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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렇게나 예쁘고 맛깔난 책이라니! 이런 책은 포토리뷰로 해야하는데, 아쉽다. 여기 나온 39가지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을 사진 없이 보여주려니 표현의 한계에 부딪힐 것 같다. 그냥 도시락 먹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이런 책은 단숨에 보는 것보다 한 꼭지씩 야곰야곰 맛보는 게 좋다. 39명 더하기 아베 부부와 어린 딸의 '사람사는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생의 지혜가 엿보인다. 게다가 사진과 편집이 좋아 전체적으로 산뜻한 책이다.

 

부제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는 이 책을 간단하고 정확히 말해준다. 아베 부부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은 39명의 인생을 도시락과 함께 엿듣는 재미가 도시락 먹는 것만큼이나 흐뭇하다. 이 책의 미덕은 사진에 있다. 인물사진과 도시락 사진이 주로 차지하고 풍경사진도 있다. 이 책은 도시락이 주인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고 먹는 사람이 주인이다. 요리연구가의 도시락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이니 비슷비슷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제각각의 이야기와 더불어 정성어린 일상의 손길이 엿보여 하나밖에 없는 귀한 도시락이 된다.  

 

어느 날 도시락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 먹은 아베 사토루, 그가 찍은 인물사진은 정직하다. 정면을 향하고 반듯하게 선 인물의 무심한 표정과 배경에서 엿보이는 직업, 인물의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기운은 도시락을 먹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과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전자가 사회적인 자세라면 후자는 좀더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그 중 첫번째 사진, 주먹밥을 한입 가득 미어터지게 베어무는 남자의 사진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도시락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웃음 짓는 얼굴에는 녹록하지만은 않은 생을 살며 둥글려진 생활의 기술이 엿보인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서 박찬일은 랍스터를 휘지 않게 잘 삶기 위해 가슴에서 배로 찔러 넣는 부젓가락 이야기를 하며 "당신 접시에 오른 랍스터가 반듯한 것은 결코 그 녀석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호쾌하게 정곡을 찔렀다. 아베 부부는 도시락 사진에다 그 사람이 지나왔고 현재 살아가는 시간을 간결하게 담아낸다. 굳이 도시락이 아니어도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겠지만 도시락을 매개로 벽을 넘어가기 수월했을 듯. '도시락의 시간'은 '도시락에 담긴 시간' 혹은 '도시락이 먹은 시간', 더 평이하게는 '도시락과 함께한 시간'이 되겠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건 39가지 특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이다. 직업이 특이하다는 건 내 소견일 테다.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수는 엄청나다고 들었지만 내가 처음 들어본 직업도 많았다. 대충 열거하자면 집유원, 해녀, 산사음악연주자, 증류소직원, 말 체중 측정 담당자, 수타면 장인, 모래찜질온천 직원, 관광마차 마부, 원숭이 재주꾼, 아이누 예술인, 사찰승려, 북 연주자, 가야부키(일본 전통 초가집) 장인, 옛날이야기꾼, 스키 투어 가이드 등등.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냥 할머니, 고등학생, 유치원생도 있다.

 

생활과 가족을 말하며 그들 직업에 서린 애환을 즐거움으로 승화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솔하고 밝다. 도시락에 담긴 애정과 배려,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들에서는 어김없이 훈훈한 마음에 젖게 된다. 첫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은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힘들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며 손수 자신이 먹을 주먹밥을 싸고, 또 첫 새벽에 출근하는 역무원 아내를 위해 어떤 남편은 손수 아내가 먹을 도시락을 싼다. 아이들 도시락을 손수 싸주는 아버지, 하트를 보면 행복 모양이 떴다고 좋아하는 유치원생 아이에게 하트모양 계란말이를 꼭 싸주는 일하는 젊은 엄마, 먹은 상태를 보려고 도시락을 씻지 말고 가져오라는 아내, "내 나이 때는 뭐든 조금만 있으며 되거든"이라고 말하며 멀리 있는 딸이 보내주는 고기로 도시락을 싸는 놀빛 할머니, 세상에서 하나뿐인 '스카보로 페어 베이컨'을 손수 만드는 철도 운전사 등등...

 

문어잡이 항아리를 연구 중인 디자인학과 교수는 손수 자신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고양이가 남긴 참치로 김밥을 싸오고, 고양이가 남긴 게 없는 날은 학교식당에서 200엔 하는 매실 미역 우동을 먹는 그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문어잡이 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문어잡이 항아리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문어가 도망치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잡히면 문어의 책임이 된다는 점이 무척 공정하게 느껴지죠. 문어도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그렇게 바라던 금과 은으로 된 문어잡이 항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2미터 정도 되고 무게가 약 3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거대한 항아리였죠. 만들고 나서 안에 들어가 봤는데,

문어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더라고요. 나오기가 싫었거든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금 항아리 안쪽에는 옻칠을 해놔서 바닷속에서 보면 마치 블랙홀처럼 보일 거에요.

은 항아리 안쪽은 형광도료를 발랐기 때문에 번쩍거리고요. 제 숙제는 이것을 어떻게 바다로 옮길 것인가랍니다

      - p45

 

 

"도시락은 두 사람이 먹는 것"이란 말이 좋다. 혼자 먹지만 싸준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니.

"사람에게서 삶의 활력소와 건강을 얻었다"고 믿고 말하는 증류소 직원의 말도,

"오늘도 좋은 스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일도 스님으로 있자."라고 말하는 사찰승려도 참 좋다.

육덕진 체구의 이 사찰승려는 초등학교 때 사용하던 알루미늄 도시락을 지금도 쓰는데 4학년 때 어머니가 한천을 만들 때도

그 도시락을 써서 바닥에 칼자국이 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사찰승려는 결혼을 하나 보다. 지금은 아내가 이 도시락에

밥을 싸준다니. 반찬도 절반 나눈 삶은 달걀 한 개와 생선구이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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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9-2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은 두사람이 먹는것 진짜 좋은 글귀네요 싸준사람과 먹는 사람 두사람의 정이 통한다는 뜻이 겟죠

프레이야 2012-09-26 18:49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때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두 개가 생각납니다.
한 개는 1교시 전에 이미 먹고 없었어요. 모양새는 투박해도 정성이 담긴 도시락이라야 진짜겠지요.

