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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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에 틀림없다.

부러운 삶이다. 좋아하는 작가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니!

나 역시 헤세를 좋아했건만 왜 이러고 사는지.

(하긴 그녀처럼 헤세의 전 작품을 읽진 못했다.)

10대 때 가장 많이 읽은 작가는 단연 헤르만 헤세였다.

(<데미안>때문이었을까. 요즘 10대들도 그럴까?)

 

1부는 헤르만 헤세가 태어나고 자란 독일의 칼프로 향하는 여행기와 헤세의 삶, 그리고 그의 소설의 명문장들로 2부는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에 대한 정여울의 감상들로. 3부는 말년의 헤세가 정착한 몬타뉼라에 대한 여행기 그리고 또 다시 헤세의 삶과 소설들의 명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헤세 작품에 대한 감상에 정여울은 융을 대동한다.

융 심리학을 통해 본 헤세라고 해야 할까.

 

어째서 우리는 청소년 시기에 헤세를 읽는 걸까?

한편으로 왜 또 다시 헤세인가?

 

우리 모두가 인생의 좌표를 상실한 채 떠도는 방랑자라는 자각 때문은 아닐까.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신봉하던 가치들은 추락했다. 우리는 천민이고 사축이고 난민이며 벌거벗은 생명이다. 청년기를 보내고 장년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우리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부유한다. 알은 터무니없이 견고하다. 금조차 가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단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대라니!

 

입시지옥이 지옥의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지옥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일 줄이야!

과연 헤세를 읽으며 우리는 이 지옥을 헤쳐 나올 수 있을까.

혹은 헤세를 다시 읽는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수 십 번이건, 수 백 번이건, 수 천 번이건!

 

밑줄 그은 문장.

 

 

p32. 헤세는 <홀로>라는 시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인생의 길은 말을 타고 갈 수도, 자동차로 갈 수도, 둘이서나 셋이서 갈 수도 있지만, 마지막 한 걸음만은 혼자서 걸어야 한다고.

 

p33.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안개속에서>

 

p40 친구와 와인을 마시며 기묘한 인생에 대해 악의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p43. 한 순간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 한 여자의 미소를 위해 여러 해를 희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가을의 도보 여행>

 

p48. 헤르만 헤세는 여행광이자 독서광이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책 속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책 자체가 궁극의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책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 가깝다. 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다정한 질문 기계, 그것이 책이다.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어떤 책도 당신에게 곧바로 행복르 가져다주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책은 살며시 당신을 자기 내면으로 되돌아가게 한다고.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책은 그런 우리 마음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p63. 행복은 내일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늘 가져다준 것에 감사하며 받아들일 때만 존재합니다. 마법의 시간은 계속해서 다시 찾아옵니다. <서간집>

 

p70. 인간이 자신의 소명에 따르는 것, 그래서 그가 잘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세상은 어디서나 진보할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p73. 헤세는 <행복론>에서 작가의 언어란 화가의 팔레트 위 물감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언어는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만들어지지만, 아름다운 말, 진정한 언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림물감도 그 농도와 혼합색은 수없이 많지만 내 마음에 딱 맞는 바로 그 빛깔을 찾기는 어려운 것처럼.

 

p76. 헤세는 인도를 여행하며 <싯다르타>의 영감을 얻었다. 그가 그리고 싶은 인도는 깨달음의 공간, 용맹정진의 공간, 세속의 욕망을 해탈하는 공간이었다. <싯다르타>에서 헤세는 깨달음의 인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대부분 인간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춤추고 방황하고 비틀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살아간다고. 하지만 별을 닮은 인간도 있다고. 별을 닮은 인간은 확고하게 자신의 궤도를 걷는다고. 어떠한 강풍도 별을 닮은 인간을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자신의 내부에 작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별을 닮은 인간이다.

 

p84.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나를 진정으로 아프게 하지 못한다. 나의 갈망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나 자신이다.

 

p117. 헤세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제는 바로 노래, 경건한 마음, , 악기 연주, 시 짓기, 방랑이라고 했다. 그는 위대한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풍류를 아는 시인이기도 했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헤세. 행복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사소한 것들과의 조화임을, 그는 알았다.

