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지음, 이세운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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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는 6세기 초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510년부터 콘술(흔히 말하는 집정관)을 지냈으며, 이후 로마 장관직과 행정관장을 지냈다. 523년 동로마 황제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알비누스를 변허하다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 옥중에서 쓴 책이 바로 <철학의 위안>이다.

 

보에티우스는 꽤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저술들을 남겼다. 수학, 신학, 음악, 천문, 철학, 번역서, 주석서 등등. <철학의 위안>은 굉장히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대화체라는 점에선 플라톤의 대화편을 떠올리게 한다. 시와 산문이 섞여있는 형태의 문학은 매니포스 풍자문학에서 유래한다고.

 

보에티우스는 옥중에서 철학을 연상시키는 여신을 만난다. 여신은 보에티우스를 위로하던 무사(뮤즈)여신들을 내쫓고는 자신이 보에티우스를 치유하기를 자처한다. 보에티우스는 누명을 쓰고 갇힌 자신을 한탄한다. 여신은 철학을 통해 보에티우스를 위로한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에게 복종한 댓가가 고작 모함에 의해 명예가 실추되어 감옥에 갇힌 것이냐며 여신에게 항의한다. 보에티우스의 슬픔, 분노, 탄식이 너무 깊어 철학은 가벼운 치료제를 사용하기로 한다. 치료하는데 적당한 방법을 찾기 위해 철학은 보에티우스에게 여러 가지 짧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 세상이 우연과 운에 좌우되는지, 이성의 규칙에 의한 것인지, 신이 있다고 믿는지. 신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어떤 통치 원리로 다스려지는지, 세상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연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람은 무엇인지.

 

철학은 보에티우스가 과거의 운명에 대한 미련과 갈망 때문에 스스로를 소진시킨다고 진단 내린다. 사실 보에티우스는 당시 최고위층이었다가 모함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형수의 위치로 전락했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 철학에 따르면 운명은 보에티우스에게 적대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운명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다. 운명의 굴레에 일단 목을 걸었다면, 운명의 영역으로 무엇이 들어오든지 평정한 마음으로 견뎌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운명의 바퀴를 잡으려는 시도는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매한가지다.

 

철학은 또한 그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한탄하지 말고 (애초에 가진 것도 없었다) 즐거웠던 경험, 행복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라고 충고한다. 철학의 입장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이란 운명 안에서,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자신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 속에. , 권력, 명성 등은 우연적이고 외부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철학은 운명이 호의적일 때 보다는 적대적으로 보일 때 오히려 더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행운은 우리의 정신을 옭죄게 하지만 불행은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보에티우스는 탄식에서 벗어나 기운을 회복하고 철학에게 참된 행복을 간구한다.

 

철학에 의하면 참된 행복이란 bonum, 선이다. 모든 좋은 것들 중에서 최고는 최고선이다. 에피쿠로스는 재산, 명예, 권력, 영광, 쾌락 등울 최고선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것들 역시 인간 외부에 있어 일시적인 것이다. 부자들은 행복할까? 철학의 입장에선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결핍을 두려워한다. 권위는 어떨까?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더라도 권위, 명예를 누린 자들 중 비참한 말년을 보낸 이가 수두룩하다. 세네카 역시 네로에게 재산을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지만 결국 황제암살 모함을 뒤집어쓰고 독배를 들이마셨다.

 

보에티우스가 재산, 명예, 권력, 쾌락 등이 진정한 행복에의 길이 아님을 인정하자

철학은 이제 최고선의 가르침을 펼친다.

 

최고선의 원천은 신이다. 완전한 선이 참된 행복이므로, 참된 행복은 최고의 신 안에 있어야 한다.

 

최고선을 추론하는 3권이 <철학의 위안>의 핵심인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철학에 관심 없는 독자라면 2권까지 읽어도 충분히 철학의 위안을 느낄 수 있다. 기껏 위안을 얻었는데 3권을 읽으며 고뇌에 싸일 필요는 없을 듯)

 

신이 존재하며 그것이 존재한다면 악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추론들은 내 지력으로 이해 불가능하다. 관심도 없고. 궤변 속으로 빠져든다.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악인들의 능력은 힘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힘없음에서 나온다고?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악은 이신교가 아닌 유일신교에서 가장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여서가 아닐는지. 단지 악인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5권에선 우연성과 필연성,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룬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면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몰랑. 이것도 일단 패스.

