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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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을 읽다 거짓말이 아니고 수십번 마주친 문장이 있다.

심지어 송호근의 <나는 시민인가>에서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문장이다. ‘눈의 고장은 니가타 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이다. 발레에 대한 글을 비정기적으로 쓰는 것 말고는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는 그의 손이 기억하는게이샤 고마코를 찾아간다.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만난 요코 (등불이 켜진 여자)를 보고 호기심을 품지만, 시마무라에 대한 고마코의 연정은 눈의 고장에서도 식을 줄을 모른다. 아니, 해가 갈수록 시마무라에 대한 고마코의 애정은 깊어만 간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p10

 

시마무라의 손은 고마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작 그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고마코가 아니라 요코였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이 소설의 결정적 순간은 아래의 장면이다. 연회에 참석했다가 술에 취해 돌아온 고마코는 여관 전체가 떠나갈 정도로 시마무라를 찾는다. 그리고는 시마무라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여자는 이제 그의 손바닥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낙서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겠다며 연극이나 영화배우들의 이름을 이삼십 개 남짓 늘어놓고 나서, 이번에는 시마무라라고만 무수히 적어나갔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사랑한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남자의 이름만을 무수히 손바닥에 적어갈 수 밖에 없던 게이샤 고마코. 소설 속에서 이보다 안타깝고도 애잔한 순간이 있었던가. 이러한 장면 외에도 이 소설엔 형용할 수 없는아름다움들의 순간들로 넘쳐난다.

 

새하얀 눈의 나라. 강렬한 시각적 대비와 청각적 이미지들이 흘러넘친다. 그야말로 감각의 향연이다. 무채색의 시마무라는 적과 흑(고마코와 요코)의 아름다움에 둘러쌓인다. 시마무라는 은하수안으로 흘러든다. 시마무라는 자신에 대한 고마코의 마음을 알지만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려고도 하지 않는다. 고마코의 말대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눈의 고장에 비견할 만한 한국 작품은 단연 안개의 마을’.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언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0~11

 

고마코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은 장아이링의 <,>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에서 이선생(양조위)앞에서 막부인(탕웨이)이 차파오 차림으로 노래하는 장면 때문일까. 아니면 절대로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해버린 여인의 이야기이기에. 어쩌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여자뿐일지도.

 

 

밑줄 친 문장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 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시마무라가 요코를 오래 훔쳐보면서도 그녀에게 실례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저녁 풍경을 담은 거울이 지닌 비현실적인 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그 신호소를 지날 무렵, 이미 창에는 어둠뿐이었다. 건너편 풍경의 흐름이 사라지자 거울의 매력도 사라지고 말았다. 요코의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히 비쳐지고 있었지만, 그 따스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시마무라는 그녀 안에서 뭔가 투명한 차가움을 새삼 발견하고 거울이 흐려지는 것을 닦아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저녁 풍경이 비친 거울 속에서 요코가 보살펴주었던 환자는 시마무라가 만나러 온 여자가 사는 집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알자, 자신의 가슴속을 뭔가가 스쳐 지나간 듯 느꼈지만, 이 우연한 만남을 그는 별로 신기하게 여기진 않았다.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자신을 도리어 신기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와 눈에 등불이 겨킨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쩐지 시마무라는 마음속 어딘가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아직 저녁 풍경이 비치던 거울에서 덜 깨어난 탓일까. 그 저녁 풍경의 흐름은, 그렇다면 흐르는 시간의 상징이었던가 하고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여름 산들을 둘러보아 온 자신의 눈 때문인가 하고 시마무라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적당히 피로해졌을 무렵, 문득 방향을 바꾸고는 유카타 자락을 걷어올려 한달음에 뛰어내려와, 발밑에서 노랑 나비가 두 마리 날아올랐다.

나비는 서로 뒤엉키면서 마침내 국경의 산들보다 더 높이, 노란빛이 희게 보일때까지 아득해졌다. 28.

 


얼굴엔 눈부시게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그때>를 회상하는지 마치 시마무라의 말이 그녀의 몸을 서서히 물들여 가는 듯했다. 여자가 샐쭉해서 고개를 숙이자,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고 등줄기까지 붉어진 것이 보여 흠뻑 젖은 알몸을 고스란히 내놓은 것 같았다. 새카만 머리색 때문에 더욱 그렇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앞머리가 촘촘하게 숱이 많은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이 남자들처럼 굵고 귀밑머리가 거의 없어 뭔가 시커먼 광석이 지닌 묵직한 빛이었다.


