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 달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여행하면서도 먹고 살뿐만 아니라 섬세한 시인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에 심지어 잘 생기기까지.

게다가 착하기까지!!

(사진을 못 찍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구도가 영..... )


재수 없어서 책을 대충 흘겨봤다.


뭐 자기한테만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


의심을 가득 담아 시비 걸 대목을 찾아 문장을 꼬치꼬치 쫓아갔다.

지하철 역사에 책을 몰래 갖다 두는 걸 보고 살짝 미안해졌는데

시인이 한 번 스친 일본 사세보에서 태어난 노인 장례식에 참석한 일화를 읽다가 포기했다.

미워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어느 책이었더라.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화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요

이 책은 시인이 여행 중에 만난 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앞이건 옆이건 뒤건 중요하지 않다.

잠깐.... ‘지금 내 뒤에 있는 사람이요는 좀 이상할라나)


여행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

잠깐 동안의 꿈에 젖는다.



나의 계절은 아직 겨울이어서.


밑줄 그은 문장 


p. 인생에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은 눈빛을 살아나게 한다.


무구한 눈빛은 사람을 사로잡는다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살고 싶어서 일순간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그 눈빛이 내가 잃은 지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그 눈빛으로 내가 씻겨지는 기분마저 들기도 해서 마치 좋은 바람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그런 사람이 내주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어떻게 보면 그 좋은 눈빛이 커피에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우리는.


p.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시 한 편을 낭송하는 시간이었다한 사람이 시 낭송을 마치고 울컥하였다

나중에 왜 울컥했어요라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p.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단풍 이야기다단풍이 말이다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물들어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낮밤으로 사람이 걸어 도착하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일치한단다.


어떻고 어떤 계산법으로 헤아리는 수도 있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낳아가지고 이 가을집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문득문득 나뭇가지들을 올려보게 한단 말인가말과 말 사이에 호흡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이 말은이 근거는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또하나의 믿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의 이름에 관련되어 있다백리향이라는 풀의 이름에도 그만한 쉼표와 호흡이 장치되어 있다백리향은 낮게 자라는 나무의 일종으로 주로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데이 식물의 향은 가을 풀 향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단지 식물 냄새만이 아닌 동물적인 냄새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다 진하고 또 강렬하여 늦은 밤 책상에 앉은 사람마음이 허전한 사람,종일토록 기력이 없는 사람사는 것이 지옥 같아서 자꾸만 먼 데만 보는 사람을 자극하는 데 직방이다백리향도 발 끝에 붙은 향기가 백 리를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p.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

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

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

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

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

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

함께 마시는 커피와 함께 먹는 케이크가

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p. 봄이 왔는데 당신이 가네요


동백이 피었는데요

봄이 가네요

내 마음이 피었는데

조금만 머물다 봄이 가려고 하네요

나에게도 글씨가 찾아와서

이제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는데

봄이 왔는데요

당신이 가네요


(글씨를 배운지 얼마 안 되신 할머니의 시가 이 정도라니,

왠지 눈물이 난다.)


비록 증명사진 크기이긴 했지만 서로의 사진이 붙은 수험표를 편지로 교환해 나눠 갖기도 했던 그 어느 봄날의 기운이 묵직하게 내 가슴 한쪽께에 맺히는 것 같았다한번은 내가 나가지 않았고 또 한번은 그녀가 나오지 않아 싱겁고 싱겁게 어긋났던 두 번의 기회를 떠올렸다.


p. 아무도 모르는 사이거의 모든 일들이.


시간의 시침과 분침의 끝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우리를 겨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p. 이토록 서서히 퍼지는 광채


좋아하는 술 가운데 마음을 전한다라는 뜻을 가진 전심이라는 술이 있다이 술은 어떤 맛이 나는가 하면 일단 첫맛에서 이러면 안 되지하는 맛이 난다.


p. 사랑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점선처럼 만나 실선처럼 하루를 보냈습니다.

엄마는 하지 못했지만 너는 사랑을 하라고어떻게든 사랑이 나를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며 모르게 될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엉킨 선도 풀어나갈 힘이 없는거라고.


p. 잊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길고 먼 여행이 끝나고 나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으면서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자를 사서 모으기 시작했네나라는 사람은 30센티에 불과하다고 평소에 생각했었으니까. 30센티 자 막대기를 볼 때마다 내 한도와 내 한계를 그것에 걸어보면 정신이 들까 하는 거였어자에는 1밀리미터의 눈금만 표시되어 있지사람이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일 걸세한데 자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30센티는커녕 그 1밀리미터의 간격을 표시하는 두 칸의 작은 눈금 사이에 웅크린 채 살고 있었네. 30센티 자 안의300개의 눈금그 사이 고작 두 칸만이 인생의 전부이자 내가 사랑한 전부라고 믿었던 거였네.


1밀리미터에서 시작되어 백 미터를 넘어 몇 킬로를 넘어 몇만 킬로까지 이어지는 눈금의 행진들그 눈금들이 촘촘히 만들어내는 마음 안의 파도들파도를 멈추게 할 힘이 있는가그럴 수 없어서 사랑이지 않겠는가.


p.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대뜸 어린아이가 그리움이 뭐냐고 나에게 물은 적 있었다그때 나는 그리움은 눈 같은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이해되었다는 듯 확신에 찬 얼굴로 그럼그리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라고 돌아온 아이의 질문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으니 나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계절이 도착하고 계절이 떠나기도 한다나에게는 가을이 왔는데 당신은 봄을 벗어나는 중일 수도 있다나는 이제 사랑이 시작됐는데 당신이 이미 사랑을 끝내버린 것처럼.


