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적할 때 볼 만한 영화 가운데 <글루미 선데이>(1999)가 있다(주제가 뮤비는 http://www.youtube.com/watch?v=N2fGWQKbX68). 오늘 같은 날 보거나 듣기 좋은 헝가리 영화이고 주제가이다. 한데, '글루미'라는 게 영화 제목 이상의 '유행어'라는 건 오늘 알았다. 우연히 담비에서 읽은 기사가 '글루미 제너레이션'을 다루고 있었던 것(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5894). 알고 보니 지난 봄에 TV에서 이 '우울한 세대'를 기획특집으로 다루기도 했었다(알라딘만 드나들다 보니, 세상 물정에 까막눈이 될 때가 있다!). 이 대학원신문의 기사와 함께 (언제나 앞서가는!) 마케팅 기사를 같이 옮겨놓는다.  

동국대 대학원신문(143호) '글루미 제너레이션'이 뜬다

「어느 여자가 인사동의 골목들을 지난다. 그녀의 왼손에는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고 오른손엔 가벼우면서도 조그만 디지털 카메라, 귀에는 목소리 굵직한 래퍼의 웅얼거림을 전해주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그녀’에겐 가까운 사람의 체온, 시선, 목소리를 대신할만한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 ‘그녀’는 ‘우리’보다 ‘혼자임’을 사랑하고, ‘우리의 관계’보다 ‘나’에 집중한다. 유행처럼 ‘그녀’를 닮은 ‘그들’이 늘어나고 세상은 그들을 글루미족(Gloomy 族)이라고 부른다.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 이 새로운 세대는 이름 그대로 우울하기보다 ‘우울함을 즐기는 세대’이다. 이들을 가리켜 글루미족(Gloomy 族) 혹은 나홀로족(族)이라 한다. - 결혼이라는 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이상과 일, 능력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싱글족(Single 族)과는 분명 구분되어야하는 개념이다. 싱글족(Single 族)은 결혼이라는 체제에 묶여 자신을 가두기보다 독신을 고집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글루미족(Gloomy 族)은 외로움과 고독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즐기는 것으로 여기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 한 방송사의 아침 프로그램이 대인관계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484명 중 60%를 차지하는 291명이 자신이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이라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Internet)의 사용이 증가하고 DMB 단말기, MP3등의 기기들이 등장하면서 혼자만의 시간도 무료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거기다 개인주의가 발전하면서 현대인들에게 외로움과 우울함은 일상이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고독에 괴로워하기보다 오히려 즐기기로 했다. 글루미족을 위한 마케팅이 블루 오션으로 환영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울함을 즐기기

장기화된 경기 침체, 실업률의 증가 등으로 사회 전반에 우울함이 형성됐다면 우울함은 자신감 저하, 의욕 상실, 대인기피증을 가져왔다. 어떤 의사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했다. 현대인의 다수에서 흔히 발견되는 증세라고 보는 것이다. 감기를 방치하면 폐렴으로 발전되어 생명을 위협하듯 우울증도 가볍게 여기고 그냥 지나치면 누구에게든 치명적일 수 있다. 게다가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니 이는 더욱 심각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인구 10만명당 26.1명, 교통사고 사망률 1위를 달리는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 사망자의 1.5배에 달한다. 그야말로 우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세상을 살고 있는 셈이다.

멀지 않은 과거엔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을 빙빙 돌려가며 수군거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함을 숨기고 나아가 우울증에 걸린 자신을 자학하기도 했다. 2005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설문에 응한 2475명의 59.8%가 우울증을 경험하거나 치료했다고 대답했다.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아프면 약을 먹고 치료해야 하는 일반적인 질병이 된 것이다. 소수에게 국한되었던 외로움과 고독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런 현상은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의 등장을 보다 의미있게 한다. 글루미족은 우울함을 내면에서 끄집어내어 삶의 한 면으로 인정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인정한다. 숨기기보다 우울함 자체를 즐기는 고독으로 대체함으로써 우울증을 이겨내는 것이다. 혼자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만의 감정과 느낌에 집중하고 내 외로움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법도 배운다. 이렇게 보낸 시간이 다음의 일상을 준비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글루미족은 우울함에 도전장을 던진다. 고독한 시간에 쓸모없는 ‘나’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온전히 ‘나’를 위해 준비된 시간에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글루미족의 우울함 극복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될 것이다.

진화된 개인주의

「점심 메뉴를 고르면서 상대방의 취향이나 입맛을 배려해가며 식사를 하는 것보다 혼자 먹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 전시회 관람을 좋아하는 친구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골목길 산책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버릴 바엔 과감하게 혼자 여행을 떠난다.」

글루미족이 추구하는 건 절대 자유이다. 어느 누구의 침해도 용인할 수 없는 나만의 절대적인 자유를 위해 그들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포기한다. 직장 상사가 오전에 부부싸움을 하고 한나절을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내가 뭘 잘못했을까하며 자존감에 상처를 내는 일은 글루미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조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거부한 그들은 이미 타인과의 소통 역시 차단한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은 단순히 타협과 통제, 절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또한 완전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성을 통해 표현된 생각을 한 번에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은 좀처럼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울림을 통해서 그 사람과의 벽을 허물고 거리를 좁힌다. 글루미족에겐 이 어울림이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혼자가 편안하고 익숙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 어색하기만 하다.

예전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애(自己愛)를 구현했다면-자기 가치의 고양(高揚)을 위해 타인의 확인과 인정,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함-현대의 글루미족은 자신만의 세계에 구축된 자기애(自己愛)에 치중한다. 거울 속에 비치는 아름다운 나의 모습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거울을 훔쳐보며 혀를 차건 말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마음상함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절대 자유를 얻기 위해 당당하게 자신을 지키고 형성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저주라기보다는 축복이다.

하지만 사회가 존재하기에 인정받는 개인이라면 타인과의 소통이 없는 삶을 과연 뭐라고 해야 할까? 당당하다 못해 도도해 보이기까지 한 이 완벽한 개인주의를 변화된 사회의 치부(恥部)로 인정하고 묵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 안에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개인주의가 도시의 세련됨과 맞물려 그럴듯하게 포장되었다고 해서 매력적인 부메랑을 얻은 것을 기뻐해야만 할까?(박수령 동국대학원신문 편집위원)

한겨레(06. 12. 10) 마케팅, 우울한 현대인을 겨냥하다

지난 7월 서울시광역정신보건센터가 1,49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서울 시민 10명 중 4명이 우울하다고 답변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현대를 살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최근 개봉된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정신적으로’ 우울한 현대인을 코믹하게 그려냈다.

또 최근 서울 명동에선 ‘프리 허그(Free Hug)’라 불리는 자유롭게 껴안아주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 운동은 이미 2년 전 호주에서 처음 시작했다. 해외에선 이미 우울한 현대인을 위한 다양한 상품이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영국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에서 열린 ‘침묵 디스코’ 라는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사람들은 헤드세트를 끼고 음악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페스티벌에 참여했지만 음악은 혼자서 조용히 심취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영국 런던에 위치한 클럽바 ‘필링 글루미(Feeling Gloomy)’는 우울하고 멜랑꼬리한 음악을 즐기는 클럽으로 오는 12월 31일에는 ‘우울한 새해’를 기획하고 있다. 우울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과 가는 해를 더 우울하게 보낼 사람들을 위한 파티인 셈이다.

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 건강 포럼에서는 계절성 감성 치료나 만성 피로, 각종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첨단 기술을 활용한 안경이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루미넷 안경(Luminet glasses)이라 이름 붙여진 이 안경은 빛을 망막에 집중시키고, 이 빛이 곧 뇌에 인식되어 우울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를 억제시킨다.



