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은 경향신문 기사의 전문을 찾아 옮겨놓는다. 지난달말 영남대학교에서 열린 '우리시대의 교양' 강좌의 좌담이다. 서경식, 한홍구, 박홍규 교수 등이 주요 참석자이다. 개인적으론 지난주에 옮겨놓은 서경식 교수 인터뷰 기사(http://blog.aladin.co.kr/mramor/1938368)의 '후속편'으로 읽었다.   

경향신문(08. 03. 05) ‘우리 시대의 교양’ 인문학 강좌 좌담 전문

-영남대 법학도서관(2월29일 오후 3시~7시30분)
-참석자: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박홍규 영남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최재목 영남대 교수, 허아람 인디고 서원 대표, 조진석 ‘나와우리’ 상임활동가(사회자), 이 외에도 인디고 서원 식구들과 성공회대 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인 교사들, 대구의 철학스터디 모임 ‘철학본색’(http://spermata.egloos.com/) 회원들 외 다수가 참여.

조진석 ‘나와우리’ 상임활동가(사회자)= 오늘 좌담 자리는 제가 서경식 선생님과 박홍규 선생님을 모두 알아 중개하게 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은 도쿄경제대의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다가 성공회대에 연구교수로 와계시고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서선생님이 일본에 돌아가시는 날을 몇일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박홍규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관심과 애정, 고민 특히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관심이 비슷하다고 여겨져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분간의 작은 만남으로 시작했다가 준비 과정에서 다소 커져서 부담도 되고 기쁘기도 합니다. 오늘 모임을 주최해주신 곳은 영남대 신문방송사입니다. 신문방송사 주간이신 최재목 선생님과, 인디고 서원의 허아람 선생님,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오신 분들을 포함해 성공회대 교양학부의 한홍구 선생님도 참석해주셨습니다. 또한 영남대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순서는 서선생님이 먼저 말씀해주시고, 그 다음에 박홍규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두 분이 먼저 이야기를 풀어주신 다음에 한홍구 교수와 최재목 교수, 허아람 선생님께서 몇 가지 코멘트를 해주시겠습니다. 그 뒤에는 참석자 전체가 질문과 토론 시간을 갖겠습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2년간 한국에 머물렀지만 아직 조선어 표현에 서투릅니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교양에 대해 같이 고민하자는 취지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교양이라는 말은 서양어의 번역어입니다. 일본에서도 교양이란 말을 쓰고 있고, 여기서도 쓰고 있습니다만 양쪽 사회에서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교양이 없다면 ‘질서가 없다’는 의미, ‘몰상식한 사람’이란 뜻으로 쓰지만 일본에서 교양은 2차 대전까지는 아주 특권적인 말이었고, 대단히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이었어요. 종전 후에 “나는 교양이 있다”는 말은 좋은 말도 아니고 오히려 쑥스러운 말이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교양이라는 말의 원래 뜻을 다시 생각하자고 할 때 일본에서는 너무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우리가 교양 다시 발견하고 그 뜻을 재생시켜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동경경제대에서도 ‘21세기 교양프로그램’이라는 학부 코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문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4년 전부터 시범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토 슈이치라는 일본의 대표적 교양인께서 시카고대 노마 필드 교수를 초청해 강연회와 대담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작년에 한국에 번역돼 나온 '교양,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노마 필드 교수는 대한민국에서도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라는 책이 번역돼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 분 아버지가 미국 군인이고, 어머니는 일본 사람입니다. 이 말은 좋은 말이 아닌데, ‘혼혈아’라고 볼 수 있죠. 일본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에서 교육 받았고, 미국에서 일본학과 선생으로 계십니다.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라는 책은 쇼와 천황 즉 지금 천황의 아버지가 1989년에 죽었는데, 그때 일본에 있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에세이로 쓴 거죠. 시카고와 일본을 왔다갔다 하면서 저와 개인적인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저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국 정부나 정권이 이렇게 비합리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미국민 80% 이상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집단적인 열광으로 말입니다. 비판의 목소리에는 아무도 귀 기이울이지 않죠. 그때 저는 노마 필드에게 연락해 “미국에서 교양 교육은 완전 패배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 가지고 토론해 보자고 했습니다. 제가 도발했고, 이 사람이 일본까지 왔습니다. 저는 적어도 명백한 증거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을 죽이고, 전복시키는 전쟁을 80% 이상의 국민이 지지하는 상태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의 시대에, 교양이란 게 전쟁을 막을 힘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지요. 지금은 누구나 그것이 증거도 없는 전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대량 살육 무기가 없었다는 걸 미국 정부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전쟁을 진행 중이고, 지금도 사람 죽이고 있습니다.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비합리적인, 불법한 구속 상태로 피의자가 고문당하고 있다는 것도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물고문 허용법안이 미국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불법 도·감청도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허용된다고 합니다. 2003년에는 찰나적이고 일시적인 열광을 교양이라는 게 막을 힘이 없다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주 일상화된 허위, 거짓에 대해서조차 교양이란 게 무력하다는 게 증명됐다는 느낌입니다.

가토 슈이치 선생님이 많이 얘기하는 것이 있는데. 지금 일본 헌법 9조, 전쟁 군비 포기 조항을 개정하려고 일본 보수파들은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일본 국민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나이 90에 가까운 가토 선생이 이것을 반대하는 외로운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어요. 가토 선생이 저희 학교 강의에서 알기 쉽게 비유를 드셨어요. 성능 좋은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그런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학문인데, 교양이 없으면 이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갈지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교양은 자동차를 타고 어디에 갈 지 가르치는 것이라고 설명한 거죠. 아주 알기 쉬운 얘기니까, 이 얘기를 인용합니다.

대한민국에 오기 전까지 저는 일본 사회와 비교해 교양이라는 것이, 지식인이라는 것이 아직 살아있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한홍구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문제가 많더군요. 이것은 여담인데요, 제 파트너, 즉 같이 살고 있는 여성이 있는데요. 2년 가까이 연세대 어학당에 다니며 조선말 수준을 6급까지 올렸습니다.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도달해 지금은 논문 쓰는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논문의 내용이 아니라 쓰는 형식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죠. 온갖 나라 사람들이 와서 들어요. 그 중 중국 사람들이 많대요. 그 어학당 선생님께서 엄격히 하시는 게 '나'라는 말 쓰지 마라는 거예요. 주관적이라는 이유지요. 그렇게 엄격한 명령을 전해 들으며 ‘아, 나를 죽이는 사회, 나를 죽이는 시대가 이 사회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어학당 프로그램이니까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온갖 모든 교육들이 이런 식으로 벌어지고 있는 측면이 있는 듯 합니다. 일본에서는 과거 너무 지나치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어요. 일본에서는 ‘나’가 없어요. ‘나’가 없는 곳이 일본입니다. 일본에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너무 당혹스러워하고, 오히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냐고 허락을 얻으려고 하는 곳이 일본입니다. 학교에서도 질문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요. 가끔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질문이란 게 “보고서는 A4로 써야 하느냐” “손으로 써도 되느냐”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미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나’라는 말 쓰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저처럼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자율적인 회의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그런 것 없이 교육하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가 봐야 합니다.

과거 일본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러일전쟁 얘기가 나올 때, 일본 우파들은 러일전쟁 때 일본이 이겼고, 일본이 영광스러운 나라라고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학생들은 그걸 판단하려는 의지조차 없습니다. 그 시점에는 온통 세계가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 그 시대에는 그게 정의였을 것이라고도 얘기합니다. 1세기 전에는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노예제도가 당연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봅니다 1세기 전에는 여성들이 권리가 없었고,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지금 이 시점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면 당혹해 합니다. 바로 ‘나’가 없는 사회인 거죠.

일본이 90년대에 그렇게 된 상황을 지금 한국이 급속히 따라가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했는데, 이렇게 나왔습니다(신문을 들어보임). 사진이 별로 잘 안나왔네요.(웃음)

손제민 기자에게 인터뷰 질문을 받으면서 새롭게 알게 됐는데, 한국에서도 ‘전문가’라고 하지, ‘지식인’이라고 잘 안한다고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고 하는데요.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박홍규 교수님도 일본에 오래 계셨으니 잘 알고 계실텐데 일본의 교수들이 전형적으로 그렇습니다. 저는 지식인입니다라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아름다운 오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겸손한 게 아니라 자신을 비하하고 낮추고 책임 안지려는 태도일 뿐이니까요. "저은 전문분야만 알고 있을 뿐, 그런 것은 잘 몰라요"하는 사람들이 일본사회에 대다수입니다. “제가 지식인입니다” 하면 우스운 사람이 돼버립니다.

박사학위도 없고, 외국어도 잘 못하지만 교수로 임용된 저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쉽게 말해 책임회피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페셜리스트’인 것이지요. 우리처럼 대학교에서 근무한 사람들이 육체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책만 보고, 해외에도 가고, 휴가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왜 누리고 있을까요. 그만큼 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스페셜리스트들은 그러지 않아요. 그들은 위에서 시키는 명령대로 할 뿐이에요. 성능 좋은 차,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무기 등 만들라는 대로 다 만들어내는 것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스페셜리스트’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에이얄 시반이라는 이스라엘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감독이 만든 영화죠. 이 영화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나치의 고급관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관리지요. 60년대에 이 사람이 잡혔고, 그것을 잡아 재판한 장면을 다큐로 각색한 영화이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여기서 읽어냈죠. 영화를 보면 악은 평범하지 않아요. 당당하고 뻔뻔해요. 나는 스페셜리스트로서 시키는 대로 충성했을 뿐인데, 뭐가 나쁘냐고 당당하게 말해요. 그런 얘기를 시종일관 하는 게 바로 아이히만이죠. ‘저는 전문가입니다. 지식인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저는 아이히만’이라는 말과 똑같아요. 일본이 아이히만들의 나라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패전 직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정신구조에 대해 써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사회에 큰 영향을 준 책이 있죠. 일본의 군국주의자와 독일 전범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권한으로의 도피입니다.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죠. 둘째, 규정 사실에 대한 반복입니다. 흐름이나 추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런 게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군국주의자의 정신구조입니다. 악은 악인데, 나치 전범들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의 악이라고 합니다.

‘스페셜리스트’라는 영화를 보니 ‘저는 전문가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정신구조가 어떤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일본에서 60년대는 전공투와 베트남전 반대 등 여러 가지 활동이 있었어요. 거기서 중요한 구호는 ‘자기 부정’이었어요. 전공투는 동경대 의학부에서 시작했는데, 그곳이 원래 아주 봉건적이고 권위적이고 위계가 확립된 제도였어요. 그것을 해체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들은 동경대 의학부를 다니면서 무난하게 살면 의사로 살 수 있음에도 ‘자기 부정’을 외쳤어요. 또, ‘산학 공동체’를 해체하자는 것이 구호였어요. 학문 연구는 산업과 자본의 요구가 별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학문의 연구는 산업/자본의 이익이 아니라는 것이죠. 당시에 특히나 군산학 공동체인데, 이 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월남전 때 강조했죠. 그게 아니라는 거죠. 베트남전 반대와 산학 공동체 해체가 잘 맞아요.

하지만 전공투 운동은 결국 완패했어요. 여기서 대부분 사람들이 체제 내화됐어요. 일본에서는 70년대부터 경제성장이 왔기 때문에, (전공투 세대가) 패배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만연했어요. 패배했기 때문에 성장도 이뤄지고, 그들 자신들도 큰 기업이나 대학교의 사회주류가 됐다는 거죠. 그런 자기기만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게 일본 주류입니다. 산학공동체 해체 요구가 완전히 무너지고 그것이 오히려 일변도로 강화돼 왔어요. 90년대부터 일본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돼서 아주 심한 경쟁 논리가 도입되게 됐습니다. 그럴수록 교양 부분은 계속 줄어들게 됐죠. 고등교육 뿐 아니라 초등교육까지 ‘나’라는 것이 없는 사회가 됐습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루 속히 기계화되는 것이 사회적 상승의 길이라는 거죠. 기업들은 ‘나’가 없는 친구들을 데려 오라고 했어요. 기업들은 자기 입맛에 맞게 ‘교양’이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일 잘하는 친구들 말이죠.

교양이라고 할 때는 마치 동상이몽과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기업의 이해와 욕구에 따라가려는 것과 인간으로서의 독립성 그런 게 섞여 있습니다. 그런 기업의 요구도 의미가 있고 필요하겠지만, 학자들은 ‘나’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학생들, 자기 의견을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기업에 들어가서 어떤 쓸모가 있을까 걱정해야 합니다. 대학에 온 학생들에 대해 고등학교 때 손을 들고 몇 번을 말했는지 점수로 계산해서 보내와요. 내용이 별로 없는 질문을 해놓고도, 자신이 발언을 열심히 했는데 점수가 왜 B학점이냐고 묻는 경쟁적이고 인간미라고는 없는 사회가 된 거에요. 그런 일본을 떠나 한국에 오게 됐을 때에는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일본에 있는 저의 동료들도 한국 학생들을 좋아해요. 태도가 좋다고. 그래서 우스개로 “한국처럼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해요. 군대 덕분에 사람 된다고 말이에요.

연세대 인문학부에서는 30퍼센트 이상은 A학점을 주지 못해요. 컴퓨터와 권력의 결부, 결합관계가 일본보다 여기가 더 강하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일본에는 원호가 있어요. 시대를 구분해주는. 근데 저 뿐 아니라 일본에서 천황의 원호를 안써요. 군국주의, 천황제도가 부정당했는데, 이제 80년대 말부터 그것을 사용하라 강요받아 거의 그렇게 써요. 저는 지금 서기를 쓰는데 인정을 못받아요. IT와 전근대적인 연호가 결합한 거죠. 아주 면밀하게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관리하는 것이 이 시대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교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한 마디로 저는 ‘신자유주의 전체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시대는 ‘나’가 없어요. 완전히 억압되고 부정당해요. 주체가 아예 없는 사회지요. 그런 사회에서 ‘우리’, 감히 이야기하자면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나 여러 선생님과 함께 배우고 싶습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 막걸리나 한잔 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장소가 로스쿨이라는 곳인데 제가 30년 가까이 법과대학에 있으면서도 여기는 처음 왔습니다. 지난 해 하반기에 저는 소속을 법과대학에서 교양학부로 옮겼는데요. 이렇게 생긴 장소가 교양을 얘기할 수 있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교실은 처음 봅니다.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컴퓨터 화면에 딱 잡히네요. 로스쿨 하는 데 이런 게 왜 필요한 지 모르겠습니다. CCTV라는 것이 정말 기분 나쁜, 감시사회의 상징 같은 건데요. 이 교양없는 사회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법대를 떠난 이유가 법대가 교양없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교양 때문에 모이셨는데 다시 와도 정말 교양 없는 곳이네요. 이런 분위기는, 바로 한국, 일본, 미국.. 바로 글로벌리제이션을 운운하는 세계 전체의 분위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학생들이 잘가는 막걸리집에 가는 것이 훨씬 더 교양스럽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서경식 선생님께서 ‘파트너’라는 말을 쓰셨는데요. 파트너라고 말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궁금했습니다. 파트너라는 말을 저도 오늘 한 번 써보겠습니다. 저의 파트너 왈, 제가 오늘 양복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왜 갑자기 양복을 찾느냐고 하는 겁니다. 서경식 선생님이 오셔서 교양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제 파트너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교양 없는 사람이…”라며 피식 웃었어요. 그 사람도 매일 먹고 노는 정말 교양 없는 여자가 감히 교양학부 교수인 저를 교양이 없다고 놀리다니요. “야, 무슨 소리냐. 내가 명색이 교양학부 선생인데…”라고 반박했죠. 집사람의 교양론은, “인간이 상식이 있어야 하는데 너는 상식이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학교 연구실에 가서 입고 다니는 옷이나, 집에 와서 잠자는 옷이나, 밭에 가서 일하는 옷이나 구분도 안되고, 목욕도 안하지, 세수도 안하지, 이발도 잘 안하지, 어떻게 교양 있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시대별로 상황별로 교양이라는 말은 쓰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서선생님도 한국에서 교양이 있느니, 없느니 그리고 일본에서 교양에 대한 냉소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하셨지만 서양사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17~18세기 독일 같은 나라에서 괴테가 교양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는 좀 긍정적인 의미였는 지 모르겠지만 19세기 오면서 망해가는 귀족, 신흥 부르주아 계층들이 재산과 교양이라고 하는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교양이라는 말을 썼지요. 그런 생각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많은 비판 받았다는 것을 예술작품 통해 볼 수 있고요. 교양인이라는 인간이 갖는 속성에 대한 비판은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를 막론하고 있는 듯 합니다.

서경식 선생님과 김상봉 선생님의 대담에 보면 김상봉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한국의 전통사회에 시·서·화, 유교의 논어·맹자 이런 것을 열심히 읽었던 선배들은 교양이 있었다, 교양인이었다고 얘기하시는 것 같더군요. 다른 부분은 다 마음에 들었는데 그 부분이 저는 좀 별로였어요. 사실 꽤 정확히 읽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생각하기를 지금 육법을 다룬다고 하는 법대 교수나, 시서화를 다룬 선비나 모두 입신양명을 위해, 권력에 빌붙기 위해서 한 것인데 그것을 무슨 교양이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외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예컨대 허균 선생 같은. 그러나 과연 조선시대, 동양에서 동양철학이라고 하는 것에, 그것을 공부한 사람들이 과연 교양인이었느냐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재목, 한홍구 선생님이 욕하시겠지만,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의 교양 문제,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 제일 교양없는 인간인데, 그리고 장관 조무래기들. 그야말로 무교양의 극치이죠. 어떻게 교양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어요? ‘스페셜리스트’ 얘기를 하셨지만,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이명박까지 교양이 없어서 저 모양이다, 대한민국이 이렇다, 교양이 없어서 일본이 저렇게 됐다고까지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식인이라는 말을 저 자신에 대해서도 쓴 적이 없고,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지금도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지식인이든, 교양인이든, 지성인이든 뭐든 간에.

저까지 포함해서 우리 시대에 과연 교양이 있는가, 지성이 있는가 물으면 정말, 죄송하게도 한홍구 선생님을 제외하고, 저 자신도 그렇고, 제가 보기에도 전문인으로서의 대학교수, 언론인, 종교인 등 모조리 스페셜리스트, 프로페서라고 하는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곳이죠. 전문가만큼 반교양적이고, 교양을 망치는 것은 없다고 봐요. 전문성은 교양의 반대말이에요. 대한민국은 옛날부터 전문가가 다스리는 사회였어요. 양반이고, 고시 합격한 전문가도 대학교수도 우리 시대의 교양에 대해 얘기할 입장이 안되지요. 하여간 교양이 없다는 말 외엔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드릴 말씀은 대학교육인데. 6개월 전에 교양학부로 옮겼어요. 30년 남짓 공부한 법대를 떠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교양과목이라는 게 모조리 60~70 개 되는 전공학과가 관리하는, 전공학문을 좀 쉽게 가르치는 과목들이에요. 영남대학만 그런가 싶어서 잘 나간다는 서울대, 연대, 고대 커리큘럼을 다 수집했는데 모조리 그래요. 대한민국의 대학에는 교양교육이 없어요. 말만 교양이지 교양교육의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모든 과목들은 이른바 전공학과라는 곳에 전공학문의 개설서 수준의 것으로 하고 있어요. 과목 이름을 바꾸는 것도 유행해서 옛날에는 철학개론인데, 지금은 사상의 교육, 인간의 이해 이렇게 말만 바꿔서 하고 있어요. 초·중·고는 암기교육만 하다가 대학에서 교양교육을 처음 하는데, 문제는 나를 포함한 교수들이 교양이 없어요. 내가 말하는 교양이란 이른바 전문의 벽에 분리돼 있는, 전문가에 의해 망쳐진 세상을 조금은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조금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볼 수 있는 교양이 좀 있어야 하는데….