 

p126.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삶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삶의 기술이다. <메모>

 

p147.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여성상, 아니마는 흔히 첫 사랑의 경험을 통해 최초로 드러나곤 한다. 융은 남성 안의 여성상, 아니마의 발전에는 4단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1단계는 야생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상, 즉 이브의 이미지다. 2단계는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여성상, 헬레네와 같은 여성상이다. 마릴린 먼로와 같은 유혹적인 여성상, 대중문화에서 가장 선호하는 팜므파탈적인 여성상이 바로 2단계의 전형이다. 3단계는 마리아의 여성상, 즉 에로스적인 사랑을 신성한 헌신으로까지 고양한 여성상이다. 육체적 사랑을 넘어 정신적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여성이 바로 이러한 단계를 뜻한다. 4단계는 가장 성스럽고 숭고한 여성상으로서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같은 여성상이다. 예술가에게 창조성의 원천이 되어주는 뮤즈가 바로 이런 여성이다. (이브 먼로 마리아 뮤즈)

 

p168. 융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가장 빛나는 영적 에너지를 발견해내는 현상을 에난치오드로미(Enantiodromie)라고 불렀다. 에난치오드로미. 그것은 반대 극으로의 역전을 뜻하는데, 융은 이렇듯 극과 극이 서로를 향해 끌리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생명의 법칙이라 말한다.

 

p174. 래브란도 반도의 숲에 살고 있던 나스카피 인디언들은 자신의 내적 중심을 매우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형태로 깨닫고 있었다고 한다. 나스카피 사냥꾼들은 평생에 걸친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적인 목소리와 무의식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그들은 종교적 지도자도, 축제도, 정해진 관습도 없이 오직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법에만 기대 인생의 모든 통과의례를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자기 안에 내면의 동반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영혼의 동반자를 미스타페오라 불렀다. 미스타페오는 저마다의 심장에 살며 불멸의 존재로서 마치 수호천사처럼 우리의 영혼을 이끌어준다.

 

233.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p320 모든 사랑이 깊은 비극을 품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더 이상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간집>

 

p350. 어떤 두 사람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심연이 놓여 있다. 그 심연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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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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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영면하시기 하루 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을까.

그래서 더 아팠을까.

그래서 일까. 생전에 선생님과 단 한 번의 일면식도 없었으면서도

그 분을 내 선생님이라고 여기는 까닭은.

 

<변방을 찾아서>는 선생님이 쓰신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기획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 분교, 강릉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박달재.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 오대산 상원사.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 김개남 장군 추모비. 서울특별시 시장실.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석.

 

언젠가는 선생님의 글씨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변방을 찾아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기에.

 

 

메모한 문장들.

 

 

그러나 벽초와 <임꺽정>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다. ‘오래된 미래이다. 좌우를 아울렀던 벽초의 유연한 사고와 진정성이 그렇고, 임꺽정과 그의 동무들이 보여 준 노마디즘의 삶이 그렇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분명 변방의 작은 공간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것은 탈냉전과 탈근대의 장이다. 평화와 공존의 철학을 앞서서 보여 주고, 영토와 소유의 협소한 틀을 깨뜨리고 미련 없이 흘러가는 길 위의 삶을 앞당겨 보여 준다. 한마디로 미래 담론의 창조 공간이다.

 

이번의 변방 여행에서 느끼는 감동은 변방 개념의 일정한 발전이었다.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변방에 대한 오해이다. 누구도 변방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곳도 변방이 아닌 곳이 없고 어떤 문명도 변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라는 타종의 엄청난 굉음을 좇아가 이윽고 도달한 곳은 묵언이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소리의 뼈는 침묵이었다. 충격에서 시작하여 긴 여운을 거쳐 정적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탈주와 접속의 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혜는 자기와의 불화이고 시대와의 불화이다. 지혜가 고요와 깨달음의 초월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에 대한 오해이다. 마찬가지로 무소유 역시 사회와의 불화이다.

 

추억이란 세월과 함께 멀어져 가는 강물이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숱한 사연을 계기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거듭할수록 우연이 인연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이리라.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일들도 결코 우연한 조우가 아니라 인연의 끈을 따라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필연임을 깨닫는다.

 

문명도 생물이어서 부단히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정분교는 틀림없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을 담는 학교로 빛날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그의 작은 책 <분노하라>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서정분교는 저항이었으며 창조였다.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어디다 꿈을 담지?” 가방에다 담는다는 아이도 있었고 머리에 담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내내 배우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가르쳤다. 꿈은 가슴에 담는 것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서정분교 자체가 꿈이었다. 서울 아이들의 꿈이 바로 서정분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p52.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눈다. 항민은 순종하며 부림을 당하는 백성, 원민은 윗사람의 수탈을 원망하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백성임에 비하여, 호민은 허균이 찾는 이른바 변혁 주체라 할 수 있다. 사회 부조리를 꿰뚫고 때를 기다렸다가 백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사회 변혁을 영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가 쓴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바로 호민으로 캐스팅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p57,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춘다는 의미가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면 글자 그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조금씩 새롭게 바뀌어 왔다는 사실이다.