그러니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다고 술술 답하는 상태에 있으면 좋겠다적어도 계절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어디를 살고 있는지를 조금 많이 알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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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5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비 붙는 볼거리를 놓쳐서 아쉽지만 (농담) 포기가 참 아름다웁군요~ ^^

시이소오 2016-02-15 08:33   좋아요 2 | URL
애초에 아름다운 사람한테 시비걸어 자빠뜨리겠다는 심보가 고약했던거죠 ㅋ ^^

2016-02-15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15 09:13   좋아요 0 | URL
글도 잘 쓰더라구요. ^^

깊이에의강요 2016-02-1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의 어떤이가 아름답게 늙어야지 그래야지...
입에 달고 살아서
그이 몰래 입을 삐죽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젊은 너도 아름답지 않거늘 늙어서는 말해 무엇하겠냐고...
이병률은 제가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아름답게 늙어 가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젊어서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시이소오 2016-02-15 10:32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여성 독자분이 이러시면 저는 이병률이 도로 미워집니다. ^^ ;;

깊이에의강요 2016-02-1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는 나의 힘 ㅎㅎ^^

시이소오 2016-02-15 14:14   좋아요 1 | URL
이 경우엔 힘이 돼지 않아요. 질투와 질타만 남아요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은것이냐`
 
기억의 집 - 불굴의 인간 토니 주트의 회고록
토니 주트 지음, 배현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토니 주트의 대표작이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열쇠 책이다. 즉 토니 주트라는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는 key. <기억의 집>은 루게릭 병에 걸린 말년의 그가 자신의 삶을 담담히 회고한 유고작이다. 런던 태생이었으나 유대인이었던 주트는 젊은 시절 이스라엘 키부츠 농장으로 가 청년 시온주의 단체에서 무급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의 유대인들을 보고 경악했다. 유대인들은 패전한 아랍인들을 잔혹하게 대했고 자신들이 아랍 땅을 점령하고 지배할 거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일찌감치 그는 마르크수스의는 물론이고 마오주의, 극좌주의, 3세계주의 등 당시 유행하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온주의와의 결별이후 그는 보편적 사민주의자의 길로 나아갔다.

 

자신을 영국인으로도 유대인으로 규정짓지 않은 그는 주트는 뉴요커였다- 자신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에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은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기 이전에 필리핀에 먼저 사죄해야 한다. 역사적 낭만화라고 해야 할까? <국제시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우리는 필리핀 사람들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살인자. 박정희가 그러하듯 도살자였다.)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죄악 외에 히틀러의 또 다른 죄를 추가하자면 갈가리 찢겨있던 시온주의를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젠장, 히틀러이전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시온주의를 원하지 않았거늘.

 

오늘날 유대인은 히틀러만큼이나 잔혹한 만행을 스스럼없이 일삼는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의 배를 가른다. 오늘날 종교는 신이 고안했다기보다는 악마가 고안한 것처럼 보인다. 절대적으로!

 

타인의 관습을 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 과거에 대해 책임감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유대인인 이유다.

 

중년의 위기로 인해 다른 남자들이 차를 바꾸거나 아내를 바꿀 때, 주트는 체코어를 공부했다. 체코에 대한 관심 덕분으로 그는 대표작 <포스트 워>를 집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워시의 <사로잡힌 마음>과의 만남도.

 

미워시는 그의 동시대인 네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들이 자율에서 출발하여 복종의 희생양이 되는 과정에서 보인 자기기만을 드러내면서, 지식인들에게 <복종 감정>이 필요했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개의 이미지다. 하나는 <무르티빙의 약>이다. 이 약은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브트키에비치가 쓴 모호한 소설 <탐욕>에서 미워시가 찾아 낸 것이다. 이 소설의 중앙 유럽인들은 동쪽에서 온 정체불명의 유목민 무리에게 정복당하기 일보 직전, 어떤 약을 먹게 된다. 이 약은 두려움과 불안을 덜어 주며, 그 약효를 본 사람들은 새로운 지배자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환영하며 기뻐한다.

 

두 번째 이미지는 <케트만ketman>인데, 이는 아르튀르 드 고비노가 쓴 <중앙아시아의 종교와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책에서 프랑스 여행가인 고비노는 이란에서 생겨난 선택적 정체성이라는 현상을 보고한다. <케트만>이라는 존재 방식을 내면화한 자는 자신이 하는 말과 다른 것을 믿으면서 모순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지배자가 새로운 것을 요구할 때마다 자유롭게 순응하는 한편, 자기 내면의 어딘가에는 자유사상가로서 적어도 타인의 사상과 독재에 스스로 복종하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한 사상가로서 자율성을 지켜 왔다고 믿는다.

 

미워시는 말한다. <동유럽 사람이기에, 미국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사람들이 판단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경험을 통해 배운 적이 아직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 미워시 탄생 후 100, 시대의 획을 그은 에세이 <사로잡힌 마음>이 출판된 지 57, 노예근성을 가진 지식인들을 향한 미워시의 고발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 되게 들린다. <그의 주된 특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데 있다.>

 

케트만의 존재 방식을 내면화한 노예근성을 가진 지식인들을 향한 미워시의 고발은 그 어느 곳보다 이 땅에서 진실 되게 들린다.

