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섬, 인도
장 그르니에 지음, 배재형 옮김 / CIR(씨아이알)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르니에의 <>과 비슷한 에세이일거라 짐작했건만.

(나는 왜 그렇게 <>을 좋아했던 것일까.)

<상상의 섬, 인도>는 에세이이긴 하나 철학적 에세이다.

특히나 인도철학. 그르니에가 작가 이전에 철학자임을 잊고 있었다.

 

한때 인도에 가고 싶었고 가기 위해 티켓팅까지 했었다.

거의 한달 동안 명상만 하는 여행. 깨닫고 싶어서.

 

인도를 생각하다보면 양가적 감정에 휩싸인다.

깨달음의 나라. 신성한 나라.

한편으론 독재국가, 여성이 차별 당하는 나라.

불가촉 천민은 동물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계급 사회.

(그들은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빗자루를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

한때는 도무지 인도나 인도국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불가촉 천민을 학대하냐고? 그건 그 사람의 카르마, 업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일까? 그르니에는 인도를 상상의 나라로 바라보길 제안한다.

그르니에가 이 정도로 인도철학에 조예가 깊을 거라곤 미처 상상조차 못했다.

인도철학을 공부했었거늘 어느덧 다 잊어버렸다.

인도 철학, 다시 공부해야지.

 

인도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만 이 책을 추천한다.

 

예전에 참석한 영성관련 모임에서 허구헌날 꾸벅꾸벅 조는 나를 보며

다른 참가자들은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러시다 윤회하시면 어쩌시려고.”

윤회하죠. .”

 

그때만 해도 다시 산다면 재밌을 것 같았다. 지금은?

절대로 윤회하고 싶지 않다. 또 다시 이 나라에 태어날 걸 상상하면 끔찍하다.

(만일 윤회가 사실이라면 나는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헬조선에 천민으로 태어난 걸까?)

 

, 무슨 수로 깨닫는단 말인가.

젠장, 이번 생도 글렀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수밖에.

 

메모한 문장들

 

이즈음 장 그르니에를 다시 읽으니,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저작들 주위를 맴돌고 있자니 예술적 문체와 파격적 행보, 심도 깊은 앙가쥬망을 양립시킬 줄 알았던, 그르니에라는 한 명의 진정한 철학자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우리 시대가 못내 불만스럽다. 이 시대는 영혼없는 주석자들을 상찬할 테고 모든 문학의 기원인 노래와 실체를 다루는데 거침없었던 한 문필가는 침묵 속에 버려둘 것이다. 영감없는 사상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영혼의 양식이 못 된다면 문체가 대체 무슨 소용 있을까?

 

-올리비에 제르망 토마스

 

p20. 플로티누스는 죽음을 두 가지로 나눈다. 자연적 죽음, 그리고 자연적 죽음을 능가할 수 있는 철학적 죽음, 철학적 죽음은 힌두교도의 목표다. 정신의 방향, 오직 그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기에 무엇을 행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흔히 말하는 현세에 대한 혐오에서 시작해 지중해 정신을 낳은 이원성을 허물고 마침내 계시에 이르게 되는 이 점진적 환멸의 과정을 상상해보자.

 

p21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는 것 같은 존재의 어떤 미동에 세계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를 떠받치고 선, 그가. 그렇다면 그에게 돌아갈 수 있는 더 직접적인 길은 없을까? 내가 나의 가장 깊은 심연에 귀 기울이면 나는 존재하길 멈추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다른 어떤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 내 생각과 가장 내밀한 욕망들이란, 바로 그 생각과 욕망을 들쑤시는 그것과 맞바꾼, 한낱 마술 환등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잠이 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이 다가서고, 죽으면 그것과 합일하게 된다. 그것의 품 안으로 나는 떨어진다. 마치 작은 돌멩이 하나가 우물 속으로 떨어지듯이.

 

p39 인도는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향에서 항상 벗어났다. 인도는 한 가지 야심을, 그것도 유일무이한 야심을 갖고 있었다. 세상을 등진다는 야심 말이다. 인간의 생애를 고작 바람결에 흩어지는 한 무리 날벌레들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인도는 꿈에 잠긴 채 꿈쩍도 않는다.

 

p53. 그래서 알로 신부는 오직 철학자들의 인도만을 보려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역시 그런 인도다. 두 가지 문제가 힌두교도들에게 던져진다. 영원과 변화의 문제, 존재와 생멸의 문제. 이것은 정말이지 모든 계시와 전통을 떠나 철학적 지성에게 던져지는 본질적 문제들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란> 어쩌면 시간과 영원의 관계 맺기라는 단 하나의 문제일지 모른다. 인간의 지성은 영원한 것에 단박에 몰입한다. 그런데 사실 지성은 오직 시간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을뿐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 때문에라도 시간 속으로 침잠한다.

 

p59. 카이저링의 방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잘 안다. 그 방식은 전쟁 전 크게 유행했던 감정이입의 미학 이론과 원리상 같은 것이다. 어떤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그 작품을 관조하는 게 아니라 그와 합일해야 하고, 더 나은 방법은 작품 자체가 되는 것 말이다. 이 테마에 대해서라면 모두 알다시피 베륵손 철학의 장광성이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 카이저링은 충실히, 그러나 허망하게 그 기법을 적용한다. 그는 모든 문명에 관해, 그 문명들이 누군가의 영혼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p65 동양학자들을 향한 궤농의 두 번째 힐난은 연대기에 개의치 않았던 사람들의 연대기를 중시한다는 것, 그리고 인도인들에게 전부를 뜻하는 전통을 정작 동양학자들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말해 역사적 방법이 형이상학에 적용될 때 역사적 방법은 제값을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궤농에게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계시의 풀이에 불과한 신학도, 오로지 이성에만 의존하는 철학도 아니라고 궤농은 말한다. 형이상학, 그것은 우주적이고 조전 지어지지 않은, 궁극의 인식이다.