일본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은 조금 달라요. 제가 법과대학을 그만 둔 이유는, 하도 우리 법대생들이 교양이 없다고 생각해서 ‘법과 예술’이라는 과목을 10년 전에 시작했어요. ‘법과 문학’ ‘법과 미술’ 하니까 문과대학, 미술대학에서 들고 일어나요. 자기 학과 전공을 침해하는 교양 과목을 만들려고 하면 절대 안됩니다. ‘커뮤니케이션 윤리’를 만들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철학과에서 들고 일어나요. 이번 학기 들어 교양과목을 하나 만들려고 ‘사상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이름을 붙여보니 온 과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결국 타이틀을 ‘위대한 인류의 조상’으로 했어요. 이 교양과목은 미 콜롬비아대에서 교양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까지 상세하게 붙여줬어요.

‘법과 예술’이라는 과목은 제가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강의하고 돌아오니 없어졌어요. 사법시험과 아무 관계 없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그 과목을 법을 아는 3~4학년을 대상으로 개설했어요. 여러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법 문제, 재판 문제를 다룰 생각이었죠. 문학 작품이나 음악이나 오페라, 미술 작품을 통해 법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를 법대생들에게 교육하려 했는데…. 결국 일반교양으로 해서 법도 모르고, 예술도 모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10년 가량 가르쳤어요. 로스쿨 한다고 또 시끌벅적해요. 저는 반대론자인데, 교육부에서 나온 지침에도 ‘법과 예술’이라는 과목이 선진적인 모델이라고 들어있는데 제가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또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대한민국의 몇 개 대학에 전화해 법과 예술 강의를 허용하는 대학있으면 나를 불러주라 가려니까 또 여기서 붙잡아서 결국 영남대에 머무르게 됐어요.

적어도 기본적으로, 교양 교육이라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이에요. 입문, 개론 수준이 아닌 여러 각도에서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이라든가 뭔가를 통해서 인식을 넓혀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학제적 연관성을 갖고 있는 과목이 거의 없어요. 서울대, 연·고대도 마찬가지예요. 교양 교육의 문제점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학교 교양학부라는 것은, 성공회대는 어떻게 하는 지 모르겠는데, 교양교육기초대학에 자율학부라는 게 있어요. 교양도 늘리고, 자율도 늘리겠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건 진짜 타율학부예요. 교육부에서 입학정원을 줄이라고 하니까 자율학부라는 말도 안되는 과를 만들어놓고 특정 전공학부에 못가는 학생들만 전부 몰려와서 입학은 했지만, 점수 떨어지는 친구들이 와서 1년 정도 있다가 원하는 대학에 가려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율성과는 전혀 관련 없는 그런 과가 됐죠. 서선생님이 계시는 도쿄경제대에서 새로운 교양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시작됐는지 꼭 좀 듣고 싶어요. 이래저래 여러 군데 찾아다니며 호소도 해보고, 하소연도 해봤는데 도저히 전공학과가 지배하는 체제 하에서는….

저는 한 가지 사명감이 있는데, 교양학부에서 전공학과의 입김을 없애는 문제입니다. 영문과든 법과든, 자기들 전공의 입문 수준을 어떻게 교양으로 요구할 수 있는가. 지금 교양학부에 교수가 저 혼자 밖에 없어요. 저 혼자 600~700명의 영남대 교수들과 싸워야 하는데, 교양과목 만큼은 전문가가 물러나라고 하고 싶어요. 눈물을 머금고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는데,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았어요. 서경식 선생님의 학교에는 전공학과 교수들의 저항이 없었는지 묻고 싶어요.

서양의 교양의 개념의 변천사 그런 걸 말씀드릴 틈도 없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구 귀족이 몰락하면서 신흥부르주아가 탄생한 가운데 재산과 교양이라는 것을 구 귀족을 대신하는 가치관으로 이맛짝에 붙인 게 교양입니다. 그게 일본을 통해 왜곡된 형태로 들어왔죠. 더더구나 식민지 현실에서, 특히 입신양명을 유일한 이상으로 삼는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이후 우리나라에 대학교육도 마찬가지로 양반 찌꺼기가 다 모여있는 그런 교육이 됐죠. 서구에서 온 허구적인 레테르가 교양입니다. 20세기 와서 서양사회도 대중사회로 바뀌고 우리도 대중사회로 바뀌는 가운데 교양에 대한 멸시감도 생겨났죠. 저도 교양의 필요성이 더욱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게 아닌가 해요.

이명박 얘기를 잠깐 했지만, 지금 우리 시대 교양이라는 게 영어 잘 하는 것입니다. 혓바닥 식민지이죠. 저도 경향신문에 칼럼을 쓰는데, 2주 전 원고를 보내며 ‘영어를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고 제목을 썼는데 전혀 다른 제목을 달았더군요. ‘국어부터 제대로 사용하라’는 점잖은 제목으로. 그건 이명박을 보고 한 얘기입니다. 김대중씨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마음에 안들었던 것이 영어를 많이 썼던 것입니다. 노무현은 못하니까 안 썼겠죠. 이명박이 실용외교 한다고 하는데, 취임식 장에서는 영어를 안지껄였어요. 영어 열광, 영어 광견병 수준입니다. 그야말로 영어가 교양의 상징처럼 돼버렸어요. 전문가의 시대에 대학교육의 전문성이 가진 전횡과 함께 근대화의 파행성에 갇힌정치, 경제, 사회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 것을 타파하기 위한 교양 문제, 교양 교육의 재정립이 필요하지 않은가 해요. 우리 전통에서 꼭 찾아야 한다면 교양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제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중들입니다. 원효는 평화주의 반전론자였어요. 전통 지식인 중에 가장 서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가장 교양인, 지식인이었어요. 反전문, 反관료의 표상이죠. 고려시대까지는 그런 게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단절된 게 아닌가 해요. 더구나 일제시대 이후 우리 대학이 기형적으로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됐기 때문에 비전문 아마추어 정신, 학제적인 내용으로 비판적 시각에서 저항적인 지식인의 태도 이런 게 교양인으로서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해요.

공공성이나 이웃에 대한 관심, 세계에 대한 관심 등도 당연히 필요한 교양의 요소입니다. 지식인이 있고 없고 이 문제보다, 참 부끄러운 게 저의 파트너라는 사람이 아침에, “야, 텔레비전 보니 교수 하는 사람들 중에 진짜 돈 많은 인간들 많은데, 너는 왜 없니”라고 하더군요. 대한민국 교수들의 표상이라는 게 권력 지향적, 자본 지향적이죠. 그런 작자들이 대학 교육을 시키니 대학이 무슨 교양교육을 시킬 수 있겠어요. 공공성, 사회성, 비전문성, 반자본주의, 국제주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교양의 의미가 좀더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 볼 수 있다면 다행일 듯 합니다.



조진석=‘지식인은 무엇인가’(‘권력과 지성인’으로 국내에 번역됨)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을 보면 “지식인은 아마츄어이고 세계를 우려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두 분들의 말씀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한홍구 교수님께서 먼저, 성공회대에 교양학부가 있고 하니 말씀해 주십시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우리 학교의 교양학부 실상을 말씀드리자면 교양이 많아서도 아니고, 교양교육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의 결과도 아니고, 무소속과 같은 것입니다. 교양학부에 교수가 세 명 있습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고병헌 교수와 문학을 전공한 임규찬 교수와 저입니다. 저희는 특별히 소속한 과가 없고 해서 과를 하나 만들자고 하게 됐는데, 일본학과 중국학과가 있듯이 한국학과로 하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얼마나 좋으냐, 학교회의도 없고 그래서 한국학과를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론내렸습니다.(웃음)

영남대에서도 찾아보면 그런 분들이 몇 분은 계시지 않을까 해요. 학생이 없다보니까 스승의 날에도 우리 셋이서 모여서 밥 먹습니다. 교양학부는 그렇다고 하고, 성공회대가 교양교육을 그래도 많이 시키는 편입니다. 교양과정이란 게 있어서, 전공들도 있지만 과에서 교양과목을 꼭 개설해야 하는 식이어서 자기 영역이라고 밥그릇 싸움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영남대에 와보니 우리 학교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학교 규모도 비교가 안될 정도 크네요. 우리는 작은 대학입니다. 학생 수가 500명 정도입니다. 그래서 과목 수를 얼마만큼 현실적으로 유지하는가가 문제입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들을 게 없다는 말도 많이 했습니다. 학생 수와 과목의 내용과 방향을 생각해볼 때 비교적 좋은 교양과정을 운영해왔다고 생각했는데요. 2006년부터 과목 정리를 하며 좀 잘라 과목 수가 확 줄었습니다.

고정관념일 수 있겠지만 대학에 꼭 필요한 무슨무슨 개론 하는 것도 몇 개 있습니다. 저희는 그걸 도구과목이라 부르지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글쓰기 과목(말과 글이라는 이름의) 등입니다. 우리 학교는 인권과 평화 관련 과목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양 필수로 꼭 이수하게 합니다. 그런 것 이외에 다른 과목들은 많이 줄였어요. 이유는 돈이 많이 드니까. 강사료 많이 들고, 작은 대학에 등록금 많이 올릴 수 없고, 밥값도 올릴 수 없고. 그 점이 가슴 아프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비교적 다양한 과목을 선보였다고 생각해요. 저도 전공에 구애받지 않아요. 제 과목 중에 군대와 사회라는 게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라면 군대 갔다오고, 군대 갔다온 아버지나 남편 만나 살게 되니까요. 학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문화답사 기행도 있는데, 한 학기 내내 학생들과 놀러다니는 수업입니다. 대학의 교양과목이라면 대개 200~300명이 듣는 대규모 강의인데요, 우리는 비교적 학생 수가 50명 정도로 유지합니다. 200~300명은 학생과 가르치는 사람이 같이 교감하고, 소통할 분위기는 아니지요. 50명만 되어도 사실 불가능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15~20명은 돼야 눈 맞춰가면서 얘기라도 할 수 있는데. 교양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데는 그래도 양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양은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가가 중요합니다. 기업에서도 이미 교양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어요. 대학도 고민을 한다면 그런 쪽에 맞추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교양의 위기 또는 인문교양의 죽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도 하는데요. 교양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다른 얘기.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과의 위기이죠. 인문교양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부분 많아요. 서경식 선생님의 책처럼 굉장히 우울하고 스산한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는 독자층이 굉장히 많이 존재합니다.(웃음) 여기저기서 서선생님을 많이 초대해 무척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공계 가보면 이공계의 위기 아닙니까. 공대 쪽을 학생들이 거의 안간다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도대체 위기가 아닌 곳은 어딘가요. 아마도 있다면 돈 되는 곳이 아닌가 싶어요. 신자유주의 전체주의 시대라는 서선생님 말씀에 저도 아주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서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신 시점이 안좋았다고 봐요. 노마 필드가 일본에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를 경험하며 책을 쓰셨다면 이번에 서선생님은 일본에 돌아가면 ‘시들어가는 운동권의 나라’를 쓰셔야 하겠죠. 변화 개혁의 열정이 시들어가는 시기에 와서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88만원 세대’라고 있죠. IMF 맞고 난 후 한국사회가 엄청나게 변했어요. 저는 박사학위를 위해 오랫동안 미국에 가 있다가 외환위기가 그럭저럭 끝나간다는 99년에 돌아왔어요. 10년만에 한국사회가 정말 엄청나게 달라졌구나 느꼈어요. 그 대가를 지난 번 선거에서 톡톡히 치렀죠. 신자유주의 전체주의 시대에, 나를 죽이는 사회라는 말씀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수업시간에도 그렇지만, 한 때 질문 던져놓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게 한두번이 아니에요. 면접 때 저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학생들은 머리를 굴리며 도대체 질문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땀 뻘뻘 흘립니다. 그런 모습 보며 ‘이건 정말 할 짓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가 주체가 되어 결정하는 것, 여기에 필요한 것이 교양이고 인문학적 지식입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은 저런 말을 하는가, 왜 나를 꼬시는가 이런 의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의심이죠. 교수들은 왜 저렇게 교양은 없고, 땅만 많을까. 의심의 근거가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 의심을 해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 말입니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너무 세게 몰아부쳤어요. ‘이중기준’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놈이 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면 우리도 하면 안되죠. 한국군이 한국전쟁 때도 위안부 썼고, 그걸 같이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베트남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죠. 우리가 거리를 두고 같은 잣대를 자신에게도 들이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남만 몰아부치지 않을 수 있는 염치가 아주 중요합니다.

교양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느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많은 지식인들이 무력감에 빠져들었음을 지적하셨는데, 한국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변화가능성입니다. 한국사회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었습니다. 해방 후 당연히 친일파를 청산해야 할 때 역전패했죠. 그 때 정말 다 죽었어요. 그러나 불과 7년만에 4·19가 일어났죠. 그러다가 80년 광주에서 정말 무참하게 깨졌어요. 광주에서 정말 총소리 안들은 사람 누가 있고, 쿨쿨 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7년만에 6월 항쟁이 터졌어요. 불과 그 6개월 전만 해도 박종철이 죽을 무렵, 제가 민중신문 기자를 했는데, 신문 1면에 뉴스를 쓰려면 100명만 보여도 쓸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는 100명도 안모였어요. 6개월만에 엄청나게 변화한 거죠. 한명한명이 작게 해서 모인 것이죠. 누가 탁 치고 앞서 나가서 그렇게 된 게 아니예요. 세상이 바뀔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박종철 죽었을 때 짐작이나 했겠어요? 한국현대사에서는 그게 계속 반복돼 왔어요.

지금 젊은이들이 낙담하고 개별화 돼 있어요. 하지만 신자유주의 전체주의 시대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키워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느낄 때, 거기서 연대가 나오고, 공감이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양 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다른 사람의 불의에 대해 공감하고 아파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봐요. 엊그제 체 게바라 책을 보니 볼리비아로 떠나면서 자기 딸에게 쓴 편지에 “아파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아라”고 했어요. 저는 그럴 때에야 비로소 속지 않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좌절하지도, 쉽게 기대하지도 않고 마침내 변화시키고 마는 사람이 된다는 거죠.

한국은 독특한 사회입니다. 박홍규 선생이 유교를 부정적으로 보셨는데, 부정적인 것도 많지만 긍정 요소도 많습니다. 지식인이 지배해온 나라, 아까 서선생님은 전문가라고도 했지만, 문자를 아는 사람이 적어도 백성을 교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유교와 공산주의 사회가 독특한 점인데요. 교양이 아닌, 교화해온 사회였죠. 교양과 교화의 차이는 누가 주체냐 하는 거죠. 자기를 살찌우느냐, 타자를 살찌우느냐. 권력 가진 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 만들어내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한국형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군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고 했죠. 중·고교는 아직 공식적으로 그걸 많이 따르고 있어요. 두발검사, 복장검사가 대표적이죠.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게 좀 완화된 듯 보이지만, 권력이 국가의 군대권력에서 시장, 자본으로 넘어간 것이죠. 돈이 모든 것을 쥐는 상황입니다. 대학만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면 고3보다 더 불쌍해지는 상황입니다. 이제 고3 시절은 긴 터널의 끝이 아니라 더 긴 터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양은 노예이냐 자유인이냐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터널을 그대로 따를 것이냐, 왜 이 터널을 따라가야 하느냐 따져보는 차이입니다. 끝으로 역사 전공자로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노예의 평균 수명은 굉장히 짧았다는 것입니다. 20대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최재목 영남대 교수= 현실적인 얘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홍규 선생님이 저를 이지메하며 상당히 즐거워 하셨는데, 별도의 반론을 안하겠습니다. 타당한 말씀입니다. 저는 영남대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박선생님을 꼽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별 다른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박선생님이 법학부에서 교양학부로 옮긴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교양학부로 옮기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가르치는 석박사 과정생들 두고 가기가 부도덕한 것 같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소문이 나기도 했죠. 저는 현재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박선생님처럼 교양 얘기를 하고자 하는 분이 교양학부에서 자리를 못잡는다고 하면 대학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주변에서 들린 얘기가, 교양학부에 잘못가면 밥그릇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굶어죽을 각오하고 가라고 하더군요. 그런 게 좋은 가늠이 됩니다. 현재 전문가들은 거의 깡패 수준이기도 한데요. 전문가 속에서 교양을 얘기하고 교양을 새롭게 꿈꾼다는 것은 대학 체제에 부적응하는 지식인 난민들의 콘테이너 박스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노숙 지식인들, 지식인 부랑자의 대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 박선생님이 충분히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면 왜 그런가. 전공 전문가 집단의 폭력이라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환자 개인이 의사 집단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잘 알 겁니다. 지식인이 얼마나 자기 합리화, 자기 변명을 잘 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대항해 싸운다는 것 역시 바보같은 짓입니다. 저는 이따금 교양교육을 위해서는 대학 내 권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교양교육 정상화는 학과 전공 체제가 해체돼야 가능합니다. 정말 죽어서, 정말 교양이란 게 뭔가 이걸 프리하게 생각하는 시점이 오지 않고, 어떤 구조조정이나 권력의 재편이 돼서는 안됩니다. 칸트 왈, 누구 왈, ‘구라’들이 논리 논증하는 게 현재 지식인 집단입니다. 카더라 지식인이 모인 집단이 대학입니다. 에세이도 못쓰고, 자기 얘기 없는 곳이 우리 대학입니다. 지식 불구들이 모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 아닙니다. 제가 언론에 있으면서 글을 좀 써달라고 하면 못쓴다고 합니다. 칼럼을 못씁니다. 자기 얘기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야기 좀 해보자며 팔을 붙들고 해도 안됩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박선생이 그걸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는 소피아, 지혜라는 것과 스킬 교육이 엄밀하게 구분되고, 층위를 달리 해야 할 때입니다. 기능이 중심이 되는 때에 지식, 진리 그 자체를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대화가 안되죠. 소피아는 어떻게 추구되야 하는가 다시 물어져야 할 때입니다. 아마 박선생님은 계속 떠들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떠들다가, 콘테이너 박스에 아무도 안가면 혼자서라도 지키고 계실 분이 아닌가 합니다. 교양이 제대로 되려면 바깥 풍경과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작은 토대들이 제도나 권력을 떠나서 그런 메커니즘을 벗어나서 자기 이야기, 자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지 않겠나 합니다. 박홍규 선생의 십자가, 저도 돕겠습니다.

조진석= 교양교육 불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데, 저는 인디고 서원에서 그런 고민을 어떻게 현실화 시키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와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허아람 선생님?



허아람 인디고서원 대표= 최재목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저희 인디고서원의 ‘주제와 변주’에 초대해서 저희와 함께 자리를 가졌습니다. 한홍구, 박홍규 선생님 두 분을 뵌 지 2~3년 지났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내면화된 자율성, 주체성을 도모했는데 두 분의 얘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네요. 발표가 별로 재미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경식 선생님의 ‘교양,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책을 읽고 지난 7월에 아주 열심히 토론했는데, 오늘 하신 말씀은 그 때와 같은 이야기라 재미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오늘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제가 듣기로는 그동안 앞에 있는 분은 교양교육의 비관적인 시사를 주셨는데 저는 교양교육의 지향을 알려드리고, 제가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을 보여드리면 도전이 될 것 같아요. 저 밖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네요. 제가 말하겠습니다.



인디고 서원이 걸어온 길을 들려드리는 것이 희망의 증거가 될 듯 합니다. 경향신문에서 서경식 선생님 인터뷰를 하며 한국이 30년 전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주제를 다루셨는데요. 인디고 서원에 대해 난 기사 중에는 “충실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싶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안다뤄주시는 것을 보니 경향은 좀 불공평한 듯 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 곳에 모여 교양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숨쉬기 위해 쉬고,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고, 호기심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자체가 우리 삶 그 자체입니다. 교양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교양이 왜 필요한가의 물음도 결국 우리 삶 자체를 위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교양 역시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교양도 삶 자체이기에 뭘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인들이 자발적인 공동체로 모여서 자유롭게 사는 훌륭한 공동체가 인디고 서원이라고 생각해요.

