내 마음이 그 뱀 한 마리 때문에 설레며 요동쳤던 기억이 난다. 또, 어쩌자고, 예쁜 뱀 한 마리를 마음에 두냐 말이다. 무섭다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고 다그치는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하면서 나는 잠시 그 뱀을 더 생각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왜 예쁘던데? 이러며...  

 

無心!  마음이 빈집이 되어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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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11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깜짝이야...독사래서 괜히 놀랬잖아요^^
나름의 체취가 있고, 쓰다듬으면 엄청 부드럽고 오싹했었다는 개코친구의 예전 감상이 생각납니다~

프레이야 2010-08-11 20:11   좋아요 0 | URL
독사 맞아요, 제가요. 아니, 제마음이요ㅎㅎ
집에선 완전 왕비병이랍니다. ㅋ
흐흑 친구분 뱀을 만져보셨단 말이에요?

라로 2010-08-11 20:13   좋아요 0 | URL
저희 아이들도 뱀을 만져봤어요~.
전 뭐했냐고요??? 으악 소리 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죠~.ㅎㅎㅎㅎ

그 친구분은 저와 같은 부류네요,,,ㅎㅎㅎㅎ

소나무집 2010-08-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운전하는데 앞에서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뱀을 발견하고는 멈칫멈칫 서행했어요.내가 그 녀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속력을 냈다면~ 아우, 상상하기도 싫어~

프레이야 2010-08-11 23:18   좋아요 0 | URL
걔도 살아야죠. 길을 가로지르는 힘겨운 여정이었을지도요.
아우, 속력을 내셨더라면, 저도 상상하기 싫어요. 소름돋아요.

마녀고양이 2010-08-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 줄무늬 뱀 한마리. 어린 왕자의 그 뱀일까요?
언니가 보셨다는 뱀..... 이미지만 선명하네요. 맘 속의 독사, 나쁜건가요? 잘 모르겠어요.

프레이야 2010-08-11 23:46   좋아요 0 | URL
선명한 노랑줄에 감청색 바탕인데, 감청색줄에 노랑바탕일 수도 있어요.
간격이 아주 고르게 그어져있었어요.
한눈에 스쳐간 또렷한 어떤 이미지!
정말 우리 사는 것도 그런 한 순간의 강렬함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일 수도 있을까요?
마음속의 독사,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시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어요.
그래요, 우리 누구도 나쁘지 않아요.^^

마녀고양이 2010-08-12 11:48   좋아요 0 | URL
프야 언니, 저는 노란 뱀을 강렬하게 보시는 언니가 좋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를 갖지 않은 사람, 한가지 색으로만 물들은 사람이 과연 좋은걸까 하는 의구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선선해지네요..... 너무 기뻐여~ 의욕이 돌아올 듯 하여.

프레이야 2010-08-12 15:00   좋아요 0 | URL
마녀님, 한가지 색으로만 물든 사람은 위험하지요.
동감이에요. 그리고 힘도 되구요.
올여름 진짜 덥죠? 어여 더더 선선해지면 좋겠어요.
하지만 뭐 이 더위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할래요.ㅎㅎ

穀雨(곡우) 2010-08-1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군생활하던 시절 뱀이 숱하게 많았어요. 습하고 무더운 야심한 밤에 내무반으로 기어들어 오기도 했고 오솔길 사이사이마다 똬리를 틀고 있던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뱀은 인간이 만든 부정적 이미지의 최대의 희생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해코지를 하지 않으면 제 갈길 무심히 가는 뱀에게 경악하고 매질을 하는 건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음,,,제 생각엔 프레이야님의 마음이 뱀에게 이끌렸던 것은 고단한 그 녀석이 애달파 보여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독은 치명적이지만 때론 매혹적일 때도 있으니...^^

프레이야 2010-08-12 15:03   좋아요 0 | URL
우리들 마음대로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 심어두고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게 어디 뱀뿐일까요.^^
선명하고 경쾌하고 유연한 그 노란 줄뱀,
어쩌면 내면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더랬어요.
(은유적으로요)

blanca 2010-08-1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프레이야님. 태어날 날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요? 프레이야님과 저. 무심하고 싶어요. 언제나 초연하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0-08-12 19:30   좋아요 0 | URL
우리 처녀자리지요!! 우리 같이 축하해요.
마음, 그게 과연 있기나 한 건가? 원래부터 없는 것이라고 언젠가 그렇게
말해주더군요. 마음수련하는 사람이요.
우리의 것이 아닌 걸 들고 다니며 종일토록 바쁜 사람, 택배기사,
그게 우리들이라고 이철수는 그림그리고 썼구요. 와닿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