 

p66 <베다>에는 형이상학의 씨아이 담겨 있다. 형이상학은 <우파니샤드>를 지나 오늘날 유럽인들이 아는 거대한 계보의 육파철학을 낳는다. 그렇지만 궤농의 학설에 부합하는 것은 미맘사와 베단타 학파 둘 뿐이다. 히자만 원자론 학파인 바이쉐쉬카는 어찌 되는가?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이쉐시카는 중심 교리에 어떤 타격도 가하지 못하는 일종의 보충 교리에 불과하다. 그 교리는 세계에 대한 완전 무결한 설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자여서 유물론자라면, 바이쉐쉬카 학파의 논사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도 사상의 통일성이란 이처럼 완벽하다. 하지만 자이나교는? 또 불교는? 궤농은 자이나교와 불교가 인도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단들이므로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도 사상은 그렇게 브라마니즘으로, 브라마니즘은 베단타 철학으로, 베단타 철학은 중세의 위대한 논사 샹카라의 쉬바교적 교리 체계로 환원되고, 더 이상 어떤 물음도 제기되지 않는다.

 

p67 궤농에 따르면 인도의 철학 유파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인류의 사라진 위대한 전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도약 또는 비약이 가능한 것은> 그가 모든 전통들의 통일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이 인류의 잃어버린 전통과 교류하길 희구하는 엘리트 진영을 나라마다 꾸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모든 전통의 비의적 통일성(11세기 베단타 철학에 그 통일성의 원초적 형태가 순수하게 표현돼 있을 것이다)에 도달하는 것이라 한다.

 

p70 유럽인들을 따르든 아니면 인도인들을 따르면, 중요한 것은 인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열망이다. 꼬르네이유와 바레스가 스페인을 보았던 것과 같은 입장에서 인도를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인도를 어떤 상상의 나라로 간주하고서야 비로서 그 실체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니, 달리 인도를 생각할 여지는 없다.

 

p71. 사회적 장치 그 자체. 카스트에 따른 분할. 복잡한 제의들. 개인을 사회 미에서, 인간을 종교 밑에서 꼼짝없이 옭아매고 억누르는 것 전부. 우리 그리스 문명 및 기독교 문명과 상반되는 모든 것. 힌두교도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게 하는, 우리에게 혐오감을 줄 뿐 아니라 내게도 혐오감을 주는 그 모든 껏. 이들 모두가 가장 소중한 관계들 - (인도에서 이 관계들은 족쇄다.) - 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는 데 필요한, 이성 너머로 도약하려는 정신을 돕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 생각하니, 그 모두가 내게는 흥미진진해 보인다.

 

p72. 파스칼이 알려 하고 경배하려 하는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뿐이다. 철학자들의 신이 아니다. 이 철학자들의 신을 그 극한까지 밀어붙여보라. 인도의 신을 보게 되리라. 가장 비인격적인 사유도 인도의 신에겐 이미 하나의 현시다. 인도의 신은 그 자체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순수하고 한정될 수 없는 것. 파스칼은 바로 이 신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말을 남긴다. “이 무한한 우주의 침묵에 난 두려워진다. 인간과 저 대문자 존재 사이에 이렇게 아득한 거리가 있다니.....”

 

p74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뉘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껏 변화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독교 성자는 고대의 현자와도 현대의 시민과도 닮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모종의 신인류를 창조하려 한다.

 

p77. 삶의 모든 굴곡을 따르는 것하곤 거리가 멀고, 베단타 철학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는 직관은 베단타 철학에서 나와야 하고 장제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배단타 철학의 직관은 어떤 점에서 베륵손의 직관과 대비되지만 플로티누스의 직관과는 가깝다.

 

삶과 사유 사이의, 속죄 받을 길 없는 싸움. 사유는 그 자신에게 골몰하기에 대담하다. 사유는 내가 감히 생각하는 것 저 너머로 나를 이끈다. 사유는 겁내지 않고, 인간의 삶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사유에 죽음이란 없다. 사유 앞에서, 삶이란 부조리하다. 사유 앞에서, 사유란 부조리한 것일 수 없다. 거기에 절대적 니힐리즘의 한계가 있다.

 

p85 인도의 윤회 관념은 환생 관념 자체를 훌쩍 넘어서 우주 전체에 적용된다. 우리 유럽인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단절을 뜻하고, 바로 그 죽음에서부터 우리는 비로소 어떤 영혼의 역사를 상상한다. 그러나 인도인들에게 윤회란 어떤 존재의 무한정한 일련의 상태 변화들로, 매 상태마다 고유한 특징적 조건들을 갖고 한 번밖에 거쳐 갈 수 없는 존재의 주기가 되며, 땅에 사는 존재거나 몸을 가진 존재 일반은 다른 무한한 상태들 중에서 하나의 특정 상태만을 나타낼 뿐이다.