책읽는나무 2012-09-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낼모레 또 도시락을 싸야하는데 말이죠~
귀.찮.다.라는 생각이 먼저였는데,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문득 드네요.^^
포토리뷰 다시 한 번 올려주세요.ㅋ

프레이야 2012-09-26 18:50   좋아요 0 | URL
내일 도시락 예쁘고 맛나게 싸시겠네요.^^
갑자기 다른 사람이 싸준 도시락이 먹고 싶어진다능ᆢ 포토리뷰는 아무래도 패스에요.ㅎㅎ

블루데이지 2012-09-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고는 평범한것들에 이렇게 맘이 짠하게 묵직하게 울려도 되나 싶을정도로 저도 이책 너무 좋았어요!
이 책을 읽은사람으로서 프레이야님의 리뷰를 읽으니 복습되고, 읽을때의 감동도 다시 살아나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님께서 느끼신걸 저도 느꼈다는게 너무 기분좋으네요!
프레이야님을 지극히 애정합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2   좋아요 0 | URL
우리 같이 느꼈군요.^^ 고마워요, 블루데이지님 :)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 결코 작은 게 아니란 것.
그런 것들이 쌓이고 모이고 이어져서 의미가 되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12-09-2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말로 함축한 삶을 만나셨군요. 엄마가 싸주셨던 설탕을 살짝 뿌려서 라면 봉지에 담았던 누룽지가 생각나요.
39가지의 직업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말 정겹고 따뜻할 것 같아요.
음식에 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책은 색다른 맛을 안겨줄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글 덕분이겠지요?

프레이야 2012-09-26 16:4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자목련님. 인터뷰이들의 얘기가 장황하지 않게 나오는데
'도시락' 안에 많은 게 함축되어 있어요. 행간에 엿보이는 어떤 것들이요.^^
설탕 뿌린 누룽지는 먹어봤지만 그걸 라면봉지에 담아서 주셨군요, 엄마가요. ㅎㅎ
한 맛 더 났겠다 싶어요.
이 책은 정말 책 자체가 예뻐요.

페크pek0501 2012-09-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은 싸준 사람과 둘이 먹는 거군요. 멋진 표현이에요.^^

프레이야 님은 신간평가단으로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겠네요. 저는 책은 탐나지만 이렇게
부지런히 리뷰 쓸 자신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요. 더군다나 이렇게 성실하게 쓴 긴 리뷰는...

저, 추석 쇠러 2박3일로 대구에 간답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2012-09-27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종파에 따라 다르군요.
페크 님의 생각처럼 오히려 믿음이 갈 거 같은걸요, 저도. ^^
대구면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도시에요.
추석 맛난 거 많이 드시고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 있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일은 적당히 분배해 하시구요ㅎㅎ 리뷰는 저도 맨날 하루 늦거나 마지막날ᆢ
벼락치기 공부하던 버릇이 아직ㅎㅎ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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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이 남다른 저자들이 많은데 박찬일도 이력이 남다르다. 기자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이 치고 나가는 문장이 힘있고 맛깔져 읽는 재미가 있다. 인간관계도 전방위 같은데 김중혁 등 문학계 사람들은 물론 기자 시절 이탈리아 영화에 매료되어 이탈리아로 음식 유학을 갔을 정도이니 셰프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달걀을 몸서리치게 좋아하고 술 잘 마시고 새로운 음식 먹는 것도 좋아하고 두루 호쾌한 사람 같다. 특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미각만이 아니라 상당히 예민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저자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맛'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라는 헌사로 서문을 시작한다. 음식의 맛에 대한 이야기이고 추억의 맛에 대한 이야기다. 글쓴이의 맛의 추억이 읽는 이에게도 위로의 맛이 될 수 있다니, 맛난 책이다.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그친다면 부족하겠다. 언급된 어떤 재료든 맛나게 조리할 수 있는 '비법'이라든지 쉽고도 자신있게 해볼 수 있는 자신만의 조리법도 제공하고 있다. 유머와 농담을 섞어가며 엽기적인 먹을거리 후일담을 늘어놓고 잠시 사색에 빠지고 철학하다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참새머리 오도독 씹기나 죽어도 다리에 남아있는 신경의 꿈틀거림으로 생존을 항변하는 블랙유머의 주인공 산낙지 아니 죽은 낙지의 추억 같은 것.

 

저자에 의하면 음식의 맛이란 지구시계의 1년을 기준으로 12월 31일 오후 다섯 시의 존재, 그 인간시계의 오후 다섯 시에 나타났다. 오후 다섯 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해거름을 준비하는 시간이잖은가. 음식의 맛을 위해 공을 들이는 일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란 얘기인데 나로서는 쓸쓸하고도 충만하게 지는 해를 가슴으로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과 그 이전 시간의 추억을 곱씹는 재미도 더했다. 돌이켜보면, 음식을 만드는 일도 먹는 일도 그렇게 거룩했다.

 

세 개의 장으로 나뉜다. 1부는 우리 땅에서 몸에 지문처럼 새겨진 맛의 추억, 2부는 외국 땅의 낯선 맛의 추억, 3부는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과 맛의 추억이다.

 

1부에서는 21가지 우리 음식이 불러오는 추억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수박 화채 속에 둥둥 떠 있던 송곳으로 깬 날카로운 예각의 얼음맛, 스러져간 가부장의 권위가 서글픈 닭백숙의 기억, 각자의 입안에서 이질적인 맛의 창조를 찾아내는 아름다운 공간 배열의 남도 한상 차림, 어머니가 쌓은 찬합의 높이로 추억하는 운동회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전은 지구전(持久戰)이다,에서는 전을 대표 슬로 쿠킹으로 부르며 명절이면 소쿠리 가득 하루 종일 전을 부쳐야하는 여자들의 힘든 노동을 알아주는 대목이 나온다. 명절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그걸 알아주는 남자가 여기 있다.