인디고 서원은 부산 광안리 남천동에 있습니다. 이제 문을 연 지 4년 밖에 안된 인디고서원이 국제적 행사를 개최합니다. 최재목 선생님께서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씀하셨는데, 제도의 개편에도 본질적인 목표 성취하기 위해서는 가장 본질적인 수단으로 가야 할 듯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수단과 방법은 비본질적으로 가도 좋다는 식으로 근·현대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이 모양이죠.

인디고 서원은 아프리카와 호주를 끝으로 지난 1년간 전세계 6대륙을 돌았어요. 그렇게 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내면성, 자유, 상상력, 본질적인 모습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었어요. 6대륙을 돌며 저희가 지정한 6개 카테고리, 문학 ,역사, 철학, 예술, 생태 환경 등 분야의 45명의 초청인들을 선정하고 호주 멜버른 대학의 피터 싱어 교수를 만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프로젝트를 종료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누군가에게로 받았어요. "이런 프로젝트를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냥 자다 일어났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그러듯이 우연이었다고. 어떤 타이틀을 위해서가 아니고 가장 본질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달려 왔어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대화하는 것이 6대륙의 지식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두 분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면서 저희 프로젝트에 대해서 소개하려 해요.

이번에 한국에 오는 분들 중에 두 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선 마크 오너라는 남아공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흑인 청소년 한 사람이 굉장히 빽빽하게 노트를 기록한 것을 보았어요. “왜 이렇게 열심히 적었니?”라고 물었더니 자기 마을에 글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자기가 잘 기록해 자신이 전하기 위해라고 하더랍니다. 마크 오너가 이 소년의 하는 말을 듣고 “내가 이 일을 도와야겠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는 아프리카 전역의 청소년들을 위해 세계 과학자들 모아 교과서 만들어 그 교과서를 무료로 배포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안을 제시할 때, 대학의 교양교육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 선생님들이 대학 교양 교육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다루고자 할 때, 하소연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작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실천하는 이 지점부터 시작됩니다.

콜롬비아 카르테헤나에도 갔습니다. 여기는 KBS에서 동행하고 취재해 방송되었는데 여기 있는 선생님들도 보시면 좋겠어요. 알바로 선생님이라는 무용가인데,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빌리더라도 정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약 중독으로 찌든 아이를 ‘몸의 학교’를 통해, 무용으로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전, 가난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 그 지역에서 몸의 학교라는 곳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고 인간의 존엄을 표현하는 예술 수단을 이용해 나가는 것 보고 우리의 처지와 환경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열악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어 병을 들어버린 거죠. ‘춤의 혁명’으로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친구들을 볼 때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의 본질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것을 여러분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공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간에 대한 것인데요. 근대에서 인간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게 180년 밖에 안됩니다. 그 전에 동아시아에서는 人이라는 말이 쓰였죠. 레비나스 선생님을 모셔서, 타자에 대한 개념을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타자성, 타자에 대한 사유, 타자에 대한 배려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돼야 하는 게 자율성, 자기 주체성, 나를 살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좋은 것을 정립하지 않고는 타자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저희가 지금 레비나스 철학을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대륙을 돌아다니며, 삶의 일상성으로부터 너무나 본질적인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모셔서 인간성을 되찾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 내면에 대한 성찰, 타자에 대한 감정 이입, 윤리적인 관계. 대한민국 공교육이라는 적과 뜨겁게 싸우면서, 비판이 아니라 희망을 가끼이 두고 제시하는 게 인디고 서원입니다. 희망을 가까이 두시고, 불만을 내뱉는 담론이 아니라, 희망을 제시하는 그런 좋은 어른들과 연대하고 싶은 생각이 다시 들었었습니다. 청소년들의 현장을 보여드리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조진석= 서경식과 함께 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최근 주제로 ‘희망’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런 얘기를 할 만한 자리가 많이 없었습니다. 3월에 서선생님이 일본으로 가시면 그 모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와 그 얘기를 나눌 분들이 한국에 안계실 것인가. 이번 자리는 2월까지 희망이라는 주제를 끝으로 한 모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것입니다. 큰 범위로는 우리 얘기의 주제는 교양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하면 돌파할 수 있는가. 본질적인 지식인라는 것이 교양 속에 담겨 있지 않은가. 현재 교양이란 무엇인가, 이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희망이 있는 듯 하지만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을 이겨낼 수 있을까에 대해 다른 참석자 여러분들과 얘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인디고 서원 박용준 팀장= 지식인 집단과 대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지식인과 대중의 실천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예전에 인터뷰할 때와 지금 모습은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토양 위에서 실천을 하고 있는가 묻게 됩니다. 책을 쓴다든지, 토론한다든지 하는 것인데. 사실 모든 변화는 현실적인 실천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듯 합니다. 책을 쓰고 여러 방식으로 사유를 촉발하고, 실천이 일어나기까지 나의 동기부여로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무력감이 느껴집니다. 과연 서경식, 한홍구, 박홍규 선생님이 자신이 속한 일상 속에서 어떤 실천들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소소한 실천들까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선상에 놓일 수 있는 것 아닌지요.

조진석= 이 질문을 박홍규 선생님께 돌려드리자면, 대학교수 자리에 30년 가까이 계셨는데, 걷어차고 인디고 서원에 가셔서 공부하시는 게 오히려 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가능성을 보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재목= 아까 괜히 박선생님의 누를 끼칠까 싶어서 말을 안했는데, 허아람 선생님이 제가 권력을 이용한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인 듯 합니다. 제도 시스템을 활용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교양과정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위원회를 몇 번 거치고 본회의, 그리고 최종결정까지는 상당히 걸립니다. 정말 양식있는 총장이 있어서, 교양교육이 왜 필요한가 하는 마인드가 확실히 있는 경우에는 그나마 조금 쉽습니다. 제가 권력을 악용하자는 나쁜 놈은 아니고 그런 뜻에서 한 말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서 첨언합니다.

허아람= 결국 우리가 정권에 곤두세우는 이유가 뭡니까. 개인의 삶을 정책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 정책이 우리 모든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시스템입니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인데, 그 상식이 안통하는 사회에서 교양을 얘기한다는 것이 역설적입니다. 권력이나 제도로서 이용하는 차원이 아니고, 패스하는 정도로서가 아니라, 문제가 있다고 모두 공감하면서도 그 안에서 하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오래 걸립니다. 작은 시도라도 굉장히 근본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저항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에 굉장히 깊게 공감합니다.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해 실감하지 않는 무감각한 사람들이 우리 정책을 그렇게 몰아가도록 하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박홍규= 지난 가을에 법학과를 그만두고 교양학부로 옮겼을 때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선생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좀 해볼 수 있을까 방황해왔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의 파트너 말따나, 왜 대학에 안온하게 앉아서 헛소리나 하고 변혁을 위한 실천을 못하고 있느냐는 거죠. 어렸을 때 제가 나이 든 분들에게 했던 말을 제가 나이 들어서 똑같이 듣고 나니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지난 가을에도, 조진석 선생 말씀대로 교수 일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보자는 고민을 수 없이 했는데 이렇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20~30년 계속 후회만 하고 방황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저로서는 교양학부로 옮겨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능력에 맞는 것이라고 봅니다.

서경식= 저는 일단 지식인이라는 말을 쓴 이유가 지식인과 대중을 구별하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지식인은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혼자서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 지식인입니다. 저는 재일조선인이니까, 일본에서도, 여기서도 마찬가지지만 항상 주변화된 소수자로 살아왔습니다. 일본에서도 우연히 대학 교수가 됐는데, 너에게 일상생활 속의 실천이 뭐냐 묻는다면 글쓰기야 말로 일상 속의 실천이다 이렇게 말씀드려야 할 듯 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임용됐을 때 나이가 50이었는데. 그때 처음 조직생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직의 관점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노동조합원이 되고. 연금이나 보험이나 전부 다 학교에서 전부 대주고, 얼마나 살기 쉽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다들 갇혀 있구나 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런 틀을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낙오할 수 밖에 없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어요. 저는 나이 50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잘 압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대다수는 비정규직, 여성, 외국인 등 거의 주변화된 양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집단성, 대중으로 산다는 것은, 대중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외로움을 대가로 자유로운 판단의 대가로 외로움을 택한 것입니다. 이제서야 생각한 게 아니라 계속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박홍규 선생님이 도쿄경제대에 왜 이런 교양 프로그램이 생겼느냐 하셨는데, 제가 들어가기 전에 도쿄경제대에 차별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유학 온 여성 학생에게 일본 남성이 차별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아야!” 소리가 났을 때 남자가 이상한 소리를 낸다며 농담으로 시작해, 점점 갈등이 고조돼 “너는 매춘부냐, 얼마냐”라는 소리까지 했습니다. 여자가 화를 냈죠. 한국 남자 학생이 그 일본 남학생을 때렸어요. 제가 임용되기 전 일인데요. 이 일본 학생이 자신은 폭력의 피해자라며 한국 학생을 고소했습니다. 이 일을 보며 일부 동료 교수들이 법학만 가르치고 사회에 보내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우리가 조금씩 교양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저를 초빙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박사학위도 없고, 대학원도 안갔어요. 그런 사람을 임용하는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이 일본에 남아있었어요.

7~8년 전 저를 임용한 사람들은 아주 소수파입니다. 저를 임용한 것에도 여러 가지 중복된 이중적 사고 방식이 있죠. 조금이라도 다른 특색을 내고 학생을 많이 모집할 수 있도록, 교양도 하나의 상품적 가치 선전이 될 수 있는 거죠. 재일조선인을 임용하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가 선전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게 별로 신기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원래 그런 상황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여기서도 그렇게 살 뿐입니다. 물론 대학교수라는 기득권이 됐으니까 비판도 받아야겠지요.

집단성과 달리, 저를 성찰하는 기준이 저에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의 가족관계도 하나의 척도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미국 대학의 교수였던 것이. 그 순간 순간 자신의 친구가 있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니라 멀리 외국에 지금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서 잘 싸우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 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디고 서원이 어떻게 하고 계신 지 모르겠지만 한국사회에 공동체적인 것이 벌어지고 있다고 할 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엄격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일상적 실천이 벌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에도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저는 그런 걸 좀 느꼈습니다.

조진석= 21세기 교양프로그램 얘기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현실에서 쓰이는 교양개념 자체가 모순 투성이고 다른 생각 가진 교수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까, 경기장에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 있는 현장이 그렇습니다.

인디고서원 일꾼 한지섭= 훌륭한 선생님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지식인과 교양에 대해. 교수님들이 현실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잘 알겠는데 그러면 저희는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생 친구에게 “야 니 행복하나” 물으니 “불행해요”라고 해요. “왜 불행한데?” 물으니 “학원가야 되고, 학교가야 되니까”라고 해요. 그 중학생이 하는 말이 “안봐도 비디오쟎아요”래요. 인디고서원 하면서 관심의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너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는데요. 친구들에게 “교양 뭐 신청할래?” 하면 “학점 잘 받는 것” 한대요. 스키, 수영... 학원 가면 5만원 내면 한달 내내 들을 수 있는 과목을 듣는대요. 모든 게 관심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 지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10년 후 안봐도 비디오인 것을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수님들이 힘드신 점, 아프신 점, 고달프신 점 다 들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떡하라고?”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존경하는 교양인을 한 분 정도씩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한홍구= 제가 늙었다는 생각 많이 하게 됩니다. 눈이 침침해서 잘 안보이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눈 앞이 캄캄해지니까요.(웃음) 그런 질문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바로 자기자신이죠. 그거 어쩌라고. 당할 사람도 자기고, 헤쳐나가고, 싸울 사람도 자기입니다. 승리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변화되죠. 내가 그걸 볼 수 있을 지는 딴 문제이지만. 역사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 답을 갖고 있다면 거기서도 자기의 선택 문제입니다. 지금 질문한 분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갔고,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고, 인디고를 선택했지요. 인디고가 굉장히 훌륭한 모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행복함을 느끼면서 다른 친구들을 끌어들이는 장을 만들고, 일단 확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런 작업을 어떻게 다른 지역에서도 할 수 있을까 하는. 부산에서는 했는데, 서울에서는 이런 식이 불가능할까, 대구에서 광주에서는? 주제가 있다면 변주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문제를 찾는 데서 여러 군데를 다니는 경우도 많겠지만, 특히 사회과학 쪽에서 그렇죠. 서구의 대가다, 제3세계의 누구다, 모셔다 놓고, 어쩌라구요? 그 사람들도 이 곳의 현실은 알 도리가 없는데. 저도 청소년을 위한 역사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는데 그건 내 입장에서 하는 얘기이고, 청소년 입장에서는 다른 문제입니다. 힌트를 얻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기성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줄 수 있는 답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자기가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네가 부딪힌 세상이 이런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얘기해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거기서 결단하고, 행동하고, 연대하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 교양이라는 부분이 나와 타인의 문제, 공익과 사익의 문제를 너무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 합니다. 내가 있어야 남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다고 했는데. 한국사회가 너무 자기이익을 추구한다, 국익만을 따진다고 하죠. 그런 데서 문제가 비롯되는 것은 맞고 비판해야 하는데, 사익의 추구가 과연 나쁜 것인가 물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게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측면 있다고 봅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사익의 추구가 정말 나쁜 것이고, 어떤 지점에서는 나의 사익 추구 싸움이 우리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인가.

비정규직의 사익을 건 싸움은 우리 사회의 공익과 맞닿은 부분이 있죠. 돈 많은 사람이 사익 계속 추구하면 땅 늘리고 하는 그런 것은 아니겠죠. 사익과 공익의 연결점이 어디겠는가.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로 제도화시켜나가는가, 꿈꾸고, 도전하고, 싸워서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질 것입니다. 싸움이라는 게 하고 싶어서 할까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죠. 그런 부분에 있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감을 못하고 있는가 하면, 원산 총파업 때 강주영이라는 여성이 을밀대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펼쳤다고 하는데, 그 높이는 지금으로 치면 몇 미터 되지도 않아요. 그런데 요즘은 120m 크레인 위에 올라가 70여일 농성을 해도 어디에도 기사 한 줄 안나오는 세상이 됐어요. 옛날에는 을밀대 가지고 대서특필했는데요.

저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선한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은 저 사람이 저기 올라가 있지만, 내일은 내가 120미터 저기 올라가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저 사람의 고통,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 그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찾고 그 사람들과 무얼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에는 대학에서 그런 걸 기대했죠. 70년대만 놓고 봐도, 저는 지금 우리 사회가 진보했고, 민주화됐다고 생각해요. 올해는 제가 대학에 입학한 지 꼭 30년 되는 해입니다. 자꾸 저의 대학교 1학년 때와 비교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제 주변에 장관 아들도 있었고, 재벌집 자식도 있었어요. 그런 애들도 그렇게 내놓고 말하지는 못했어요. 이 문제는 우리가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파이를 키워서 문제를 풀자는 생각인데, 지금 파이는 초코파이에서 카페트만하게 커졌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걸 왜 푸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요.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도 없고, 무능한 사람들은 도태되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생각 공공연하게 퍼져 있어요.

베트남에 파병할 때, 다리 같은 걸 놓을 수도 있고, 돈도 생기는 데 그 때는 차마 그걸 드러내놓고는 얘기 못하겠다고 했어요. 지금은 이라크니 뭐니 당연히 국익으로 얘기하는 사회죠. 과연 어떤 사회가 더 교양있는 사회인가요. 이익에 대한 추구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문제예요.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한나라당에도, 뉴라이트에도 가 있고, 민주당에 들어가 이상해진 사람들도 많죠. 세상의 변혁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을 버려야만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자기 이익을 추구하되 어떻게 공익과 결합할 수 있을 것인가를 다그쳐야 이 사회가 피곤해지지 않고 사회 진보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진석= 박홍규 선생님과 서경식 선생님 두 분이 루신, 사이드, 고흐 등 공통된 인물에 대해 얘기하신 게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거기에다 교양에 대해 얘기하신 부분도 비슷해서, 친구로서 만나고 싶어하신 게 아닌가요. 아까 교양인을 추천해 달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박홍규= 모범적인 교양인?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딱 한 가지 이유가 아닙니다. 빈센트 반 고흐, 에드워드 사이드, 루신 등을 교양인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고, 이 분들이 학제적, 종합적 지식을 보여준 적도 없어요. 고흐를 그렇게 얘기한다면 우스개같은 얘기이죠. 어떤 인물을 전형적인 교양인으로 꼽을 수 있느냐. 제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들 얘기를 해왔을 뿐이죠. 그래도 한 사람을 꼽는다면 사이드입니다.

사이드가 자신이 교양인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어요. 교양을 비판했죠. 리버럴 아츠 차원의 교양 말입니다. 사이드는 그리스 로마 이후 고대 정전에 기반한 미국의 리버럴 아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어요. 서구 오리엔탈리즘적 지식체계, 예술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었죠. 서구 고전들이 갖는 보편성, 그런 걸 대단히 중시한 사람을 무시할 수 없어요. 사이드 자신이 가장 진지하게 진실을 추구했던 지식인의 모습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교양인이라는 차원에서는 어떨 지 모르겠어요. 뭐 꼭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다 빈치를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우리 사회에서는 대표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죠. 찰스 퍼시 스노의 ‘두 개의 문화’ 얘기에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을 교양인이라 보지 않아요.

학제적, 가교적, 경계 허무는. 다 빈치가 그림 그리고 비행기를 설계했다고요? 저는 그런 점에서 신지식인 개념이라든지, 최근 기업이 요구하는 그런 교양인의 개념에 대해 대단히 비판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르네상스적인 자기 추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히 권력지향적입니다. 다 빈치는 미켈란젤로 등에 비해 훨씬 현실순응적이었어요. 미술과 과학이라는 두 가지. 다빈치 닮기, 다빈치처럼 생각하기 등 예찬론식 이야기는 교양인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더라도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교양인의 모습은 얼마든지 발견하리라 봅니다.