 

유대인이었으나 끔찍한 유대인들을 서슴없이 비난했던 주트, 루게릭 병으로 예고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온갖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격차에 분노하던 주트. 그는 죽었으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던 그의 가르침은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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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절로 가는 사람
강석경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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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불면의 등불이 나를 인도한다>를 보면 담양 토지문학관에 입소한 시인이 강석경의 <신성한 봄>을 허겁지겁 읽은 일화가 나온다. 시인은 강석경의 문장이 손이 데일 듯 뜨겁다고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민 박사의 서평집 <집 나간 책>에서도 강석경을 찬양하는 글을 보았다.

 

그러니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강석경이란 이름을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냉큼 집어왔다. 어라, 그런데 소설이 아니었다. <저 절로 가는 사람>

주로 스님들, 혹은 절에 관한 에세이다.

소설이 아니었지만 글자를 삼키듯 허겁지겁 읽은 건 나 역시 시인과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으면서 엉덩이가 들썩거려 혼났다.

오늘이라도 당장 삭발하고 출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요히 앉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치킨 안 먹을 자신 있어? 한우 안 먹을 자신 있어? 삼겹살은? ...... ’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송광사에서 나오는 표고가 들어간 떡국과 짬뽕이 더 먹고 싶었다.

 

섹스는? 섹스 안 할 자신 있어?’

 

예상과 달리 그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출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속세와 인연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싸질러놓은 애새끼는 어쩌란 말인가.

 

혹시 변명 아닐까. 애를 빙자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닭다리와 닭 날개,

섹스에 대한 욕망을 은폐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은 참기로 했다. 재가 불자 박문호 박사도 있지 않은가.

 

심산 명당은 오대산이고 야지 명당은 통도사라고, 통도사에도 가보고 싶다.

화엄산립법회의 정수라는 법문도 듣고 싶다.

해인사, 송광사, 화운사에도.

 

작가가 송광사 가는 길에 만난 숙녀의 말은 얼마나 황당하던지. 특목고 다닐 때 인간의 양상이 아수라장이어서 빨리 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숙녀는 유학 이후 실제로 출가했다.

 

작가가 소개한 스님들의 면면은 실로 파란만장하며 경이적이기까지 하다.

송광사 인석 스님은 경율이 암기가 안 되자 한 번 읽고 직도직해 했다고 한다. 대장경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해인사 성안 스님. 선일 스님은 인도 유학, 팔리어 공부만으로 9년을 보냈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스님은 스리랑카로 떠난다. 그곳에서 6~7년 동안 등이 아플 정도로 경전 공부에만 매진한다. 한국에 돌아와 암에 걸렸지만 투병 3년 만에 암을 완치한다.

 

신동화가로 이미 15세 때에 원각사 탱화불사 5축을 혼자 완성한 석정스님. 석정스님과 17년간 한국의 불화작업을 함께 한 송천스님. 초등학교 때도 장례 희망 직업란에 스님이라고 적었던 정우 스님.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 상을 받을 정도였으나 15세 때 출가를 결심한다.

 

뇌과학자면서 지치지 않고 수년간 불교 경전을 강의하는 박문호 박사.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학 강단에 선 화공스님. 하루 만에 천수경을 외워버릴 정도로 천재였던 덕민 스님. 스님은 추연 권용현 선생 밑에서 유학을 공부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데 입을 못 마출 게 뭐 있냐며 여자들에게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는 둥 기행을 일 삼치 않았던 종표 스님. 덕민 스님은 그 종표 스님을 탁구로 꼬셔 유,,선의 고전과 경전들을 가르친다.

 

이 스님들을 다 만나고 싶지만 특히나 몬스터종표 스님을 만나고 싶다.

지금은 장자, 맹자, 논어를 지나 두보 시를 공부하신다고.

두보를 공부해야겠다.

 

종표스님은 화엄사에 계신다.

 

기독교인에서 무신론자였다 다시 유신론자(모든 종교를 믿었다)였다가

지금 나는 불가지론다.

 

비록 불교도가 아닐지라도 강추한다.

진리가 비처럼 쏟아질테니.

 

만일 내가 애새끼를 버리고

기어코 출가하게 된다면 이건 모두 다 강석경 작가 때문이다.

 

책을 통해 누구나 삐-(기쁨)를 느끼시길.

 

아따 딧빠!! (너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밑줄 그은 문장

 

p22. 아만의 산을 무너뜨리고 공덕의 숲을 키운다는 뜻의 산림법회에서는 돌아가신 부모 조상과 유주무주의 영가까지 청하여 천도를 실시하면서 회향한다. 회향이란 세간의 생사가 없는 저 언덕으로 가는 것

 

p25. 영취산은 부처님이 인생의 후반부를 보낸 인도 마가다국 라자그리하의 산 이름을 한자식으로 번역한 것으로 영축이라고도 읽는다.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통도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 앞까지 걸어가면 좌우 기둥에 쓰인 불지종가 국지대찰 글씨가 보인다.

법광 스님이 쓴 <선객>에 통도사 스님의 자기 도량 자랑이 나오는데 이러하다. “저희는 지난해 동지 때 가마솥의 팥죽을 젓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수평선 너머로 간 스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p26. 자료에 의하면 원나라 사신들도 고려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진신 사리탑이 있는 적멸보궁에 참배했다고 한다. 이웃 나라에 알려진 만큼 고려 말에 왜구들은 두 차례나 통도사에서 부처님 사리를 가져가려 했고 조선시대에는 한때 사리를 약탈당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다고 한다.