 

경북 내륙지방의 배추전에 대한 추억이다.

 

전은 기름막이 있는 듯 없는 듯 바른 팬에서 천천히 요리해야 하는 음식이다. 손님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후딱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그래서 전은 지구전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학대하면서 만드는 음식이다. 그걸 아는 집을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다. 역시 늙으신 어머니를 다시 졸라야 하나.   - p83

 

 

2부에서는 15가지 외국음식의 추억을 불러온다. 나는 이 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치즈, 랍스터, 소 내장 요리, 라멘, 바칼라, 딤섬, 이슬람의 할랄푸드 등 다른 문화를 맛과 함께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흥미롭고 유익하다. 이탈리아적인 서사로 기억한다는 '대부'에 매료되어 시칠리아 섬으로 간 저자가 카놀리와 토마토소스를 첫 순서로 말하는 건 당연한 일.

 

시칠리아 유학 당시 스승, 주세페가 전하는 초콜릿 소스 토끼요리는 특별하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카카오 초콜릿으로 '가장 순수하고 가장 품질 좋은' 초콜릿을 만든 그의 초콜릿 소스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니. 주세페는 말한다.

"대지의 기운, 흙냄새, 먼지바람, 새벽이슬 같은 게 카카오의 본래의 맛과 냄새야. 잘 맡아봐. 아프리카의 카카오는 무언가 건조하고 대륙적이고, 아메리카의 카카오는 습하고 진하며 나무냄새가 많이 나. 둘 다 태양을 닮은 맛이라는 건 공통점이지." (p194) 

 

저자가 마음에 새긴 주세페의 말은 삶을 살만 한 것으로 만든다.

 

"초콜릿소스의 토끼 고기 같은 건 이제 먹지 않을 줄 알았어. 이탈리아에 맥도널드가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걸 만들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희망이 없으면 삶이 무슨 소용이지? "   - p195

 

 

이슬람의 할랄(허용,이란 뜻) 푸드에 대한 구절은 새삼 놀라운 각성이다.

 

 

할랄 푸드와 수식(手食)은 강제된 것은 아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교차점을 맞붙이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오른손을 써서, 살과 소스를, 할랄의 고기를 꾹꾹 뭉쳐 먹는 온전한 手食은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식사법이다. 신이 주신 모든 먹을거리는 손을 통해 그 존재의 각성을 불러온다. 따뜻한 음식을 체온으로 집을 때 그것은 비로소 내 몸이 될 것이란 확신을 얻곤 한다. (중략)

"손 있는 자, 그대 손으로 음식을 집으라. 신이 거기 있으리라."   - p229

 

 

 

3부에서는 황새치가 나오는 <노인과 바다> 등 9편의 작품을 통해, 한때 이러저러한 소재로 소설쓰기에 도전해봤던 고백도 있고 문학에 대한 그의 끊이지 않는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백영옥의 '스타일'을 들어 쓴 '고기 권하는 사회'에서도 아버지가 생각났지만, 박완서 '그 남자네 집'에서 저자가 길어올린 민어의 추억이 맛나다. 여기서 '포만감'에 덜커덕 걸려든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먹는 행위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혀에서 두루 느껴지는 화학적 반응에만 기대는 게 아니란 걸 집어낸다. 포식가들의 손을 들어주는 그는 진정한 미식가이지 않은가. 미식가들이야 여러가지 음식을 소량 맛보며 맛에 대한 평론까지 해야할지 모르지만 대개의 우리는 음식이 내 손을 거쳐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부풀려주는 그 포만감에 흡족해 한다. 재료는 두툼해야 하고 양도 적어서는 안 된다. 혀의 오르가슴을 더해주면 금상첨화지만 절정의 감각은 일순간의 것, 그 순간이 지나면 체감되고 망각된다. 그에 비해 포만감은 상대적으로 좀더 오래간다.

 

민어는 식도를 자극하는 통쾌한 맛이 있었다. 두껍게 썰어 질감을 살린 횟점이 식도를 넘어가며 위에 포만의 자극을

시작한 셈이었다. 미각이란 때론 화학적 반응을 넘어 물리적 현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 p272

 

 

내 아버지는 고기대왕이다. 생선보다 육류의 살점을 즐기는 당신은 여든이 넘은 생, 평생 몸을 키우고 만들고 그 몸으로 일하고 늙어가는 생명의 재료로 고기를 드셨다. 우리 삼남매는 당신 몸의 등골을 빼먹고 자랐다. 아버지가 먹은 소를 일렬로 세운다면 그 길이가 얼마일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얘길 하며 웃곤 하시는데 지금은 드시는 양 자체가 줄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도 고기가 오르지 않은 밥상은 한번도 없었다. 채식을 하면 소화가 안 되니 상추 같은 채소가 곁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생마늘이나 생양파가 채소를 대신한다. 고기는 무한정 소화가 되니 특이체질도 그런 체질이 없다. 그래도 혈압도 정상이고 성인병이라곤 없다. 아버지는 고기를 얇고 잘게 썰면 싫어하신다. 두툼한 고기살의 붉은 기운이 가시기 전에 지글지글 매 끼니 드시니 주방엔 늘 기름기가 배어있었다. 식탁도 바닥도 주방 벽지도 누렇고 찐득거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힘드실 수밖에. 그래도 밑반찬 요것조것 해야하는 상차림보다 수월하다고 하신다.

 

낚시에 걸린 민어를 바라보며 저자는 요리와 생명과 먹는 일의 숙명적 관계를 이렇게 쓴다.

 

 

고기가 사후 경직이 일어나듯 생선도 그렇다. 붉거나 푸르거나 선명한 색채의 몸통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돌듯이 사악하고 창백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생명이 사라지는 과정이다. 요리는 생명을 위해 복무하지만, 그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에서 얻는다. 육식하는 사람의 태생적인 딜레마랄까. 번민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 p268

 

 

음식의 맛, 추억의 맛은 오후 다섯 시의 맛이란 말에 끄덕거려진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하니, 나머지 절반은 무얼까.

