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9, 10월의 사회적 독서의 주제 중 하나는 '제국'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0493). 미처 다 읽지는 못하겠지만 견적이라도 내볼 요량으로 대출한 책이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 

옥스포드대출판부에서 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의 한 권이다. 내가 '아주 간단한 입문'이라고 부르는 시리즈로서 분량 대비 만족도가 아주 높은 책들이다.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더 읽을 거리'가 제시돼 있는데 몇몇 권은 국내에 이미 소개된 책이어서 겸사겸사 참고해볼 만하다.

 

 

 

 

먼저, 중국사학자 페어뱅크의 <신중국사>(까치글방, 2005)는 '중국 제국에 관한 입문서'로 소개돼 있다. 알다시피 페어뱅크는 하버대학의 역사학부 교수로서 영어권에서는 중국사학의 대부 정도 될 듯하다. 최근에 10권과 11권이 번역돼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새물결, 2007)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기도 하다. 

 

 

 

 

마셜 호지슨의 <이슬람의 모험>(1974) 전 3권도 무슬림 제국의 건설과 보편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서로 추천되고 있다. 호지슨의 책은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2006) 정도가 소개돼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물론 역사적인 '세계체제'와 '세계 제국'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로 꼽히는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까치글방, 1999)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D. 아베메티의 <세계 지배의 동학(The Dynamics of Global Dominance)>(2000)은 "근대 제국에 관한 개론서 중 하나로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고 소개된다.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2006)는 "식민주의에 관한 체계적이면서도 간결한 책"이라고 하며, 국역본 소개가 빠져 있지만 안토니 파그덴의 <민족과 제국>(을유문호사, 2003)은 "제국 건설과 대량 이주의 연관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책으로 아주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언급된다. 제국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주제가 오리엔탈리즘인바, 이에 대해서는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이 고전적인 저작이다. 저자가 거기에 덧붙이고 있는 건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이다. D. 카나딘의 책 <오리엔탈리즘: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나>(2001)와 함께 "에드워드 사이드의 입장에 반대하는 대응들"로 제시되고 있다. 식민지와 탈식민지에 관한 연구서로는 단연 로버트 영의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포스트컨티넨털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역시나 국역본 소개에 빠졌지만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룬 좋은 책"이다.

  

'아주 간명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또한 영의 저작이다(앞의 책의 다이제스트판 정도 되겠다).

 

 

 

 

J.A. 홉슨의 <제국주의>(창비, 2003)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과 함께 "제국에 반대하는 오랜 전통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반향을 얻고 있는 텍스트들"로 거명된다(국내엔 파농의 책 두 권과 전기 두 권이 소개돼 있다). 국내 소개돼 있는 책들 가운데 맨마지막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 "제국주의적 현재와 미래에 관해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 중의 하나"인데, 그 논쟁에 관해서라면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이 참조가 되겠다.

Empire: The Russian Empire and Its Rivals

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이지만 소장도서라서 저자의 언급이 반가운 책은 도미니크 리븐의 <제국: 러시아 제국과 그 경쟁자들>(2000).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의 팽창과 쇠퇴를 다루고 있다. 비교연구도 잘 되어 있다"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분량이 5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대저 이 정도는 읽어줘야한다는 얘기겠다...

07. 10. 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7-10-16 16:46   좋아요 0 | URL
제국에 대한 책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읽고 싶은 책들 중에 번역 안된 것들 혹은 절판된 것들이 많아 포기했었어요. 아부 루고드나 사미르 아민 책 같은 것들... 혹시 읽어보셨나요? 읽어보셨다면,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영어로 사서 보려니.. 심적 부담이 넘 커서... 일단 로쟈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

로쟈 2007-10-16 17:12   좋아요 0 | URL
딸기님하고 제가 관심지역이 좀 다르죠.^^; 제국이라고 해도 저는 일반론과 러시아 제국 쪽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가 번역됐다는 건 알게 됐습니다. 그의 <카오스의 제국>도 소개되면 좋겠네요(찾아보니 분량이 얇은 책이군요)...
 

아침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의 특집대담인데 김기봉, 박찬승 두 역사학 교수가 민족주의를 화두로 하여 나눈 것이다. 요 며칠 남북 정상회담이 국가적 이슈였는데, 남북 통일의 과제도 '민족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지역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인지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07. 10. 05) "脫민족 공화주의로 새로운 정체성 정립을”

민족주의는 20세기를 통틀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한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우파 쪽에서도 ‘민족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현실에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막강하다. 외국인 거주자 100만명 시대에, 왜 우리는 아직도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것일까. 학계 쪽 얘기를 들어봤다. 탈민족주의 사관을 펴온 김기봉 경기대 교수(서양사)와 항일독립운동 및 정치사상을 전공한 박찬승 한양대 교수(한국사)가 27일 오후 경향신문사에서 대담을 가졌다. 이들은 “민족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공동체적 정체성이 필요하다”면서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기봉 교수(왼쪽)과 박찬승 교수는 단일민족은 허구이며, 이제 민족의 틀을 넘어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교수가 지난달 27일 대담을 갖고 경향신문사 별관 1층 경향갤러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재찬기자

박찬승 교수=지난 8월말로 한국 거주 외국인 인구가 100만명을 넘었습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도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땅의 다양한 인종들 간의 이해와 관용, 우호 증진에 장애가 될 수 있다”며 한국사회의 다인종적 성격을 인정하고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김기봉 교수=유엔 권고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실은 다민족이었는데, 말로는 단일민족을 주장해온 거죠. 족보들에 따르면 많은 성씨의 시조가 중국에서 왔지만 우리는 모두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고 가르칩니다. 공적 역사와 사적 역사가 불일치하는 모순이죠. 이는 민족이라는 ‘매트릭스’가 작동해왔기 때문입니다.

박찬승=학습의 효과이기도 합니다. 올해 발간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면 “우리 민족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국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학생으로서 하등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죠. 역사책 가운데 단일민족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손진태 선생이 1948년에 쓴 ‘국사대요’입니다. 하지만 혈통은 씨족을 넘어가면 확인이 안됩니다. 고대의 부여, 삼한, 여진, 예맥 등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 현재 민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단일 민족이라는 표현은 사실로도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제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다민족국가가 되는 상황이어서 교과서 표현은 시급히 시정해야 합니다.



김기봉=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걸까요, 한국인으로 되어지는 걸까요. 민족 개념 속에는 문화적, 선천적, 객관적인 종족이라는 뜻의 에스노스(ethnos)와 정치적 의미공동체라는 뜻의 네이션(nation) 두 가지가 있어요. 특히 네이션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민족에서 민족주의가 나온 게 아니라, 민족주의가 발명한 게 민족입니다. 그 공식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단일민족이란 건 말이 안되죠.



박찬승=한국에도 민족과 비슷한 개념은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아족류(我族類)’인데요. 왜족류나 여진족류와 구분할 때 썼는데, 에스노스 개념에 가깝습니다. 갑오개혁 이후엔 ‘2000만동포’ ‘조선동포’ 등에서 ‘동포’가 등장합니다. 이후 일제강점하에서 국권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됐죠. 여기서 그 주체로 민족이 등장했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민족 내적인 통합이 필요했고 여기서 신분의식의 청산이 필요했어요. 서양 근대적 의미의 네이션이 등장한 거죠.

