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만큼 무정부주의에서 제국주의까지 그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은 문헌은 없을 것이다. 이유가 없지 않다. 도덕경의 말들이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백성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무위자연의 성인(聖人)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제국주의적 자본가들의 정치를 분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과 모르는 척하는 것 혹은 아는 것과 아는 척하는 것은 구별하기 힘들다. 애매모호함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성인과 사기꾼은 한끝 차이다. 공통점이 있다. 첫째, 성인은 스스로 성인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성인이 스스로 성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은혜를 베푼다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사기꾼도 스스로 사기꾼이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스스로 사기꾼이라고 떠버리면서 사기 치지는 않는다.

둘째, 성인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듯이 사기꾼도 사람의 마음을 현혹한다. 사람들을 홀리는 기술인지 유혹하는 매력인지 어째든,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마력이 있다.

셋째, 성인이건 사기꾼이건 체득(體得)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다. 사기꾼들에 관한 탁월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성인과 사기꾼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청진기대면 바로 진단 나와.”

성인이건 사기꾼이건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고서 청진기만 대면 곧바로 진단 나와야 한다. 머리 굴려 사려하고 주판알 퉁기면서 계산한다면 사기꾼 되기 한참 먼 것이다. 사기꾼 가운데 최고 고수는 청지기대면 진단 바로 나오는 체득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하지만 성인이야 말로 사려하거나 계산하지 않는 체득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었던가.

성인이건 사기꾼이건 청진기대면 진단이 나오는 체득의 경지로 스스로 의식하지 않거나 타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정이천은 노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노자라는 책은 그 말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부합되지 않으니 애초의 의도는 도의 극히 현묘한 곳을 말하고자 하였으나 나중에는 도리어 권모와 사술을 말하는 것으로 흘러버렸다. 예컨대 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주어야 한다라는 말들 따위이다.”(老子書, 其言自不相入處如氷炭, 其初意欲談道之極玄妙處, 後來却入做權詐者上去. 如將欲取之, 必固與之之類.)

 

정이천이 보기에 노자라는 책은 매우 오묘한 지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사기술로 빠진다는 말이다. 노자라는 책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면 문제이겠지만 노자의 애매모호함은 장점이 아니라 약점일 수 있다.

 

 

 

 

 

 

 

 

 

 

 

 

199310월에 호북성(湖北省) 형문(荊門) 곽점(郭店) 초묘(楚墓)에서 대나무로 이루어진 죽간본(竹簡本) 노자를 발견하였다. 기존의 통행본과 비단본인 백서(帛書) 노자와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 세계의 노자 연구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이제 노자의 연구는 시작일 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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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려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책.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구나 귀곡자가 전한 삶의 노하우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역사의 안개에 가려진 비서(祕書). 이제 그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무렵 서서히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귀서(貴書).

권모술수와 음모는 비열한 술수이다. 하지만 고고한 도덕을 고집하면서 몰라서도 안 되는 노하우다. 유학자들은 당연히 이런 귀곡자를 혐오했다. 당나라 유종원(劉宗元)그 말이 매우 기괴하고 그 도리가 매우 좁아터져 사람을 미치게 하고 원칙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했고, 명나라 송렴(宋濂)귀곡자가 말하는 패합술(捭闔術)과 췌마술(揣摩術)은 모두 소인들의 쥐새끼 같은 꾀로서 집에 쓰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쓰면 나라가 망하며 천하에 쓰면 천하가 망한다고 혹평한다.

 

 

 

 

 

 

 

 

 

 

 

 

 

 

 

귀곡자는 전국 시대 종횡가(縱橫家)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문헌이다. 한서<예문지>에서는 종횡가를 이렇게 평가한다.

 

종횡가의 유파는 행인(行人)의 관직으로부터 나왔다. ...... 그 말이 상황에 합당했고 임기응변으로 일을 마땅하게 처리했다. 군주의 명령을 받되 구체적인 행동 명령은 받지 않았다. 이것이 이들의 장점이다. 그러나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이를 행한다면 사기술만을 숭상하고 신의는 저버린다.”(縱橫家者流, 蓋出於行人之官, ...... 言其當權事制宜, 受命而不受辭, 此其所長也, 及邪人爲之, 則上詐諼而棄其信.)

 

행인이란 외교관을 의미한다. 외교관들은 정치적이고 언어적 능력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했고 소피스트(sophist)들의 수사학(修辭學)을 비난했듯이 공자는 정나라 음악을 물리치고 말재주 좋은 사람을 멀리 했다.