먹어서 '내가 된' 저자처럼 해거름에 서서 맛을 추억하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멀가까운 인연들을 생각한다.

 

 

 

 

 

 

 

ps)  좋은 책에 오자가 둘 있어 아쉽다.

       p194 /아프리카 사람들은 뱀을 숭상한다. 대지를 배고 훑고 다니면서 어머니 대지와 동거한다. (배고 --> 배로)

       p263 /소설 속의 새댁은 아마도 작가의 어릴 적 분신은 혐오의 기분까지 한껏 내비치고 있었다. (분신은 --> 분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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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의 맛은 추엇의 맛이기도 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되는 글입니다. 이번 명절이 지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녀석에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파티쉐가 되어서 오라고 하면서 선물한 책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9   좋아요 0 | URL
추억을 불러주는 음식,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맛깔나게 쓰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이 책은 벗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LAYLA 2012-09-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어찌 책을 사지 않을 수 있겠어요...바로 사러 갑니다 ㅎㅎㅎ

프레이야 2012-09-27 07:43   좋아요 0 | URL
홍홍! 사셨어요?ㅎㅎ
맛나게 읽으실 거에요. ^^

페크pek0501 2012-09-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저는 글에서 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배워야겠군요. 잊고 있었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
이것도 배워 갑니다.^^

프레이야 님, 저도 오후 다섯 시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한답니다.
요즘 이 시간에 산책을 하면 죽이죠. ㅋㅋ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낙관이 때론 위험하단 생각을 하먼서도 그럼에도 그게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귀착해요. 페크 님도 해 넘어가는 그 시간을 좋아하시는군요. 와락 반가워라. 님이랑 저는 기가 비슷한 거 같다능ᆢ 호호~~~ 개와 늑대의 시간이기도 한 그 시간, 공원산책 하며 저도 호흡 좀 가다듬어야겠어요. 산책! 이 말 참 좋아요^^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폴 오스터의 어느 책표지에서 본 이후로 나는 표지나 삽화에 실재하는 수동타자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수동타자기의 추억은 그보다 더더 오래전 이십대 초반으로 거슬러 간다. 신입생이 된 나는 영문타자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학교 앞 타자학원에 등록했다. 여름으로 접어들어 한낮의 열기가 제법이었던 어느 날, 작고 낡고 후텁지근한 공간에 앉아 거리로 난 창문을 활짝 열고 차소리를 들어가며 타.닥.타.닥 ...  내 촉수는 온통 타자기 소리로 뻗치고 한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나 몰랐다. 한달 후 강사에게 물어보니 집으로 가져가서 연습할 수 있게 타자기를 대여해 준다는 것이다. 학원은 한 달이면 충분했고 집에서도 한 달이면 되었다. 한글타자보다 영문타자가 훨씬 쉽다. 받침이 없으니.

 

한글타자기도 그 후 대여해 와 집에서 연습했다. 몸으로 익힌 건 잊어먹지 않는다더니 지금도 영문타자를 더 잘 친다.  이후 개인용 컴이 보급화되고 누구나 부드러운 자판에 미끄러지듯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수동타자기의 촉감과 소리가 참말 좋다. 먹끈를 갈아끼우며 손이 시커멓게 되던 일, 한 행을 치면 왼쪽에 달린 막대를 조작해 덜커덩 행을 내려주고 종이 한 면을 다 치고 나면 레버를 돌려 종이를 빼고 새 종이를 갈아끼우고. 종이가 자주 끼이기도 하고 먹끈이 감기기도 하지만, 한 타 한 타 내려칠 때마다 톡.톡... 활자판이 튀어나가 종이에 찍히는 기막힌 광경을 쳐다보며 글을 쓴다는 건 말할 수 없는 희열이다. 한 자 한 자 내 생각과 마음이 곧바로 교감과 이해를 얻는 듯 눈 앞에서 내 눈을 보고 맞장구 쳐주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지금도 집에 골동품 같은 수동타자기가 있다. 외국 것이라 영문타자기인데 가끔 자판을 몇 개 탁.탁. 쳐본다. 고장나 작동은 안 되고 둔탁한 소리를 내지만 오래 갖고 있고 싶은 물건이다.

 

수동타자기의 낡은 기억을 늘어놓은 까닭이 있다. 강영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이 끌렸던 건 다분히 저 표지의 수동타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팅'이라는 낱말에도. 예를 들어 '글쓰기 수업'이라고 제목 짓지 않은 건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야기를 다 읽어보면 왜 우리말 제목을 짓지 않았는지 수긍된다. 분명히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또 행운이었고 인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모임에서 '내 삶의 키워드'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바로 '글쓰기'를 떠올렸지만 발표는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진심이 잘 전해졌는지 모호하다. 말이든 글이든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진실과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고 지나친 자기검증과 겸손의 책무로 덜 전해지기도 하고 잘못하면 과시나 자만으로 들릴 수도 있고, 아무튼 말과 글은 늘 오해의 소지를 그림자처럼 달고 태어난다. 그렇다고 주눅들지 말자. 글쓰기는 삶의 방식이고 양식이며 삶 그 자체라고 <라이팅 클럽>이 자신있게 응원하고 있으니.

 

 

중요한 건 의지가 아니라 테크닉이다. - 9p

 

 

<라이팅 클럽>을 여는 첫 문장이다. 눈치 챌 수 있겠지만 라이팅을 리빙 정도로 대입한다면 삶은 의지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테크닉이라는 말이 된다. 이 소설은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물론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 중도에 딜레마에 빠져있는 사람, 삶이 충분히 풀리지 않는다고 여겨져 의기소침한 사람 모두에게 적절한 보람을 준다. 작가는 글쓰기에도 삶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고 지금도 늘 요령 부득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소설 속 김 작가와 딸(주인공)은 지지부진한 삶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결국 삶의 테크닉, (세상과 사람과의)관계의 테크닉, 글쓰는 일의 테크닉을 몸으로 익힌다. 내가 얻은 결론은 누구나 자기 삶의 승리자이고 패배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삶이건 글이건 테크닉이라고 하니 거창한가. 그렇지도 않다, 사실은. 우리가 대체로 알고 있는 구체적 글쓰기의 테크닉도 알고 있어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테크닉보다 연습이 아닐까. 시행착오와 전쟁과 아픔과 상처의 나날을 거듭하는 연습. 죽기와 살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연습. 글쓰기의 과정만 놓고 봐도, 아무리 허섭스레기 같은 초기의 일기류 글과 구구절절이라 해도 그것을 월반해서는 다음 단계가 오지 않는다. 그런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치를 것은 다 치러야 '그 다음'이란 게 있다. 삶도 그런 것이다.