김기봉=민족에서 ‘족’은 족류에서 왔을 것이고, ‘민’은 평등에서 왔을 겁니다. 전통의 근대적 변형이 이뤄진 것 같은데,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게 아니라 일제시대를 통해 강박적으로 이뤄졌고, 또 한편으로 좌절됐습니다. 우리는 민족이라 하면 저항적으로 투쟁해야 된다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연결하는데, 이게 민족 개념이 굴절된 계기입니다. 이제 와서 자신감을 좀 갖게 되니까 그 불일치가 부각되는 거죠.

박찬승=한국 민족주의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식민지배에 저항해 국권을 지키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동원될 필요가 있었죠.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나름대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너무 강했기 때문에 남녀평등이나 소수자의 문제는 억압됐습니다.

김기봉=세계화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린민족주의로 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과정으로서 탈민족주의적인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반민족주의와는 다릅니다. 봉건적 신분질서의 위계적인 인간관계를 깨고 주권이 민에게 있다는 의식을 확립한 해방적 측면은 민족주의의 빛나는 기능입니다. 하지만 그게 악마적 속성을 갖게 된 것은 정치적 민족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기독교가 더 이상 제시하지 못하자 민족이 그것을 대신했죠. ‘나는 유한하지만 민족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민족 아닌 다른 민족은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종주의와 만나 나치즘이 되고 제국주의, 1·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서구사 경험에서 한국사는 면제될 수 있다고 봐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한국 민족주의도 그에 못지 않다는 얘기죠.



박찬승=1931년 만보산 사건 당시의 중국인 학살은 이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당시 조선의 중국인들 중 100여명의 중국인이 조선인에게 피살됐습니다. 총독부의 농간이 작용하긴 했지만 조선인들의 배타성이 잘 드러났습니다. 해방 후에도 정부 정책은 화교에 무척 배타적이었습니다.

김기봉=인종주의는 구별이 차별로 될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의식에 골상학, 비교해부학, 생물학 등 과학이 동원됐습니다. 우리는 과학까지 동원한 경험은 없었지만 인종주의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처음 심어놓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박찬승=그 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요.



김기봉=무리짓기의 원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비슷하다는 의식이 생긴다’는 겁니다.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같은 우리’라는 의식이 만들어지는 거죠.

박찬승=학계에서는 신라 통일 이후 한국의 원형민족이 형성됐다고 봅니다. ‘우리는 신라인’이라는 동질성 개념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고, 아족류라는 개념이 조선초에 나오게 됩니다. 이 역시 하나의 무리가 되고 나서 ‘우리’라는 의식이 만들어진 셈이지요.

김기봉=해방 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 우리 민족 운명이 결정된다는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 과제였습니다. 식민주의 사학과 비슷한 게 지금의 샌드위치 국가론입니다. 세계화 상황 속에서 식민주의가 변형된 거죠. 하지만 이제는 민족이라는 프레임으로 우리 현실을 사유할 수 없습니다. 탈민족적 관점에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범주를 다시 고찰해야 합니다. 민족국가는 큰 문제 다루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문제 다루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환경 문제는 초국가적이지만 자꾸 민족국가 틀 안에 갇히고, 지방분권은 중앙집권적 민족국가 때문에 방해 받습니다. 우리 안의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 역시 조승희 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는 안으로도, 밖으로도 탈민족해야 할 상황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적 정체성을 만들어야 합니다.



박찬승=유럽이나 미주를 여행할 때 그쪽 사람들은 우리를 중국인, 일본인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나의 정체성 중 하나가 ‘아, 아시아인이구나’ 깨닫습니다. 동아시아 교역량도 엄청나서 경제공동체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고 이미 문화적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런 사회는 올 것이라면 교육 안에서도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식인들 사이에는 통일될 때까지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고, 일반인들 사이엔 중국과 일본 틈에서 한국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은 듯합니다.



김기봉=독일은 1964년에 외국인 100만명을 맞았습니다. 100만번째 노동자가 포르투갈인이었는데, 당시 독일 고용주 협회장이 그 노동자에게 꽃다발을 주며 “진심으로 축하한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 뒤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이게 부담이 됐습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민족 정체성이 훼손됐다는 정서가 등장하며 네오나치가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도 틀림없이 이런 현상이 생길 겁니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출산율이 최저인 상황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결국 우리 연금을 부담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럴 때 민족주의는 틀림없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인스 워드가 왔을 때, ‘대한민국을 품고 세계로 나아간다’는 광고가 만들어졌죠. 하인스 워드를 언제 한국인으로 생각했습니까. 그의 정체성은 미국인입니다. 우리가 필요하면 환영하고, 필요없으면 내쫓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박찬승=왜 한국사회에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가 오게 됐을까요. 90년대 이후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학력이 인플레돼 대학 진학생이 80% 이상이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3D 업종 중심으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처음엔 산업연수생으로, 이제는 고용허가제로. 앞으로 3D 업종뿐 아니라 고급인력 시장에서도 부족 현상이 올 겁니다. 결혼이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30년 전부터 태아감별이 시작됐고, 남아선호 사상과 결합되면서 남녀 출산 성비가 엄청나게 벌어졌습니다. 신부를 수입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우스개로 말했는데 그게 현실화됐습니다. 혈통을 잇는다고 남아를 선호한 탓에 결국 외국인 며느리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결국 한국사회의 책임입니다. 법무부에서는 향후 매년 10%씩 외국인 거주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 대책이 필요합니다.

김기봉=미국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다문화의 전형입니다. 유럽은 우리와 다른 게 유럽인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해소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여력이 없는 데다, 분단돼 있습니다.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이 헌법에 쓴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의 원칙을 가지고 세운 공동체입니다. 헌법을 통해 미국이라는 민족을 만든 거죠. ‘용광로(melting pot)’로 미국 국민 만들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시민적 내셔널리즘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조승희는 용서를 받았지만 9·11 테러범들은 못받았어요. 그들은 시민이라는 카테고리로 우리와 타자를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용광로가 아니라 다른 문화를 그대로 존중해주는 ‘샐러드 접시(salad bowl)’ 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는 이 모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 모델은 바로 ‘비빔밥’이지 않을까요. 우리 전통은 유교 불교 기독교 모두 밖에서 온 걸 하나로 만들었죠. 서로 다른 문화도 비빔밥처럼 버무릴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신라의 불상이든 뭐든, 우리가 나름대로 소화한 외국 문화를 찾아내는 식으로 민족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찬승=한국정부는 결혼이민자에게는 포섭과 동화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결혼이민 지원센터도 만들었죠. 결혼이민여성만 15만명 이상인 상황에서 이런 프로그램은 아직 부족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져온 문화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도 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베트남 문화를 버리라고 할 것인가요. 베트남 출신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그걸 살려갈 수 있도록 돕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아시아인의 동등한 자격으로 당신들은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도 당신들 것을 이해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교육, 방송 등이 많이 필요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상황이 더 안좋습니다.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들은 3년이 지나 자진출국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됩니다. 우리도 60~70년대 독일에 간호사나 광부로 가면 대부분 잔류했습니다. 아무리 제한조치를 만들어도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상 다시 돌아가기는 힘듭니다. 그걸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들을 불법체류자로 단속하며 코너로 몰면 집단거류지를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중소기업들은 숙련 노동자도 많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들이 일할 만하면 내보내야 하는 정책은 문제입니다.



