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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ㅣ 사이언스 클래식 24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8월
평점 :
이 책의 주제는 유사 이래 폭력이 감소해왔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주장을 펴고자 스티븐 핑커는 무려 1,4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을 썼다. 그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을 대하자니 절로 경외심이 든다. 서문을 읽고선 워낙 두꺼운 책이라 대충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1,2장부터 낚여서는 완독하는데 보름이나 걸렸다.
그는 모든 육체적 폭력의 경우를 추적한다. 국가 간의 전쟁, 국민에게 저질러진 국가 살해, 집단 살해, 테러리즘, 연쇄살인, 강간, 영아 살해, 동성애, 동물들에 행해진 폭력까지. 핑커의 주장에 의하면 그 모든 부분에서 폭력은 줄어들었다. 이 책을 덮고 나자, 핑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이 듬과 동시에 한편으론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는 어쩔 수없이 폭력을 계량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예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것일까.
그는 세상을 평화로운 방향으로 밀어붙인 다섯 가지 요소를 주장한다. 국가(리바이어던), 온화한 상업, 여성화, 세계주의, 이성화다.
내가 잘못들은 걸까? 국가라고?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구 숫자 대비 사망자 수로 계산했을 때 국가 형성 이전의 사회보단 국가 사회에서 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망자 수로만 따진다면 유럽 500년 역사에서 17세기와 20세기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핑커는 매슈 화이트가 집계한 인위적 원인들로 인한 총 사망자수 ‘1억 8000만명’을 20세기 총 사망자의 3퍼센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억 8천명의 죽음은 3%라는 통계에 불과하다)
국가가 자국의 국민을 살해한 경우의 사망자도 1억 명이 넘는다. 그런데도 국가 때문에 폭력이 완화되었다고!!! (심리 치료를 권유한다.)
상업과 세계주의도 원인과 결과의 명백한 혼동이다. 널리 알려져있듯 20세기 초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구축해왔다. 그러다 20세기 중반부터 식민지를 포기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강대국 입장으로선 식민지 사업이 딱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경제적 이유도 존재했을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죽이는 것보다는 파는 게 강대국으로서도 이익이 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핑커의 주장처럼 상업과 세계주의는 폭력을 줄어들 게 한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문명화 과정으로 폭력을 직접적으로 쓸 수 없게 되자, 1980년 초에 강대국인 미국과 영국에서 비롯된 보다 고도화되고 내면화된 폭력이 신자유주의다.
핑커는 심리학자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가 오로지 육체적 폭력으로만 폭력을 한정했다는 것이다. 즉 그는 현대에 자행되고 있는 정신적, 경제적 폭력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리학자가 어떻게 이렇게 인간 심리에 무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일부러 외면한 것일까.
그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왜 오늘날 폭력이 줄어들었을까’를 묻기 보다는 ‘문명화, 이성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폭력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을까’를 물어야 했다. 또한 국가와 지배계급이 어떻게 육체적 폭력을 내면화했는지 파고들었어야 했다. 한국을 보아라. 국가는 고문하기보단 노동자들에게 배상금 47억 때린다. 이것은 고문이 아니란 말인가?
핑커는 ‘팔레스타인에서 겨우 4,000명 죽었다고, 그래서 세상이 나빠졌다고? 옛날엔 더 죽었어. 감사해야지’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는 통계에만 집착하다보니, 혹은 자신의 주장만을 고수하려다 보니, 자신이 인간 생명을 다루고 있음을 망각한 듯 보인다.
단 한 사람도 폭력에 노출 되서는 안 된다. 그것이 육체적 폭력이든, 언어적, 정신적 폭력이든, 경제적 폭력이든. 서문만 읽을 걸 그랬다. 미국식 낙천주의가 낳은 1,400여 페이지의 재앙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씌여진 가장 두꺼우면서 가장 빈곤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옥시토신을 처방 받길 권유한다. 혹시 그는 저활성 MAO-A 유전자를 지닌 걸까)
- 2014. 11. 14. 작성
박노자는 <비굴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핑커의 주장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주된 폭력의 형태는 자본의 횡포, 이른바 갑질이다. ‘갑’은 파견 업체를 통해서 1년 계약의 비정규직을 모집해서 정규직과 같은 라인에서 일하게 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힘든 일을 한다. 그들이 비정규직 보호법에 의거해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기만 하면 갑은 바로 계약을 해지하고 그들을 내보낸다. 직장이외에는 사실상 어떤 복지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업 수당을 최장 10개월간 받고 나면 그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갑의 이러한 횡포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초적인 정의를 짓밟는 강자의 부당 대우는 바로 광의의 폭력에 속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