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복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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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엔 독사가 산다, 청보리밭 너른 들은커녕.
일전에 벗들과 변두리 어느 유명한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먹었다. 다 먹고 나서 경관이 좋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노란 줄무늬의 가는 뱀(아마도 줄뱀)이 스르륵 지나가는 것을 일별했다. 선명하고도 매혹적인 그 줄무늬와 몸통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 소리. 그냥 무심한 풍경 하나 오롯이 들어앉히지 못하는 못된 사진사 같은 내 마음이 그 뱀 한 마리 때문에 설레며 요동쳤던 기억이 난다. 또, 어쩌자고, 예쁜 뱀 한 마리를 마음에 두냐 말이다. 무섭다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고 다그치는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하면서 나는 잠시 그 뱀을 더 생각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왜 예쁘던데? 이러며...
無心! 마음이 빈집이 되어야 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