김기봉=지난 여름 베트남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문화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한국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땅은 한반도보다 넓고 인구 8800만의 사람들은 굉장히 젊고 우수합니다. 민족해방전쟁에도 승리해봤고, 손재주도 좋습니다. 그간 우리는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만 사고하느라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과 연대·소통 노력을 소홀히 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과의 공존이 우선입니다. 출산 후 찬물에 샤워하고 싶은 베트남 산모가 한국인 시어머니와 갈등을 빚는다고 합니다.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교육하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 것입니다.

박찬승=이주자들이 한국에서 문화제 같은 것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참여하는지 궁금해요. 우리도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 외국인들이 이와 같이 파도처럼 몰려온 적은 없었습니다. 최근 여론조사는 한국인들이 다인종사회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게 됐다는 시각은 아직 적습니다. 골치아픈 존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이 왜 와 있는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김기봉=최근 혈통 민족주의에서 국가 민족주의로 코드 전환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단일민족주의에서 대한민국 국가주의로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올해 말 대선에서 누가 되느냐에 따라 북한 문제에서부터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통일과 외국인 문제는 민족이라는 틀로 껴안을 수 없습니다. 건국 60년이 되는 내년 역사학대회의 주제를 ‘역사상의 공화정과 국가 만들기’로 정했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민족 정체성이 아니라 공화국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후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존재해 왔지만 정작 공화주의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공화주의는 사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적 덕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공화주의는 남한사회 내 외국인 노동자를 포섭하면서 북한 주민도 담을 수 있습니다.

박찬승=한국사회는 전세계의 600만 해외 동포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잘 적응해주길 바라는 한편, 한국문화를 잊지 말기를 기대합니다. 역지사지로 한국 사회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도 한국사회를 함께 구성하는 공동체의 성원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또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문화는 우리 문화를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리|손제민기자)

07. 10. 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국문과 소멸론'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칼럼을 하나 읽었다. '인문학 위기론'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시사적인 칼럼이다. 내용중에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란 구절이 있어서 찾아보니 정말로 딱 1년이 되었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 서재에 옮겨놓은 글들도 상당수였다(http://blog.aladin.co.kr/mramor/954391, http://blog.aladin.co.kr/mramor/1045570 등등). 이 위기론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기사들이 몇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정도가 이 페이퍼의 주제이겠다. 

한국일보(07. 09. 28) [편집국에서] 국문과 소멸론

올해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김광규 시인, 정혜영 교수 부부는 독문학 전공의 대학생일 때 만났다. 한 사람은 현역의 우뚝한 시인으로, 한 사람은 한ㆍ독작가회의를 만드는 등 독일어권에 한국 현대문학을 알리는 전도사로 활동해온 이들에게 몇 년 전부터 큰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한국의 대학에서 독문과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과, 중문과 아니면 학생들이 오지를 않으니 과가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문과의 존폐 여부도 여부지만, 그들의 진짜 걱정은 한국의 인문학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독문과 만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다. 신설 대학이 국문과를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기존에 있던 국문과가 폐지되거나 디지털 스토리텔링 혹은 디지털 문예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콘텐츠에 관한 실무를 주된 교과과정으로 하는 '아류' 국문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야 독문과도, 국문과 출신도 아니지만 놀라운 소식이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장 논리다. 전통적 국문과를 졸업해서는 취업이 안 되니 학생들이 지원하지를 않고,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던 교수들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영상ㆍ뉴미디어 쪽으로 연구와 교육의 방향을 바꾼다. 과의 위상이 하락하고 존폐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 학문의 순혈주의만 고집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 그걸 두고 인문학 교수들의 밥그릇 싸움이다, 언제 인문학이 위기 아닌 적 있었느냐, 인문학 전공자들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자기성찰하라는 등 말도 많았지만 인문학 위기론의 본질은 그런 차가운 비판으로 그냥 비켜갈 문제는 아니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일본어 폐지론이란 것이 두 차례 제기됐다. 메이지유신 직후에는 영어의 국어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프랑스어의 국어화를 외쳤던 움직임이 그것이다. "지배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때때로 억압된 반발과 나란히 가고, 그것은 증오로 돌변하기도 한다. 일본의 근대만 해도 그렇다… 근대의 여명기에 일본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지향점을 바꾸었을 때 싹튼 것은 그때까지 스승으로 모셨던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이 아니었던가."(쓰지 유미 <번역사 산책>에서).
국문과 소멸론이 일본어 폐지론과 같은 수준의 논의는 물론 아니다. 특히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일본어에 대한 절망감은 과거 자국 역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의식과 겹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문과 소멸론, 넓게는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위기 논쟁을 보면 우리사회의 학문 혹은 대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속 빈 강정인가 절감하게 된다.

시장이라는 당장의 지배적인 가치에 그렇게 흔들릴 정도라면 사실 그것들은 인문학이고 대학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대학에서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의 평생 직업을 보장해주기 위한 훈련과정이 아니며, 넓은 의미의 인문교육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를 시장유일ㆍ경제제일주의의 밀림화로부터 지켜야 하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나 대학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하종오 문화부 부장대우)

조선일보(07. 09. 18)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그러나…

“진정한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9월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117명은 비장한 어조로 ‘인문학(人文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9월 26일 전국 93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의 선언으로 이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1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1년 200억원… 치열한 경쟁
‘선언’의 가장 구체적인 반응은 지난 5월 교육부로부터 나왔다. 2016년까지 10년 동안 4000억 원의 예산을 인문학에 지원하고, 당장 올해부터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한 해 200억여 원의 돈으로 거점 연구소를 집중 지원해서 인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이 사업이 사실상 작년 ‘선언’의 유일한 성과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이 사업을 공고한 것은 지난 6월 29일이었고, 신청 마감은 8월 30일이었다. 전국 69개 대학 153개 연구소가 불과 두 달 만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11월 발표되는 최종 지원 대상 연구소는 10~20곳뿐이다. 실로 각 대학 인문대의 사활이 걸린 로스쿨 못지않은 경쟁이었다. 인문학 전공의 한 교수는 “방학 중에도 며칠 동안 합숙하고 밤을 새워 가며 제안서를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선택과 집중의 경제논리를 인문학에 적용하는 탓에 대학 사이의 양극화가 더 커진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위기’에 선 인문학
한국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학술원은 지난 14일 올해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자연과학자 세 명에게만 시상했다. 학술원 관계자는 “인문학은 수상 대상자가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상반기 교보문고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20권 중에 저서가 포함된 현직 인문학 정교수는 두 명이었지만 올해 9월 현재는 단 한 명(정민 한양대 교수)뿐이다.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작년 이후 인문학이 ‘회복’되고 있다는 징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선언’ 때만 해도 ‘지방대학의 경우 폐과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일어났지만 올해는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4월 동국대는 독문과와 북한학과를 폐과하고 인문학 정원을 축소하는 학제개편안을 내놓아 마찰을 빚었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06년 인문대 졸업생의 정규직 취업률은 40.1%로 의대(82.9%), 공대(59.8%), 사회대(47.3%)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며,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경우도 48.8%(전체평균 68.9%)에 그쳤다. 작년 고려대 선언을 주도했던 조광 전 문과대학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인문학 위기란 짧은 시간 안에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라
그런 가운데서도 인문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각개 약진’의 노력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암학당의 플라톤 원전 번역 사업,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인터넷을 통한 철학강좌,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의 학문 통섭 노력, CEO를 대상으로 한 서울대의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 등의 예는 그 일부일 뿐이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철학과는 ‘논술 인증제’, 국문학과는 ‘문화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분야로의 개척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사능력 검정시험으로 다시 일어나는 ‘역사 알기’ 붐은 사학과를 고무시키고 있다.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는 “정부 지원을 바라기 전에 인문학자 자신들의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유석재 기자)

경향신문(07. 09. 03) 한국 인문학 ‘길은 여전히 멀다’

십수 년 뒤에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지난해처럼 교수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없고, ‘인문주간’ 행사도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 강사·연구원도 크게 줄 것이고, 일자리가 없어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진 박사 학위자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바람대로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하 ‘인문한국’)이 계획대로 튼실하게 뿌리를 내린다면 말이다.