 

p32. “형상은 세간법이고, 법계는 무상법이에요. 몸은 세간이지만 자세히 보면 법계예요, 중생은 법계를 모르고 형상만 봐요. 보이는데 보이는 것이 없어. 들리는데 들리는 것이 없어. 거울의 그림자처럼 드러나는 것이 법계예요. 넓고 넓은 바다에 많은 그림자가 비치는데 바닷속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물뿐이야. 물속에 별이 보이는데 별이 아니라 물이고, 해가 보이는데 해가 아니라 물이에요. 일체 만물이 지혜의 바다에 비친 그림자인데 중생은 미혹해서 그림자만 알고 마음인 물을 몰라. 우리 마음의 물에 비친 그림자는 아무리 큰 것도 작은 것도 그림자일뿐 자체가 없어요. ”

 

p41. “인간은 구하다 구하다 죽어요. 기러기는 날다가 날다가 죽어요. , 명예, 사람, 건강, 어떤 것을 구해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 그러니 다음 생애 또 구해요. 생사윤회야. 중생은 구하는 데 머물고 부처님은 깨닫는데 머물러요.”

 

p53. 지눌이 혜심을 알아보았듯이 인석 스님도 사람을 알아본다. 모든 생명은 육도 윤회를 하는지라 동물보다는 식물, 식물보다는 패류가 영이 낮고 전생에 동물로서 윤회한 사람은 지능이 낮고 착하다고 들려준다. 대부분의 동안들은 천상에서 떨어진 사람인데 언젠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함께 온 동안의 여대생을 원주실에서 맞고 인석 스님의 동공이 벌어졌다. 영이 맑기가 바로 천상에서 떨어진 사람 같았다.

 

p55. 수처작주, 어느 곳을 가든 주체가 되리라.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가 그의 마음을 굳혔다.

곳곳이 수행처요, 쌓인 것이 밥이거늘/ 대장부 어디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랴.”

 

p56. 프로적인 사고로 일을 하려 하지만 차 타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 될 만큼 몸이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검은 묵과 다크의 느낌이 왜 다른가를 생각한다. 누가 다크 초콜릿을 가져와서 다크란 단어가 머리에 박혔다. 묵이 강이라면 다크는 강가의 바위다. 묵이 선()이라면 다크는 정()이다.

 

p65. “당신에게 사막이란 무엇일까, 중사여, 그것은 당신 쪽으로 끊임없이 걸어오는 신이었다. (....) 사막은 우리에게는 무얼까? 그것은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무엇이다. 우리 자신에 관해 우리가 배우는 그것이다.”

 

p68. 해인(海印)이란 아름다운 이름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동양 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지는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이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오염되지 않은 무구한 우리 중생의 본디 마음이다.”

 

p80. 말로 들으면 평범한 일 같지만 행자 일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 세속의 습관을 버리고 중물 들이기의 시작이므로 하심이 먼저 요구된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고, 오른손을 왼손 위에 얹어 모으는 차수 자세도 행자가 지켜야 할 하심 사항이다. 중노릇 모든 것이 행자 기간과 강원 교육까지 5년 동안에 형성되므로 중요한 만큼 엄하다. 사찰 중에서도 해인사 행자 노릇이 가장 힘들기로 꼽히는데 군대로 치면 해병대고 인원도 가장 많아서 전국 절의 행자들이 모여 집체 교육을 받을 때면 으레 해인사 행자가 반장을 맡았다.

 

p90. 선일 스님의 법문대로 철마다 철마다 우린 모두 곧 떨어질 꽃처럼 살고 있다.”

 

p107. “부모가 돌아가실 때도 울지 않았지만 우리 스님이 돌아가실 땐 울었어요. 나고 죽음이 없으니 무상하다는 건 알지만 정이란 게 고약스러워. 이치는 알지만 상좌를 떠나보내니 육신을 가진 마음이 미어져요. 논리적으론 불생불멸이나 가슴이 아프고 허전한 정.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도 산천초목이 울었고 오백아라한이 슬피 울었어요. 이치만 알아서는 냉혈이 돼요. 이치도 알고 감정이 풍부해야 자비가 생겨요.”

 

p119. 절망에 휩싸인 여인은 옷이 훌러내린 줄도 모르고 광녀처럼 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왔다. 사람들이 뒤에서 몰아내려고 하자 빳따짜라야하고 부처님이 부르셨다. ’빳따짜라옷이 풀어진 채 다니는여인이다. 부처님의 부름에 여인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황급히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자신의 고난을 호소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의 안식처이고 피난처이며 귀의처이다. 너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맨 마지막 말씀이 바로 팔리어로 아따 딧빠.

 

중생심의 너 자신, 탐진치의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그러한 수행을 하는 너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

 

p125. “ -띠라는 팔리어가 있어요. 기쁨이라는 뜻이에요. 수행은 기쁨이 있어야 가능해요. 수행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삐-띠예요. 기쁨을 알면 더 큰 기쁨을 알고 싶고, 기쁨이 있어야 진보가 있어요.”

 

p127. 스리랑카에서 돌아와 한 첫 법문은 자애경(멧따수따)이었다. 자애경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팔리어 구절이 있었다. “모든 생명 모두 다 행복하여지이다!”

 

p132. 몸 받은 생명, 몸 없는 존재까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숨 쉬는 이라면 누구라도 모두 다

모든 생명 모두 다 행복하여지이다!

 

삽베 삿따아 바완뚜 수키땃따아!

 

p178. 간경 시간에 <금강경> 5장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구절을 외우는데

환희심에 눈물이 났다.

 

p185. 울란바토르는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울란바토르에 가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특히 나처럼 아름다운 지명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고 자서전에 썼다.