 

p86 영혼의 불멸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영혼은 영원하니까. (아리스트텔레스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는 예외지만, 이는 서구에서는 흔치 않은 관념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영혼은 그 개체성 안에서나 영원하다. 영혼은 실체의 양태로서, 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라이프니쯔에게는 수축과 전개에 관한 문제이지만, 이 수축과 전개는 항상 하나의 닫힌 모나드 안에서 일어난다.)

 

인도인들 입장에서 보면 영혼, 즉 개별적 생명원리 안에도 우선 붓디buddhi(우리라면 로고스, 이성 혹은 신의 말씀), 다음은 우주적 영혼atman(플로티누스적 의미의 토일성)이 있다. (잠이 든 상태에서) 아트만에서 시작해 붓디로, 그 다음 지와 아트만 손으로 발현한다. 회귀는 거꾸로 지와 아트만에서 붓디를 거쳐 아트만에 이른다. (잠에 비유하면) 꿈꾸는 상태에서 숙면 상태로, 결국에는 어떤 제약도 없는 상태로 가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죽음도 개체의 기능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감각의) 외적 기능과 (활동의) 내적 기능들은 지와 아트만으로 수렴된다.

 

우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내세 혹은 불사라 부르는 것, 인도인들을 운명적으로 일련의 dus 연쇄적 환생으로 인도하는 삶이 바야흐로 시작된다. 개체로 현현한 상태인 현세로 돌아오지 않으려면, 이번 생을 끝으로 지고의 행복인 범아일여의 미분화 상태로 되돌아가려면 해탈moksa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인도 정통 철학에서] 해탈은 여느 종교들의 구원처럼 행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행위로는 행위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천국은 현세의 삶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인식 또는 앎을 통해서만, 그것도 완전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서야 비로서 개체성과 시공간의 굴에에서 벗어날 수 있음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 깊은 곳에 숨겨진 근본 원리를 파악하는 데 열중해야 한다. 그 원리에 자신을 맡기면서, 존재의 생멸변화와 영영 작별하기 위하여. 몰지각한 자들은 자기가 속한 순환 주기가 끝나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무한정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느니, 그 끝에 이르면 세계는 해체되고 그 다음 재형성된다. 하지만 현자들은 죽은 뒤에, 죽음과 동시에, 심지어는 살아생전에도 브라만에 도달할 수 있다.

 

p88. “우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것이 되어야 한다. 이 진리를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다. 이 진리를 아는 자들은 불사의 존재가 된다. 그렇지 못한 자들, 그들이 가는 곳은 괴로움이다. 만일 나는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아트만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육신을 전전하며 고통을 감내할 이유가 있겠는가? 몸에 깊숙이 숨겨진 아트만을 찾아 이해한 사람, 그 사람은 우주의 창조자이자 조물주다. 세계가 그의 것이고 그가 곧 세계다.

 

무엇이 윤회를 야기하는가? 존재의 방만함이다. 무엇이 윤회를 멈추게 하는가? 존재 자신에 대한 집중이다. 이 점에 대해서라면 정통 철학과 비정통 철학을 막론하고 인도의 전통 전체가 삼천 년 넘도록 같은 입장이었다. 이보다 더 한결같은 형이상학적 전통의 예도 없다.

 

p90. 인도인은 그보다 더 완고해서, 윤회 혹은 전생을 면하기 위해서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행위를 완전히 멈춰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오로지 지식을 통해야만 구원이 있다.

 

p92. 존귀한 자가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의연한 용사여, 이미 말했듯이 세상에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정신의 노력에 의지한 사상가들의 태도가 있고, 실천적 노력에 의지한 고행자들의 태도가 있다. 행위를 멈춘다고 해서 행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활동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 한순이라도 비활동 상태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그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의 생리 작용 때문에 행위에 들어가게 된다. 신체 기관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나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라도, 감각적 대상들과 이리저리 떠도는 상념에 정신 팔린 자가 있다면 그를 일러 사이비 수행자라 한다. 그러나 아르주나야, 감각적 욕망들을 정신으로 굴복시킨 자, 어떤 행위에 집작하지 않으면서도 그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 신체 기관들의 활동에 힘 쏟는 자는 존경받는다.”

 

행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끄리쉬나는 온갖 근거를 들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행동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을 돌아봄 없이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되 행동의 결과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행함에서 행하지 않음을 보고 행하지 않음에서 행함을 보는 자, 그 자는 범부들 중에서도 현자다. 다른 곳에서 어떤 행위를 하든 그는 신과의 합일 상태에 있다. 마치 지혜의 불로 행위의 소산을 태워 없앤 것처럼, 그가 도모하는 모든 것마다 욕망의 충동 없이 이루어진다면 학식 있는 자들은 그를 현자라 부른다. 그 행위의 열매에서 욕망을 몰아낸 자, 항상 충만해 있고 갈망에서 벗어난 자, 그는 어떤 행위에 몰두하고 있을지라도 행위하지 않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p96. 인도에서 까르마는 공평한 정의로 여겨진다. 왜 가난하게 태어나는 가? 전생에 재물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왜 현명한 사람으로 태어나는가? 전생에 지식을 얻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각자의 운명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이라 부르는 것이 인도인들에게는 인간 행위의 결과다. 인간은 과거와 관련하여 결정된다. 행위의 효과가 행위자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인간은 미래와 관련하여 자유롭다.