 

 

비유로, 거짓말로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 갔다 - 269p

 

 

한 때 나는 잡문이든 아니든 왜 깊은 밤 잠 안 자고 글을 쓰고 있나, 자문한 적이 있다. 답은 쉽게 나왔다. 고통을 비켜 가기 위해. 배설이라도 나쁘지 않다. 痛하고 慟해야 通하니까. 저 인용 구절의 '비유'는 시로 '거짓말'은 소설로 범위를 좁힐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가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 작용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걸 나무랄 수 없다. 자신의 것을 다 토해내야 남의 것도 들어온다. 대개 우리는 남의 이야기에는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머의 너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타인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단계가 온다.

 

 

자, 이제 우리의 수업 방향을 좀 바꿔야 해요.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 혹은 이미지로부터 얘기를 만들어나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왔어요. - 173p

 

 

시간과 공간,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라는 우문에 접한 적이 있다. 공간설정이야 말로 이야기의 상당히 중요한 조건이다. 강영숙 작가는 공간을 관찰하는 정도가 아니라 탐구하라고 한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공간이 나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낯선 공간에 두고 싶은 열망에 여행을 하고 생경한 공간에 자신을 두어 다르게 물들어가는 그 순간의 마음에 집중해보기도 한다. 그 공간은 점멸등처럼 기억의 스위치를 켰다껐다 반복하고 공간마저 잠식하는 시간의 잔인함을 이기는 힘이 된다. 다음 팁은 소설은 물론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유효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 199p

 

 

주인공을 빌어 작가는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으로 날씨가 너무 더워선 안 되고 배가 너무 고파도 불러도 안 된다고 썼다. 배가 부르면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글 쓰는 데 집중을 못 한다고 우스개처럼 말한다. 이 소설은 가벼워 보이는 화법을 쓰지만 그렇지 않다. 블로그의 시대,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에 우리의 욕망이 어디로 어떻게 투사되는지 그리고 그 방향성은 어떠해야할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술술 잘 읽히는 멋내지 않은 문장으로 날강날강한 삶의 이면을 측은하게 바라보게 하면서 결국 눈물나게 따뜻하고 힘찬 기운을 주는 강영숙 소설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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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언급된 책 15권을 메모해둔다. 언젠가 찾아읽고 싶은 책들.

작가는 '어떤 경우 책은 너무 많은 걸 감춰주는 보호 장치의 역할도 한다'며, 책을 읽는 상대의 첫번째 좋은 이미지 속으로 쏙 들어가 모든 걸 덮어버린 결과는 오해나 착각을 불러왔고 대부분 좋지 않았다고 주인공을 고백한다. 그래도 책읽기는 글쓰기와 도반인 걸. J작가가 주인공 영인에게 준 읽어야할 책 목록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읽고 읽었듯. 읽고 쓰고, 쓰고 읽고, 생각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넘어서기!

 

1. 노동일기/ 시몬느 베이유

2. 형태의 삶/ 앙리 포시용

3.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4. 제8요일/ 마렉 플라스코

5. 닥터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6.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부인/ 버지니아 울프

7. 디 아워스

8.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9. 티보가의 사람들

10. 캬라멜 공장부터/ 사다 이네코

11. 강철군화/ 잭 런던

12.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시몬느 보봐르

13. 돈 키호테/ 세르반테스

14. 파울라/ 이사벨 아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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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탁탁탁...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좋아하셨구나...
저도 그 타자기 소리와 관련된 페이퍼를 언젠가 한번 올려야겠어요.
강영숙 작가 글 좋아요. 이 책 말고 다른 책들도 제가 읽어본 것들은 다 좋았어요.

프레이야 2012-09-22 18:50   좋아요 0 | URL
나인님의 리뷰로 얼핏 이 책을 본 것 같아요.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페크pek0501 2012-09-2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쓴 리뷰를 맛있게 음미하다가 내려오니 벌써 다 읽고 말았다는...ㅋ

14권의 목록은 저도 어디다 적어 놓고 싶군요. 전 이중 세 권만 읽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자 알...


프레이야 2012-09-22 18:51   좋아요 0 | URL
그 중 세 권이나요!! 전 한 권 달랑.^^
맛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페크님.

하늘바람 2012-09-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나게 읽었어요 리뷰를 볼

프레이야 2012-09-22 18:52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읽으셨군요, 이 소설.
산후조리 잘 하셔야 해요.
마침 계절이 참 좋은 때라 행운이에요. 반디도 엄마도^^

자목련 2012-09-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영숙의 소설, 좋아요. 특히 이 장편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단편집 <아령 하는 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도 좋았어요.
한데 프레이야님의 리뷰는 더 좋아요!!

프레이야 2012-09-23 18:04   좋아요 0 | URL
역시 문학을 사랑하시는 자목련님^^
권해주신 강영숙의 단편집도 담아둡니다.
고마워요~~~~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 김연수의 책을 그러고보니 네 권인가 가지고 있다. 모두 초반에서 읽다가 접은 상태로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적지 않은 것들이 흩어지고 또 다져졌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공교롭게도 당시 책을 펴들었을 때 내 심경이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나 마음결이 문장과 같이 흐르지 못했던,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들만 있다. 작가에게는 다소 불성실한 독자가 된 셈인데,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로 다시, 미뤄두었던 그의 작품을 읽어볼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책이 좋았다는 말이다. 그건 사십대 중반인 내게, 글 쓰는 일에 어정쩡하게 몸을 담고 딜레마에 빠져 있는 내게, 혁신을 바라는 내게,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았고 세상에 이해되지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내게 이 책이 와닿았다는 필연의 결과다. 최근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ebs fm 책읽어주는라디오,에서 낭독으로 몇 번 들었고 그게 그에 대한 애정복귀(혹은 복구)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참 특이하게 짓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도 목차의 제목들이 모두 그렇다. (나는 책을 처음 만나면 목차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목은 첫인상이고 글의 얼굴이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닌데, 그의 제목짓기 방식에서 슬쩍 힌트 얻어볼 생각도 들었다.