인디고서원의 한 학부모=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참가자 토론할 때 이야기할 주제로, 절망을 느끼는 분위기 속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시대에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요. 저는 이 자리가 굉장히 유쾌한 자리로 자리매김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다른 분들은 어떻게 길 찾기를 하는지 듣고 싶어서입니다. 많은 분들이 딱딱하게 말씀하셔서 쉽게 토론하는 자리에 풍덩 빠지는 분위기가 아닌 듯 합니다. 대학생들이 참 많은데, 희망 찾기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하시는지 말씀해주시지요. 지금보다는 좀 더 유쾌하게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최재목= 타자를 위한다는 게 쉬운 것 같아도 쉽지 않습니다. 투쟁한다, 저항한다고 하지만 이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중국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고 돼 있어요. 그게 교양이 되기도 합니다. 일률적으로 이것이 교양이다, 이대로 살아라 하는 것도 폭력적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교양을 만들어 제공해야 하는 것인지, 다양한 논의를 통해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영남대 법과대 학생= 개인이 길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개인에 달린 문제입니다. 처음에 대학에 들어와 찾은 곳이 ‘새벽을 여는 노래’라는 노래패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민중가요 노래패죠. 90년대 중반 한총련이 연세대를 때려부수는 사태 즈음해 학회가 생겨났습니다. 선배들이 생각하는 민중가요가 대학생들의 교양입니다. 민중이라고 하는 데에는 대학생이 생각하는 모든 교양이 들어있고,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군대 갔다와서 보니 학회가 없어져버렸어요. 일반 대학생이 생각했을 때 그 길은 일반 대학생이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죠. 교과과정 이상의 교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04학번 후배를 받으면서 비슷한 일을 떠올렸습니다. 네가 지식인이라면 네가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어요. 참 말도 안되는 것이죠. 저도 4학년인데, 제가 생각했던 삶을 지금 살고 있는가 물어보게 되요. 스물한살 때 스무살 후배들 앉혀놓고, 네가 사회 나가서 뭐 할거냐고 물었으니. 3~4년 뒤에 그 후배가 와서 형이 한 말 때문에 내가 생각을 해보고 많은 다른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찾아봤다고 했어요. 길이라는 게 어떤 사람의 영향 하에 자기 자신이 찾아가는 것 아닌가 해요. 교양을 얘기한다는 게 교양학부에서 가르치는 수준인가, 경제학의 이해와 같은 전공수업의 입문 수준으로 하는 것인가, 증권투자의 이해를 듣는다면 일반적인 수준에서 증권투자를 이해하는 것인가요. 이것이 과연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양인가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교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없어요. 학교에 뭔가 건의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지금 대학생에게 가르쳐야 할 교양이 무어라고 보시는지 묻고 싶어요. 교수들은 대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교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인디고서원 이소연 학생= 모두들 좀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보고 있는데 표정이 서로 좋은 영향 줬으면 좋겠어요. 교양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삶을 바라보는 태도라면, 생각해보니 왜 우리가 시대정신에 묶여야 되는가 생각하게 되요. 노예제도가 왜 생겨났고, 왜 없어지지 못했는가. 교양의 역할은 시대정신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바람직한 삶을 사는가와 연결되지요. 저의 길찾기는 배워가는 과정인데, 그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것에 대해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조진석=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할머니 옆에 서세요, 그리고 웃으세요, 사진 찍어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분들에게 웃으라는 것은 사진을 찍기 위한 것이죠. 인디고 서원이 오늘 일관되게 얘기하셔서, 저는 심각해질 때는 심각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소연= 지금 이 순간이 인디고서원 프로젝트 하면서 굉장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 순간과 끝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이순간이 굉장히 소중하다 생각해요. 매 순간 치열하게 깨어있고 싶은데 함께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조진석= 증권투자의 이해, 골프 이런 게 전부 교양에 속해 있는데. 그렇다면 교양의 방향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것을.

서경식= 일본의 학생 청년들은 자발적인 다수자입니다. 누군가 권력으로 강제한 그런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차단하고 외면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사니까. 그런데 전부 다 그렇게 되면 몰락하겠다, 전체주의 그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가르치는 교양이라는 것은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삶의 가치가 여러 개 있어요. 일류회사에 들어가는 것만 인간의 삶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도 그렇게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같이 해보면서, 가령 미술관 가거나, 아우슈비츠에 가거나 하면서 말이죠. 희망이라는 말에 대해,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같이 나누는 것이 그만이면 그만인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아왔고, 저도 그걸 가르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뭘 가르치느냐 하는 건데 저는 항상 그런 기대를 갖지 마라, 그런 걸 믿지 마라고 해요. 노신의 마지막에 죽음이라고, 7개 유언이라는 게 남에게서 주어지는 것을 기대하지 마라고 해요. 평생 그렇게 살다 죽고 만 사람이 있었다. 그런 얘기 밖에 할 수 없겠네요.

영남대대 법학부 학생2= 박홍규 교수의 인턴 조교입니다. 교양에 있어 현재 상태 내지는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매실을 보면 침이 고이는데 그거와 비슷하게 일제 시대 일어난 수많은 농민운동, 지금의 수많은 파업들이 있죠. 저는 농민들이 독립을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지 않고, 파업하는 사람들도 노사화합을 위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한 것일 테지요. 선생님들이 하셔야 될 것은 그 목표, 교양이라는 것에서 달콤한 사탕, 방향을 제시해준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박선생님은 여러 책을 쓰시고 서경식 선생님도 강연을 많이 하시는데요. 바뀌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크다고도 보지 않아요. 달콤한 사탕을 제시해주고 그 다음에는 사회의 자정 작용에 맡길 수는 없을지...

허아람= 노예가 될 가능성이 많은 학생이군요. 이상적인 스승이 있다면 그걸 따라가려고 하는 건가요?

학생2= 자만은 아니지만 이상적인 생각들이 있어요. 저도 집에 가면 ‘파트너’가 있고, 자식이 있어요. 저를 위한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아이와 파트너를 위해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데요. 교양에 있어 여기 계신 대다수 참여하시는 분들이 교양이라는 이상이 이뤄졌다면 이뤄진 이상을 제시해주면 충분히 따라갈 의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조진석= 대학의 교양교육이 제도화된 채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해진 채로 하게 돼 있어요. 제도화 돼 있는 것을 따른다고 노예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걸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런 사고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교육 뿐 아니라 인생살이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노예라고까지 하신 것은 좀 심했다고 봅니다.

인천에서 온 지리 교사= 주제가 광범위하고, 공감이 갑니다. 인디고 서원에서 비판도 하셨고 저희도 공교육 현장에서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박홍규 선생님이 법과 예술을 강의하신다고 하셨는데, 강의명만으로는 그 느낌이 확 오지 않습니다. 그런 게 바로 바로 교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강의하시는 내용이 좀 궁금하기도 하고요.

박홍규= 우선 법학개론이라는 과목이 법에 대한 상식이나 천편일률적인 책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깨뜨릴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법대만이 아니라 중등학교 때 문학 사상, 고전을 읽을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해낸 강의입니다. 한 학기는 오페라를 열 몇편 골라서 봤어요. 끼워맞추면 법과 관계없는 게 없어요. 다 법 이야기입니다. 오페라에서 등장하는 사건과 삶이 법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그런 식으로 풀고. 한 학기는 소설로 했어요. 소설도 대단히 많으니까요. 법대를 다녔다가 소설가가 된 사람도 많고, 소설에도 재판, 법적 분쟁이 수없이 등장하죠. 미술도 그렇고, 시도 그렇죠. 소재가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 통해서 법대 학생들에게 작가, 화가들, 음악가들을 소개해주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법에 대한 관점을 이렇게 가졌고 하는 것을요. 제가 10년 수업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예술가가 비판적이었습니다. 법이 좋다고 하는 미친 예술가는 없죠. 저는 또 그게 좋은 거고. 미국 영화도 잘 보여주는 데, 시민참여 다루기 위해서는 미국 재판 영화를 몇 편 보면서 얘기하는 식이었죠.

인디고서원 박용준 팀장= 방금 하신 질문은 교양교육의 목적성, 결과를 낼 수 있것에 대한 가능성, 효용 등과 관련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박선생님의 대답은 한 마디로 얘기하면 법과 예술을 하는 유는 법보다 예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는 것 뿐이네요. 이 대목에서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것이 교육의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싶어요. 교육, 제도의 이름이 아니라, 향유 나눔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것이 좋겠다는 거죠. 교양이 목적성을 띠기보다 나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자신의 길찾기 등 여러가지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그걸 가르치는 게 교양이라면 그것이 과연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교양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될 수 있지 않은지요.

한홍구= 교양과 계몽이라는 것의 차이인데요.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다를 수 있다고 봐요. 가령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그 자리에 강제로 와서 어떻게 한다면 그 역시 억압이 될 테고, 재미없어질 겁니다. 그걸 흥미를 느끼면 몰입할 수도 있을 거고요. 교양이라는 것이 원래 쓸데없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쓰일 데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대개 당장은 쓸데 없는 것입니다. 성공회대에 채플이 있어요. 채플 중에 아멘 하는 곳도 있지만, 사실 굉장히 좋은 교양과목으로 돼 있는 곳도 있어요. 학생들은 그래도 싫어해요. 서경식, 박홍규 선생 모시기도 하고, 해금 연주자 불러서 조그만 연주회도 갖고 음악가와 얘기 나누면서 더할 나위없이 좋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하는데도 학생들은 그런 채플도 싫어해요. 제도화 자체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이죠.

어쩔 수 없이 그런 점도 있지만. 옛날에는 선생이 있으면 찾아가는 체제였는데, 지금은 대량화, 제도화돼 일정한 한계가 있는 거죠. 그래도 인문학에서 교양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그 정도는 해야죠. 학생들 입장에서도 듣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대학 시스템이 너무 비대해져 있고, 교수 학생들 간에 인간적 관계 내지 대화의 시간이 너무 부족한 점 등 그런 한계를 갖고 있겠죠.

서경식= 법과 예술 강의를 어떤 내용으로 하는지 흥미로웠어요. 고전은 어떤 형식으로 바꿔도 감동을 주게 돼 있어요. 그것이 고전의 힘이죠. 인간이 고뇌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교양이라고 봅니다. 실용성이 없어요. 타자에 대한 배려는 자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박교수님과 달리 반 고흐를 엄청난 지식인이라고 보고 있어요. 반고흐 전집 6권 완역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지식인 말씀을 하셨는데, 본능, 욕망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들과는 달라요. 네덜란드인이면서 영어·프랑스어도 했죠. 동생 테오와 싸웠을 때도, 7월 혁명 때도, 일본의 하세가와와는 달랐죠. 고전적인 보편적인 의미가 있어요.

고흐가 행복하게 산 사람이 아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고정 개념을 깨고, 외로워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야를 주는 게 교양입니다. 그런 교양을 바라지 않는 제도는 성공적일 수 없어요. 저 자신이 그런 시각을 갖게 되어서 겨우 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지금은 어려운 시대입니다. 눈에 잘 안보이는 전체주의에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인간적으로 살 수 있으면 됩니다. 지식인이 누군가의 입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넣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몸을 두고 있는 그 장소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해야 합니다.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는 게 교양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질문인데요, 제가 군산학공동체 얘기를 했는데. 제국주의 종주국이나 소위 선진국 얘기죠. 일제시대 생각하면 상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나라 지식인들은 국가와의 거리가 있을 거다 생각했어요. 완전히 국가에 포섭된 사회가 아닐 거다는 생각을 했어요. 임창순 선생님 같은 조선시대 서당교육, 근대적인 제도가 아닌 교양이라는 얼터너티브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했어요.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하면 서당교육이 이뤄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런 것도 교양이 있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한홍구=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고 봐요. 한국에 그래도 비판적인 지식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70~80년대 국가를 상대로 투쟁했기 때문이었죠. 어용지식인도 물론 있었고요. 한국사회가 민주화된 것을 두고, 대한민국은 약간 민주화된 사회다, 물타기형 민주화라고 하죠. 권력에다 계속 물을 부어서 한 민주화라는 거죠. 한나라당 이재오나 김문수가 실권을 갖고 있는 것이 잘 보여주죠. 이 곳이 옛날 민정당과는 다른 곳인데, 김대중, 노무현 10년을 거치며 국가와 지식인의 거리가 상당히 달라진 측면이 있어요. 노 정권 때는 굉장히 기대했다가 거리가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지만, 과거청산의 ‘판’이 벌어졌을 때 어쨌거나 했단 말이죠. 그러면서 국가와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거기서 길 잃은 지식인들이 많아졌어요. 과거 비판적 모임인 학단협, 산사연 등에서도 자기 반성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국가가 역진을 할 지 어떨 지 모르겠지만.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살아나야 할 상황이 됐는데, 70~80년대 비판적 지식인이 됐다고 해서 과연 그 때처럼 거리로 나가야 할 때인가. 아니면 무력감, 열패감에 빠질 것인가. 8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온 이후 비판적 지식인 재생산 문제는 일본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도 그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요. 과거 비판적 지식인이 이제 50대 중후반이 됐고, 학계에서는 지도적 위치에 올랐죠. 제자들을 가르치고 권위주의화해요. 선생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우리 학교는 예외적인 경우지만, 우리 학교가 우리가 학계에서 재생산 구조에서 차지하는 것은 거의 미미해요. 각 대학에 포진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단절된 부분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어요. 일본에서 우경화가 진행되며 느끼는 것과 한국과 어떤 점이 다르고, 어떤 점이 닮았는지 봐야 해요. 닮아가는 점을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어쨌거나 한국사회는 투쟁으로 극복해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죠. 이것이 발목 잡는 것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어떨 지 모르겠어요.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이 역동성이 많이 죽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는 부분이 있죠. 요는 이명박 정권이 5년을 겪으며 어떻게 대응해 나가느냐인데. 제일 심각한 문제가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입니다. 이들이 과거 운동권 세대가 소통이 안되고 거리감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말씀드리자면 작년 2월 부산에 가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KTX 종업원들이 왔어요.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돼 왔대요. 그 분들이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 큰 힘이 됐다. 굉장히 외로울 때 와서 상준다고 해서 왔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근데 박종철이 누구니?”라고 하더군요. 그게 상징적으로 잘 보여줘요. 비정규직 여성으로 첨예한 지점에서 가장 오래 싸우고 있는 그 분들이 “근데 박종철이 누구니?”라고 하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어요.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됐는지 안됐는지 의문이 드는데, 그때 싸웠던 분들은 지금 자기네들끼리 싸우는데, 이 지점에서 젊은 세대들이 갖고 있는 싸한 분위기가 있다는 거죠. 진보 세력과 88만원 세대가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이게 일본과 한국이 같은 길로 가느냐 다른 길도 있느냐 큰 분기점이 되리라고 봅니다.(정리/손제민기자)

08.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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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동자 2008-03-06 16:43   좋아요 0 | URL
이 대담 옮겨주어서 감사해요. 잘 읽고갑니다. 늘 일독하는데 처음으로 흔적 남깁니다.

로쟈 2008-03-06 22:37   좋아요 0 | URL
일독하기에 좀 길던데요.^^
 

지난 월요일에 읽고 공감했던 시사인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도서관 전문사서 양성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우석훈의 칼럼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07). 낮에 관련 전공자들과의 대화에서 이 문제가 화제에 올랐을 때 나는 스위스의 도서관 사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는데, 이 칼럼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아래 사진은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도서관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나도 '사서' 하고 싶다(서지학이 부전공 아니냐란 얘기도 듣는 만큼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자면 스위스로 이민을 가야 할까?..

시사인(08. 02. 26) 도서관에 전문 사서가 없다

얼마 전부터 신문 안 본다는 게 자랑이 된 사람이 많다. 신문사도 좀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신문이 신문다워야 볼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쨌든 사람들이 신문도 안 본다는 것은 사회의 위기이다. 그렇다면 잡지나 계간지는 보고, 책은 좀 읽는가? 다른 것도 별로 안 보는 게 우리나라 실정인 것 같다.

유럽에서 부러운 게 몇 가지 있다. 파리에서 할머니들이 아침마다 신문과 잡지를 사들고 커피 마시는 장면은 솔직히 부럽다. 더 부러운 장면은 아인슈타인이 다녔다는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볼 수 있다. 할머니들이 이 도서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다. 스웨덴과 더불어 가장 먼저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넘은 스위스에서는 흔한 장면이다.

한국에서는 책 읽고 잡지 보는 모습을 대학 도서관에서도 보기 어렵다. 그 자리를 고시 책과 취업 서적이 휩쓸고 있다. 우습지만 한국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은 스타벅스이다. 유럽에서도 일부 도시에서는 스타벅스가 성업 중이긴 한데, 정말로 신문·서적·잡지를 많이 보는 도시에서는 스타벅스에서 책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참 부러운 유럽 도서관의 책 읽는 풍경

내가 만나본 최고의 전문직 사서는 취리히에 있다. 영문학과 생물학 석사 학위를 가진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나보다 키가 큰 북구형 미인이다.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데, 뭐든지 주제어만 말하면 책을 찾아다 준다. 한국에서는 이런 전문 사서가 서울대에도 없다. 서울대 사서는 순환 보직으로 전문 사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제도를 탓해야 한다.

내가 만나본 최고의 서점 직원은 프랑스의 교보문고라 할 조셉 지베르의 직원들이다. 소르본 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책을 분류하고 관리하며, 책 파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 반면 교보문고에 가보시라. 점원에게 책 위치를 물어봤다가는 속 터진다. 당연하다. 그들은 비정규직이고, 파견직이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서로 민망스러운 일이라도 생길까 봐 말을 거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 사서와 서점의 전문 직원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 사회에 지식의 축적을 돕고 원활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지식사회의 전사이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20대 딱 1000명을 정규직 서점 직원으로 채용하고, 이들의 월급을 보조해주자. 영화서적 전문, 미술서적 전문, 음악서적 전문…, 멋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들이 일할 수 있는 지역의 전문 서점도 지정해서 지원해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잘사는 나라가 된다. 이건 큰 힘 안 들이고 바로 할 수 있는 일이며 효과도 확실하다. 10년 후, 이들이 자기 전문 영역에서 전문 서점을 1000개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게 바로 지식사회다.

최근 프랑스 책방연합회에서 <도서관 경제학>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책이 살아야 신문도 살고, 신문이 살아야 책도 산다. 그래야 전문 잡지도 산다. 여기에 좌파·우파가 있겠는가? 같이 힘써야 할 일이다. 운하에 들일 힘 100분의 1만이라도 지식 축적에 쏟았으면 좋겠다.(우석훈_성공회대 외래교수) 

08.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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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28 22:49   좋아요 0 | URL
도서관인데요.^^

2008-02-28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8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8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8-02-28 23:47   좋아요 0 | URL
흐흐 로쟈님이 사서하면 누가 대학에서 가르치나요. ^^ 저야말로 저런 사서하고 싶군요. 스위스의 저 사서들 따라잡으려면 공부 많이 해야겠지만.

로쟈 2008-02-29 00:21   좋아요 0 | URL
비정규직 강사보다야 정규직 사서가 낫지요.^^

마늘빵 2008-02-29 23:2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래요 :) 강사 급여가 좀 많이 올라가야하는데 말여요.

2008-02-29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29 00: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로스쿨처럼 문헌정보학도 대학원 과정이어야 맞다고 봅니다. 이런 건 왜 '선진화'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lectrice 2008-02-29 00:15   좋아요 0 | URL
전문 사서라...제게 딱인 직업인데. / 외국의 도서관장들은 또 어떤가요. 노장 소설가들이 도서관장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럽기 그지없더라고요. 보르헤스가 관장인 도서관이라, 생각만 해도 좋지 않습니까.

로쟈 2008-02-29 00:24   좋아요 0 | URL
'환상의 도서관'이죠.^^

바람돌이 2008-02-29 01:31   좋아요 0 | URL
학교에도 제발 전문사서를.... 학교 도서관에 사서선생님이 있는 학교가 가끔 있는데 도서관 운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몰라요. 근데 정말 사서 선생님 있는 학교는 가뭄에 콩나듯하다죠. ㅠ.ㅠ

marine 2008-02-29 12:1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책이나 제대로 찾아 줬음 좋겠어요. 책이름 말하고 찾아 달라고 하면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찾아 봤냐고 면박이나 주고, 책이 자리에 없으면 없는 걸 어쩌냐고 읽지 말라는 식으로 가 버리니, 참...

로쟈 2008-02-29 22:50   좋아요 0 | URL
개념 없는 사서로군요...

람혼 2008-02-29 15:32   좋아요 0 | URL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저도 사서직에 관심이 참 많아서, 국립/시립 도서관 사서들에게 전화까지 걸어가면서 이것저것 여쭤본 적이 있었습니다. 요는,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사서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죠.^^;(전공자가 아닌 사람은 성균관대 대학원에 있는 문헌정보학 과정을 몇 년 이수해야 사서 자격증이 나오는 것으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현장을 잘 모르는 '소박하고 무지한' 질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때는 '철학 전문 사서' 또는 '외국서적 전문 사서'도 있는가, 그런 질문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의 취지대로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죠. 그나저나 취리히 대학의 도서관 풍경은 정말 말 그대로 '환상적'이군요.^^

로쟈 2008-02-29 22:5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문헌정보학과 대학원생과 대화를 나눴던 참이었습니다.^^

열매 2008-02-29 16:36   좋아요 0 | URL
한 일년 전부터 도서관 서가 개방시간이 22시로 연장되면서 17시 이후부터는 비정규직 사서들이 연장근무 시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대학이나 대학에서 소정의 과정을 거친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없더군요.