 

p98 더 광범위한 결정론, 더 심오한 자유. 인도인의 사유 속에서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 까르마다. <서구에서> 관념이나 감각기능이 주어진 사물과 행해진 모든 것을 단지 옮기는 장치임에 비해, 인도인의 사유에서 인간 정신은 수동적이 아니라 본래 창조적인 하나의 활동이고 자연 그 자체의 소산이다. 관조적이라기보다는 (영적 의미에서) 훨씬 더 실제로 구현된 정신. 우리 자신의 행위의 소산, 그것이 바로 우리(이고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이).

 

p 100. <우파니샤드>에 와서야 비로소 브라만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게 되고 아트만과 동일시된다. 아트만, 그것은 인성의 중핵이고 와는 정반대되는 자아이며 의식과 대비되는 영혼이자 우리들 가장 깊은 곳에서 정신의 온갖 변화를 통해 지속되는 실체다. 따라서 아트만은 심리학적 용어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용어다. 아트모스나 아니마와 흡사하고, 용어의 어원이 오늘날 논란거리이긴 하나 아마도 그 역시 원래는 생명의 숨결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 영혼은 우주적 존재와 동일시된다. 우주적 존재 바깥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들 자신의 중핵은 우주적 존재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그리하여 우주적 가치를 갖고 존재는 영적 의미를 띠게 된다.

 

p102. 야갸발꺄는 답했다. “진정 당신을 심란케 할 만한 그 어떤 말도 난 하지 않았고. 내가 말한 것은 이해하기 쉬워요. 실로 아트만을 소멸되지 않아요. 아트만은 파괴되는 법이 없고. 아트만이 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보는 자와 보는 기능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니 그는 보지 않아도 본다오. 보는 능력을 파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 모든 것이 아트만으로 환원되면 아트만과 구별되고 아트만이 볼 수 있는 제 2의 것으로서 아트만과 다른 어떤 것이란 더 이상 없지요.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자와 생각은 분리되지 않고 식별하는 자와 식별 기능은 분리되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한편 모든 것이 아트만으로 환원될 때 아트만과 다른 어떤 것, 아트만이 보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저기 있으니 하나는 다른 하나를 볼 수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느낄 수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들을 수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생각할 수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의 모든 것이 그의 아트만으로 되돌려지면 그가 무슨 수로 볼 것이며 볼 수 있겠소? ......이제 나는 당신에게 내 가르침을 전했으니, 마이뜨레이여,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사외다. ”

 

p103. 불사란 우리가 의미하는 불사가 아니라 영원성을 말한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죽은 뱀의 껍데기가 개미둑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과 같다. 죽음 뒤에는 시신이 이와 같이 있으리라. 그러나 뼈도 없고 살도 없는 아트만, 지성이 의거하는 아트만, 그것은 브라만 그 자체다. 그것은 세계 그 자체다. ”

 

아트만의 인식에 이르기 위해 <우파니샤드>문헌들은 요가(연결, 합일이란 뜻)와 사색이라는 두 경로를 권한다. 베다의 희생제의는 경시된다. 까르마가 권면된다.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고 요가를 지향해야 하며 결국에는 명상해야 한다.

 

학문에 환멸을 느낀 학자는 마치 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이의 단순함에 질리고 난 뒤에는 고행자가 된다. 마침내 고행에 환멸을 느낀 다음에서야 그는 한명의 진정한 브라만이 된다.”

 

p104. 그 본질상 브라만, 즉 아트만이란 무엇이가?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에 우선하는 고로 규정될 수 없다. “그것은 아니다, 아니다’(라는 부정)으로 밖에 지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붙잡을 수 없다. 분할할 수 없다. 집착함도 없고 얽매임도 없는 것이다. ” <브라하드아란야캬, 3. 9) - “ ‘그는 있다라고 생각돼야 할 뿐 아니라 그는 없다라고도 생각돼야 한다. ‘그는 있다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그 실재의 본질이 나타난다.” (<까타>, 6, 13) 브라만에 대한 인간의 앎이란 정말이지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인간의 앎으로는 브라만이 현현한 상태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브라만은 순수한 주체, ‘영원하지 못한 생각들의 편린들을 사유하는, 사유의 영원한 주체(까타, 5,13)이기도 하다. “그 어떤 정신도 그것을 사유할 수 없고 외려 그것에 의해 정신이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께나>, 1,5)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아트만 브라만은 분명 그들 내면에 있다. “그것은 몸 안 구석구석에 있다. 마치 칼집 속의 면도칼처럼, 제 둥지로 들어간 한 마리 전갈처럼.: 하지만 아트만 브라만은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적이다. ” 불이 본질적으로 똑같은 하나의 불임에도 세상을 태울 때면 상이한 온갖 형태를 따라 모양을 취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의 내적 정수인 아트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아트만은 그 형태들 바깥에도 역시 존재한다. “ 브라만이 세계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브라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브라만을 세계 안에 있다고 본 것은 다름 아닌 브라만을 알기 위해 결과들에서 근본 원리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는 탓이다.

 

하지만 앎의 순서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렇듯이) 존재의 순서와 역순이다. 실제로는 브라만이 세계를 감싸고 있고 세계는 브라만으로부터 온다. “거미가 제 스스로 거미줄을 만들고 다시 삼키듯이, 대지에서 초목들이 자라듯이, 사람에게 머리털이 나오듯이, 그와 같이 이 불멸

의 존재로부터 만물이 나온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동일한 본성의 불똥 수천개가 사방으로 튀듯이, 그와 같이 수많은 온갖 피조물들은 불멸의 존재로부터 나와 그 존재에게 되돌아간다.”