 

1970년 생 경북 김천 출생, 서울 삼청동 자취 유학생을 거쳐 지금은 일산호수 근처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소설가 중 한 사람이 쓴 에세이<지지 않는다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글쓰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사는 한 남자의 성장과 성찰의 기록이자 비슷비슷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유년에서 청년, 중년이 되기까지 감각하고 체험하고 경험한 어떤 것 혹은 모든 것들에 대한 진솔한 기억이자 소망과 응원의 글이다. 특별한 점은 달리기를 인생의 노선과 동일하게 두고 달리기를 하며 느끼고 체득하게 된 몸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물론 백 미터를 9초 몇 분에 달리는 우사인 볼트 스타일의 달리기가 아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달리기는 결승점까지 도달하는 데 의의가 있는 인내와 근력의 달리기이고, '결승점에 이르면 나를 환호해주는 사람들이 두루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달리기다. 어느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하루키 자신도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26p)"고 고백했다. 아래 문장은 무의미하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비교의 한 예다.

 

 

작가의 삶과 달리기가 유사하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논리와 흐름에 제 생각을 맞춰야만 하는 고된 소통'이라는 부분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가면서, 또 그 사람의 이런저런 사정을 봐 가면서 함께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달리기 역시 자유를 선호하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지지 않는다는 말, 254p)

 

 

하루키가 이미 달리기와 삶과 글쓰기를 동일선상에 두고 그 행위를 관통하며 에세이를 썼지만 김연수의 이 책은 좀 다른 맛이든다. 이전의 문장보다 힘을 뺀 것도 같고 좀더 생각이 유연해진 것도 같고, 한 마디로 우주적 인간으로 넓어진 것 같은 성숙한 글이 읽는 이로 하여금 품 넓은 하늘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견일 뿐이지만, 궁핍한 시절(누구나 유년은 궁핍한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까)의 기억이거나 팍팍한 현재의 삶이거나 암담한 미래의 길이거나,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그 모든 걸 변화무쌍한 바람의 손길로 위로받고 힘을 얻는 느낌이다.

 

과거를 불러오는 일이 잦아지는 건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풍요로움이 어디에 기원했던가를 무의식에서 불러오는 심리적 작용이다. 고백성 강한 에세이를 쓰는 일이 흔히 과거 회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가족에 대한 기억, 친구들과의 기억, 집 안팎에서의 기억, 학교에서 혹은 학교 밖에서의 기억, 사회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과의 좀더 냉정하거나 업무적인 기억조차  '몸'으로서의 '나'를 키워가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나는 달리기에는 젬병이다. 마음은 우사인 볼트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나는 출발선에서부터 이를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덜덜 떨고 서 있곤 했다. 학교 운동회 때면 꾀병이라도 부리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다음 조가 따라와 나와 섞여 뛰어도 나는 3등을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달려 들어오곤 했지만 웃음거리밖에... 그래도 대입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은 건 피까진 아니어도 땀나는 노력의 결과다. 상대적으로 오래달리기가 좀 나았지만 그나마도 지구력이 부족한 나는 지금도 달리기를 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하지만 몸의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만은 안다. 그것은 감각의 돋을새김이므로. 초등학교 6학년, 달리기 대신 선택한 자전거가 그렇게 짜릿할 수 없었다. 자전거는 지금도 잘 탄다. 내 달리기에 대한 변명은 이만 접고. 김연수 작가는 삶과 글쓰기와 달리기를 등호로 놓고 보면, 글을 쓰는 자는 그 과정에서 몸이 느끼는 고통과 그 한계의 벽을 넘었을 때의 환희 모두를 벗으로 삼고 동행해야 하는 달리는 자의 숙명을 몸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달리기 대신 자전거로 좀 바꿔줄 수 없을까.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게도 달리기는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272p)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내가 특히 매료된 건, '나 아닌 존재로'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로 모순인 채로 살라고 권하는 말이다. 작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고 독자에게 하는 말인데, 에세이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말을  '바람과 구름의 정신'으로 명명하고 싶다. 가슴 뛰게, 나중에 얼마든지 할 일은 지금 하며, 변덕스럽게 살자는 말이다. 나는 언젠가도 말했지만 한결같이 웃음 짓고 있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한결같은 그 얼굴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치고 있을까. 나는 그늘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사는 일이 그리 햇볕 짱짱하기만 할 리 없는데 웃고만 있는 네가 나는 믿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바닥까지 맑고 밝아서 지순한 행복으로 가득찬 얼굴의 웃음은 별개의 얘기이고. 정말 종교적으로 헌신적인 어느 분의 그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마라톤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변덕과 변심이 다 들어 있다. 천국이었다가 지옥이었다가, 확신에 찼다가 회의했다가, 심지어는 몸이 자기 몸이었다가 남의 몸이었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다. 삶을 살아갈 때는 때로 행복이 그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일 뿐일 때도 있지만, 마라톤을 할 때의 행복은 말 그대로 티 하나 없는 지복의 상태다.......