지난주 학술진흥재단이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올해 처음 시작된 ‘인문한국’ 프로젝트에 모두 69개 대학의 153개 연구소에서 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웬만한 대학의 연구소는 모두 신청했다는 얘기다. 어느 대학에서는 11개 연구소가 응모했다니 ‘인문한국’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번 ‘인문한국’ 사업은 경쟁률이 8대 1에 달해 2~3대1의 경쟁률에 그친 ‘두뇌한국’(BK) 사업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그도 그럴듯이 ‘인문한국’은 인문학 연구에 대한 최초의 정부 지원 사업이다. 지원규모, 기간 등에서 ‘두뇌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연구소에 10년동안 매년 5억~15억이라는 거금을 지원하니, 과제가 채택되기만 하면 연구교수와 연구원들이 시쳇말로 ‘먹고살 걱정’을 안해도 된다. 게다가 연구교수급은 ‘인문한국’사업이 끝나도 연구소 교수로 남아 학교로부터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다니 ‘꿩먹고 알먹기’다. 그러니 대학교수들이 여름방학도 반납한 채 합숙하고 밤을 새워가며 연구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지원 규모 이외에 ‘인문한국’은 연구 과제 공모에서도 BK와 다른 실험을 하고 있다. BK가 박사급 등 학문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인데 반해 ‘인문한국’은 연구소 등 인문학 연구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지원 성격이 강하다. 당연히 공모하는 연구과제도 학제간연구, 인간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주제 등으로 포괄적이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의 파장이 컸던 만큼 그 대가로 얻어낸 ‘인문 한국’ 프로젝트는 야심치고 희망적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의 말대로, 인문학의 물줄기를 바꿔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기치 않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연구가 외부의 지원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높은 보수에 편안한 연구실에서 수십년간 ‘연구’하고서도 변변한 학술서 한권 내지 못한 ‘학자’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 학문의 토대를 놓는 일이라면, 연구는 학자 개개인의 몫이다. ‘인문한국’의 지원이 연구소, 연구단 차원으로 이뤄진다 할지라도 연구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지적 활동이다. 학문은 ‘혼자 하는 놀이의 진수’이고 그 방법론은 ‘지적 도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 인문학자의 노력과 성취는 인문학 탐구가 어때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 한문학자인 그는 지난달 4권이나 되는 학술서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예전에도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했기에 그가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못된다.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그의 학문 방법론이다.

대학원 시절, 강교수는 조선 후기 중인문학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잡았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양반사대부 문학과 다른 중인문학의 특징을 찾아보자는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연구를 해 보니 중인문학과 양반문학은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한국 인문학 연구가 ‘민족’과 ‘근대’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근대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을 찾는 데 한국 인문학이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교수는 이후 우리의 눈으로 우리 것을 연구하는 대신,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살폈고 우리의 눈으로 타자를 봤다.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보고, 둘의 관계를 살폈다. 그로부터 얻어낸 결론이 ‘민족 국문학은 없다’는 점이다. 가장 민족적이라는 국문학·한문학에서조차 ‘민족’이라는 알맹이는 없었다는 그의 연구결과는 자못 논쟁적이다. 그러나 십수년간 중국과 한국의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며 얻어낸 결과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강교수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혼자 있었다. 그곳에서 한적을 뒤적이면서도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를 비롯한 4권의 저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남은 길은 여전히 멀다”고 적었다. 개인의 다짐이지만, 모든 인문학자들이 새겨야 할 금언이기도 하다.(조윤찬/ 문화1부장)

07. 09. 30.

P.S. 강명관 교수의 연구서들에 대한 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23938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얼마전부터 대학가에서 '학문 융합'이란 말이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는데, 이전의 '학제적 연구'보다 더욱 강조된 전공연계, 특히 인문학과 자연과학/공학의 만남을 지향하는 것이 '학문 융합'이 그리는 상인 듯하다('통섭'이란 용어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런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거꾸로 지금의 대학과 학문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겸사겸사 참고가 될 만한 기사들을 몇 개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7. 09. 27) '학문 융합' 어떻게 해야하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공학도, 첨단 유전공학을 파악하는 철학도는 시대의 요청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는 가시각(可視角) 30도의 일관된 자세로 한 학문을 파고 드는 방법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는 분명 한계를 안고 있다. 국내외 대학들이 미래의 키워드를 ‘학문 융합’으로 정하고 각종 연구소와 기구를 설립해 연계 전공이나 통합 과정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ㆍ시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화여대 최재천(53) 석좌교수와 서울대 정진홍(70) 명예교수가 최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정 교수의 개인 연구실에서 만나 왜 학문 융합이 필요한지, 학문간 벽을 넘어선 연구가 우리 학계에 뿌리내리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함께 고민해봤다.

환원주의에서 융합주의로
정진홍(이하 정)=지금까지 통용됐던 개념이나 인식을 추출하는 방법론이 새로운 시대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지심리학에서는 ‘뇌 세포의 어떤 부분이 상처를 입으면 종교적 감동이 사라질까’ ‘어떤 부분을 자극하면 종교적 감동이 만들어 질까’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학에서 말하는 ‘초월’이나 ‘신비’라는 개념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지요.

때문에 이제껏 이어져온 분과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 지금껏 사용했던 개념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학문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른 학문을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학문끼리 대화하면 새로운 인식 방법이나 개념을 만들 수 있고 또 현실적 요구에 응할 수 있습니다. 종교학과 생물학, 종교학과 뇌 과학이 다른 쪽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인식 지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최재천(이하 최)=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선생이 활동 했던 시기에는 한 학자가 여러 분야를 두루 다뤘고 자연스럽게 학문 융합이 됐습니다. 이후에는 서양 중심의 환원주의의 영향으로 학문은 분과로 쪼개져 발전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인류가 지닌 지식의 총량이 크게 늘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정약용 같은 학자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시대는 인류가 축적해 놓은 지식의 총량이 많지 않아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 2, 3개 분야를 완벽히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또 다른 차원의 융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문 융합은 새 공용어 창출 과정
최=지난해 말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에게서 ‘우물을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여럿이 함께 넓고 깊게 파야 물이 나오는 시대입니다. 혼자 파 봐야 겉만 긁적거리다 끝납니다. 다른 학문과의 공용어를 찾는 게 학문 융합이자 통섭(統攝)이지요. 많은 학자들은 ‘내 학문만 파면 되지’ 하는데 그래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나와 너의 학문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공통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개별 학문을 하는 학자들끼리 각자 사투리를 써서는 소통이 안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자존심을 ‘자존감’이라고 합니다만 철학에서는 안 쓰는 말입니다. 학문의 공용어를 만들어야 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학문적 리얼리티(진실)를 발견했다면 그 진실은 기존 학문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새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그 언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바로 학문 융합입니다.