 

 

p105. 그 대부분이 시의 형태나 비밀의 잠언으로 표현된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굉장히 포괄적이어서 일원론, 유물론적이거나 관념론적인 범신론, 절대적 관념론, 심지어는 단자론적 다원론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종류의 철학 체계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다. 하지만 그토록 광대한 원천에서 정연한 체계들을 길어 올릴 생각을 하기까지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10여 세기가 지나야 했고 불교라는 이단에 맞서 싸워야 했다.

 

p106. 그러므로 사실을 말하면 브라만은 신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다. 브라만은 우주 삼라만상이 나왔다가 돌아가는 플로티누스의 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통일성, 즉 일자와 유사한 것이리라. [일자로부터의 유출은 지성, 세계- 영혼, 우주 삼라만상 순으로 일어나며 뒤로 갈수록 앞의 것에 비해 불완전해서 전체로 보면 일자를 정점으로 거대한 위계 구조를 이룬다.(역자)]

 

p108 다신교와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대신 우리는 막스 뮐러가 빚어낸, 교체신교라는 아주 적절한 용어와 만나게 된다. 인도는 신을 차례로 바꾸어가며 숭배하고 진정한 현자에겐 그 하나하나가 신의 한 측면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것이 힌두교의 포괄적 똘레랑스를 낳는다. 모든 것이 우주에 대한 하나의 형이상학적 비전속에 통합될 수 있으니, 인도는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브라만이 이런 형상이 아니라 저런 형상을 취하는 것이 무에 대수로운 일인가? 예수와 붓다와 마호멧과 라마 끄리쉬나는 모두 똑같이 현자들일 텐데 말이다. 유럽인은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계속해서 내민다.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힌두교도는 양가성 속에 머문다.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p109. 그리스 사상과 인도 사상은 마침내 신성 숭배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됐다. 신이 아니라 신성 말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 사상과 인도 사상은 지성적 열망과 행위에 대한 반감을 공유했던 것이다. 행위를 말하는 것은 곧 사람의 가치와 그 소망의 효력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니까.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베륵손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의 합일을 허락하지 않는 신비주의를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완전한 신비주의란 행위,창조,사랑일진저.

 

p110. 기독교 신비주의가 제아무리 행동에 호의적이라 한들 소용없다. 그 지적 기반, 그 신비주의적 도약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어떻게 안 보이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마르타에 대한 마리아의 우위는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도 역력하다. 그러니 절대, 일자, 불이에 도달하는 지성에 관해서라면 인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숭고한 근사값을 제공할 것이다.

 

p111.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 세계란 하나의 환영, 마야다. 그 자체가 사람들의 무수한 착각 안에서 굴절되는. 매번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도는 감각의 단순한 착각에 기댄 입론부터 집단적 환각의 입론까지, 회의론적 논증이란 논증은 전부 동원했다. 가장 흔한 것이 꿈의 논증이다.

 

p113. 서구에서도 순수하게 사변적인 철학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간혹 순수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스피노자를 꼽는 이들이 있지만 그의 다섯 번째 저작이 바로 <에티카>! 만일 구원의 철학이 있다면 <에티카>야 말로 그렇다.

 

p124. 알다시피 소승불교는 실체로서의 인격이나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찰라멸하는 것일지언정 모든 법이 실유함을 인정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붓다에게서 멀어져 나름의 신학과 철학을 구축한 대승불교는 이 이원성을 거부하고 인격뿐만 아니라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무분별의, 부정적 표현으로만 정의할 수 있을 뿐인 어떤 절대, 즉 공이다. 이것이 <해심밀경>이 설하는 내용이다.

 

p126. 올리비에 라콩브는 보기 드물게 철학자와 문헌학자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베단타의 중심문제인 절대의 문제, 절대와 관련한 정신의 문제와 맞서길 두려워 않는다. 그는 특히 불교의 머슴이라는 흔한 비아냥거림으로 얼룩진 샹카라를 깨끗이 씻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샹카라에게 가상들의 유희는 단순한 무가 아니다. 상대적인 것이라 해도 절대 앞에서 무화되지 않고, 가상으로서의 세계 안에도 비교적 알기 쉬운 일종의 결정적 조건들이 있다. 브라마니즘의 재건자들은 이단적 불교에서 성전에 표현된 진리의 요체를 간단명료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 무한하고 상주하는 존재가 있을 뿐으로, 정신은 이 존재의 무의식적 현현들을 거스르면서 존재 자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바야흐로 정신은 아트만이고 존재는 브라만이라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가장 위대한 진리, 그것은 브라만이 존재하고 아트만이 브라만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허상들 때문에 세계와 자아가 멀어져 버린 플라톤 기독교적인 전통에서처럼 일종의 신과 영혼의 합일 문제인가? 아니다. 존재하는 것, 존재, 그것은 동시에 또 불가분하게 사유(작용)이지 신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신이나 영혼은 어떤 인격적 존재 양태를 취한다는 바로 그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베단타 철학의 근본적 직관은 바로 존재의 충만함이다. (공의 광대무변함이 후기 불교의 작관인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직관이 서양에서 해석하는 식으로 범신론으로 귀결될 수도 있겠으나 막상 베단타 철학자들은 그에 저항한다. 베단타 철학은 일종의 일원론,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불이론이다. 물론 외부 세계를 설명하는 일이 커다란 장애이긴 하다. 어떤 창조의 결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유출의 결과도 아니라면 이 세계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될 수 있는가? 순수한 환영인가?