한없이 미워해 보지도 않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도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경우는 필경 둘 중의 하나다. 사랑하지 않거나 죽었거나. (276- 2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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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8-21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뛰러 가요, 비록 러닝머신이긴 하지만요 ^^
이 페이퍼는 있다가 와서 한번 더 읽어야겠어요. 이런 페이퍼는 저의 얄팍한 페이퍼 몇 개의 무게가 느껴지고, 프레이야님의 '생각'이 전해지니 참 좋군요.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려면, 어디에 매인데가 없어야하고 그러려면 욕심과 집착은 좀 내려놓아야겠지요.
오늘은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프레이야 2012-08-21 09:19   좋아요 0 | URL
나인님, 러닝머신이라도 하시니 부지런하시네요.ㅎㅎ
전 그림의 떡이랍니다. 아니 빨래널이 ㅋㅋ
제겐 김연수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든 좋은 에세이에요.^^

blanca 2012-08-2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 책 정말 좋았죠!! 저는 막 달리기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이 글 읽으니 또 그런 생각이^^;; 과거가 현재에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정말 놀라운 통찰을 보여 준 작가 같아요. 공감 가는 글이라 더욱 반갑네요

프레이야 2012-08-21 15:07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페이퍼를 감동으로 읽으며 댓글 달았던 기억이 ^^
우리의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과거에 고마워해야겠어요. 힘들고 아팠어도요.
아까 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시를 들었어요. 천양희 시인의 시인데,
과거는 가버리는 게 아니라 늘 내게 다가오는 것, 뭐 그런 싯구였는데 정확하진 않구요.ㅎㅎ

라로 2012-08-2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그럼 김연수를 만나 볼까봐요~~~.
저는 사실 청춘의 문장도 읽다 말았거든요. 남들 다 좋다는 것을,,ㅋㅎㅎㅎ

프레이야 2012-08-21 15:08   좋아요 0 | URL
청춘의 문장,은 저도 안 읽어봤어요.
남들 다 좋다는 책이 누구에게나 다 좋은 건 아니고 그때그때 다르기도 하구요.
인연이 닿아야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전 볼일 보고 좀전 왔어요. 한낮의 태양이 대단해요!! 여름이니까ㅎㅎ

페크pek0501 2012-08-2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저는 이 말을 자전거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어요. 10년 넘게, 아주 오랜 만에 자전거를 탄 적이 있는데,
타는 방법을 잊어서 잘 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몸은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고 있더라고요.
저절로 잘 타지더라고요. 그때 정말 신기했어요. 제 머리와 상관없이 몸이 자전거를 타더라니까요.

프레이야 님, 이 리뷰, 참 좋은데요... 맛있어요. ㅋ

프레이야 2012-08-21 15:11   좋아요 0 | URL
저도요 페크님, 히히~~ 맛나게 드셨다니..
저는 두발 자전거를 12살에 배웠는데요, 자전거는 한 번 배우면 안 잊는다잖아요.
몸으로 익히는 건 대개 다 그런 것 같아요. 몸은 정신보다 위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이라는 표어의 교훈은 건강하게 몸과 정신을 닦아라는 말이라기보다
몸에 정신을 맡겨라 혹은 몸에 함부로 대들지 마라, 뭐 그런걸까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2-08-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청춘의 문장] 던진 기억이.. 학교 때 도서관에서도 김연수를 읽다 던지고 읽다 던지고.. 더 커서 책을 샀을 때도 읽다 던지고..읽다 던지고.. 이후에 뭐 한 권 더 샀었는데 그것마저도..

저는 김연수를 홈피에서만 좋아했어요 :)
그래도 이 책 눈이 좀 번쩍한데 또 속을까요?^^

프레이야 2012-08-21 19:27   좋아요 0 | URL
읽다던지고ᆢㅎㅎ 저랑 비슷한 분 이제야 만났어요. 근데 아이님 이번엔 질끈 속아보셔도 크게 속진 않을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싶어요^^

2012-08-2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도로 찾으셨네요? ^^

프레이야 2012-08-22 13:52   좋아요 0 | URL
우와! 살아돌아왔어요. 섬님ㅎㅎ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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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정록은 서랍을 갖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소설가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 많은 서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잘한 에피소드, 사소한 지식, 작은 기억, 개인적인 세계관(같은 것)... 등등. 그런 걸 에세이에서 다 써 버리면 소설 쓸 때 궁핍해지니 서랍 속에 아껴 두는데, 소설을 다 쓰고 나도 쓰지 않은 서랍이 몇 개씩 나온다고. 그중 몇 개는 에세이 재료로 쓸 만하다 싶은 게 생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본업이 소설가인 하루키는 '맥주 회사에서 만드는 우롱차' 같은 에세이를,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이 에세이를 썼다(지만),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했다. 이 책은 정말 어깨 힘 빼고 다리 뻗고 누워 히죽거리며 읽어야 제격이다. 휴가지에 이 책을 가져간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가볍고 예쁜 '책'이다. 손에 쏘옥 쥐어지는 깨끗한 책의 외모도 흡족하다는 말. (근데 일본에서는 우롱차가 대중적으로 많이 소비되는 차인가? 우리나라에도 캔으로 나와있듯이)

 

'채소의 기분'은 이 책의 첫 이야기다.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한다는 하루키는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은 채소나 다름없다'라는 영화 대사에 매료되었지만 "채소도 채소 나름, 어떤 채소요? "라고 물으면 돌이켜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에 잠기게 될 때가 있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 '아멜리에'가 떠올랐다. 막돼먹은 채소 가게 주인의 최대 욕이 '채소같은 것!' 뭐 이런 대사였는데 주인에게 핍박받던 점원이 들고온 꽃양배추는 마치 하나의 '등장인물' 같았다. 갖가지 채소 중에 하필 꽃양배추라니. 대단한 걸! (꽃양배추님 이름 불러 죄송해요^^)  하루키의 결론은 "채소도 채소의 마음과 사정이 있으니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라는 말이다. 첫 장의 채소 이야기는 나중에 나오는 굉장히 초현실적인 일본식 커다란 순무 이야기에서 다시 채소를 들먹이며 배꼽 잡게 하는데, '순무에게도 인격이 있다(179p)'고 농담하는 바람에 그만 또 우스워 킬킬댔다.

 

이 책은 첫 장의 채소 이야기부터 <먼 북소리>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와는 조금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데 가볍게 후후~ 하면서도 얕지만은 않은 생각의 타래에 고수의 글맛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에서 작은 교훈이나마 얻기를 원하는 독자는 그런대로, 그냥 킥킥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에서 일상의 여유와 농담을 즐기길 원하는 독자는 또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다.