 

철학으로 위로받으려 했지 지혜를 간구한 것은 아니기에.

 

 

밑줄 그은 문장

 

p28. 이 옷의 맨 아랫단에는 희랍 문자 Π, 가장 윗단에는 Θ가 수놓아져 있었고 두 글자들 쪽을 향해 사다리 문양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p36. 그러니 혹시 우리가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의 바다에서 몰아치는 폭풍으로 인해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놀랄 것은 없다. 극악한 자들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 우리 삶의 방식이니 말이다.

 

p37. 가련한 자들은 어찌하여 잔혹한 폭군들이

절제하지 못한 채 광분하는 데 그토록 놀라는가?

무언가를 희망하지도 무언가를 두려워하지도 마라.

그러면 너는 저 난폭한 자의 분노를 없앤 것이나 마찬가지거늘

 

p44. 그러니 당신의 무리들 중 누군가가 정당하게 물었었지요.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신어 없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가?’

 

p49.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것을 조종하는 당신은

오직 인간들의 행위에서만은 마땅한 제재를

가하지 않으십니다. 지배자시여,

어찌하여 불확실한 운명은

그토록 크게 바뀌는 것입니까?

죄인이 받아야 할 처벌은 결백한 자들에게 내려지는데,

그릇된 습속은 높은 옥좌에 앉아 있고

사악한 자들은 부당한 운명으로 고귀한 자들의 목을

짓밟고 있습니다.

빛나는 덕은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지고

정의로운 자는

적들이 덮어씌운 죄를 견디고 있습니다.

거짓된 구실로 꾸며진 속임수도,

어떤 거짓 맹세도 저들에게는 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기꺼이 힘을 사용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저들,

저 위대한 왕들까지도 속이기를 기꺼워합니다.

 

p51. 나는 상아와 유리로 벽이 장식된 서재를 찾는 게 아니라

네 정신의 창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나는 책이 아니라 책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한때 나의 것이었던 책 속의 생각을 모아 놓았으니.

 

p61. 너는 운명이 너를 적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운명의 법칙이며 본성이다.

 

p63. 모든 필멸하는 것들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여, 운명이 머무르려 한다면 그것은 운명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p69. 그런데 그때 즐거운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유로 네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슬픈것들이라 생각되는 것들 역시 사라질테니 너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혹 너는 삶이라는 무대에 지금 처음 발을 들인 방문객으로 온 것이냐?

 

p71. 저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유지되기 힘들다면,

그처럼 자주 변화한다면,

인간의 운명이 사라질 것임을 알며

부가 금세 지나가 버릴 것을 알지어다.

생겨난 것은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은 채 머무르지 못한다.

이는 영원한 법을 통해 굳게 자리 잡았으니

 

p73. 나는 너의 행복에 뭔가가 빠졌다고 그렇게 슬퍼하고 걱정하며 불평하는 네 자만심을 참을 수가 없다. 대체 누가 어느 모로 봐도 자신의 처지에 불평할 게 없을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단 말이냐?

사람들 각각에게는 겪어 보지 않은 자는 모르고 겪어 본 자는 두려워하는 뭔가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또한 가장 행복한 자들의 생각은 대단히 연약한 것이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모두 아주 작은 일들에 쓰러진다.

 

p74. 내가 너에게 가장 큰 행복의 으뜸이 무엇인지 간략히 보여주마. 너에게 너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네가 자신을 지배하게 된다면 너는 절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운명이 앗아갈 수도 없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연적인 일들 안에는 행복이 영속할 수 없음을 알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보아라. 만약에 행복이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본성의 최고선이고, 최고선은 어떤 식으로든 빼앗길 수 없는 것이라 해 보자.

 

p78. 사물의 본성상 네 것이 아닌 것들을 운명이 네 것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다.