우울함을 즐기는 사람들

트렌드 컨설팅 업체인 아이에프네트워크(대표 김해련)는 ‘0708 FW 트렌드 워치(Trend Watch)’ 설명회에서 앞으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현대의 우울한 소비자들 즉 ‘글루미 컨슈머(Gloomy Consumer)’의 감성을 공략하는 것이 소비 트렌드에서 앞서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른바 우울한 현대인,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은 코쿤족, 싱글족 등의 나홀로족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결혼 여부에 따라 구분되던 싱글족과는 달리 결혼을 했건 하지 않았건 현대 사회의 고독한 개개인, 글루미 제너레이션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글루미 제너레이션을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이유는 이들이 외로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즐겨야 할 부분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들은 고독이나 우울증을 숨기지 않고 건강하게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런 특성은 이들이 향후 다양하게 출시되는 우울상품을 소비하는데 주축이 될 개연성이 높다. 많은 트렌드 워처들은 향후 등장할 우울 모드(Melancholy Mood)를 이용한 기발한 상품들이 새로운 소비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최근 눈길을 끌고 있는 외톨족을 위한 여행 상품이나 나홀로족을 위한 놀이동산의 프로그램,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있어 옆자리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식당의 1인 공간 등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다. ‘디스턴스 프레즌(Distance Presence)’은 글루미 제너레이션을 겨냥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존재감을 느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디스턴스 프레즌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제공하는 이불이다.

이불 원단에 열을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이불 한쪽에 손을 대면 그 정보가 이불의 반대쪽에 전달되고 그에 따라 반대쪽에 따뜻한 열기와 함께 서서히 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LED를 이용하여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디자인을 많이 한 스웨덴 디자이너 칼 헤이걸링(Carl Hagerling) 디자인 그룹이 만들었다.

미국의 마이클 커쉬(Michael Kersch)가 디자인한 ‘리아이우스(Lyaeus)’는 사용자에게 편안한 3차원 공간을 제공하는 릴렉세이션 체어(Relaxation Chair)다. 휴식, 독서, 경치 즐기기 등 목적에 맞춰 리아이우스를 놓아두는 곳에 따라 사용자가 원하는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야외에서 사용 시 발생하는 자외선을 막기 위해 햇빛 가리개도 있다.



4등분 되는 4인용 식탁도 있어

주변의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도움을 주며, 이로 인해 눈과 마음을 편하게 쉴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사생활을 보호 해주는 장점이 있다. 스프링 스틸 디자인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일본 출신 네덜란드의 활동 작가인 쿠니코 마에다(Kuniko Maeda)가 디자인한 ‘4등분 되는 4인용 식탁’은 현대인의 식문화를 반영한 디자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가정에 놓인 식탁은 4인용 이상인데 비해, 네 식구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쿠니코 마에다는 혼자 외로이 끼니를 때우는 이를 위해 이케아(IKEA)의 4인용 식탁을 친절히 4등분했다. 외톨족은 식탁의 한 조각만 TV앞으로 가지고 나가 식사를 할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안나 마리아 코넬리아의 ‘라이프 드레스(Life Dress)’도 우울한 현대인들을 겨냥한 상품이다. 이 드레스’는 한마디로 변신 스커트다. 항상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고 싶은 욕망을 채워 줄 신개념의 옷이다.

비상 상태가 발생했을 때, 즉 주위가 견딜 수 없이 혼잡하거나 시끄러우면 스커트로 머리를 감싼 후 지퍼를 잠그면 자신만의 개인 도피처가 마련된다. ‘라이프 드레스’는 ‘살인적인’ 소음과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 작품인 셈이다.(류근원 기자)

우울한 어린이를 위한 상품

다양한 글루미 제너레이션들을 공략하기 위한 상품은 어린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외로운 외동 자녀를 위한 상품을 공략하는 것도 시장 트렌드를 앞서가는 한 방법이 된다. 일본 니프로사의 코코로 스트레스 미터(Cocoro Stress Meter)는 자신의 감정표현이 구체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스트레스 측정기'이다. ‘코코로 스트레스 미터’를 입속에 넣었다가 빼면 침을 분석해 스트레스의 정도를 측정해준다고 한다.

일본 토미사의 유아용 프로젝터 드림 에너지(Dream Energy)는 부모와 아이의 다정한 시간을 연출하는 디즈니의 신 플랫폼 ‘Disney 캐릭터 이야기 극장 판타지움’을 발매했다. 이 제품은 콤팩트 사이즈의 유아용 프로젝터로 전용 소프트를 본체에 세팅 하면, 디즈니 캐릭터 관련 슬라이드가 투영된다. 화면에 표시되는 자막(스토리)을 그림책이나 그림 연극을 읽듯이 엄마나 아빠가 읽어주면서 함께 하는 엔터테인먼트 기기이다. 곧 있으면 엄마나 아빠의 목소리로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된다.

핀란드의 론리 자켓(Lonely Jacket)은 옷에 벨크로(Velcro), 일명 찍찍이가 붙어 있어 다른 사람과 접촉만 하면 쉽게 붙어 있을 수 있다. 핵가족화 되어 사람들과 접촉이 많지 않은 요즘 가정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재미있는 놀이도구로서의 기능도 가능하다.

07.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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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독서의 주제 중 하나를 '제국'으로 정했는데, 마침 한겨레에서 '우리시대 지식 논쟁'이란 기획기사를 만들면서 '제국'을 첫번째 테마로 다루고 있어서 옮겨놓는다(네그리/하트의 <제국>은 리스트에서 제외했지만).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라는 테마 타이틀에 세 명의 필자가 가세하는 모양인데, 첫번째 타자는 네그리/하트의 제국론의 지지자인 조정환 다중네트워크 대표이다. 이후 정성진, 이진경 교수의 글들도 옮겨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9. 01)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제국 시대

이번주부터 매주 한차례씩 학계의 주요 쟁점을 보는 전문 연구자들의 각기 다른 시각을 엮어 내보낸다.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시사성 있는 쟁점에 대해 그 논리의 틀거리와 각기 다른 논지의 차이를 세밀히 들여다볼 계획이다. 풍부한 논리 소개로 해당 주제에 대한 독자 이해도를 높이고자 원칙적으로 매주 한 꼭지의 글로 한 면을 채우기로 했다. 시리즈의 첫번째 쟁점은 ‘제국이냐 제국주의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책 <제국>이 지난 2000년 출간된 이후, 이 주제는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됐다. 지은이들은 현재의 전지구적 권력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국’을 내세운다.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고 권력의 중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제국주의론’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국주의론’에 사망 선고를 내린 셈이다. 이들은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으로 미국 등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제국’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오늘의 세계는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 과정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제국론의 지지자인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상임간사?)의 글에 이어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제국주의론의 견해에서 반론을 펼치며, 이후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제시한다.(편집자)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① 왜 제국인가

왜 미국은 양귀비가 주요 산품일 뿐인 농업국 아프가니스탄에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붓고 있는가?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나 독일인이 어째서 탈레반의 인질로 이용될 수 있는가? ‘전지구적 주권질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주권의 확장메커니즘을 설명했던 ‘제국주의론’은 20세기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었지만 탈식민화가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적실성을 잃기 시작했다. 신제국주의론,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탈식민주의론 등은 그것의 부적실함을 메우고자 만든 이론들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더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물론 제국주의 현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국익’을 위하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작은 나라들을 침략·점령한 뒤 석유·가스와 같은 자원을 약탈하거나 그 수송로를 매설하고 무기를 비롯한 상품을 팔고 자본을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을 제치고 소련 제국주의와의 냉전에서 승리한 뒤 점점 더 거대한 제국주의 초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일면적이다. 그것이 감추는 다른 면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전비는 점령을 통한 자원 확보나 상품 수출을 통해 볼 수 있는 이익을 훨씬 초과한다. 게다가 전후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거대한 자금이 원조로 제공되어야 한다. 저항이 끝나지 않음으로써 전쟁은 항구화하고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행동은 미국 자신을 연간 7000억 달러의 무역적자와 연간 40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기록하며 평균 매일 20억 달러를 차입해야 하고 또 매일 50억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빚더미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론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제국주의론의 좀더 발전된 판본은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한다. 그 종속국의 범위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독일과 같은 이전의 적대국, 그리고 프랑스·영국과 같은 옛 제국주의 맹주국들도 포함할 만큼 넓다. 동맹국들을 거느리는 데 드는 높은 비용 때문에 미국의 부채는 부단히 증가한다.