 

p100 종메는 고래요, 종은 용뉴에 틀고 앉아 있듯이 용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가 바로 타종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전 처음 타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소리는 과연 정념스님의 설명처럼 용과 고래의 충돌이었다.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단정하고 겸손한 모습과 달리 종소리는 높은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드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나를 남겨두고 종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대산 1만 문수보살의 조용한 기립이 감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정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적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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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2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3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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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에 읽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만큼이나 문장에 빠져 읽은 책이었다. 좋은 문장을 만날 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반짝 반짝 빛나는 은 세공품 같은? 문장을 가질 순 없는 걸까? 안되겠지.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니까.

 

메모한 문장들.

 

p13. 지금도 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선생님의 편지 봉투를 볼 때마다 한 자락 질투의 감정을 느낍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떠나는 것. 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가요!

 

p17. _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불가피한가!

 

p29.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를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발탁당한 채 살아간다.

 

p51. ‘어떤 일을 표현한다 함은, 그 일이 지닌 힘은 보존하고 두려움은 제거하는 것이리라.’ 페소아가 쓴 글입니다.

 

p78. 아버지 제가 예레미야서를 읽었을 때의 분노를 상상하실 수 있나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뭘 원하는 게야?”

바르톨로메우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신이야.”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런 분이 신이라는 것, 그게 바로 신의 본질에 어긋나는 겁니다.”

 

p82.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편지에서 언급한 예레미야서의 구절을 찾아 읽고, 아픙로 넘겨 이사야서로 갔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프라두는 신이 생각과 의지와 느낌을 지닌 존재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것들이 다른 모든 사람의 말과 마찬가지로 들렸고, 이런 거만한 성격을 지닌 인물과는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신에게 성격이 있는가?

 

p119. 현재를 산다는 것, 이 말은 옳고 훌륭하게 들린다. 짧은 글에서 프라두는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면 원할수록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p121. -수수께끼같은 시간. 한 달이 얼마나 긴 지 알아내는 데 1년이 걸렸다.

 

p124. 나는 가끔 아주 느리다. 11월 초순의 햇빛이 다시 부서지는 오늘에 와서야 내가 아나에게 던졌던 질문 돌이킬 수 없음, 허무함, 후회, 슬픔-은 그동안 내가 계속 생각해오던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 우리 곁을 지나 흘러가거나 감수해야만 하거나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서 잃어버리고 놓쳤다고 생각되는 시간, 그 시간이 지나가서 슬픈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슬픈, 그런 시간에 관한 게 아니었다. 나는 한 달이란 시간을 충만한 것으로, 직접 경험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러므로 내가 하려던 질문은 한 달의 길이가 아니라 한 달이라는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였다. 한 달이 완전히 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과연 언제 인가?

 

p134.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p147. “말을 하지 못하는 것. 오빠는 감정 교육이 무엇보다도 느낌을 드러내는 기술, 말을 통해 느낌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p150. “마지막 해에 오빠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외로움의 본질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우리가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그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아. 혼자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게 뭘까?’

 

p162. 오빠는 멜랑콜리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며, 인간이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귀중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깨지기 쉬운 인간의 모든 연약함이 거기에 들어 있어.”

 

p174. 아마데우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이란, 틀에 박히고 무미건조한 논리가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모든 것이 훨씬 더 복잡해. 매 순간마다 아주 더 복잡하지. 서로 사랑해서 삶을 함께 하려고 결혼하지. 돈이 필요해서 훔치고, 상처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해.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지! 우린 천박함으로 가득 꾸며진 존재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수은과 같은 영혼, 게다가 끝없이 흔들리는 요지경처럼 색과 형태가 변하는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 아닌가.”

 

p175. “그런데 틀린 점은 바로, 발견할 진리가 존재한다는 가정이야. 조르지, 영혼은 오로지 만들어낸 거야. 우리 인간의 가장 천재적인 발명품이지. 현실세계에서처럼 영혼에도 뭔가 발견할 게 있으리라는, 무척이나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암시성 때문에 천재적이지. 하지만 조르지, 진실은 그렇지 않아. 우린 대화할 대상을 갖기 위해 영혼을 만들어낸 거야. 우리가 만나면 이야기할 만한 뭔가를 갖기 위해. 우리가 영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고 한 번 생각해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건 정말 끔찍할거야!”