 

p80. 인간 본성은 자신을 알 때, 그때에 다른 사물들보다 그만큼 뛰어나지만, 만약 자신을 알기를 포기한다면 짐승들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본성에 속하는 것이나 인간에게는 악덕이 되는 법이다.

 

p91. 1만 년이라는 시간은 소위 망누스 안누스(Magnus annus) 혹은 태년이라 불리는 것으로 태양과 달, 그리고 다섯 개의 행성이 우주가 처음 생겼던 당시의 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인 12,954년을 의미한다. 이 역시 키케로가 <국가론> 스키피오의 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p94. 운명은 호의적일 때보다는 적대적일 때 사람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운명은 매력적으로 보일 때 행운의 모습으로 속이지만, 변화로써 항구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때는 항상 진실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행운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불행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행운은 거짓 선의 위장된 모습으로 행운을 즐기는 자들의 정신을 옭아매고, 불행은 깨지기 쉬운 행운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준다.

 

그러니 행운은 바람처럼 흘러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항시 그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만, 불행은 경고를 하며 명쾌하여 그 불행의 단편을 통해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마지막으로 행운은 매력을 발산함으로써 참된 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지만 불행은 대부분 갈고리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참된 선으로 돌아오게 이끈다.

 

한때 거짓된 행복을 바라던 나도

네 목에서 멍에를 벗어 버려라.

그리하면 참된 행복이 네 마음에 깃들 것이니.

 

p141. 분명 만물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선이라 결론을 내렸으니 만물의 목적이 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p. 164. 하나인 모든 것은 하나 그 자체이자 선이라고 조금 전에 내가 가르쳐주었다. 그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또한 선이라 여겨지게 된다. 그러니 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무엇이든 존재이기를 멈추게 된다. 따라서 악한 자들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존재이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 형태가 남아있어서 그들이 과거에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악으로 돌아선 그들은 인간의 본성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오직 선함만이 누구든 인간을 넘어서도록 이끌 수 있기에 필연적으로 악함이 인간의 조건에서 떼어놓은 그들을 인간의 가치 아래로 몰아간다. 따라서 네가 누군가 악덕으로 인해 그 모습이 변한 것을 보는 경우, 너는 더 이상 그를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좋음을 버리면 그는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고, 신의 상태로 건너갈 수가 없기에 짐승과 같은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p173. 육체의 병처럼 악함이라는 것이 소위 정신의 병이라면, 우리는 몸이 아픈 이들이 미움이 아닌 동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병보다도 지독한 악함으로 인해 정신이 고통받는 자들은 비난이 아니라 더 큰 동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다.

 

p178. 모든 사물들의 탄생과 변화하는 자연의 모든 진보,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는 것이라면 원인, 질서, 그리고 형상을 신의 정신의 항상성으로부터 얻는다. 이 항상성은 단일성이라는 성채 안에 놓인 것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들에 다양한 방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 방식이 신의 저 순수한 지성 안에서 인식될 때 그것은 섭리라고 불리지만, 그 방식이 움직이고 배치하는 것들과 관련될 때 선조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섭리는 모든 것이 아무리 다르고 아무리 무한하다 해도 그것들을 동일하게 포괄하지만 운명은 장소와 형태, 시간에 배정된 각각의 것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적인 질서의 전개가 신의 정신의 통찰과 하나가 되는 것이 섭리이며, 그 합치가 시간에 따라 나눠지고 전개되는 것이 운명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p190. 사실 덕을 키워 가는 단계에 있는 너희는 사치로 방종하지 않고, 쾌락으로 시들지 않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너희는 온갖 운명과의 전쟁을 영혼과 함께 격렬하게 치르고 있으니 이는 슬픈 운명이 너희를 짓누르거나 즐거운 운명이 너희를 타락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굳건한 힘으로 중용을 지켜라.

