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의 위안 - 라틴어 원전을 충실하게 완역한 탁월한 정본
보에티우스 지음, 이세운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평점 :
보에티우스는 6세기 초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510년부터 콘술(흔히 말하는 집정관)을 지냈으며, 이후 로마 장관직과 행정관장을 지냈다. 523년 동로마 황제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알비누스를 변허하다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 옥중에서 쓴 책이 바로 <철학의 위안>이다.
보에티우스는 꽤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저술들을 남겼다. 수학, 신학, 음악, 천문, 철학, 번역서, 주석서 등등. <철학의 위안>은 굉장히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대화체라는 점에선 플라톤의 대화편을 떠올리게 한다. 시와 산문이 섞여있는 형태의 문학은 ‘매니포스 풍자문학’에서 유래한다고.
보에티우스는 옥중에서 ‘철학’을 연상시키는 여신을 만난다. 여신은 보에티우스를 위로하던 무사(뮤즈)여신들을 내쫓고는 자신이 보에티우스를 치유하기를 자처한다. 보에티우스는 누명을 쓰고 갇힌 자신을 한탄한다. 여신은 철학을 통해 보에티우스를 위로한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에게 복종한 댓가가 고작 모함에 의해 명예가 실추되어 감옥에 갇힌 것이냐며 여신에게 항의한다. 보에티우스의 슬픔, 분노, 탄식이 너무 깊어 철학은 가벼운 치료제를 사용하기로 한다. 치료하는데 적당한 방법을 찾기 위해 철학은 보에티우스에게 여러 가지 짧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 세상이 우연과 운에 좌우되는지, 이성의 규칙에 의한 것인지, 신이 있다고 믿는지. 신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어떤 통치 원리로 다스려지는지, 세상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연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람은 무엇인지.
철학은 보에티우스가 과거의 운명에 대한 미련과 갈망 때문에 스스로를 소진시킨다고 진단 내린다. 사실 보에티우스는 당시 최고위층이었다가 모함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형수의 위치로 전락했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 철학에 따르면 운명은 보에티우스에게 적대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운명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다. 운명의 굴레에 일단 목을 걸었다면, 운명의 영역으로 무엇이 들어오든지 평정한 마음으로 견뎌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운명의 바퀴를 잡으려는 시도는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매한가지다.
철학은 또한 그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한탄하지 말고 (애초에 가진 것도 없었다) 즐거웠던 경험, 행복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라고 충고한다. 철학의 입장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이란 운명 안에서,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자신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 속에. 부, 권력, 명성 등은 우연적이고 외부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철학은 운명이 호의적일 때 보다는 적대적으로 보일 때 오히려 더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행운은 우리의 정신을 옭죄게 하지만 불행은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보에티우스는 탄식에서 벗어나 기운을 회복하고 철학에게 참된 행복을 간구한다.
철학에 의하면 참된 행복이란 bonum, 선이다. 모든 좋은 것들 중에서 최고는 최고선이다. 에피쿠로스는 재산, 명예, 권력, 영광, 쾌락 등울 최고선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것들 역시 인간 외부에 있어 일시적인 것이다. 부자들은 행복할까? 철학의 입장에선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결핍을 두려워한다. 권위는 어떨까?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더라도 권위, 명예를 누린 자들 중 비참한 말년을 보낸 이가 수두룩하다. 세네카 역시 네로에게 재산을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지만 결국 황제암살 모함을 뒤집어쓰고 독배를 들이마셨다.
보에티우스가 재산, 명예, 권력, 쾌락 등이 진정한 행복에의 길이 아님을 인정하자
철학은 이제 최고선의 가르침을 펼친다.
최고선의 원천은 신이다. 완전한 선이 참된 행복이므로, 참된 행복은 최고의 신 안에 있어야 한다.
최고선을 추론하는 3권이 <철학의 위안>의 핵심인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철학에 관심 없는 독자라면 2권까지 읽어도 충분히 철학의 위안을 느낄 수 있다. 기껏 위안을 얻었는데 3권을 읽으며 고뇌에 싸일 필요는 없을 듯)
신이 존재하며 그것이 존재한다면 악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추론들은 내 지력으로 이해 불가능하다. 관심도 없고. 궤변 속으로 빠져든다.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악인들의 능력은 힘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힘없음에서 나온다고?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악은 이신교가 아닌 유일신교에서 가장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여서가 아닐는지. 단지 악인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5권에선 우연성과 필연성,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룬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면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몰랑. 이것도 일단 패스.
철학으로 위로받으려 했지 지혜를 간구한 것은 아니기에.