그래서 빌 보너의 <부채의 제국>,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차머스 존슨의 <제국의 슬픔> 등은 미 제국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언한다.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을 보지 못하고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상의 이론들은 미국의 군사적 강대화와 경제적 취약화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실천적으로 제국주의론은 민족해방을 아직도 유효한 투쟁전략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미국에 맞섰던 사담 후세인을 군사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탈레반을 민족해방운동의 전위대로 지지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테러와 납치도 민족해방운동의 부득이한 전술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도 반제국주의 보루로 보일 것이다. 반면 미 제국론은 미국의 붕괴를 예상하면서 미국을 대체할 대안제국(가령 유럽이나 중국)을 상상하는 데 머무른다. 이러한 정치학이 가져올 퇴행적 결과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듯 이들이 국가행동에 정치의 초점을 맞추는 한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국경을 넘는 전지구적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태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하자면 오늘날 주권이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은 주권의 이러한 전지구적 구성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제공한다. 각 층에 각 3단의 작은 계단을 가진 3층 피라미드의 주권 구성체 그림에서 미국은 피라미드적 주권 질서의 최상층, 최상단에서 전지구적 무력사용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 한국의 파병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의미에서 전지구적 용병대의 우두머리다.

그 아래로 전지구적 통화수단을 통제하면서 국제거래를 조절하는 일단의 국가들의 연합체(주요8국, 파리클럽과 런던클럽, 세계경제포럼 등). 그 아래 단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처럼 군사적 혹은 재정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제단체들이 놓인다. 이상이 제국을 ‘통합’하는 군주층이다. 그 아래의 귀족층은 초국적 기업들 및 시장을 조직하는 세력들(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등과 같은 국제경제기구들)과 국지적으로 영토화된 국민국가들(유럽연합 등)에 의해 ‘절합’되어 있다. 이것이 귀족층이다. 그 아래의 민주층에 전지구적 권력배치에서 민중의 이해를 ‘대의’하는 집단들이 놓인다. 유엔을 통해 다중을 대의하는 국민국가들, 미디어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들 등이 그것이다.

등장하고 있는 전지구적 주권질서에 대한 이 그림은, 수많은 크고 작은 권력체들이 위계질서화된 그물 속에 마디들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물 주권기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중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적 삶의 생산자라는 사실의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 전지구적 주권기계의 기능은 다중의 삶활력을 권력흐름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민주층의 대의회로를 거친 그 힘들을 귀족층에서 마디마디 절합하면 군주층이 통합하여 단일한 세계명령(보편공리)으로 만든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는 자본 착취의 무제한 자유를, 테러에 대한 영구전쟁은 다중의 삶자유에 대한 무한한 억압을 공리화한다. 이 명령기제를 통해 다중의 생산적 활력은 제국주권의 동력으로 포획된다.


요컨대 제국의 재생산은 다중으로 하여금 창조적으로 살되 공포와 예속 속에서 살게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와 같은 사회적 갈등들은 물론이고 외형상 국가간 전쟁형태를 띠는 갈등조차 실제로는 다중에 대한 제국의 전쟁, 곧 전지구적 내전이다. 21세기의 전쟁들은 자본의 이러한 필요에 따라 각층 각단의 주권마디들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지지 아래 일상적·보편적·항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구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군대는 지구상 어느 오지라도 파견된다. 그런데 그에 수반되는 전비는 누가 치르는가? 미국은 동맹국들로부터 전비를 거두는데 이것은 해당국 다중들의 세금에서 나온다. 미국 자신의 전비는 부채(국채판매)로 충당하는데 미국의 국채를 구입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 같은 여러 나라이며, 그 주요 자금은 국민들의 연금·기금·보험료·저축 등이다. 결국 전세계의 다중들이 다중 자신을 공격하는 제국의 전쟁에 전비를 치르는 셈이다.

미국의 부채는 미국이 붕괴되지 않는 한에서만, 아니 전쟁 강국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다른 부채를 통해 상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결국 전지구적 전쟁질서로 말미암아 미국은 부단히 ‘제국주의적’ 행동을 일삼게 되고 그것은 다중의 건강과 노년, 다시 말해 생존과 안전을 볼모로 잡는다. 

이 착종되고 역설적인 상황을 깨뜨릴 대안은 무엇인가? 그 답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주권질서 자체가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중 자신이 다양한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들을 지구적 수준에서 연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길이다. 투쟁하는 다중의 지구적 네트워크의 길을 열어감에서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실재성을 보지 못하는 제국주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과제다.(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07. 09. 02.

P.S. 어휘론적 차원에서 네그리/하트의 <제국>이 낳은 최대 기여는 '제국'과 (특히) '다중(multitude)'이란 어휘의 대중화이다(적어도 지식사회에서는). 나는 말 그대로 '다중적(muliple)' 의미를 갖는 '다중'이란 개념의 현실적 유효성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때문에 "다중 자신이 다양한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들을 지구적 수준에서 연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길이다."라는 선언적 주장에서 '이론투쟁'의 뉘앙스만을 읽는다. 이후의 반박과 지양(?)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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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에서야 가까스로 '글의 감옥'에서 벗어났다. 많은 분량은 아니었음에도 주말에 세 편의 원고를 몰아서 쓰는 건 정신적으로 너무 곤욕스럽다(지난 이틀 내내 마지막 30초에 쫓기며 바둑을 두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날밤을 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보니 어느덧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당장 개강준비로 읽어야 할 책들이 턱밑까지 쌓여 있다. 그러는 와중에 또 사회적 독서의 목록도 '의무감'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사실 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http://blog.aladin.co.kr/mramor/1366681)을 보니 내가 읽지 못한 책들이 대다수이고 그나마 구입한 책이 절반 가량이다. 휴가도 못 갈 만큼 바쁘기도 했으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대신에 다른 책들을 읽었던 걸 위안으로 삼는다). 어차피 사놓은 책들은 언제 읽어도 읽게 되는 것인지?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니까 '9월의 사회적 독서'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마지막 주는 추석 연휴이니 실질적으로 3주밖에 안되는 데다가 첫주는 개강이라 다들 바쁘지 않겠는가. 해서 '9, 10월의 사회적 독서'라고 해두고, 주제별로 몇 권의 책 정도를 꼽아보도록 한다.  