 

아래에 머물러 있거나 위로 나아가는 것은 무엇이든 행운으로부터 경멸을 받을 뿐 고난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법이니까. 왜냐하면 너희 스스로 어떠한 운명을 만들고자 하는지는 너희의 손에 달려 있으며, 역경으로 보이는 모든 운명은 단련이나 교화의 목적이 아니라면 처벌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어떠한 일을 위해서 행해졌는데 원래 목적했던 바와는 다른 것이 어떤 원인들로부터 생겨날 때 우연이라고 한다. 이는 밭을 갈려고 땅을 파다가 깊이 묻힌 금덩어리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p198. 그러니 우연이란 다른 목적으로 행해진 일들에 여러 원인들이 합쳐짐으로써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원인들을 만나고 합쳐지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합과 함께 진행되는 저 질서이며 질서는 섭리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것을 제자리와 제때에 맞게 배치한다.

 

p202. 예견되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들이 필연적으로 예견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어떤 일의 원인이 무엇인가, 즉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는 것이 필연성의 원인인가.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필연성이 섭리의 원인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p211.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이유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오직 인식되는 것들 자체의 힘과 본성에 의해 인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완전히 반대다. 인식되는 것은 모두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파악되기 때문이다.

 

p219. 어떠한 미래도 부재하지 않고 어떠한 과거도 흘러가버리지 않는 바로 그것이 영원함이라 할 수 있다. 영원한 것은 자신의 주인으로서 필연적으로 항상 자신에 대해 현존하며, 무한히 움직이는 시간을 현재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p222. 만약 신의 현재와 인간의 현재를 비교해도 된다면 너희가 너희의 시간에 속하는 현재 안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신은 자신의 영원한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의 예지는 사물들의 본성과 고유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시간 안에서 언젠가 미래의 것들로 일어날, 그러한 현재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p223. 만약 섭리가 어떤 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본다면, 비록 그것이 본성상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해도 그것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신은, 의지의 자유로부터 나오는 저 미래의 것들을 현재의 것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신의 시선에 들어오면 신의 인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조건을 통해서는 필연적인 것들이 되지만, 스스로 고찰될 때는 고유한 본성의 절대적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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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um 2016-03-0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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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3-01 11: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소울메이트 고전 시리즈 - 소울클래식 8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정윤희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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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 있는가? 혹은 당신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죽기를 원하는가?

이 책에는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아주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실려 있다.

, 책 끝부분에 소개하고 있어 본 리뷰에서도 맨 마지막에 공개하기로~~


세네카는 알려져 있다시피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사상가다. 그는 그 유명한 폭군 네로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지만 네로가 거의 실성할 무렵 네로 곁을 떠나 은둔생활을 한다. 결국 황제암살을 모의했다는 모함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불교가 열반, 니르바나를 추구한다면 스토아학파는 평정, 아파테이아를 추구한다.

동양으로 치자면 중용이다.


누구는 화를 내라고 하고, 누구는 화를 참으라고 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난감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화를 내서 좋은 결과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화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었으니.

오호통재라. 화를 냈다 병원 신세를 졌던 게 무릇기하였던가! 부러지고 째지고 깨지고.

돈은 또 얼마나 깨졌던가. 수 천 만원이 날라 갔다.

 

세네카는 화를 초기에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화가 난 이상 제어하기는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화 <레버넌트>처럼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할까? 세네카에 따르면 그렇다. 화는 성급하고 광기에 가까운 것이라 목표를 성취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할까? 예를 들면 세월호 유가족 단식하는 옆에서 짜장면, 치킨을 쳐 먹는 것들을 보고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하나? 그렇다. 왜냐하면 온 사방이 악덕과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경우에 화를 낸다면 우린 분노로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차분하게 대안을 생각해야지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의 우매함을 인정하고 용서하려는 아량을 지녀야 한다. 숲에 과일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화를 내야 하나? ‘배부른 돼지들이 꿀꿀댄다고 화를 내야할까? ‘개새끼들이 컹컹 짓는다고 화를 내야 할까. 그들은 오로지 꿀꿀대고 짖기 위해 태어났다.

타고난 자연의 결함 때문에 화를 낼 순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참아야 한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화가 났을 때 거울에 비춰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또한 화가 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도 도움이 된다. 너무 과중한 일이나 중요한 일에 휘둘린다면 화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

 

소크라테스는 화가 나면 억지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수를 줄였다고 한다. 화를 자극할 만한 사람들과는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그리고 가장 공감한 문장. ‘애꿎은 물건을 향해 화풀이를 하지 말라게임에서 졌다고 핸드폰을 던져 버린 게 몇 번 이던가. 세네카의 말대로 이건 미친 짓이다. 핸드폰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심지어 누군가 우리에게 화를 내더라도 오히려 친절함으로 대해야 한다.