아까 손으로 만져보고 이렇게 찬 머리카락은 처음이라며 깜짝 놀란 것도 찬 공기 탓이 아니라 바로 이 머리 때문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들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시마무라는 그쪽을 보고 움찔 목을 움츠렸다.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

 

세 번째 곡으로 미야코도리를 켜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 곡이 지닌 농염한 부드러움 탓일까, 시마무라는 더 이상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도 없이 포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고마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자 육체의 친근감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가늘고 높은 코는 다소 쓸쓸하게 마련인데 뺨이 활기 있게 발그레한 덕분에,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속삭임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윤기 도는 입술은 작게 오무렸을 때조차 거기에 비치는 햇살을 매끄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구름이 끼어 응달진 산과 아직 햇살을 받고 있는 산이 서로 중첩되어 음지와 양지가 시시각각 변해 가는 모습은 왠지 싸늘해지는 풍경이었다. 이윽고 스키장도 한꺼번에 어두워졌다. 창 밑으로 시선을 던지자, 시든 국화 울타리에 우무처럼 서릿발이 서 있었다. 그러나 지붕 위의 눈이 녹아 떨어지는 홈통의 물소리는 쉴 새없이 들렸다. 68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75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는 코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110

 

그걸로 족해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여자뿐이니까.” 112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134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불똥은 은하수 속으로 퍼져나가며 흩어져 시마무라는 또 한번 은하수 쪽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연기가 은하수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은하수가 쏴아 하고 흘러 내려왔다. 지붕을 비껴난 펌프의 물줄기 끝이 흔들려 물안개처럼 희뿐연 것도 은하수 빛이 비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고마코가 시마무라의 손을 잡았다. 시마무라는 돌아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줄곧 불을 지켜보는 고마코의 약간 상기된 진지한 얼굴에 불길의 호흡이 일렁거렸다


시마무라의 가슴에 격한 감정이 복받쳐왔다. 고마코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목은 길게 빼고 있었다. 거기로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갈 듯, 시마무라는 손가락 끝이 떨렸다. 시마무라의 손도 따스했으나 고마코의 손은 더 뜨거웠다. 왠지 시마무라는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149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요코는 그 찌르듯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몇 해 전인가,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러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시마무라는 다시 가슴이 떨렸다. 일시에 고마코와 함께한 시간들이 환히 비쳐진 것 같았다. 뭔가 애절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 고마코가 시마무라 곁에서 달려나갔다. 고마코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린 것과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앗 하고 숨죽인 바로 그때였다.

 

물을 뒤집어쓴 타다 남은 시커먼 나무들이 어지러이 흩어진 속에서, 고마코는 게이샤의 긴 옷자락을 끌며 비틀거렸다. 요코를 가슴에 안고 돌아오려 했다. 필사적으로 버티려는 얼굴 아래, 요코의 승천할 듯 멍한 얼굴이 늘어져 있었다. 고마코는 자신의 희생인지 형벌인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달려나와, 두 사람을 에워쌌다.

비켜요, 비켜주세요.”

그는 고마코의 외침을 들었다.

이애가 미쳐요. 미쳐요.”

 

정신없이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 2015. 6. 19 


어제 소복히 내린 눈을 보다 감상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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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7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사한 문장들을 읽는 재미가 좋네요. *^

시이소오 2016-02-17 16:42   좋아요 0 | URL
다행이네요. 스크롤 압박을 드려 죄송했었는데^^;;

룰루라떼 2016-02-1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꾸 부딪히는
문장때매 시작했는데...
안읽혀지더라고요~ㅠㅠ^^ㅎ

시이소오 2016-02-17 18:54   좋아요 0 | URL
시마무라가 여성독자 입장에선 별 매력이 없을것도 같아요. 양다리잖아요. 아내도 있고
재수없어 그러신건 아닐지요 ^^;;

룰루라떼 2016-02-17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시이소오님 정답^^ㅋ

나와같다면 2016-02-17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그리고 나중까지 기억할때도 있어요

시이소오 2016-02-17 20:15   좋아요 1 | URL
동감이에요. 경험에 의하면 그래도 몸보단 마음이 더 오래가더러구요 ^^

서니데이 2016-02-17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시이소오 2016-02-17 20:1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 저녁 맛있게 드셨길^^