 

 

 

 

첫번째 주제는 '제국'이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제국에 대한 아주 간단한 입문'(http://blog.aladin.co.kr/mramor/1504292)과 '로버트 카플란과 제국의 보병들'(http://blog.aladin.co.kr/mramor/1507526) 같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거기에 덧붙여서 홉스봄의 4부작 중 <제국의 시대>(한길사, 1998),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2007), 그리고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의 한국어판 <제국의 새로운 전선>(필맥, 2007)을 '역사'와 '시사'를 보완하는 의미로 같이 꼽아둔다(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그 자체로 덩치가 너무 크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두번째 주제는 혁명이다. 특히 올해 90주년이 되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주제이다(10월 혁명은 구력으로 환산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달력으론 11월 7일이 혁명기념일이다). 예의상 관련서들을 한권 정도는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미 여러 차레 페이퍼를 쓴 바 있지만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가 핵심적이지만 가독성이 떨어지기에 대중적으로는 이번에 새로 나온 스티브 스미스의 <러시아혁명>(박종철출판사, 2007) 정도를 권한다. 저명한 러시아사가 리처드 파이프스의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교양인, 2007)과 함께 영어권 학자들의 시각을 일람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문학과지성사, 개정판1999)는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나온 가장 두꺼운 책이다. 올가을에 관련서들이 더 나오면 좋겠다.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 sic vii ([sic] Series)

가령 지젝 등이 편집한 <재장전된 레닌(Lenin Reloaded)>(2007) 정도의 책이 나와주었으면 싶다.

 

 

 

 

세번째 주제는 정치의 계절에 읽는 고전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다양한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건 강정인 등이 옮긴 <군주론>(까치글방, 2003)이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역시나 강정인 교수 등이 쓴 해제 <군주론>(살림, 2005)를 참조해볼 수 있겠고, 레오스트라우스의 <마키아벨리>(구운몽, 2006)은 <군주론>을 이미 읽은 독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한길사, 2003)와 같이 읽어야 한다). 산본마쓰의 <탈근대군 주론>(갈무리, 2005)는 "1960년대 신좌파의 등장,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 탈식민주의 등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꼼꼼하게 읽고 이들의 인식론적 오류와 실천적 결함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탈근대에 다시 씌어질 수 있는 <군주론>이란 어떤 것인지 가늠해보게 한다.

 

 

 

 

네번째 주제는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고독'이다. 정치를 '고독산업'이라고도 부르는 강준만의 <고독한 한국인>(인물과사상사, 2007), 리즈먼의 고전적인 사회학서 <고독한 군중>(문예출판사, 1999),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이레, 2007) 등 고독의 메뉴는 다양하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문학동네, 1998)도 일독해볼 수 있겠고, 폴 오스터의 초기 에세이집 <고독의 발명>(열린책들, 2001)도 꼽아볼 수 있겠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이나 릴케, 김현승의 시까지 거론하게 되면 끝이 없을 듯하므로 각자의 고독은 각자가 챙기시길...

07. 09. 01.

 

 

 

 

P.S. '사회적 독서'에서 '고독'을 주제로 다룬다고 하니까 뭔가 어색하긴 하다. 아마도 더 어색한 건 '단독자의고독'을 다룬 키에르케고르(키르케고르)의 책들을 읽는 것이 될 것이다. 다산글방에서 다시 나오고 있는 임춘갑 선생 번역의 키에르케고르가 이제 다섯 권이 되었다(<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직 안 나온 것인가?). 이번 가을에는 (열외로) 키에르케고르도 한두 권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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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reo 2007-09-01 17:28   좋아요 0 | URL
김학준저작의 <러시아혁명사>가 아니라 번역일 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작년 <한겨레신문>의 한 칼럼에서 그런 뉘앙스의 글을 보았습니다. "전두환때 정치특보"였던 이라면 마땅히 김학준을 가리키는 진술인에요. 원저자를 아실 수 있는지요?

로쟈 2007-09-01 17:33   좋아요 0 | URL
아마도 편저성이 강하다는 뜻일 테구요, 저자가 참조한 책들은 책에 소개돼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요는 여기저기서 발췌/번역도 하고 본인이 채워넣기도 하고 그랬다는 얘기지요...

허리우스 2007-09-02 00:26   좋아요 0 | URL
음 찜할께요. 매번 관심가는 책들을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승하시죠.

로쟈 2007-09-02 10:50   좋아요 0 | URL
관심가는 주제시라니까 다행이네요.^^
 

한동안 시끄러웠던 '디워' 논란도 이젠 잦아드는 국면인 듯하다. 여전히 약간의 '후일담'은 새어나오고 있지만, 어쨌거나 '정리 모드'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진중권의 최근 몇몇 칼럼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는다). '디워'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말썽의 건덕지도 없어 보이지만(말 그대로 '디워'가 걸작이어서 70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다고 말할 사람은 없는 거 아닌가? 왜 그게 시비의 대상이 되는지?), '디워'가 '핑계'가 되어준 거라고 하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소위 평론가 집단과 대중은 서로에 대한 쌓이고 쌓인 경멸과 반감을 '디워'를 핑계로 '터놓고' 교환한 것이 되니까. 최근 몇몇 언론의 '진단'은 이젠 그런 쪽으로 시야를 돌리는 듯하다(가령 이번 논란의 구도를 '386세대 지식인 vs 포스트386세대 대중'의 구도로 보는 식이다). 눈에 띄는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So what?'은 '대중의 반역'의 구호이면서(그런데, '대중의 시대'에도 '대중의 반역'은 가능한 건가?) 동시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반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So what?'은 부정의 변증법을 체현한다...

  

중앙일보(07. 08. 28) 21세기판 저주받은 걸작에 대하여

‘저주받은 걸작’이란 어느 비평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교체되어야 한다. 소수의 비평가 집단에서 일반 대중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23일 열린 토론회에서 비평가 진중권은 “문근영이나 이나영 보겠다고 영화를 보러 가긴 하지만 그걸 가지고 평론하거나 평점을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정답이다. 같은 시각 같은 극장에 앉아 있어도 비평가와 대중의 동기와 목적은 다르다. 하여 반응도 당연히 다르다.

비평가에게 예술작품은 텍스트다. 텍스트이므로 그들은, 학생이 교과서 공부하듯이 영화를 분석하고 소설을 해부한다. 한 번은 문학평론가의 노트를 구경한 적 있다. 그 노트엔 한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가 설계도면 마냥 촘촘히 그려져 있었고, 어구 하나하나를 옮겨놓은 바로 아래엔 깨알 같은 해설이 달려있었다. 그게 그들의 업이다. 다시 말해 벌이의 수단이다.

하나 대중(Mass)에게 문화는 소비의 대상이다. 문근영이 나와서 또는 컴퓨터그래픽이 그럴싸해서, 아니면 작정하고 울어 보려고, 이도 아니면 소일삼아, 그들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 전문가 버금가는 매니어도 물론 있다. 그러나 매니어란 말 자체엔 아마추어란 개념이 포함돼 있다. 먹고사는 일이 아니므로 매니어의 작업은 일종의 유희다.

마침 계간문예지 ‘문학수첩’ 가을호가 흥미로운 특집을 실었다. 김훈·공지영·류시화·하루키의 문학이 왜 인기인지를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란 제목 아래 조명했다. 찬찬히 읽어봤지만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글쎄다… 훈계 조의 몇 말씀만 눈에 띄었을 뿐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획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했다.

앞서 언급한 넷 중 공지영과 류시화는, 대중의 지지가 무색할 만큼 비평과 사이가 나쁘다. 이에 대해 공지영이 진작에 한 말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떠들게 하라. 난 내 길을 가겠다.” 이런 식의 대응은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개중 한 신예작가의 재치 어린 화법이 기억에 남는다.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 ‘지젝’과 ‘라캉’은 현재 한국 비평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소위 ‘주석용 학자’다. 마치 ‘지껄이고 깡깡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일찍이 평단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던 박민규가 자신의 SF소설 ‘깊’이 올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오르자 “왜들 이러셔”라고 대꾸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비평 작업을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비평을 거치지 않고도 대중과 바로 교류하는 문화상품이 늘고 있음을 지적할 따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화상품’이란 용어다. 혜택받은 소수만이 문화를 향유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걸 ‘문화상품’은 스스로 증명한다. 한 문학평론가의 고백이 떠오른다. “박민규는 비평을 통하지 않고 독자와 직접 접촉한 문학에서의 첫 사례다.” 공지영이나 류시화, 나아가 ‘디 워’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다.

