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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 김연수의 책을 그러고보니 네 권인가 가지고 있다. 모두 초반에서 읽다가 접은 상태로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적지 않은 것들이 흩어지고 또 다져졌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공교롭게도 당시 책을 펴들었을 때 내 심경이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나 마음결이 문장과 같이 흐르지 못했던,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들만 있다. 작가에게는 다소 불성실한 독자가 된 셈인데,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로 다시, 미뤄두었던 그의 작품을 읽어볼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책이 좋았다는 말이다. 그건 사십대 중반인 내게, 글 쓰는 일에 어정쩡하게 몸을 담고 딜레마에 빠져 있는 내게, 혁신을 바라는 내게,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았고 세상에 이해되지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내게 이 책이 와닿았다는 필연의 결과다. 최근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ebs fm 책읽어주는라디오,에서 낭독으로 몇 번 들었고 그게 그에 대한 애정복귀(혹은 복구)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참 특이하게 짓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도 목차의 제목들이 모두 그렇다. (나는 책을 처음 만나면 목차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목은 첫인상이고 글의 얼굴이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닌데, 그의 제목짓기 방식에서 슬쩍 힌트 얻어볼 생각도 들었다.

 

1970년 생 경북 김천 출생, 서울 삼청동 자취 유학생을 거쳐 지금은 일산호수 근처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소설가 중 한 사람이 쓴 에세이<지지 않는다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글쓰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사는 한 남자의 성장과 성찰의 기록이자 비슷비슷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유년에서 청년, 중년이 되기까지 감각하고 체험하고 경험한 어떤 것 혹은 모든 것들에 대한 진솔한 기억이자 소망과 응원의 글이다. 특별한 점은 달리기를 인생의 노선과 동일하게 두고 달리기를 하며 느끼고 체득하게 된 몸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물론 백 미터를 9초 몇 분에 달리는 우사인 볼트 스타일의 달리기가 아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달리기는 결승점까지 도달하는 데 의의가 있는 인내와 근력의 달리기이고, '결승점에 이르면 나를 환호해주는 사람들이 두루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달리기다. 어느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하루키 자신도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26p)"고 고백했다. 아래 문장은 무의미하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비교의 한 예다.

 

 

작가의 삶과 달리기가 유사하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논리와 흐름에 제 생각을 맞춰야만 하는 고된 소통'이라는 부분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가면서, 또 그 사람의 이런저런 사정을 봐 가면서 함께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달리기 역시 자유를 선호하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지지 않는다는 말, 254p)

 

 

하루키가 이미 달리기와 삶과 글쓰기를 동일선상에 두고 그 행위를 관통하며 에세이를 썼지만 김연수의 이 책은 좀 다른 맛이든다. 이전의 문장보다 힘을 뺀 것도 같고 좀더 생각이 유연해진 것도 같고, 한 마디로 우주적 인간으로 넓어진 것 같은 성숙한 글이 읽는 이로 하여금 품 넓은 하늘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견일 뿐이지만, 궁핍한 시절(누구나 유년은 궁핍한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까)의 기억이거나 팍팍한 현재의 삶이거나 암담한 미래의 길이거나,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그 모든 걸 변화무쌍한 바람의 손길로 위로받고 힘을 얻는 느낌이다.

 

과거를 불러오는 일이 잦아지는 건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풍요로움이 어디에 기원했던가를 무의식에서 불러오는 심리적 작용이다. 고백성 강한 에세이를 쓰는 일이 흔히 과거 회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가족에 대한 기억, 친구들과의 기억, 집 안팎에서의 기억, 학교에서 혹은 학교 밖에서의 기억, 사회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과의 좀더 냉정하거나 업무적인 기억조차  '몸'으로서의 '나'를 키워가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나는 달리기에는 젬병이다. 마음은 우사인 볼트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나는 출발선에서부터 이를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덜덜 떨고 서 있곤 했다. 학교 운동회 때면 꾀병이라도 부리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다음 조가 따라와 나와 섞여 뛰어도 나는 3등을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달려 들어오곤 했지만 웃음거리밖에... 그래도 대입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은 건 피까진 아니어도 땀나는 노력의 결과다. 상대적으로 오래달리기가 좀 나았지만 그나마도 지구력이 부족한 나는 지금도 달리기를 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하지만 몸의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만은 안다. 그것은 감각의 돋을새김이므로. 초등학교 6학년, 달리기 대신 선택한 자전거가 그렇게 짜릿할 수 없었다. 자전거는 지금도 잘 탄다. 내 달리기에 대한 변명은 이만 접고. 김연수 작가는 삶과 글쓰기와 달리기를 등호로 놓고 보면, 글을 쓰는 자는 그 과정에서 몸이 느끼는 고통과 그 한계의 벽을 넘었을 때의 환희 모두를 벗으로 삼고 동행해야 하는 달리는 자의 숙명을 몸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달리기 대신 자전거로 좀 바꿔줄 수 없을까.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게도 달리기는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272p)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내가 특히 매료된 건, '나 아닌 존재로'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로 모순인 채로 살라고 권하는 말이다. 작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고 독자에게 하는 말인데, 에세이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말을  '바람과 구름의 정신'으로 명명하고 싶다. 가슴 뛰게, 나중에 얼마든지 할 일은 지금 하며, 변덕스럽게 살자는 말이다. 나는 언젠가도 말했지만 한결같이 웃음 짓고 있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한결같은 그 얼굴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치고 있을까. 나는 그늘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사는 일이 그리 햇볕 짱짱하기만 할 리 없는데 웃고만 있는 네가 나는 믿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바닥까지 맑고 밝아서 지순한 행복으로 가득찬 얼굴의 웃음은 별개의 얘기이고. 정말 종교적으로 헌신적인 어느 분의 그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마라톤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변덕과 변심이 다 들어 있다. 천국이었다가 지옥이었다가, 확신에 찼다가 회의했다가, 심지어는 몸이 자기 몸이었다가 남의 몸이었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다. 삶을 살아갈 때는 때로 행복이 그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일 뿐일 때도 있지만, 마라톤을 할 때의 행복은 말 그대로 티 하나 없는 지복의 상태다.......