컨디션 2016-02-17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크롤 좀 해야 하긴하지만, 설국과 무진기행 비교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신 솜씨와 노고에 박수를~^^ 지금 북플이라 이따 pc로 정독하러 다시 올게요 ㅎㅎ

시이소오 2016-02-17 21:36   좋아요 0 | URL
고생하셨어요^^;;
저는 이따가 오자들을 수정해야겠네요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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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빌려오긴 했지만 그다지 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제목을 보아하니 죽음에 관한 그저 그런 책이거나 혹은 죽기 일보 직전인 노인들을 위한 책이라 짐작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다......고 말할 순 없겠네. (중이염 때문에 고막은 녹고 허리 디스크 때문에 다리는 저리고 매일 상습적인 트림으로 보아 위암, 직장암, 식도암으로 추정되기에)

 

이 책의 원제는 <Being mortal>이다. mortal죽음의로 번역되긴 하지만 인간의혹은 현세의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뭐라고 번역하는 게 가장 좋을까. 영어에 문외한이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책은 죽음을 논하기보단 삶을 논한다. 죽음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것인가를.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무엇을 하는 것보다 존재하는데, 미래보다 현재에 더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온 몸에 수십 개의 관을 꽂고 산소 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할 순 있다. 길어봐야 몇 달을 더 살기 위해. 과연 그게 옳은 일일까.

 

누구나 죽는다. 노화로 인해 죽게 된다면 누구나 혼자 힘으로 생활이 불가능한 시기가 온다. 그럴 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은 시설이다.

 

프레데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서 오베의 친구이자 원수인 루네의 시설 행을 막기 위한 루네 아내와 오베, 이웃들의 고군분투의 일화가 나온다. ‘선진국에서나 떠올릴만한 갈등이군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보니 그래야만 했다.

 

저자인 아툴 가완디 박사에 따르면 획일적인 시설에 들어간 노인들은 대부분 불행한 상태로 죽음을 맞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선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는 순간 인간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가족이 노인을 돌보는 것이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사례를 통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를 성심성의껏 돌보던 셸리는 끊임없이 사생활이 침해받자 두려워했다. ‘아버지가 죽을까봐가 아니라 아버질 죽일까봐’.

 

이러한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명가들이 있었다. 윌슨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집과 같은 요양원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파크 플레이스를 오픈한다. 파크 플레이스는 후에 어시스티드 리빙시설로 확장되지만 윌슨이 추구한 집 같은 요양원의 개념은 퇴색되고 만다.

 

의사 빌 토머스는 체이스 요양원에 부임하자 즉각적으로 요양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눈에 요양원은 절망과 우울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요양원에 생기를 불어넣을 계획을 추진한다. 꽃과 개, 고양이, 그리고 어린 아이들. 나중엔 새와 토끼, 심지어 암탉까지.

(새장이 늦게 와 잉꼬 수백 마리가 병실 안을 날아다닌 일화를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터진다.)

 

토머스의 에덴 얼터너티브프로그램은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세상과 관계 맺고, 사랑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웃기 시작했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호스피스 케어도 하나의 대안이다. 의료 행위가 생명 연장이 목적이라면 호스피스 케어는 환자가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호스피스 케어를 선택할 경우 환자들은 고통을 덜 느끼고 화학요법을 선택했을 경우보다 생존기간도 25%나 더 늘었다고 한다.

 

가망없는 치료를 계속 고집하는 건 환자의 의도일까,

아니면 죄책감을 덜고 싶은 환자 가족의 의도일까.

 

아툴 가완디는 환자 가족(그의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이었고 의사다. 그가 보기에 의사들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 가부장적 의사, 정보를 주는 의사, 그리고 해석적인 의사. 가완디는 자신이 정보를 주는 의사의 입장이 가장 편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환자 가족의 입장이 되었을 때에야 그는 의사들이 해석적의사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해석적 의사들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해석적 의사들은 환자 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걱정되는 게 뭐지요?”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환자의 가족 들도 환자가 중요시하는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치료는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환자가 의식이 불명일 경우 환자 가족들이 결정을 대리해야 한다. 그럴 경우 환자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완디의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고통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의 몸에 수십 개의 관을 꽂아 생명을 연장시킬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아버지의 생각을 몰랐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삶에는 끝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 죽음을 앞둔 환자. 환자의 가족.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인간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밑줄 그은 문장