 

샹카라는 이원론을 배격하면서도 이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플라톤도 비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마야란 존재와 다른 것도 아니고 존재와 같은 것도 아니다. 샹카라는 오직 절대만을 믿었으나 그러면서도 그가 세계를 구제할 수 있도록 한 미묘한 의미상의 변이들이 있건만, 그 사태를 여기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올리빙레 라콩브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샹카라보다 존재들의 개체성을 훨씬 더 존중한 라마누자는 일종의 한정 일원론, 혹은 인도식 표현대로 하면 다양한 것들 그대로 불이론에 머문다. 다원론도 아니고 일원론도 아니다. 브라만과 존재들 사이에 완전한 일치란 없고 전적인 분리도 없지만, 그러나 양자는 구별되고 이 구별로 인해 브라만과 개별젹 자아들과의 결합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신의 몇몇 속성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라마누자는 신애bhakti개념으로 서구의 관념들과 훨씬 더 가까워진다. 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이 개념은 기독교의 신비적 상태들을 연상시킨다. 유신론과 신의 인격대로 기우는 이 추세는 라마누자 이후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p138. 먼저, 브라마니즘이라는 이 거대한 집합에서 쇼펜하우어가 빌려온 것들이 무엇일까? 두 가지다. 환영으로서의 현상계와 실체의 통일성의 영원성. 쇼펜하우어는 천친난만한 기쁨을 표하면서 마야의 관념을, 그것도 차라리 불교적인 의미에서 취한다. 그에게 마야란 인간을 생멸의 굴레에 머물게 하는 착각의 원인이다.

 

p145. 이 모든 신비주의자들 중에서도 쇼펜하우어가 가장 크게 빚지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에크하르트로, 쇼펜하우어는 그를 독일 신비주의의 아버지라 부른다. 온 천하에 퍼진 이 범신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도 바로 그에게서다. 그리고 우주적 환영과 전적인 포기의 관념도, 쇼펜하우어가 충분히 알면서도 별로 활용하지 않거나 오용했던 것은 인도 형이상학에서가 아니라 바로 에크하르트에게서 온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붓다와 에크하르트와 나는 진리를 알았다. 그러나 붓다는 그 진리를 비유들로 감쌌고 에크하르트는 감히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못했으니, 오직 나만이 그 진리를 순수한 상태 그대로 누설한다.”

 

p149 반면 우리는 <찬도갸 우파니샤드>에서 베단타 철학의 최고 정수인 범아일여를, 달리 말해 존재 그 자체자아의 동일함을, 우리 식으로 말해 신과 영혼의 동일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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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8-04-0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아...이거이거 일일히 타자 칠려면 꽤 시간이 많이 걸릴듯요...

음성으로 말하면 인공지능이 인식해서 글자로 변환해 주는 어플이 있긴 하던데 아직 변환율이 만족스럽진 않겠죠?

상용화되면 좀 편하게 될듯....

시이소오 2018-04-05 10:38   좋아요 0 | URL
타자치면서 한번 더 읽어본것으로 만족하렵니다 ㅎㅎ
 
여자의 빛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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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읽은 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20년 만에 다시 집어 든 그의 책 <여자의 빛>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정말 잘 쓰는구나.’

 

로맹 가리처럼 살고 싶었건만.

두 번의 콩쿠르 상 수상, 여배우와의 결혼, 권총 자살.

내가 로맹 가리였더라도 권총을 입안 깊숙이 쑤셔 박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철학적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분명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자유를 획득했다.

아메리의 표현에 따르자면 자유죽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딪힌다.

달러 밖에 없던 그를 위해 여자는 프랑화를 건네주고,

남자는 그녀로부터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받는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찌나 작업을 잘 하는지)

 

남자는 파일럿이다. 그는 공항에 가는 대신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와의 잠깐의 해후 이후 그는 공항으로 가지만 또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간다.

 

당연한 수순의 섹스. 그러나 ‘8층에서 몸을 던지는 듯한 섹스

리디아는 6개월 전에 남편과 딸을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미셀 폴랭은 시간을 증명하기 위해 우연히 만난 세뇨르 갈바의 공연을 보러 바를 찾아간다.

세뇨르 갈바는 침팬지와 푸들이 파소도블레에 맞춰 춤을 추는 공연을 한다.

 

파소도블레에 맞춰 침팬지와 푸들이 춤을 추는 동안 미셀의 아내 야니크는 이미 죽었을까. 야니크는 불치병에 걸렸다. 그녀는 고통 없이 죽길 원했고 오늘이 그날이다. 그녀가 죽는 동안 미셀은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한다. 그날 미셀은 리디아와 세뇨르 갈바를 우연히 만났다.

 

리디아는 미셀의 전화를 받고 세뇨르 갈바의 공연이 열리는 바를 찾아가고 그를 그의 남편에게 데리고 간다. 리디아의 남편은 교통사고 이후 베르니케 실어증에 걸렸다. 생각은 적절한 음소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미셀은 리디아의 남편에게 소리친다.

 

이것 보시오 난 신자가 아니오. 신이든 원숭이든 인간의 삶을 미리 정해놓는 것 같진 않소. 신이나 원숭이가 별거 아니라는 건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힌 그들의 후손들만 봐도 알 수 있소. 이따금 바나나가 있고. 우리로 하여금 삶을 계속하게끔 부추기려고 자그마한 보상을 던져주는 거라오.”