한없이 미워해 보지도 않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도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경우는 필경 둘 중의 하나다. 사랑하지 않거나 죽었거나. (276- 2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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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8-21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뛰러 가요, 비록 러닝머신이긴 하지만요 ^^
이 페이퍼는 있다가 와서 한번 더 읽어야겠어요. 이런 페이퍼는 저의 얄팍한 페이퍼 몇 개의 무게가 느껴지고, 프레이야님의 '생각'이 전해지니 참 좋군요.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려면, 어디에 매인데가 없어야하고 그러려면 욕심과 집착은 좀 내려놓아야겠지요.
오늘은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프레이야 2012-08-21 09:19   좋아요 0 | URL
나인님, 러닝머신이라도 하시니 부지런하시네요.ㅎㅎ
전 그림의 떡이랍니다. 아니 빨래널이 ㅋㅋ
제겐 김연수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든 좋은 에세이에요.^^

blanca 2012-08-2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 책 정말 좋았죠!! 저는 막 달리기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이 글 읽으니 또 그런 생각이^^;; 과거가 현재에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정말 놀라운 통찰을 보여 준 작가 같아요. 공감 가는 글이라 더욱 반갑네요

프레이야 2012-08-21 15:07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페이퍼를 감동으로 읽으며 댓글 달았던 기억이 ^^
우리의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과거에 고마워해야겠어요. 힘들고 아팠어도요.
아까 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시를 들었어요. 천양희 시인의 시인데,
과거는 가버리는 게 아니라 늘 내게 다가오는 것, 뭐 그런 싯구였는데 정확하진 않구요.ㅎㅎ

라로 2012-08-2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그럼 김연수를 만나 볼까봐요~~~.
저는 사실 청춘의 문장도 읽다 말았거든요. 남들 다 좋다는 것을,,ㅋㅎㅎㅎ

프레이야 2012-08-21 15:08   좋아요 0 | URL
청춘의 문장,은 저도 안 읽어봤어요.
남들 다 좋다는 책이 누구에게나 다 좋은 건 아니고 그때그때 다르기도 하구요.
인연이 닿아야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전 볼일 보고 좀전 왔어요. 한낮의 태양이 대단해요!! 여름이니까ㅎㅎ

페크pek0501 2012-08-2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저는 이 말을 자전거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어요. 10년 넘게, 아주 오랜 만에 자전거를 탄 적이 있는데,
타는 방법을 잊어서 잘 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몸은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고 있더라고요.
저절로 잘 타지더라고요. 그때 정말 신기했어요. 제 머리와 상관없이 몸이 자전거를 타더라니까요.

프레이야 님, 이 리뷰, 참 좋은데요... 맛있어요. ㅋ

프레이야 2012-08-21 15:11   좋아요 0 | URL
저도요 페크님, 히히~~ 맛나게 드셨다니..
저는 두발 자전거를 12살에 배웠는데요, 자전거는 한 번 배우면 안 잊는다잖아요.
몸으로 익히는 건 대개 다 그런 것 같아요. 몸은 정신보다 위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이라는 표어의 교훈은 건강하게 몸과 정신을 닦아라는 말이라기보다
몸에 정신을 맡겨라 혹은 몸에 함부로 대들지 마라, 뭐 그런걸까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2-08-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청춘의 문장] 던진 기억이.. 학교 때 도서관에서도 김연수를 읽다 던지고 읽다 던지고.. 더 커서 책을 샀을 때도 읽다 던지고..읽다 던지고.. 이후에 뭐 한 권 더 샀었는데 그것마저도..

저는 김연수를 홈피에서만 좋아했어요 :)
그래도 이 책 눈이 좀 번쩍한데 또 속을까요?^^

프레이야 2012-08-21 19:27   좋아요 0 | URL
읽다던지고ᆢㅎㅎ 저랑 비슷한 분 이제야 만났어요. 근데 아이님 이번엔 질끈 속아보셔도 크게 속진 않을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싶어요^^

2012-08-2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도로 찾으셨네요? ^^

프레이야 2012-08-22 13:52   좋아요 0 | URL
우와! 살아돌아왔어요. 섬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