이기적인 학문의 벽 뛰어 넘어야
최=국내 대학은 ‘학과’ 체계의 높은 벽에 막혀 있습니다. 만약 자연과학 전공 교수가 인문학 전공 학과에 새로운 연구를 해보자고 제안하면 혼만 나는 게 현실입니다. 학문 이기주의, 학과 이기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에 앞서 교수들에게 안정성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기존 틀을 완전히 뒤엎는다고 하면 학과 체계에 익숙한 교수들은 자신의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인문학, 자연과학 전공 교수들은 학과가 아닌 ‘예술과 과학’ 교수단에 속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내용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결정이 나면 학과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정=학문 융합을 잘못 이해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융합은 기존 학문이 잘못 됐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학문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그냥 두면 자칫 경화해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종교학의 경우 옛날 같으면 초월, 신비라는 개념에 묶여 있었죠. 그러나 정치, 경제로 외연이 넓어지면서 천당 가자는 말로는 매우 모자라게 되고, 결국 과학이라는 벽과 부닥치게 됩니다. 때문에 종교, 정치, 과학을 통틀어 함께 봐야 합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건도 종교, 정치, 과학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였죠. 정치학자의 말, 과학자의 말 등을 모두 귀담아 들으면서 문제가 서로 어떻게 만나는지 파악하고 또 사태 전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문ㆍ자연 아우르는 기초교육 절실
최=문, 이과를 갈라 놓은 중등 교육과정도 큰 문제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가르치는 게 없어요. 중고교에서는 모든 학문의 기본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여러 공부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신입생에게 기본기 가르치기도 버겁습니다. ‘수학(修學) 장애우’ 들이 대부분이에요. 문과 출신 학생들은 이과 수업을 못 알아듣고, 이과 학생들은 문과 수업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연계전공, 협동과정 같은 학문 융합을 시킨다 한들 뭐가 되겠습니까.

정=학문 융합이 가능해야 개별 학문도 훨씬 빨리 발전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방향과 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학문 융합의 시각에서 분과 학문을 바라볼 때 융합 자체가 살아납니다.

최=어느 미래학자의 말처럼 앞으론 평생 한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여러 차례 전직할 수밖에 없게 될겁니다. 40대 중반에 첫 직장을 그만 둔다면 한 가지 전공만 했을 경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학문 융합입니다. 미국 유명 대학은 학생들에게 전공에 관계없이 인문학, 자연과학 등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데 큰 비중을 둡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는 수학 능력을 갖추도록 합니다. 만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여러 직종을 옮겨도 잘 적응할 수 있겠죠. 반면 우리 대학들은 기본조차 안된 학생들에게 그나마 편협한 교육을 하고 있어요. 대학생들은 인문학적 소양과 자연과학의 기초를 확실히 닦고 대학 문을 나서야 합니다. 잡탕 학문만 잔뜩 가르치고 배워서 사회에 나온다면 10년은 버틸지 몰라도 그 이후는 어렵다고 봅니다.(정리 박상준기자)

국내 대학 '학문 융합' 현주소

국내 주요 대학 가운데 이화여대의 학문 융합을 위한 움직임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이화여대는 올해 초 ‘이화학술원’과 ‘스크랜튼 대학’을 창설했다. 이화여대를 설립한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1832~1929)의 이름을 딴 스크랜튼 대학은 하버드대의 기숙대학(Residential College) 개념을 도입했다. 기존 국제학부를 확대해 만든 2년제 과정으로, 올해 처음 30명의 학생들을 모집했다. 학생들은 인문ㆍ자연과학 등 기존 학과 체계를 뛰어 넘어 모든 분야에 걸쳐 자기 목표를 설정한다.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스스로 설계하고 공부하면서 국내외 석학으로부터 디지털 인문학, 문화연구, 생명과학기술 등 통합 과목을 배운다.

이화학술원은 국내외 석학이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공동 연구와 강연을 진행하는 연구 기관이다. 1호 국가과학자인 이서구 교수, 이어령 명예 석좌교수 등 국내 석학과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총재, 침팬지 연구가 제인 구달(영국) 박사 등 해외 석좌교수가 함께 연구와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는 내년 중 경기 수원시 인근 광교신도시의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에 ‘범학문통합연구소’를 개설할 예정이다. 연세대도 2010년 인천 송도신도시에 학문융합 관련 연구소를 열 계획이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학문 융합에 대한 교수 사회의 거부감이 심하기 때문에 저변을 넓힐 터전이 필요하다”며 “학문 융합을 전담할 교원을 배치하고 별도 예산을 편성해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박상준기자)

한국일보(07. 09. 17) "인문학 소양 갖춘 공대생은 왜 못키우나"

14일 오후 서울대 공대 연구동내 한 강의실. '공학 문제 해결과 창의적 사고' 제목의 세미나 수업이 한창이다. 교수는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도록 질문을 유도한다. 단순한 문제 풀이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10명 남짓한 1학년 수강생은 3조로 나눠 '소변기에 내리는 물을 어떻게 절약할 수 있는가' '교내 전단지 공해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등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묘수를 짜내야 한다. 재료공학과의 한 교수는 "공대생은 애매하고 답이 명확치 않은 문제에 약하다"며 "인문학적 소양과 창의적 사고를 갖췄을 때 비로소 완전한 공학도가 된다"고 강조했다.

● 대학에 부는 '융합' '통섭' 바람
요즘 대학의 화두는 '학문 간 융합'이다. 대학이 사회와 소통하려면 학문 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탓이다. 특히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이공계 분야에 융합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추세다. 최근 부임한 강태진 서울대 공대 학장은 이공계 위기론과 관련, "융합과 통섭의 시대를 맞아 리더십을 가진 이공계 지도자를 육성해 이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학문 융합은 대학 발전계획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화여대의 경우 지난해 9월 통섭원을 만들어 학문 간 벽을 허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통섭(統攝)이란 '서로 다른 것을 아우른다'는 개념이다. 대학에서는 이를 '학문 접목'을 통해 기존 학문 체계의 고립화를 극복한다는 뜻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가령 성형외과 의사가 미학을 연구하고, 제품 디자이너가 시(詩)의 은유를 배울 때 더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연세대는 신촌캠퍼스에 융복합프로그램을 개설하고 2010년 개교 예정인 송도캠퍼스에 관련 연구소를 만들 예정이다. 서울대 역시 3월 장기발전계획을 통해 융합분야에 참여하는 교수나 연구원의 교육 결과를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차후 세계적 수준의 융합분야 연구소를 설립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경기 수원 광교신도시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내에 범학문통합연구소를 내년에 문을 열어 인문 자연과학 예술이 함께 어우러진 중심 기구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도 들어 있다.