 

 

미셀은 리디아를 데리고 그의 집을 찾아간다. 계획대로 야니크는 죽었다.

 

미셀은 자신의 물건을 찾기 위해 세뇨르 갈바의 호텔을 찾아간다. 세뇨르 갈바 역시 죽어 있었다. 갈바의 제자가 침팬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침팬지는 턴테이블의 전축을 켜 파소도블레에 맞춰 분홍색 푸들과 춤을 춘다. 세뇨르 갈바의 마지막 공연.

 

리디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미셀은 도움이 필요한 젊은 금발 아가씨의 신발 끈을 매준다. 금발의 여자는 미셀에게 말한다.

이리오세요. 길 건너는 걸 도와드릴게요.”

 

<여자의 빛>은 사랑에 관한 희비극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소도블레에 맞춰 춤을 추는 침팬지에 불과한 것일까.

삶이란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들에게 던져지는 바나나 같은 것?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여자의 빛이 있다.

(여자들에겐 남자의 빛’? 그런 게 과연 있을 수 있을까? )

그러니까 당신이 거기 있군. 여자의 빛이 있어.

다른 남자들은 그것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메모한 구절

 

P16. “세르비아어로 죽음이라는 말이라오. 스므르트. 나는 일곱 개 국어를 할 줄 아는데 사물에 최고의 이름을르 붙이는 슬라브 어족의 말들이 으뜸인 것 같소. 세르비아어로는 스므르트, 러시아어로 스메르트, 폴란드어로는 뭐더라...... 이 단어들은 살무사나 파충류를 연상시칸다오. 하지만 죽음을 뜻하는 우리네 서구 단어는 너무 고상하오. 프랑서어 모르, 스페인어 무에르테, 독일어 토드 모두 말이오. 하지만 스므르트는.....사람 다리 위로 지나가는 역겨운 방귀 같지 않소. 독 있는 전갈보다 더 유독하게 느껴지고 말이오.

 

p34. “ ....우리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바다에 띄운 병 편지가 누군가의 손에 닿기를 기대하는, 가능성이 희박한 그런 도움을 구하도록 선고받은 존재들이라오. 게다가 이제는 더 이상 바다가 없다오. 오직 병들이 있을 뿐이오. ”

 

p38, 39. “ 여성성이라는 모국을 잃은 사내가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 타자, , 무국적자.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모국을 앗아갔군, 친구. 당신의 샘, 당신의 하늘, 당신의 밭, 당신의 과수원을. 그 나라에서 그녀의 금발은 유년의 은신처들보다 더 안전하고 은밀한 곳이었다. 그녀의 금발이 내 두 눈을 가려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동안 나는 순간순간을 누렸다. 궁극적인 지각, 존재 이유라고 해야 할 그런 순간들을. 그 존재 이유가 그녀 아닌 모든 것으로 확장되었다. 마침내 가시를 버리고 돌을 담금질하는 데 어떤 결핍감, 어떤 박탈감이 필요한지 알 게 된 것처럼.

 

내겐 여성이라는 모국이 있었고,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 나라는 삶이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낸 것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다른 꽃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미소짓는 들판의 꽃들로 판단컨대 삶 역시 즐거움을 필요로 한 것이다. 함께 브리악에 있는 우리 집에 머물던 때가 생각난다. 시간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를 낮춘 채 밖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어찌나 잘 훈련되어 있던지 마을에 간 그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야 비로소 짖어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는 커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 지상에 새겨진 오래된 길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련다. 나는 지금 행복의 진부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독특하게 창조해내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결합하는 그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다를 것도, 독특할 것도, 귀할 것도, 예외적일 것도 없었다. 영원성과 지속성 그리고 커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의 기억보다 더 오래된 존재들이었다. 태고의 맛을 지니지 않은 행복은 없다. , 소금, 포도주, , 신선함과 불, 둘이 함께 있으면 서로가 땅이고 서로가 태양이다.

 

p43. 나는 여객기 조종석에서 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 가슴속 내래이터의 충실한 중얼거림을. 추억을 잃어버린 이들은 더 이상 오래된 프로프터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당신애 왜 거기 있느냐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어째서 세상은 그리고 자신들이 미쳤다고 주장했던 그 많은 유명인들은 거기 없느냐고 당신에게 묻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마치 당신이 우주의 불심검문은 발화자가 없는 질문이라고 주장하기라고 한 것처럼. 지상의 육체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숨을 가르고 떼어내고 벌리고 들어 올리고 둘로 나누어야 했다. 그것은 언제나 그만큼 손실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몸이 둘이라면 언젠가는 반쪽이 되어야 한다.

내가 당신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한 거야?‘

지독한 방해지. 당신이 여기 없으니 말이야.’

p50. “ 이른바 조련 경연 대회 같은 걸세. 하지만 누가 그걸 주최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주최자들은 자기들만의 올림포스 산에 앉아 즐기고 있으니까. 모두들 불가능한 걸 해내야 한다는 게 그들 요구일세. 심지어 모자 상자에 들어가 앉는 사내도 있다네. 우리 곡예사들 중 한 사람이지. 신인지 원숭이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올림포스 산 위에 앉아서 우리 공연을 내려다보며 즐기고 있다네. 그뿐일세.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하고 싶었네. 우리 모두는 걸어 다니는 명작들이야.”

 

p56. 그것은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피로감이 뚜렷이 드러나 있긴 했지만 두 눈 깊숙한 곳에 여전히 뭔가 남아 있었다. 불굴의 그 무엇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패배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므로.