 

음식, 옷입기, 음악, 취침, 운동(달리기), 사람(여자, 남자), 대인관계의 기술 등 하루키의 취향이 두루 드러나는 데, 특히 본업인 소설 쓰기나 번역의 일보다 더 고민하게 된다는 에세이 쓰기에는 그만의 세가지 법칙이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 내리긴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34p)

 

이런 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려니 화제가 제한되고 '쓸데없는 이야기'나 쓰게 되어 피판 받을 때도 있지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너무 화내지 말고 적당히 넘겨주시길. 무라카미도 무라카미 나름대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35p)"라고 번죽 좋게 능청을 부리는 저자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긴 책으로 내기에 좀 시시하지 않나,라고 살짝 의심 들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나게 마련. 역시 에세이는 '어려운 글'이다. 글의 경중을 저울질 해가는 일도, 내용의 솔직함과 가감의 조절도. 나도 경험자이고 주위에서도 듣는 이야기지만 에세이는 개인적인 고백성이 강한 글이다 보니 자신과 독자 사이 가슴과 머리의 간격을 조절하는 일이 쉽지 않다. 고백성의 정도도 그렇거니와 글쓴이 자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니 위선이나 가장, 미화 같은 심리적인 작업을 하기가 더 용이하다. 그걸 경계해야 된다. 에세이는 어떤 방식이든 어떤 내용이든 글쓴이 자신의 생각이 맑고 자신에게 솔직한 명분이 서시 않는다면 호감을 끌어내기에 힘든 글쓰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소설가든 시인이든 에세이를 쓰지 않고는 글쓰는 사람의 궁극에 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루키의 에세이는 그런 점에서도 그래서 더 솔깃하다.

 

번역에 대한 생각도 들어볼 만하다. 오역보다 나쁜 것은 '읽기 힘든 나쁜 문장으로 나열된 번역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번역'이라고. 그렇다고 오역을 봐주기엔 난감하다고.  비단 번역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읽기 힘든 나쁜 문장의 나열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글은 글쎄다. 나도 갈고 닦아야할 사항이다. 번역서를 읽다가 가끔 난감한 게, 지시대명사가 난삽하게 쓰였을 때다. 최근 무척 흥미로운 책 <케빈에 대하여>를 읽다가도 이게 어떤 걸 지시하는 거지,라며 다시 앞뒤를 읽어보게 되는 부분이 종종 있었다. 지시 대명사 경우가 아니어도 좀 풀어서 앞 뒤 맥락에 맞게 번역해 주면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되씹어 읽어보며 머물러있을 때가 있다. 소설 같은 경우, 죽죽 이야기를 따라 나가고 싶은데 덜커덕 걸리는 것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표지와 삽화도 생뚱맞은 매력을 발산하는데 알고 보니 일본 동판화가의 동판화다. 글과 잘 어울린다.

 

각 이야기 아래 사족 한 마디가 달려있는데 그것도 뜬금없다. 이런 게 바로 하루키식(?!!) 꺾기도 같은 것. 유쾌하고 발랄하게, 여름날을 사는 우리에게 한 줄기 살랑바람 같은 글!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에서 한 입 베어문 보석바 같은 글!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정전이 되면 마주 앉은 여성의 손에 가만히 손을 포개는 게 '세상에서 가장 타당하고 자연스럽고 예의바른 행동의 하나'라고 믿는 엉큼한 하루키. 그러나 생각만 하다 불이 번쩍 켜지고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는 소심한 하루키. 무라카미는 무라카미대로 채소는 채소 나름대로 우리는 각자 우리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러니 잘 못 산다고 총은 쏘지 맙시다,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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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8-2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힝,,,부러워요. 김연수 책도 그렇고 하루키의 이 책도 그렇고 다 평간단이라 받았다는 거죠!!!
저 옛날에 평가단 할 때는 이렇게 좋은 책 안 걸리더만,,,
암튼 이 책을 새책으로 사 중고로 사,,,이러면서 어제부터 망설이고 있어요.
그런데 "유쾌하고 발랄하게, 여름날을 사는 우리에게 한 줄기 살랑바람같은 글!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에서 한 입 베어문 보석바 같은 글!" 바로 저에게 필요한 글이에요!!!갑자기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는 나비아줌마,,ㅋㅎㅎㅎㅎ

프레이야 2012-08-21 15:4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고 그게 또 누군가에겐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한 권쯤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에요. 책 자체가 이~~뻐~~요.ㅎㅎ
당장 생일선물로 새 것으로 보내드릴 테니 꼼짝마욧!!ㅋㅋ

비로그인 2012-08-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던 머그컵 증정이 오늘 주문할려고보니 글쎄 재고소진이래요 맘상할까말까 하고있는데 ㅎㅎ글 잘보고갑니다^^

프레이야 2012-08-21 15:15   좋아요 0 | URL
앗, 머그컵이 있었어요? 그럼 기다렸다가 구매할까나요...
재고소진이면 이제 다신 안 하나요? 그렇겠군요. 다시 안 하겠어요.ㅎㅎ
고맙습니다. 머그컵에 맘 상하진 마시구요.^^

댈러웨이 2012-08-2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리뷰 제목 보고 한참 웃었어요. 채소도 채소 나름,이 아니라 채소는 채소 나름으로,구나... --
전 왜 이제 하루키 책을 주문하지 않게 된 걸까요, 프레이야님? 그 빨간 책이랑(제목 기억 안남요. 미치겠다.), 달리기 책이랑도 함께 사고 싶었는데 최종 클릭에서 자꾸 빠지네요.

프레이야 2012-08-22 07:43   좋아요 0 | URL
리뷰제목은 채소도로 썼어요.ㅎㅎ
댈러웨이님 말씀하신 책은 하루키 잡문집 같은데 저도 그건 안 읽었구요. 최종클릭에서 자꾸 빠지는책, 있지요. 저도 그런게 많아요. 한정된 시간에 모든 걸 다 읽을 순 없죠. 전 댈러웨이님의 문학도서읽기 페이퍼가 참 좋아요. 럭셔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