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엄청난 발견을 했다 치자. 관련 계통에선 위대한 업적이겠지만 대중에겐 그저 “So what(그래서 뭐)?”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비평 언어는 애초부터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비평은 각 장르 안에서 엄연한 학문이다. 문화 유통업자들이 비평의 권위를 빌릴 뿐이다. 그러니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세상은 이미 변했다.(손민호 기자)

경향신문(07. 08.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현대의 대중과 지식인 : ‘디워’ 논란
문화 연구는 대중문화가 모든 사회적 힘이 관여된 전장이며 늘 새로운 터라는 데 착안하고 있다. 영화 ‘디워’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오늘날 한국 문화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테크놀로지의 문제, ‘괴수 영화’라는 장르와 수용의 행태, 그리고 배경에 있는 미국 대중문화와의 관계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롭고도 중요한 것은 ‘디워’ 수용과 논란에 개재된 참여자들의 행동 양식이다. 거기에 바로 거대한 카오스모스로 존재하는 한국의 ‘대중’이 있다.

'디워’ 논란은 아직 우리가 ‘대중’이라는 현상과 그 카오스모스를 잘 읽어내거나,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지식인’의 비평이 오히려 문화지체와 지적 한계의 덫에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들끓는 대중 현상이야말로 ‘지식인의 죽음’을 확증해주는 듯하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몇 가지 해석의 도구 때문에 대중보다 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기 십상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텍스트 자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현학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도구란 대중이 처한 현실 자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디워’ 논란만 보아도 거기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대중의 앎과 삶이 반영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단지 애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는 ‘무지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권력과 권위에 대한 건강한 도전 의식과 소외된 자로서의 분노, 그리고 무차별한 향유의 정신과 상식적 윤리성, 또한 마니아적 집요함과 여러 분야의 지식을 나눠 가진 모순적 존재이다. 평소에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데서 서식하지만, 때론 한데 뭉쳐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폭발의 방향과 반응도 진화하고 변이를 일으킨다. 몇 줄짜리 ‘댓글’이 곧 대중은 아니다.

양심적이고 날카로운 한 문화평론가가 ‘디워’ 때문에 마치 공적처럼 돼버린 사태는 대중의 모순적 역동을 그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그는 쉽게 사태를 애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추상’에 환원하고 대중을 ‘초딩’에 비유했다. 그는 전혀 공적도 아니고, 그의 ‘디워’ 평가도 옳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오류에 빠진 게 아닐까. 그는 복잡다단한 현상으로서의 대중을 단순히 사상하며, 윤리적·문화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의식을 건드린 듯하다. 물론 대중의 파도 속에는 참주선동을 일삼는 음험한 세력이 언제나 끼어있을 수는 있다. 문화연구는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주체-수용자 현상을 가장 주요한 대상으로 한다. 문화의 정치 경제학적 재생산과 개별 텍스트에 대한 분석·비판은 그를 위한 중요한 통로이다.

◆한국에서의 ‘문학에서 문화연구로’
하지만 문화연구가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악·미술·문학·영화 같은 개별 장르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이다. 문화연구는 수용주체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와 돈,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깊게 문제 삼는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주지하듯 후기산업사회의 계급대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영국에서 탄생한 ‘시각’이다. 이는 대중과 엘리트,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생활양식 등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는 효과를 지닌 입장들을 지칭했다. 그래서 문화연구는 하위 주체와 그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인해 젠더 연구와 탈식민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문화 연구는 문학 연구의 밭으로부터 움이 터서 일구어지고 있다. 문학이 전 시대의 중심적인 양식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총체적인 것과 새로운 것에 예민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이전의 국문학은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풍속·일상·문화제도·수용자·젠더 등에 대한 논의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구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화사나 문화 연구의 방법론을 참조해서 많은 성과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 이외에도 계급·젠더·민족(인종) 문제에 민감한 정치 경제학,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연구, 그리고 전통적인 미학이 다 문화 연구와 직접 관련된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 연구는 인문-사회과학 내부의 ‘통섭’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편, 현실과 연구 및 현실과 비평의 연결 강도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현대 한국의 문화사가 제대로 서술된 적이 없고, 문화 재생산의 한국적 양상이 총체적으로 연구된 바도 없다. 또한 ‘문화과학’ 등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각개 약진하는 여러 분야의 연구와 담론이 어떻게 공통의 의제와 담론의 장을 만들 것인지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영미의 문화 연구가 가진 한계는 이미 지젝이나 스피박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됐다. 문화 연구는 현실과의 연관이 미미해진 이론과 문학에 대한 중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본성상 대학 학과의 틀 속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문화 연구라는 문제 의식 자체 속에 앎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의도가 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넘어서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 연구도 서구 문화 연구 이론의 영향을 물론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끝없이 역동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문화 현실이 더 1차적이며 근본적인 문제틀이다. 오늘날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은 미국과 유럽의 발걸음을 추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는 소위 ‘선진국’의 이론에도 한 발, 또 현실에도 여러 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긴장력은 무조건 중요하다. 문화적 현실은 ‘지식인의 죽음’을 증거하지만, 그것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문화 연구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의 영역을 지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앎을 종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적인 계몽이 불가능하고, 대신에 소통과 연대가 가능한 길임을 문화연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문화의 변화와 과제
어떻게 한국의 문화 연구는 공동의 주제를 설정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비판적 문화 연구는 계급과 성,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토픽을 다루지만, 그것은 ‘지금-여기’의 문화변혁의 의제와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대중문화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2002년의 승리는 문화적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대중성의 성격 변화와 한국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대중의 외부’도 없고 대중문화의 외부도 없다. 다시 말해서 문화(즉 삶의 양식) 전체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또한 그 활동과 소통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영역이 없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성 변화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측면이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에서 돈은 얼마나 더 중요해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시끌벅적한 대중문화의 장이야말로 오히려 돈만으로 다 안 되는, 내지는 돈의 장악이 지닌 모순이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터이다.

한국 사회에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8대 2, 아니 9대 1 사회로 영구히 공고화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불평등과 계급불평등은 이제 단단히 구조화되어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적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로 파급되고,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면적으로 문화적 양극화는 잘 관철되고 있는 듯하다. 빈곤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실로 문화의 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문화는 정치 문제이다.

그런데 문화의 양극화는 ‘반-경향’과 함께 관철된다. 대규모 자본이 투여된 상품만이 시장을 장악하여 대량의 이윤으로 회수되는 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심각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추구는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동시성을 통해 구현되는 공통의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다른 한편 취향에 의해 수평적으로 준별되는 문화의 향유에로 달려가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

마니아(동호인·문화 부족) 현상은 일단 소요 자본과 진입장벽이 크지 않은 분야에서만 두드러지지만, 문화적 취향을 근대적인 ‘고급/저급’ ‘본격/통속’과 같이 위계지어진 것으로 구분하거나 특정한 문화적 취향을 특정 경제적 계급에 귀속시키는 일이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계급 구성과 정치·경제적 계급 구성 사이의 불일치, 또 노동과 향유 사이의 괴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항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불일치와의 괴리가 점점 더 복잡하고 커지는 양상을 띤다.