● 학생들 "부담 크고 필요성 덜 느껴"
대학들은 저마다 연계전공제(학부)와 대학원 협동과정(석ㆍ박사)제도를 통해 학문 융합을 시도하고 있지만 갈 길은 한참 멀다. 학부생들은 단순히 '취업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다' '부담만 된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연계전공을 외면하고 있다. 연세대는 2000년 1학기 8개 전공을 도입하며 이 제도를 시작했지만 올해 1학기 이수 학생은 143명에 불과하다. 송예슬(21ㆍ연세대 문헌정보학과)씨는 "연계전공 이수학점이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복수전공을 하면 본 전공과 제2전공이 각각 36학점씩인데 연계전공을 하게 되면 본 전공 57학점을 다 채워야 하니 같은 조건이라면 연계전공보다는 복수전공을 한다는 뜻이다.

연계전공에 대한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인식도 매우 낮은 편이다. 본보가 대졸 취업준비생들이 비교적 선호하는 11개 기업(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커뮤니케이션즈 한국IBM LG패션 넥슨 한국전력 한국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 NC소프트) 인사팀에 문의한 결과 관련자 모두 용어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아예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산점을 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대학원 협동과정은 학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과정엔 하나의 학문적 테마를 놓고 겉으로는 이질적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교수들이 참여하는 게 보통이다. 예를 들면 의료법ㆍ윤리학 협동과정(연세대)의 경우 법학 의학 철학 보건학 이학 전공 교수들이 함께 참가하는 식이다. 그러나 학부와는 달리, 이와 같은 협동과정 자체엔 전임교수가 없어 지속적이고 책임있는 연구·교육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 전임교수 확보 시급
융합학문 분야에서 오랫동안 몸 담아 온 학자들은 '학문 간 벽 허물기'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선 학문 간 융합의 필요성에 대한 학계 전반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취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생들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안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고려대 비교문학ㆍ비교문화 협동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정우봉 국문과 교수는 "우리 학계는 아직 학문 간 경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경계(警戒)를 하고 있다"며 학과 중심의 강한 연구풍토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전임 교수 확보도 시급하다. 단순히 구색갖추기 식으로 '이 학과에서 이 교수 빼오고, 저 학과에서 저 교수 빼오는' 식으로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학문 발전이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의 전공주임을 맡고 있는 홍성욱(생명과학부) 교수는 "학과가 소속 교수의 협동과정 겸임교수 활동을 얼마나 인정해주고, 밀어주냐에 따라 겸임교수 섭외가 쉬워지기도 하고 어려워지기도 한다"고 말했다.(박원기기자)

주요 대학들의 학문융합 추진 현황
▦고려대= 2004년 교과과정 개편 통해 연계전공 실시. 학부생 이중전공 의무화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융복합 프로그램 개설. 송도캠퍼스(2010년 개교 예정) 융복합 관련 연구소 개설 예정
▦이화여대= 5월 학문융합 전담 스크랜튼 대학 설립(문화연구, 디지털인문학, 사회과학심화, 생명과 과학기술 4개 분야). 지난해 9월 통섭원 개설. 파주 새 캠퍼스 화두를 '학문융합' 으로 결정
▦서울대= 2008년 경기 수원 광교신도시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내 범학문통합연구소 개설.
(장기발전계획) 학문융합분야 참여 교수나 연구원 인사 고과 반영, 세계적 수준의 융합분야 연구소 설립 추진

고대신문(07. 09. 16) 학문융합 모양만 있고 '내실'이 없다

본교 대학원 응용언어문화학협동과정 선정규(인문대 중국학부) 주임교수는 학문융합에 대해 "르네상스 이후에 세분화된 학문의 분류로 생긴 틈새를 보완하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본교도 학문융합 추세에 동참하고 있다. 지난 2004년 본교는 학부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연계전공을 실시했으며, 학생설계전공 시행을 준비중이다.

연계전공은 두 개 이상의 전공이 모여 새로운 전공을 만들어낸 것이다. 수학과와 정보보호대학원이 융합한 ‘암호학 연계전공’이 그 사례다. 한편, 학생설계전공은 학생이 개별적으로 원하는 전공분야가 있는 경우 학과에 상관없이 스스로 커리큘럼을 계획해 이를 이수하는 제도다. 학교 측은 지난 2006년부터 학생설계전공을 시행하려 했지만 현재 보류 중이다.

학부에 비해 심도 있는 학문계발이 이뤄지는 대학원은 한 발 먼저 학문융합의 추세에 합류했다. 본교 대학원은 지난 1996년부터 학과 간의 벽을 허물고 두 개 이상의 전공이 모여 ‘학과 간 협동과정(이하 협동과정)’을 시행하고 있다. 금융공학협동과정의 경우 △경영학과 △수학과 △경제학과 △통계학과 △산업시스템정보공학과가 통합된 것이다. 하지만 학부의 연계전공 및 대학원의 협동과정에 학생들의 관심이 적어 제대로 운영되는 학과가 많지 않다.

▲학생들의 관심 부족으로 운영 ‘삐걱’
지난 2006년 2학기 04, 05학번 학부 재적생 8038명 중 연계전공을 이수한 학생은 안암 · 서창 캠퍼스를 합쳐도 272명 뿐이다. 특정 학과에 학생들이 몰리는 것도 문제. 2007년 1학기 연계전공 지원 · 합격 현황을 보면 전체 지원자 211명 가운데 166명이 합격해 79%의 합격률을 보였다. 하지만 △환경디자인학(5명) △산업디자인공학(6명) △사회복지학(14명) 등 대부분의 학과는 지원자 전원이 합격했다. 이번 학기 신설된 나노바이오정보기술학전공의 경우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지난 2005년 2학기 개설된 환경생물자원공학의 경우 지난 학기까지 지원자가 없어 폐지됐다. 대학원 역시 2007년 2학기 현재 석사, 박사 및 석 · 박사통합과정 재학생 5035명 중 협동과정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은 273명뿐이다.

▲다양성 부족한 전공수업
연계전공과 협동과정의 전공과목 수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본지는 협동과정 대학원생 30명을 대상으로 만족도 및 개선사항 조사를 실시했다. 학생들은 ‘다양한 전공 간의 교류를 통해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들며 본교 협동과정의 만족도에 보통 이상의 점수를 매겼다. 하지만 '개설과목이 적어 선택의 폭이 좁다'는 점을 지적한 학생들이 다수 있었다.

실제로 이번 학기 16개 협동과정의 개설 전공과목 수를 살펴보면 △마이크로/나노시스템 △통신시스템기술 △메카트로닉스 협동과정은 한 과목 뿐 이었고 기전융합신기술협동과정은 개설과목이 없었다. 이는 협동과정을 전공하는 학생 수가 적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의 경우 학생 수 3명이 폐강 기준인데 이번 학기 기전융합신기술협동과정의 재적생은 3명이다.

학부 역시 14개의 연계전공 중 7개 전공만 해당 전공만을 위한 과목이 개설됐다. 이마저도 한 과목씩 뿐이다. 연계전공을 이수하는 학생들은 단순히 연계된 단일전공들의 과목을 들어야 한다. 패션디자인 및 머천다이징을 전공하는 한 학생은 “각 학과의 전공과목들이 모였을 뿐 학문융합됐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식품과학 △생명공학 △의과대가 모인 식품생의학안전학 김경헌(생명대 식품공학부)주임교수는 “만들어 놓은 과목이 있지만 운용이 잘 안된다”며 “교수들이 해당 전공을 맡기도 바쁘다 보니 과목 개발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설문조사에 응한 30명의 협동과정 대학원생 중 11명의 학생들이 ‘전임교수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꼽았다. 여러 전공의 교수들이 있지만 협동과정만을 담당할 전임교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체계가 덜 잡혀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금융공학협동과정을 전공하는 한 대학원생은 “협동과정을 '학과'로 전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응용언어문화학협동과정의 한 학생은 “독자적인 건물이나 연구실도 없고 협동과정의 이름도 계속 바뀌니 붕 뜬 기분이다”라고 협동과정의 모호함을 표현했다.