 

사실 사유는 둘째야.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시지. 시적인 사유와 사유하는 시가 존재하는 곳은 낙원일거야.’

 

P178. “한계가 없는 솔직함이란 불가능한 거요.”

두 사람이 거리로 나와 악수를 할 때 조르지가 말했다.

그건 우리의 능력 밖이오. 침묵해야 하기 때문에 고독한 경우도 있는 법이오.”

 

p181. 그녀는 넓은 초원에서 늘 깨어 살고 있는 생명체에게서 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p186.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기. 나중에도 언제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고치기. 메멘토를 안락함과 자기기만과 꼭 필요한 변화에 대한 불안에 대항할 도구로 사용하기. 오래 꿈꾸어오던 여행하기. 이런 언어들을 배우고, 저런 책들을 읽기. 이 보석을 사고, 저 유명한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 스스로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여기에는 더 큰 일들도 속한다. 좋아하지 않던 직업을 그만두고, 싫어하던 환경을 떠나기. 더 진실해지고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들을 하기.

 

p202. “아마데우는 기차를 좋아했어요. 기차는 그에게 삶의 상징이었어요. 난 같은 칸에 함께 타고 싶었지만, 그가 원치 않았아요. 아마데우는 내가 플랫폼에 있기를, 그래서 창문을 열면 내가 언제든지 자기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길 원했어요. 그리고 그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플랫폼도 함께 떠나길 바랐어요. 난 기치와 완벽하게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플랫폼에, 그 공중의 플랫폼에 천사처럼 서 있어야 하는 거였죠.”

 

p205. 마지막 구절 기억하시죠? 말씀의 신성함과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이 필요하다고 한 구절. 그다음에 나오는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그게 연설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하지만 원래는 한 구절이 더 있었어요.

그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니까.’

정말 아름다운 장면인데!’

내가 소리쳤지요.

그러자 그가 성서를 들고 솔로몬의 <전도서>를 읽어주었어요. ‘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p215. “문제는....” 전에 기차가 바야돌리드에 멈췄을 대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거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겁니다.”

 

p221. 유사. 일의 성공이나 실패가 노력과는 상관없는 운의 문제임을 알았더라면,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경험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덧없고 방해가 되는 유사란 것을 알았더라면 자존심이나 회한이나 부끄러움과 같은 낯익고 훌륭한 미덕은 어떻게 되는 건가?

 

배신적인 언어.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또는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잠깐 엿보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을 타인에게 준다는 뜻이다.)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문제에 관한한 독자적인 감독이요 결정권을 지닌 극작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완벽하게 잘못된 생각, 자기기만이 아닐까? 우린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려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p231. “아마데우는 여행에 대해 아주 극단적인 태도를 보였어요. 언제나 멀리 떠나려고, 자신에게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에 휩쓸려가고 싶은 열망에 몸을 떨었지요. 하지만 리스본을 떠나면 바로 향수병에 걸렸어요.”

 

그 사람들은 리스본이 아니라 그가, 바로 아마데우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그의 향수병은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었어요. 훨씬 더 깊은 그 무엇, 그의 주심에 관한 문제였어요. 자기 영혼의 위험한 파도와 분노한 저류에서 자신을 지켜줄 내부의 견고한 댐 안으로 도망치는 것.....

 

p232.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영원히 멈추어 버리지 말기를,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

 

p235. 가끔 기차가 언제든지 탈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렇다, 나를 놀라게 하는 생각은 대부분 이것이다. 그러나 가끔 작렬하는 어떤 순간에는 이 생각이 마치 복을 내리는 번갯불처럼 나를 뚫고 지나간다.

 

p236. 한 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 나에서 금방 다시 멀어지지 않도록 진정으로 이해하기. 그러나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뒤의 인상이 앞의 것을 지워버린다. 나는 기억을 일깨우며, 숨을 헐떡이며, 흩어지는 빠른 인상들을 모아 뭔가 이해할 만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주의력의 빛이 사물의 뒤를 아무리 빨리 쫓아가도, 난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다. 늘 속수무책이다.

 

p248. 스스로를 파괴하는 분노 때문에 영혼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은 왜 주지 않은 걸까?

 

p253. 우리는 작은 암석 조각들로 덮인 망각의 비탈길이다.