얼마전 서울시립 도*도서관에 게시된 비정규직 사서모집 공고문을 보고 경악을 금치못했는데, 그들의 시급이 4천원상당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게시판에 '차라리 햄버거를 굽자'라는 제목으로--요즘은 고등학생들이 알바를 메우는 페스트푸드점 시급이 그정도입니다-- 그 시급의 기준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도서관 관리자는 공무원법 *조에 의한 것이라고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말더군요. 그런 경력이라도 있어야 나중에 공채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나, 채용된 2명의 여자분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로쟈 2008-02-29 22:53   좋아요 0 | URL
그 도서관 관리자는 자신의 시급 또한 '4천원'이란 생각은 안 들었나 보군요...

turk182s 2008-03-02 14:36   좋아요 0 | URL
음..한때 저도 백수때 사서직도전할라고 무진장생각만많이한적이 있는데,,그냥 도서관이 좋아서,가면 편하고 무언가 보물창고같고,근데 갈수록 동네 독서실화 되어가는 도서관을 보면 마음이 슬퍼요...우리동네도 비정규직사서를 뽑던데 저라도해볼까 했는데 이중취업이 된다네요..

로쟈 2008-03-05 22:34   좋아요 0 | URL
좀더 크고 멋진 도서관들이 많아졌으면 싶어요...
 

'디아스포라의 지식인' 서경식 교수가 2년간의 고국생활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한다(어느새 2년이 흘렀군).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기사(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960100&artid=200802261723535)의 전문을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2. 27) ‘도쿄경제대 복귀’ 서경식 성공회대 연구교수 인터뷰 전문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던 바로 그 시간, 그는 서울 창전동의 자택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무심히 커피를 따라주며 말했다. “‘시라케(しらけ)’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퇴색하다’ ‘빛이 바래다’는 뜻으로 일본에서 70년대에 유행한 말인데요. 정치에 냉소적인 70년대 학번 세대를 일컫는 말로 쓰였어요. 지금 한국사회을 보면 자꾸 그 말이 떠올라요." 그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한국사회에 환기한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다. 그는 다음 달이면 2년 간의 고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난생 처음 고국 땅에서 ‘생활’해본 그는 지금 ‘솔직한 비관주의자’의 마음이다.



2년 전 그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답답한” 일본사회를 구원해 줄 희망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를 안고 한국에 왔다. 현해탄 넘어 바라본 조국은 적어도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시켰고, 사형수였던 이가 대통령이 되고, 민주투사였던 여성이 총리가 되는,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나라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의’라는 말을 꺼내기가 왠지 모르게 좀 겸연쩍어지고, 마찬가지로 ‘지식인’이라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지는 분위기로 되어간다는 점에서 30여년 전 일본의 전철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밟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주류사회의 어느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이 바로 ‘시라케 시대’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희망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일본사회만은 닮아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한국사회는 그의 바람과 달리 어떤 경우는 일본보다 더 앞서서 신자유주의화를 향해 치닫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은 2월25일 오전 11시부터 2시간 30분동안 가진 서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손제민=오늘은 공교롭게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날인데요. 한국 생활 2년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소회가 있으시다면.

서경식= 일본사회에서 70년대에 유행했던 시라케(しらけ·빛이 바래다, 퇴색하다)라는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한국사회가 일본의 재현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시라케는 원래 “색깔이 희게 되다”라는 뜻인데, “김 빠지다” “김 새다” 그런 뜻으로 의역됩니다. 정치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고 냉소적으로 된다는 뜻이지요. 6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는 큰 서사나 큰 꿈-민주나 인간해방이나, 평등사회-을 추구하고, 대다수 학생이나 시민들이 열기에 차서 지냈지요. 64년에 도쿄 올림픽 있었고, 일본의 고도성장기이기도 했어요. 사회 전체가 열기에 차있고, 뭔가 공유된 꿈이랄까 그런 게 막연하게나마 있었어요.

지금 와서 따져보면 그 속에는 모순된 두 가지가 다 있었지요. 진짜 인간해방으로 가려고 하는 방향과 또 사회적인 상승이랄까 조금 더 잘 먹고 잘 사는 생활에 대한 욕구 이런 게 다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사회변혁의 분위기가 무너지고, ‘시라케 세대’가 나왔어요. 60년대 세대는 자신들의 아랫 세대에게 “너희들은 시라케 세대다”라고 했어요. 아랫 세대는 윗 세대의 이중성, 자기기만성을 참을 수 없었지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많이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자기정당화를 잘 하는 그런 세대라는 거죠. 그런 걸 보고 시라케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위로를 하며 그냥 조그마한 서사에 갇혀 있으면서 사생활적인 즐거움으로 살자는 분위기였죠. 이것은 훌륭하고 영웅적이며 아름다운 삶과는 다른 것이지요. 시라케 세대란 그런 것입니다.

여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문민화가 돼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대통령을 거쳐 이명박 시대에 왔는데, 지금이 바로 한국판 시라케 시대가 왔다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70년대의 민주화, 노동해방 이런 꿈들, 민족통일이라는 큰 서사에 그래도 사회의 상당한 다수자들이 가치를 공유하고 우파·보수파와 맞서 싸워왔는데 지금은 그런 대립점이 좀 애매해졌고 모두가 ‘생활 보수파’가 됐다고 할까. 그런 시대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고, 또 그대로 인정하면 자신들의 지금 나날의 생활을 정당화할 수 없으니까 이중 기준적으로 살 수 밖에 없게 됐죠. 이중기준적으로 나날의 생활을 정당화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흔히 큰 얘기를 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을 비하하며 대화에서 슬쩍 빠집니다. 자신은 그런 고민을 못한다며 그냥 소시민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며 결국 그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며 살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기득권이기도 합니다. 그게 정말 기득권이라기보다 기득권이라는 환상이기도 한데, 그런 게 생기면서 다수 사람들이 현실 타협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점이 일본과의 공통점으로 보입니다.

이번 이명박 새 대통령에 대해서도 아무도, 아마도 보수파조차도 “빛나는 꿈이 실현됐다”고 기대하지 않고, 또 단 한 사람도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성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래서 그런 시대가 왔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인데요. 일본에서 좌파 진보가 많이 잘못된 대응을 해왔습니다. 90년대 이후만 해도 20년 가까이 일본사회가 우경화·반동화 일변도로 몰락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기서 교훈을 잘 배우고, 부디 같은 길을 안 가줬으면 했는데, 이게 너무 어려워 보입니다. 분위기가 너무 일본과 유사해지는 것 같아요.

손=민주화운동세력이 기득권화 됐다는 지적은 타당한 듯 합니다. 그것이 전부였을까요.

서=옛날에 같이 싸웠던 세대는 같은 세대끼리 “너희는 변절했다”는 얘기를 잘 합니다. 그리고 아랫 세대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싸웠는데, 너희는 정치적인 의식이나 사회적인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우선 변절이라는 말은 아주 진지하게 봤을 때 진짜 변절이려면 원래 있던 소망, 이상, 주의, 이데올로기, 신념 이런 것들이 진짜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는 막연했습니다. 당시 처한 현실보다는 조금 다른 생활을 꿈꾼 정도죠. 너무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386세대에 대한 비판을 많이 들었는데, 386세대 같은 경우도 원래가 그런 급진적인 사회변혁이라기보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상태에 승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상승하고 싶은 그런 의도,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변절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미국식 자유라는 것이 기회의 자유를 말한다는 겁니다. 기회의 자유라는 말은 경쟁을 정당화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 능력 있는 사람이 이기고, 능력 없는 사람은 지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기회가 없는 상황이 부당하다는 그런 문제제기였죠. 그런 평등주의와 결과의 평등이라고 할까,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평등하다 이런 생각은 많이 다르죠. 능력이 있건 없건 피부 색이나 사회계층이나 민족이나 성별이나 그런 것에 관계 없이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살 권리가 있다는 이런 얘기와는 사뭇 다르지요. 그러나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그냥 같은 평등이라고 얘기했죠.

그런데 지금 보면 전자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친연성이 있어요. 군정 시절이나 과거 한국에서 자유가 없다, 평등이 없다고 했을 때 이런 부분들이 혼재된 채로 싸웠죠. 그 중에는 물론 사회적 약자도 있었지만,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기회가 없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후자는 신자유주의 방향으로 가는 거지요. 그것을 변절로 보기보다는, 이 사회가 다음의 어려운 차원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사람들의 변절을 비판하기 보다 이런 표면상 기회의 자유가 주어진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결과의 평등이랄까, 진짜 잘된 평등을 위해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에 대한 어려운 사고를 고민해야 하는 때가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 누구가 체제내화 되며 변절했다는 얘기를 윤리적으로 하더라도 별로 큰 소용이 없는 듯 합니다.

물론 윤리적인 수준의 논의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너는 옛날에 같이 싸웠을 때 우리와 약속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투쟁·싸움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차원에 있어서 평등을 위한, 아니면 참된 자유를 위한 싸움이 얼마나 어떻게 필요하느냐는 문제는 이런 얘기이기도 합니다. 가령 일본에서 사회가 우경화되고 있을 때 평화헌법(헌법 9조)을 지키자든가, 국기·국가 강요를 막아야 한다든가 이런 걸 외치면서 싸웠죠. 저도 그렇게 했고요. “이렇게 되면 옛날의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레토릭을 많이 썼어요.

그것이 반이 진실이긴 하지만, 전면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과 똑같은 것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옛날하고 똑같은 게 아니다, 지금 일본은 민주사회다, 정당의 자유도 있고, 의회제도 있고, 신문도 매체도 있고 하는데, 그것을 너무 과장해서 옛날 군국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것이 항상 보수파, 중간파의 논리죠. 그것이 표면상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고요. 옛날과 똑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파시즘이 여기서 벌써 시작돼 작동하는 새로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얘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에서는 일단 그런 경직화되고 단순화된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옛날 같지가 않다고 해서 안심해도 된다고 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명박이라 해도 군정시절로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한나라당이라 해도, 이 나라가 15년 동안 민주화, 시민화 돼 왔고 옛날 같이 된다는 얘기는 너무 과장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1년 전부터 대선 국면에서 계속 그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진보적인 사람들도 “진보파 중에 될 만한 후보자도 없고, 아마도 이명박이 당선될 거다” 그래요. 그러면서 “그래도 이명박이 된다 해도 옛날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옛날같이 되지는 않겠죠. 박정희 시대와 똑같은 시대가 오지는 않겠지요.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좀 의심스럽긴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아직 있으니까요. 온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논리가 아니겠지요.

옛날 같으면 개발독재적인 억압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경쟁적인 파시즘에 가깝습니다. 이 파시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국인과 외국인 그런 차별, 경계선을 갖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그 중심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 강박의식에 기반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중심에 다가가지 않으면 이 사회의 낙오자가 된다는 강박 말이지요. 일본말로는 마케구미라고 하는데요. 가치구미가 이긴 자이고, 마케구미가 진 자이죠. 그런 이분법으로 “나는 가치구미다, 너는 마케구미다” 규정하지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안하면 너는 마케구미가 된다” 사회적으로 그런 강박의식을 공유하면서, 사람들 스스로가 아까 얘기했던 시라케 세대처럼 별로 열의 없게 지금 상황을 승인하고 “아무래도 이명박으로 가지 않겠느냐” 하며 자주적으로 노예가 되는 그런 전체주의 말입니다. 신자유주의 전체주의라고나 할까 그런 상황이지요. 옛날과 똑같느냐 달라졌느냐 하면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사회가 좋아졌다, 앞으로 낙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낙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답답하네요.

손=일본에 있을 때에는 어땠습니까.

서=일본에 있으면서 더욱 답답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남들보다 여러 상황을 잘 보는 사람이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소수자니까 잘 보이지 않습니까. 더 잘 느껴지지요. 일본 사회에서 다수자들은 별로 그런 절박감이 없었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차별이나 이런 것을 우리 남자가 잘 못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일본에서 답답하게 지내면서 이 나라, 대한민국 사회를 쳐다 보았을 때는 뭐랄까 그래도 민주화 시민혁명을 스스로 이룬 사람들의 사회였습니다. 저와 비슷한 70년대 세대들이 아직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 2년을 지내다 보니까. (이 때 전화가 걸려옴. 마침 이날 경복궁 옆에 인문학 책방 ‘길담서원’을 연 박성준 교수의 안부 전화였음.)

박성준 선생님이십니다. 박선생님과 한명숙 여사가 일본에 계셨을 때가 90년대 중반이죠. 저는 그 전부터 교류가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이 교도소에서 저의 형 둘(서승, 서준식)이와 감옥 친구였습니다. 서준식 형님이 88년에 출옥했으니 그 때 내가 여기 한국 와서 박선생님 알게 됐습니다. 박선생님이 출옥하신 뒤 90년대 들어와 일본에 유학을 오셨지요. 일본에서 해방신학 또는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신부나 연구자들을 제가 소개해드리고 같이 연구하는 모임도 가졌지요.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바로 그 때 제가 여러 일본 친구들, 소위 진보파들에게 경고 비슷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더군요. 듣고는 있는데 다수자에게는 별로 절박함이 없는 거지요. 당장 낼모레 전쟁이나 터질 것 같으면 모르지만, 어제까지와 비슷한 일상생활이 계속 돼 간다고 느끼는 아주 강인한 관성이랄까 그런 게 있었어요. 심리적인 관성이죠. 그래서 조금씩조금씩 사회가 무너지고, 변화해 가고 있음에도 어느 시점에 무엇에 의거해서 저항해야 하는 지에 대한 그런 것이 전혀 갖추어질 수 없었지요. 쉽게 얘기하면 큰 회사의 사원으로 있으면 이 회사가 경영상태가 나빠져 파산 위기에 처하더라도 하급사원들은 일일이 이런 것을 걱정하지 않고, 맨날 일하고 월급 받고, 월급 조금 많아지면 좋아하고, 적어지면 실망하는 그런 식으로 살지요. 그러니까 주류라는 게 그런 겁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그렇지 않죠. 불경기를 탈라치면 잘리게 되지요. 다수자와 소수자가 그런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저는 90년대에 일본에서 한국을 보았을 때, 그래도 한국은 아주 활발한 시민운동도 있고 사회적인 활기가 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국 여성 운동계가 하던 역할은 아주 컸지요. 그걸 보면서 그래도 한국에는 희망이 있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사회 또는 일본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제 결론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그대로 몰락해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이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다시 재기,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이 이웃인 한국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억압해온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것도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 전 여기 올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무현 정권의 전반기가 막 지났을 때였지요. 노무현이 이회창과의 경쟁에서 위태롭다 했을 때, 김대중 때 그나마 있었던 민주적 변혁들이 뒤집어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래도 노무현이 당선도 되고, 나중에 탄핵 국면도 극복을 했지요. 일본에 있는 우리들에게 제일 크게 다가온 것은 노무현이 아무리 문제투성이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에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해 할 얘기를 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정부가 이 때까지는 없었지요. 군정 때는 표면상 민족주의지만 사실은 일본과 동맹관계, 친일이었지요.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물론 그랬고요. 김영삼 같은 경우도 문민화 됐다 해도 구세대니까 아주 철저히 하지 못하고 타협적이었어요.

김대중 정권 들어서며 역사 문제에 대해 조금씩 할 만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죠. 노무현의 3·1절 대통령 연설 같은 경우는 재일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줬어요. 이제 이런 얘기를 솔직히 하는 대통령이 나왔다는. 그리고 그때는 국보법 폐지가 거론돼 있던 때이기도 했지요. 여성부가 생겼고 감옥 생활을 했던 여성이 사회적으로 지도적 위치를 잡을 수 있는 사회가 됐어요.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합니다. 일본에도 민주당 당수, 사민당 당수가 여성이기는 하지만 너무 힘이 없습니다. 여당의 여성 정치인들은 한편으론 탤런트나 이런 사람들이고, 아니면 남성 정치인보다 훨씬 공격적인 우파들입니다. 여성일수록 자신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그렇게 되죠.

요즘은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와는 같은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일류대학을 나와 정치학이나 외교학으로 미국 유학을 갔던 여성 관료 같은 경우는 있긴 합니다. 그러나 한명숙씨처럼 민주화 운동을 했고, 또 여성계 대표로 일을 열심히 해왔고, 감옥생활까지 한 사람이 장관이 되고, 나중에 국무총리가 된 사회 그것은 꿈이 있지 않나요. 적어도 일본사회와 비교하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꿈들이 아주 급속히, 제가 여기 있는 동안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느낌이 듭니다. 이 사회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제가 거리가 떨어진 일본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이 사회의 리얼리티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봅니다. 뭐,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어긋남이라고 할까요, 상상했던 것과는 좀 많이 다르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환상이 깨졌다고 볼 수 있는 듯 합니다.

 

손=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지난 2년 사이 일어난 변화도 많지 않았나요.

서=지금 이 나라에서 이라크 파병에 대해 주류 사회에서는 의논조차 하지 않지요. 물론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반대해온 운동 단체가 있긴 합니다만. 그것도 일본과 비슷해요. 이런 이중성, 자기기만성, 너무나 뻔뻔스러운 현실주의라고 할까요. 3년 전인가 부시가 한국에 왔죠. 그 때가 고이즈미 정권 때인데. 일본에 먼저 왔다가 한국에 왔죠. 고이즈미 정권은 부시의 충실한 푸들이었습니다. 블레어 정권과 함께 부시 정권의 맹우였죠. 부시가 왔을 때 대환영했죠. 부시도 그걸 좋아했고. 그 때가 이라크 침공 직후였습니다. 일본에도 이라크 침공, 자위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회적으로는 빅뉴스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이즈미와 부시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그런 얘기 밖에 안했죠.

일본에서 이라크 전쟁 파병에 대한 반대시위나 그런 운동이 별로 잘 동원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거기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통제도 너무 심했어요. 일본의 시민권 차원에 봤을 때에도 지나친 과잉경비였는데, 이걸 문제 삼은 매체도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부시가 한국에 왔을 때에는 대규모 시민들의 시위에 둘러싸이고 그랬습니다. 일본에서 그런 장면을 보면서도 “아, 그래도 한국의 시민권은 살아있구나. 한국에서는 양심이 그래도 살아 있다” 이렇게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불과 한 1~2년 후 여기 와서 뭐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도 않았죠. 오히려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 없었다는 점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도 얘기를 안하고 있어요. 안하는 것보다 ‘정의’ ‘진실’이라는 가치가 공허화, 허망이 된 그런 상황이라 할까요.

부시의 이라크 침공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개인적으로 물어보면 적극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정의롭다는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요. 그러면 한국이 군대를 파병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느냐고 물으면 "그것이 정의가 아닌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죠. 그러니까 정의라는 수준으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정의롭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 목표를 위해서 또는 미국 일국 지배 하의 세계에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다른 차원의 대답을 하죠. 정의라는 척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보수파가 얘기할 때는 “어른이 됐다” “사회가 성숙했다” 이런 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이야말로 바로 시라케죠. 정의를 정의로서 얘기할 수 없는, 정의를 정의로 얘기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사회입니다.

바로 일본이 그랬어요. 정의를 정의로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사회, 정의를 들어 싸우는 사회가 한국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희망을 걸었지요. 일본은 아무리 정의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다수자들은 저에게 “서 선생님은 정의롭습니다” “선생님은 옳습니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요” 이런 식으로 항상 현실을 정당화 시키면서 결국 그 사람 자신도 주류가 되고, 주변화된 사람들을 억압하는 처지로 가요. 그건 자기정당화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에 대해 호소하는 사람들은 다 주변화된 힘이 없는 사람들 밖에 안남게 되죠. 애초 질문항목과는 조금 어긋나는 데 계속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요? (어차피 다 통하는 얘기이므로 하고 싶은 말을 해주십시오)

다카하시 데쓰야라는 도쿄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저와 대담집도 내고, 지난 10여년 간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막으려고 같이 노력해 왔습니다. 일본사회가 다카하시에게 붙인 별명이 ‘정의파’입니다. 이거 칭찬이 아니예요. 오히려 아이러니라 할까, 웃음거리로 만드는 거죠. “아, 너는 정의파다” 하는 식으로 고립화시킵니다. “너는 너무 정의니까 우리는 못따라간다” “사람이 이렇게 너무 정의로운 얘기만 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항상 외면하려고 합니다.