과학기술학협동과정 과학관리학전공의 한 학생은 “기존의 단일 학과만으론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양한 학문간의 배움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했지만 “좋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학과간 협동과정에 대한 학교의 지원이 부족해 여러 도약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행초기인 협동과정의 시스템은 오랜시간 독자적으로 성장해온 단일전공에 비해 아직 갈 길이 멀다.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의 정우봉(문과대 국어국문학과)교수는 "학문융합이 필요한 시기이며 추세지만 일시적인 유행이 돼선 곤란하다"고 경고한다. 이어 정 교수는 “발전적인 학문융합을 위해선 각각의 독자적인 학문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아직까지 한국 학계는 학문간 경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재학협동과정의 이홍종(인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역시 “모든 사회조직이 결국 총체적이고 유기적이 듯 학문도 이제는 독자적인 연구를 벗어나 이를 융합해야할 시점”이라며 “하지만 아직까지 학과 중심체제가 강하다”고 말했다.

점점 무너지는 학문의 경계에서 간학문적 접근의 필요성은 가속화되고 있다. 낯선 것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고 보다 열린 태도가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학교와 정부 또한 적극적인 자세로 학문융합에 접근해야 한다.(김효원기자)

07. 09. 27.

P.S. 연세춘추의 관련기사는 http://chunchu.yonsei.ac.kr/news/read.php?idxno=10246&rsec=S1N2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우리시대의 명저50'에서 조혜정(조한혜정) 교수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 꼭지를 옮겨놓는다. 아주 오래전에 들춰봤던 듯한데 그다지 강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나로선 저자의 최근의 인터뷰나 기고기사에 더 눈길이 간다. 남녀간의 성차보다는 계급차나 세대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탓이겠다. 그럼에도 사회과학서가 거의 20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명저50' 가운데 '현역'으로 남아있는 책들이 몇 권이나 되는지 의심스럽기에 더욱 그렇다). 관련기사와 인터뷰, 그리고 최근 기고기사를 함께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7. 09. 20) 억압과 착취 구조의 뒤틀린 유산을 일갈하다

가부장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가장 교묘하게 인간성을 억압해온 제도이며, 여성 억압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와 맥락을 같이 한다.” 조혜정 교수가 1988년 발표한 <한국의 여성과 남성>(문학과지성사 발행)이 당시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컸다. 6ㆍ29선언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세계화가 화두로 떠올랐지만 가부장제를 가족관계의 본질로 여기는 통념은 여전히 유효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가부장제는 가족관계의 본질이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의 권력 확장을 위해 고안된 역사적 구성물이며 이를 통한 여성의 억압은 곧 남성도 ‘남성다움’의 굴레에 갇히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모성(母性)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가히 선동적이었다.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가부장제나 모성의 신화, 억압과 착취에 기반한 남녀관계의 기원 등을 역사적인 맥락 아래 검증한 최초의 저작”이라며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성을 잃지 않는 저자의 혜안과 선 굵은 문제의식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책이지만 편협한 여성주의에 머물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는 한국의 남성과 여성이 이뤄온 생활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여성해방 이론가이자 운동가로서 구상하고 실천해온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분석적 토대를 이 책에 담고 있다. 저자가 처음 시선을 둔 것은 ‘여성 차별과 비하의 근원인 가부장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를 지배하게 됐나’ 하는 문제다.

조선 초기에는 재산 분배나 제사 상속도 받을 만큼 비교적 평등한 지위를 누렸던 여성들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계 순수혈통의 원리가 절대화되면서 ‘2등 백성’으로 전락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왕권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양반관료층들이 유교 이념을 교조화하면서 남존여비 이데올로기를 심화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가부장적 지배는 빈곤과 혼란기를 거치면서 불변적 남성우월주의로 고착됐고, 발전 이데올로기가 주도한 근대 공업화 시대와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거치며 ‘국가와 일터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남성의 공적 영역과 그를 위한 ‘휴식처’로 전락한 가정의 관장자로서 여성의 사적 영역을 명확히 가르는 데 이용된다. 공ㆍ사의 명확한 구분과 고정된 성 역할 관념은 제도의 차원이 아닌 일상의 문화로 강력한 의미를 지닌 채 존속된다. 가부장제 아래 여성들은 인격이 아닌 어머니로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체제의 협력자가 되면서 스스로의 역할과 공간을 제한했다. 이른바 ‘도구적 모성’의 탄생이다.

저자는 부부 역시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파악한다. 특히 경제적 능력 여부에 따라 지배와 복종이 정확히 갈리고, 경제력이 없는 여성들은 자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대리만족하면서 가족 내 존재감을 획득한다. 저자는 “가정에서 소외된 남편, 과도한 교육열 등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에 안주하는 여성들의 계산된 헌신의 산물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면서 “부부관계가 애정과 신뢰를 잃을 경우 자녀의 도구화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고 경고한다.

가정에 안주하지 않은 여성들은 그럼 행복할까. 저자는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면 현대에 들어서서는 배제의 정도가 줄어든 대신 보이지 않는 통제는 더욱 체계화되어 여성의 삶은 더욱 교묘하게 왜곡되고 있다”고 갈파한다. 소위 ‘성공적인’ 전문직 취업여성일지라도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의 이방인으로 전문직의 역할 수행 이외에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수행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된다. 결혼을 했을 경우는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늘 ‘약간씩 모자란 느낌’을 갖고 자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저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고도의 산업화가 진행중인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해진다”며 “특히 결혼과 자녀 출산 시기 및 자녀의 수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무리함이 없도록 조정하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를 낳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정상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씌어진 지 30년이 됐지만 불평등한 남녀관계가 잉태하는 가족해체, 저출산, 고령화사회 등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정확히 꼬집어내고 있다.

저자는 여성과 남성이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간의 유대를 강화할 것,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사랑 존경 즐거움 성취 권력에의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 대할 것, 남성은 가부장적 부권을 포기하고 가족구성원으로서 소통과 보살핌의 노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한다. 가족간의 소통과 감정교환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학계의 성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책은 인문ㆍ사회과학 전문서로는 드물게 현재까지 14쇄를 찍었고, 2002년에는 일본 법정대 출판부가 <한국사회와 젠더 연구>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하기도 했다.(이성희기자)

"신정아 사건은 일터에서의 남녀관계가 동료라기보다는 여전히 연애의 대상으로 환원되고, 성취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 조직문화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거죠."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조혜정 교수는 "<한국의 여성과 남성>을 쓸 때만 해도 남녀 모두 행복한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는 국내 사회학이 꽃핀 시기였고, 여성해방주의자들 사이에서 남녀가 모두 주인공인 일상의 문화를 새롭게 짜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했어요. 83년에 여성학자 조형, 조옥라, 고(故) 고정희 시인 등과 함께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하나의 문화'를 결성하면서 이들과 토론하고 싸우며 얻은 성찰들이 책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조 교수는 그러나 "지금은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고 말했다. 여성운동이 성숙하면 남녀평등사회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알파걸, 킹콩걸, 골드미스 등 여성파워를 상징하는 용어들은 쏟아지되 남녀간의 적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여성은 '피해 볼 일은 절대 안 하겠다'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남성은 기득권을 빼앗긴 박탈감에 시달리면서 '사이버 마초' 같은 감정적 대응을 일삼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사회구조에 있는데 서로 감정싸움만 되풀이해요. 남녀 문제만 나오면 너무나 단세포적인 반응을 쏟아내는 사회가 된 것이죠."