마니아는 대중의 존재성을 바꾸고 또한 강화한다. 그들은 지적 엘리트나 지배계급이 아니지만, 새로운 앎을 개척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횡적 연대는 그 자체로 오늘날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참여군중(Smart Mobs)’ ‘대중지성’ 등이 운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제품(자동차, 패션, 각종 전자기기 등)과 특정한 대중문화 상품(TV드라마, 연예인, 영화 등)에 대한 동호인 문화는 이제 일상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소비제품과 대중문화 수용에 있어 마니아들의 도움을 얻고, 또한 스스로 마니아가 되어 비평하고 옹호한다.

거대한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선도하는 힘이 전위나 지식인이 아니라, 열정을 바치는 마니아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거기에 새로운 정치도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전통적 비평의 불가능함도 여기와 연관된다. 문화 연구도 생산되는 텍스트를 뒤따라 다니면서 주석 달고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생산하는 앎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문화 연구가 ‘대중을 향한 생산’이 될 수 있느냐는 것에 그 미래의 중요한 부분이 달려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외부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활용하고 필요한 만큼 긍정하고, 대중 현상에 배후에 숨어서 권력과 지배를 항구적으로 누리려는 세력에 저항하고, 대중의 역능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연대의 전선을 개척하는 것이다. 또한 앎의 연대 전선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순종과 발전주의의 나락에 빠진 대학을 변화시키고, 인문학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과업과 관계 깊다.(천정환|성균관대 교수·국문학)

07. 08. 29.

P.S. 관련기사로 더 보탤만한 건 프레시안의 기사이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823134236. 그리고 더불어서 이번주 한겨레21의 '노 땡큐!'에 실린 김규항의 '타인의 취향'도 읽어두는 게 공평하겠다. 덧붙이자면 나는 계몽적 대중주의자이다. 나는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가 엘리트 평론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일용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계몽의 끝이다). 내가 기대하는 건 엘리트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엘리트화이다. 그럼으로써 엘리트주의를 해소하는 것. 엘리트주의의 상징적 폭력을 무력화하는 것. 자기부정의 운동은 그래서 요구된다. 타인의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안주하는 건 존중받을 만한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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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30 01:25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고 엄청나게 원색적인 가사가 대부분인 메탈리카의 곡명이 생각났었습니다.^^

섬나무 2007-08-30 11:14   좋아요 0 | URL
로긴 안하고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갈 수 없네요.^^인상적인 사회현상을 들추게 된 영화얘기니까요. 하여간 이번을 계기로 진중권씨에 대한 호감이 박살이 난 사람이거든요.그렇다고 디워 옹호론자도 못되는데 말입니다. 문화를 꼭꼭 씹어 먹는 일이 업인 사람이 그걸 대충 삼키는 대중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열을 낼 일이었나 싶습니다.역시 대중의 가치관은 전문가들의 그것보다 현실적이며 폭넓다는 생각입니다.
올리신 기사들이 깊이 공감됩니다.

람혼 2007-08-30 12:12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자면, 저로서는 바로 Miles Davis가 떠오르는군요...ㅎㅎ

로쟈 2007-08-30 15:32   좋아요 0 | URL
노래를 먼저 떠올리신 분들께는 죄송한데요.^^
섬나무님/ 저의 So what?은 대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저부터도 지식인-대중이니까요)...

섬나무 2007-09-03 10:42   좋아요 0 | URL
저는 가끔 아주 몹시 어느 한 쪽에 서고 싶어집니다. 아무래도 저는 흔들리는-대중 입니다^^ 하지만 로쟈님의 조언은 백번 지당합니다.

람혼 2007-08-31 02:33   좋아요 0 | URL
사실 Miles Davis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는걸요.^^
 

지난주부터 문화일보에 매주 월요일 '직장인의 자기계발을 위한 인문학'이란 기획기사가 연재된다. 어제까지 2회분을 옮겨놓는다. '사회적 독서'로 분류한 것은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확산이란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 비단 '인문학자들과 학문후속세대들을 위한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사이의 틈새시장이 말하자면 '직장인 인문학'이다. 관심을 가져볼 만한 사회적 의제라고 생각한다.

문화일보(07. 08. 20) 직장인의 자기계발을 위한 인문학 ①

직장인 10명 중 6명은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문화일보 16일자)가 있었다. 직장인 1254명을 대상으로 강박증에 대해 설문한 결과,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증’이 59.6%로 가장 높았다. 샐러던트’(직장인과 학생의 합성어)라는 말이 당연시될 만큼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에 쫓기고 있다. 하지만 절반을 훌쩍 넘는 직장인들이 자기계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면 지금까지의 자기계발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어떤 한계에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되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업그레이드 미’가 앞으로 10회에 걸친 시리즈로 인문학을 비롯, 영화·음악·미술·연극 등 문화예술로 자기계발을 도모하는 직장인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참을 수 없이 공허한 자기계발
경영학과 인문학의 결합을 모색하는 변화경영연구소(소장 구본형)의 홍승완 연구원은 현재 직장인 자기계발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경쟁중심적이다. 다카하시 순스케(게이오대 정책미디어 연구과)교수의 말대로 “직장인들이 지나치게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적인 선택에 내몰리며, ‘이 세상은 경쟁 사회며 서두르지 않으면 패배자가 될 것이다’라는 가정 위에서 살고 있다”는 지적과 같은 맥락이다.

둘째, 그렇다보니 자신의 기질과 장점, 꿈 등 내적동기와는 무관하게 자기계발을 한다. 이 분야 저 분야의 자기계발이 유행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외적동기에 쫓기다보면 ‘자기’는 없고 공허감만 남는다. 세째, 자기계발의 양상이 파편화돼 종합적인 자아실현과 동떨어지고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패하고 만다. 예컨대, 처세술과 인맥관리 방법을 배웠다고 인간관계가 좋아지는가? 사실은 그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정확히 알아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있는 자기계발서 중에 ‘우화형 자기계발서’가 적지 않다. 자기계발서에 스토리를 부여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같은 책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몇 줄이면 가능하다고 비판한다. 이 책들이 사이버교육장에선 한달간의 강좌로 둔갑한다. 직장인들의 ‘자기계발 강박증’을 이용한 상술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 인문학이 블루오션이다
21세기 지식기반 사회는 사람이 경쟁력이라고 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직장인 10명 중 7명(73%)은 직장에서 업무보다 인간관계 때문에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조사도 있다. 결국은 인간이다.

사람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한 인류의 성과가 인문학(humanities)이다. 그 속에는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든 사회, 문화, 예술이 모두 포괄돼 있다. 지식기반 사회의 경쟁력으로 일컬어지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인문학의 바탕 없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인문학을 ‘모든 학문과 사회, 기술, 경제, 정치분야의 수원지(水源地)’라고 부른다. 또 인문학은 요즘 주목받는 ‘창조경영’의 기반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문학이 블루오션으로 재평가되는 분위기가 우리에게도 자리잡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직장인들, 아니 현재 대학생들조차 시장(市場)이 원하는 ‘인문적 감수성’을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못하고 있다. 취업률을 우선시하는 우리 대학의 풍토에서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자격증과 처세술 등 기능개발에만 집중되는 자기계발에 대해 직장인들은 염증을 느끼고 있다. 거기에는 삶의 깊이나 질이 없다. 또 가장 중요한 창의성의 여지와 재미도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30~40대 직장인들 사이에 인문학을 공부하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직장인 자기계발 지면인 ‘업그레이드 미’는 앞으로 8회에 걸쳐 ‘직장인의 자기계발을 위한 인문학’시리즈를 싣는다.(엄주엽기자)

문화일보(07. 08. 20) 국내 최대 인문학 학습사이트 ‘아트앤스터디’ 현준만 대표

직장인이 인문학을 손쉽게 공부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국내 최대 인문학 학습사이트인 ‘아트앤스터디’(www.artnstudy.com)다. 문화예술인들이 만든 이 사이트의 현준만(49·문학평론가) 대표에게 ‘직장인에게 인문학 공부가 왜 필요한지’를 들어보았다.