 

p64. “아뇨, 미셀.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때때로 믿음이 산을 옮겨야 한다는 과제만을 내주는 경우도 있어요. 여성성에 대한 신앙, 그게 결국 무엇으로 귀착될까요? 한 남자를 살도록 돕는 거예요. 하지만 내겐 그런 소명이 없어요.”

 

P69 “그러니 내일 나와 함께 떠납시다. 지나치게 경험에 의존해 오히려 빗나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마시오. 나와 함께 떠납시다. 불가능에게 기회를 주시오. 불가능이 어느 정도로 신물을 내고 있는지. 불가능이 어느 정도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고 있소.”

 

p87. “저 애는 신을 믿지 않아요. 저 애는 붙들고 살 그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어떤 가요?”

복도에서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소냐, 제 아픈 곳을 찌르시는군요.”

, 당신도 그렇다는 거군요. 믿고 살 만한 걸 전혀 갖고 있지 않다니, 참 유감이에요.”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분명 뭔가 남아 있을 텐데.

아무것도 없군요.”

 

p103. 피로가 불쑥 몸속으로, 핏속으로 들어오자 신뢰와 확신의 파도가 소리 없는 노래처럼 내 안에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그건 그저 나로 하여금 이 삶을 계속하도록 부추기는 두 번째 숨결일 뿐.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 우리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과거에도 패배시킬 수 없었고 미래에도 패배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 각자는 안다. 나를 위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 속에 말이다. 쇠는 깨어지고 우리는 자신의 손금대로 살아가리라.

 

p107 “그건 사랑이 모든 걸 이해하고, 모든 것에 응답하고, 모든 것을 해결하기 때문이라오. 사랑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소. 교통수단을 바꾸려면 정기권, 곧 카르트 오랑주를 구하면 되는 것처럼 말이오.”

 

P110 “ 우리는 나약함으로 터져 나갈 지경이지만, 그것에서 온갖 희망이 나온다오. 나약함은 언제나 상상력을 살려냈소. 강인함은 스스로 자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소. 재능이 있는 건 언제나 나약함이오.......나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소. 내 두 손은 풍차요. 그렇고 말고. 내 믿음은 어쩌면 정신 나간 자의 다행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소. 그렇소. 하지만 우리는 지독히도 나약하기 때문에 패배당할 수가 없다오.”

 

p123 “난 삶이 어떤 수준에 오르지 못할까 봐 불안해요, 미셀”.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불행히도 메아리를 꿈꾸지 않는 돌들이 있고,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일들이 무척 많아요.”

 

p125. ‘당신을 나 없이는, 여자의 빛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었으니까. 다른 여자를 위한 자리가 완벽하게 준비된 셈이지. 나는 도둑처럼 떠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당신은 내가 여자로 남아 있도록 도와줘야 해. 나를 잊어버리는 가장 잔인한 방식은 바로 당신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야. 이런 얘기를 그 여자에게 해줘.....’

 

빵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고, 물은 샘을 가르치려 들지 않으며, 심장은 피에게 자신이 무엇으로 사는지 설명하지 않소. 오래전부터 우리는 생명 없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고 있소. 여성적인 입술의 부재가 석회화해 무생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오. 따라서 사람들이 줄곧 슬퍼하는 것은 대지가 먼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그게 먼지든 신이든 나는 전혀 관심이 없소. 왜나하면 어느 쪽이든 여자가 아니니까. 나는 때때로 랭스나 샤르트르 대성당을 보러 가기까지 했소. 어떤 식으로 번지수를 잘못 찾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말이오. 감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삶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 맛과 가장 가깝소.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거기요, 거기가 바로 내 존재의 출발점이오.”

 

p126 “당신은 좋은 주먹을 갖고 있군요. 이 주먹을 뭐에 쓰죠?”

주먹을 꿈꾸는 데 쓴다오. 주먹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호메로스가 한 얘기요.

 옛 사슬들이 새 사슬들에게 하나의 전설을 들려준다오. 그래서 사슬 간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지는 거지.”

 

p129. “당신 계산을 하고 있군, 리디아. 주판알을 튕겨가며 희망을 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모르겠군.

사랑이란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모험이야. 거기서는 신중해지는 순간 길을 잃지. ”

 

p145.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집은 바닷가에 있어서 바다의 중얼거림이 내 귀에 들려온다. 나는 주의 깊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소리는 세월 저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새로운 세계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아무도 맛본 적 없는 행복,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즐거움, 여자의 빛이 아닌 다른 지복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래된 메아리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불멸하는 것으로만 살 수 있다.

 

밤이 우정에 차서 다가와 내게 자신의 잠을 조금 나누어 준다. 눈꺼풀이 감기자마자 모든 기억이 다시 흠 없이 떠오른다. 낮이면 나는 형 같은 바다를 친구 삼는다. 인간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데 필요한 목소리를 가진 것은 바다뿐이니까.

 

p157. 지붕들 위로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주위의 사물들이 나를 자기들 흐름으로 다시 끌어들이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과 우주와 광년이 벌이는 작업이 거기 있었다. 하늘은 짐짓 표정을 꾸며댔지만, 그 광대함은 그의 뜻을 배반했다. 진짜 하늘은 손으로 가릴 수 있을만큼 작으므로. 주위를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품위 있고 자존심 강한 수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수많은 여자들의 건조한 눈빛에서는 기도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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