 

p265. 아니었다. 쏴와 소리를 내는 드넓은 바다가 언어와 낱말의 기억이나 망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러 말 가운데, 여러 단어들 가운데 단 하나의 단어, 말과 단어는, 눈 먼 채 침묵하는 바다가 손댈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우주 전체가 하루아침에 끊임없는 홍수에 휩싸인다 해도, 온 하늘에서 쉴새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해도 말과 단어는 순수하게 머물러 있을 터였다. 온 우주에 단 하나의 단어, 오직 하나의 단어만 있다면 그 단어는 이 세상의 모든 수평선 저편에 있는 밀물보다도 더 강하고 더 투명하게 빛날 터였다.

 

p28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실우베이라는 성서를 가지고 와서 요한복음의 첫 구절들을 읽었다.

그러니까 언어가 사람들의 빛이로군. 사물은 말로 표현되고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거군.”

실우베이락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는 리듬이 있어야 하지. 여기 이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레고리우스가 덧붙였다.

말은 시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수가 있어. 변화하는 말의 빛 속에서는 같은 사물도 아주 다르게 보이지.”

 

p292. 인생이 불완전한 상태로, 토르소로 머물 것이라는 공포, 원하던 모습이 되지 않으리라는 자각.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결국 이렇게 정의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될 삶의 불완전함과 부조화를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두려워하겠냐고 물었다.

 

p293.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p296. 고통이나 외로움, 죽음처럼 사람이 견디기에 너무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장엄함, 행복도 우리에게는 너무 큰 개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위해 우리는 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잃는다면 어떤 이이 벌어질까요? 그렇더라도 앞서 언급한 것들은 여전히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거나, 여전히 우리에 비해 너무나 위대합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개인적인 삶의 시입니다. 시가 우리를 지탱해줄 만큼 강할까요?

 

p312. 다르게 말하자면 저는 그가 정말 원했던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가 잡으려고 했던 삶의 무대였지요. 죽음에 이르기 전에 한 번 완벽한 삶을 살고 싶다는 듯, 지금까지 사람들이 마치 그를 속여 왔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잡으려던 완벽한 삶의 무대. “

 

p320.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일상적인 대지에서 호기심이란 희귀한 사치일 뿐......힘차게 방르 딛고 서서 매 순간 솔직하게 연주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은 예술일 것이다. 우리는 모차르트여야 한다. 열린 미래의 모차르트.

 

p334. 어두워지는 길을 운전하여 병원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가 썼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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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이 마치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몽테뉴의 수상록이 자신만을 위해 씌여진 것 같았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더라. 나는 20대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니체의 책들을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소 재수없게 들리겠지만 저는 철학과 였답니다.^^물론 지금은 다 까먹었어요. ) 그렇다고 해서 삶이 완전히 뒤바뀐 건 아니었는데, 이 소설속의 주인공은 책 한 권 때문에 그가 쌓아왔던 몇 십년간의 삶을 내던지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별명이 문두스(Mundus, 세계, 우주, 하늘)인 라틴어 선생인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다리 위에서 뛰어내릴 듯한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는 싸인펜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전화번호를 적는다. 잊어버릴까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보는 남자 이마에??)

 

모국어가 뭐나는 물음에 그녀는 포르투게스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가 그의 강의를 듣다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날 그레고리우스는 30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난다. 그는 그녀를 만난 다리로 가보지만 그녀를 또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파냐 책방으로 가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웅 오루리베스 다스 팔라브라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에 매료된다. 서점 주인이 포르투칼어 책을 번역해서 읽어주자 그레고리우스는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글은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혹은, 파스칼의 <팡세>를 연상시키는 철학적 에세이다.)

 

그는 포르투칼어를 공부해 책을 해석해 읽고,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포르투칼로 훌쩍 떠난다. 작가는 이미 죽었으나 그레고리우스는 작가의 지인들을 만나 그의 삶을 재구성해 나간다.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혁명과 사랑.

(‘혁명과 사랑소설의 원형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 아닐까.)

 

그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딜레마. 프라두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독재정권하에 침묵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는 신을 경외하지만 한편으론 잔인한 신을 증오한다. 그는 어릴 적 지기인 조르주의 애인인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조르주는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 때문에 그녀를 죽이고자 한다. 프라두에게 우정이란 의지결정이며 영혼의 견해표명이다. 프라두는 에스피노자를 다른 나라로 도피시킨다. 만일 그녀가 독재 정권에 붙잡혀 고문에 의해 저항 운동의 동료들을 고발한다면? 프라두는 의사라는 직업에 충실하고자 인간백정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다. 그를 살리는 게 수 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직업적 윤리에 입각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행동이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닐까.