―아트앤스터디는 언제, 어떻게, 무얼 지향하며 만들었나.

현재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계발 서적과 교육은 자격증, 어학, 처세, 화술 등 주로 ‘기능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지식기반사회’에 요구되는 상상력과 창조력의 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집약된 인문학의 몫이다. 실용 교육에 비해 인문 교육은 그 기회가 많지 않은 데다 주로 오프라인 교육장에서만 이뤄진다. 디지털 시대에 ‘시공간의 제약 없이 내 방에서 편하게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해서 지난 2001년 뜻을 같이 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함께 온라인 교육 전문 사이트를 만들게 됐다.”



―주로 어떤 강의들이 이뤄지나.

“현재 시인 신경림, 김지하, 소설가 조정래, 박범신, 철학자 이정우, 진중권, 인문 사회학자 이진경, 고병권, 고미숙 등의 교수진이 문학, 철학, 미학, 영화, 건축, 미술, 음악, 전통문화 등 인문학과 문화예술 전 장르에 걸쳐 300여개의 동영상 강의를 하고 있다. 그 중 이정우, 진중권, 박정하 등 유명 강사진의 철학 강좌가 특히 직장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일상에 묻힌 월급쟁이들에게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직장인들의 일상이 바쁘고 팍팍하기 때문에 인문학 공부가 더욱 필요하다. 힘겨운 일상 속에서 누구나 “왜 사는가”, “이렇게 사는 게 과연 행복인가”와 같은 질문과 맞닥뜨린다. 이때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철학과 사색의 힘이 자아를 건강한 삶으로 이끌 수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지금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지식기반사회’의 원동력과 핵심은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이것은 공식을 외우고 지름길을 찾아가는 ‘기능 교육’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인문학 교육은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직장인에게 진짜 필요한 건 창의성과 세상 흐름을 읽는 폭넓은 시야다. 인문학 공부가 여기에 도움이 될까?

인문학은 사람 인(人)자가 들어간 데서 알 수 있듯,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문화를 철학, 역사, 문학의 눈으로 각각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기 위해 인문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처세술 학습으로 될 일이 아니다. 사유의 참맛을 알게 해주는 철학 공부를 통해 자아를 더 성숙하게 키워나갈 수 있고,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고전 공부를 통해 현재를 바로 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며, 또 메마른 정서를 적셔줄 문학, 미술, 음악 공부도 유용할 것이다.”

―철학공부가 인기가 있다는 것도 의외다.

고무적이라고 본다. 그 배경은 첫째, 직장인이 철학을 공부할 곳이 없다. 혹 철학책을 읽는다 해도 비전공자가 혼자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다. 둘째, 철학을 가르치는 오프라인 교육기관이 있지만,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수도권 거주자가 아니면 오프라인에서의 공부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아트앤스터디의 경우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어느 때나 동영상 강의를 볼 수 있어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오프라인 교육에 비해 비용도 저렴하다.”

―아트앤스터디의 직장인 수강생은 어느 정도인가.

아트앤스터디의 주 이용층은 20대 후반에서 40~50대의 직장인이다. 직장인들의 퇴근 후 자기계발 열풍을 반증하듯,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사이트 접속률이 가장 높다.”(엄주엽기자)

문화일보(07. 08. 27) 직장인의 자기계발을 위한 인문학 ②

인문학을 통한 직장인 자기계발의 핵심은 인문학 책 읽기다. 인문학 독서야말로 창조적으로 사고하고 소통하는 인간 능력 향상의 첩경이자, 지식기반 사회로 불리는 21세기 경쟁력의 근원을 다지는 일이다. 2000년대 이후 인문학책 출판에 매진해온 그린비 출판사의 유재건 대표는 “철학이 만학의 왕이듯이 인문학이야말로 모든 실용서의 왕”이라며 “요즘처럼 속도가 빠르고, 변화무쌍한 시대일수록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역량을 길러주는 인문학 독서의 필요가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유 대표는 이와 함께 자기 성찰, 자기 수양으로서의 인문학 책읽기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삶에서의 성취와 나락이 순식간에 뒤바뀌며 공존하다시피하는 시대, 평소에 인문학 책을 읽으며 삶의 뿌리를 든든하게 받쳐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직장인들이 인문학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전 번역을 중역(重譯)한 사상서, 전집류 등을 들여놓고, 제대로 이해도 못한 채 끙끙대던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학 책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 없진 않다. 몇몇 출판사들이 이 시대의 문제의식에 맞춰 새로 쓴 고전을 읽거나 인문학 관련 잡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런 책들로 기초적인 이해를 쌓은 뒤 원전을 완역한 책을 읽으면 고전을 읽는 맛이 확 달라진다.

쉽게 읽히는 인문학 책도 있다 = 인문학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난해하고 골치 아픈 책은 아니다. 특히 소장·중견학자들이 인문·사회학 고전을 이 시대에 맞게 곱씹으며 풀어쓴 책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과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시리즈다.

최근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강신주 지음)을 냄으로써 모두 7권이 나온 그린비 출판사의 ‘리라이팅 클래식’은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이 인문학 베스트셀러에 든 것을 비롯,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고병권 지음),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 지음),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권용선 지음) 등 하나 하나가 모두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이성은 신화다…’는 ‘열하일기…’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나 난해한 텍스트로 유명한 ‘계몽의 변증법’을 1인칭 시점으로 풀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제의식에 다가가게 하는 솜씨가 매우 빼어나다. 출판사 측이 시리즈를 시작한 지 3년이 훨씬 지나도록 7권밖에 내지 못한 것도 ‘리라이팅’의 야심에 걸맞은 내공 깊은 저자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

그린비의 ‘리라이팅클래식’이 본격 저작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면, 살림출판사의 ‘e 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는 고전이 탄생할 수 있었던 시대 배경과 작가의 환경, 그리고 고전의 핵심 등을 이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 출간하는 다이제스트 형식의 총서다. 시리즈 제목의 ‘e시대’는 ‘첨단 정보통신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시대에 맞는 현대적 감각의 고전을 목표로 한다. 고전을 읽으려 해도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용어 앞에서 기가 죽는 독자들에게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는 저자 개인이 해당 원전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과 문제의식들이 핵심내용과 잘 어우러져 있어 ‘상군서-난세의 부국강병론’(장현근 지음), ‘리바이어던-국가라는 이름의 괴물’(김용환 지음), ‘사기-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이인호 지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동서양 고전 28권이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인문학 잡지로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 서점과 인터넷에서 차고도 넘치는 인문·사회학 관련 책들, 무엇을 집어야 할지 모를 때는 잡지를 보는 것도 방법이다. 잡지야말로 홍수처럼 넘치는 정보의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골라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평있는 잡지들에는 인문학 사회학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편집위원과 집필진으로 참여, 당대의 주요한 문제를 수준 높은 감식안으로 심도있게 분석한다. 정평있는 잡지의 글들은 웬만한 단행본을 능가한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면서 한때 줄지어 문을 닫았던 잡지들도 최근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제반 문제와 남북문제, 변화한 미디어 환경과 대중문화, 생태, 대안적 공동체 운동 등등을 제대로 진단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상반기 봄호를 끝으로 휴간됐던 인문학 전문지 ‘비평’이 지난해 복간됐고, 98년부터 2005년까지 계간지로 발행됐던 ‘당대비평’이 부정기 단행본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를 가지고 돌아왔다.



