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루 종일 잤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어 괌에서 읽던 쿤데라의 <농담>을 집어 들었다. 새벽쯤 다 읽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갈증이 느껴지는 걸까? 왜 이러지? 흡사 신경증, 불안증 환자인 듯 초조해졌다. ‘쿤데라 쿤달리니’라도 깨어난 것일까? 이런 증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쿤데라 신드롬?’, ‘쿤데라 이펙트?’, ‘쿤데라 콤플렉스?’ 자고 나면 괜찮으려나?
잠에서 깨고 나서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침대 옆에 모셔두고 읽지 않았던 쿤데라의 <정체성>을 허겁지겁 집어 들어 한숨에 다 읽었다. 그래도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이런 더 이상 소장한 쿤데라 책이 없다니. 다음날 도서관으로 달려가 <느림>을 빌려 읽었다. 아, 이건 너무 짧잖아. 주말을 다른 책들로 버티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 <불멸>을 빌렸다. <불멸>을 손에 쥐고서야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거의 이건 금단증상?
쿤데라와 나는 인연이 깊다. 물론 쿤데라는 알 길이 없지만. 대학 시절 유헌식 선생님 수업에서 내가 발제한 소설이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당시 나는 쿤데라 소설의 음악적 형식에 주목했던 것 같다.
쿤데라의 책을 읽는 사이사이, <농담>의 리뷰가 실린 조안나님의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조안나님은 <농담>을 읽고 허기가 졌다고 한다. 나는 ‘허기’라기보다는 목이 말랐다. 도대체 이 목마름의 원인이 무엇일까? 쿤데라 소설이 가진 결핍 때문인가? 혹은 나의 결핍? 문득 우치다 타츠루의 말이 떠오른다.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우치다 타츠루는 하루키가 세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로, 하루키가 결여한 것을 세계 전체가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쿤데라 역시 그런 걸까? 쿤데라가 결여한 것을 내가 결여하고 있기에, 읽어도 읽어도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 걸까?
혹은 위에서 언급한 음악적 형식 탓일까? 기억을 더듬자면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론도 형식’을 차용했다.
론도는 론도 형식으로 쓰인 곡을 말하며, 주제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반복하여 나타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R-E1-R-E2-R-E1-R'의 형태를 이룬다. R은 주제(론도)를, E는 삽입부(에피소드)를 뜻하는 약어이다. 즉 주제는 원칙적으로 같은 조성으로 4회 반복되며, 그 사이에 3개의 삽입부가 끼워진다. 이것은 론도 형식이 17세기의 론도-(A-B-A-C-A-D…A)의 삽입부(B, C, D,…)를 3개로 줄이는 데서 생겼다고 하는 역사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밖에도 R-E1-R-E2-R이라는 5부분으로 된 론도 형식이 자주 보인다. 앞에 든 7부분으로 된 론도 형식에서는 3개의 삽입부 중에서 맨 처음과 셋째는 대략 같은 재료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전체는 E2를 중심으로 하여, 전후에 대칭적인 형으로 된다.
위키 백과
<농담>역시 론도 형식이다. 농담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루드빅 – 헬레나 – 루드빅 – 야로슬라브 – 루드빅 – 코스트카 – 루드빅
(– 헬레나 – 야로슬라브)
A-B-A-C-A-D- A
–(B – C)
단지 론도 형식이기에, 즉 소설의 음악성 때문에 갈증을 느끼는 걸까? 그것도 답이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농담>을 읽으며 느낀 갈증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왜 책을 읽는데 목이 마르는 걸까? .....어쩌면 쿤데라 문장의 ‘배음’ 탓일까?
감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의미성이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의미성과 의미성이 어떻게 서로 호응하느냐는 것입니다. ‘배음’같은 것인데 배음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거기에 몇 배음까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깊이를 좌우하지요.....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배음이 들어가 있는 소리는 신체에 남습니다. 육체적으로.....하지만 그것이 왜 남는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서사라는 기능의 특징이지요. 뛰어난 서사란 사람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 제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뛰어나지 못한 서사와 기능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179
이것도 설명이 안 된다. 배음이 몸에 남는다고 해서 갈증이 느껴질 리는 없지 않은가? 혹은 쿤데라의 소설이 해소되지 않은 사랑의 기억들을 건드리기 때문일까? 그런데 왜 목이 마르냐고?
모르겠다, 모르겠어. 할 수 없다.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선 쿤데라의 작품을 다 읽는 수밖에. 쿤데라 전집을 간절히 사고 싶었다. ......돈이 없어. 참자 참아야 해. 이 현상은 아무래도 복잡하다. 하여 ‘쿤데라 콤플렉스’라고 불러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