프라두는 의사로서 루이스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 이후로 삶의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그는 상처받았고 그는 저항운동에 참여한다.

 

호기심을 끄는 도입부, 추리소설과도 같은 전개, 그러면서도 삶에 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내다니! 도대체 어떤 작가인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독일 철학자였다. 페터 비에리.

 

페터 비에리는 자기 결정의 삶이란 철학을 제시한다. 모든 삶의 변곡점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삶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기위해서는 냉철한 자기인식이 필수적이다.

과연 지금의 나의 삶은 내 스스로 결정한 삶일까.

아직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책 읽는 건 잘하는 건 같은데, 돈이 안 되니.)

못하는 건 알겠다. (몸 쓰는 건 정말 못한다. 그렇다고 머리 쓰는 일을 잘 하지도 못하니,

나 같은 한량을 어디에 쓸 것인가)

 

와신상담과 용사지칩의 고사를 마음에 새기고 생계를 위해 굴욕을 감수하고 버텨왔는데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오랜 꿈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계획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처럼 야간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이 책과 함께여도 좋겠다.

 

오랜만에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한 작품을 만났다.

 

밑줄 친 문장들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몽테뉴, <수상록>2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p31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p51. “ 우리 둘 모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하지요. 그의 <명상록>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생은 한 번, 단 한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65.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p76 그리고 자기 이름은 주제 안토니우 다 실우베이라이며 비아리츠에 도자기를 파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비행공포증이 있어 기차를 이용한다는 말도 했다.

자기가 지닌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p79. 헤브라이어를 담당했던 교사가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다음, 바로 욥기를 읽게 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그레고리우스는 동양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무아지경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칼 마이의 글은 동양을 너무 독일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뒤에서부터 아픙로 읽어간 이 책에서의 동양은 동양다웠다. 욥의 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 몽롱하게 만드는 이 이국적인 이름부터 벌써 먼 바다 건너편에서 온 듯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꿈같은 세상인가!

 

p83. 여기서 얻는 결론이 뭘까? 그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적용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의 반응은? 속으로 그의 행동에 동의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부러워할까?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일으키고 앉아 은빛으로 동이 터오는 올리브 숲을 내다보았다. 그가 지난 세월 내내 동료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익숙함은 착각에 가득한 습관이요, 새어버린 무지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정말 중요한 일인가?

 

p92.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마리아 주앙의 갈색 무릎, 그녀의 밝은 옷에서 나는 비누 냄새로 돌아가고 싶은건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 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살마도 돌아가려고 할까?

 

p96.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 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성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가끔 멈추어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랑하는 고전들은 각자의 삶을 산 인물들로 가득했고, 그 책들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삶을 읽고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p106. <대지진>. 그레고리우스는 대지진이 1755년에 일어났고, 리스본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일로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p107. 그게 그렇게 대단했던가?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 페소아가 쓴 이 문장은, 플로렌스와 그가 결혼생활을 하며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예리한 기억을 남겼다. 그때 플로렌스는 동료들과 거실에 있었다. 웃음소리와 컵들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리우스는 필요한 책 때문에 할 수 없이 거실로 건너갔다. 그가 막 들어섰을 때, 누군가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정말 엄청난 문장이지?” 플로렌스의 동료 가운데 한 남자가 예술가다운 긴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고,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플로렌스의 맨 팔에 손을 얹었다. 그 문장을 이해할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겠군요. 그레고리우스가 말했다. 갑자기 거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래서 당신이 그런 선택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건가요?” 플로렌스가 신랄한 말투로 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지요.”

 

p112. 다시 한 번 묘비를 훑어보던 그레고리우스는 억센 담쟁이 넝쿨에 반쯤 가려진 기단의 비문을 발견했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그렇다면 여기 프라두의 죽음은 정치적인 것이었을까? 독재를 종식시킨 카네이션 혁명은 1974년 봄에 일어났다.

 

p122.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은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p127.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가로등에 몸을 기대고 나와 골목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자존심으로 가득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내 몸짓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연약함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그의 시선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안에 그의 시선을 만들고, 그 시선에서 나온 나의 모습을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보이는 나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든, 병원에서 일을 할 때든 결코 내가 아니었다.

 

평생 단 일 분도.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외모에서 스스로를 알아채지 못할까? 그들에게도 자신의 영상이 천박한 왜곡으로 가득 차 있는 무대처럼 생각될까?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그들 스스로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느낄까? 그들에게도 내면의 익숙함과 외부의 익숙함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사람의 익숙함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일까?