87년 창간해 2003년 봄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단했던 중도진보 성향의 계간지 ‘사회비평’도 이번 여름호로 복간됐다. 이 밖에 도서출판 그린비는 최근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함께, 인문사회학 책과 잡지의 성격을 섞은 부커진‘R’의 창간호를 냈고, 1949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가 창간한 미국의 좌파 성향 월간지 ‘먼슬리 리뷰’ 한국판도 최근 첫선을 보였다.

암울하던 시절 저항과 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계간 ‘창작과비평’을 비롯, ‘문학과사회’, ‘세계의문학’, ‘문학수첩’ 등의 문학 계간지들도 어려운 출판사정에도 불구, 인간과 이 시대의 핵심 이슈에 대한 성찰을 중단 없이 계속해 온 잡지들. 기독교나 불교에 대한 수준 높은 논의를 기대하는 이들은 ‘기독교사상’이나 ‘불교평론’을 보면 좋다. 또 ‘녹색평론’이나 ‘환경과생명’은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생태와 공동체운동, 대안의 삶 등을 꾸준히 모색하며 충성도 높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김종락기자)

문화일보(07. 08. 27) '인문학이 나의 힘’ 이동환씨

“학자나 문인뿐 아니라 직장인에게도 인문학 책 읽기는 필요합니다. 경제·경영이나 자기 계발서들이 직장인들의 실무역량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실용서라면 인문학 책들은 이의 배경이나 근본이 되는 것이지요. 축구나 야구, 농구 등 운동 선수들에게 테크닉 못지 않게 기초체력이 중요하듯, 직장인에게도 인문학의 굳건한 배경은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IT컨설팅 기업인 이씨마이너 이사 이동환(49·사진)씨는 인문학 책읽기 예찬론자다. 치열한 생존경쟁 시대, 직장인들의 삶이 각박하고 힘겨워질수록 인문학 책읽기는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문학은 실용성과 거리가 먼 학문으로 여겨지지만 향후 경쟁력의 관건인 창의와 상상력의 에 관건이 되는 분야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원천이라는 것이다. 특히 직장 업무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소통과 가로지르기가 필요한 때, 인문학의 효용은 더욱 커진다고 강조한다.

 

이씨의 이 같은 주장은 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가 지난해 읽은 책은 모두 180여권. 이 중 절반 이상은 묵직한 인문학과 과학 분야 책이다. 지난 6월 읽은 15권의 책 중에서 ‘버자이너 문화사’(앨토 드랜스 지음, 김명남 옮김, 동아시아), ‘컬처 코드’(클로테르 라파이유 지음, 김상철·김정수 옮김, 리더스북) 등 6권이 인문학 책, ‘리처드 도킨스’(앨런 그래펀 지음, 이한음 옮김, 을유문화사) 등 4권이 과학 책이었다.

이씨가 처음부터 실용성을 위한 인문학 책읽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벗어난 지 20여년, 직장 생활을 할수록 공허해졌고, 인간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대학에서 행정학,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해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인문학 책읽기에 빠져든 것은 나이 마흔이 넘어 생기기 시작한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재미와 지적 만족을 위해 시작한 인문학 독서가 직장 생활에도 효용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하는 IT기업의 컨설팅 업무에서 일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던 인문학이 만만찮은 저력이 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인문학 책을 읽으며 얻은 지식들은 우선 고객과의 대화에서 신뢰를 담보하는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컨설트 대상 기업의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할 때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들도 인문학 책을 읽으며 수없이 경험했던 지적인 과정과 다를 게 없었어요.비록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한 단계만 더 나아가면 인문학 책은 수준 높은 실용서였습니다.”

인문학 책은 또한 빼어난 자기계발서이기도 했다. 인문학 책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들이 몇 줄이면 요약가능한 자기계발서에 적힌 이야기와 비교할 바 아니었다. 그가 주로 책을 읽는 때는 출퇴근 시간, 책을 읽기 위해 일부러 전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너무 어려운 책을 대할 땐, 이와 비슷한 분야의 책 중에서 좀 쉬운 것을 골라 읽습니다. 그러다 보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참고도서 서너권을 읽는 때도 많았어요. 그 책이 좋으면 관련 저술을 모조리 찾아 읽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읽기지요.”

이씨는 3년 전부터 YES24 블로그에 둥지를 마련, 서평을 올리고 있다. 읽은 책을 다른 이와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가 지난해 올린 서평은 모두 90여편, 독자도 많이 생겨 지금까지 방문자가 6만명에 육박한다. 여기에다 월요일엔 야학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토요일마다 자원봉사를 한단다.

특정 분야의 책을 20권 정도 읽으니까 체계를 갖춰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50권 정도 읽으니까 강의를 할 수 있게 되더군요. 100권 정도 읽으면 책도 쓸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아, 역사와 고고학, 인류학, 지리학, 기후학, 생물학 등등을 크로스오버하는 책을 써보고 싶습니다.”(김종락기자)

07.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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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8-28 11:4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런 고비를 넘겨야하는데, 일터 일상에서 동화같은 실용서도 읽지못하거나, 읽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나마 그 경계선을 넘어서거나 넘도록 만드는 이런 기사가 고맙네요. 인문학 책을 읽으라는 빌미가 마땅하지 않았는데, 이 참에 빌미를 만들어가네요. 이번주 회식때나 한번 써 먹어 봐야겠군요. ㅎㅎ

로쟈 2007-08-28 18:17   좋아요 0 | URL
맘만 먹으면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2007-08-28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28 18:18   좋아요 0 | URL
이건 뭐 신문기사 옮겨온 것뿐인데요...

라주미힌 2007-08-28 16:48   좋아요 0 | URL
아니.. 대학교에서도 멀리하는 인문학을, 인문학의 실용성을 직장인들이 찾다니(저도 그러고 싶은 ^^).. 재밌는 기사네요.

로쟈 2007-08-28 18:19   좋아요 0 | URL
인문학도 꽤 재미있잖아요.^^

비로그인 2007-08-28 19:5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로쟈님.
저도 인문학 마냥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는데요,
왠지 희망이 보이는 페이퍼라고나 할까요? ㅎㅎ

로쟈 2007-08-28 20:05   좋아요 0 | URL
제가 대단한 일을 한 건가요?^^;

마늘빵 2007-08-28 21:10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하고 있는 것만 끝내고, 이런데 다니면서 취미로(?) 공부하고 싶어요. 찾아다니면 요새는 정말 갈 곳 많더라고요. 철학아카데미, 아트앤스터디, 한겨레문화센터 등등.

로쟈 2007-08-28 23:49   좋아요 0 | URL
너무 많아도 탈이죠.^^;

심술 2007-08-28 22:38   좋아요 0 | URL
그런데 이동환 님은 저 많은 넥타이 부대 가운데 누구예요?

로쟈 2007-08-28 23:49   좋아요 0 | URL
전혀 무관한 사진입니다.^^;

섬나무 2007-08-29 12:26   좋아요 0 | URL
주변의 아는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인문학 읽기를 합니다. 일하는 주부들이 주류입니다.
인문학자들이 말한 인문학의 위기는 이제 상아탑이 아닌 저자거리에서 출구를 찾을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흔적이 사라지는 일은 온전히 살아남기보다 불가능한 일일테니까요.
위기론들은 변주를 위한 서주 같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7-08-29 19:38   좋아요 0 | URL
저도 일반인 대상 강의를 하는데, 오히려 대학생들보다 열심히들 들으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