손=지식인들도 그런가요.

서=대중들 뿐만 아니라 학계, 지식인도 그래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물론 아주 광신적인 기독교인들, 이슬람 사회가 악마라고 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당화 할 수 없는 그런 힘에 이렇게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어요. 그 쪽으로 따라가면 이익이 되니까 따라가는 사람이 돼버리지요. 그런 시대입니다.

정의에 대해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람들에게 불편하죠. 어떤 자리에 정의로운 사람이 끼어있으면 불편하니까 정의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을 고립화시키려고 해요. 고립화시키려 할 때에도 그들을 논파할 수는 없어요. 상대방이 정의이고, 자신은 정의가 아니니까. 그래서 시라케 수사로 “아, 저는 약간 힘이 없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요” “너무 정의로운 얘기는 제가 못따라가요” “나는 맨날 먹고살기 힘들어서, 바빠서 그런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라는 식으로 회피하는 겁니다.

지식인들조차 그렇습니다. 먹고살기 바쁘다고 하는데, 그래도 지식인은 대학교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도 월급을 받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똑같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월급 받으면서 책 보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그런 게 있지 않느냐는 얘기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주 조그마한 반경 100밖에 못본다고 하면, 그래도 우리는 한 반경 500 정도는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봐야 하는 존재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는 이론상 이런 게 보인다,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 아닌가요.

‘정의’라는 말처럼 ‘지식인’이라는 말도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선생님, 저는 지식인이 아닙니다. 선생님처럼 훌륭한 분들이 지식인이지요. 저는 그냥 월급쟁이예요”라고 자신을 비하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권력의 중심에 가있어요. 우리는 권력의 중심에 없으니까 이런 얘기 밖에 할 수 밖에 없지요. 아주 흥미로운 일인데, 잘 관찰해보세요. 앞으로 몇 년 내에 한국에서 그런 어휘의 어감의 변화가 비슷하게 일어날 거예요. 정의라는 말을 하기가 좀 쑥스럽고, 정의라고 하면 자리가 좀 어색해지고. 그리고 대학에서도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좀 줄어들고, 그래도 지식인이다 하는 사람은 좀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손=한국에서도 스스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서=그래요? 언제부터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손=1997년 외환위기 이후인 듯 합니다.



서=그러면 자연스럽게 전문가-지식인 얘기로 넘어갑시다. 제가 영향과 격려를 많이 받은 책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 The Reith Lectures’입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번역됐는지 모르겠는데요. 사이드가 영국 BBC 방송에 출연해 한 연속강연의 기록들을 묶은 책입니다.(한국에서는 ‘권력과 지성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미국 콜롬비아대학 교수로 있는 사이드가 영국 BBC의 지적인 프로그램에서 한 강연은 아주 지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캠브리지, 옥스퍼드 등 지식인의 전통이 있는 사회에 아주 낯선 아랍인 출신의 사이드가 출연해 한 얘기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적어도 사이드 자신에게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잘못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프로페셔널이지만 프로페셔널리즘에 빠지지 않겠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저 서경식은 소위 전문교육을 못 받고, 학위도 없고 대학원도 안다닌 사람인데, 일본에서 글 쓰고 대학 교수가 됐어요. 제 주변에는 박사 투성이고 전문가 투성이에요. 전문가 투성이인 일본의 대학이라는 직장에서 그러면,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맡아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고민했을 때 이런 얘기가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사이드가 했던 또 한 가지 중요한 얘기는 ‘지배층의 서사(master-narrative)’에 대항한 ‘억압받은 자의 서사(counter-narrative)’를 대치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대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신조랄까 기준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전문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된 것은 너무 상징적이고 위태로운 얘기라고 봅니다. 한국은 군정시대까지만 해도 지식인의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지식인이 살아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우회해서 얘기하자면, 제가 쁘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인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작년이 그가 자살한 지 20주년이어서 이탈리아까지 갔다 왔습니다. 20주년 기념논문집이 피렌체대학에서 출간되고 저도 거기 하나 기고했습니다. 그때 논문집을 편집한 교수가 화학자였습니다. 피렌체 대학의 루이지 데이 교수라는 분이었습니다. 쁘리모 레비도 화학자였지요. 그러니까 화학하는 사람이 레지스탕스 운동도 했고, 아우슈비츠도 겪었고, 그 생활에 기반해 글도 쓰고 한 거죠. 지금 시대에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기념 논문집을 또 다른 화학자가 편집한 것이고요. 그걸 보면서 너무 저는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루이지 데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거 뭐 신기한 일이냐, 그냥 보통 일인데…. 쁘리모 레비도 화학자였고, 학문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러더군요.

이것도 너무 미화하면 안되겠지만, 이탈리아는 르네상스기부터 볼로냐 대학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대학이죠. 여기서 후마니즘, 즉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지(知)에 대해 가르치고, 그리고 종합적인 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학자다, 지식인이다라고 했죠.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그렇죠. 또한 중요한 특성은 이탈리아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지방분권적인 나라였습니다.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도 있었고, 서로가 싸우고 그런 상황에서 다빈치 같은 지식인은 토스카나 출신인데, 밀라노 대공에게 가서 일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도 일했고, 또 피렌체로 돌아왔죠.

영주나 왕들은 이들을 고용할 때 종합적인 지식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다 계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운명적으로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권, 한 사람의 왕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인도 독립성이 있고, 그래서 상대방과 자신을 계약하는 존재이죠. 지오다노 브루노가 화형 당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 공공의 적이 되는 억압적인 시대였는데도, 지식인으로서의 독립성, 권력과의 거리, 복수의 교권, 국가의 권력과 거리를 가지며 계약하며 사는 지식인들의 상이 있었던 거죠. 그것이 어쩌면 독립된 지, 지식의 사회적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전통들이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고, 그래서 지금도, 물론 미화만 할 수는 없지만 화학자가 쁘리모 레비에 대해 관심 가지는 것이 왜 안되냐 할 정도인 거죠. 그것은 국가나 기업 때문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가지고 자유롭게 상대방과 계약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종합적인 넓은 시야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뭔가에 갇히고 구속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스페셜리스트’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나치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스페셜리스트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소개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전문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말은 "저는 인간으로서의 자율성을 포기한 사람입니다"라는 말과 비슷한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제 주변, 친구들은 영화 스페셜리스트를 보고 나서 자신은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을 안이하게 할 수는 없다고들 합니다.

영화 스페셜리스트에 대해 좀더 얘기하자면, 에이알 시반이라는 유태인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고급 관료인데 소위 ‘최종해결’ 즉, 유태인 대학살을 아주 효율적으로 실행한 능력있는 관리였습니다. 이 사람이 1966년에 예루살렘에서 전범재판을 받았을 때 촬영해둔 기록필름을 편집해 영화로 만든 것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거기서 스페셜리스트라는 뜻이 인간으로서의 판단을 스스로 중단하고 그런 판단을 안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관료, 바람직한 독일 국민,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기계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페셜리스트는 그런 식의 능력이 뛰어납니다. 너는 비행기 100대 만들라고 하면 100대 만들고, 유태인 1만명 죽이라고 하면 1만명을 죽일 수 있는, 요구받은 그대로 그 일을 처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아유슈비츠 이후에도 “아, 저는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교양,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책에도 썼는데요. 일본의 와타나베 카즈오(渡邊和郞)라는 프랑스 사상 연구자가 있습니다.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 시대에 어렵게 정신의 자유를 지켜낸 사람인데요. 인간이란 스스로 야만화시키고 기계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지식인이라는 말을 안쓰게 되고, 오히려 자신을 “전문가입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이 시대가 바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대학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권력에서 독립해 있으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판단을 포기하고 전문가로서의 특기, 기능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그게 가장 위태로운 세상입니다. 나치 시대나 군국주의 일본시대나 별로 다를 게 없는 시대입니다. 나치 시대나 군국주의 일본 시대처럼 폭력으로, 곤봉으로 때리고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빼앗은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교양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눈에 쉽게 보이는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통제 논리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지식인 사회에까지 침투하고,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기계화시키고 스페셜리스트화시키는 그런 전체주의적 사회가 일본에서는 벌써 15~20년 전부터 진행됐습니다. 일본에 원래 만연해 있던 다수자, 또는 주류의 탈정치적인 사고 방식에다, 소위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 더해지자 더욱 그렇게 됐죠.

아까 얘기했듯이, 한국에서도 “아, 저는 지식인이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월급쟁이지요”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많아질 거에요. 그것이 말하자면 사람들의 자기방어의 기제라고 할 수 있죠. 이 사람들이야 말로 아주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학위 얻고 교수가 되는 것만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그래도 즐거움이 있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기야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죠. 왜 저 같은 사람이 그런 얘기를 계속 하느냐 하면, 원래 그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재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일조선인은 원래부터 재야이지요. 그러니까 원래 있던 어떤 기득권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잃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다시 말해 주변화된 사람, 소수자였죠. 저는 학위도 없고, 영어로 강의도 못하지만, 그래도 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 재일조선인 입장에서 글도 쓰고, 발언도 했고 해온 것이 아주 소수 부분이지만, 아, 이런 것도 재미있다 이런 것도 대학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사람들, 그나마 조금 균형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런 사례가 아주 예외적이지요. 드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성공의 서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처럼 어차피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롭게 사유하고, 발언도 하고, 거기서 공부만 하면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전문가가 될 수 없고 지식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것은 사회주류가 되고 정규직이 되고, 사회적으로 상승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공유하고 있는데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그렇게 될 수 없어요. 그렇게 될 수 있으면 경쟁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아니지요.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한국에서 삼성의 사원이 되면 사회적인 성공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평생 안정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삼성에 들어간다고 해서 평생 안정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삼성 내부에 들어가도 아주 치열한 경쟁을 겪지 않습니까. 일도 많이 해야 하고. 게다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삼성의 사원이 될 수도 없고요. 그러니 이렇게 경쟁이라는 논리가 힘이 있죠.

그렇다면 오히려 숫적으로는 배척당하고 주변화되고 낙오하는 사람들이 다수자입니다. 이 다수자는 권력 관계로 볼 때는 소수자이지만, 인구 숫자로 볼 때는 다수자입니다. 이런 다수자는 다수자끼리 힘을 모으는 논리, 논리가 아니더라도 그런 힘을 모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느낌조차도 없어요. 그런 느낌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주류로 들어가 편입되고 싶고 그런 방향으로만 살 수 밖에 없죠. 정신적인 위계제도의 노예가 되는 거죠. 낙오한 사람들, 경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손 잡고 힘을 모을 줄 몰라요.

한국 와서 가장 놀랐던 일이 하나 있는데요. 이 나라에서는 상식이라니까, 나는 상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로 깨닫는데요. 연세대에 있는 어떤 교수가 알려줬습니다. 학생들 성적평가를 상대평가로 한다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가르치는 분야가 인문학입니다. 문학·역사·사상을 포괄하는. 학생이 20명 있다고 합시다. 그 중에 30% 정도가 A 학점이다. 어떻게 이렇게 점수를 붙일 수 있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인문적인 처사입니다. 인문학이란 게 모두가 A일 수도 있고, 모두가 낙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30%를 넘으면 컴퓨터에 입력할 수도 없도록 소프트웨어가 돼 있다고 합니다. 손기자도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저는 그걸 듣고 경악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 게 여기서는 상식이에요? 이제는 이명박이 대통령 됐으니 국가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가겠네요?

다른 부분에서는 시차를 두고 한국이 일본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한국은 일본보다 앞서 있어요. 부정적 의미에서의 ‘선진국’입니다. 지금 일본도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저항이 남아 있으니까 거기까지만이에요. 그래도 그런 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물론 인문학 같은 경우 상대평가로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지요. 저에게 그 얘길 해준 사람은, 31%에게 점수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행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컴퓨터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부여하는 사람의 권력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는 원호가 있습니다. 천황의 통치기간마다 소화, 대정, 평성 등 원호가 있어요. 1960년대만 해도 원호를 폐지하자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지금처럼 그렇게 당연하게 쓰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일본에 지난 전쟁의 책임이 있다” “지금이 군주제 시대가 아니다” “민주제 국가면 원호를 안쓰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의견들이 많았죠. 국민주권, 인간평등의 관점에서 헌법위반이 아니냐는 주장이 그래도 많았어요. 정부가 원호 사용을 강요하려 했는데 결국 못했어요.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일본 다수자들 중에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대다수가 아무 의식 없이 平成 몇 년 이렇게 써요. 그런 말은 없지만 저 같은 경우는 ‘양심적인 원호 거부자’라고 합니다. 가능한 한 원호를 안쓰고 서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학교나 관청에 가서 공식 서류를 만들 때는 원호를 쓰게 돼 있어요. 제가 서기로 쓰면 컴퓨터 입력을 못합니다. 학교 같은 경우 사무 직원들이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합니다. “서선생 때문에 우리가 쓸데없는 것도 다 고치고 입력해야 하나” 이런 얘기를 합니다. 누군가가 폭력적으로 곤봉 가지고 위협해서 원호를 쓰라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어쩔 수 없이 원호를 쓰게 됩니다. 불과 몇 년 동안 그렇게 자연스럽게 됐어요. 신용카드 같은 것도 원호로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연도를 쓸 때는 머릿속으로 고쳐야 하고 아주 불편합니다.

여기서는 주민등록번호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죠. 그러니까 컴퓨터 같은 아주 현대적인 기술과 천황제라는 전근대적인 군주제 지배가 결부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주제적인 사고 방식으로 첨단 기술을 사용하면 아주 효율적으로 인민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상대평가에 대해 그걸 하느냐 안하느냐 또는 A학점을 25%냐, 30%냐, 50%냐 논쟁을 하더라도 그런 걸 민주적으로,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학생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도 없고요. 이렇게 컴퓨터로 해버리고 나면 아무도 저항할 수 없게 됩니다. 주민등록번호가 비합리적이라고 해서 저항하면, 이 번호 없이는 휴대전화도 못사고, 티켓 예매도 못하니까 너무 불편하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적응하는 거고요. 오히려 주민번호를 갖고 있는 것을 정당한 시민 취급을 받는 자격처럼 착각합니다. 그것처럼 컴퓨터 첨단기술을 사용해서 신자유주의 경쟁 전체주의가 진행됐습니다.

이 연세대 교수가 하는 얘기 중에 가장 무섭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그렇게 되면 학생들 서로의 관계가 항상적인 견제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20~30%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지가 학생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습니다. 무슨무슨 보고서를 언제까지 내라고 했는데, A라는 학생이 마감을 지켜서 내고, B 학생은 아프다는 사정이 있어서 못내고 그 다음날 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둘 다 A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면 A라는 학생이 항의한다고 합니다. 불공평하다고요. “나는 마감 지켰고 그 놈은 안지켰는데 어떻게 같은 점수를 주느냐”고요. 학생들이 항상 그런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합니까? 인간의 자유 그런 가치, 학문 자체가 공허화돼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마감을 지켜야 하지요. 그러나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으로 학생 스스로가 지키는 거지요. 그리고 남이 못 지켰다고 해서 이 사람을 좀 낙제시키라고 하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손=사모님을 부를 때 ‘파트너’라고 부르시는데요.(서교수는 기자를 맞이하며 "파트너는 연세어학당에 한국어 수업을 들으러 갔다"고 말했다)

서=고유한 한국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사실는 그런 것이 있기는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있다고 합시다. 그것도 잘 배워야 합니다. 저처럼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처지에서는 참된 진정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언어의 내부에는 위계제가 너무 강하게 반영돼 있어요. 다들 언어의 권력관계에 갇혀 있어요. 선·후배 관계라든가, 교사·제자 관계라든가, 아버지·자식 관계라든가 경칭이나 말하는 게 너무 면밀하고 복잡하게 정해져 있죠.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심지어 식당에 들어가면 “다음에는 후식이 나오세요”라고 합니다. 후식은 경칭의 대상이 아닌데도 경칭을 붙입니다. 이런 게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일본도 그래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가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외식산업이 들어오고, 그리고 백화점, 영업사원 등이 말하는 것이 매뉴얼화 되어서 상대방 고객들에게 하는 말을 외워요.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얘기하지요. 여기에도 ‘기계화’가 들어옵니다. 기계화 된 말로 얘기하면 싸워야 할 때 못싸워요. 싸움이 없다는 것이 진짜 사랑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서설이 길어졌는데, ‘아내’라는 말은 일본에서도 쓰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자각이 별로 없었는데요. 80년대 초반 나이가 30대 쯤 되면서부터, 여성해방운동 그런 게 많아지고, 아는 여성 친구들에게 많은 비판도 받고 스스로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 아직 퇴근안했어요?”라고. 남편이 ‘주인’이라면 당신은 ‘노예’인가요? 평등한 관계로 살고 싶으면 호칭도 평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다른 말을 쓰면 말 잘 못하는 사람, 상식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게 됩니다.

일본 같은 경우 배우자를 부를 때 ‘같이 다니는 사람’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쯔레아이(つれあい)’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진보적인 소설가나 평론가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처음 썼죠. 우리 마음에도 적절하다고 여겨져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보급됐어요. 사회 대다수가 쓰지는 않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써도 상대방이 뜻을 이해해주고, 별로 불편함을 못느끼는 정도로 쓰입니다. 이 사람 쯔레야이라는 말을 쓰면서 아내를 얘기하고 있구나 별로 일일이 설명안해도 이해해주는 정도로 됐습니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원래 그런 말 안쓴다는 식으로 이상하게 대하면 절대로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어려운 얘기이기도 한데, 한국사회에는 가족의 비유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끼리 만나면 학벌 따지고, 상대방이 연배가 위이면 “형님”이라고 하죠.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관계가 더 진전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가령 제가 손기자께 “제민이”라 하고 손기자가 제게 “형님” 이렇게 부르면 그런 관계가 성립되죠. 누군가가 이명박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서 이명박도 무척 좋아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사회 관계가 모두 가족에 비유가 돼 있죠.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이나 애인을 “오빠”라고 부르죠.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건 한국이 옛부터 가족적인 가치를 소중히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가족의 비유가 이중성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바로 봐야 합니다. 김상봉 교수와 만나 대담을 다 끝난 뒤에도 김상봉 교수가 그러더군요. "이제 서로 속을 많이 알게 됐고 서교수님이 저보다 연배가 위이니 ‘형님’이라 부르고 싶다"고요. 그 제안에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냉정하다, 또는 서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사회는 타자와 타자가 만나는 것이죠. 부모나 부부도 타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쌍하다고 말합디다. 너무나 디아스포라적으로 어렵게 섭섭하게 외로운 세상을 살아온 신세였기 때문에 가족의 따뜻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한 번 보시지요. 가족이란 게 얼마나 억압적인지.