 

이런 의식이 불러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는,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바깥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커진다. 사람들이 타인을 보는 방식은 집이나 나무, 벼을 볼 때와 사뭇 다르다. 이들을 특정한 형식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기 내부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기대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우리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도중에 이미 딴 곳으로 돌아가고, 우리를 우리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특별하고 특이한 온갖 소원과 환상으로 흐려진다. 내면세계의 외부세계조차도 우리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다.

 

이런 낯섬과 거리감은 해악인가? 화가가 우리를 그린다면 서로를 향해 멀리서 팔을 뻐디고 있는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위해 헛된 몸짓을 하는 사람들로 그려야 할까? 아니면 보호벽이 되기도 하는 이중 장애물의 존재에 안심하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까? 서로를 낯설게 하는 이 보호벽에, 그리고 이 생소함이 가능케 하는 자유에 감사해야 할까? 해석된 몸이 주는 이중 굴절이라는 보호벽이 없이 우리가 마주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이를 분리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없어 서로 보는 즉시 와락 달려든다면?

 

p131.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들이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외양에서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런 생소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p140.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타호 강은 더 이상 흐릿한 갈색 평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이었고, 상 조르지 성은 하늘을 향해 세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콧잔등에 놓인 가벼운 테가 편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익숙한 무거운 걸음걸이는 가벼워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이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이 의심은 즐겁고 소중했다. 이런 의심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을 가능하게 했던 옛날 안경을 다시 썼다. 그러나 새로 얻은 세상도 이제 잊을 수는 없었다.

 

p149.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살마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찯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p154.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p180. “체스를 가장 잘 두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타르타코버는 체스가 전투라면 라스커가, 학무이라면 카파 블랑카가, 그러나 예술이라면 알제친이 최고다라고 대답했소. ”

 

p196. 마리아 주앙이 저를 못 본 척하는 것이 왜 대단한 게 아니었나요? 제가 그 일 때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도.....아버지의 고통과 그 고통이 준 명철함이 왜 모든 일의 척도가 되어야 했나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제가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도대체 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죠?

영원이라는 관점요? 그런 건 없습니다.”

 

p214.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덩이를 창조할 수 있을까? 만들 수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들 수 없는 돌덩이가 생겼으니까.

 

p222.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드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235.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p245. 그때의 분위기는 아마데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 이상이었어요. 우리는 그의 부재를 보았던 거요. 그의 부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소. 그가 없다는 사실이 마치 사진에서 예리한 가위로 오려내어 뚜렷하게 비어버린 윤곽, 그래서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눈길을 끄는 빈 공간처럼 다가왔소. 그래요, 아마데우는 그랬소. 예리한 부재.....

 

p263.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 재기 넘치는 수다에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 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롸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p300. 오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차 없이 솔직했던지! 자기기만과의 싸움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다니! ‘사람은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어.’ 늘 이렇게 말했어요. 그건 종교적인 고백과 비슷했어요. 조르지와 자기를 묶었던 맹세이기도 했고, 결국은 그 철석같은 우정을 깬 신조이기도 했어요.

 

p322. “난 지금 내 인생이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게 아니야. 현재 완성되지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의식 자체가 불행이라면 누구나 평생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지. 반대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각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생을 위한 조건이야. 그러나 불행을 만드는 요소는 분명히 이와는 다른 그 무엇이지. 그건 바로, 완성되고 완전한 경험을 하는 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야. ”

 

p325.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삶이 완전하지 못할 거라고 미리 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솟는다. 완전한 삶, 그건 과연 뭘까?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하기 쉬운 우리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지금 내 삶이 이미 상에 상응하도록 생각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 공포가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 상이 변덕스러운 기분에서 나왔다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나를 나로 만드는 감각과 사유의 놀이에서 자라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340.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p34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아마데우가 늘 하던 말이오.

 

p347.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p356.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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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요리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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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특별요리>를 포함한 스탠리 엘린의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들 마다 언뜻언뜻 다른 영화나 소설들이 떠오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손발의 몫>은 카프카를, <성탄 전야의 죽음>은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최상의 것>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 씨>, <배반자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하우스 파티>는 영화 <버드맨>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나 <버드맨><하우스 파티>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차용한 게 아닐까.