 

p210. 지구 산소의 기원인 시아노박테리아가 자라고 있는 남호주 샤크베이의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암석 덩어리에 대해. 35억 년 전 생명의 시원을 담은 살아 있는 화석이 지금도 산소를 보글보글 내뿜으며 샤크베이 해멀린폴 바닷가에 펼쳐져 있다고.

 

p224. 실크로드 답사 때도 버스에서 법성게를 강연하며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을 강조했다. “진리가 비처럼 쏟아지는데 중생은 자기 그릇만큼만 가져갑니다. 제발 그릇 좀 넓히세요라고.

 

p233. 물과 바람이 만나 생기는 파도라는 현상. 파도는 본연이 아니다. 파도처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상념들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위적이다. 포도주도 칭찬을 들으며 마시면 더 향기롭고 화날 때 마시면 쓰다. 인위적인 염심이 없는 것이 자연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말했다. “나는 생각할 줄 압니다. 나는 기다릴 줄 압니다. 나는 단식할 줄 압니다.”

 

지상의 수많은 생물 중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이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뜻이다. 아란 인간의 생명을 가리킨다.

 

p243. 사회학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불교는 사회운동이다. 화공 스님은 2014년에 펴낸 저서 <유마경과 이상향>에서 불교의 종교 사회학적 측면을 강조했다. “붓다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가르침은 카스트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아트만(자아의 본질, 영혼) 사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문화 혁명이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 할 주체(영혼, 자아)도 없다는 것. 카스트라는 고정관념의 허구를 밝힘으로써 인류 최초의 노예해방을 일으킨 개념이다.

 

p245. 사바세계란 참고 견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를 말한다. 천재지변, 길흉화복은 언제든 찾아오고 나가지만 주인공이 중생이다 보니 고통스럽다. 중생인 우리는 무엇으로 고통 받나? 고통의 주체는 마음이다. 인도인들은 마음의 형태를 관했고, 불교는 마음을 연구한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의 진정성은? 견성이란 마음을 들여다보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원인 구명하여 번뇌를 정화시키는 것. 우리 마음속에 온갖 번뇌 망념이 파도처럼 일렁이는데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원인을 제하니 실체가 없는 공이더라. 무어든 담을 수 있는 장이더라. 그것이 여래장이다. 심즉불.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이니 둘이 아니다. 한 발을 내딛음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즉사이도다. 번뇌즉보리.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p246. 원리 자체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고통을 겪었지만 직심이 정토라는 <유마경>구절을 명상했다. 사바세계가 얼마나 삐뚤어져 있으면 곧은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바로 정토(부처가 사는 청정한 국토)라고 할까. 중생이 얼마나 왜곡되게 살면 직심의 소유자가 바로 보살이라고 할까.

 

흔히 민주주의를 다수결과 연결시키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라는 양이 아니라고 스님은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아니라 옳은 길로 가는 것이다. 집단이 개인에게 작용하는 힘이 개인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보다 더 크게 작용할 때 그 사회는 하강이나 타락이 일어난다고 한 슈바이처의 말을 경청하자고.

 

p250. 더 이상 노력할 길이 보이지 않으니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을 마쳐도 될 것 같았다. 폭포 가까이 걸어갈수록 가슴을 에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토록 슬픈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굴까, 나보다 더 슬픈 놈이 있네. 나이아가라 폭포에 거의 다가갔을 때야 그 슬픈 놈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건 지구가 우는 소리였다.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무섭게 때리는 소리가 세상 어디 있을까. 아픈 지구가 흐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슬픈 지구 앞에서 수행자는 가만 돌아섰다.

 

산천초목도 한다는 무정설법이었다. 명망 있는 선사를 시험하러 갔다가 도리어 당하고 정신없이 마을 타고 가다 계곡의 물소리에 돌연 깨달아 오도송을 읊은 소동파.

절망적으로 갈구한다면 깨달음을 얻으리라.

 

p. 266. 자로가 공자의 원을 듣기를 청하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

어른은 공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친구에게는 믿음을 주고 아랫사람은 품어준다. 이것이 유교의 진리다. 평이한 말 같지만 엄청난 힘이 있는 소리다. 여기서 내 문제를 다 해결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p.268. 종표 스님은 거경궁리에 대해 자주 말한다. 경에 머물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라. 경은 우리가 천지로부터 태어날 때 가지고 온 프로그램이라 인류가 다 갖추고 있다고 일러준다. 일체가 부처니 경에 머문다. 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서 사물의 이치에 맞추어 노인은 공경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고 아랫사람은 감싸준다.

 

지금 종표 스님에게 <맹자>강의를 듣는 현학 스님이 질문했다. “경이 어떻게 항상 유지됩니까?” 종표 스님은 답했다. “사상(아상,인상,중생상, 수자상)이 무너져야 한다. 젊은 현학 스님은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고뇌를 많이 했기에 종표 스님의 말을 제일 잘 알아들었다. “너는 나를 의심하지 말라. 유가는 꿰뚫었다.”고 했다. 공자가 말한 오도일이관지였다. 종표 스님도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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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14 09:16   좋아요 1 | URL
또 다시 윤회할까 두렵네요 ㅋㅋ

samadhi(眞我) 2016-02-14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에 들어가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고(그것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뭐든 의지의 문제일 것이라 여기는데요.) 머리 미는 건 생각보다 쉽습니다. ㅋㅋ 저도 마음 수련한답시고 계룡산에 들어갔다 일주일만에 머리를 밀었거든요. 머리 미는 동안에 미용사분과 즐겁게 웃었습니다. 굉장히 후련한 기분이 들어요. 사람들이 치어다봐서 좀 그렇지만.