선진 제자 가운데 말재주로 유명한 종횡가는 주목받지 못했다. 서양 철학에서도 소피스트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 소피스트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 사회에서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이 주목받고 있다. 마찬가지다. 종횡가도 이런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한비자가 군주와 신하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군주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던 탐욕스런 신하들을 다스리는 통치술을 주장했다면, 귀곡자는 신하로서 화를 당하지 않으면서 포악하고 어리석은 군주를 제어하는 정치적 전략과 유세술(遊說術)을 주장했다. 한비자가 군주론이라면 귀곡자는 이에 대항하는 이른바 신하론이라 할 만하다. 언어의 힘과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권력에 대항하는 신하들의 기술과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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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2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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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를 그리 즐겨 읽지는 않는다. 맹자와 같은 강직한 스타일이나 과도한 이상주의적 태도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적 기득권을 강고하게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도덕을 정당화하려는 위선이나 고상한 이상을 떠들면서도 현실적 문제에 무기력한 무능력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이상하게도 교활한 현실주의자나 무능력한 이상주의자들이 맹자를 들먹이는 것이다

 

 

 

 

 

 

 

 

 

 

 

 

 

 

맹자를 평가하는 말이 있다. 우활(迂闊)하다는 말이다. 우활하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이 우활하다는 말의 어원은 사기<맹자순경열전>에 나온다. 거기서 맹자를 그의 말이 현실과 거리가 멀고,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라고 평하고 있다.

 

 

 

 

 

 

 

 

 

 

 

 

 

당시에는 군사 전략가이며 현실주의자들인 상앙이나 오기 혹은 합종연횡을 펼치며 정치와 외교에 뛰어났던 소진과 장의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꾀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맹자의 말들은 동키호테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송 시대의 정이천이라는 사람이 내린 평가는 이와는 다르다. “()을 아는 사람 가운데 맹자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知易者, 莫若孟子) ()이란 주역을 의미한다. 주역의 핵심은 시세를 알고 때를 아는 것이다. 정이천의 평가에 따른다면 맹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만은 아니었다.

 

 

 

 

 

 

 

 

 

 

 

 

 

분명 맹자는 이상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이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이상이 아니었을까? 현실을 몰랐거나 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현실 속에서 실현가능한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우활하다고 평가했을 뿐.

역사는 무모한 이상주의자보다는 교활한 현실주의자들이 이끌어가는 것일까? 맹자의 바람과는 달리 진시황에 의해서 천하는 통일되었다.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현실주의자였던 상앙(商鞅)과 이사(李斯)였다. 그러나 천하가 통일되었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던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민중들의 삶은 피폐하다.

맹자가 말하는 우활한 왕도(王道) 정치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맹자를 즐겨 읽지 않는 나는 답할 순 없다. 그러나 뻔뻔한 비굴과 아첨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하필 왜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왕에게 간언했던 맹자의 강직한 호연지기가 아쉬운 것은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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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중세 시대인 12세기는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 최고조로 발달한 시기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 1224~1274)의 저작으로 알려진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일명 보편 논쟁은 보편 개념이 실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 속에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스콜라철학의 최대 논쟁이었다. 바늘 끝에는 천사가 몇 명이 있을 수 있는지도 논했다고도 했던가. 허망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주희(朱熹, 1130~1200)와 친구인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펴낸 근사록은 허망하지 않고 삶에 절실하다. ‘근사(近思)’라는 말은 논어절실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은 그 안에 있다”(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등의 저서에서 발췌한 송대 성리학의 입문서라고 평할 수 있다. 이 책 안에는 송대 성리학의 주요 개념이 거의 모두 다루어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필요하고 절실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배움의 방법과 집안을 다스리는 일과 자신의 출처와 행위 방식의 문제로부터 다스림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 등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훈은 근사록을 평생을 옆에다 놓고 보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 나온 글들을 읽으면 세상에서 까불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아주 뻔한 얘기를 아주 뻔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주 어렵고 무서운 일들이기 때문이다. 나쁜 평가는 아니지만 나는 근사록을 읽으면서 당시 사대부들이 가졌던 삶에 대한 경건함을 무섭도록 느낀다. 물론 내가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무거움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사록에서 다루고 있는 배움은 우리 시대에서 말하는 전문 기술과는 전혀 다르다. 흔히 자기 수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단순히 개인적 인격을 도야하는 방법과 기술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이 자기 수양과 자기 배려가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파급력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려는 것이다. 그 절실하게 물으면서 가까운 일상적인 일들을 사고하는 태도에 담긴 아름다움의 사회 정치적 의미와 가치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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