 

20세기 단편 추리 소설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스탠리 엘린은 흔히 로알드 달과 비교되었다고 해서 의아했다. (로알드 달도 미스테리 작품으로 에드가 상을 수상했는지 몰랐다.) 로알드 달에 비견될만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애플비 씨의 질서정연한 세계>가 아닐까. 10편의 단편 중 가장 재밌게 읽었다. 배꼽을 잡고 방바닥을 굴렀다고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허리가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굴렀을지도. 이 단편을 읽으면서 애플비씨와 조니 뎁의 얼굴이 자꾸만 겹쳤는데,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나라면 단연코 조니 뎁을 캐스팅했을 것이다.

 

애플비씨는 골동품 가게 주인이다. 그는 법의학 서적을 통해 자신이 찾던 사례를 발견한다. 사례의 부인은 조잡한 소형 깔개 위에 넘어져 사망했고 사고사로 추정되었다. 변호사는 남편에게 살인죄를 물었고 검시를 통해 혐의를 증명하려던 차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해 사건은 종결된다.

 

애플비는 이 사례를 이용해 여섯 명의 아내를 갈아치운다. 또 다시 빚에 쪼들린 애플비는 보자마자 혐오감이 들었으나은행 잔고가 여섯 자리 수인 마사 스터지스에게 구애한다.

 

애플비씨는 결혼 일주일도 안 돼 마사에게 깔개를 쓰기로 작정한다. 물을 청한 뒤 깔개 위로 오면 한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손을 들어..... 애플비 부인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 한테도 이랬어요?”

 

애플비 부인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똑같은 방식으로 죽였다고. 아버지는 체포되지 않았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렇다. 애플비씨가 법의학 서적에서 읽은 바로 그 사례였던 것!!

 

애플비 부인은 9시 이전에 그녀의 변호사에게 전화로 매일매일 보고하기로 돼 있었다. 만일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녀의 변호사는 즉각 조치를 취할 것이다. 애플비씨가 변호사에게 온 전화를 애플비 부인에게 건네려 하는 순간, 애플비 부인은 물잔을 내려놓기 몸을 틀었는데......깔개가 살짝 미끄러지고.....

 

, 정말 웃겨 죽겠다. 스탠리 엘린은 미스터리 소설보단 유머 소설을

썼더라면 더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그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메모한 문장들.

 

 

 

p127. 아내들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은행 계좌 총액의 자릿수였다. 처음 두 명의 부인은 네 자릿수짜리. 세 번째 부인은 세 자릿수(깜짝 놀랐다. 실로 불쾌했다)’ 짜리였다.마지막 세 명은 다섯 자릿수짜리였다. 여섯 부인의 유산을 합친다면 누구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액수였지만 만족을 모르는 애플비의 골동품과 진귀품이 유산이 들어오는 족족 바로 낚아채갔기 때문에(마치 허기진 도마뱀이 파리를 낚아채듯) 애플비 씨는 여섯 번째 부인을 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때보다도 심각한 경제적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라 여느 때라면 다섯자릿수짜리를 꿈꾸었을 애플비 씨가 네 자릿수짜리로 타협할 생각까지 했다. 이 순간 마사 스터지스가 등장했으니 삶이 실로 기가 막히다 할 것이다. 십오 분의 대화 끝에 그는 네 자릿수와 다섯 자릿수를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마사 스터지스는 여섯 자릿수짜리였던 것이다.

 

p140.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또 다른 어느 날 마사 스터지스가 말했다. “어디선가 들은 건데요, 흡족한 결혼은 여자의 수명을 연장해준대요. 결혼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훌륭한 증거예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애플비씨가 말했다.

 

한 달의 평가 기간 동안 그는 다양한 억양을 곁들인 물론입니다.”라는 한 가지 문장에 철저히 의존하며 대화를 했는데 그 전술은 맞아떨어졌다. 마의 한 달이 저물었을 때 그는 공식처럼 읊던 표현을 게인즈버러와 게인즈버러, 골딩이 유일한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에서 결혼 선서로 바꿔 읊을 수 있었다.

 

체스의 고수

p167. 수를 둘 때마다 보드 자체를 돌리는 건 어떨까? 아니 어차피 체스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게임이니 충분히 단련한다면 실제로 보드를 돌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조지는 점점 흥분에 휩싸였다. 상대의 차례가 되면 그저 상대방이 되어버리는 것’, 이것이 비결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백의 자례. 조지는 당면한 과제에 착수했다. 그는 백의 편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기에 백이 해야 할 것을 해야했다. 그뿐 아니라 백이 느끼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집중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목표는 더욱 멀어져갔다. 그가 손을 뻗으려는 그 순간, 거듭 또 거듭 흑이 의도한 수의 생각이, 흑이 둘 것이 분명한 수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수은 방출처럼 떼구르르 굴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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