조 교수는 '누구도 승자가 되기 어려운' 초경쟁 시장경제와 그로 인한 인간의 개체화를 이렇게 분열된 사회의 주범으로 꼽는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체적인 각성을 바탕으로 대안문화나 대안학교 운동 등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IMF사태 이후 개별적 생존경쟁에 내몰리면서 지금은 오로지 일류대학을 목표로 한 무한질주에 동승한다. 동료든 친구든 가족이든, 기본적으로 경쟁자일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24시간 그야말로 '빡센' 노동에 시달립니다. 잡지 않으면 잡히는 사냥꾼의 시대에 들어선 거죠. 이렇게 경제논리가 압도하는, 극도로 도구화ㆍ개체화한 사회에서 자란 세대는 과연 행복할까요?" 조 교수는 시장경제체제의 제도는 숨가쁘게 변화하지만, 의식의 변화는 여전히 지체상태라면서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한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가깝게는 호주제 폐지 이후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의 공유가 필요합니다. 호주제 폐지 이후 가족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지, 누구랑 살지 하는 문제 말이죠. 그리고 양극화사회에서의 육아의 사회화 만큼이나, 군 복무도 사회적 책임을 함께 지는 차원에서 여성이 공유하는 문제 등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해요. 소통과 상호 돌봄을 통해 남녀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만이 지속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지요."

 

경향신문(07. 08. 29) IMF 목격한 불행한 청년들 ‘88만원 세대’ 우리가 껴안자

“부유한 50대여, 파이팅!”이라는 주간지 표지 글이 눈길을 끈다. 내용은 청년기에 통기타와 청바지, 팝송을 들으며 성장한 50대가 이제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고 패션을 주도하는 신소비군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제목을 본 청년이 “다 가지셨으니 어련히 잘 하겠수~”라고 툭 한마디를 던진다. 그의 말대로 지금 50대는 많은 돈과 시간과 건강을 가진 세대이다. 반면 그 자녀 세대는 시간에 쫓기고 늘 불안하다. 안정된 직장을 얻기 힘들고 직장이 있더라도 독립할 집을 마련하기 어렵다. 어릴 적에 갖게 된 소비수준을 유지하려면 부모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고, 이런 경제적 의존성은 젊은이들을 나약한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최근 한 경제학자와 신문기자는 현 시대의 20대들은 월 88만원으로 일상을 꾸려가야 하는 세대라면서 그들의 곤궁한 삶에 대한 논의의 불을 지폈다. ‘너희는 고생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이들 ‘88만원 세대’는 어린 나이에 IMF 금융위기 급보를 접하고 일찍이 암울한 미래가 온다는 것을 감지한 ‘불안 세대’다.

이들은 1990년대에 대중문화와 인터넷의 주역으로 잠시 부상하였지만, 그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서 가장 배려받지 못한 계층이었다. “너희는 왜 패기가 없느냐?”라는 핀잔을 듣지만 불안정한 고용상황과 끊이지 않는 재난과 소통불능 상황에서 패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연봉 억대를 버는 변호사나 대기업 사원들은 행복한가? 타고난 낙관주의자거나 그 세대에는 드물게 헝그리 정신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 ‘잘나가는’ 청년들 역시 위장장애와 조울증으로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좋은 미래가 올 거라는 믿음이 가지 않는 시대에, 생각할 틈도 없이 일해야 하는 자신이 마치 ‘소모성 건전지’ 같다는 것이다.

‘잘 팔리는’ 인재건, 하루 종일 방안에서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면식수행’하면서 지내는 백수건, 공무원 시험 자료집과 법전암송 오디오북, 다이어트 비디오를 공짜로 다운로드해 보면서 취업준비를 하는 반백수건, ‘88만원 세대’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들에게 미래라는 단어는 거북스럽다. 청년들은 부모나 어른 세대의 말을 들어야 돈이 나오는 세상에서 그들의 말에 순종하거나 숨어드는 생활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긴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적응력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콕 생활’은 불화와 불균형이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며, 애초부터 위장장애와 공황장애를 앓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방치할 때 국가는 거대한 ‘기생 국민’을 떠안는 부담을 안게 된다.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들 ‘청년존재’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하면서, “20대를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에서는 클린턴 정권 때 노동정책을 담당했던 로버트 라이시 장관이 청년기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는 ‘고용 없는 성장’ 정책을 고수할 경우에 초래될 사회적 파탄에 대해 경고하면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모든 젊은이가 18세가 될 때 일정한 금융자본금을 주어서 계속 공부를 하건, 벤처를 시작하건,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건, 증권이나 채권을 사건 각자의 생각대로 재투자를 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국가의 미래를 청년들과 함께 만들어가자는 초대장인 셈이다.

‘경제 대통령’ 논의가 분분해지고 있다. 개발 독재시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자는 주장은 지루하고 경제성장을 해놓고 보자는 논의는 무지하다. 전문가들은 돌봄과 창의적인 노동이 후기 근대 경제의 핵심 노동이라고 말한다.

그간 한국의 많은 청년들은 인디와 언더 문화, 인터넷과 대안교육 영역에서 기존 경제학에서는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는 돌봄과 소통과 나눔이 가능한 창의적인 노동을 하면서 사회 이곳저곳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려왔다. 대통령은 바로 이들의 ‘비물질 노동’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이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바뀐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 젊은이들이 더 깊은 늪에 빠져들기 전에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하면 좋겠다.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건, 선후배간 자원을 공유하며 대학 동아리를 부활시키건, 동네에 카페를 차리건, 바리케이드를 치건 조상이 물려준 물적, 비물적 공공재를 챙겨내기 위해 이제 슬슬 방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불안은, 정말이지, 영혼을 잠식한다.(조한혜정/ 연세대교수· 문화인류학)

07. 09. 26.

P.S. 기사를 읽으면 혼자 음미하고 말 일이지 이렇게 옮겨오는 것도 '습관'이다. 끽연자들이 하루 한 개비씩 담배를 줄이는 것처럼 앞으론 줄여나가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09-26 22:23   좋아요 0 | URL
^^ 기사를 소개해주시면 쉽게 접할 수 없는 좋은 글을 볼 수 있어 좋아요. 한국일보는 제가 구독하고 있어 거의 보는 편이지만.

로쟈 2007-09-26 23:49   좋아요 0 | URL
저로선 기회비용의 문제라서요.^^;

심술 2007-09-27 19:25   좋아요 0 | URL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로쟈 2007-09-27 22:38   좋아요 0 | URL
제가 푸념한 셈이 됐나요?^^;