연약한 생물들은 건드리기만 해도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연민을 가져야한다.

 

결정적으로 화를 내면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죽기를 원한다면?

세네카의 방침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 역시 곧 죽음을 맞을 테니까. 당신이 애쓰지 않아도 이루어질 일이라면 괜스레 고통스러워하며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돼지, , 말라리아 같은 인간들도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행복하다.

웃으며 잠들겠다.

 

밑줄 그은 문장.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상처를 입었을 때 곧바로 화가 나는 것인지, 아니면 먼저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후에 화가 나는 것인지다. 스토아학파의 일반적인 견해는 화는 그 자체로 야기되지 않으며 마음의 동요가 있어야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도 긴 호흡을 유지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끈질긴 악덕에 맞서야 한다. 악덕을 뿌리 뽑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사악한 격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사건이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라. 배를 조종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만하여 돛을 활짝 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언제든 밧줄을 짧게 당겨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미와 쥐는 누가 손만 내밀어도 이빨을 드러낸다. 연약한 생물들은 건드리기만 해도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아테네의 폭군으로 알려진 피시스트라투스의 만찬회장에서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만찬회에 온 손님 중 한 명이 피시스트라투스의 잔혹성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고 사방에서 그를 가만히 두면 안 된다는 불만이 들끓었다. 그런데도 피시스트라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화를 돋우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실수로 나와 부딪혔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는 가능한 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유가 궁금한가? 일단 화가 나면 그 순간에는 어떤 짓이라도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의 사상가 섹스티우스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매일 저녁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스스로 이렇게 자문했다. ‘오늘 나는 어떤 나쁜 습관을 고쳤는가?’ 악덕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는가? 어떤 점에서 발전을 이루어냈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시간들은 얼마 후면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 최대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타인을 위협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엄청난 손해를 입거나 부당한 일을 겪더라도, 경멸을 당하고 비웃음을 듣더라도 덧없는 인생사를 초월해 인내하자. 세상사에 휘둘려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죽음이 다가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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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6-02-2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때에 따라 화를 내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2-29 21:56   좋아요 0 | URL
세네카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저는 동의합니다^^

PRAUTES 2016-03-0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네카의 가르침도 네로를 어떻게 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6 07:23   좋아요 0 | URL
독재자들은 현명한 말도 안 통하죠^^

PRAUTES 2016-03-06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세네카보다는 아우렐리우스를 더 좋아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6 07:31   좋아요 0 | URL
리스본행 야간열차 읽고 저도 아우렐리우스 읽고 싶어졌어요^^

PRAUTES 2016-03-06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은 한 사람을 망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화를 돋운다.˝

시이소오 2016-11-01 13:51   좋아요 0 | URL
이글을 지금 읽었네요. 허걱 죄송해요^^;

마음대로대왕 2016-11-0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는 정말 본능에 충실하면 큰일나죠. 다스려야합니다.

시이소오 2016-11-01 13:52   좋아요 0 | URL
마음대로대왕님, 맞는 말씀입니다 ^^
 
가능성의 중심 - 가리타니 고진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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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다. (나 역시 동감이다.) 그는 왜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전쟁이 임박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가라타니는 문학평론가 아니었던가. 그랬었는데......이젠 노암 촘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전 세계적인 사상가, 혹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와 데마고기들, 어용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전 세계적인 비극만큼이나 진부한 주제도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재를 공위의 시대라고 말했다. 기존의 가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전 세계 99% 인류를 불행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를 갈아엎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뭘로? 어떻게?

 

가라타니 고진의 대안은 세계공화국이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냐고!! 그의 주장을 듣다보면 마냥 황당하지만도 않다. (규정적 이념이라고 한 발 물러선 듯 보이지만) 그는 우리가 노동자이면서 한편으로 소비자임에 주목한다. 즉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에 초점을 맞췄다면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에 초점을 맞춘다.