 

p9. 톨스토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그는 죽어 가는 게 아니라 그저 아플 뿐이며, 잠자코 치료를 받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때로 어쩌면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몸이 허약해지고 수척해짐녀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극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채 산다. 그러나 의사,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일리치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난 후에 그가 가장 원했던 건 사람들이 아픈 아이에게 그러듯이 자기를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독거리면서 안심시켜 주기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무원인 데다 턱수염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나이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위안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열망하고 있었다. ”

 

p70. 가장 심각한 위협은 폐결절도 요통도 아니다. 바로 넘어지는 것이다. 매년 35만 명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는다. 그중 40%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고, 20%는 다시 걷지 못했다.

 

넘어지는 데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 균형 감각 쇠퇴, 네 가지 이상의 처방약 복용, 그리고 근육 약화다. 이런 위험 요인을 가지지 않은 노인이 1년 사이에 낙상할 확률은 12%. 반면 이 요인들을 모두 가진 노인의 낙상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p94.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소설 <에브리맨>에서 이를 더 비통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p279. 사용하는 말도 중요하다. 완화치료 전문가에 따르면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한 이렇게 물어서도 안 된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그보다는 이게 낫다. “만약 시간이 촉박해진다면,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p227.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궈녉을 더 바라지도 않느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p355. 라케스는 이를 인정하고, 갑자기 니시아스 끼어든다. 그는 용기란 전쟁을 비롯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기서도 잘못된 점을 찾아낸다. 미래에 대한 완벽한 지식없이도 용기를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기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지혜란 분별력있고 신중한 힘이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p380. 이른바 기술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죽는 자의 역할이라는 개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죽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둔감하게 도외시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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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ology 2016-02-1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하던 게임에서는 mortal을 필멸자 라고 번역했었습니다. ㅎㅎㅎ

시이소오 2016-02-17 09:24   좋아요 0 | URL
필멸자, 비장하네요^^

깊이에의강요 2016-02-17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늙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기 싫고
보기 또한 싫어
서랍 속 깊숙히 넣어둔 숙제 같은거 아닐까요.
결국은 꺼내봐야하고
들춰봐야 하는. .

시이소오 2016-02-17 12:16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렇다고 청춘이 굳이 죽음을 고민할 필욘 없을것 같아요. 외면한다해도 언젠가 그가 찾아올테니까요. 카르페 디엠!!^^

깊이에의강요 2016-02-17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순간~~
그러나
청춘은 짧으니까요ㅎ

시이소오 2016-02-17 12:23   좋아요 1 | URL
길고 짧은건 대봐야알죠. 죽는날까지 청춘이라 우길거에요^^

깊이에의강요 2016-02-1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방법이 ^^

시이소오 2016-02-17 12:42   좋아요 0 | URL
가네시로 카즈키의 주인공들 처럼 언제나 `Go`하시길 ^^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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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건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이라기보단 에세이에 가깝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기 보단 <불안>,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같은 보통의 에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보통 역시 이 작품을 일반적인 소설로 고려하진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을 소설로 읽는다면 이보다 더 밋밋한 플롯의 소설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완벽한 17년 만의 실패작이다.(보통의 17년 만의 소설) 이 작품을 구제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기초를 소설을 빙자한 에세이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결혼이 낭만적 사랑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서 - 정이현의 주장과는 달리-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이보다 식상한 주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아무런 기대없이 보통의 문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p22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가혹하지만 타당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우리가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이라기보단 친밀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 자체로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56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p65

 

이 달콤한 삶. 그리고 배후에서 전개되는 어른의 고달픈 삶. 그 둘의 대비를 인식할 때면 벤의 눈가는 축축해졌다. 동화 속 악당이 못된 짓을 그만두거나, 버릇없던 어린 주인공이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선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정글북>을 읽어주다 말고 황급히 방밖으로 나와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가 눈물나는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었다. 세상의 아주 많은 것들이 아름답지도 순수하지도 않건만, 유년기에 속한 어떤 특별한 것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하기 때문이었다. p81

 