시이소오 2016-02-14 20:40   좋아요 0 | URL
깨달음 고수들이 와글거린다는 계룡산 계셨군요. ^^

samadhi(眞我) 2016-02-14 20:42   좋아요 0 | URL
겨우 2주만에 뛰쳐나왔어요. ㅋㅋ 선배들 사이에서, ˝걔가 글쎄 머리깎고 절로 들어갔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답니다.

시이소오 2016-02-14 20:46   좋아요 0 | URL
ㅋㅋ 2주 있기도 힘들지 않나요? 대단하시네요^^

samadhi(眞我) 2016-02-14 20:48   좋아요 0 | URL
마음먹고 가는 사람들이라 다들 몇 개월씩 버티던데요. 제가 딸려서 못 참고 나온거죠. 마음이 허해서 벼르다 큰 마음 먹고 간 건데도 여전히 의지가 없었던 거죠.

시이소오 2016-02-14 20:53   좋아요 0 | URL
책만 있음 한 2-3년은 버틸수 있을것 같아요 ^^

samadhi(眞我) 2016-02-14 21:10   좋아요 0 | URL
그때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고 갔는데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압수합디다. 그 책을 돌려받지도 못 하고 나왔는데요.(아까운 그 책 ㅠㅠ) 책 없이 면벽수행해야 해서 못 버텼는지도 모르겠어요.

시이소오 2016-02-14 21:17   좋아요 0 | URL
이 책에도 보면 스님이 작가에게 인간의 대지를 빌려달라는 일화가 나오던데
스님들은 대개 책을 못 읽나봐요? 그래도 경전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면벽수행 후덜덜하네요
제가 촛불명상은 자신있는데
벽보고 있으라면 얼마나 버틸론지 ㅋ

samadhi(眞我) 2016-02-14 21:41   좋아요 0 | URL
제가 갔던 곳은 절이 아니고 마음수련원이라는 마음닦는 단체입니다. 처음엔 가야산(경남쪽에 있는)에 있었다가 나중에 계룡산으로 근거지(?)를 옮겼구요. 말 그대로 마음 닦는 곳인데 그곳에 있는 동안 종교적 색채가 느껴져 그게 싫어 나왔습니다.
못내 마음을 버리지 못 해 뛰쳐나오고 만 자신이 한심했는데 계룡역으로 마중 나온 남편이(그땐 연애할 때) 저를 보고 씨익 웃더라구요. 그 웃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이소오 2016-02-14 21:44   좋아요 0 | URL
남편미소에 깨달으셨네요^^

samadhi(眞我) 2016-02-14 21:45   좋아요 1 | URL
깨닫지는 못 했고요^^. 마냥 좋았죠. 호호호.
 
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클베리 핀>의 이 한 문장이 한 소년을 노벨문학상 작가로 만들 줄이야! (, 나도 소년 시절 허클베리 핀을 읽었건만...... 안 읽었나?)

 

소년 오에는 그렇게 살기로 결단했고 노년의 오에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책이여, 안녕!’이라고 말할 만한 노년의 오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인생의 책들을 회고한다.

 

허클베리 핀,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포 시집, 오든 시집, 엘리엇 시집, 에드워드 사이드, 시몬 베유, 블레이크, 맬컴 라우리, 플라톤, 단테의 <신곡> 등등.

 

얼마 전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에 꽂혀 있었는데 오에 겐자부로도 좋아했다니 반가웠다.

보르헤스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신곡>을 읽었다고 하는데, 신곡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그러고 보면 <신곡>청소년 권장 도서라기 보단 노년 권장 도서가 아닐는지.

 

작고한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와 처남, 매제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줄은 전혀 몰랐다. 랭보를 이타미 주조에게 배웠다니! 오에가 싱클레어라면 이타미 주조가 데미안이었던 셈. 그는 이타미 주조의 영향으로 수상한 이인조식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비평가는 이러한 이인조의 원형으로 사무엘 베케트를 언급하지만, 베케트보다는 헤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수상한 이인조문학은 실은 문학의 시초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3000년 경, <길가메시 서사시>의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그 원형이므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소년 오에에게 이타미주조였다면

노년의 오에 에게는 에드워드 사이드다.

(이럴 수가, 에드워드 사이드 책을 단 한권도 안 읽다니!!)

 

권력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에드워드 사이드와 마찬가지로 오에 역시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에 날을 세운다. 오에는 천황의 문화훈장을 거부했다. (대통령 표창이라고 하면 한국 지식인들은 너도 나도 받으려고 야단법석이었을 텐데. 경제학자라고 우기는 공 모씨 같은 이들은 환장했을테지.)

 

금수와도 같은, 말라리아 같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에게 (기생충이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 서민 박사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기생충에 대한 모욕이다.) 책을 읽혀야 한다.

 

신곡을 권하고 싶다.

 

너희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밑줄 그은 문장

p14. 몸도 마음도 얼어붙게 만드는 궤주의 반려, ‘공황에 빠져 용맹하기로 이름난 군사들마저도 견디기 힘든 비탄에 젖어서 의욕을 잃었으니

 

p16. 그리고 센 씨는 엘리엇이 <네 개의 사중주> 세 번째 시 <더 드라이 샐비지즈>에서 크리슈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덧붙입니다. 엘리엇은 이 시에서 분명 전투를 계속하는 쪽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Fair well(무사하기를)”이라 하지 않고, “Fair forward(나아가라)”라고 하지요. “나아가라, 항해자여!”라고 말입니다. fare여행하다, 나아가다라는 뜻의 옛말입니다.