 

박노자의 대안이 자비라면 가라타니 고진의 대안은 증여.

고진의 분석에 따르면 네 가지 교환 방식이 있다. 교환방식A는 증여와 답례라는 호수적 교환이다. 그는 마르셀 모스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다분히 모스의 증여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이러한 포틀래치고차원적으로 회복한 것이 교환방식D.

 

세계공화국은 국가 간의 연합으로 증여의 관계를 맺는다. 코스타리카처럼 전쟁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 세계동시혁명이란 이러한 증여를 모든 국가들이 공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120년 전 동아시아에선 청일 전쟁이 있었다. 고진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는 120년마다 순환한다. 전쟁의 징후는 널리고도 널렸다. 전쟁이 임박해있다. 빠르면 2018년 말에서 2019년 초쯤이 되지 않을까. 전쟁은 이명박 때 이미 기획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허락 없이 절대로 평화헌법 9조를 철폐할 수가 없다.

 

고진은 어쩌면 세계공화국으로 가기 위해선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혹은 이미 전쟁을 막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지도.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을 때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할까. 개성공단 철수도 이미 계획되었던 것일까.

 

전쟁을 막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단초가 있다면 내게는 교환양식D.

하나의 플랫폼을 상상하고 있을 때 그의 책은 내게는 마치 계시와도 같았다.

 

고진을 따라 나 역시 규정적 이념이라고만 해두자. 하나의 플랫폼을 상상한다. 이곳은 일종의 인터넷 시장 혹은 쇼핑몰이다. 만일 한 명의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어떤 활동을 보고 좋아요를 누를 때 사이트에서만 통용되는 가상의 화폐를 받는다고 가정해본다. 예를 들면 좋아요한 번은 천원의 가치를 지닌다. 만일 이렇게 받은 좋아요로 쌀과 생필품을 살 수 있다면? (필수품만을 살 수 있다. 아무리 좋아요를 많이 받는다한들 람보니기니를 살 순 없다)

누가 돈을 댈 것인가? 국가의 보조금. 혹은 기업의 광고비로.

 

만일 이 플랫폼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인 중 그 누구도 굶어죽지 않을 텐데.

과연 이게 가능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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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스의 기표 2016-02-27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진을 좋아하는데 시이소오님 리뷰를 보니 고진이 더 좋아지네요

시이소오 2016-02-27 11:32   좋아요 2 | URL
고진도 전작에 도전해 봐야겠어요 ^^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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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란 한 마디로 빤한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녀는 베스트셀러를 읽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다. 그녀의 관점에서 베스트셀러는 절충적이거나 피상적이다. 따라서 지적 자극을 얻기 어렵다. ‘시대의 흐름도 아니다. 그런 흐름이란 출판 산업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저자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부분적이란 말은 한편으론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스트셀러의 대부분은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나, 걔 중에 한두 권은 분명 읽을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신영복 선생의 <담론>이 그런 경우다. 하긴 한 두 권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치러야 할 출혈을 생각해보면 저자의 독서 기준이 더 경제적이랄까.

 

우리가 접하는 책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사람이 쓴 책이다. 사회는 모두 이들 주류시각 안에 포섭되어 있다. .....대개 독자는 이 사실조차 모르고 읽는다.....진부의 관점의 지당하신 말씀으로 종이를 낭비하는 책은 킬링 타임을 넘어 지구 자원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다.

 

그래서 저자는 주류관점 밖에서 쓰인,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다고 한다. 의지의 문제라기 보단 그런 책들이 실질적 이익을 주기 때문이라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이 찍은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즉 피사체, 문제 대상(사회)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사회 밖, 틀 밖, 궤도 밖에 서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녀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정희진의 독서는 저항이고 불복종의 시작이다.”

 

독서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습득이고, 하나는 지도그리기(mapping). 습득이 객관적,일방적, 수동적 작업인 반면 맵핑, 배치는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이다.