예전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집중해서 읽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체호프와 경쟁할 만한 거라곤 골목길을 따라 이십 분 걸어가서 나누는 이웃과의 수다가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델 컴퓨터의 모니터 창을 두 개로 나눠서 한쪽에는 치어리더 사진을 띄워놓고 다른 창으로는 MSN 메신저로 스물다섯 살의 날씬한 뮌헨 아가씨와 미네소타에 사는 십대 풋내기 레즈비언 행세를 하며 실시간 채팅도 가능한 시대에 체호프든 다른 어떤 문학작품이든 간에 읽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P 101

 

그가 원하는 것을 섹스라고 기술하는 것은 벤의 흥분 상태의 근원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베키는 섹스에 해당하는 고대영어 단어 알다와 완전한 동의어였고, 본질적으로 어울렸다. , 그녀는 알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와 발목, 그리고 목덜미를 알고 싶었다. 그녀의 옷장, 책장에 꽂힌 책들, 샤워를 마친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를 알고 싶었다. 어린 소녀였을 땐 어떤 성격이었는지, 친구들과 나누는 비밀 얘기는 뭔지 전부 다 알고 싶었다. P117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현대의 결혼은 섹스, 사랑, 가족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무대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각각 다른 것들에 위협이 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섹스하는 능력을 위태롭게 한다. 특별히 사랑하진 않지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와 섹스하는 것은 사랑하지만 더 이상 흥분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사랑과 섹스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에만 몰두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육체와 정신의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P139

 

통상적인 시각에서 약간 비켜나면, 외도 자체가 죄는 아니다. 외도가 거부감을 주는 이유는 그 부조리한 천친난만함, 그 속에 담긴 희망, 그것의 감상주의 때문이다. , 그것에 깃든 낭만성이 거슬리는 것이다. P 140

 

벤은 극적인 운명을 원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그런 운명을 가졌음을 이제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을 잘 지켜내는 것, 온전한 정신상태와 생활할 수 있는 경제력을 유지하고, 결혼생활에서 살아남고, 아이들이 잘되는 것. 이런 계획들은 노르웨이 시인의 서사시만큼이나 영웅이 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한때 그는 용기를 다르게 상상했다.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금 그는 새로운 그림을 가졌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헬리콥터 안에서의 짧은 순간, 그리고 그 뒤로도 가끔씩 우리의 영웅 벤은 이 과제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P165

 

보통은 평범한 삶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결론짓는다

현명한 대답이긴 하나 시시하거나 거짓처럼 들린다.

 

사랑의 기초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소설의 몰락을 생각한다. 디킨스의 소설을 읽기 위해 항구에 몰려든 19세기의 독자들에겐 배트맨도 슈퍼맨도 아이언맨도 없었다. LA 다저스도 없었고 첼시도 없었다. 심지어 포르노도 없었다. 현대 소설은 TV, 영화, 인터넷, 페이스북, 트위터, 온갖 종류의 게임, 스포츠, 포르노와 대결해야 한다.

 

도서관은 어느새 소설책들의 납골당이 된지 오래다.

그나마 읽히는 소설들은 말초적일 수밖에 없다. 섹스나 살인, 낭만적 사랑을 다루지 않는 소설은 대부분 읽히지 않는다.


예술은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다. 현대 미술 역시 쓰레기들만이 잘 팔린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언제까지 순문학을 고집할 것인가? 올해 출판계에서 한국 문학은 거의 아사상태다. 한국 소설가들은 분명 다른 나라 작가들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좋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순문학을 읽을 수 있을만한 독자층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감소할 것이다. 소설 좀 읽는다는 나 조차도 도서관에 꽂힌 한국 소설들을 둘러보면 꽂히는 작품이 없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2015. 5. 1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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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삶을 견뎌내는 것이 진짜 용기라는 결론은 저 역시 시시하면서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불순하기까지 하고.

그닥 재미 없는 농담이지만 보통은 정말 보통이네요.

시이소오 2016-02-16 16:2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도 보통은 보통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시이소오 2016-02-16 16:32   좋아요 0 | URL
그냥 보통의 농담으로 ㅋ^^

2016-02-16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재미 없는 농담쯤으로... ^^

깊이에의강요 2016-02-16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ㅠ
나는 많이 읽는 사람이라 생각...아니, 상상했습니다ㅋ


시이소오 2016-02-16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상상 아니 착각했어어요 ^^;

깊이에의강요 2016-02-1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각 아니신데요ㅡㅡ
저는 모래정도인지
먼지 정도인지...
가늠이...