 

P20. 나는 숨을 죽이고 일 분간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 그렇게 말하고는 그 종잇조각을 찢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생각인 동시에,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말한 대로 행하고 있다. 그 마음을 바꾸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시 웬만해서는 손에 넣기 힘들던 공책을 구해서, 첫 페이지에 그 문장을 적었습니다. 문장 주변에 장식을 두르고는,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금껏 이걸 원칙으로 살아온 듯합니다. 사실 우왕좌왕할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마음가짐을 지녀왔습니다.

 

p23. <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에 제가 붉은색으로 선을 그어둔 부분 중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책의 내용과 저자의 말투를 알아채시리라 믿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난제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답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아무리 해도 포기할 수 없는 편견은, 르네상스기에 인간이 회복한 자유 검토 정신인 휴머니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며, 이를 올바로 발전시켜나감으로써 필연적 통제주의마저 불관용과 기계화, 비인간화에서 벗어나 인간의 것이 될 기회를 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생각이 신중세로부터 거부당한 케케묵은 태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p52. 그렇다면 과거의 파토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야.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의 과거 말이지. 경의를 표하고, 격찬하고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야. 그걸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갱신해서 현대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겠나? 역사에는 무자비한 측면이 있어서 인간의 경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지. 어떤 것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어. 그것은 과거에 속한 것이니.

 

p56. 지금 자신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열렬히 환영하는 가톨릭다운 환경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하나의 환경 속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제 기분을 제대로 표현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쉽고 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바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혼자이고, 예외 없이 어떠한 인간적 환경과도 인연이 없는, 추방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제게 필요하며, 또한 그런 부름을 받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p68. 그것은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새로 골라서 그 작가, 시인, 사상가를 집중해서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말이죠, 자기가 읽어온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아울러 자신의 새로운 언어 감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p82.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p122. 그리스어로 아남네시스anamnesis’상기하다’, 떠올리다, 생각해내다라는 뜻인데요. 이 아남네시스라는 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를 자기도 모르는 아름다움, 올바름으로 이끌어준다는 플라톤의 널리 알려진 철학을 다뤘습니다.

 

처음 기 형은 신약성서 <마태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부드러워져 싹이 트면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니라는 구절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편지에 씁니다. “나뭇가지가 부드러워진다는 부분은 실제로 깊은 숲 속 나무에 둘러싸여 사는 내게 중요하게 다가왔다하여 이번에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다시 읽게 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지지요.

 

옛날 우리는 천사처럼 하늘을 날았고, 지금도 우리는 가끔씩 새의 날개가 돋는 부분, 어깻죽지 부근이 근질근질하다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 형은 아까 말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성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나뭇가지에서 싹이 나는 계절, 작은 가지가 돋아나기 직전에 무화과나무를 보면, 아주 약간 부풀어 있고 부푼 부분을 눌러보면 부드럽다고 합니다. 식물이 새로 잎을 낼 때에는 딱딱한 나무 살결이 부드러워지고, 조금 부풀어 오릅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도, 영혼도,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이 싹트려 할 땐 약간 부풀어 오르면서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새로 움트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내 안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움트려 하면서,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따라서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을 일을 하고자 한다.

 

124. 그 가운데 하나가 <토성 아래서>라는 시입니다. “지금 내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해서 상실한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말아다오. 그게 아니라 나는, 이제 더는 젊은 날을 경험할 수 없다는, 바로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p134.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어느 어두운 숲 속 가운데 있었다.

 

p136. 네가 올라가 저들 옆으로 가기 원한다면 그곳에 나보다 더 나은 영혼이 있으리라. 우리는 헤어질 때가 왔으니 너를 여기에 두고 가겠다.

 

p151. 조금이나마 너희 마음에 합당하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너희 중 하나가 가르쳐다오. 너희는 정처도 없이 어디를 헤매다 죽었느냐.

 

p152. 너희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p174.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서로 미워하는 듯도 한, 어쨌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인조가 오에의 소설에는 등장한다.” 고 제임슨은 말합니다. 이러한 이인조에는 원형이 있다고 하면서, 그는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인용했어요. 베케트가 생애 최후에 쓴 소설 삼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p183. 그리하여 그곳을 나와 다시 하늘의 별을 우러렀다.

 

p186. 그 단편은 이토 시즈오라는 시인의 시를 인용하는 것에세 시작합니다.

 

나의 영혼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 증거를 나는 너에게 이야기하겠다.

 

p190. ‘나의 영혼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p193. s 씨에 따르면, 시인은 영혼의 자발성을 믿지 않고, 영혼이 말하자면 악기처럼 외부에서 오는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한다. (중략) 자체적인 힘에 의해 자기 안으로부터 노래를 발산하는 나의 영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악기가 되어 울리기 시작한 노래를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p204. 또한 죽은 자들이 살아 있을 때에

말로 꺼내지 않은 것을

죽은 뒤에는 말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전달은 살아 있다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여 불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p224. 그는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 속에서 어떤 특권도 지니지 않는 아마추어로서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을 읽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요.

 

p230. 본질적으로 보자면, 고향 상실의 주변인으로 언제까지나 권력을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사이드가, 예를 들어 이슬라엘 지식인으로 안주한 작가 아모스 오즈에 비하면 분명히 유대계 지식인다운 특성을 지녔으며, 나는 그러한 최후의 인간이라 할 수도 있다라고 한 건 사이드다운 유머이면서 아울러 그의 진심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p231. 사이드는 아도르노에 대하여라고 주석을 달아 말합니다.