제가 혈압이 높아 강남에 사흘간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제 병실에 6명이 입원해 있었는데. 증상이 가볍건, 중하건 모두가 가족들이 와서 병간호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전부 다 며느리나 부인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분들이 항상 같이 있고, 집에서 음식 해가져와서 간병하더군요. 그것을 보며 아름다운 가족애라기보다는 이러면 여성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위독해서 아파 죽을 상황이라면 가족이 와 있어야 하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가족이라도 허가된 시간만 면회하게 돼 있습니다. 간호사 대신 음식 먹이고 하면 안되게 돼 있습니다. 아, 그러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너무나 차가운 세상이다, 가족이라는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 산 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시간, 독립성이 미흡하나마 보장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일을 다 하고 난 뒤에 면회시간에 면회하고 마음의 교류를 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마음은 그런 마음이 없는데, “저기 손씨 집안 며느리가 좋은 며느리네”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건 권력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조금 더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학교도 다니고, 시험도 봐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해서 병실에 자주 못 나오면 나쁜 며느리, 부인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권력에 대해 문제제기 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회가 한국사회입니다. 사회 제도상 그렇게 돼 있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 심지어 언어의 위계질서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 하려면 우리부터, 김상봉 교수부터 저를 형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만 두고, 낯선 표현이라도 새로운 표현으로 우리가 서로, 타자가 타자끼리 구성하는 동등한 공간으로서의 사회를 구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 말로 표현안해도 눈빛만 보고 이해하는 가족이라는 것도 망상입니다. 이런 망상이나 공상이 권력화되는 그런 사회가 되면 피를 나누지 않고,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회 성원으로 인정 받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 외국인 노동자도 있고, 외국에서 시집 온 사람들도 있고, 저 같은 디아스포라도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외면상 타자죠. 내부의 타자도 있어요. 아버지에게 억압받는 자식, 남편에게 억압받는 부인… 너는 내 마음을 얘기 안해도 다 이해하는 며느리여야 한다고 하면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아무런 얘기조차 못하는 상황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면 타자 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제일 잘 아는 타자니까 물론 정(情)도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타자는 어디까지나 타자입니다.

아이들도 태어난 순간 타자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춘기 지나면서 그야말로 타자가 되어가는, 존중해야 하는 타자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때까지 있어온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너무 서양적인 개인주의나, 포스트모던적인 보편주의를 주장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데 그건 아닙니다. 이 사회가 가족주의적인 사고방식, 문화 때문에 지금 있는 억압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입니다.



손=한일 양쪽 사회에서 다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계신데. 일본에서는 국적 소수자, 한국에서는 언어 소수자. 양쪽 사회의 소수자를 대하는 차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서=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저 같은 재일조선인은 숫적으로 적을뿐만 아니라 일본은 과거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이기 때문에 과거 1세기의 역사문제까지 모두 부담으로 짊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수자로서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80년대 후반쯤부터 다민족, 다문화라고 해서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배려 있는 그런 사회로 가자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나카소네 보수 정권 때인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들과 같이 사는 열린 사회라는 구호가 많이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공허한 구호로만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적인 인식이 없이 나온 것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 아무 배경 없이 일본 사회에 들어온 소수자와 원래 있던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역사, 식민지 지배의 청산, 사상·문화적인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종전인 1945년 시점 이후에도 식민지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고, 본국인 우리나라가 분단되고 그 때문에 자신들의 중심지인 조국을 자유롭게 왕래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죠. 지금도 일본은 이북과 국교가 없으니까 왕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식민지 지배와 분단이라는 역사의 상처가 지금도 쑤셔대고 있는 거죠. 그게 일본에 있을 때 우리의 상황입니다. 저는 일본의 다수자인 일본인들이 그런 역사 인식이 없이 그냥 소수자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 같은 태도로 나왔을 때 오히려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그런 다문화주의는 역사를 부인하는 효과가 진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이런 역사적 측면에 대한 인식은 물론 공유할 수 있죠. 그런 측면에서는 편안해요. 이것도 과거 식민지 지배의 소산이긴 하지만 일본에 있으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문화나 정체성에 대한 별로 근거 없는 열등감 같은 것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령 밥을 먹는 방식 얘기를 해보죠. 밥을 쌈에 싸먹는 것이라든가, 국에 밥을 넣고 먹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버릇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그냥 문화가 다를 뿐이죠. 여기에는 우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그런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긴장 상태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여기 오면 편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기가 그렇게 천국 같은 느낌인가 하면 아닙니다.

1960년대에 젊었을 때 두 번 한국을 짧게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재일조선인은 본국 여러분들이 볼 때는 일본에 대한 표상, 일본에 대한 온갖 감정들이 다 투영됐어요. 우리를 볼 때 일본에 대한 굴절된 분노도 나오고 또 동경도 나오는 거죠. 나라가 이렇게 분단돼 여러 분들이 고생하고 있을 때 일본이라는 안전지대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라는 시선 같은 것도 많이 느꼈어요. 그것도 일리는 있었어요.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감정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이해가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것보다 일본에 대해, 특히 젊은 사람들의 감정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애니매이션이나 소설, 대중음악 등을 중심으로 일본에 대한 동경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동경을 우리에게 투사하고 우리에게 호의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것이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어색하고 때때로는 별로 기분이 안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60년대 얘기와 다른 식으로 이해할 측면도 있습니다. 이 젊은 사람들에게 과거 식민지 시기 역사는 좀 알려야 합니다. 이 사람들도 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제 상상과 달리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역사교육을 지나치게 받고 있어서 ‘역사중독’에 걸린 것 아니냐 그런 얘기까지 나오는데, 실제로 제가 와보니까 안그래요. 별로 몰라요. 독도니 뭐니 하는 것도 몰라요. 모르면서 다들 분노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것이 좀 한심스럽고 걱정이 되기도 해요. 한편에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본에 대한 시선에, 그래도 일방적으로 부정만 할 수 없는 측면도 있는 듯 합니다. 젊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알게 됐는데, 이것이 일본 사회에 대한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회가 이 사람들이 동경할 정도로 개방된 자유로운 사회가 아닌데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일본 사회에 있는 개인의 자유, 사생활에 대한 존중에 대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가족주의나, 70년대까지 있어온 큰 서사, 거기에다 최근에는 경쟁 논리까지 부과됐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된 측면이 있죠. 너무 짙고 열기가 가득 차 있고요. 진짜로 열기가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가득 차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라고 할까요. 월드컵 축구경기가 있으면 같이 응원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이죠. “나는 그런 데에 관심없다”고 하면 왠지 고립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이죠. 그것은 오히려 일본사회의 젊은 사람들과 정서가 비슷해요. 그것이 건전한 상황이 아니지만 위에서 질타하더라도 효과가 별로 없어요.

또 이런 얘기하는 분도 있었어요. 여성인데, 자신이 일본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가 별로 간섭 안한다는 것 때문이래요. 한국에서는 회사 다니면, 꼭 물어보는 게 “왜 아직 결혼 안하냐” “아기는 왜 안 낳냐” “둘째는 언제 낳을거냐” 등이라는 거죠. 인사 대신 하는 말인데,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면 성희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30년 이상 여성들에 의한 문제제기가 있어왔기 때문에 남자들 스스로도 좀 심하게 하면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더 심하면 소송을 당해 손해배상 해줘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경계가 있기 때문에 조심합니다. 그 여자 분이 도쿄 비행장에서 도쿄 시내로 전철 탔을 때, 전철역에서 퇴근하는 일본 여성들이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아 여기가 여성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아, 그렇게도 생각하는구나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역사 인식이 모자란다든가, 일본이 과거에 식민지배 했으니 일본 좋아하는 것은 친일이다 하는 식의 단순논리로는 이 사람들을 별로 설득할 수 없겠죠.

문제는 그런 측면만 볼 때에는 일본이 더 열린 사회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여행자로서는 그렇게 보이죠.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질서 잘 지키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살다보면 얼마나 억압적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조압력이랄까. 모두가 가는 방향으로 말 없이 따라 가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요.

일본에는 요즘 ‘KY’라는 말이 유행 중입니다. ‘공기를 읽는다’ ‘분위기를 읽는다’는 뜻인데요. 친구끼리 있을 때에도, 회사 회의 때에도 사람들이 모였을 때 분위기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면 안된다라든가 여기서 지나치게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 하면 안된다는가, 여기서 리더가 누구인데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든가, “자, 오늘 중화요리 먹으러 가자”고 하면 “같이 갑시다”하며 기꺼이 가는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걸 잘 읽는 사람이 케이와이입니다. 아베 신조가 지난 해에 사임했는데, 아베 신조가 전형적인 공기를 못읽는 사람이라고 젊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공기 잘 읽는 사람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요.

한국사회가 일본사회를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한국에서도 케이와이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조금 시차가 있으니까, 이 시차 있는 동안은 한국에서 일본에 가면 조금 공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선호가 일본의 전부, 천황제 전부, 보수파에 대한 선호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인, 해방적인 의미가 있는 긍정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요. 아직까지 불분명한 두 가지 요소를 가지면서 표류하고 있는 상태죠. 그만큼 우리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기존 세대 지식인들의 책임입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양측 사회를 보고 있고, 지금 말씀드린 과도기의 시차 같은 것도 느끼고 있으니.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가진 이 나라 여러분에게도 그것은 아니다, 이렇게 경고할 수 있는 처지이고요. 그런 사람이 맡아야 하는 책임입니다.



일반화하자면, 디아스포라가 그런 것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회도 알고, 미국 사회도 즉 서양중심 문화도 아니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한쪽만 알면 못썼겠지요.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양쪽 사회에서 고립되고 외롭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그런 디아스포라들이 있고, 이 때까지 디아스포라이면서도 지식인인 존재는 별로 많이 없었습니다. 유럽에는 있었죠. 20세기 초반부터 유대인들이 그랬죠.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볼 때 아시아나 아프리카에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많이는 없었어요. 있었을 경우에도 미국 같은 사회에서 상품화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출신 지식인으로 미국 유명 대학의 명물 교수가 되고, 결국 백인 사회에서 상품화되는 과정을 겪었어요.

영어로는 토큰(token)이라고 하는데. 뉴욕에서 지하철 탈 때 사는 토큰 말입니다. 미국사회가 얼마나 다문화되고 얼마나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가를 표시하기 위한 토큰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렇지 않은 디아스포라 지식인이 지금까지는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동아시아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이렇게 되면, 좋건 싫건 이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 이동하게 되면 저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겠죠.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아스포라가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이죠.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과잉 충성을 하게 되고, 국가주의에 경도될 가능성이 더욱 높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니까 꼭 도덕적으로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면 여러 개 있는 척도를 상식화해 개인의 자유도 지키면서 공동체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손=한국에 있으면 그런 디아스포라 지식인을 만난 적이 있는지요.

서=한국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너무 강해서 개인주의자가 드뭅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고립화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동문의식, 동향, 학벌 같은 공동체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외국 유학을 갔는데 일본인 친구가 파리에서 철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자 가장 친한 친구 1명만 와서 와인 마시며 축하를 해주더랍니다. 한국인들은 한 명이 학위를 받으면 유학생들이 다 모여서 축하를 했다고 합니다. 그걸 좋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학문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 적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철저히 비판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한 가족이어서 고립된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게 비판하는 게 아니라, 같이 유학 가서 고생하고 드디어 사회의 주류가 됐다며 축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그 사례를 접하며 이런 게 떠오릅니다. 옛날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가문 전체의 신분이 올라가는 게 있었지요. 죽고 난 뒤에도 호칭이 달라지지요. 그런 문화의 유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얻거나 교수가 되는 것이 독립적 지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지배기득권층에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목표가 됩니다. 양반, 관직이 되는 게 목표이지 학문이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좀 격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60~70년대 유신체제 때 이 나라 민주화를 이끈 지식인들의 역할은 아주 빛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것이 정말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전통은 소중히 기억하고 그런 선학들에게 많이 배워와야 한다고 봅니다. 60년대 4·19 교수단이나, 70년대 창비그룹의 리영희 선생 그리고 학생운동 진영도 모두 디아스포라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2000년대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래 진로 걱정을 안하던 때였습니다. 불안정한 디아스포라였지만 그래도 지식이 있었고요. 지금은 60~70년대보다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손=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서=일본에 돌아가면 학교 일로 바빠질 것입니다. 소모적인 행정적 업무도 많을 것이고. 제가 와 있는 2년간 일본도 많이 나빠졌습니다. 일본 헌법 개정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성립되었고요. 물론 제가 있어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헌법이 본격 개악되리라는 것이 구체적인 일정에 올라오는 나날이 된 듯 합니다. 이르면 3~4년 내에 그게 구체화 될 것입니다. 이 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군비가 금지된 것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결과로 인한 것인데, 그것을 청산하지도 않고 다시 군비를 하는 것은 역사적인 반동입니다. 재일조선인, 일본인들이나 어느 정도 같이 대들 수 있을 지 막막합니다. 재일조선인의 처지나 입장이 우경화 문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 재일조선인 사회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천착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는 장기간 올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자주 오고자 합니다. 2년 전만 해도 공기가 희박해지는 일본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도망해서 숨 쉬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 나라에도 공간이 얼마나 남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쉬러 온다기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같이 고민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손제민기자)

08.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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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2-27 17:32   좋아요 0 | URL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터뷰군요.

로쟈 2008-02-27 22:5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많은 대목에서 공감하게 되네요...

누에 2008-03-02 03:45   좋아요 0 | URL
감사~

섬나무 2008-03-22 18:35   좋아요 0 | URL
신문에 실리는 대담이어선지 서경식씨가 우리말이 서툴러선지 표현방법이 대단히 실용적이고 탈학문적? 이네요.^^ 일반인들을 위한 인문학의 아주 좋은 본보기 같습니다. 우리시대의 교양과 함께 유익하네요. 우리시대의 교양에서 박홍규 교수의 '이명박이 취임식장에서 영어를 지껄이진 않았다'는 압권 입니다.ㅎㅎ 근데 인디고 서원 쪽 사람들의 발언들은 모난 돌 같고 물에 기름 같네요.고진이 실패했다는 'NAM'이 생각납니다.
아 글고 로쟈님의 서재질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인간답길 노력하는 일 중에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젠 비가 제법 내리고 있네요.

로쟈 2008-03-22 21:45   좋아요 0 | URL
여기는 제법은 아니고 약간 내리는데요. 그래도 스킨을 비오는 걸로 얼른 바꾸었습니다.^^
 

주중에 <시사인>에서 읽은 기사는 최근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2>(고즈윈, 2008)을 펴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과의 인터뷰 기사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2). 지난 10년간 역사 분야의 저술가로 단연 두드러진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저자의 새로운 신간 또한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데 요즘 수위를 다투고 있는 건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2004),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웅진지식하우스, 2008) 등이다. 후자가 편술인 만큼 직접 비교할 수는 없겠다. 아울러 지난 몇 년간 국내 학계에서 유난히 18세기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저술 성과들이 나오고 또 주목 받고 있는 현상은 흥미를 끈다(학문사가들의 좋은 주제가 될 만하다). 대중적으로 요약하자면 '정조 신드롬'쯤 되겠다. 이에 관한 기사도 생각이 나서 같이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7). 한국사회의 무의식을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지표가 아닌가 싶다. 

시사인(08. 02. 19) "노론의 당론 여전히 작동 중"

지난 10여 년 사이 역사학의 결과물이 대중화한 성과는 눈부시다. 정치사에 국한된 연구자들의 관심이 생활사와 미시사 따위로 확장되어 간 것이 한 축이라면, 정치사 가운데에서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인물의 복권 흐름도 거셌다. 요즘 역사서와 역사소설은 출판 시장에 활력을 더하는 주력군이다.



그 중심에 역사 평론가 이덕일이 있다. 펴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는 그가 최근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2>(고즈윈 펴냄)를 펴냈다. 다시 정조이다. 그는 이미 ‘이덕일의 조선 후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사도세자의 고백>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통해 당쟁에 얽힌 후기 조선의 성격을 드러낸 바 있다. 이 가운데 1997년 출간된 <사도세자의 고백>은, 추리 소설 못지않은 긴박한 구성과 생생한 묘사로 선풍을 일으켰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축조함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의 존재와 영향력을 부각시켰다. 뒤를 이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약용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었지만, 사실 정조와 그의 시대에 관한 소고이다. 

그런 이덕일이 이번에는 정조 치세를 정면으로 다루고 나왔다. 위 3부작이 쓰일 때 구상했던 것인데, 4~5년이 늦춰진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자료를 더 섭렵했고, 구성도 파격적이다. 아예 소설을 방불케 하는 일화로 시작한다. 정조가 독살되었다며 거병했다 처형된 영남 양반 장시경 형제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 근거는 명확히 문헌에서 찾았다.

지금까지 그의 저서는 마흔 권 가까이 된다. 박사 논문을 털 무렵부터 집필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12년째가 된다. 숨가쁘게 책을 쏟아냈지만, 그 흔한 출간기념회나 홍보 행사 한번 변변하게 치르지 못했다. 이씨는 “책이 50권쯤 나오면 그때 출간기념회를 하겠다”라며 웃었다. 숭실대학교 사학과에서 <동북항일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년 정도 강사 생활을 했으나 점차 자기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연해졌다. 교수 충원 방식, 또 이후 강단 생활이 자기 생리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다고. ‘라면 3개와 소주 1병이면 된다고 여긴’ 그는 곧바로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길에 뛰어들었다. 

전문 연구자인 그가 펴내는 역사서는 단박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사료에 기반하면서도 호소력이 넘치는 긴박한 문체가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원전 번역이 많이 진행되어 집필 작업이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원전 해독 능력은 필수이다. 게다가 실록 같은 기록은 편년체이기 때문에 배경 지식이 있어야 기술된 ‘간략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고, 다른 문헌과 대조해보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사료의 행간을 짚어보는 데 관심이 많다. 이른바 정사는, 집권 세력이 감추고자 했던 정보가 누락되거나 간략하게 기술되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정조 시대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도 관찬 사서뿐 아니라 개인 문집과 외국의 기록을 망라했다. 그의 책에 유독 대화체가 많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외에도 <일성록> <홍재전서>, 채제공의 문집인 <번안집>, 규장각 사검서였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박제가의 <정유집>과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교황청이 갖고 있는 황사영 백서를 포함한 선교사들의 편지까지 섭렵했다.

사료 더미를 헤치는 것만이라면 수고를 더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기술에는 복병이 만만치 않다. 드러나게 발목을 잡는 일은 관련 문중의 항의와 고소 위협이다. 근거를 들어 설명해보지만, 숫제 고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윤휴와 강화학파에 관심 커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의 경우 몇 백년 후손이라도 할 수 있어 위협적이다. 지금도 공민왕에 대한 특정 기술 때문에 형법으로 단죄될 수 있으니 우스운 일 아닌가.” 그러나 그에 따르면 무형의 걸림돌이 더 문제이다. 역사학계의 치우친 관점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역사 지식, 특히 조선 시대나 상고사에 관한 대목은 노론의 당론과 마찬가지다”라는 매우 ‘센’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특히 과거 정조 시기 노론의 행태에 선명한 비판의 각을 세운다. 그에 따르면 아직도 노론 후예의 힘은 여전하다. 그들은 일제 시대에도 부귀영화를 누렸고, 유무형의 자산으로 현재까지 유리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 

그는 “한창때는 과거 사례와 당대의 현실을 비교하며 언급하기도 했는데, 3~4년 지나고 보면 그런 대목이 탁탁 걸린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큰 언급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는 과거 김대중 정부에 대해, 태종을 닮아야 할 때 세종의 길을 걸으려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더 박하다. 그는 “정적을 죽이는 게 개혁이면 누가 그것을 못하겠는가. 개혁이 어려운 것은 때로는 자기 팔을 도려내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지금 거대한 선거 혁명을 치르는 중이다. ‘기존 집권 세력은 안 된다’는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어느 시기에나 가진 사람, 배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방어 능력이 있다. 국가는 유일한 소속 단체가 국가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보살펴야 한다. 지금은 비정규직이나 힘없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가 앞으로 집중하고 싶은 인물이나 주제는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와 강화학파이다. “너무 관심이 집중되어 자꾸 과부하가 걸린다”라며 그는 웃었다.(노순동기자)

시사인(07. 10. 22) 2007년 정조가 귀환하는 까닭은?

정조에게는 두 개의 8일이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이 끊어지는 데 걸린 8일(1762년). 그로부터 30여 년 후. 재위 19년째인 을묘년(1795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死甲)을 맞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을 찾은 ‘을묘원행’의 8일. 전자는 사도세자의 8일, 후자는 정조의 8일이라고 부르자.