책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역사 최대의 거짓말이다. 책 속엔 아무것도 없다. 저자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저자와 갈등적 태도를 취할 때 더 빨리, 더 쉽게,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2015. 8.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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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26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전에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먼저 참고합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독자서평을 발견하면, 그 글의 포지션과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서평을 쓰기 시작합니다. 글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아니면 남들과 다른 감상을 기록합니다. 저는 이런 서평을 쓰는 자세가 저항과 불복종의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열심히 노력해봐야겠습니다. ^^

시이소오 2016-02-26 17:5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그런생각까진 못해봤어요. 아마도 아직까지 제가 쓰는 리뷰를 독후감이라 생각해서 인것 같아요. cyrus님의 서평은 저항과 불복종을 넘어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혁명이 되겠죠?

cyrus 2016-02-26 17:55   좋아요 0 | URL
혁명까지는 아닙니다.. ^^;;

시이소오 2016-02-26 18:00   좋아요 0 | URL
아타루의 관점으로 보자면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

cyrus 2016-02-26 18:18   좋아요 0 | URL
처음 쓴 댓글은 삭제하지 않을께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노력은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ㅎㅎㅎ

그런데 정말 잘 쓴 글이면 칭찬받는데, 못 쓰면 글쓴이의 무식함이 들통나죠. 저는 후자의 경우에 속합니다. 책을 비판한답시고 고작 오탈자를 발견하는 게 전부입니다. 시이소오님이 저의 무식함을 바로 잡아주세요. 올바른 비판도 `저항과 불복종의 자세`로 볼 수 있으니까요. ^^

시이소오 2016-02-26 18:29   좋아요 0 | URL
헉, 제가 어찌 비판을 ^^;; 응원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 화이팅이요!!!
 
예술가로 살아가기 - 나는 매일 일하며 창조적으로 산다
아드리안 아웃로우 외 39명 지음, 샤론 라우든 엮음, 김영수 옮김 / 블루베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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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예술가이고 싶긴 하지만, 나 자신을 단 한 번도 예술가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나는 노동자이고, 프레카리야트(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술가는 화가, 설치미술가, 조각가, 사진작가 등이다.

나는 이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다들 어떻게 먹고 사나 궁금해서 읽었다.

 

미국은 그래도 한국 예술가보단 형편이 나은 듯 싶다.

대부분 주로 강의로 먹고 산다. 보조금을 받거나 작품을 팔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면 노동을 한다. 화가 브라이언 노바티니는 작품이 팔리지 않을 때 트럭 운전을 했다. 화가 에릭 핸슨은 마네킹 공장에서 일하며 인체 해부학을 익혔다.

 

나는 화가가 아니기에 그림을 팔 수 없고, 강의 할 여건도 안 되고,

이런 젠장. 어떻게 먹고 살지?

 

두 가지만은 분명하다.

 

가능한 한 일하지 않는다.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

가능한 한 소비하지 않는다. (책마저?!)

 

밑줄 그은 문장

 

p122. 줄리 해퍼난

 

예술가 삶의 첫 페이지는 아주 힘들었고 기복이 많았다. 실패에 대한 공포는 공황장애, 한바탕 울기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하나씩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최신 유행을 따르거나 영혼을 죽이는 허황된 목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그래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p137. 카린 데비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로서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p186. 미셀 가브너

 

작업을 할 때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으며 의미 있는 창작을 하려고 한다. 나는 일 질문을 통해 라는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다음 자연스럽게 어떻게를 묻는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p201 피터 뉴만

 

바로 아래에는 예술가들의 고민이 쭉 적혀 있었다.

 

완벽주의

창작 활동 막힘

과잉생산

작품 설명에 대한 어려움

비현실적 기대감

개인과 다른 이들의 작품에 대한 지나친 비판적 사고

금전적 문제

감정 기복

기타등등

 

p 에드워드 윙클맨, 빌 캐롤

 

저는 항상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요. “여러분이 스튜디오에서 만든 작품은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삶도 그래야 한다. 때론 남들과 비교도 되겠지만, 어떤 길도 쌍둥이처럼 같을 수는 없다.”라고요. 예술가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소비를 줄일 것. 1980년대 후반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생활하다가 공황이 일자 좋지 않은 상황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황이 좋더라도 과소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을 구해야 한다면 예술계와 어떻게라도 관련있는 일을 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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