시이소오 2016-02-16 17:37   좋아요 0 | URL
아직 청춘이시잖아요? 저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대략 ......50년?! 음 .....희망사항이네요 ^^;;

서니데이 2016-02-16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시이소오 2016-02-16 18:2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요^^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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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Japanese”

 

일본의 어느 중학교 교실,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의 아이엠어 재피니즈를 따라 할 때

유독 한 소년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뭐시여, 왜 안 따라 혀? 개기는 거여, 시방?”

 

선생님이 소년을 다그치자 소년은 우물우물 말했다.

 

저는..... 조선인....인데요.”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고 싶었던 이 소년은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겼으니

<소년의 눈물>의 저자 서경식 선생님이다.

(위의 상황은 약간의 윤색을 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

 

<시의 힘>은 저자의 강연과 에세이들 중에 문학과 관련된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처럼 자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회고한다. 오에 문학 출발점이 <허클베리 핀>이었다면 저자의 경우엔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이것이 나의 투쟁이다.

천만 줄기 뿌리를 뻗어, 저 멀리 인생 밖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저 멀리, 세상 밖으로.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폴 니장, 에드워드 사이드, 루쉰, 나카노 시게하루, 프리모 레비 등등

 

고등학교 축제 때 자신의 시집을 직접 팔았을 만큼 시에 열정을 보였던 저자는 청년시절 주로 한국 시인들의 시에 영향을 받는다. 김지하, 신동엽, 신경림, 양성우, 고은,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 김수영, 박노해, 정해성 등등. 특히나 그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을 애타게 읽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영웅 같았던 김지하가 도살자의 딸을 지지하는 걸 보고 그 역시 꽤나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침략 전쟁을 반대한 열사들이 있었다. 고바야시 다키지.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대표적 인물이 중국의 국민작가인 루쉰이다.

 

30년 동안 나는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목도했다. 그 피들은 켜켜이 쌓여 숨도 못 쉴 만큼 나를 매장했다. 나는 그저 붓과 먹만으로 몇 줄의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진흙 속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거기서 계속 헐떡이려고 하는 바와 같다. 어떤 세상인가? 밤은 길고, 길은 멀다. 차라리 망각이 나을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기억하여 다시 그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글에 감동을 받는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명명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중략)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것을 떨쳐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

 

<시의 힘>이란 제목은 나카노 시게하루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를 읽은 저자는 이것은 후쿠시마를 노래한 시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을 읽고 내가 이것은 세월호가 아닌가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저자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쓸 만큼 레비의 삶과 제노사이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책에 실린 일본의 레비 연구 일인자인 다케야마 히로히데의 말에 무릎을 쳤다.


프리모 레비와 프랑클은 같은 강제수용소에 있었지만 문제의식은 전혀 달랐다.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인간의 정신적 변화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강제노동 끝에 쇠약해져서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 억류자, 즉 레비가 말하는 익사하는 자의 변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강제수용소에서 살아가는가, 극한의 생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가에 주안점을 둔다. 그는 고통받는 것의 의미에 관해 생각한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외적 조건이 인간의 내적 성장을 부추기는 일이 있다그리고 외면적으로는 파탄되고, 죽음마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조차,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에 이르는것과 통한다. (중략) 여기서 프랑클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낸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런 곳에서의 극한상황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가 하는 점을 중시한다. 그리고 희생이 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순교자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프랑클은 극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던 반면 레비는 내가 왜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 삼았다. 과연 누가 옳았던 것일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장 아메리, 브루노 베텔하임, 프리모 레비, 말년엔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온전히 살아남은 이는 프랑클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프랑클이 옳았던 것일까.

 

프랑클은 감동적으로 소비되었으나, 저자의 말처럼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클의 순교자라는 표현에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나치 희생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속이는 것이다. (중략)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더라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도 무신론자들이나 깊은 종교심을 지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그리하는 것은 그들의 것일 수 있는 마지막 인식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이며, 그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죽음이 무엇이었는지 직시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이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하찮은 심리적 해방감을 위해 그들의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베텔하임의 지적에 따르면, 프랑클의 저서는 그 처절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감동적결말에 의해 오히려 독자에게 거짓 위로와 해방감을 주고, 방어적 부인과 억압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찾아서>는 분명 감동적인 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거짓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국가주의에 물든 한국인들은 대개 국민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나 꾸준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잘못된 범주화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국민은 하나의 가족이라거나 피를 나눈 우리와 같은 식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관계나 혈연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발적인 참가를 전제로 해야 할 사회 조직을 마치 운명 공동체인 양 묘사하여 구성원들을 권력관계로 묶어둘 위험을 내포한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것이 각 개인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만 한다.