 

만년성은 받아들여지는 것이나 정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그 너머에서 계속해서 살아나가겠다는 사싱이다. 아울러 만년성은 인간이 만년성을 뛰어넘고, 인간이 이를 초월해 거기서 탈피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화해 불가능한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화해시키는 것을 거부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이드 자신의 음악과 세계에 대해 몇 번이고 똑똑히 들었던 음성입니다.

 

내가 아도르노 안에서 발견하는 중요한 부분은 이런 긴장감에 대한 고찰, 내가 화해시키기 어려운 것이라 부르는 부분에 강렬한 빛을 비추어 극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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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환희 2016-02-13 0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어쩜 이렇게 잘 쓰시는지요 ^^ 글쓰시는 분같아요 ^^

시이소오 2016-02-13 08:41   좋아요 1 | URL
허걱 그런 칭찬 처음 들어요. 환희의 도가니!! 감사합니다. 잘 쓰도록 해 볼게요^^
 
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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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한국학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당시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역사에는 공포스러운 장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 .......아마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그렇다.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 없었다. 국가는 잔학해지고 개인은 점점 더 비굴해지고 있다. 기득권에 기생하기 위해 대다수 지식인들이 침묵을 선택한 것과 달리 러시아의 아들박노자는 한국 현실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치 않고 해왔다. 그의 비판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한 파쇼적 아비투스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박노자는 박근혜 정권을 파쇼의 부활로 본다. 히틀러 독재가 대중 독재였듯 오늘날 대한민국은 파쇼 대중을 기반으로 한 파쇼 정권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을 해산시키는 걸 보고나 들은 적이 있나? ‘도살자박정희도 전두환도 정당을 해산시킨 적은 없다. 박노자 말대로 편집증 정권, 미친 정권이다. 오죽하면 보수적인 불교, 천주교, 개신교등 종교계가 손잡고 대통령 사퇴를 부르짖었겠는가?

 

박노자의 말대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가 지옥이라면 대한민국은 무간지옥이다. 예전에 리뷰를 썼던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해 어떤 이가 반박의 글을 올렸다. 책을 제대로 이해못했다고? 핑커의 책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지력만 있다면 누구나 이해가능하다. 핑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유사이래 폭력이 감소해왔다는 거다. 박노자는 뭐라고 했을까?

 

핑커의 주장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주된 폭력의 형태는 자본의 횡포, 이른바 갑질이다. ‘은 파견 업체를 통해서 1년 계약의 비정규직을 모집해서 정규직과 같은 라인에서 일하게 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힘든 일을 한다. 그들이 비정규직 보호법에 의거해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기만 하면 갑은 바로 계약을 해지하고 그들을 내보낸다. 직장이외에는 사실상 어떤 복지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업 수당을 최장 10개월간 받고 나면 그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갑의 이러한 횡포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초적인 정의를 짓밟는 강자의 부당 대우는 바로 광의의 폭력에 속하지 않을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핑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리 사회는 비폭력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패악질이 누적됨에 따라 더 더욱 폭력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희방버스 참석자들은 용역깡패에 의해 머리가 깨지고 송경동 시인은 갈비뼈가 부러져 나갔다.

 

국가폭력은 개인의 폭력을 내면화시키는 걸까. 윤일병 살인 사건, 김해 여고생 사건을 보면 대한민국은 괴물제작소. 김해 여고생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성매매 강요, 폭행, 고문에 이어 시신에 휘발유를 붓고 시멘트로 암매장했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네팔, 이집트, 아르메니아, 시리아 등의 국민들은 왜 우리처럼 자살하지 않는 걸까.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말했듯 돈이 없고 지위가 낮을수록 생명의 가치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세월호 사건은 기업과 국가가 공모한 대량 살인 사건이다.

 

미쳐가는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커의 말이 맞다고 아득바득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연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이 있을까. 박노자의 처방이다.

 

믿지 말라, 무조건 따르지 말라, 동류를 찾으라.

 

우리는 당장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체제가 강요하는 사회화 과정을 거부한다면 체체의 보복이 뒤따른다. 박노자는 우선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부모의 말에 따라 명문대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존중할 수 있는 학과를 선택하라. 그리고 동류를 찾으라고. 온건 사회주의자가 되든 급진 아나키스트가 되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야 말로 중요하다고.

 

나는 좌, 우파 프레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의 좌파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나의 모든 척도는 만인의 인권이다. 인간답게 살 권리 말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인가? 각자가 생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수백만 년 동안 군중 동물로 살아온 인간이 남을 짓밟고서 혼자서만 누리는 생존과 번영에 진정 행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무리 표면적으로 성공해도 이 체제와 시대가 각자에게 남기는 것은 내면의 파멸과 고통일 뿐이다.

 

인간이면 남의 고통을 진지하게 보고 이해하는 순간 자비심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운명이 그 자비심을 실천할 기회를 줄 것이다. 각자도생 시대의 적자생존이니 약자 도태니 하는 코드에 역류할 수 있는 심층적 집단 심성이란 결국 자비심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혁명적 실천의 원천이다. 파웰 코르차긴의 말대로 내 모든 생명과 정력을 다해 그것을 실천한다면 죽는 순간에는 그래도 덜 부끄럽지 않을까?


-2015. 5. 2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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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오징어 2016-02-12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더없이 강한 꼰대들이 판치는 시대죠..

시이소오 2016-02-12 21:14   좋아요 0 | URL
적어도 꼰대는 안되도록 살아야되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