밑줄 그은 문장
p28. 이 옷의 맨 아랫단에는 희랍 문자 Π가, 가장 윗단에는 Θ가 수놓아져 있었고 두 글자들 쪽을 향해 사다리 문양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p36. 그러니 혹시 우리가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의 바다에서 몰아치는 폭풍으로 인해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놀랄 것은 없다. 극악한 자들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 우리 삶의 방식이니 말이다.
p37. 가련한 자들은 어찌하여 잔혹한 폭군들이
절제하지 못한 채 광분하는 데 그토록 놀라는가?
무언가를 희망하지도 무언가를 두려워하지도 마라.
그러면 너는 저 난폭한 자의 분노를 없앤 것이나 마찬가지거늘
p44. 그러니 당신의 무리들 중 누군가가 정당하게 물었었지요.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신어 없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가?’
p49.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것을 조종하는 당신은
오직 인간들의 행위에서만은 마땅한 제재를
가하지 않으십니다. 지배자시여,
어찌하여 불확실한 운명은
그토록 크게 바뀌는 것입니까?
죄인이 받아야 할 처벌은 결백한 자들에게 내려지는데,
그릇된 습속은 높은 옥좌에 앉아 있고
사악한 자들은 부당한 운명으로 고귀한 자들의 목을
짓밟고 있습니다.
빛나는 덕은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지고
정의로운 자는
적들이 덮어씌운 죄를 견디고 있습니다.
거짓된 구실로 꾸며진 속임수도,
어떤 거짓 맹세도 저들에게는 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기꺼이 힘을 사용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저들,
저 위대한 왕들까지도 속이기를 기꺼워합니다.
p51. 나는 상아와 유리로 벽이 장식된 서재를 찾는 게 아니라
네 정신의 창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나는 책이 아니라 책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한때 나의 것이었던 책 속의 생각을 모아 놓았으니.
p61. 너는 운명이 너를 적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운명의 법칙이며 본성이다.
p63. 모든 필멸하는 것들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여, 운명이 머무르려 한다면 그것은 운명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p69. 그런데 그때 즐거운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유로 네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슬픈것들이라 생각되는 것들 역시 사라질테니 너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혹 너는 삶이라는 무대에 지금 처음 발을 들인 방문객으로 온 것이냐?
p71. 저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유지되기 힘들다면,
그처럼 자주 변화한다면,
인간의 운명이 사라질 것임을 알며
부가 금세 지나가 버릴 것을 알지어다.
생겨난 것은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은 채 머무르지 못한다.
이는 영원한 법을 통해 굳게 자리 잡았으니
p73. 나는 너의 행복에 뭔가가 빠졌다고 그렇게 슬퍼하고 걱정하며 불평하는 네 자만심을 참을 수가 없다. 대체 누가 어느 모로 봐도 자신의 처지에 불평할 게 없을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단 말이냐?
사람들 각각에게는 겪어 보지 않은 자는 모르고 겪어 본 자는 두려워하는 뭔가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또한 가장 행복한 자들의 생각은 대단히 연약한 것이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모두 아주 작은 일들에 쓰러진다.
p74. 내가 너에게 가장 큰 행복의 으뜸이 무엇인지 간략히 보여주마. 너에게 너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네가 자신을 지배하게 된다면 너는 절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운명이 앗아갈 수도 없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연적인 일들 안에는 행복이 영속할 수 없음을 알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보아라. 만약에 행복이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본성의 최고선이고, 최고선은 어떤 식으로든 빼앗길 수 없는 것이라 해 보자.
p78. 사물의 본성상 네 것이 아닌 것들을 운명이 네 것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다.
p80. 인간 본성은 자신을 알 때, 그때에 다른 사물들보다 그만큼 뛰어나지만, 만약 자신을 알기를 포기한다면 짐승들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본성에 속하는 것이나 인간에게는 악덕이 되는 법이다.
p91. 1만 년이라는 시간은 소위 망누스 안누스(Magnus annus) 혹은 태년이라 불리는 것으로 태양과 달, 그리고 다섯 개의 행성이 우주가 처음 생겼던 당시의 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인 12,954년을 의미한다. 이 역시 키케로가 <국가론> 중 ‘스키피오의 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p94. 운명은 호의적일 때보다는 적대적일 때 사람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운명은 매력적으로 보일 때 행운의 모습으로 속이지만, 변화로써 항구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때는 항상 진실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행운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불행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행운은 거짓 선의 위장된 모습으로 행운을 즐기는 자들의 정신을 옭아매고, 불행은 깨지기 쉬운 행운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준다.
그러니 행운은 바람처럼 흘러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항시 그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만, 불행은 경고를 하며 명쾌하여 그 불행의 단편을 통해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마지막으로 행운은 매력을 발산함으로써 참된 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지만 불행은 대부분 갈고리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참된 선으로 돌아오게 이끈다.