그동안 대중문화 영역에서 영-정조는 ‘사도세자의 8일’을 중심으로 배치되곤 했다. 그 틀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비정한 아비였고, 혜경궁 홍씨는 그것을 애닯게 지켜보아야 했던 지어미였다. 그들이 주인공인 드라마 속에서 정조는 항상 조연에 머물렀다. 아비의 비극적인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린 왕손, 혹은 신하의 충직한 보필 덕에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는 위태로운 군주가 정조에게 맡겨진 배역이었다. 단적으로 문화방송의 조선실록 시리즈 ‘조선왕조오백년’에서 영?정조 시대의 타이틀은 혜경궁 홍씨의 동명 저서에서 따온 <한중록>이었다.

2007년, 정조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 되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정조 혹은 정조 시대와 관련된 책들이 약속이나 한 듯 쏟아져나왔다. 명패도 케케묵은 정조가 아니라, 이산이라는 자연인의 이름으로 귀환했다. 가장 화려한 귀환은 MBC 창사 46주년 기념 드라마 <이산>이다. 여기에 소설 <이산>, 정조  시대에 천착한 소설가 김탁환의 3부작 완결판 <열하광인>, 정조 시대 천재 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대결을 그린 이정명 소설 <비밀의 화원>, 이상우 소설 <정조대왕 이산>, 강신재 소설 <이산 정조대왕>이 가세했다. 7월에 출간된 이상우(*이상각)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산 정조대왕>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소설과 드라마, 만화책까지 정조 '붐'

‘사도세자의 8일’이 과거 숱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듯 ‘정조의 8일’에 주목하는 작품도 늘었다. 대표 작품이 올해 11월 케이블 CGV에서 선보일 10부작 미스터리 시리즈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에 행차한 을묘원행을 소재로, 원행 8일 동안 정조 암살 기도가 벌어진다는 설정 아래 이를 막아내기 위한 정약용의 활약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지난해 출간된 오세영의 소설 <원행>이 원작이다. 이인화의 화제의 소설 <영원한 제국>을 영화로 만들었던 박종원 감독이 연출을 맡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만화책도 가세했다. 베스트셀러 인기 시리즈물인 ‘노빈손 시리즈’가 한국사 시리즈를 선보이는데, 첫 책이 <노빈손, 정조대왕의 암살을 막아라>이다. 노빈손이 정약용의 제자가 되어 정조 대왕의 암살을 막기 위해 활약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아동용 만화책으로까지 나온 것이다. 흡사 정조와 정조가 아꼈던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정조와 대립했던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논쟁을 벌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9월17일부터 방영 중인 MBC 사극 <이산>은 공중파 사극다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사도세자의 8일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춧돌을 놓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우선, 사도세자가 기행을 일삼던 광인이라는 정보가 없다. 뒤주에 갇히기 전 상황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냥 뒤주에서 출발해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어 정조의 즉위부터 치세, 그리고 죽음까지 온전히 이산의 삶을 기록하게 된다. <이산> 연출을 맡은 이병훈 프로듀서는 “홍국영의 활약상을 다루면서 정조의 즉위기를 망라했으나, 정조를 제대로 조명할 기회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제대로 군주 노릇을 해야 했던 이산의 인간적 번민과 치적을 비로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82쪽 상자 기사 참조).



1795년 을묘원행으로 기록되고 있는 ‘정조의  8일’은 왜 중요한가. 정조는 간난신고 끝에 왕위에 오른 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해 정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선언이 힘을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재위 기간 어렵사리 시도한 숱한 개혁의 결과와 그 주체들을 한자리에서 과시하는 행사가 바로 을묘원행이었던 것이다.



사학자  한영우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8일간의 화성 행차는 화성을 무대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친위 세력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정조의 거대한 정치 드라마였다”라고 평가했다(<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 그 시위는 한양에 잠복된 구 질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혼신의 도전이기도 했다. 물론 그의 도전은 기득권 층의 은밀하고도 격렬한 반발을 불렀고, 정조의 급서 이후 급격한 반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정조를 픽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1993년 출간된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유산은 대중문화 영역에서 쉽게 계승자를 찾지 못했다. 대신 1990년대 말부터 영?정조 시기에 관한 연구 성과가 대중적인 저작의 형태로 봇물을 이루었다. 1998년 박광용 교수는 <영조와 정조의 나라>를 펴내면서 ‘조선의 진정한 큰 임금은 세종이 아니었다. 조선의 르네상스 76년을 이끈 두 대왕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 시대를 움직인 사람들을 보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후 유봉학, 박현모, 정옥자로 이어지는 전문  연구자들이 각각 역사와 정치, 국문학 영역에서 정조 시대의 의미를 대중서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쏟아진 이덕일의 시리즈 <송시열과 그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사도세자의 고백> 등은, 정조 시대의 지형과 그의 사람들을 더욱 생생하게 복원시켰다.

그러니까 연구자들 사이에 정조의 현재적 의미에 대한 탐색이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히 시도되었고 일정 부분 합의가 끝난 것이다. 그런데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뒤늦게 지금 그 관점에 기반한 생산물이 쏟아지고 있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는 이 현상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절되는 개혁에 대한 아쉬움이 드라마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83~84쪽 참조).

“개혁 군주로서의 이미지 획일적” 비판도

한편 개혁 군주 정조에 대한 유보 없는 찬사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최근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정조는 과연 개혁적이었는가?’라는 기고 글을 통해 현재 정조에 대한 해석이 너무 획일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정조는 개혁을 추진한 사람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근본적 개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보면 결국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되풀이한 것은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이다.

김씨는 “<한성별곡-정> <이산> <정조 암살 미스터리>로 이어지는 세 편의 드라마가 모두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 그리고 반개혁 세력에게 핍박을 당하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지만, 그가 행한 획기적 정책들은 사실 강한 왕권이나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복고적 행태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정조가 암살된 것은 수구파의 책동이라기보다는 개혁파의 정조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 아닐까라는 파격적인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소설가 김탁환씨는 이런 메시지를 더 밀고 나간다. 그는 최근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에 이어 <열하광인>을 내놓아 이른바 정조 시대 3부작을 완결지었다. <열하광인>은 ‘개혁을 추진하던 정조가 왜 ‘문체반정’이라는 반동적 조처를 취하면서 돌연 절대 군주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김씨는 “혁신의 기치를 반성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수구와 혁신에서의 양자 택일은 이미 낡은 도덕적 틀이다. 이제는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를 더 깊이 따져보아야 한다. 1792년 정조의 혁신이 있었고, 백탑파(금서가 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모임)의 혁신이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한 몸인 듯했으나 결국 다른 미래를 꿈꾸었음이 분명해졌다”라고 말한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내내 주자의 마니아였고, 주자의 세계관으로 조선을 ‘품격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을 뿐이어서 어느 순간 근본 개혁을 꿈꾸며 자신을 지지했던 이들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정조는 결국 왕, 자신의 편일 뿐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열하광인> 김탁환 "왕은 왕의 편일 뿐"

그는 자신의 작품이 현재적으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정조의 눈부심은 정조 사후에 펼쳐진 19세기 초반의 엄청난 암흑으로 인한 부분이 크다. 한국 사회가 1987년 이후  2007년까지 20년 동안, 어쨌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이룩한 것들이 한순간에 암흑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 암흑 속에서 과거의 한때는 아름다웠노라고 한심하게 추억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 작품을 썼다”라고 말했다.

정조가 펼친 개혁의 한계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미 지적되어온 바이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의 저자 박광용의 문제 의식을 보자. 그는 1998년 이미 “정조는 진보적 개혁을 꿈꾸면서 보수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정조 개혁의 한계이다”라고 지적했었다. 그러나 박 교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조 개혁은 그 성과가 매우 컸다고 평가했다. 지식인들에게 급진적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넣어줌으로써 그 지식인들의 업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 함께 사는 복지사회’라는 방향을 지닌 다산 정약용의 저술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등을 예로 꼽았다. 

개혁이라는 말이 이미 염증과 양가 감정을 빚어내고 있는 지금, 대중은 대리 만족할 대상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철이 든 순간부터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개혁을 시도하고, 변화를 꿈꾸던 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정조와 그의 시대에 매료되는 이들이 늘고 있다.(노순동기자) 

08.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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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사회면이 매일같이 사건, 사고 기사로 얼룩지고 있다. 오늘/내일자 신문들이 다루고 있는 한 가지 기사는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내정자의 표절 논란인데, 기사를 몇 개 훑어보다가 '학계의 상례'와 '학계의 정설'이 서로 상반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흥미롭기에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제자와 공동연구한 논문을 자기 이름으로만 발표한 또 다른 '표절' 의혹 사례는 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080222002145&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010100000&dataid= 참조).

한겨레(08. 02. 22) 학계 “자료출처 밝히지 않으면 표절”

박미석(사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내정자에 대해 논문 표절 논란이 일고 있다. 숙명여대 교수인 박 내정자가 2002년 8월 <대한가정학회지> 제40권 8호에 발표한 ‘가정 정보화가 주부의 가정관리 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제자 ㅅ씨가 2001년 12월 숙대 석사학위 논문으로 낸 ‘주부의 정보사회화가 가정관리 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을 표절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의혹의 핵심은, 박 내정자가 제자 논문에 쓰인 설문조사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박 내정자는 ㅅ씨가 2001년 2월28일~3월20일 서울과 경기 성남, 부산에 사는 주부 5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자료를 똑같이 활용했지만, ㅅ씨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박 내정자의 논문만 보면, 그가 혼자서 설문조사를 설계·진행하고 분석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박 내정자는 21일 “자료의 수집과정이나 본인 지도하에 이뤄진 선행 연구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연구 윤리에 비춰 보면 부적절했다”고 말했다.

두 논문은 제목, 연구 목적, 결론이 매우 비슷하다. 또 ㅅ씨가 “가정 정보화라는 새로운 조류는 … 다양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쓴 문장을, 박씨는 한 차례는 똑같이 쓰고 또 한 차례는 조금 수정해 썼다. 제자 논문을 발췌해 쓰다가 실수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이렇게 박 내정자 논문엔 ㅅ씨 논문과 똑같거나 비슷한 문장이 60개 가량 발견됐다. 이 점에 대해서도 박 내정자는 “논문의 취지가 비슷하다 보니, 일부 유사한 표현이 중복되는 점에 대해 송구스럽다”는 뜻을 밝혔다고 이동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변인이 전했다.

그러나 박 내정자의 논문을 학회지에 실은 대한가정학회는 이날 “동일한 논문 자료를 활용한 것은 사실이나, 공동 연구자들은 이 자료를 사용해서 논문을 쓸 수 있다”며 “두 논문은 연구 문제, 연구 모형에 있어 내용을 달리해 ‘다른 논문’이라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박 내정자도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해 심화된 연구 결과가 나온다면 다른 논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학계의 상례”라며 “대한가정학회가 (두 논문이) 다른 논문이라고 판단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말했다. 자료 출처를 명시하지 않은 점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두 논문이 다른 논문이라는 가정학회 의견에 기대어 표절 의혹을 벗으려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

학계에선 석·박사학위 논문은 지도교수와 논문 작성자의 공동 성과로 간주한다. 하지만 지도교수가 제자와 공동 저자 형식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만 논문을 학술지에 실으면서 자료 출처를 명시하지 않으면 표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당선인 비서실에서 논문 내용을 검토한 결과, 일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사회정책수석 직무를 수행하는 데 결정적 결격 사유는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김소연 황준범 기자)

국민일보(08. 02. 21) 박미석 사회정책수석 내정자, 제자논문 표절의혹

숙명여대 교수인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내정자가 자신이 지도교수를 맡았던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20일 제기됐다. 이에 따라 이명박 당선인측의 인사 검증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박 내정자는 2002년 8월 대한가정학회지 제40권 8호에 ‘가정정보화가 주부의 가정관리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앞서 박 내정자의 제자 A씨는 2002년 2월 숙대에서 ‘주부의 정보사회화가 가정관리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불과 6개월 뒤 제자와 비슷한 제목의 논문을 학회지에 제출한 것이다.

두 논문을 비교한 결과, 참고문헌을 제외하고 13쪽 분량의 박 내정자 논문에서 A씨 논문과 똑같거나 비슷한 문장이 최소 60개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연구목적도 비슷했다. A씨는 “정보통신기기 및 인터넷 활용능력과 주부의 가정관리능력의 관련성을 밝혀…주부의 정보활용에 대한 동기유발을 촉진시키고”라고 썼다. 박 내정자는 “정보활용도와 가정관리능력의 관련성을 밝혀…주부의 정보활용에 대한 동기유발을 촉진시키고”라고 서술했다. 결론도 역시 유사했다.

결정적으로 표절 의혹을 받는 이유는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조사대상과 자료수집’ 때문이다. 조사 시점과 대상이 모두 일치했다. 또 박 내정자가 논문에서 사용한 표 6개 중 4개도 A씨 논문 내용과 거의 동일하거나 유사했다. 그러나 박 내정자는 자신 논문의 참고문헌이나 각주 등에서 A씨 논문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현재 ‘표절 가이드라인’ 기초연구를 마무리했다. 출처없이 6개 단어 이상이 연속적으로 일치하는 경우, 출처를 밝히지 않고 데이터나 조사방법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우 등을 표절로 규정하고 있다. 김기수 변호사는 “표절에 대한 각종 판단 기준에 비춰볼 때, 표절로 볼 근거가 있으며 이는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박 내정자는 “제자의 데이터를 활용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연구비를 줄이기 위해 같은 데이터를 활용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분명히 다른 연구방법론을 적용해 쓴 논문”이라고 말했다.(하윤해 안의근 기자)

국민일보(08. 02. 21) 60여곳에 판박이 문장… 결론도 비슷

박미석 신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 내정자의 논문이 표절 의혹을 받는 이유는 크게 여섯 가지다. 그러나 박 내정자는 제자의 논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표절 의혹을 부추겼다. 한 대학교수는 “박 내정자가 A씨의 논문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논문의 주제와 내용, 조사방법까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 상태에서 유사한 논문을 제자에 대한 어떤 인용없이 발표한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① 제목과 연구 목적이 비슷=어순만 조금 바꿨을 뿐 두 논문의 제목이 매우 유사하다. 사실상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연구목적도 비슷하고, 제자보다 6개월 뒤에 비슷한 논문을 낸 것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② 너무 많은 동일 또는 유사 문장=A씨 논문 9쪽에 있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여성 특히 주부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가사 자동화(Home Automation)를 들 수 있다’는 문장은 박 내정자 논문 5쪽에 실려 있다. 이처럼 비슷하거나 동일한 문장이 60개를 넘었다. 박 내정자가 A씨 논문의 각기 다른 페이지에 실려있는 내용들을 한 문장, 혹은 두 문장씩 끌어다 합친 부분도 발견됐다.

③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조사방법=첫째, 조사기간이 2001년 2월28일부터 3월20일까지로 같다. 둘째, 조사 샘플도 서울과 경기 성남, 부산에 거주하는 주부 500명으로 동일하다. 셋째, 회수된 설문지 역시 421부로 같다. 다만 A씨는 421부 중 부실기재된 17부를 제외한 404부를, 박 내정자는 421부중 자녀 1명 이상인 주부 338명의 자료를 각각 최종분석자료로 활용한 점만 다를 뿐이다. 같은 데이터를 공유했다는 의혹이 일만한 상황이다.

④ 표 6개중 4개가 유사=박 내정자의 논문에 있는 ‘조사대상자의 사회인구학적 특성’, ‘인터넷 사용행태’ 등 4개의 표는 A씨 논문에 있는 표와 매우 비슷하다.

⑤ 결론도 비슷=박 내정자는 정보 유용성의 홍보와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주부들간의 정보격차를 줄일 수 있는 노력 등을 결론으로 제시했다. 또 가정정보화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정확한 척도 모색도 강조했다. A씨 역시 이런 내용들을 자신의 논문에 썼다.

⑥ 제자 논문 문장 중복도 있어=특이한 점도 발견됐다. A씨는 자신의 논문 8쪽에 ‘가정정보화라는 새로운 조류는…다양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문장이 박 내정자 논문 2쪽과 3쪽에 있다. 이런 경우는 또 발견됐다. A씨는 논문 15∼16쪽에 걸쳐 있는 한 문장 역시 박 내정자 논문 2쪽과 6쪽에 있다. 옮겨 쓰다 실수로 2번 쓴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제자 논문과 다른 부분은 박 내정자 논문 전체 13쪽중 11쪽 일부와 12쪽 일부에 있는 ‘경로분석 결과’, ‘모형적합도’, ‘경로모형’ 등의 내용이다. 박 내정자가 A씨의 연구방법론을 지도하는 등 논문 작성에 큰 도움을 줬다 하더라도, 표절 의혹을 피해가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두 논문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학위 논문의 저작권자는 집필한 학생이며, 비슷한 데이터와 문장을 출처없이 사용하는 것은 표절로 보는게 학계의 정설이다.(하윤해 안의근 기자)

08. 02. 21.

P.S. 정리하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해 심화된 연구 결과가 나온다면 다른 논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학계의 상례”이다. 그리고 동시에 "비슷한 데이터와 문장을 출처없이 사용하는 것은 표절로 보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을까? 비슷한 데이터와 문장을 출처없이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심화된 연구 결과'로 간주하면 된다.

가령 "가장 절실한 것은 주부들이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마인드에서 벗어나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는 변화된 자세라고 생각된다."라는 결론과 "아울러 주부들은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마인드에서 벗어나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된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결론이 거의 유사해 보이지만, 그건 '소극적인 마인드'로 읽은 탓이다(어여 우리 마음의 전봇대를 뽑아내야 한다!).

대학원생은 고작 '생각된다'라고 희미한 결론을 내린데 반해서 우리 교수님은 '요구된다'라고 강하게 못박았다. 이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이며 변화에 대한 순도 높은 갈망인가! 대한가정학회가 두 논문이 서로 '다른 논문'이라고 판단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21일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내정자의 논문표절 의혹과 관련해 사회정책수석 직무수행에 결정적 결격사유는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이 정도 일은 물론 이 당선자에겐 깜도 안되는 일일 터이다.) 우리도 어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야겠다. 동료 주부들이여, 정신차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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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2-22 01:34   좋아요 0 | URL
표절이라뇨! 남의 “독창적인” 연구성과를 표절로 모는 것은 대체 어느 나라 공작정치입니까?

본인이 판단컨대, 상기 내정자의 논문은 학문적 “독창성”과 “심화된 연구 결과”를 도출했다는 점이 적극 인정됩니다.

왜인즉슨,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는 자세”와 “받아들이는 자세” 사이에는 엄청난 차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즉 A씨의“받아드리는 자세”는 “받아서” 남에게, 예컨대 상전이나 교수님께 “드리는” 자세입니다. 이에 반해 내정자의 “받아들이는 자세는” 남한테, 예컨대 쫄이나 제자한테 “받아서” 내 주머니나 내 안방으로 “들이는” 자세입니다. 따라서 두 자세 사이에는 근원적이고도 양립할 수 없는 학문적/철학적/경제적/정치적 차별성이 존재/내재/선재합니다. 전자의 개념을 “상납”이라고 하고, 후자의 개념은 “착복” 혹은 “횡령”이나 “갈취”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국가공무원학”에서 두 개념들 간에는 양립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게 학계의 상례이자 정설입니다. 따라서 내정자 분께서는 아주 독창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의 개념을 미리 간파하고 주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논증에 비춰볼 때, 상기의 내정자의 논문을 표절로 추단하는 것은 깜도 안 되는 일일 터입니다.


로쟈 2008-02-22 12:59   좋아요 0 | URL
지승호와의 대담에서 우석훈 왈,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에겐 아직 학자라고 하면 깜박 죽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더 당해봐야 합니다. 유럽 같으면 '교수'라고 해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서 표절의 '순기능'도 인정해줘야겠습니다. 제값의 포지셔닝 과정이라고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