 

일찍이 니체는 국가는 훔친 이빨로 물어뜯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루쉰이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의 국민들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듯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 국가의 수장들과 기득권자들의 악랄하고 비열한 행태에 침묵해서도 안 될 일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국일지언정.

 

얼마 전 우리 박근혜 각하께서 노동자들을 자르기 쉽게 해달라고 서명을 받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박정희 유신시절, 장준하가 주도한 유신 철폐 백만인 서명운동을 보고 따라 한 것일까?’

 

각하를 따라 대기업 임원들도 길거리로 나와 서명을 받았다지.

시인 정희성의 시처럼 이제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니!!

 

 

저자의 마지막 말에 울컥하였다.

 

시의 힘이란 시적 상상력을 가리킨다. 루쉰에게 있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나카노 시게하루)” 역시 그러한 상상력이 가져온 것이다.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내려는 이유는 본문에서 루쉰의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나 역시, 다짐해본다.

 

 

걸을 수 있는 동안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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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16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빅터 프랑클의 책은 많이 알려진 반면에 프리모 레비는 아직까진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레비는 진짜 서중석 선생, 디아스포라에 관심 많은 독자들이 잘 알지, 보통의 독자는 잘 모를 겁니다.

시이소오 2016-02-16 09:37   좋아요 0 | URL
레비 전도사가 되고 싶네요^^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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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인문 서적을 읽다보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저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의 <리퀴드 러브>를 읽고선 참담한 기분이었는데 그가 희망을 말할 줄이야! 이 책은 바우만의 인터뷰를 담았다. 의외였다. 감동을 기대한 것도 위안 받고자 한 것도 아니었는데. 생계를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푼돈을 받고자 비굴하게 영혼을 팔며. 고작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가.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읽고서 엄청난 힘을 느꼈다. 이 책은 바다에 띄운 편지.

 

나는 쓰레기이자 벌거벗은 생명이고 난민이며 프레카리아트다. ‘프레카리아트인 나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바우만의 글은 비관적이기보다는 냉정하다. 기존의 가치들은 무너졌다. 새로운 가치는 도래하지 않았다. 이런 공위의 시대에 그는 여전히 희망을 말한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의미없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미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닿을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우리는 희망해야만 한다.

 

그래서 좋은 사회에 대한 저의 정의는 아주 간단합니다.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실패나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늘 이런 실패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하죠. 또한 이것은 희망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공에 대한 보장없이도 우리는 무언가 희망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희망하기를 멈출 때, 우울한 기운과 불길한 예감이 당신을 덮칠 것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잃지 않는 것만이 우리 삶에서 가능한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끝없이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모든 것은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힘닿는 데까지 지치지 말고 계속 하라고 말한다. 계속 하세요. 계속 시도하고, 또 시도하세요.” 그는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희망하는 자들이란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저는 여기에 제 3의 부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희망하는 자들이 그것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희망하는 자들이죠. 저는 새로운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오직 우리가 희망하기를 멈출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오랫동안 희망해 온 것들에 분명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왜일까. 2차 세계 대전 전, 무명작가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 진정한 작가였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했다.”

 

윗 문장을 읽고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진정한 지식인이 있었다면 세월호 학살을 막을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은 스스로 속죄할 갈망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는가.

카네티의 선언처럼,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는 의지와 또 말의 어떠한 실패에 대해서도 자기 스스로 속죄하려고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카네티는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오늘날 진정한 작가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진정한 작가가 되도록 간절히 바라야 한다.”고 말이지요.

 

지그문트 바우만이란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책을 통해 형용하기 힘든 힘을 얻었다.

정신에 힘줄이 불끈 불끈 솟았다고나 할까. (물론 내 육체는 물렁물렁하다.)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Dum spiro spero”


-2015. 8.1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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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15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이 사회학 분야에서 대세인 건 인정하는데, 우리말 번역이 불만스러워요. 어떤 책은 번역체가 이상해서 읽다가 말았어요.

시이소오 2016-02-15 17:37   좋아요 1 | URL
번역이 아쉬울 때가 많죠 ^^;; 번역가들 처우도 워낙 안 좋아서 뭐라 말도 못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