한때 거짓된 행복을 바라던 나도
네 목에서 멍에를 벗어 버려라.
그리하면 참된 행복이 네 마음에 깃들 것이니.
p141. 분명 만물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선이라 결론을 내렸으니 만물의 목적이 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p. 164. 하나인 모든 것은 하나 그 자체이자 선이라고 조금 전에 내가 가르쳐주었다. 그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또한 선이라 여겨지게 된다. 그러니 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무엇이든 존재이기를 멈추게 된다. 따라서 악한 자들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존재이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 형태가 남아있어서 그들이 과거에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악으로 돌아선 그들은 인간의 본성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오직 선함만이 누구든 인간을 넘어서도록 이끌 수 있기에 필연적으로 악함이 인간의 조건에서 떼어놓은 그들을 인간의 가치 아래로 몰아간다. 따라서 네가 누군가 악덕으로 인해 그 모습이 변한 것을 보는 경우, 너는 더 이상 그를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좋음을 버리면 그는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고, 신의 상태로 건너갈 수가 없기에 짐승과 같은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p173. 육체의 병처럼 악함이라는 것이 소위 정신의 병이라면, 우리는 몸이 아픈 이들이 미움이 아닌 동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병보다도 지독한 악함으로 인해 정신이 고통받는 자들은 비난이 아니라 더 큰 동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다.
p178. 모든 사물들의 탄생과 변화하는 자연의 모든 진보,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는 것이라면 원인, 질서, 그리고 형상을 신의 정신의 항상성으로부터 얻는다. 이 항상성은 단일성이라는 성채 안에 놓인 것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들에 다양한 방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 방식이 신의 저 순수한 지성 안에서 인식될 때 그것은 섭리라고 불리지만, 그 방식이 움직이고 배치하는 것들과 관련될 때 선조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섭리는 모든 것이 아무리 다르고 아무리 무한하다 해도 그것들을 동일하게 포괄하지만 운명은 장소와 형태, 시간에 배정된 각각의 것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적인 질서의 전개가 신의 정신의 통찰과 하나가 되는 것이 섭리이며, 그 합치가 시간에 따라 나눠지고 전개되는 것이 운명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p190. 사실 덕을 키워 가는 단계에 있는 너희는 사치로 방종하지 않고, 쾌락으로 시들지 않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너희는 온갖 운명과의 전쟁을 영혼과 함께 격렬하게 치르고 있으니 이는 슬픈 운명이 너희를 짓누르거나 즐거운 운명이 너희를 타락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굳건한 힘으로 중용을 지켜라.
아래에 머물러 있거나 위로 나아가는 것은 무엇이든 행운으로부터 경멸을 받을 뿐 고난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법이니까. 왜냐하면 너희 스스로 어떠한 운명을 만들고자 하는지는 너희의 손에 달려 있으며, 역경으로 보이는 모든 운명은 단련이나 교화의 목적이 아니라면 처벌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어떠한 일을 위해서 행해졌는데 원래 목적했던 바와는 다른 것이 어떤 원인들로부터 생겨날 때 우연이라고 한다. 이는 밭을 갈려고 땅을 파다가 깊이 묻힌 금덩어리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p198. 그러니 우연이란 다른 목적으로 행해진 일들에 여러 원인들이 합쳐짐으로써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원인들을 만나고 합쳐지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합과 함께 진행되는 저 질서이며 질서는 섭리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것을 제자리와 제때에 맞게 배치한다.
p202. 예견되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들이 필연적으로 예견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어떤 일의 원인이 무엇인가, 즉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는 것이 필연성의 원인인가.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필연성이 섭리의 원인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p211.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이유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오직 인식되는 것들 자체의 힘과 본성에 의해 인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완전히 반대다. 인식되는 것은 모두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파악되기 때문이다.
p219. 어떠한 미래도 부재하지 않고 어떠한 과거도 흘러가버리지 않는 바로 그것이 영원함이라 할 수 있다. 영원한 것은 자신의 주인으로서 필연적으로 항상 자신에 대해 현존하며, 무한히 움직이는 시간을 현재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p222. 만약 신의 현재와 인간의 현재를 비교해도 된다면 너희가 너희의 시간에 속하는 현재 안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신은 자신의 영원한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의 예지는 사물들의 본성과 고유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시간 안에서 언젠가 미래의 것들로 일어날, 그러한 현재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p223. 만약 섭리가 어떤 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본다면, 비록 그것이 본성상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해도 그것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신은, 의지의 자유로부터 나오는 저 미래의 것들을 현재의 것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신의 시선에 들어오면 신의 인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조건을 통해서는 필연적인 것들이 되지만, 스스로 고찰될 때는 고유한 본성의 절대적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